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었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시사회가 끝나고 잠깐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서 있던
사실 그렇다. 일차적인 피해자는 나지만 이건 피해자 입장에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그 할머니가 남자의 분홍색에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건 그런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이며 그런 관성 속에서 파묻혀 지내온 세월 탓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뒤늦게 와서야 그것을 바로잡는다 한들, 이제 와선 늦은 일이다. 사실 중요한 건 내 입장이다. 내가 아니면 된 거다. 그들은 변할 수 없어도 나는 변할 수 있으므로 그런 말이 내게 와 닿는 충격을 잘 감내하고 내 다음세대에게 그런 이상한 상황을 물려주지 않으면 되는 거다. 세대차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다. 사회는 수시로 바뀌고 있으며 시간은 인간을 꼰대로 만든다. 집단적 규약, 질서, 법칙, 이런 제약들이 개개인의 융통성을 제한하고 집단으로서의 일방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런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관성적으로 주체적 자립을 거두긴 어려운 노릇이다.
중요한 건 나다. 상대의 허물을 보고 혀를 차는 자신은 얼마나 당당한 사람일 수 있는가를 가늠해야 한다. 얼마 전 <날아라 펭귄>에서도 이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을 닦달해서 학원에 보내는 어머니는 말한다. 요즘 엄마들 정말 문제야. 사실 본인도 문제다. 그리고 그건 단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를 부추기는 사회의 문제다. 모든 문제는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개인을 감싸는 사회의 테두리가 그것을 방조할 때 만연한다. 그 개개인은 그 사회적 의무에 기댈 필요가 있다. 시스템의 허술함을 탓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에게 이런 갈등을 야기시킨 사회에 따져 물을 이유가 있다. 어쨌든 난 여전히 종종 그 분홍색 셔츠를 입는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내 셔츠를 보고 눈 버렸다고 한들,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않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내 탓이 아니지 않나. 억울해하지 말자. 즐겁게 저항하자. 타인이 던져 준 스트레스에 얽매여 자신의 순간을 파괴하지 말자. 누군가의 삶에 켜켜이 묵어 내린 편견에 휘말리며 제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그리니 난 분홍색 셔츠를 입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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