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맞고 사망한 부랑자 시신이 발견된 이튿날,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의 여비서가 지하철역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 덕분에 스티븐과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고 무기회사를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티븐의 발언권이 상실될 처지에 놓인다. 하루 차이로 발생한 두 죽음은 그저 동떨어진 두 개의 점처럼 접점이 없는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취재하던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이자 스티븐의 친구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우)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단서를 발견한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직감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이하, <플레이>)는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뛰어난 취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와 혈기왕성한 신예 여기자 델리 프라이(레이첼 맥아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사건의 취재를 밟아나간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크가 번번히 무산되거나 박대 당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취재과정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는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지적인 묘미를 더한다. 영화의 중추는 분명 거대한 집단의 이기에 대항하는 개인의 윤리적 저항을 곧잘 이야기하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이다. 음모론에 갇힌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어지는 결말 직전, 영화는 진실의 맹점을 자각하고 왜곡된 진실의 남은 한 꺼풀마저 벗겨내며 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정의를 위해서지만 정의에 대한 집념은 때로 진실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까지 진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정의라고 믿어지는 부분조차도 의심해야 한다. <플레이>는 거대한 자본의 알력과 권력의 위협에 대항해 사선을 넘어서까지 결백한 진실을 얻어내려는 기자의 직업윤리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찌라시가 득세하고 가십이 넘쳐나는 시대에 완전한 진실을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기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종을 울린다.
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예술을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붓을, 혀를, 돈을 재능처럼 부리는 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판이다. 그 재능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된다. 이는 도박처럼 위험하다. 그 재능을 걸고 ‘몰빵’하면 그 판 안에서 영생을 누리기도 하지만 무덤처럼 갇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 성패는 자신의 재능이 상대를 압도할만한 그릇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의 배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패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동 스캔들>은 붓과, 혀와, 돈을 자신의 패로 들거나 감춘 이들이 벌이는 판세의 경과를 지켜보는 영화다.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위작 논란에 빠진 작품을 감정하는 이강준(김래원)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미술복원가다. 좋은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복원가로 활동하지 않은 그는 도벽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세다. 미술계의 큰 손인 중개업자 배태진(엄정화)은 이강준의 특별한 처지를 이용해 안견의 ‘벽안도’복원작업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강준은 ‘벽안도’에 흥미를 보이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에겐 다른 구상이 있다. <인사동 스캔들>은 ‘벽안도’복원이라는 사건의 기능적 관찰보다도 그 사안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축전에 주력하는 영화다. ‘벽안도’복원에 착수하는 배태진과 이강준의 심리적 대립구도가 영화의 밑그림이 된다면 그 주변부에 산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채색을 돕는 다양한 염료와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와 이미지에 담긴 대용량의 정보들이 출력된다. ‘매치컷(match cut)’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전환 방식을 활용하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고 사연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출력하며 정보적 포만감을 발생시킨다. 복원과 복제가 의미를 달리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미술경매와 암거래 경매장이 교차하는 대비적 풍경은 <인사동 스캔들>의 장기에 가깝다. 미술품을 둘러싼 담합과 밀거래 등, 예술품이 유통되는 암투적 과정을 묘사하는 <인사동 스캔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실성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생소한 덕분에 특별한 풍경으로서 값어치가 있다. 특히 오래된 종이에 먹일 풀을 구하는 ‘세초’작업, ‘원접’과 ‘배접’을 나누는 ‘상박’, 선명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한 ‘회음수’등, 동양미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타짜>의 ‘밑장빼기’만큼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사실 <인사동 스캔들>은 <타짜>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다. 도박과 미술이란 소재는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너비가 벌어지는 느낌이지만 복원가를 ‘떼쟁이’로, 중개업자를 ‘장물쟁이’로 지칭하는 은어가 소통되는 미술계의 뒷면은 도박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세계처럼 연출되며 이런 노선이 <타짜>의 기시감을 부른다. 타짜의 손기술은 복제가와 복원가의 그림 재현 솜씨와 대응한다. 복제와 암시장거래가 만연하는 미술품 거래장면은 치열한 기싸움과 암수가 오가는 도박판과 유사한 단상을 부른다. 현란한 전환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이야기 형태도 낯이 익다. 캐릭터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지만 인물관계의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놓고 보자면 비슷한 선이 발견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타짜>가 활용하기 좋은 규격을 선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조건은 <인사동 스캔들>에 위작의 감정가를 매기고 싶게 만든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욕적이다.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를 풍요롭게 장식하나 종종 자신의 그릇을 지키기 위해 과한 경쟁을 벌이는 캐릭터들이 발견되고, 현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와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정보는 포만감을 넘어 폭식에 가까운 부담을 안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 이해력에 가깝다. 이야기의 총합을 이루는 태도는 물리적인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결과를 이루는 모든 과정이 계산적인 계획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예언을 가장한 우연을 방치하고 묵인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필연 같지만 그것을 보좌하는 우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이미지로 이뤄진 스토리를 다 따라잡는다 해도 의식 속에 침전된 의문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질 정서적 감흥이 기본적인 기대치의 수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의 대립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강준과 배태진의 대립구도는 기세로서 동등하다. 배우가 고민할만한 캐릭터의 디테일은 충분히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데서 균등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역할의 보조자, 즉 감독의 배려가 부족하다 탓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강준이 기능적인 능력을 전시해나가는 동안, 배태진을 수식할만한 역할의 기능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캐릭터의 외모와 대사를 통해 예측되는 잠재력만 발견될 뿐이다. 말미에 다다라서 두 인물은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의를 바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자와 악의를 품고 몰락하는 자로 나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설정 자체가 상대적인 편애를 발생시키기 좋은 조건이다. 캐릭터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건 선의의 승리라기 보단 불합리한 성취를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의 파괴가 아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그릇된 욕망을 대변하는 배태진의 배경은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결국 결말부에서 목적을 이룬 인물로부터 전해질 공감대가 깊게 자리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인사동 스캔들>은 분명 어떤 성과를 드러내는 영화다. <타짜>와 골격이 유사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물량공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느낌이고 문화적 국수주의를 어필하는 말미 즈음엔 <식객>보다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연까지 계산된 계획처럼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게 걸리지만 스토리 자체의 전후관계는 맥락 자체로선 앞뒤가 맞는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분명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하지만 역시나 과욕이 문제다. 다양한 색을 입혔지만 저마다 색이 번지는 느낌이다. “서양화는 베끼는 게 어렵고, 동양화는 살리는 게 어렵다.”는 대사처럼, ‘자질은 살리는 게 어렵고, 과욕은 죽이는 게 어렵다’.
공무원 지상주의가 대한민국 20대를 고시라는 무덤에 매장해버린 세태 속에서 <7급 공무원>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한 예감을 부른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코미디, 그것이 진리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첩보행위 도중에도, 지상과 수상을 넘나드는 추격전 도중에도, 긴박한 육박전이 동원되는 액션 도중에도, 어김없이 다리에 힘 풀릴만한 엇박자가 연출된다. 진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해프닝을 일삼는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엔 안중 없는 대사의 합은 매번 웃음을 안겨주고야 만다.
안수아(김하늘)는 국가 비밀정보요원이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처지인 덕분에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무(?)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으로 애인인 이재준(강지환)의 오해를 사고 결국 이별 통보까지 받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여전히 공무를 수행 중이던 안수아는 이재준과 재회하고 구타로 회포를 푼다. <7급 공무원>은 액션물이나 형사물, 심지어 첩보물의 외피를 한쪽씩 걸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로맨틱코미디다. 그리고 그 로맨틱코미디 안에서도 로맨틱보단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다. <7급 공무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위해 모든 요소를 복무시키는 영화다.
전체적인 맥락만 놓고 보자면 <7급 공무원>은 조악한 영화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득할만한 내러티브는 종종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시퀀스 전체를 관통할만한 유기적인 맥락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그릇을 시야에서 가려버릴 정도로 뻔뻔하게 눈에 띄는 장기가 그 안에 담겨있다.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들은 <7급 공무원>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일급요원들이다. 새침하듯 억척스런 안수아와 소심하듯 열정적인 이재준을 연기하는 김하늘과 강지환은 나름대로 그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펼친다. 또한 두 주연이 이루는 합의 빈틈을 메우거나 역할의 반사적 기능에 충실한 덕에 효과를 증폭시키는 조연들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준의 상관 원석은 웃음의 자율신경이라 명명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배후 인물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국제적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다. 그들은 고성능 장비를 소지하거나 첨단 추적 기기를 통한 지원을 얻는다. 사실 영화 속 ‘7급 공무원’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과학수사대와 경찰특공대라는 절대명사까지 동원한다 해도 영화 속에서 ‘첩보’란 단어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의 범주를 통해 예상되는 스케일과 괴리감을 부른다. 드레스를 입은 채 수상제트스키를 타고 범인들을 쫓는 안수지의 추격전에서 시작되는 <7급 공무원>은 작게는 고화질 위장캠을 비롯한 첨단 첩보 장비로 무장한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외형부터, 크게는 스파이물이라는 소재 자체의 성격까지, 모든 것들이 한국적이라고 부르기엔 괴리감을 형성할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 괴리감은 <7급 공무원>의 선택적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지향점이 그 영화적 현실을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시킬 요량과 무관함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만약 일련의 이미지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첩보물 형태의 오락영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은 분명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읽히는 영화다. 반대로 그 동경심 자체를 역공으로 착취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케일을 흉내 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묘사한 사례들을 대한민국에 적용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7급 공무원>의 핵심은 시트콤에 가까운 에피소드를 순발력 있게 이어가며 강세를 유지하는 코미디다. 공격할만한 허점이 많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조직된 진영이라기 보단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웃음들이 순간을 지배한다. 물론 객석에서 일어서게 될 즈음엔 영화의 첫 장면이 가물가물함을 느낄지 모른다. 어떤 관객은 뒤늦게 이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두더라도 2시간 정도는 분명 낄낄거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7급 공무원>은 욕설과 구타라는 가학적 폭력을 코미디라고 착각하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유연한 캐릭터와 합이 적절한 대사를 통해 웃음을 전달하는 건전한 오락영화란 점에서 장르적 성취를 인정할만하다. 어쩌면 코미디라는 기능성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7급 공무원>을 선택할 관객에게 이런 긴 설명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대사로 치자면,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랄까.
<Duplicity>라는 원제처럼 <더블 스파이>는 시종일관 ‘표리부동’한 정체를 유지하는 캐릭터들의 심리전이다. 각각 ‘MI6’와 ‘CIA’근무경력이 있는 전직 국가요원 레이(클라이브 오웬)와 클레이(줄리아 로버츠)는 현재 대기업 산업스파이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두바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구면이지만 초면처럼 낯선 인사를 반복적으로 주고 받아오곤 했다. 마치 정해진 대사처럼 대화를 나누고, 정해진 배역처럼 마주치고 헤어졌다. 첫 만남을 묘사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로 5년 뒤로 점프 컷, 그리고 그 중간중간의 서사를 플래쉬백하는 영화의 속내를 읽기란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저 두 사람만큼이나.
2003년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더블 스파이>는 첩보물의 예감을 부르지만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동서진영의 이념적 대립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본’시리즈의 각본가이자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인 토니 길로이의 이름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런 예감쯤은 애초에 지닐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아남은 첩보원이 자신을 폐기하려는 국가에 대항하던 스토리나 기업의 비윤리적 노폐물을 청소하던 로펌 변호사의 양심적 결심을 묘사한 이야기는 거대한 반윤리에 맞서는 개인 윤리의 승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더블 스파이>는 앞선 사례들처럼 비범한 야심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는 어떤 본질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하지 않는다. '제이슨 본'과 '마이클 클레이튼'이 개인의 본질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역류했던 것과 달리 레이와 클레이는 개인의 욕망에 삶을 복무시킨다. 반윤리적 질서 속에서 몰락한 개인의 가치를 복권하기 위한 고행을 감내했던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의 남녀는 사유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껍데기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한다. 상대를 속이는 동시에 상대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연출된 거짓처럼 인식시키며 철저하게 위장된 삶을 살아간다. 5년의 너비를 확보한 서사는 그 간격을 오가며 두 사람의 진심을 끊임없이 캐묻고 덮는다.
관객에게 있어서 <더블 스파이>는 두 사람의 진심을 추적하는 게임과 같다. 스파이를 소재로 두고 있지만 첩보물과 거리를 둔 <더블 스파이>는 경쾌한 범죄영화의 외형에 로맨틱코미디의 정서를 함양한다. 물론 그 모든 형태와 정서를 포괄하는 스토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부르는 미궁처럼 설계됐다. 하지만 ‘본’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해법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듯 군더더기 없는 결말은 탁월하다. 줄충한 스토리 설계자로서 토니 길로이의 능력은 <더블 스파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다만 미로 같은 심리를 헤매는 과정이 온전히 매력적이라고 떠받들기엔 걸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더블 스파이>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관객은 예측 불가능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끊임없이 그 진심을 의심하면서 반복적인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수집하고 배열해나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수고와 노력에 비해 결말이 주는 보상은 충분한 위안이 될 만큼 비범한 것이 아니기에 허무에 시달리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컷어웨이 방식의 장면 전환 역시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권태로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더블 스파이>는 분명 뛰어난 스토리 그 자체를 핵심에 두고 다양한 장점을 장착해나가는 영화다. 클라이브 오웬과 줄리아 로버츠의 앙상블은 진심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의 모호한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절묘한 호흡을 선사한다. 로맨스적 감수성과 대결 구도의 긴장감까지 아우르는 캐릭터 수행 능력은 이야기를 위한 훌륭한 보호색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대사를 차단한 채 경쾌한 배경음과 슬로모션을 통해 연출한 오프닝 시퀀스의 난투극은 고조된 감정을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도 한껏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연출한다. 마치 춤을 추듯 멱살을 잡고 팔을 휘두르다 이내 바닥에 뒤엉키는 톰 윌킨슨과 폴 지아매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섬세하게 포착된다.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씬이지만 그 씬의 독자적인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더블 스파이>에 등장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산업스파이들은 삶의 본질보단 물질적 수단으로서의 일상에 속박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인과 닮았다. 결국 모든 작전은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봉착하고 결과적으론 물질적 실리가 없는 승패가 구성된다. 물론 그 뒤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건 패자들의 실체 없는 허무다.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껍데기 같은 일상에 복무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한방을 계획하는 산업스파이들의 위장된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토니 길로이는 결국 게임의 윤리를 빌미로 막대한 이윤을 부과하지 않는다. 오락적 자질을 뽐내는 동시에 작가의 가치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토니 길로이의 양심은 결코 변질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두리라. 완벽한 결말만큼 계산도 철저하다.
세련된 사무실과 억척스런 생선가게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여성의 일상이 대조군을 이루듯 차례로 스쳐 지난다. 사실 두 여자는 어머니의 부음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자매지간이다. 그러나 자매는 가까이 누워도 마주보지 않는다. 명주(공효진)와 동생 명은(신민아)은 배다른 자매라서 인지 닮은 구석도 없지만 성격도 판이하다. 그래서인지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감지된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두 자매의 갈등과 화해를 이루는 로드무비다.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는 동선만큼이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서사도 부지런하다. 명은의 친부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두 자매의 관계에 얽힌 비화가 한 꺼풀씩 드러낸다. 그와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도 좁혀진다. 갈등 뒤, 화해를 이루는 과정은 그 형태만으로 진부하지만 영화는 이를 상쇄할 만한 진심을 연출한다. 세대를 넘어 복잡한 가정사 속에 놓인 여성들의 갈등과 화해는 한 걸음씩 조용히 이뤄진다. 다만 그 끝에 놓인 파격적인 결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맥락을 변질시키는 대목은 아니지만 영화가 기존에 이루던 정서를 전복시킬만한 파괴력을 지닌 탓에 반감을 살 여지가 발생한다. 캐릭터의 균형마저도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다. 물론 흥미로운 사안이며 존중될만한 문제제기로서의 가치가 있다. 다만 그 여파에 대한 호불호가 영화 자체의 잔향을 날려버릴 만큼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물론 말미까지 호연을 유지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 논란과 무관하게 만족스럽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상훈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유일하게 삶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목을 조르고 손목을 긋고 싶은 혈연의 증거다. 손목의 핏줄을 잘라서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혈연이라는 원한이 그의 몸 속을 돌고 돈다. <똥파리>는 모든 이의 혐오를 살만한 존재의 외피를 넘어 내면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영화다. 그 안엔 어떠한 위로나 염원이 없다. 그저 최대한 진심에 접근해갈 뿐이다. 상훈의 진심을 추적하는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것과 같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컷들은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배출한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굴며 주변에 자리한 구성원의 모든 것을 흔들고 부순다. 그 폭력의 중심에서 자라난 또 다른 수컷들은 그 삶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폭력을 재생산하고 잠재적인 잉태를 부른다. 결국 맞는 자도, 때린 자도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삶이 걸쳐있는 영역 전체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삶은 지속된다. 연희(김꽃비)는 유일하게 상훈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전히 체감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다. 상훈이 연희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연희와 상훈은 서로에게 있어서 출구와 같다. 아버지와 남동생 영재(이환)와 함께 살아가는 연희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고립된 신세다. 상훈은 해소되지 못하는 폭력의 징후에 감금되어 지독한 증오를 통해 삶을 지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빈정거리는 욕설로 이뤄지는 대사는 때때로 농담과 같은 언어적 유희가 되어 관객의 웃음을 야기시키지만 이를 담보로 거리감을 좁힌 관객을 곧바로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 방치해버린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끼고 뺨을 얻어맞은 채 눈을 부릅뜰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뺨을 얻어맞은 쪽도 하나같이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 폭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공유해야 한다. 그 과정은 실로 절망적이다. 때때로 어떤 가능성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가장 지독한 폭력을 구사하던 대상이 몰락하는 방식이 발견될 뿐이다. 폭력을 구사하던 육신의 주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질 뿐, 폭력은 계승되고 유지된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영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똥파리>는 희망적인 영화다. 절망을 관통하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이 가능할 때 <똥파리>는 완전한 100%의 절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단지 전세대의 폭력을 증오하는 것으로, 혹은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단절하는 것으로선 그 부조리를 끊을 수 없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 폭력의 기저를 살피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신이 부정하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켜선 안 된다. <똥파리>를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둔갑시키는 이 세태를 고민해야 한다. 가난을 비극으로 치환하고 가정을 폭력의 도가니로 변질시키는 건 그저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증오를 통해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증오를 배출하는 혐오의 덩어리로 몰락할 뿐이다. 실상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영화 밖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 속에서 가족은 살아간다. 그 안에 ‘똥파리’들이 자라나자신만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실상 자신이 폭력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았을 때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
정체불명의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엔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 숫자들은 인류에게 찾아올 재앙을 예언하는 암호와 같다. 1959년 메사추세츠의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묻었던 타임캡슐로부터 50년 만에 발견된 종이엔 지난 5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을 예언한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그 외의 숫자들이다. 지난 50년 간 발생했던 재앙을 지목하는 숫자들 외에 다가올 재앙을 가리키는 숫자들이 있다는 것. 다가올 재앙의 정체를 반신반의하는 사이 끔찍한 예감은 실재가 된다. 재앙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예언이 작동한다.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대립적인 관계에 놓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통해 서로를 마주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 근거가 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그 결과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없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을 때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보다도 무기력하다. 특히나 그것이 거대한 재앙이라 할 땐 더더욱 참담할 뿐이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을 알게 된 인간이 그 앞에서 체감해야 할 스스로의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처럼 시작되는 영화는 종말론에 다다른다. 지적인 추리를 요구하는 척하지만 결과적으론 종교적 성찰에 가깝다. 어쩌면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영화와 판이한 방식의 블록버스터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는 이들의 운명을 그린다. 예언서는 재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안이 아니라 그 재난이 부를 거대한 화를 미리 각오하게 만드는 선언과 같다. 그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재난은 어느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의 태도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과학적 이론부터 지적인 추론, 그리고 장황한 스토리까지, <노잉>은 수많은 정보를 다룬다. 그만큼 <노잉>은 관객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좋은 영화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를 발췌하는 건 딱히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정보는 때때로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탓이다. 그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정보를 수집할 필요 없이 스토리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쳐 보내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영화는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실현하지 못할 것 같은 결과를 영화적 관성을 밀어붙여 끝내 이루고야 만다.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쓰고 있지만 철학서마냥 진지한 사유를 요구한다. 압도적으로 끔찍한 결말의 영상은 대단한 스펙터클을 완전한 비극으로 절감하게 만든다.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으로 체험할만한 영상이라 말하기엔 단연 비극적이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물음을 얻는다. 스스로의 멸망을 통해서 대안이 발생한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어려운 물음이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우린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세계의 멸망과 함께 죽어 없어질 운명에 처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노잉>은 그 거대한 이미지를 동원해 대단히 절박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똑똑해지는 것보다도 현명해진다는 건 실로 어렵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엄적 고민이란 점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의 가치란 희귀하여 값진 것이다. 그만큼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다.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 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대비적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탐구로 맞닿아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을 근거로 둔다 해도 그 결과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지다. <노잉>은 그 결과값에 대한 이야기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란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재앙 앞에 섰을 때에 해당된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이 그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종말론으로 종착하며, 지식을 동원하던 추리는 성찰을 도모하는 영험으로 나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다소 당황스럽겠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블록버스터와 다른 방식으로 숭고함을 묘사한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닌 죽음을 각오하는 자들의 운명을 그린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그 모든 것이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쓴 철학입문서처럼 깊은 사유를 부른다. 물론 압도적인 영상은 끔찍할 정도의 스펙터클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광경을 마냥 체험하기란 어렵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세계를 목도한다. 자신의 멸망을 통해서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역시나 어려운 물음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오늘날에 있어서 현명한 물음이기도 하다.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인 것이다.
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김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김병희는 막 생을 끊으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삶을 포기하는 시도가 그저 처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막 벽에 못을 박고 노끈을 묶어 자신의 목을 조일 고리를 만들었고 설마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던 차였다. 그리고 결심의 순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그 중요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녀가 등장했다. 거짓말처럼, 불쑥 찾아와 남의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미스럽게 그의 결단을 또 한차례 꺾어버린다. 이수강과 김병희의 만남은 생소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급격히 틀어버린 혹은 다시 제자리로 튕겨버린 우연은 그토록 현실감 없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엽기적이라 느껴질 만큼 기막힌 방식으로.
현재를 축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나열되는 과거는 김병희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재구성되는 시점과 이수강의 과거를 플래쉬백하는 시점으로 나뉜다. 현재에서 파생된 병렬 구조의 과거가 나란히 배열된다. 두 사연의 간격은 동떨어진 것처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현재를 떠받드는 궁극적 인과의 실마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집>은 그 사연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 사연이 무엇을 가리키며 시작되는지, 강한 호기심을 부르는 영화다. 모든 호기심의 축은 이수강이란 인물에게서 시작된다. 그녀의 정체를 비롯한 모든 행위는 물음표를 소환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수강의 사연이 큰 테두리라면 김병희의 사연은 핵심에 가깝다. 관객이 <우리집>을 통해 머금게 될 호기심은 입체적이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두 인물에게 걸쳐지는 의문은 사실상 영화 내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보좌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삶엔 어떠한 연관도 없다. 단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처럼 다가온 진실로 인해 한 순간 좌초된 삶을 맞이한 병희와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관계의 결렬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물로 몰락한 수강은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결과적으로 그 만남은 지독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거와 공모는 필연처럼 이뤄진다. 그 기이한 연대는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사연들이 감정적 동의를 구축하고 이 모든 총합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덧씌운다.
정체불명의 해프닝처럼 시작된 사연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벗겨지며 사연의 실체에 접근할 때 얕은 호기심은 점차 깊은 연민으로 번진다. <우리집>은 분명 비극적인 사연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는 담담하며 때때로 역설적인 유머를 장착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해학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영화다. 그 죽음엔 어떤 불행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복구시킨다. 게다가 한 여자의 오랜 착각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독한 간섭이거나 악몽이기도 하지만 실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실이란 점에서 연민을 부르고 한편으론 위안을 준다. 수강의 과거를 모두 벗겨낸 이야기는 핵심적으로 병희의 사연을 벗기며 핵심을 들어선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지를 되새겨버린 남자의 인생을 좌초시킨 근본을 비로소 고백한다.
지나친 우연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아닌 사연에 감화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놓인 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통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필연은 어쩌면 우연을 쌓아 올린 결과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집>은 첫인상이 낯설어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비극에 갇힌 이가 누군가의 담담한 비극을 마주한 뒤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실상 부조리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할만하다. 사실상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병희와 수강의 태도가 겉보기와 무관하게 너비를 벌린 까닭이기도 하다.스토킹과 납치, 자살미수로 거칠게 포장된 사연이 너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설적으로 미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연민까지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집>은 특별한 사연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연의 형태는 여전히 비극에 가깝지만 그 비극의 중심에 놓인 자들은 죽음으로서, 혹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물음엔 답이 없다. 그건 그저 그랬기 때문일 뿐이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필연이라는 게 어차피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엽기적으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비극은 비극을 구출하고 미련 없이 소진된다. 게다가 영화는 노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일방적인 동정의 여지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현실을 과감히 묘사함으로서 대안의 의지를 촉구한다. 정치적 주장이나 투쟁이 아닌 시선의 견지 자체로 하나의 쟁점을 마련한다. 이는 분명 공정한 시선이라 그만큼 깊은 배려다.
오랜만에 특별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강혜정의 캐릭터에 대한 반가움도, 번거로운 과제나 다름없는 1인칭 나레이션을 탁월하게 소화한 박희순의 대단한 소화력도 <우리집>을 보좌하는 훌륭한 일원이다. 무엇보다도 엽기적이라 할만한 사연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감수성을 야기시키는 <우리집>은 황수아 감독의 데뷔작이란 점에서 분명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