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예정됐던 8시가 조금 넘어서 오프닝 게스트인 태양의 공연이 시작됐다. ‘기도’와 ‘나만 바라봐’를 불렀는데 무대 연출에 어느 정도 능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곡의 절반이상을 립싱크로 잡아먹는 라이브는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 물론 여성 팬들은 엄청난 소리를 질렀지만. 라이브 연주가 아닌 MR이라 음향도 썩 좋지 않았다. 뭐 그저 오프닝 게스트일 뿐이었다. 흥을 돋우기엔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저 1집 솔로 가수일 뿐이다. 물론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에 어폐가 있을 듯. 이것이 불만스러운 문장으로 보인다면 그저 오해요. 허허.
태양의 공연이 끝나고 30분에 시작될 예정이던 알리샤 키스의 공연은 역시나 지체됐다. 내한 공연은 언제나 30분 정도 늦게 시작하는 게 관례라는 걸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물론 실내는 살짝 더웠고, 스탠딩 좌석은 살짝 술렁였다. 8시 45분 즈음 스태프로 보이는 외국인 2명이 무대에 나와서 관객에게 파도타기를 유도했지만 그다지 큰 호응은 없었다.
9시 즈음,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자리를 잡은 세션들의 연주가 시작됐고 관객석은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알리샤 키스의 등장! 엄청난 환호와 함께 메인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음향에 대한 큰 결함은 없었다. 잠실실내체육관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괜찮은 사운드를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알리샤 키스의 보컬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게다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녀를 본다는 것 자체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뭐 별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Intro와 중간 Interlude를 제외한 총 14곡의 셋리스트, 그리고 2곡의 앵콜은 1시간 30여분을 꽉 채웠다. 셋리스트는 올해 발표한 세 번째 정식앨범 ‘As I am’에서 가장 많은 7곡이 선곡됐고, 두 번째 앨범인 ‘The diary of Alicia Keys’에서 5곡, 데뷔앨범인 ‘Songs in a minor’에서 3곡, 그리고 Unplugged앨범에 수록됐던 Unbreakable과 어셔(Usher)의 앨범에 수록된 듀엣곡 My boo로 채워졌다. 확실한 건, 스튜디오 앨범보다 라이브에서의 보컬이 더욱 폭발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 소울풀(soulful)한 보컬링이란 막연한 단어의 의미가 체감됐다. 관객들의 호응도에 따른 무대의 리액션도 상당히 열성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는 공연이었다. 국내 공연장의 열악함을 염두에 둔다면 현지에서 공수한 장비와 세션의 능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할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리샤 키스의 실력과 무대매너는 가히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기에 탁월했다라 말할 수 밖에.
공연의 말미에 다다를수록 열기가 뜨거웠다. 셋리스트가 진행될수록 공연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는 인상이었다. 특히 스탠딩석에서 볼 수 있었다는 건 꽤나 큰 수확이다. 상당히 대규모의 스탠딩석이 확보된 것이 아님에도 나름 무대와 가까운 곳에서 치이지 않고 여유 있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것도 알리샤 키스의 공연을 말이다! 특히나 공연의 말미에 다다라서 두 번에 걸친 앵콜은 작위적(?)인 의도를 통해 관객의 열기를 끌어냈다. 가히 탁월한 무대매너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중요한 무대매너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No one과 If I ain’t got you로 이어진 두 번의 앵콜은 정말 엄청난 희열을 부여했다. 물론 무엇보다도 곡이 적절했다. 전체적인 셋리스트부터 세션의 수준, 보컬의 상태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아무래도 한가지 지적당해야 할 부분은 알리샤 키스의 공연과 무관하게 티켓의 가격이다. 듣보잡 공연 기획사가 비욘세로 반짝하더니 갑자기 돈독이 올랐는지 터무니 없는 가격을 책정했다. 3층 사이드의 A석 가격이 십만 원대라는 게 말이 되나? 잠실실내체육관에 한번이라도 와서 공연을 본 관객이라면 아무리 그 누가 온다 한들, 정신 줄을 놓지 않고서 그 자리에 십만 원의 거금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공연 당일, 인터파크에서 남은 좌석을 반값에 급매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결국 그럼 초반에 예매한 관객은 뭐가 되겠는가? 이런 식으론 악순환만 도모한다. 결국 제값을 받는 공연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근래 들어 대형뮤지션들의 내한이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이상한 외부적 잡음이 언젠가 발목을 잡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내에 내한하는 톱뮤지션들의 공연 티켓가는 한번쯤 심각하게 조정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뮤지션들은 죄가 없다. 터무니없는 가격 책정에 열 올리는 기획사들에 뇌구조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특히 입장하는 부근에 널린 초대권 암표상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딴 식으로 초대권 남발해서 헐값에 자리를 채울바에야 차라리 티켓가를 2~3만원 낮춰서 좀 더 실속을 챙기는 것도 그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관객도, 기획사도, 서로 윈-윈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일단 ‘젤리클 고양이’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뮤지컬 <캣츠>를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T.S.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읽었기 때문이야! 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겠죠. 하지만 이미 원작보다 유명해져 버린 뮤지컬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게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니겠죠?
사실 (인터미션 20분을 제한) 2시간 20분의 공연을 관람하고 나온다고 해도 저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아요. 젤리클 고양이를 아냐고 객석에 물음을 던지던 고양이들은 공연 내내 젤리클 고양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도 대답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젤리클 고양이가 어떤 고양이인지에 대한 고민 따위는 금새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고양이란 동물에 대한 호감 정도는 생길 수 있을 거에요. 중요한 건 사실 젤리클 고양이가 뭘까, 라는 고민 따윈 중요하지도 않다는 거죠. 공연을 보고 나서 저 물음표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쩌면 젤리클 고양이에 대해서 되묻는다는 건 내 이름의 연원을 캐묻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거에요. 젤리클 고양이는 말 그대로 ‘젤리클 고양이’일 뿐이라고요. 바로 당신이 2시간 20분 동안 주목하는 무대 위의 고양이들 말이죠.
젤리클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고양이의 모든 것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물론 그들은 고양이가 아니에요. 엄연히 사람이죠. 그걸 당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 <캣츠>의 묘미입니다. 고양이 분장을 하고, 꼬리를 달고, 고양이의 네발처럼 무릎과 팔로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고양이처럼 눈을 비비거나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죠. 그 모습은 실로 고양이처럼 앙증맞거나 도도하고 우아해서 놀라울 지경이에요. 그들은 철저하게 고양이처럼 굽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무대에서 뛰쳐내려와 객석 사이를 활보하곤 합니다. 공연이 시작할 때쯤, 무대 위로 슬금슬금 모여들던 고양이들에 집중하다 어느 순간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지 몰라요. 그들은 무대 뒤에서 튀어나오거나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뛰어내려와 당신을 바라보며 노래하기도 하죠. 만약 당신이 운좋은 관객이라면 자신을 선택한 고양이와 객석을 거닐게 되는 영광(!)도 누릴 수 있을 거에요. 물론 본인에게 모든 관객의 시선이 모이는 것쯤은 감안해야죠. 하지만 그 눈길에 어떤 부러움이 섞여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건 결코 나쁜 경험이 아니겠죠? 무엇보다도 최고의 팬서비스는 <캣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오리지널 넘버, ‘Memory’의 한 소절을 한국어로 부르기도 한다는 점이죠. 가히 감동적이에요.
현대무용에 기초한 군무와 독무는 절제된 세련미와 함께 화려한 동선을 자랑합니다. 호사스러운 볼거리임에 틀림없죠. <캣츠>는 연극적인 이야기 흐름보다는 화려한 안무와 흥겹거나 구슬픈 음악을 통해 뮤지컬의 묘미를 철저하게 증명하는 작품이에요. 사실 중심인물의 교체와 함께 단막적인 형식으로 치고 빠지는 <캣츠>의 내러티브 구조는 관객에게 친절한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동시에 몰입도가 상승하는 관객이라면 이 뮤지컬에 집중하기 힘들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요. 하지만 <캣츠>는 결코 허술한 뮤지컬이 아니에요. 앞에서 언급한 것과 연관이 있지만 <캣츠>의 이야기 구조가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되는 건 이유가 있어요. <캣츠>가 T.S.엘리엇의 시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집을 하나의 뮤지컬 형태로 완성함에 있어서 <캣츠>는 그 개별적 장르의 특성을 이야기 구조에 반영하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것이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스물아홉 마리 고양이들의 사연을 다채롭게 전달할 수 있는 현명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대 위를 누비는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개성이 넘쳐요. 당신이 평소에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그 취향을 다시 한번 재고해보고 싶을 거에요. 게다가 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들은 각각 무대 앞에 서서 관객들을 향해 자신들의 사연을 노래하곤 하죠. 그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고, 저마다 제 성격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 와중에 갈등과 충돌도 발생하지만 사랑과 우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펼치는 대장정의 궁극적인 주제는 고양이를 존중해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에요. 이렇게 매력적인 고양이가 존중 받을만하지 않나요? 라고 스스럼없이 묻는 그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낭만고양이임에 틀림없어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온화하며, 사나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앙증맞은, 그런 고양이라고요. 뮤지컬 <캣츠>는 당신에게 지혜로운 고양이를 만나기 위한 안내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 고양이 울음소리가 재수없다, 라는 편견을 지닌 당신이라면 한번쯤 그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어요. 적어도 이 젤리클 고양이들은 고양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동물인지 당신에게 새삼스럽게 각인시켜줄 만한 지혜로운 고양이임에 틀림없어요.
무기와 로봇으로 변신해서 관객을 현혹시키는 CG도 있지만 보호색을 띠고 배경으로 은둔해서 관객을 속이는 CG도 있다. 한국영화에서 CG가 눈에 띠지 않았던 건 주로 후자 쪽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이 이뤄지는 현장조건이 모든 걸 좌우하거나 카메라에 보여지는 것만이 영상의 모든 것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CG는 카메라에 걸리는 불필요한 배경들을 지우개처럼 지워버리거나 원하는 풍경을 능청스럽게 조합해버린다. 작년에 개봉된 <M>이 최소한의 세트 안에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상에서 다양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CG의 힘이다. 하나의 공간은 CG를 통해 다른 거리로 탈바꿈했고, 블루스크린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창 밖은 산홋빛 해변으로 환골탈태했다.
표현력의 확대는 다양한 컨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창작의 기반이 됐다. CG기술의 발전으로 영화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난 셈이다. “CG기술발전은 과거와 달리 이제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가 가능해졌다는 걸 제작자와 투자자들에게 깨우쳤다. CG기술이 컨텐츠의 다양성에 기여한 바가 있다.” ‘DTI픽쳐스’ 이수영 기획실장의 말대로 만약 CG가 없었다면 DTI픽쳐스가 <중천>을 통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기술상을 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태풍>의 스펙타클한 해상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세트장에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된 모형배는 CG작업을 거쳐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항해했다. 만약 CG가 없었다면 직접 바다로 나가 배를 침몰시켜야 했을 <태풍>은 투자자로부터 비웃음이나 살만한 과대망상이었을 것이다.
1. 이명세 감독 <M> 미장원 골목 촬영 원본 2. 배경합성을 위한 마스킹 작업
3. 매트 페인팅 작업 4. 결과물
실제로 영화가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다양한 장르가 개척됐고 더욱 효과적인 연출이 용이해졌다. 2007년 말, 사극에 판타지를 가미하며 새로운 장르적 시도를 하며 관심을 모았던 <태왕사신기>는 기존의 드라마들이 꾀하지 못했던 장르 개척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분명 국내CG기술의 기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시도였으며 동시에 기술영역의 확보가 창작범위의 확장으로 연결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DTI픽쳐스'의 현장 슈퍼바이저로 활약하는 류재환 감독은 이렇게 전한다. “영화인들이 CG를 공부해야 하듯 우리도 영화를 공부해야 한다. 실사촬영과 CG작업 중 어느 것이 비용과 노력 면에서 더 나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전반적으로 계산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장의 협조도 중요하다. 카메라 무빙을 비롯해 소스 촬영까지 CG작업을 위한 현장 스태프와 전반적인 협의가 필요하지만 CG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초창기 현장은 이런 요구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물론 요즘은 과거와 달리 CG의 필요성이 인식되는 만큼 협조적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예전에는 난이도가 높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액션 연출에도 CG는 힘을 발휘한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들을 피해가며 도로를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야수>의 초반 카체이싱은 순수 스턴트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CG에 빚진 결과다. CG가 그려 넣은 승용차 덕분에 오토바이에 탄 스턴트맨은 느리게 달려오는 자동차 몇 대를 유유히 피해 다니며 노고를 줄일 수 있었다. <무영검>의 수중격투씬과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빌딩경공술씬 역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CG는 와이어에 매달린 배우들의 액션 장면을 각각 물 속으로 잠수시키거나 공중으로 부양시켰다. 또한 잔인한 신체훼손 장면에서도 CG는 몸은 사리지 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육중한 폭발장면에 신체가 찢겨지는 인간을 겹쳐내는 CG로 전장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오래된 정원>에 출연한 배우 염정아도 CG덕을 봤다. CG가 머리카락을 가려준 덕분에 삭발투혼을 면한 것. CG는 배우의 사적인 인권마저 보호한다.
1. <아라한 장풍 대작전> Before 2. After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CG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제작비에 비해 비용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는 장면의 어려움은 통솔이 어렵고 실제 그 인원을 모두 모으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CG의 활용도는 꽤나 유용하다. 최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덴마크 결승전의 관중석을 가득 채우지 못한 엑스트라의 공백은 CG가 메웠다. 또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1.4후퇴 씬에서 등장했던 수만 명의 중공군 중 실제 엑스트라는 3백 명 남짓이었다. 남은 공백을 채울 1인 다역은 모두 CG가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CG는 복사와 편집의 기능을 한다. 현장에 동원된 인원을 촬영한 뒤 그것을 재배열해서 이어 붙이면 이는 결국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인파로 완성된다. 실제 현자에 있던 인물은 대규모 인파의 일부이며 동시에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제작비에 큰 영향을 주는 인건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CG작업이 단지 영화의 크랭크업 이후, 후반작업에만 관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의 제작팀을 제외하고 작품의 기획부터 개봉 직전까지 영화제작 전반에 참여하는 건 오로지 CG팀뿐이다. 요즘은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카메라의 구도를 대략적으로 그려 넣은 콘티를 3D영상으로 제작하는 ‘프리 비쥬얼(Pre-Visualization)’ 시스템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카메라와 캐릭터의 동선을 체크하고 그에 따른 구도를 미리 모니터하고, 이를 직접 테스트함으로서 실제 촬영시 나타날 수 있는 혼선을 줄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적용한 <청연>의 공중 비행씬은 당초 예상했던 3개월의 촬영기간을 단 11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오늘날 CG는 영화의 후방을 견인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전방까지 사수하고 있다.
블루스크린에 그리는 미래 영상의 청사진
미국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한국인 CG디렉터들의 활약은 국내CG기술에 대한 대외적 신뢰 구축에 이바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VFX회사인 ILM과 디지털 도메인에서 각각 ‘크리쳐 기술 전문가(Creature Technical Director)’로 활약하는 홍재철과 ‘디지털 아티스트(Lead Digital Artist)’로 활약하는 서명철, 표영일이 참여해 화제가 됐다. 그 밖에도 최근 <베오울프>에 참여한 소니픽쳐스이미지웍스의 정유진을 비롯해 적지 않은 인원들이 할리우드 현지에서 한국인력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근래에 몇몇 국내업체의 해외진출이 성사됐다는 고무적인 성과도 있었다. 현재 국내CG업체인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피’, ’풋티지’가 공동으로 이연걸과 성룡의 동반출연작인 <포비든 킹덤>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며 <태왕사신기>의 CG를 맡았던 ‘모팩 스튜디오’는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런드리 워리어>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것이 회사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내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을 가질 필요성도 있다. 수요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공급은 반대로 시장의 출입을 막는 법이다. 국내의 주먹구구식 관행과 달리 할리우드의 현장시스템은 계약서 두께부터 차이가 난다. 작업을 위한 스케줄을 보장하는 만큼 확실한 단계적 성과를 증명하길 요구하며 그것이 가능해야 장기적인 파트너쉽을 기대할만한 신뢰감을 구축할 수 있다. 파이가 적은 국내시장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해외시장은 필요조건에 가깝다. “<런드리 워리어>는 기존의 국내작업에 비해 세배 이상의 이윤과 네 배 이상의 작업기간이 확보된 만큼 예전 국내작업보다 좋은 퀄리티로 완성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또한 잉여자금을 R&D(연구개발비)에 재투자할 수 있어서 더욱 발전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모팩 스튜디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회사의 해외진출은 시장성의 확보와 함께 작업 환경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특히 최근 할리우드가 자국보다 비용대비효과가 큰 유럽과 아시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에 국내업체들의 충분한 대비가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우. 생. 순> Before After
Before After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는 작년에 유체 시뮬레이션 기술 연구를 통해 난이도가 높은 맥주 거품을 구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CG분야에서 국제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시그라프(SIGGRAGH) 2007’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관련 논문의 채택도 이뤄졌다. 외국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에 의지하면서도 고급기술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국내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 정책으로 주도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실적을 국내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상용화 방안의 실질적인 모색도 필요하다. 기술적 성과를 산업적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에 대한 산업적 논의가 좀 더 구체화될 필요성이 있다.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을 통해 자국회사인 ‘웨타 워크샵(WETA Workshop)’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건 투자의 기회비용이 창출할 수 있는 산업적 효과를 증명한다. 단기적인 작품의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기회 비용을 지불하는 투자가 산업의 근간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국내영상산업의 밑거름이 될 CG산업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춘 시도가 요구된다.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오퍼니지(Orphanage)’는 <괴물>을 통해 캐릭터CG의 경험치를 습득했다. 만약 그 노하우가 국내에 흡수될 수 있었다면 국내CG산업의 성장을 위한 양질의 밑거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괴물>은 작품의 개별적인 성과를 남겼지만 영화에서 시도된 특수효과 기술이 국내산업의 노하우로 흡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경험을 통한 노하우만큼 좋은 자산은 없다. 산업적인 보호도 여전히 미비하다. 국가적 지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공해 벤처 산업을 굴뚝 달린 제조업에 엮어 넣는 시대착오적 정책의 변화는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CG를 단순히 영상의 기술적 소품으로 생각하며 창의적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몰지각한 태도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use) 시대에서 CG기술의 발전은 영화뿐만 아니라 CF, 뮤직비디오, 게임을 포함한 영상분야의 파급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다양한 파트에 기술적 역량을 공급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해서 다양한 수익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10년 넘게 한국영화와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는 ‘인사이트 비쥬얼’의 강종익 대표가 그리는 CG산업의 청사진이다. 결국 CG산업은 국내영상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촉매로서 비전을 지닌다. 열악한 국내여건 속에서도 우직하게 토양을 일군 인력들의 땀을 먹고 국내CG기술은 오늘날까지 자라왔다.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창작에 참여하는 일원’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열정이야말로 영상산업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좋은 밑그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