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상훈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유일하게 삶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목을 조르고 손목을 긋고 싶은 혈연의 증거다. 손목의 핏줄을 잘라서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혈연이라는 원한이 그의 몸 속을 돌고 돈다. <똥파리>는 모든 이의 혐오를 살만한 존재의 외피를 넘어 내면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영화다. 그 안엔 어떠한 위로나 염원이 없다. 그저 최대한 진심에 접근해갈 뿐이다. 상훈의 진심을 추적하는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것과 같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컷들은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배출한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굴며 주변에 자리한 구성원의 모든 것을 흔들고 부순다. 그 폭력의 중심에서 자라난 또 다른 수컷들은 그 삶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폭력을 재생산하고 잠재적인 잉태를 부른다. 결국 맞는 자도, 때린 자도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삶이 걸쳐있는 영역 전체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삶은 지속된다. 연희(김꽃비)는 유일하게 상훈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전히 체감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다. 상훈이 연희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연희와 상훈은 서로에게 있어서 출구와 같다. 아버지와 남동생 영재(이환)와 함께 살아가는 연희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고립된 신세다. 상훈은 해소되지 못하는 폭력의 징후에 감금되어 지독한 증오를 통해 삶을 지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빈정거리는 욕설로 이뤄지는 대사는 때때로 농담과 같은 언어적 유희가 되어 관객의 웃음을 야기시키지만 이를 담보로 거리감을 좁힌 관객을 곧바로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 방치해버린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끼고 뺨을 얻어맞은 채 눈을 부릅뜰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뺨을 얻어맞은 쪽도 하나같이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 폭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공유해야 한다. 그 과정은 실로 절망적이다. 때때로 어떤 가능성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가장 지독한 폭력을 구사하던 대상이 몰락하는 방식이 발견될 뿐이다. 폭력을 구사하던 육신의 주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질 뿐, 폭력은 계승되고 유지된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영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똥파리>는 희망적인 영화다. 절망을 관통하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이 가능할 때 <똥파리>는 완전한 100%의 절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단지 전세대의 폭력을 증오하는 것으로, 혹은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단절하는 것으로선 그 부조리를 끊을 수 없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 폭력의 기저를 살피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신이 부정하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켜선 안 된다. <똥파리>를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둔갑시키는 이 세태를 고민해야 한다. 가난을 비극으로 치환하고 가정을 폭력의 도가니로 변질시키는 건 그저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증오를 통해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증오를 배출하는 혐오의 덩어리로 몰락할 뿐이다. 실상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영화 밖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 속에서 가족은 살아간다. 그 안에 ‘똥파리’들이 자라나자신만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실상 자신이 폭력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았을 때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
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김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김병희는 막 생을 끊으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삶을 포기하는 시도가 그저 처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막 벽에 못을 박고 노끈을 묶어 자신의 목을 조일 고리를 만들었고 설마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던 차였다. 그리고 결심의 순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그 중요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녀가 등장했다. 거짓말처럼, 불쑥 찾아와 남의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미스럽게 그의 결단을 또 한차례 꺾어버린다. 이수강과 김병희의 만남은 생소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급격히 틀어버린 혹은 다시 제자리로 튕겨버린 우연은 그토록 현실감 없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엽기적이라 느껴질 만큼 기막힌 방식으로.
현재를 축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나열되는 과거는 김병희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재구성되는 시점과 이수강의 과거를 플래쉬백하는 시점으로 나뉜다. 현재에서 파생된 병렬 구조의 과거가 나란히 배열된다. 두 사연의 간격은 동떨어진 것처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현재를 떠받드는 궁극적 인과의 실마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집>은 그 사연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 사연이 무엇을 가리키며 시작되는지, 강한 호기심을 부르는 영화다. 모든 호기심의 축은 이수강이란 인물에게서 시작된다. 그녀의 정체를 비롯한 모든 행위는 물음표를 소환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수강의 사연이 큰 테두리라면 김병희의 사연은 핵심에 가깝다. 관객이 <우리집>을 통해 머금게 될 호기심은 입체적이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두 인물에게 걸쳐지는 의문은 사실상 영화 내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보좌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삶엔 어떠한 연관도 없다. 단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처럼 다가온 진실로 인해 한 순간 좌초된 삶을 맞이한 병희와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관계의 결렬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물로 몰락한 수강은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결과적으로 그 만남은 지독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거와 공모는 필연처럼 이뤄진다. 그 기이한 연대는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사연들이 감정적 동의를 구축하고 이 모든 총합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덧씌운다.
정체불명의 해프닝처럼 시작된 사연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벗겨지며 사연의 실체에 접근할 때 얕은 호기심은 점차 깊은 연민으로 번진다. <우리집>은 분명 비극적인 사연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는 담담하며 때때로 역설적인 유머를 장착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해학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영화다. 그 죽음엔 어떤 불행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복구시킨다. 게다가 한 여자의 오랜 착각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독한 간섭이거나 악몽이기도 하지만 실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실이란 점에서 연민을 부르고 한편으론 위안을 준다. 수강의 과거를 모두 벗겨낸 이야기는 핵심적으로 병희의 사연을 벗기며 핵심을 들어선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지를 되새겨버린 남자의 인생을 좌초시킨 근본을 비로소 고백한다.
지나친 우연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아닌 사연에 감화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놓인 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통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필연은 어쩌면 우연을 쌓아 올린 결과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집>은 첫인상이 낯설어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비극에 갇힌 이가 누군가의 담담한 비극을 마주한 뒤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실상 부조리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할만하다. 사실상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병희와 수강의 태도가 겉보기와 무관하게 너비를 벌린 까닭이기도 하다.스토킹과 납치, 자살미수로 거칠게 포장된 사연이 너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설적으로 미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연민까지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집>은 특별한 사연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연의 형태는 여전히 비극에 가깝지만 그 비극의 중심에 놓인 자들은 죽음으로서, 혹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물음엔 답이 없다. 그건 그저 그랬기 때문일 뿐이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필연이라는 게 어차피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엽기적으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비극은 비극을 구출하고 미련 없이 소진된다. 게다가 영화는 노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일방적인 동정의 여지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현실을 과감히 묘사함으로서 대안의 의지를 촉구한다. 정치적 주장이나 투쟁이 아닌 시선의 견지 자체로 하나의 쟁점을 마련한다. 이는 분명 공정한 시선이라 그만큼 깊은 배려다.
오랜만에 특별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강혜정의 캐릭터에 대한 반가움도, 번거로운 과제나 다름없는 1인칭 나레이션을 탁월하게 소화한 박희순의 대단한 소화력도 <우리집>을 보좌하는 훌륭한 일원이다. 무엇보다도 엽기적이라 할만한 사연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감수성을 야기시키는 <우리집>은 황수아 감독의 데뷔작이란 점에서 분명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성과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멱살을 잡힌 채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멀쩡하게 일어서서 눈감지 못하는 쪽도 하나같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어느 곳보다도 현실적인 풍경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이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는 사이 점차 부서지고 파편화되는 가족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낯익은 풍경이다. 지독한 폭력에 노출된 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부조리의 자궁에서 또 다른 증오를 잉태한 채 자라고 엉킨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광경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절망을 관통하고 멈춰선 채 응시한다. 통증을 각성시키고 폭력을 환기시킴으로써 파묻어 부정하던 폐부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유도한다. 따뜻한 위안이기 보단 거친 윽박을 지른다. 당황스럽겠지만 객석에서 일어날 때 즈음엔 진통과 함께 밀려드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구상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은 결국 영화 밖에 있다. 똥파리는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똥 무더기다. 혐오의 대상이 사라져도 혐오의 세계는 남는다. 그걸 걷어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영화가 아닌 관객이다. 바로 당신이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진동하는 핸드헬드와 거친 입자가 부유하는 캠버전 영상은 영화의 정서를 관통하기까지의 추이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실험적 기제처럼 보인다.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근본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언니인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킴(앤 헤서웨이)은 대사를 앞둔 집안의 공기를 불안정하게 덥힌다. 킴과 가족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을 부수기 위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담긴 거친 언어가 쏟아진다.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흔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반목 속에서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혈연이라는 구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존재만으로 폭력처럼 행사되던 가족이란 속박이 서로를 위한 배려로 거듭난다. 단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가족은 오랜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의 카메라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볼 따름이다. 단지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앤 헤서웨이의 놀라운 연기는 그 의미를 돈독히 다지는 강력한 지원군이다.
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
다음 영화가 또 돈과 관련된 영화다. <십억>말이지. 내가 믿는 구석이 있다면 그 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개봉해서 <작전>의 이미지를 순화시켜줄 수 있을 거란 점이다.
<십억>도 신인 감독 영화더라. <작전>의 이호재 감독에 이어 계속 신인 감독과 작업하게 됐다.
내가 언제부터 신인 감독 따지는 배우였다고 그런 말씀을. (웃음)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신인감독들이 나를 찾아줬고 그 분들의 시나리오에 믿음이 가니까 했던 거지. 내가 조금 풀렸다고 해서 신인 감독하고 안 하는 것도 웃기잖아.
예전 인터뷰를 보니까 송강호 씨가 ‘시나리오보다 감독이 더 중요하다’라고,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고 했던데.
첫 대본을 받고 감독님을 만나 뵈면 그 분의 인품이나 철학, 생각이라던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100% 옳은 건 아니겠지만 일단 그 분이 생각하는 지점이 드러났을 때 판단이 서면 같이 하는 거지.
<작전>을 선택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 건가?
일단 주식이란 소재가 국내영화에선 다루지 않았던 거라서 신선했다. 우리나라엔 정치, 경제, 사회를 다룬 시사성 있는 영화가 많이 드물잖아. 소위 감독이라고 불리는, 철학이 있는 분들이 예술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사회 풍자를 비롯해 여러 다양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많이 부족하다 느끼던 차였다. 상업영화, 오락영화지만 요즘처럼 경제도 어려운데 주식이란 소재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어 보이더라.
주식 관련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일반인에겐 어려운 용어지만 관객 입장에서 그냥 한 귀로 흘리듯 들어도 상관없게 완성됐기 때문에 문제는 없을 거 같다. 내가 주식을 모르는 입장에서 대본을 이해 못할 정도라면 할 필요가 없겠지. 예술영화도 아니고, 오락영화인데 대중과 소통이 쉽게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안 했을 거다. 내가 주식을 전혀 모름에도 캐릭터를 따라가다 보니까 이건 해도 괜찮겠다 싶더라. 화투를 몰라도 <타짜>를 재미있게 본 것처럼. 나는 진짜 화투로 숫자 세는 것도 모르는데 (영화에서) 땡이 된다고 하니까 땡인가 보다, 이러면서 봤으니까. <작전>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주식을 사려고 하는지, 팔려고 하는지, 이것만 알면 대충 맞춰가는 거지.
최근 했던 인터뷰가 인터넷에 많던데 또 조폭 연기를 했다는 질문이 많더라. 그런데 사실 조폭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닌데 다들 그렇게 묻는 거 보면 조폭이 획일적인 이미지란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런 질문이 본인의 이미지를 신경 쓰게 만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그렇지. 기자간담회 때도 일부로 조폭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런 선입견이 생길까 봐. 조폭이란 어감 자체가 좀 그렇지. 미국은 마피아잖아. 좀 그럴 듯하지만 조폭은 어감도 안 좋고. 예전에 조폭 코미디가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또 조폭이야’, 이런 선입견이 나부터도 있는데 관객들은 오죽하겠어. 그래서 웬만하면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님들이 자꾸 꺼내시니까. 그게 다른 캐릭터란 걸 얘기하기 위해서 참여하는 편이지.
<작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악역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실 악역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을 거 같다. 캐릭터도 좀 더 입체적인 경우가 많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다만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저 착하고 사랑 받는 역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번에 센 걸 했으니까 다음엔 유한걸 해서 나의 정신세계를 바꿔보고 연기적인 마인드도 변화시켜보자 이런 거지, 관객에게 사랑 받고 싶으니까 이런 역을 하자, 이런 건 아닌 거 같다.
악역 이미지로 국한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본 적은 없나?
한번 이런 걸 하면 다시는 안 시킬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가족>을 했는데 그런 역이 더 많이 들어오더라. 그때 내가 잘 참은 거 같다. 돈도 많이 필요했고 힘들었지만 그때 좀 늦게 가더라도 참자고 했던 게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왜냐면 그때 참고 <러브토크>를 했으니까. <러브토크>의 지석이 너무 답답하고 평범한 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역이더라. 그 뒤로 여러 작품을 하면서 배우로서 다양한 층을 지닐 수 있게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센 역할로 흥행이 돼서 저 사람은 센 연기를 하는 친구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보는 사람 마음이니 어쩔 수 없지. (웃음) 물론 센 역할이 더 쉽게 각인되는 면도 있고.
황종구는 종종 상황을 유머스럽게 만든다. 진지한 상황을 빗나가게 하는 행위를 한다고 할까.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의 캐릭터도 그랬을까?
그렇게 웃기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내가 그런 상황 자체에서 ‘척’을 많이 하는 인물로 설정했기 때문이지. 품위 없는 사람이 품위 있는 척을 하니까 그로 인해 생기는 에피소드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이 쓰신 대본을 봐도 그렇게 폼 잡고 멋있는 척하는 놈이 ‘이 신발 봐, 이게 얼만지 알아?’ 이런 대사를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더 좀스럽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진짜 멋스러운 여유가 있고 품위 있게 보여야 격은 살리면서 재미있는 코미디가 나올 것 같더라. 다만 우리끼린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NG도 내고 재미있게 찍었지만 관객에게 통할까 싶은 걱정은 계속 있었지.
이번에도 나름 센 역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머를 삽입한 건 그 세기를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된 게 아닐까.
캐릭터상 이런 게 가미되면 좋겠다 싶었지. <작전>은 상업영화인만큼 웃음이 있다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의도했다기 보단 이게 잘 어우러져 공감대가 형성이 되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 물론 이 캐릭터 자체가 센 느낌을 주는 장면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독특한 유머가 가미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부분은 있었다.
본인이 염두를 둔 캐릭터가 감독이 생각했던 캐릭터와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촬영 들어가고 나서 싸우는 건 이미 늦은 거지. 그땐 감독을 따라가는 게 맞다. 그리고 촬영하기 전에 먼저 컨셉이 섰을 때,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대충 내가 어떤 연기를 했을 때 이 작품이랑 맞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는 이런 지점을 잡고 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도장 찍기 전에 그런 조율을 마치는 편이다. 이번에도 작품 수정고가 몇 편 나왔고 그걸 보면서 감독님한테 믿음이 생겼다. 사실 내 나름대로 연기 컨셉이 잡혀져 있는데 그게 내가 해왔던 그런 류의 연기가 아니라면 나에게도 모험인 셈이다. 이걸 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 계속 되물어 보고 되짚어보고 하는 편이지.
이호재 감독과 조율하는 과정은 순탄했나?
감독님도 내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만 감독님 스스로도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지점이 있었을 거다. 처음에 찍기 시작할 때, 내가 품위를 지키려 하고, 톤을 다운시키고, 깔고, 이렇게 가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할 거냐고 묻더라. 나는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도 지금 서서히 적립해가고 있는 건데. 그래서 지금 찍은 것까지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아니, 문제는 아니고요. 이렇게 쭉 가시진 않을 거죠?” 그러시더라. 감독님도 믿음은 있었지만 걱정이 많이 됐던 거지. 그래서 좀 기다려보라고, “나도 터지는 부분이 있고, 그럴 때 뭔가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지 않냐.” 그랬지. 그러다가 자동차에서 허리띠 풀러 주는, 그 장면을 4회 차에서 찍었는데 그때 이 톤으로 가면 되겠다, 라는 판단이 나도 섰고, 감독님도 만족하셨고, 그렇게 계속 갔지. 그리고 중반으로 가면서 유머를 조금씩 넣기 시작하니까 이젠 감독님이, “그쪽으로 너무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셔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지점을 간 뒤 번외로 내 걸 갑시다.” 제안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내 버전을 다시 갔다. 그 때 막 애드립도 넣었지. 현장 편집에서는 애드립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그런데 스튜디오 편집에선 내 애드립이 다 들어갔더라. 어느 정도 가다 보니까 여기선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가미를 한 거였다.
그 연기에 의심이 생긴 적은 없었나. 차라리 경험이 적은 배우는,
그냥 마구 밀어붙이는데.
반대로 경험이 많으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경험에 비춰서 자기 연기에 대해 종종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반에 걱정이나 의심을 많이 하게 되지만 처음 생각했던 게 맞는 거라 생각하면서 자신을 추스른다. 내가 그려놓은 상이 있으니까 거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돼야지, 이걸 다른 방향으로 틀면 내가 무너지고, 이 작품 자체가 무너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내가 그려본 상에 자신이 있을 때 도장을 찍는다고 얘기했듯이 그걸 다시 되짚고 되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새롭게 노선을 바꿨다가 나도 망치고 작품도 망칠 수 있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내가 적립해놨던 게 맞을 거라고, 다시 자신감을 100% 채운 뒤 설정을 적립하지.
<작전>에서 그런 의심의 지점이 있었나? 초반에 조금 그랬다. 어느 시점부터 현장 편집을 조금씩 확인하는 편인데, 중반 정도 가니까 클라이맥스로 가는 도중에 좀 정적으로 흐르더라. 여기선 뭔가 보여줘서 긴장감을 살려야 될 거 같은데 내가 생각한 컨셉대로 가버리면 다운될 거 같은 거다. 그래서 노선을 바꿨지. 감독님한테, “이쪽은 좀 세게 가야 될 거 같지 않아요? 여기서 분위기를 잡아주지 않으면 너무 정적으로 가기 때문에 뒤에서 손해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가게 됐다. 내가 생각한 뼈대는 그대로 가되 조금씩 수정을 가했지.
영화를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구분하는 것처럼 연극도 마찬가지다. 목화에서 나와서 대중적인 연극에 몇 편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했던 연기는 분명 목화 시절과 다른 연기였던 거 같다. 좀 더 계산적인 연기랄까. 영화에선 그런 계산적인 연기가 더욱 요구되지 않나.
모든 영화에서 계산적으로 연기한다. 물론 어떤 캐릭터를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인간 박희순이 더 많이 보여지는 영화가 있긴 하다. 일상적인 연기를 할 땐 내가 많이 보여지겠지만 나와 동떨어진 캐릭터를 만들 땐 내가 아닌 부분이 보여지겠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나 <러브토크>에서의 평상시 모습은 박희순이 많이 보이는 거 같다. 만약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한다면 정말 인간 박희순이 나오지 않을까. 진짜 술을 먹이신다는데, 내 술버릇도 나오겠지. (웃음) 반대로 캐릭터를 만들고 설정을 붙여서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예전에 목화 연극을 12년 동안 하다 보니까 답답함과 염증이 생겼지만 같은 공간, 같은 연출, 같은 배우들 사이에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목화에서 나와서 <록키호러쇼>나 <그리스>, <아트>나 <클로저>를 거친 건 목화와는 다른 연기 톤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마다 다른 연기 톤을 가지고 나를 더 보여주느냐, 아니면 나와 다른 걸 가미하느냐라는 연기 플랜이 생기는 거지.
캐릭터에 인공적인 느낌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관건이 아닐까 싶다.
그것 자체가 모험일 순 있지. 캐릭터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인공적이다, 내지는 과장됐다, 이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큰 숙제지. 황종구란 역할을 만들면서도 계속 이걸 혹시 받아들이지 못할까, 라는 걱정도 하고 의심하면서 만들어 나갔다. 편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설정을 하지만 현장에서도 편해지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이에 대해 공부하는 편이다.
김무열은 요즘 무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배우다. 무대 출신 후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일단 기본기가 탄탄하지만 이 친구의 장점은 성실성이다. 준비를 많이 하고 분석 능력이 탁월하더라. 보통 스스로 배역을 준비해올 때 겉모습에 많이 치우쳐서 오히려 진짜 자신의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정말 많은 준비나 설정을 해왔더라. 촬영장 안에서 자꾸 없어진다. 찾아보면 한쪽에서 연습하고 있더라. 기본기가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성실성을 갖고 있다는 게 후배지만 믿음직스러웠다.
함께 호흡을 맞추는 씬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의 장점도 있었을 거 같은데. 각자 설정해가는 부분이 있잖아. 나는 이렇게 가게 되면 이 친구 또한 자기대로 해석하지. 연극을 경험했던 친구니까 어떤 설정을 맞춰감에 있어서 열려있는 측면이 있었다. 이 친구와 연습을 많이 했었다. 자동차에 담배 비벼 끄는 씬도 감독님이 설정만 해준 걸 우리끼리 다른 데서 연습해서 완성했다. 그런 재미가 있었지.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너 이렇게 해, 이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할건데 넌 어떻게 할래, 이럴 때 남자들끼리라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거든. 물론 현장 분위기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고. 내가 중간에 연극을 한번 보러 갔었다. 워낙 유명하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같이 작업한 친구니까 보러 갔지. 나는 탁구경기를 보는 줄 알았다. 모든 여자관객들이 (고개를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김무열만 쫓아다니는 거야, 김무열만. (웃음) 근데 진짜 그럴 만하더라. 이 친구는 룩(look) 자체도 괜찮고, 연기적인 설정이나 감성이 너무 좋더라. 정말 진심으로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나중에 농담 삼아 얘기했지. 네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배려를 안 했을 텐데. (웃음)
극단 목화에서 12년간 있었으니 오태석 선생님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 혹시 본인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은 없나?
그런 건 없는데 이번에 상 받았을 때 직접 음성이 왔더라. “너 상받았다며? 축하해! 파이팅!”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지.
목화를 나올 때만 해도 많은 기분을 느꼈을 텐데, 지금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진짜 기적 같지. 그 12년 동안 연극 판에 있었으면서 영화 판에 가서 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내가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잘 적응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요즘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게 정말 기적 같다.
<세븐데이즈>가 출세작이 됐다.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한 작품으로 유명세가 생겼다.
그 당시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답변을 한 적 있는데, 나는 꾸준하게 많은 캐릭터를 변신해왔는데 그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대중적으로 흥행이 하나 되니까 그걸로 나를 평가한다는 게 자꾸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그 작품 하나로 인해서 내 전작들을 찾아본다는 거지. 재평가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더라.
<작전> 포스터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난 현상수배범인 줄 알았어. (웃음) 사실 그건 권력들 사이에 있는 개미를 표현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뿐이지. 내가 뭐 잘 나서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이 크게 나오지만, 그런 것뿐이지.
하지만 분명 그 포스터엔 이제 박희순이란 배우의 이름과 얼굴이 영화의 홍보에 득이 된다는 계산도 내포된 셈이다.
용하나 민정이는 충분히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영화를 이끌어 갈만한 자격이 있는 친구들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많이 약하기 때문에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인터뷰도 많이 하고, 심지어 <해피투게더>까지 나가고. (웃음) 나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홍보를 위해서도 노력하지.
자신의 인지도가 넓어지고 있다는 걸 의식한 적은 없나?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영향력을 느낀다거나.
거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한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품이나 캐릭터의 색깔과 다른 걸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게 더 우선이지, 내가 원톱이냐, 투톱이냐, 전면에 서느냐, 후면에 서느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부분에 부담을 느끼고 쫓아가다 보면 다치게 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내 인생은 수직상승형이 아니라 계단형이다. 그런 걸 일부로 거부하거나 역행할 필요는 없겠지만 쫓아가진 않으려 한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연기에 매진했다. 연기가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박희순이란 사람은 재미도 없고, 모험을 즐기지도 않고, 활동적이거나 사회적이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콤플렉스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 내가 작품에 임할 땐 자신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도 더 모험을 즐기고, 새로운 걸 추구하고, 스스로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안하고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지, 나이를 먹으면 변해야 되지 않나, 이런 자책을 하게 되는데 연기하는 동안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유머스러움까지, 많은 변화가 있다. 박희순은 30%밖에 없는 거 같고, 70%를 배우로서 사는 거 같다. 그 70%가 있기 때문에 박희순이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사는데 의미가 생기는 거 같다. 그런데 이 30%는 정말 의미가 없는 거 같다. 내 삶에서 배우가 돼서 연기를 하고 영화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는 70%가 내 인생이고, 내 호흡이며,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이고, 직업인 거 같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연기를 하게 한 건가?
그냥 막연하게 시작했지, 뚜렷한 계기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지. 날 보여주는데 익숙하지 않고, 교우관계도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지만 무대에 섰을 때 조명을 받으면 내가 가면을 쓴다고 생각하고 연기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안에서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도피나 회피이거나 미지의 세계였던 거 같아.
연기라는 것이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란 말처럼 들린다. 반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 순간에는 그만큼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웃음) 연애를 하면 달라질지 모르지. 사실 요즘 유난히 더 그러는 거 같다. 애인도 없이 한참 바쁘게 연기만 하고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면서 느껴지는 허전함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런 당신이 연기를 하겠다고 할 때 부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아이러니한 게 아무런 끼도 보여드린 게 없었는데 어머니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거다. 항상 연극을 하는데 있어서, 너는 잘 될 것이다, 너는 잘되길 빈다, 기도한다, 이런 얘기를 하셨지, 때려 치고 다른 걸 해라,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남들이 그런 얘길 하면, ‘너나 잘해!’ 이런 식이었으니까. (웃음) 그건 참 고마운 일이지.
장가가라는 말씀은 안 하시나.
하지. 그러니까 주위에 여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웃음) 모든 기자들에게 내가 지금 밑밥을 깔아놓고 있다.
나도 궁한 사람이라서. (웃음) 이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
못 알아본다. (웃음) 일단 내가 알아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인기를 얻게 돼서 좋은 건 작품이 다양하게 들어와서 내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는 거다. 내가 영화를 10작품 이상 했지만 사회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웃음) 나로선 다행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작품 속의 나와 박희순은 너무 많은 차이가 나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너무 다르니까 대입을 못 시키는 거 같아. 그리고 설사 알아본다 하더라도 내가 장동건도 아닌데 뭐, 별로 신경이나 쓰겠어? (웃음)
배우로서의 이미지 외의 모습들은 잘 드러나지 않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에 <해피투게더>, <놀러와>에 출연했던 것 때문에 약간 걱정된다. 아, 이젠 정말 그런 거 안 하려고. (웃음)
홍보 때문에 예능프로에 출연했나 보다. 어땠나?
죽는 줄 알았지. 진짜 목욕탕에서 찍더라. 그 좁은 데서 카메라 열대 늘어놓고 너 웃겨봐 그러는데 나가고 싶더라. (웃음)
사실 요즘 예능프로들이 좀 공격적이지 않나. 막말도 넘치고. 그래서 어려운 건 없었나.
그렇지. 다만 그냥 자기들끼리 하면 좋겠는데 자꾸 시키니까. 난 좀 내보내줬으면 좋겠는데. (웃음) 질문에 있는 얘기만 물어보면 준비를 해갈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박명수 씨한테 엄청 혼났지. (웃음)
예능도 그 나름대로의 연기가 필요하다.
‘테이프 갈고 하겠습니다’ 하면서 잠깐 쉬면 힘들어서 늘어져있다가 다시 시작하면 왁자지껄하다. 연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 같더라. 박명수 씨도 녹화 중엔 막 큰소리치더니 다 끝나니까 다가와서, ‘팬입니다.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이러더라.
연기로 치자면 감정에 몰입해서 연기하다가 컷이 된 후 그 감정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연기에 몰입했다가 빠져 나오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인가?
감정씬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경우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개봉작 중에선 가장 힘들었던 게 <남극일기>였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일 년 내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힘든 작품은 <우리 집에 왜 왔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10키로나 살을 뺐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아내를 잃고 계속 자살을 시도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아픔을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또 코믹한 요소도 있다. 연극할 때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비극은 희극처럼 희극은 비극처럼 연기해라, 라는 말이 있다. 코미디가 전반에 흐르고 있는데 그걸 비극처럼 하니까 당사자는 괴롭지. 저예산이다 보니까 24시간 넘게 촬영을 강행하기도 하고, 그 두 달이 지옥 같다고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
연기하는 감정에 따라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있나 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통닭 먹고 우는 씬 때문에 하루 종일 감정씬을 했었다. 와이프와 재회하고 헤어지는데 눈물이 계속 나더라. 그렇게 눈물을 닦고 또 통닭 먹는 씬을 찍는데 죽겠더라. 답답하고 너무 힘들었지. 그 씬 찍고 나서 커트를 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30분을 대성통곡했다. 내가 그렇게 소리 내서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엉대며 울었다. 밤에 다른 씬을 찍어야 되는데 눈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하고 몇 시간 있다가 찍을 정도였지.
그렇게 괴로운 경험을 겪게 되면 몰입하는데 있어서 반사적으로 움츠려 들진 않던가?
그렇진 않다. 그런 건 배우로서, 연기에 있어서 그렇게 몰입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 거부하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연기가 흐르는 데로 배우는 가는 거지.
시장이 좁다 보니 그만큼 선택의 폭도 줄어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을 거다. 시도가 가능한 장르가 제한된 만큼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쉬움이 많다. 스릴러 하나 잘되니 계속 스릴러가 나오고, 내년엔 <과속스캔들>따라 간다는 얘기도 있고. 다들 천편일률적으로 이때다 싶으면 몰리고, 그런 점에 대한 답답함이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나는 거꾸로 가는 거 같다. 작년에 한참 스릴러를 많이 찍었지만 <작전>이 새로운 시도처럼 보여서 한 거고, 그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도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겠단 판단이었다. 스릴러에 원톱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세븐데이즈>보다 재미있거나 새로운 게 없더라. 형사역할만 들어오는데 굳이 그런 걸 또 하면서 새로운 걸 찾을 수 있는 노력을 허비할 바에야 정말 새롭고 독특한 걸 해보는 게 낫겠다 생각하던 차에 <우리집에 왜 왔니>가 들어왔고, 이건 내가 보여주지 못한 독특한 색깔이 있기 때문에 저예산이든, 원톱이든, 투톱이든 상관없이 하겠다고 했지. 그건 내 선택의 문제지, 나에 대한 강요는 없으니까. 우리 ‘열음’(소속사)이 나한테 많이 맡겨주는 편이다. (웃음)
혹시 외국영화보면서 자신이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가 있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처럼, 그런 역할을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적은 있었지.
할리우드로 가야겠는데. (웃음) 혹시 다시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올해 말에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스케줄 때문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계속 들어와서.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가.
아직 구체화된 건 아니고 2년 전부터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가 계속 끊이지 않고 들어오니까. 조금 더 미뤘다가 할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본인의 인지도가 연극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무슨 기여를 한다거나 그런 건 생각이 없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 가수가 공연에서 라이브로 관객과 만나서 신나게 한판 놀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무대가 그리운 거다.
작년에 <연극열전2>가 꽤나 화제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시도는 좋고 박수도 쳐줄 수 있다. 다만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무대로 데려와서 예전에 대박난 작품들을 우려먹기처럼 다시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창작극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 안에 그 배우들이 존재한다면 모르겠지만 배우들을 상품화시켜서 좋은 작품에 끼워 맞추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로 연극을 대중화시킨다는 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거지, 지속적으로 연극을 발전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완전히 작업이 끝난 건가?
이미 <작전>이전에 끝났다.
개봉이 지연된 셈인데, 사실 이런 경험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그렇고, <바보>도 그렇고, <세븐 데이즈>도 우여곡절이 있었고. 예전에 스스로 곗돈 찾는 기분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던데, (웃음) 배우로서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볼 기회가 미뤄진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지금 했던 작품과 다른 작품을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를 선택하는 놈인데 그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지는 사태가 자꾸 발생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운명인 거 같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는 게 운명이듯이 이 작품의 개봉이 엉키는 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세븐 데이즈>끝나고 작년에 <우리 집에 왜 왔니>와 <작전>을 찍었는데 그게 올해로 넘어왔다. 그래서 원래 작년 1년이 비는 셈이었는데 그 자리에 <바보>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왔으니까 오히려 다양성 면에서 잘 됐다 싶은 면도 있었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어쨌든 벌써 다음 영화에 캐스팅됐고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기회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연기 외적으로 짊어지는 부담도 늘어난 바는 없나.
한 작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고, 내 스스로 새로움을 찾기 위한 모험도 있지만 어차피 난 늦었거든. (웃음) 그러니 더 서두르고 말고 할건 없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대로 천천히 가면 된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린다는 건 사치지. 작품하고 있는 것만해도 행복하니까.
남현수의 ‘오후의 뮤직’을 진행하는 라디오 DJ 남현수(차태현)는 청취율 1위를 달리는 인기 DJ다. 한때 가수로서 흥망을 맛보기도 했지만 라디오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좋은 집만큼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명예도 얻었고 바람기를 발휘할(?) 기회도 얻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청취자들과의 전화연결을 통해 고민을 상담해주곤 한다. 물론 진심을 다하는 척할 뿐, 뒤에서는 대화내용으로 농담을 일삼는다. 사연을 소개할 때마다 청취율을 상승시키는 황정남(박보영)의 아빠 찾기 사연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날, 미모의 애인을 집에서 기다리던 남현수 앞에 황정남이 나타난다.
소재만을 살펴보자면 <과속스캔들>은 어떤 오해나 편견을 발생시키기 좋을 만한 여지가 가득하다. 오래 전 혼전 관계로 잉태된 2세가 찾아온다거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그리고 화합, 아동 캐릭터를 이용한 웃음과 감동 등등, 영화가 끌어 모은 소재들은 예상 범위가 인지되기 좋은 수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동시에 어떤 착취에 대한 오해를 형성시킬만한 여지도 농후하다. 영화 역시 그 예상범위를 특별히 벗어날만한 파격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속스캔들>은 충분히 즐길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족드라마로 완성됐다. 뻔한 듯한 게 아니라 뻔한데도 즐길만한 구석이 충분하다.
중학교 시절 옆집 누나와 맺었던 첫경험(!)이 22살 먹은 딸로 인해 되살아난다는 설정이나 그 딸이 역시나 6세 손자까지 달고 온 미혼모라는 설정은 겉보기만으로도 상당한 무리수다. 무리수를 헤쳐나가는 돌파력은 캐릭터에서 발생한다. 고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배우나 신선한 이미지를 어필하기 좋은 신인배우나 존재 자체가 귀여움으로 인식되는 아역배우나 각자의 장점을 적절하게 발휘하고 있다. 캐릭터의 앙상블은 헐겁거나 과하다 싶을 만한 허구적 설정과 맥락을 제자리에 안착시킨다. 그리고 드라마가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과속스캔들>은 기막힌 사연에서 시작되는 가족드라마이자 어느 남자와 소녀의 성장드라마다.
전복적인 상황과 캐릭터를 앞세운 유머를 통해 재치를 발휘하며 시작되는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러 통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고 이내 극복을 통한 대통합 감동모드로 돌입한다. 전반부의 위트가 오밀조밀한 재미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후반부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긴 하다. 그럼에도 캐릭터의 매력은 후반부까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며 제 능력을 다한다. 지구력 약한 드라마를 순발력 있는 유머로 극복한다. 이는 <과속스캔들>의 오락적 성과를 인정하게 만들 정도의 자질이 있다. 특히 남현수의 6살 손자 황기동을 연기하는 아역 왕석현의 능수능란한 표정연기가 이에 대단한 공헌을 보인다.
한편, 외부적으로 큰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음에도 <미녀는 괴로워>가 연상된다. 시사성을 지닌 소재가 보편적인 감정을 야기시키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두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대의 속성이 캐릭터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무대에 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공통적으로 노래를 잘 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음악감상의 즐거움은 서브적인 묘미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