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인텔의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진짜 존재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는 언제나 틈나는 대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가 정해놓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생의 쾌감을 좇아갔다. 그런 어느 날처럼 그는 무작정 유타주의 블루존 캐넌으로 도보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동행을 만나 자신만의 루트 안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쾌감을 안긴 뒤, 또 다른 영역으로 혼자 떠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그 사내는 위풍당당하게 협곡을 건너기 위해 틈새에 놓인 바위 위에 발을 내디딘다. 순간 발을 지탱하던 바위가 떨어졌고 그는 협곡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협곡 사이에 끼인 바위 틈새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통증보다도 경악스러운 건 결코 손을 뺄 수 없다는 것. 누구도 찾지 않는 깊은 협곡 속에서 오른팔을 볼모로 남자는 갇힌다. 그리고 결국 그 남자는 127시간을 버티다 자신의 괴사된 오른팔을 잘라내고 사막을 걸어 나와서 비로소 구조된다. 이는 실화다. 아론 랠스톤이 바로 그다.

Posted by 민용준
,

실한 경찰이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스티브 러셀(짐 캐리)은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결심한다.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그 원하는 삶이란 그의 진짜 정체성, 즉 동성애자로서의 삶이다.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가장으로서의 위장된 삶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누리던 러셀은 게이로서의 삶이 대단한 수입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되고 그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위해 갖가지 사기를 구상하고 실행하며 성공한다. 하지만 결국 러셀은 사기 행각이 드러나 감옥으로 향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그 감옥에서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

Posted by 민용준
,

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Posted by 민용준
,

<밀크>란 제목은 우리가 잘 아는 그 보통명사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실존했던 어떤 사람의 이름, 즉 절대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밀크>는 전기영화란 말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공직자로 활동한 게이이자 게이인권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하비 밀크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그의 생의 일부, 즉 그가 죽은 1978년으로부터 8년 전인, 1970년에 시작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하비 밀크란 인물에 대해서 말할 때, 8년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건 딱히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Posted by 민용준
,

살바도르 달리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지칭했다. 그는 사회부적응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천재라고 언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기괴한 행적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스스로도 이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천재로 인정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달리의 기괴한 행위만큼이나 기괴한 그의 그림들이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을 대변한다. 그의 기괴한 행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잊혀져 갔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여전히 현세에서 유효한 가치를 이어나간다.

Posted by 민용준
,

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Posted by 민용준
,

단순 명확한 제목처럼 <이태원 살인사건>1997년 이태원에서 벌어졌던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에 의거한 영화다. 이 사건의 첫 번째 문제는 진범을 밝히지 못한 미제라는 것이며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한국과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근거에 둔 음모론적 해석의 개입이 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마치 잘 빠진 장르물 제목처럼 보이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핵심도 그 지점에 놓여있다. 영리한 서사 구조나 빠른 속도감 따위는 철저히 배제된 영화는 묵묵하게 그 사건이 한국 사회의 무엇을 건드리고 관통하는가에 치중한다. 문제의식은 좋다. 하지만 영화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지점이 애매하다. 기록적 사건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이태원 살인사건>이 동원하는 건 진실을 둘러싼 윤리적 공방이다. 스릴러적 오해를 부를만한 제목이지만 그것보단 법정드라마에 가까운 현장성을 지닌 <이태원 살인사건>은 정작 재현의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 사건 자체가 지닌 충격이 전달될 뿐, 영화의 의도는 정작 흐릿하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수직적인 한미 관계를 어필하고, 윤리적 문제에 천착하면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지점에선 느슨해지고 만다. 팽팽해야 할 법정신엔 두서가 없고, 좀처럼 긴박감을 얻기가 어렵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법제도의 맹점을 파고 들어야 하는 영화다. 하지만 자꾸 지루한 도덕 선생님의 훈계처럼 스스로를 치장한다. 결국 남는 건 현실에 대한 찝찝한 단상뿐이다. 그런 감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나.

Posted by 민용준
,

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Posted by 민용준
,

백부는 경극 배우였다. 그는 배우로서 명성을 누렸고,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백부는 광대였다. 광대란 명예를 쌓아 올려도 한 줌 바람에 허물어지기 좋은 운명에 불과했다. “경극배우로 성공해도 멸시를 벗어날 수 없다. 무대를 떠나라.” 백부의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던 어린 원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연기를 가르칠 선생님이 왔다. 백부는 원화에게 무대를 떠나라 했지만 운명은 원화를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매란방>은 배우로서의 삶을 면치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의 운명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된 이름이다.

Posted by 민용준
,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Posted by 민용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