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설원의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을 밟고 선 순록 한 마리,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소녀. 평온한 이 풍경은 소녀의 손 끝에서 퉁겨져 나간 화살 한 촉과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순록과 이를 따라 질주하는 소녀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제목은 바로 그 미스터리한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를 위한, 그리고 한나에 의한, 한나에 대한 영화다. 어떠한 지정학적 정보가 등장하지 않는 설원의 한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되듯 성장한 소녀 한나는 그녀를 인간병기로 길러내는 전투교관이자 매일 같이 책을 읽어주는 헬러(에릭 바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났다. 어떤 실체도 드러나지 않는, 동시에 무언가 불확실한 사연이 감지되는, 그 부녀의 사정은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됐다는 한나의 확신과 짐작이 쉽지 않은 헬러의 결심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한나>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솔로이스트>까지 창백한 광량을 능숙하게 활용하며 감수성 짙은 드라마를 만들어오던 조 라이트의 액션 스릴러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설원과 사막을 건너 도시 속으로 들어선 한나의 여정은 조 라이트가 수집한 풍요로운 광량을 머금고 빛을 발한다. 또한 전작들에서 엿보인 사운드 감각도 <한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케미컬 브라더스가 매만진 강렬한 비트와 노이즈로 무장한 <한나>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조 라이트의 비주얼 감각과 융화를 이루며 영화에 공감각적인 시너지를 형성한다.
<본>시리즈의 소녀 판본이라도 해도 좋을 <한나>는 복수극의 형태로서 비정한 스릴러의 문체를 뽐내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의 감수성이 깊게 배인 성장드라마이면서도 곳곳에 매복된 액션 시퀀스를 통해 역동적인 동선을 확보하기도 한다. 액션영화로서 <한나>는 액션 시퀀스의 물리적 중량감이 대단한 영화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시리즈와 같이 현장감 있는 액션 시퀀스들을 지니고 있지만 속도감이나 현실감도 상대적으로 새롭다고 평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적이면서도 건조한 정서적 분위기와 영상의 질감 속에서 연출되는 영화의 몇몇 액션 시퀀스는 분명 인상적이다. 특히 초중반부에 등장하는 한나의 탈출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사운드와 비주얼의 조화는 역동적인 공감각의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롱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된 헬러의 도주 신 역시 대단히 완성적인 리얼리티와 극적인 연출감을 공유하고 있다. 디테일한 액션의 포착은 실패했으나 시퀀스를 두르고 있는 전체적인 요소들의 조화가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한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바로 캐릭터들의 개성 자체에 있다. 롤타이틀 한나를 비롯해서 그녀의 조력자 헬러와 그 반대편에 선 마리사(케이트 블란쳇)까지, 이 세 명의 캐릭터가 이루는 갈등 구도는 영화가 마련한 내러티브의 말판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훌륭한 말의 임무를 수행해낸다. 특히 영화의 근간이나 다름 없는 한나 역의 시얼샤 로넌은 이 영화가 이룬 최고의 성취이자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를 통해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근작인 <웨이 백>에서 뚜렷한 육체적 성장을 보여준 시얼샤 로넌은 <한나>를 통해 배우로서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넘어선 확신까지 부여할 정도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를 우직하게 떠받드는 에릭 바나와 악랄한 카리스마로 어린 주연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케이트 블란쳇의 서포트도 훌륭하다. 재능 있는 신예와 이를 돋보이게 비추는 기성배우들의 관록이 이루는 조합이 근사하다.
액션과 스릴러라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말하기엔 머뭇거려지지만 <한나>는 분명 인상적인 작품이다. 갇혀 있던 존재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확고한 정체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색적인 성장드라마로서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사운드와 비주얼을 어루만지고 조합하는 조 라이트의 감각도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는 겉으로 드러난 장르적 외피의 강도보다도 그 내면을 감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부르는 흥미가 보다 탁월한, 주목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좋은 기대감을 부르는 배우의 발견이란 점에서 보다 즐겁다.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 재능이란 실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리고 즐겨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재능이 당신을 풍요롭게 만들 지이니.
찰리 채플린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희극지왕
찰리 채플린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의 달인 즈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시자라면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채플린은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즈음으로 여겨지던 무성영화에 예술의 의미를 새겨 넣었다. 삼류 연극 배우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희극으로 전복시키며 세상의 비애를 돌봤다. 자신의 경험을 필름에 투영한 기념비적인 장편 데뷔작 <키드> 이후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나 <서커스>를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역설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겨눈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를 저항적 유희로 끌어올렸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채플린은 삶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 희극지왕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진심이자 불의를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여전히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들은 되레 동시대인의 공격을 얻곤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마 이 방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공개될 당시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온전히 기술에 심취해 버린 껍데기처럼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큐브릭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직관과 도전이 이룬 독창적인 성과로서 인정받았다. 큐브릭은 기술로서 시대를 선도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일찍이 씨네필이었던 그는 단지 기술적 실험의 매체로서 필름을 남용하지 않은, 기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필름 장인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그를 작가적 반열에 올린 건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런던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얻을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영화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서 큐브릭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레오 까락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네아스트
프랑스가 전세계 영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흐름’그 자체였다. 그리고 누벨바그의 포스트 세대라 할 수 있는 누벨 이마주는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사조였다. 그 누벨 이마주의 중심에 레오 까락스가 있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시퀀스의 이미지 혹은 단 한 컷만으로도 깊은 인장을 남긴다. 물론 그는 단순한 비주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하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찰나만으로 영원을 설득할 수 있을 낭만이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비범한 광기가 서려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시네아스트로서의 재능을 선보인 그는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고통과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꿈틀대는 사랑을 무언으로 설득한다. “도시의 어디에나 내 사랑이 있다.”까락스의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대사는 자신의 영화처럼 좀처럼 말이 없는 까락스의 절망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 – B급으로 위장한 컬트의 수집가
일명 B급 영화라고 국내에서 통칭되는 ‘B무비’는 동시상영관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떠리처럼 상영되던 삼류영화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B급 영화들이 컬트의 영역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남자의 공이 8할이다. ‘키치’라는 용어를 훈장처럼 미화시킨 주범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목격하고 그 모든 취향을 제 것으로 섭렵해낸다. 이는 결국 그의 창작적 뿌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B급 영화의 경박한 완성도 속에 자리한 통렬한 쾌감을 포착해내고 이를 하나의 위장된 영화적 트릭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한 재간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즐겼던 다양한 영화들, 즉 필름 누아르부터, 웨스턴 무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영화,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자신을 흥분시켰던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재현하고 탁월하게 조립하며 자신의 영화로서 재창조해낸다. 영화광이었던 소년은 스스로를 B급으로 무장하며 그렇게 컬트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역설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가
<메멘토>의 망각과 기억, <인썸니아>의 수면과 각성, <프레스티지>의 환상과 트릭,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대조적인 관념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오가는 인물의 혼돈과 착시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야심가다. 등을 돌리듯 맞선 두 세계의 대조적인 단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이를 통해 두 세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명료하게 설득해낸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호흡정지 진단이 내린 히어로 시리즈의 생명연장을 이룬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블록버스터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의 장으로 끌어올리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거대한 스케일을 반도체적인 세심함으로 완성해낸 <다크 나이트>는 작은 결점조차 허락하지 않는 놀란의 이성적 두뇌가 총 집약된 야심작이다. 그리고 <인셉션>은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대변하는 총아적인 단서나 다름없다. 꿈과 현실을 넘나 드는 인물들의 분투는 <다크 나이트>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새삼 각인시키며 전세계를 ‘꿈의 해석’으로 끌어들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드는 듯한 놀란의 꿈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으로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
확실히 김연아에겐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기능적인 우월함을 초월할만한 예술적 기질이 다분하다. 사실 이번 세계피겨선수권 대회 점수는 전체적으로 인플레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플레를 감안한 거품을 털어내더라도 김연아의 200점 돌파는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고 본다. 참 잘하더라. 쇼트는 정말 완벽했다고 본다. 오히려 기술점수가 2점 정도 높았어도 상관없었다고 생각한다. 프리에선 살코를 실패했지만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자꾸 플립에 어텐션을 지적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하지만 그런 건 이제 걱정거리도 아니다. 김연아의 스케이트날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링크 내의 공기가 바뀐다. 심판들의 채점 이전에 관객들이 먼저 알고 일어나 박수를 친다. 누가 봐도 이건 예술이니까.
김연아와 같은 재능이 대한민국에서 등장했다는 건 실로 기적이다. 척박한 땅에서 싹을 틔웠고 잘 살아남아 꽃을 피웠다. 잠재력을 죽이기 좋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사되지 않고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어쩌고, 국민이 어쩌고,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선 링크가 자신의 것이란 것만 염두에 두고 전진하길 바란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한 희열을 만끽하길 원한다. 물론 잘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발전 중이다.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고무적이다.
때때로 아사다 마오를 비롯한 김연아의 경쟁자들의 실수에 환호하는 이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순위 매기기에 급급한 천박한 근성 앞에서 질릴 때가 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공연을 보지 못하고 순위 결정전에 집착하는 태도들에 토악질을 하고 싶어진다. 난 개인적으로 김연아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의 베스트를 보고 싶다. 그리고 최종적으론 김연아의 베스트를 보길 원한다. 모든 선수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만족할 수 있길 바란다. 순위 매기길 좋아하는 족속들의 천박한 근성을 비웃듯 완벽한 연기들을 펼쳐주길 바란다. 그 무대가 채점을 위한 자리가 아닌 표현의 자리임을 각성시켜주길 원한다.
김연아는 쇼트트랙 밖에 모르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관심을 부여했다. 우린 그걸 알아야 한다. 김연아로부터 얻은 혜택이 단순히 ‘대한민국 1등’이란 슬로건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1등은 김연아지, 대한민국이 아니다.다만 우리는 그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게 비단 김연아가 아니길 바란다.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이나 바우어와 감각적인 스텝과 스핀, 아름다운 점프, 그리고 음악에 도취된 선수들의 연기. 그 모든 총합을 이루는 피겨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그저 김연아 1등에 목말라서 박수 치고, 혹은 반대로 분개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의 박수나 시기가 그저 1등만을 향하지 않길 바란다. 모든 선수의 열의와 노력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
김연아도 훌륭했지만 안도 미키도 인상적이었다. 한 해 동안의 부진을 털어내고 정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오늘 프리스케이팅은 어떤 면에서는 김연아보다 뛰어난 느낌도 얻었다. 동시에 김나영 선수도 수고했다.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있다는데 충분한 치료와 휴식을 통해 완치되길 바란다. 그리고 김연아에겐 감사를. 정말 대단한 것을 보여줬으니. 신기록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후회하지 않을만한 경기를 치를 수 있길 바란다. 그저 우린 그 축복 같은 재능을 누리기에 앞서 소양을 갖춰야 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건 동시대 인류의 축복이다. 그리고 그 축복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