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요즘 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 이상의 체험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극장부터 골랐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새로 단장한 프리미엄 상영관 ‘부티크 M’을 찾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예매사이트에 접속해서 영화를 고르고, 두 좌석을 선택한 후 결제를 했다. 5만원이 결제됐다. 그러니까 영화 티켓 두 장의 가격이 무려 5만원이다. 티켓을 금으로 만들었나? 종이였다.
상영관 이름이 스위트룸이라고 했다. 흔한 극장 상영관처럼
1관이라고 부르는 대신 101호라고 했다. 상영관이
아니라 호텔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호텔식 서비스를 지향했다.
넓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체어에서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에비앙 생수를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입구에서 무릎담요를 나눠주고 자리엔 슬리퍼도 놓여있다. 룸서비스도 가능하다. 영화 시작 전에 좌석 측면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팝콘이나 나초 대신 피자를 주문했다. 화덕에서
구운 조각피자로 유명한 ‘피자리움’이 입점해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와인도 판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대 부근의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앤트러사이트를 비롯해 타발론 티, 오설록
아이스크림도 상시 판매한다. 어쨌든 2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를 보면서 리클라이너 체어의 안락함을 실감했지만 동시에 영화가 재미없다면 숙면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고,
잠들 일은 없었다.
부티크 M과 같은 상영관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프리미엄 상영관은 존재해 있었으니까.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모델이다. CGV에선 일찍이 식사와 영화관람을 연동해서 즐길 수 있는 ‘시네 드 셰프’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롯데시네마 역시 샤롯데라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메가박스
부티크 M은 후발주자다. 이미 존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 시장에
뛰어든 건 지금의 시장에서 유효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박스에선 지난해부터
다양한 형태의 상영관을 기획해왔다. 과거의 자동차 극장을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M과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텐트와 캠핑 의자에 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글램핑 상영관인 오픈 M이 눈에 띈다. 둘 다 영화 관람 외적인 경험을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띄는데 어린 유아가 있는 부부가 쉽게 극장을
찾지 못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바비큐나 와인, 맥주와 함께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전통적인 영화관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 관람과 동반할 수 있는 체험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21세기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맛을 돋우는
음악처럼, 영화 또한 감각적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CGV에선 멀티플렉스 대신 컬처플렉스란 언어를 동원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했다. 컬쳐플렉스는 영화뿐만 아니라 외식이나 쇼핑, 문화체험
등 영화 외적인 다양한 경험과 연계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성의 연계나 확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CGV청담시네시티엔 다양한 식당과 커피 전문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층층마다 자리해있다. 기존의 골드클래스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더
프라이빗 시네마’와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 형태로 제작된 커플석만으로 상영관 좌석을 채운 ‘스윗박스 프리미엄’과 같은 상영관은 영화 관람에서 서비스의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새롭게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 ‘시네
파크’라는 광장 형태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영화 이외의 문화적 체험을 전달하려는 다른 극장들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체험적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은 극장산업의 화두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넓어졌고, 관객들은 기꺼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기다린다. 이를 테면 최근에 화제가 된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열풍이 그렇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길 고집하는 배경엔 ‘좀 더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 ‘두 영화를 관람하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이맥스 상영관이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영화가 주는 감각적 체험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영화관람이란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적인 체험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소비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D 상영 방식의 일반화 또한 궤를 같이
하는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전세계적인 흥행 이후로 디지털 상영관이 확대되고 3D 상영이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해 버린 건 어떤 체험을 계기로 관객들의 감각적 경험이 확장되고 정착된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 감각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체험적 방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험의 확장을 통해 훈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체감하길 바라는 관객의 정착이 극장 상영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돌비 애트모스 음향 시스템도 장착된 상영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개인 좌석마다 설치된 헤드셋을 통해서 영화 사운드를 홀로 독점하는 상영관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통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향에 따라서 좌석의 진동을 체감하도록 하는 비트박스관과 오감을
자극하는 4D 상영관의 공감각적 체험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4D는 기존의 영화관람 형태를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영화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고, 그런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극장은 진화하고 있다.
21세기의 극장들은 영화의 관람방식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영화 관람 외적인 서비스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극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견인해왔다. 동일한 티켓 가격으로 각기 제작비가
다른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 산업이란 대중의 기호에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 극장문화의 변화란 결국 대중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영화는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또한 IPTV를 통해서 한동안 부재했던 영화의 2차 판권 그러니까 홈 씨어터 시장이 순식간에 정착됐다. 영화란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됐다. 그만큼 극장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커다란 스크린만으로 극장의 경쟁력을 논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관객들은
이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영화 그 이상의 영화관을.
신해철과 서태지는 90년대를 관통하는 뮤지션이자 메신저였다. 하지만 신해철이 언어로서
세상과 충돌하는 사이, 서태지는 언어의 미로 속에 자신을 숨겨왔다. 죽은
신해철은 말을 남겼고, 산 서태지는 말을 아낀다. 신해철의
말은 죽어서도 살고, 서태지의 말은 살아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신해철이 죽었다. 벼락처럼 떨어진 비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추모했다. 밀물처럼 추모의 말들이 달려와
바다를 이뤘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서태지도 말을 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 현장이었다. 서태지는
“힘들지만,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해철은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명곡을 만들었고, 나도 듣고 자란 세대다. 누구 보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노래 가사는 내 마음을 너무 흔들어놨다. 나도 그런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태지가 신해철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서태지가 신해철처럼 가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의외였다.
신해철의 가사는 직설적이다. 피해가지 않는다. 투수로 치자면 직구 일변도의 투수였다. 그래서 종종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속구를 구사하며 호쾌하게 미트를 때렸다. 수비수의 도움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특별히 해석을 부르는 가사를
쓰거나 부르지 않았다. 가사가 가리키는 지향점이 명확하다. 반대로
서태지의 가사는 은유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투수로 치자면 맞춰 잡는 변화구 투수였다. 가끔씩 정면승부를 시도하며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인구를 던져서 맞춰 잡았다. 그만큼 수비수의 도움이 절실하다. 쉽게 말하자면 팬덤의 지원사격이
중요하다. 단어를 나열한 형태만 봐도 의도라는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언어인 만큼 애정을 바탕에 둔
의미부여가 중요해진다.
올해 신해철과 서태지는 모두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신해철은 7년만이었고, 서태지는 5년만이었다. 신해철은
올해 말에 넥스트의 신보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서태지에게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서태지의 활동 재개가 확정된 시점이었다. 서태지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서 방송 출연을 결정했다. 그가 결정한
건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였다. 방송 전부터 서태지가 등장한다고 예고편을 떠들썩하게 틀었다. 22년
만에 못다한 말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서태지의 지난 시절을 떠들썩하게 떠들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서태지의 아들 이름이 ‘삑뽁이’라는 것 외엔 새로울 것도,
기억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에 출연한 <뉴스룸>에서 유효한 이야기가 나왔다. 앵커 손석희가 뼈 있는 질문을
던져준 덕분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소격동’이 녹화사업을 비롯한 과거의 정치사를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과 해석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서태지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노래를 만들 땐 정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컨대 예쁜 한옥 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마음만 다뤘다”고 했다. 다만 “80년대 서슬 퍼런 시대를 표현하지 않고는 ‘소격동’이란 곡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들어간 거다”라고 부연했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 발매된 서태지의 8집 앨범에 수록된 ‘T’ik T’ak’을 두고 세간에선 이것이 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 즈음에 코엑스에서 펼쳐진 서태지의 게릴라 콘서트에서
서태지는 시대적 흉흉함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며 ‘시대유감’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그 노래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지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태지의 본의와 무관하게 서태지에게 무언가 명확하게 바라는 바가 있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적 부도덕과 불합리를 좀 더 명확하게 꿰뚫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태지와 상관 없는 바람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신곡
중 하나인 ‘크리스말로윈’의 가사에 등장하는 ‘산타’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서태지는
그것이 ‘나쁜 권력자’라고 했다. ‘교활한 권력자, 교활한 직장 상사, 그런게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부연했다. 그러니까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인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나쁜 권력자인지 알 길이 없는 ‘환상 속의 그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랄까.
신해철의 언어는 언제나 명확하고 확실했다. 서태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신해철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현정부를 향한 촌철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대통령은박정희대통령의향수를가지고있는지모르겠지만국민들이지금보고있는모습은전두환의모습이다. 박정희의모습이아니다.”그런태도는지지자를만들어내는동시에적대자가등장하는이중적계기가되기도했다. <백분토론>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에대해서세간의비판여론이일자그는자신의미니홈피계정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은분명일부에게 '익숙지않은모습'일수있다. 하지만 '익숙하지않은모습'이반드시 '옳지못한모습'은아니다"라고논평했다. 그에게는정해진편이없었다. 단지불합리한권력을내세우는다수와맞서는사람이었다. 하지만그의언어는불합리한권력을찌르기위한창으로서만존재하지않았다. 반대로그는약자에게관대한사람이었다. 신해철의생전마지막기록이라할수있는JTBC의 <속사정쌀롱>에서그는 "내가
다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에서 비전을 세우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다르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보험사에서 최소한 주유소까지 향하는 기름을 넣어주는, 최악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 환경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언어는 그의 노래 가사와도 일맥상통한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용기를 주거나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The
Dreamer’)”라고 다짐하거나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어(‘매미의 꿈’)”라고 꼬집어 말한다.
서태지도 한때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매나!”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허공에 대고 일갈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제도를 바꾸라는 건지, 그런 교육제도 속에
머무르는 학생들의 태도를 바꾸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 통일을
염원하거나, 교육제도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도 명확한 비판의 대상이 부재한다. 서태지는 ‘시대유감’을
‘이 시대에 유감이 있다고 말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런 노래의 가사가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라고 겉핥기에 그치는 건 가사유감이다. 명확한
건 제목뿐이다. 서태지의 솔로 앨범 가사들은 대부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를 동반하지 않으면
언어의 가치가 불확실해진다. 최소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쳐먹도록 그게 뭔지 몰라”라는 언어를
구사하는 신해철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시대 비판이라는 언어로 처세를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리스너의 판단’이라는 말로 모호함만 증폭시킨다.
<해피투게더>에선
서태지의 90년대 활약상을 훑으며 찬사를 거듭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태지는 90년대의 영광 이후로 보여준 것이
드물다.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9년, 서태지가 모아이섬에서 신비를 노래할 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서태지의 노래와 노래 밖 현실의 괴리가 선명했다. 신해철이 죽은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해철이 생전에 뱉었던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주워들었다. 죽은 신해철의 언어로부터
위로를 느낀다. 멋대로 해석해도 좋을 말장난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가 존중 받는 건 당연하다. 흉흉한 세상에선 위로가 되는 말이 더욱 귀하다. 신해철의 죽음은
그래서 시대유감이다. 그 가운데서 서태지는 ‘소격동’의 추억을 노래한다. 소격동의 녹화사업은 단지 기억의 재현일 뿐이다. 개인적인 옛 기억이 예쁘게 추억될 뿐이다. 유감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린다.
음악을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음악이 길이 되고, 생이 됐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음악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새로운
삶을 만난다. 그리고 이 세계보다도 넓은 음악적 여정을 꿈꾼다.
‘내가 이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20년 전, 파리 유학 중 우연히 지나가던 샤틀레 극장 앞에서, 나윤선은 생각했다. 그리고 2013년
나윤선은 샤틀레 극장에 있었다.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있었다. 1600석이 넘는 좌석을 빈틈 없이 꽉 채운 관객들 앞에서 노래했다. “놀랍게도
꿈이 실현됐으니 그때 제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죠. 그것도 전석 매진이 되는 상황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1860년에 지어진 파리의 샤틀레 극장은 파리의 예술가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무대다. 나윤선은 그렇게 꿈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재즈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뉴욕의 ‘블루노트’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틀 동안 네 차례의 공연을 펼쳤다. 재즈의 본고장
미국 안에서도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을 배출한 재즈의 산실 블루노트에서 말이다. “재즈 뮤지션에게 미국
시장은 언제나 숙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미국 활동에 할애하려
해요. 어쨌든 미국에서의 첫 숙제는 비교적 잘 마친듯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간절함과 절실함만으로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치게 되는 운명의 좌표가 등장한다. 뒤늦게야
그것이 마냥 지나치던 일상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리키던 지표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린
그걸 재능이라고 부른다. 재능은 삶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윤선이
재즈 보컬리스트가 된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패션회사에 지원했어요. 입사 경쟁률이 높은 회사였고, 합격해서 운이 좋다고도 생각했죠.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회사를 그만
뒀을 무렵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됐죠.” 혹시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이 있었던
것일까?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어요. 당시
음악을 하던 친구가 제 노래를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뮤지컬 연출자인 김민기 선생님께 들려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경험이 일천한 저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셨어요. 그 뒤로 두 편의 뮤지컬에 더 출연했어요. 정말 우연의 극치죠.” 하지만 그 ‘우연의 극치’가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란 미래를 발굴한 셈이다.
뮤지컬 무대에서의 경험은 나윤선의 유전자에 잠재된 재능을 흔들어 깨웠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클래식 합창단 지휘자인 아버지와 뮤지컬 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나윤선은 ‘공연장의 백스테이지가 놀이터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녀에게 음악이란 매일같이 열고 닫는 방문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문턱을
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워보고자 결심했다. 다만
그것이 재즈여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무언가를 배우기엔 이른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클래식을 공부하기엔 조금 늦은 것 같았고, 친구의 권유로 재즈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아닌 프랑스 유학을
선택한 건 제 전공이 불문학이었기 때문이에요. 개인적으로 샹송을 매우 좋아하기도 했고요.”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그렇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실 나윤선의 공연에선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일관성보단 다채로운 음악적 영향력이 감지된다. 나윤선의 무대는 록과 팝, 일렉트로니카, 포크, 국악 등 다양한 음악적 자장을 재즈로 흡수해버리는 장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재즈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 관심이 있어요.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들도 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재즈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라도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하는데 적합한 음악이거든요.” 어쩌면 그건 그녀의 곁에 좋은 음악적 동지들이 존재하는 덕분일지도 모른다.
벌써 7년째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는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최정상급의 연주자다. 그리고 아코디어니스트 뱅상 뻬라니와 콘트라베이시스트인 씨몽 따이유도 재능을 인정
받는 연주자다. 이처럼 재능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나윤선
콰르텟’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나윤선에게 그들을 매혹시킬만한 실력이 있다는, 역설적 증명이다.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는 건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같아요. 그런 면에서 지금 함께 활동하는 뮤지션들은
정말 제게 최고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죠.”
나윤선은 1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100회 정도의 공연을 소화한다.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 앞에 서고 노래한다.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뮤지션에겐 큰 행운이에요. 같은
레퍼토리를 공연해도 관객에 따라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고되고 힘든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윤선은 아직도 그 여정을 통해 얻게 될 무언가를 기대한다. “어느
유명 연주자가 인터뷰에서 ‘당신은 어디에 사세요?’라는 질문에
‘호텔에서 살아요’라고 답한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어요. 실제로 연주 여행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나 호텔에서 보내게 되니까요. 녹록한 일이 아닌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항상 설레는 마음이 있죠. 저는 항상 제 음악적 여정을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많은 여행을
하며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게 되고요. 낯선 곳에서 만나는 생경한 풍경과 사람들도 제겐 때로 큰 영감으로
다가옵니다. 지금도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라는 설렘으로 비행기에 올라요.”
이미 잘 알겠지만 나윤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재즈 보컬리스트다.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닿길 염원하는 팬들이 전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한류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나윤선은
세계를 누볐다. 그런 그녀에게 한국의 무대에 선다는 건 지금 어떤 의미일까. “모든 무대가 소중해요. 하지만 한국에서 공연할 땐 조금 다른 느낌이
있죠. 공연 시작 전엔 좀 더 긴장이 되는데 막상 시작하면 해외에서보다 편안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이 좀 더 크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여정이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되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음으로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나윤선은 모든 공연의 끝에서 ‘아리랑’을 부른다. 그
무대의 끝에서 자신이 돌아올 곳을 되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한 뮤지션’이란 수사도 그녀에겐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겐 보다 넓은 세상이 있고, 더 큰 음악이 있다. “음악 활동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연습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다.’ 어느 80대 원로 연주자가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인데 저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항상 새롭고 젊은 음악을 하는 게 제 음악적 목표에요. 아직 저 앞에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윤선은 젊은
뮤지션이다. 아직 서야할 무대가 많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중하고 큰 의미를 되새길 때가 왔다. 오는 12월, 한국에서의 공연을 앞둔 나윤선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안도감과 정서적 공감을 확인하고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할
계획이다. 내년 3월엔 다시 프랑스 샤틀레 극장의 무대에
선다. 세계보다도 더 넓은 음악적 여정을 향해 나아간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작품이란 걸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좋은 감독이란 거장의 면모를 지닌 감독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라세 할스트롬은 바로 그런 작품을 만든 그런 감독이다.
1946년생인 라세 할스트롬은 40여
년에 달하는 연출 경력을 지닌 60대 후반의 노장 감독이다. 하지만
흔히 그만한 경력을 지닌 감독들에게 손쉽게 동원하는 ‘거장’이나
‘대가’라는 단어에 어울린다고 말하기엔 겸연쩍은 구석이 있다. 물론 그가 연출한 작품 가운데선 기억될만한 수작들이 더러 존재한다. 하지만
라세 할스트롬은 대단한 울림을 전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걸작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을 연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거장이나 대가만이 오랜 시절의 경력을 보장받는 건 아니다. 라세 할스트롬은 개별적인 인생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동을 길어 올리는 범작들을 꾸준히 만들어오며 대중과 호흡해온 감독이다.
라세 할스트롬이란 이름만으로도 짐작하겠지만 그는 미국 출신 감독이 아니다. 스웨덴, 그러니까 북유럽 출신 감독이다. 라세 할스트롬과 함께 동시대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북유럽 출신 감독으론 레니 할린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레니 할린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옛날
사람이 된지 오래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할리우드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연출해온 건 할스트롬이 유일하다. 과거형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물론 할스트롬의 감독 경력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할스트롬은 소위 말하는, ‘떡잎이 노란
아이’였다. 열살 무렵 단편영화를 연출하며 감독으로서의 비전을
찾은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TV방송 전파를 타게 되는 경험을 얻기도 했다. 이 경험은 본격적인 TV시리즈 연출 데뷔로 이어졌고, 10여 년간의 TV시리즈 연출자로서 경력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유명세에
일조한 건 세계적인 스웨디시 팝그룹 ‘아바’였다. 아바의 히트곡 대부분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으며 아바의 공연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바: 더 무비>(1977)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스트롬은 1985년에 발표한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미래로 나아간다.
할스트롬은 <개 같은 내 인생>
이전에도 스웨덴에서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모두 가정을 배경으로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란 점에서 일관성이 있었다. <개 같은 내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병약한 어머니를 둔 소년의 고독하고도 묵묵한 성장기를 그린 이 작품을 통해서 할스트롬은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각본상과 연출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그 뒤로 한동안 스웨덴에서 영화를 연출해오던 그는 홀리 헌터, 지나
롤랜즈 등 당대의 배우들이 출연한 <사랑의 울타리>(1991)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리고 그 후 할스트롬의 가장 인상적인 연출작 중 하나인 <길버트 그레이프>(1993)를 발표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라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변변찮은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다섯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해낸다.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충격에 휩싸여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지나친 과체중이 된 어머니와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막내 동생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라도 부둥켜
안을 수 있는 혈육이지만 한편으론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기도 하다. 하지만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애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 살아가다 보면 어찌할 수 없이 매일 같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론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종속된 일상이 무기력하게 추락하지 않고 결국 새로운 기류를 타고 짐작할 수 없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응원 같은 결말로 이륙한다. 결핍의 시간을 어제로 밀어내고 충만한
내일을 꿈꾼다.
<길버트 그레이프> 이후로
연출한 <사이더 하우스>(1999)와 <쉬핑 뉴스>(2001), <언피니시드 라이프>(2005) 사이엔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사생아들을 받아주는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의 성장과 정착을 다룬 <사이더 하우스>,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보낸 유년시절로 인한 자신감이 결여된 삶을 극복해내는 남자의 인생을 살피는
<쉬핑 뉴스>, 모종의 사고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며느리를 원망하고, 친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곰에게 앙심을 품은 노인의 삶에 관한 <언피니시드
라이프>까지,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거나 그로부터 해방되는
남자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조류를 거슬러올라가거나 타의적으로 떠밀려가거나 제 자리를 꿋꿋이
지켜나가거나, 저마다 다른 형태로 천착한 결핍을 메우고 치유하는 건 결국 그 주변부에 머무는 관계를
통해서다. 결국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설 자리를 깨닫고, 자신이
의지할 존재를 발견한다. 필연적인 환경이나 불가피한 사건으로 얻은 결핍과 상처가 관계를 통해 치유된다. 평범한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뤄지는 삶, 그것이 바로 라세 할스트롬의
영화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서다.
할스트롬의 작품 속에서 보기 드물게 우화적인 세계관을 지닌 <초콜릿>은 종교적 교리를 바탕에 둔 억압적인 정서를 당연한 규율로 감내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 편입된 한 여인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주민들을 계몽한다는 달콤한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서 시대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어느 개인과 그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초콜릿>은 서로 반목하던 세계의 화해와 화합을 그린다는 점에서 근작인 <로맨틱
레시피>(2014)와 연결된다. 뤼미에르에서 프랑스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프랑스 여인과 인도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인도 가족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이 작품은 결코 서로 손잡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의
화합을 그린다는 점에서 할스트롬의 세계관에 종속된다. <사막에서 연어낚시>(2011) 또한 중동과 서방 세계의 갈등 속에서 국면 전환을 꿈꾸는 영국 정부와 예멘의 부호가 손을 잡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21세기 이후로 할스트롬은 다양한 방면의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중세 시대에 숱한 여성들을 매혹시켰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호색가 카사노바에 관한 <카사노바>(2005)나 미국의 대부호인 하워드 휴즈에
대한 자서전을 날조한 작가에 관한 실화를 다룬 <혹스: 욕망의
법칙>(2006)과 같이 남다른 면모를 지닌 이들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디어 존>(2010)이나 <세이프 헤이븐>(2013)과 같이 남녀의 절실함을 바탕에
둔 로맨스물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주인에 대한 충심이 강한 강아지의 절절한 사연을 다룬 <하치 이야기>(2009)도 한편으론 새로운 드라마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세 할스트롬의 작품들은 어떤 대단한 경지를 선사할만한 걸작에 대한 기대감으로부터
확실히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그의 영화들은 과거보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너른 감정들을 담아내는
드라마로 확장되고 있다. 감독으로서 무엇이 더 옳은 길일지에 대해 말하긴 어렵다. 중요한 건 그의 드라마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걸작일 수 없듯이 모든 이의 삶이 위대해질 순 없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에도 나름의 위로가
필요하다. 라세 할스트롬의 드라마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좋은
범작들을 만드는 것, 그것 또한 이 세상에 필요한 재능인 셈이다.
소설
찍는 남자, 라세 할스트롬
라세 할스트롬의 초기 대표작인 <개 같은 내 인생>은 스웨덴 작가 레이다 욘손의 자전적 소설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을 기초로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밖에도 그는 적지 않은 소설을 영화로 연출해왔다. 소설가이자 각본가이며 영화 감독인 피터 헤지스의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부터 스토리텔링의 대가 존 어빙의 소설 <사이더
하우스>, 영국의 여류 작가 조앤 해리스의 소설을 옮긴 <초콜릿>과 퓰리처상 수상 작가 E. 애니 프롤스의 소설 <시핑 뉴스>, 베스트셀러 작가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소설 <디어 존>과 <세이프
헤이븐>, 영국 작가 폴 토데이의 소설 <사막에서
연어낚시>를 영화화했으며 최근작인 <로맨틱 레시피> 또한 경제전문지 출신 기자인 리처드 C. 모리아스가 쓴 소설 <백 걸음의 여행>을 스크린에 옮겼다.
무명 배우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변신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할리우드에선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탄생했다. 크리스 프랫은 지금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사실 크리스 프랫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 승선하기 전까지 완전한 무명 배우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다.
올해로 6시즌까지 진행된 TV시리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연기한 앤디 역으로 적지 않은
인지도를 얻었고, 크리틱스 초이스 TV어워즈에선 코미디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사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의 앤디는 유쾌한 유머 감각을 지닌 캐릭터란 점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외모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처럼, 믿을 수 없도록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육질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스타로드와 달리 앤디는 테디베어처럼 둥글둥글한 곡선미가 눈에 선명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프랫은 한 TV쇼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내에게 소리쳤던 일화를 밝혔다. “여보! 75파운드나 몸무게를 빼야 되니 빵은 그만 구워!” 반쯤은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에겐 일종의 절실함이 있었다. 마블
코믹스의 팬이기도 했던 그에게 마블 유니버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경력 안에서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감초 역할에 특화된 편이었는데 그런 역할을 통해서 경력을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오디션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2012)에 출연한 뒤부턴 연기하고
싶은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매니저를 통해서 새로운 오디션을 찾아갔다.”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말이다.
사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크리스 프랫이 특별히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출연했던 <원티드>(2008), <신부들의 전쟁>(2009)이나 <머니볼>(2011),
<5년째 약혼 중>(2012) 등의 작품에서 어떤 배우가 맡았다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역할을 전전해왔다. 그나마 지난해에 제작된 <딜리버리
맨>과 <그녀>에선
각각 극의 중심인물이 지닌 정서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중심인물의 정서적 결핍을 긍정적인 태도로 수긍하고 이해하는 인물로서
자리하며 나름의 존재감을 어필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다만 편차가 심해 보이는 체중으로 인상이
자주 변화하는 탓에 크리스 프랫이란 배우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인상을 꿰어내기가 쉽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앞서 나열한 출연작들보다도 주연 캐릭터의 내레이션을 맡은 <레고 무비>(2014)에서의 존재감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무엇보다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를 보며 앞서 열거한 그의 출연작들을 짐작하는 이란 드물 것이다. 단언컨대 그럴 수밖에 없다. 식스팩과 수백 광년쯤은 동떨어진 듯한
체형의 무명배우였던 그의 과거를 연상했을 때 스타로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 프랫과 처지가
유사한 작품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또한
마블 코믹스의 역사를 차지하는 작품이지만 <어벤져스>의
세계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 프랫에겐 좋은 기회였다. “시나리오와 감독의 디렉팅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배우로선 도움이 된다.” 대중에게도 낯선 역할인 만큼 자신의 관점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낯설지 않은 작품이었다. 유년시절 친구를 통해서 우연히 원작 코믹스를 접한 적이 있었고 자신도 그 중
몇 권을 소장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론 운명적이란 의미를 붙일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막상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역이라서 안도했지. 시나리오가 아주 웃긴데, 그게 딱 제임스 건 감독 스타일이다. 그는 실제로도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사실 크리스 프랫은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의 칭찬을 곧잘 하는 편인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도 주변 동료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입바른 말을 잘해서라기 보단 그가 실제로 사려 깊고 친절한 동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는 <당신은 몇번째인가요?>(2011)라는 영화로 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주연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의 역할에 오디션을 봤지만 작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크리스 에반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크리스
에반스 또한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크리스 프랫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었는데 두 배우가 모두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치곤 기묘한 일이다. 언젠가 <어벤져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중첩될 가능성도 다분한 만큼 두 배우가 한 스크린에 자리할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다.
한편 그는 자상하고 세심한 가장이기도 한데 한번은 동료배우이기도 한 아내 안나 패리스의 머리를 땋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화제가 됐고, 한 영상 인터뷰에서 머리 땋기 실력을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천연덕스럽게 내년 개봉작으로 예정된 <쥬라기 공원>의 새로운 속편을 홍보하며 1분만에 완벽한 머리 땋기를 선보인
그는 “(머리를 묶을 땐) 고무밴드보단 스크런치라고 불리는
걸 쓰는 게 낫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촬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아내로부터 생후 13개월이 된 아들이 아빠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자신을 보고 ‘아빠’라고 불러주는 어린 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날을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리스 프랫은 우주를 지키는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이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 충실한 남자인 것이다.
크리스 프랫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마블 유니버스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배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최근 LA에 있는 한 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자신이 영화에서 입었던 의상들을 입고 스타로드로서 아이들을 찾았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관련된 인터뷰 중 자신의 촬영
의상을 챙겨놨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영화가 개봉하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아이들을 찾아갈 거다. 영화가 크게 성공해서 아픈 아이들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피터 퀼이나 스타로드가 찾아오는 게 큰 의미가 된다면 그럴 거다. 그럼 이 영화가 내게 진정한 의미가 될 거다. 가장 멋진 건 내
아들이 언젠가 이 영화를 볼 것이고, 어쩌면 내가 어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이다. 그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는 거다.” 생각해보면 크리스 프랫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선한 인물로서 자리했다. 때때로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랬다. 그는 본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배우다. 진정한
영웅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식스팩보다 그 착한 마음이 진정한 매력이자 재능일 것이다. 그 마음이 그의 경력에 좋은 영감이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식스팩을
볼 기회는 유효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속편이 2017년에 공개될 예정이니 말이다. 물론 식스팩보다도
따뜻한 마음이 더욱 매력적인 남자, 크리스 프랫의 유쾌한 행보를 계속 목격하고 싶다.
'리부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부팅’ 그러니까 컴퓨터를 다시 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러니까 영화를 리부트한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부트는 그 대상이 되는 원작이 깔아놓은 철로에 개량된 열차를 올려놓는 작업이 아니다. 열차뿐만 아니라 철로를 싹 갈아엎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작업이다.
변주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시리즈의 정체성만은 유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엔 배트맨이 있고, <맨 오브 스틸>(2013)엔 슈퍼맨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없는 <007>시리즈가 존재할 리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의 미래를 보장하는 뿌리이자 줄기이며 잎이자 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엔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리부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배트맨이든, 슈퍼맨이든, 스파이더맨이든, 한결 같이 ‘태생의
비밀’을 안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리부트
영화들이 ‘프리퀄 무비’로 시작되는 건 다분히 전략적인 셈이다. 리부트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돼서 새롭게 설계된 이야기 위에서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다. 이를 테면 <007: 카지노 로얄>(2006)이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과 같은 작품은 프리퀄의 형식을 빌려서
시리즈의 리부트를 시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서사의 발판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구축한 뒤, 나아가버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노력보다도 손쉽게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방법론이다. 게다가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증명한 것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의 너비란 그야말로
우주처럼 넓고 광활하다. CG의 발달을 위시한 영상 기술의 발달도 리부트를 부채질한다. 과거의 기술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구현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을 놀라운 볼거리로 발바꿈시키는 것만으로도 리부트의 가능성은 보다 무궁무진해진다. 리부트
열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프랜차이즈들이 리부트의 대열에 합류 중이다.
리부트 열풍은 영화계를 넘어서 TV시리즈까지 강타하고 있다. 내년에 방영될 예정인 <히어로즈> 시즌 5는 이미 기존의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또한 고전 시리즈로서 인기를 모았던 슈퍼히어로물인
<플래쉬>도 새롭게 리부트될 예정이다. 또한
리부트 열풍은 영화와 미드의 경계를 넘어선 스핀오프 기획으로 진화 중이다. <어벤져스>의 성공에 힘입은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기획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을 주인공으로 둔 또 다른 <배트맨> 프리퀄 시리즈가 미드로 제작 중이다. 스크린과 TV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리부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