스피아톤의 화면 너머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거구의 경찰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년은 심문 당하는 중이다. 거칠게 날아오는 손바닥이 얼굴을 강타하는 동시에 질문이 날아온다. “이름?”곧바로 교차된 화면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돈 다발이 떨어지는 욕조의 풍경이 낯설게 삽입된 후, 선명한 조명 아래 제 자리를 잡은 컬러톤의 화면 너머로 퀴즈쇼 사회자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년의 표정은 역시나 상기돼 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자말 말리끄(데브 파텔)가 2천만 루피(20 million rupees) 상금을 얻기 위해선 (퀴즈쇼에서) 단 한 문제만 통과하면 된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통과)했을까?” 4지 선다형의 질문. 그리고 상황은 다시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경찰의 구타와 퀴즈쇼의 긴장이 연속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동일한 질문이 서로 다른 상황을 관통하다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그 와중에 어떤 상념이 다시 끼어든다.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이 점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하나의 정답을 맞추면 상급 단계로 넘어가는 퀴즈쇼처럼 자말은 인생을 돌고 넘으며 높게 자리잡은 염원을 향해 나아간다. 비극적 테두리에서 시작되는 자말의 거칠고 험난한 인생사는 물음표를 통해 소환되고 정답처럼 나열된다. 폭력이 지배하는 원초적 기운의 사회에서 착취와 유기에 내몰린 자말은 잇따른 상실을 건너며 상흔을 품고 성장해 나아간다. 자말을 성장시킨 수많은 정답들은 그가 염원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건 그저 순리적인 과정들에 불과하다. 모든 우연은 필연을 이루고 끝내 운명으로 명명된다. 모든 지나간 시간은 운명이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이하, <슬럼독>)는 삶을 가로막고 선 수많은 물음표 사이로 전진해나가는 자말의 인생을 통해 풀어나가는 퀴즈쇼다. 물음이 던져지면 과거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 놓인 정답이 드러난다. 현재의 물음을 통해 소환되는 과거는 관객에게 일종의 퍼즐과 같다. 관객은 퀴즈쇼를 통해 자말의 서사를 조립하고 그 운명의 조각들을 수집해나간다.
<슬럼독>은 분명 운명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는 운명에 순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운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운명을 이야기한다. 배반과 상실의 경험을 덧칠해나가던 자말의 인생은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매번 역류를 시도한다. 수많은 물음표가 향하는 정답을 수집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리를 뒤따르는 방식이 아니다. 단지 그 정답이 드러난 후에야 뒤돌아 확인하게 되는 지난 과정들이 마치 이미 준비된 운명처럼 인식될 뿐이다. 퀴즈쇼는 자말의 운명을 되짚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점차 고단위의 문제들이 출제될수록 자말은 평정심을 찾아간다. 경험의 반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에 스스로 익숙해져 간다. 문제의 간극을 파고드는 과거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필연의 방식으로 현재를 재구성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마다 익숙한 경험의 실마리를 통해 발견된 정답 역시 지나갈 운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말은 자신의 염원으로부터 주춤하거나 때때로 물러서야 하는 지난 운명들을 배반하듯 이내 전진한다.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라는 물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치 않다. 그저 라띠카(프리다 핀토)를 만나는 것이 그가 염원하는 유일한 운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염원을 운명으로 개척하기 위해 자말은 답을 고른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그 지난한 여정은 <슬럼독>의 피날레를 완성하기 위한 도움닫기와 같다. <슬럼독>은 인도라는 특별한 국적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다. 운명을 뒤쫓아 달리는 자말의 서사는 사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절반 정도는 되감기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기 위해 마련된 것과 다름없다. 퀴즈쇼와 심문의 빠른 교차를 통해 출발하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오가며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돌입하기 위해 기지개를 편다. 이미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둔 자말의 현재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사실상 이미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놓인 운명들을 관객들이 복기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운명에 대한 설득력을 마련하는 셈이다. 결국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위해 복무하는 운명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에게 오늘의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경험의 예시이자 뒤따를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운명을 이룬다.
각색을 맡은 사이몬 뷰포이는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가 집필한 ‘Q&A’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슬럼독>을 완성했다. 대니 보일은 이에 완전한 이미지를 덧씌워 스크린에 투영해냈다. <트레인스포팅>만큼이나 혈기왕성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스토리는 거칠고 성기지만 유쾌하고 끝내 낙관적이다. <슬럼독>은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완성된 발리우드 감성의 영화다. 원시성이 잔존한 인도의 부조리한 현대적 풍경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지만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최대한 배제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필터링되지 않은 온전한 이국의 풍경은 생경함을 뛰어넘어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한 이미지로 연출됐다. <슬럼독>은 이국적 세계의 관습과 양식을 충실히 보존하는 겸손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현지의 양식에 입각한 방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 특성을 습득하고자 하는 열의를 느끼게 한다. 지정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할리우드의 글로벌 전략은 분명 주목할만한 태도다. 올해 아카데미가 <슬럼독>을 지원 사격한 것 역시 그런 흐름 자체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큰 존중을 얻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년은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달려 결국 운명을 따라잡는다. 그 운명 속엔 자말을 무너뜨리기 좋은 비극적 기제들이 넘실거리지만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염원을 쫓아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자말의 약속은 좌절을 건너 거대한 기적을 이룬다. 그 염원은 개인을 넘어 온 국민들의 염원으로 발전하고 이내 기적처럼 완성된다. <슬럼독>은 우연이 한데 모여 필연을 이루는 과정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 끝에 이뤄지는 결말은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으로 완성된 운명이다. 그 모든 건 애초에 운명이다. 그 운명을 납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모든 뒤쳐진 순간들은 이미 운명이 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분명 어떤 선택을 통해서 결정된다. <슬럼독>은 그 운명적 선택을 설득하는 흥미로운 사연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통해 <슬럼독>을 본다면 그 역시도 운명이다. 물론 그 운명 역시 어떤 선택을 통해 이뤄진 것이겠지만.
좋은 집과 좋은 직장, 평온한 삶과 순탄한 일상. 누구라도 행복하다고 믿을만한 인생. 하지만 그 인생의 주인공은 그 삶이 실로 괴롭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사는 헐리 부부의 삶이 그렇다. 이웃에겐 동경의 대상이지만 실상 그네들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에 닳고 닳아 낡은 벽지처럼 빛 바래간다. 삭막한 현재와 달콤한 과거를 대비시킨 프롤로그는 무너져버린 삶의 근원이 자리한 좌표를 예감하게 한다. 파리에서의 삶을 꿈꾸던 달콤한 연인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권태로운 부부가 되어 살아간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이하, <레볼루셔너리>)는 안온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깊은 권태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실이라는 거짓말이다.
너나 같이 비슷한 양복과 타이를 매고 먼 거리의 시내까지 기차로 출근하는 샐러리맨의 틈바구니에 낀 프랭크 윌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 앞으로 쓰레기통을 끌고 나오다 비슷한 너비로 줄 지어 선 쓰레기통이 집 앞마다 늘어선 적막한 거리를 지켜보는 에이프릴 윌러(케이트 윈슬렛)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젊은 부부다. 하지만 실상 윌러 부부의 삶은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점화되어 폭발 직전에서 다다르듯 위태롭다. 끔찍한 삶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에이프릴은 점점 예민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프랭크 역시 지쳐간다. 질식 당할 것 같은 권태에 짓눌리던 윌러 부부의 삶을 반전시키는 건 오래된 언약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날아가는 것. 해묵은 약속을 현실로 소환하려는 에이프릴의 권유는 프랭크의 승낙으로 이어지고 이는 고요한 수면처럼 평온한 삶 속에서 위태롭게 침잠되던 부부의 삶을 끌어올려 숨을 불어넣는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을 통해 시대를 지배하던 지독한 권태를 풍자한 리처드 예이츠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레볼루셔너리>는 텍스트의 행간에 놓인 여백까지 여운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듯 세심하고 첨예하다. 사랑하는 연인에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 모든 순조로운 과정이 실상 스스로를 얽매는 거대한 속박이 되었음을 깨닫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뒤늦게나마 자신들이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 부부의 삶은 부풀어오르지만 이내 다시 예민하게 서로를 찌르고 결국 터져나간다. 굴레를 맴돌듯 정해지듯 뻔한 일상을 돌고 도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헤매던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를 천천히 침식해나간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차분하고 예민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면서도 차갑게 냉소하지 않는다.
가능한 변화들을 역설하지만 실상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자들의 불행을 조소하지 않는다. <레볼루셔너리>는 시대의 기운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도 개개인의 특별한 속내에도 세심하게 귀를 연다.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에 가득한 건조한 향취를 외면한 채 행복한 척 살아가는 이들의 연기적 삶을 쓸쓸하게 비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행한 삶의 내면을 바라보는 건 정신병자로 낙인 찍힌 존(마이클 쉐넌)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나 파리로 가겠다는 윌러 부부의 고백에 수긍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다. 정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윌러 부부의 이웃과 프랭크의 직장 동료들은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비웃는다. 실상 그 정상인들은 현실에 담보 잡힌 삶 속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아내길 포기하듯 살아가고 있다. 매 순간마다 감지되는 불행의 신호들로부터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들고 자신의 현실에 합리를 덧씌워 불행으로부터 매일같이 도피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 합리의 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던 에이프릴과 이를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하던 프랭크는 현실을 등지려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현실로 다시 침전한다. 천천히 기울다가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해버린 타이타닉처럼 삶이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타이타닉> 이후로 11년만에 호흡을 맞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고요한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의 흐름을 따라잡듯 섬세한 케이트 윈슬렛은 밑바닥에서 천정까지 차오르는 감정의 영역폭을 깊고 높게 끌어올린다. 이를 보좌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액션 또한 훌륭하다. 안단테(andante)처럼 흐르는 <레볼루셔너리>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크레센도(crescendo)와 같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악센트(accent)와 같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전체적인 흐름을 좌우할만한 감정의 바다를 이룬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감정의 바다에 격랑을 제공하는 암초와 같다. 두 배우의 조합은 꽤나 이상적인 결과를 낫는다. 정신질환자 존을 연기하는 마이클 쉐넌 역시 비중에 비해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선사한다.
<레볼루셔너리>의 결말은 단연 비극이다. 그리고 그 파국을 면전에 둔 객석으로 모종의 질문이 던져진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삶이 권태롭다 하여 세상을 등지긴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불행의 근본을 마주서야 한다. 거기서 우린 선택한다. 삶을 등지고 전진하느냐, 삶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느냐.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건 삶이 아니다. 살고 있는가, 살아있는가. 전자와 후자는 불과 한 음절의 차이를 두고 있을 뿐이지만 결국 차원이 다른 언어로 읽힌다. <레볼루셔너리>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자신을 위한 자리인가? 비현실적인 꿈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은 행복을 선사하는가? 이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란 그런 것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에 두려운 영화다. 만약 당신이, 혹은 어느 누군가가 이 질문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충동 역시 느낄 것이다. 성공의 척도에서 인생을 볼모로 제공한 채 생을 부지하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면 그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평온한 거짓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사려 깊은 도발이다.
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
아이가 태어났다. 축복을 공유해야 할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통하다. 산모가 죽었다. 그 때문인가. 다들 아이를 경계한다. 아이의 얼굴을 본 아버지의 얼굴은 경악을 품더니 그 아이를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버려진다. 팔순 노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얼굴과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노쇠한 육체는 막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요양원에서 거두어진 아이는 운명처럼 노인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알려진 스콧 F.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모티브의 뼈대로 삼아 풍만한 살을 붙여나간다. 제목은 영화를 탁월하게 함축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특별한 일대기를 회상과 재현의 방식으로 전진시키는 160분의 서사는 저 제목으로 완전히 압축된다. 서사적인 흐름에 역류하는 인물의 성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주변에 선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는 원작과 궤가 다르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설정이 원작으로부터 이탈된다. 인물을 둘러싼 변화를 덩어리진 서사의 경계적 진행에 담아 묘사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사실적인 연대를 서사로 삼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배경을 사건에 결부시켜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연관시켜 작동한다. 1860년대에 시작되는 원작과 달리 <벤자민>이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에 시작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맥락도 마련됐다. 어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특별한 사연을 가공해 삽입한다. <벤자민>은 기이한 생을 짊어지고 가는 남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저 노인에서 유아로 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삶을 다룬 원작과 달리 <벤자민>은 그 기이한 삶 속에서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는 로맨스의 추억을 드리운다. <벤자민>은 실로 미스터리 하나 로맨틱한 영화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로맨스는 은밀하게, 때론 강렬하게 지속된다. 이는 평생의 러브스토리이자 운명적인 로맨스다. 물론 긴 러브스토리는 많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인생이 이 러브스토리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매우 절실한 감성을 보완한다. 특별한 소재와 서사의 뼈대가 온전한 원작을 통해 수려한 모티브를 발생시켰다. 각색을 맡은 에릭 로스는 흥미로운 사건을 위대한 러브스토리로 펼쳐냈다.
현실적인 연대는 <벤자민>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벤자민>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특히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진 유화 같은 색감을 지닌 <벤자민>의 풍경은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에 걸맞은 삽화로서 기능한다. 마치 실재 같지만 환상이며, 거짓 같지만 진실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씩씩하고, 그 운명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아련하되 투명한 여운으로 지속된다.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듬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고 진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디악>을 통해 중후한 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데이빗 핀쳐는 <벤자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생이 끝나도 그 생이 남긴 사연은 회자되기 마련이다. <벤자민>은 특이한 삶보다도 특별한 감동이 서려있어 아름다운 수작이다. 160여분의 대장정 끝에 얻어진 감정은 실로 투명하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도 마지막까지 사랑은 흐른다.
인간을 습격하는 대신 동물을 사냥한다. 태양빛을 받으면 피부가 보석처럼 빛난다.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독심술, 예지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공존한다. 창백한 얼굴에 되려 기품이 서렸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반인류적인 존재로 묘사되던 기성 뱀파이어와 다르다. 생존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관점 자체가 판이하다. 새로운 종족이다. <트와일라잇>은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습성을 무시한다.
단순히 말하자면 <트와일라잇>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공산품이 아니다. 특정한 대상을 타깃으로 한 맞춤식 기능성 제품과 같다.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장르물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뿌리가 되는 기성 뱀파이어와 다른 개체다. 전통적인 특성과의 접점이 좁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은 뱀파이어의 모티브를 빌린 어떤 은유적 대상에 가깝다. 비약하자면 귀여니 소설의 일진과도 비슷한 존재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서 소녀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특별한 개체들이다. 그것이 종족의 구분으로 진전됐을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할리퀸 로맨스나 다름없는, 그럼으로 전세계 소녀팬들의 열광을 한몸에 얻은 원작소설의 인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뱀파이어 영화라기 보단 틴에이저 무비라 명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은 실질적으로 플라토닉한 로맨스를 이룬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혈액을 탐닉하는 뱀파이어의 전통적인 습성을 간단히 배제해버린 <트와일라잇>에서 두 존재의 차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거리감의 기능성에서 이뤄질 수 없는 감정적 거리로 치환된다.
존재의 차이로 인해 조숙한 성애는 거세되고 로맨스의 개체는 존재를 보존하듯 저마다의 순결을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에로티시즘의 화신처럼 묘사되던 뱀파이어 대신 순결하고 강직한 기사의 상이 아른거린다. 이사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은 단지 뱀파이어와 인간이라기보단 단순히 이뤄질 수 없는 어떤 관계라고 규정해도 무방한 허울과 다름없다. <트와일라잇>는 단지 그것을 간단히 걸쳐버린 셈이다. 이를테면 그렇다. 심각하면 지는 거다.
취향의 여부를 떠나서 영화 자체가 기본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말을 하긴 어렵다. 때때로 인물과 상황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장면적으로, 연기적으로 느슨하여 객석으로의 전이가 지체된다. 단지 그것이 복선으로 장치되기 위한 애매모호함이었다 핑계를 댈 수 있을지언정 그 상황 자체가 종종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다. 에드워드를 연기하는 로버트 패틴슨은 때로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기 보단 몰입하려 애쓰는 표정을 지독하게 전시한다. 이것이 때때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이는 배우의 잘못이라기 보단 캐릭터에 대한 막연한 구상으로 젊은 배우의 덕을 보려 한 연출자의 과오에 가깝다. 몇몇 장면은 허세가 심한 기교로 남발된다.
원작 소설의 인기가 본토에 비해 미약한 국내에서 그 기능성의 여파를 장담하긴 힘들지만 특정 대상을 위한 효과는 유효하다. 틴에이저 로맨스 무비로서의 기능성이 뱀파이어를 착취해 슈퍼히어로로 확장시키며 판타지의 환각을 조장한다. 기본적인 골조는 소녀의 성장이며 그 여정은 인테리어와 같은 로맨스를 가꾸며 이뤄진다. 마치 통과의례를 거친 것마냥 모험 같은 로맨스는 사춘기 소녀에게 시련과 경험을 선사한다. 그 동세대 소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킬링 타임이다. 영화의 분량 이후에도 진전될만한 원작의 소스가 여전히 많은 분량을 남기고 있다. 영화도 이를 의식하듯 애매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미 시장을 의식한 영화가 얼마나 자기 계발에 충실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공될 제품의 생산 라인은 좀 더 장기적으로 가동될 것 같다.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어느 식민지가 그러했듯 영국의 소유가 된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 정복자들의 하수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가 탄생했다. 원주민 여성과 이주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백인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원주민과 격리된 수용소에서 길러졌다. 그리곤 백인들을 위한 종으로 팔려가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두에 등장하는 긴 자막이 가르키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을 언급하고 말하려 한다. 일단은 그렇다.
166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만으로도 서사적인 너비가 느껴진다. 서사는 전후반의 구조로 나뉜다. 두 맥락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일관된 정서다. 박애와 사랑.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한 천장과도 같은 서사를 떠받드는 정서적 기둥 역할로 구축된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들은 빛 좋은 포장지와 같다. 화려한 이미지가 벽화처럼 영화를 두른다. 롱숏에 담긴 거대한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드넓은 평원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는 절경이 호화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병풍을 두른 영화다. 유채색에 가깝게 대비된 색감의 톤이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발생시킨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것은 그림이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안에 인물을 담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이전에 삽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책과 같다.
호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남편을 쫓아 영국에서 날아온 새라(니콜 키드먼)는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1500마리의 소를 항구까지 몰고 가야 한다. 지체 높고 고상하기만 하던 새라가 문명의 이기를 깨닫고 로맨스에 이끌리는 과정은 전형적인 클리셰로 읽힌다. ‘몰이꾼’ 드로버(휴 잭맨)와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끌고 항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서부 개척지로 나아간 영국 젊은 남녀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파 앤드 어웨이>를 닮았다. 일본 전투기들의 대규모 공습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진주만>을 연상시킨다. 이별남녀의 애틋한 로맨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평이하다. 풍광의 스케일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지만 이야기에 더해진 감정적 울림은 정해진 너비를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비극도 희극도 그 간격을 철저히 유지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조율된 풍경이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날아가는 카메라의 숏엔 전시적 욕망이 철저히 반영됐다. 측면에 밀어 넣은 인물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놓은 컷엔 좋은 밑그림에 대한 욕심이 팽배하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 위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이야기는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만큼 볼거리는 충분하며 이야기는 순탄하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흥이 얕다. 감정의 진폭이 좁다. 이미지에 눈이 돌아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영화라기보단 화보에 가깝다. 아름다운 회화적인 색감에 담긴 이야기는 깊은 공명을 부르지 못하고 찰나를 채울 따름이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노골적인 자막에 실어 직시했지만 성찰의 여력은 앙상하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시선이 영화의 전반을 관장하는 주제라면 모험과 로맨스는 각기 전반과 후반을 지배하는 주요소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고, 사활을 걸며, 희생을 불사하지만 그 과정의 긴장감을 도출하는 기능적 효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반라의 원주민 캐릭터를 내세워 영험한 신비를 전시하려 하지만 기이한 현상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되려 맥락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연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동시에 백치미스럽게 타자화된다.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캐릭터를 장치해버린 인상이다.
사랑과 전쟁, 자연과 인간, 자유와 박애,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의 너비만큼이나 방대한 대서사를 펼쳐 보이지만 그만큼 산만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의 집중력도 미약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배우들은 훌륭하며 스케일은 거대하지만 정작 감흥이 없다. 방대한 서사엔 지극히 평범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물론 구도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영상이 아니란 점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어떤 비범함을 발견할 때 감흥도 커지는 법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와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연극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호화롭지만 어울리는 주인을 얻지 못해서 텅 빈 집처럼 허망하다. 물론 그 호화로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 없는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하는 것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값비싼 장신구도 과도하게 착용하면 제 빛을 낼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저마다 반짝이지만 제 능력을 지나치게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울릴 줄 모른다. 비범한 것들이 저마다 지나친 빛을 내다 보니 되려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하게 한데 모였다.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은 만화작가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한다는 것만으로 <순정만화>는 일단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바보>에 이어 영화화된 세 번째 작품이자 이전에 영화화됐던 작품들이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원작의 인기를 배반할만한 결과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실질적으로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순정만화>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적용할 수 밖에 없는 잣대는 분명 원작의 영향력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순정만화>는 위에서 열거한 이전의 두 작품에 비해 적절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할만한 수준이다. 원작을 변주함에 있어서 과욕이 지나쳤거나, (<아파트>) 원작의 스토리와 설정을 축약하기 급급했던(<바보>) 전작들과 달리 <순정만화>는 만화 본래의 설정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수순에서 영화적인 이미지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작이 지닌 최대의 장점인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순정만화>는 작정하고 써 내려간 듯한 비현실적인 연애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표백된 것처럼 선량하고, 그 인물들이 인연을 맺는 방식도 일상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예로 CF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가능할 것 같은 특별한 경우의 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순정만화>가 공감할만한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정서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까닭이다.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커플 관계를 상정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일반적인 연애의 감정들을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넉살 좋게 그려내고 있다.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라기 보단 인물의 감정에서 발견되는 적절한 수긍에 가깝다.
원작이 지닌 장점을 영화적으로 잘 계승하고 있는 <순정만화>는 특별함보단 안정감이 장점인 작품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중심에 자리잡은 두 커플은 비현실적인 나이차를 지니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양상의 로맨스를 점해나간다. 하지만 특별한 갈등 상황에 직접적으로 돌진하기보단 적절한 유머와 캐릭터의 사연에 적절한 여백을 두며 차근차근 인물의 심리를 관찰하고 따라잡는데 주력한다. 풋풋하고 순수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띠동갑 커플과 일방적인 연하남의 구애를 받는 연상녀의 마음 기울이기엔 현실적인 편견을 넘어설만한 극적 재미가 존재한다. 소심한 30대 남자와 낙천적인 10대 여자, 적극적인 20대 초반 남자와 소극적인 20대 후반 여자의 로맨스는 각자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상황에 몰입하기 좋은 설득력을 구사한다. 비록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인지하면서도 수긍하고 싶게 만드는 여력이 충분하다. <순정만화>란 제목처럼 그 판타지 로맨스의 한계까지도 적절한 수준으로 묘사된다.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 ‘멋진 하루’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멋진 하루>는 우연과 필연이 겹친 두 남녀의 만남이 이뤄내는 하루 동안의 서사극이다. 오래 전 자신의 연인이었던 병운(하정우)에게 역시 오래 전 빌려줬던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희수(전도연)가 찾아간다는 사연은 단순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역시나 사연의 진행도 번거롭다. 350만원은 고사하고 자신의 거처조차 없는 변변찮은 신세인 병운은 자신에게서 빚을 받으려면 자신과 동행해서 빚을 융통하러 다녀야 한다고 희수에게 제안한다. 두 사람의 동행과 함께 본격적인 <멋진 하루>가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전사와 후일담이 궁금한 쌍방향의 호기심을 추적하는 로드무비이자 경계가 희미한 로맨스 영화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만큼이나 병운에게 냉랭하기 그지없는 희수와 달리 병운은 시종일관 뻔뻔하리만큼 천연덕스럽게 희수를 대한다. 해묵은 두 사람의 관계는 채무관계만큼이나 어색해야 마땅하지만 병운은 그 모든 어색함의 테두리를 거리낌없이 지워낸다. 병운의 능청스런 태도에 희수는 줄곧 짜증을 내지만 점차 태도는 누그러진다. 두 사람의 심리적 관계 변화는 <멋진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희수의 심리적 변화에서 시작되는 파생적 결과다. 희수의 심리는 <멋진 하루>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감수성이다. 오랜 과거와 비교해도 전혀 변함이 없는 병운과 달리 희수는 단 하루 동안에도 만감이 교차하는 감성적 변화를 거친다. 병운을 짜증스럽게 대하던 그녀가 병운과 동행하며 그에 대한 태도를 서서히 누그러뜨릴 때, 그 변모의 계기가 되는 건 불현듯 찾아오는 로맨스적 회고다. 병운과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을 함께 하는 희수는 그 동선 안에서 과거 로맨스의 추억을 종종 되새긴다. 오랜 과거로부터 변한 것이 없다는 병운은 현재의 희수에게 현실을 가늠하게 만드는 일종의 기준점이다. 희수는 병운을 통해 자신의 현모습을 자각하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병운은 희수의 감성적 변화를 도모하는 일종의 대비적 거울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건 대부분 현재 병운의 현실이다. 병운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만나는 수많은 여성들은 병운의 현실을 구체화시킨다. 희수는 그런 병운의 삶에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은연중에 모종의 공감대를 품는다. 그건 한때 350만원을 융통해줬던 과거의 자신과 병운에게 자금을 융통해주는 현재의 여성들에 대한 동질감이다. 관찰과 목격을 통해 수집되는 병운의 사연과 달리 희수의 사연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수의 감춰진 사연은 어느 순간 스스로의 입을 통해 발설된다. 희수는 병운에게 잠시 나직하게 자신의 어떤 사연을 내뱉지만 병운은 그것을 능청스럽게 눙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병운의 일시적 배려임이 뒤늦게 드러나지만 그 순간에 선명한 정체를 드러내고자 한 희수의 심리적 변화가 여실히 포착된다. 얕은 표면을 맴돌던 이야기 속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며 심해에 잠겨 있던 진심이 일순간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멋진 하루>는 희수가 잃어버렸던 어떤 날을 찾아가는 만 하루의 여정이다. 350만원이라는 가격은 희수가 내몰린 조급한 심리적 채무를 대변하는 액수이자 만 하루라는 일상의 소소함을 꽉 채우는 계기가 될만한 가격표다.
무엇보다도 <멋진 하루>는 희수와 병운이라는 두 캐릭터의 앙상블이 묘미의 축이다. 이윤기 감독의 전작에서 등장하던 캐릭터들이 극 중 상황에 식물적으로 배양되듯 사건에 종속되어 가던 것과 달리 <멋진 하루>의 희수와 병운은 능동적인 동선 위에 주체적인 해결방식을 도모한다. 이는 두 배우의 영향력이 캐릭터에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정우의 능청스러운 대사와 행동은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만큼이나 시니컬한 전도연의 표정에 반사되어 더욱 능수능란해진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선보인 연기적 방식과 겹치는 면이 발견되긴 하지만 하정우가 펼치는 기막힌 넉살 연기만큼이나 이를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전도연의 리액션이 탁월하다. 두 배우의 조합은 때때로 괴상하게 느껴질 만한 여정에 자연스러움을 녹여낸다.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을 영화화한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인 상황에서 출발하는 만 하루 동안의 특별한 에피소드다. <멋진 하루>는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미니멀리즘한 연극적 에피소드에 어울려 보이는 사소한 개연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신선한 설정에서 지속되는 찰나의 응집력이 세심하게 군집을 이룬다. 인물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거나 멀리서 고개만 살짝 내밀며 인물을 훔쳐보는 수줍은 핸드헬드와 깜빡임 없는 눈동자처럼 신중하게 인물을 지켜보는 롱테이크 역시 영화에 깃든 감성을 대변한다. 물론 커다란 자극이 발생하지 않는 평온한 흐름 안에서 지속되는 이야기는 다소 밋밋한 느낌의 파스텔톤 색채를 반복적으로 감상하듯 지루함을 부여할 가능성도 배제하긴 힘들다.
과거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동행한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은 삭막한 자본의 강요에 채무 된 희수의 낭만을 환기시킨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 오래 전 연인이었던 병운을 찾아나선 희수의 선택은 그만큼이나 삭막한 희수의 삶을 드러내는 지표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무위도식으로 내려앉은 지겨운 삶에 자극을 얻고 싶었던 희수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욕이나 실컷 해주고 싶었던’ 희수가 ‘자신을 따라오면 갚아주겠다’는 병운을 따라나선 건 그 무기력한 삶에 새로운 활력의 계기를, 혹은 무료함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쫓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지나간 옛 연인과의 일시적 만남은 만 하루의 유효기간이 경과할 때 즈음 이별의 수순을 밟는다. 그리고 차용증은 새롭게 갱신된다. 희수는 왜 병운과의 채무관계를 갱신했을까? 언젠가 희수는 삶이 무료해지고, 일상이 각박해질 때 즈음 또 한번 병운을 찾아갈 것이다. 물론 희수는 병운을 찾아 스페인까지 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멋진 하루>는 어느 날 한번쯤, 충동적으로 갈망할만한 소소한 그리움을 자연광처럼 투명하게 담아낸 이야기다. 사소한 일상은 아련한 로맨스를 품고 특별해진다. 낭만은 그렇게 때때로 대책 없이 짙어지는 법이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