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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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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로부터 밤섬에서 8회 차 촬영만 허가받았다고 들었다.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아낸다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다.
연출부와 제작부에서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강이란 강은 모두 다 뒤졌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중요했다. 모래사장과 모래사장 뒤로 울창한 숲이 있어야 되며 촬영여건을 따지자면 섬보단 차 진입이 가능한 강변이어야 됐다. 그리고 여자의 시점샷을 고려하자면 어느 정도 망원렌즈를 붙여서 찍을 수 있는 거리감이 확보되는 조건도 중요했고 해변이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안됐다. 그런 조건들을 찾기 위해서 정말 강이란 강은 다 뒤져서 충주의 주 촬영지를 찾아냈다.
사실 어떤 장면은 밤섬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밤섬 자체의 생태를 설명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람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는 밤섬의 모습들이 더 중요했다. 김씨는 밤섬에 처음으로 떨어진 경계의 대상이므로 처음엔 낯선 이방인을 거부하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의 숲처럼 보이다가 김씨가 점차 밤섬을 자기 공간으로 인식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이루고 보금자리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숲의 이미지가 연출돼야 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숲의 이미지에 따라서 각자 다른 숲으로 돌아가면서 촬영을 했다. 밤섬 자체를 모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이 남자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공간의 필요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천만 인구의 대도시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표류를 한다. 이 독특한 소재의 시작이 밤섬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미지였을지도 모를 밤섬에 대한 목격을 관찰로 진전시키고 허구의 살을 붙여 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보는 순간, ‘아, 저기 섬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그 어둑한 섬이 딱 보아하니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무인도 같아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곳이 있다라는 건 얼핏 알았지만 그게 여기라는 건 그때 보고 알았지. 공간 자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밤섬 주변에 서강대교에 허락된 가로등을 제외하곤 일체 조명을 못하거든. 그래서 그 주변이 굉장히 어둡다. 그런데 그 백(back)엔 화려한 시티라이트가 있고, 그 가운데 어둡게 자리잡은 섬이라니 공간의 재미가 오더라. 지금 저기에 한 남자가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들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가 그 남자를 발견했을까, 혹은 발견했더라도 그 남자의 구조신호를 인지했을까, 아니면 그냥 사람이 있네 이러다 말고 지나갔을까. 이런 무심한 속도감 속에서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감, 그 관계성, 그런 생각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남아있더라.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결국 밤섬을 이야기의 척추로 삼아 캐릭터의 뼈대를 잇고 다양한 설정의 살을 붙여나간 셈이다. 그리고 남자 김씨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몰락한 루저가 밤섬이란 모티브와 연결되는 첫 번째 지점이었나.
글쎄, 분석적이고 전략적으로 ‘루저를 등장시켜야지’ 이렇게 접근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인 거 같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가 루저라면 루저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으니까 내가 잘 아는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항변하고 싶어지는 거고. 내가 우울하거나 그렇게 이해될 존재는 아니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일 뿐이지만 다른 친구들이 보기엔 번듯한 직장도 없고, 돈도 있다가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뭐 저렇게 무책임하게 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볼 거란 말이지. 그렇게 내 스스로를 항변하고자 하는 이해심을 조금 더 발휘하면 이해되지 않을 존재가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 아님에도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자살을 실제로 해보지 않았음에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이 사람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존재라고.
현실적인 세태를 대변할만한 설정이 등장한다. 특히 친절하게 채무액을 알려주는 대출업체의 코멘트, 서비스 가입을 권하는 끈질긴 이동통신사 상담원 안내와 같이 겉보기에 친절하지만 진심이 인색한 세태에 대한 은유가 노골적이다.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조난 문자를 관심 있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징표처럼 떠오른 이미지다. 그게 그런 전화통화나 유람선에서 손 흔드는 장면과 같은 에피소드로 이어진 거다. 표류라고 하지만 표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말하자면 먹고 살고 생존하는 이야기 후에 찾아오는 어떤 욕망으로부터의 고립감. 그런데 그런 얘기는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같은 훌륭한 작품들 속에서 이미 했고, 내가 그걸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그런 마당이니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 안에서 써야 하니까 일단 내 자신이나 가족들, 친구들과 같이 내 주변 사람들이 안고 가는 고민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되더라. 빚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도 많고, 내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너무 낯설다 생각했던 경험도 있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확장된 셈이다.
처음 남자 김씨가 섬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섬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에 안착하려면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과정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사실 남자가 섬을 못 나오는 상황보단 그 섬에 남는 게 중요하다. 이 남자가 그 섬을 못 나오는 게 아니라고 관객들도 이해할 거라고 믿었고. 이 섬에서 남고자 하는 욕망이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에 맞닿을 수도 있는 지점이 있겠다고 봤으니까. 만약 수영을 잘해서 이 섬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섬에 남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시작된 계기는 거기서부터라고 봤고. 다만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20여분의 상황을 코미디로 끌고 갈 수 있겠다고 봤다. “정말 저게 말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서 부담없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섬에 남아야지, 하는 순간부터 저 사람의 입장과 욕망에 대해 관객들도 동의해주고 출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밤섬이 모티브고 시작점이라면 여자 김씨와 그녀의 방은 추가적으로 나열된 캐릭터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두 가지 정도의 전제를 갖고 시작했다. 이게 단순한 표류 영화가 아니라 요즘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과 이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일단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등장한 다음엔 표류의 고립감을 어느 순간 희석시키기 보단 그 고립감을 안으로 더 파고 들 수 있는 상황의 존재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히끼꼬모리를 떠올리게 됐다. 다만 그게 표류기라는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전제가 된 건 아니다. 일단 이야기 목표가 표류가 아닌 관계성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캐릭터였던 거다.
모티브가 밤섬이고 그 밤섬에서 살아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니 결과적으로 여자 김씨는 이야기의 입체감을 배려하기 위해 후발적으로 창작된 캐릭터와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처음부터 관계성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봤으니까 두 인물로 시작했다. 표류하게 된 남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아이템들을 떠올렸지만 태생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해서 출발했기 때문에 후생적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장편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으로서 얼마만큼 표현하고 얼마만큼 포기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늘 있었다. 연출가로서 보는 즐거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협소한 상황을 이래저래 돌파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이 생기더라. 단지 내가 생각하는 사실감을 통해 나의 만족을 얻고자 하면 그게 보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연이 보존된 밤섬의 원시적 풍경과 달리 여자 김씨의 방은 인공적이고 현대적이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공간이 대비적으로 설계됐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석적으로 뭔가를 계획할 인간은 못 된다. 물론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지만 보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서 대차점이나 대비를 이루는 상황의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목표해서 반대개념이나 대비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던 건 아니다. 그보단 기본 목표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요소가 떠올랐고, 그런 만큼 이런 대차점에 주목해서 포장이 가능했던 거지. 다만 그 공간이 서로에게 의미를 준다는 지점이 중요했다. 특히 여자는 이 남자를 발견하면서 컴퓨터의 윈도우가 아니라 진짜 윈도우를 보고 이를 통해서 가상의 친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대를 보게 된다는 기본 개념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블루로 가득했던 방이 창이 열려서 옐로우로, 따뜻한 빛의 공간으로 변하고 이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색도 살아나고 공간이 생기를 얻는 과정으로 변하는 게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소품들이 저마다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야기에 입체감을 이룬다. 다양한 소품들이 영화를 패셔너블하게 꾸미는 것만 같다. 마치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품을 수집한 것 같다. (웃음)
일단 패셔너블하다라는 것에 동의할 순 없다. (웃음) 어쨌든 나는 소품 하나하나가 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놓칠 수 없는 것들이라 봤다. 궁극적으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 사소해서 별로 눈 여겨 보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본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말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오히려 그런 게 부족한 사람들이 그 안의 어떤 의미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태프들에게도 소품 하나하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세심하게 놓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당부했고, 그렇게 코미디를 위한 배치나 활용도에서 신경 써나간 측면이 있다.
사소한 소품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디테일한 느낌이었다.
표류 얘기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핵심은 이 사람이 뭘 이용해서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더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공간감을 유지하면서도 소품의 본래 활용 방식을 뒤집는 전복의 방식을 활용하면 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커피잔을 가리키며) 사실 이 커피잔은 우리에게 커피를 담는 용도로서 규정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단정을 물려받지만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이걸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규정된 물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쓰레기를 갖고 처음부터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소품적으로 작용했으면 했다. 버려진 오리배를 갖고 집으로 활용한다거나 뚜껑을 갖고 선글라스를 만들어 쓴다던가, 자신만의 생활방식으로 모든 걸 다 재조립하는 진화의 단계랄까.
관객 입장에서 의미를 수집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소품을 마련하는 입방에서도 그런 수집의 단계가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직업시나리오 작가로서 어떤 정확한 이야기 설계가 되지 않고선 작업을 하지 않았었다. 포스트잇을 쫙 붙이고 모든 과정을 나열하는 방식이었지.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지난 작품을 보면서 조금 반성한 결과랄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훨씬 더 생기와 생동감이 넘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갑갑하게 찍었구나 느꼈거든. 그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그런 방식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싶더라. 그래서 이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단초들만 갖고 무작정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인물이 가는 대로 받아 적어야 되겠다, 그런 결심으로 시작했고 그냥 남자 김씨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었다. 캐릭터와 일치된 상태에서 썼다고 할까. 그러니까 김씨의 절실함이 나의 절실함이었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니 물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어떻게 잡아야 할까, 그러면 포대기에 나무를 연결해서 해야지, 이런 김씨의 방법이 동시에 나의 방법이었으니까. 고기를 다 잡고 나면 또 무엇이 먹고 싶어지고 욕망하는 게 뭘까, 이런 욕망도 내 욕망이었다.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것도 순전히 이야기적 구성요소로 궁리한 게 아니라 내 욕망을 끌어온 거다. 그렇게 나와 일치된 김씨의 욕망을 그때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표류하듯이 따라간 결과인 셈이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야기를 똑똑하게 만든 셈일까. (웃음)
욕망이 사람을 똑똑히 만든다. (웃음) 어쨌든 이야기를 전진시키고 싶은 내 욕망이 수를 써내게 하더라.
그런데 여러 가지 음식이 정말 많은데 왜 자장면이었을까. 자장면이 어디든 배달되는 음식이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자장면을 원하니까, 내 욕망이 진짜 자장면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다 보니까 배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고. 그냥 정말 발상의 진전대로 이야기를 쓴 거다. 이야기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예를 들면 김씨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서 면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김씨가 한동안 방법을 못 찾을 땐 나도 방법을 못 찾았다. 이야기를 한달 동안 쓰지 못했다.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면을 어떻게 만드나, 미치겠네. 이런 김씨의 고민이 곧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김씨가 우연히 새똥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어느 순간 ‘똥이다!’라고 외치듯이 방법을 떠올렸고,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켜서 써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계획적인 방식으로 써나간 건 아니었다.
‘농심’에서 협찬 받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웃음) 사실 그런 상표명을 가릴 때 뭔가 실제적인 상표명이나 상호가 주는 리얼리티가 훼손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게 참 억울한 측면인데 PPL은 고사하고 허가를 받아야 되는 입장이었거든.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는 영화에 자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와 상표를 허가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더라. PPL얘기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 허가까지 받아가면서 써야 했던 건 다들 그 짜파게티의 맛을 아니까, 그 즉물감을 무시하거나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SK텔레콤’이라던지, ‘오뚜기’ 얼굴이라던지, ‘짜파게티’, 우리가 사는 공기 중의 일부분이라 말할 수 있는 그 물리감이 이야기를 받쳐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지.
밤섬에서 김씨가 살아가는 모습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렵과 채취에서 사냥으로 이어지고, 결국 농경사회로 진입한다. 이런 과정의 설계도 역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방식 안에서 단계적으로 착안된 건가?
그건 약간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코미디를 빌려 쓴 인류학 보고서의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왜냐면 김씨는 사회성을 다 내던지고 다시 밤섬에서 새롭게 사는 거니까 그러려면 자신만의 방식에서 비롯된 삶이 진화적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랬다. 작지만 다른 의미의 진화랄까. 먹을 것을 구하고, 욕망을 성취하고, 어떤 일에 보람을 느낀 다음의 욕망은 뭘까. 그 다음의 욕망은 결국 사람을 원하지 않을까. 이런 과정들이 일종의 진화에 가까운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도 예측은 있었다.
남자 김씨가 섬에 표류했을 때, 119에 신고하고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조를 요청한다. 부모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래서 그럴까. 그것도 내 욕망인데, (웃음) 내가 만약 자살했다가 실패해서 밤섬에 떨어졌다면 가족한테 전화할 거 같진 않거든. 걱정도 되실 테고, 내가 자살을 포기한 상태도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가족을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상태로 거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가족이 편한 상대가 아닐 수 있지 않나. 혹은 자신의 그런 상황을 알리고 싶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타인인 119를 통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본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119의 도움을 받고 밤섬에서 나가서 다시 자살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운 친구나 친척, 가족에게 자기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건 불편하지 않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동구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마지막 허들은 아버지다. <김씨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의 유년시절이 잠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여자 김씨는 온전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같은 집에 사는 부모와 완전히 단절돼서 살아간다. 폐쇄적인 가족 구조가 <김씨표류기>에서도 은연중에 감지된다.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그런 문제처럼 이해돼서 그런가 보다. 가깝지만 가깝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지긋지긋하게 계속 화해해야 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내가 조금 비뚤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고.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나 <김씨표류기>의 남자 김씨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이라 할만한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사회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라던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사회적 자살을 선택하는 남자니까. 하지만 정작 그 삶을 드러내는 방식은 비관과 거리가 멀다. 상황의 비극을 유희로 역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면 자살하려는 상황에서 변의를 느낀다거나. (웃음)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취향상 뭔가 하나의 감정을 100%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감정이란 복잡한 문제를 싹 여과해서 어떤 감정에 100% 집중해서 이것만 보라고 하는 게 진심을 다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슬프게 오열하는 가운데서도 똥이 마려울 수 있는 거 아닐까. 거부할 수 없는 똥. (웃음) 그 감정이 놓인 공간 안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셈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 같은 설사라고 설명을 해서 배우가 기겁을 하긴 했는데, (웃음) 눈물보다 설사가 중요했고, 눈물보단 침이 더 중요했다. 며칠간 물을 못 먹다가 달콤한 액체를 삼키면서 입안에 도는 침이 그를 다시 살게 하는 거니까. 실제로 측면의 클로즈업으로 봐도 눈물은 없다. 콧물과 침, 설사, 이렇게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다시 산다는 것에 주목한 장면이라서 눈물만 흐르는 장면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
남자 김씨의 위생상태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불결함이지만 여자 김씨의 불결함은 선택에 가깝다. 결벽적인 인간으로 그려볼 생각은 없었을까.
여자가 무엇을 방치하고 무엇을 지키느냐라는 게 공간에서 확실히 대비되길 바랬다. 이 여자는 결벽증이 있다. 그런데 모든 사안에 관한 결벽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에만 결벽이 있는 거다. 나에게도 그런 시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자기에게 관심 없는 건 완전히 방치하고 자기가 매달리는 것들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습성을 보이는 여자의 절실한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방은 그렇게 어지럽지만 자판은 매일 청소하고, 쓰레기는 널브러져 있지만 그 가운데 가지런히 정리된 것들이 있고, 그런 풍경 속에서 본인의 입장과 태도, 감정을 설명해보려 했다. 계획적으로 삶을 방치하는 여자다. 삶을 방치하는 인간이지, 방치된 인간은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주도 면밀하고 계획적이기까지 하다. 기본 생활을 방치할 뿐이지, 자신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한다.
여자 김씨가 너무 예쁜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
어느 선에 맞춰서 표현해야 할지, 예를 들면 상처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와 같이 관객과 내 입장 사이를 염두에 두는 모양새의 고민이 있었다. 히끼꼬모리가 왜 저렇게 예쁘냐, (웃음)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다는 걸 예측했지만 그 상황에서 적절한 예쁨이란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든 예쁘지 않게 보일 방법을 못 찾을 정도로 뭘 해놔도 여배우가 예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웃음)
사루비아라던가, 민방위 훈련 같은 과거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반대로 로그인이라던가, 젊은 세대와 소통이 용이한 용어들도 함께 등장하고. 시대적 정서가 먼 용어들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현대적인 스타일을 두르고 있음에도 과거지향적인 감성을 지녔다고 할까.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가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고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적 욕망이 있었다.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그런 단순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다층적이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섬이 황폐화되는 장면은 <김씨표류기>에서 유일하게 영화의 비극적 감정이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부분이다. 캐릭터에겐 가장 가혹한 순간이기도 하고.
태풍은 한국에 살면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사전조사를 해보니까 밤섬에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에 보통 공익근무요원과 해병전우회 분들이 정화작업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사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지금까지 끌고 온 이야기와 충돌되는 요소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까 맞닿은 지점이 있었던 데다가 일종의 이격화 같은 게 필요했다. 밤섬은 김씨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싸늘한 시선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김씨의 왕국과 성취감에 감동하고, 김씨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현실이 휙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냉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좀 보여주고 싶었다.
고립을 선택한 인물의 삶을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결과적으론 그 고립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고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고립에서 인물이 벗어나는 장면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남자는 자장면이 희망이라고 얘기했지만 자장면을 다 먹은 다음엔 어떡하나. 결국 희망은 자장면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닌가. 결국 지치고 힘들게 볶는 관계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간의 관계에서 풀고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한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걸 김씨가 알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그렇고 <김씨표류기> 역시 주인공의 미래가 드러나지 않는 영화다. 사실 두 김씨 남녀의 만남이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삶이 더 비참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지운 감독님이 영화 보시고 나서 말씀하시더라. “너무 멋 부린 결말 아니야?” (웃음) 자기는 좋지만 관객들은 뭔가 후일담을 더 원할 거 같고, 그에 대해서 더 친절한 결말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도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냐 마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다음을 보여줄 엄두가 안 났다. 둘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만 앞으로 닥쳐질 삶이 마냥 행복할지, 아니면 어려울지 모른다. 아니면 마냥 행복하다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려나. 쉽지도 만만치도 않은 앞길을 남겨두고 끝내는 게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책임이었다. 내 마음에서 보자면 그 이후에 둘이 버스에서 내려서 손을 잡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건데 뭔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규정 같아서 꼭 그렇게까지 한쪽으로만 볼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지는 걸로 그냥 남겨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마치 캐릭터의 조물주나 다름없는 창작자가 그 삶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창작자라고 해서 내가 한 사람을 단정하고 규정하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봤다. 비단 결말 이후의 얘기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도 그렇다. 남자는 최소한 빚이 있어서 자살하려는 건지 알지만 저 여자는 왜 벽장에 틀어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물의 전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히끼꼬모리가 됐고, 자살을 선택했다는 단정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야기가 그런 방식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두 사람의 현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현실의 공기를 충실하게 다룸으로서 각자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내가 짊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경우는 에필로그라도 있어서 최소한 그 인물에 대한 희망이 감지되는 지점이 있지만 <김씨표류기>는 그냥 두 사람의 만남과 동시에 이야기가 끝난다. 어떻게 보자면 동구에 비해 남녀 김씨의 미래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건 아닐까.
동구는 어리기도 하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니까. 일단 두 사람의 맞잡은 손만한 게 없겠다는 생각도 했고. 앞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사실 그 인서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처음 계획은 남자 김씨의 얼굴로 시작해서 다시 남자 김씨의 얼굴로 끝내는 거였다. ‘클로즈업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가 점점 퍼지기 시작하고 그 미소가 더 퍼지다가 가차없이 암전되면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게 원래 시나리오 문구였는데 영화를 찍는 순간 그렇게 끝내선 안되겠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투샷에서 끝내야겠더라. 두 사람이 쏟은 애정을 생각하면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지도 못하고, 손 한번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내는 건 할 수 없겠더라고. 찍는 도중에 거기서 조금 더 가는 결말로 약간 수정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바라보는 투샷이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말이란 걸 느꼈지.
<김씨표류기>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가는 두 인물의 연대를 통해서 관객에게도 모종의 희망을 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이라 할 수 있나?
내가 사실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인 인물은 못 된다. 그래서 희망을 더 갈구하고 얘기하는 것일 수 있겠다. 사실 나나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어려운 소리만 하고, 희망이 희망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이니까 나와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희망 얘기하니까 갑자기 내 자신이 턱 막히는데. (웃음)
결국 영화가 자신의 갈증을 해갈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시나리오가 유머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지만 내 자신은 그렇게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갈증과 욕구들을 작품을 통해서 찾으려 하는 거 같다.
자신이 생각했던 3~4개의 구상 가운데 <김씨표류기>가 가장 비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파울로 코엘류의 ‘오, 자히르’라는 소설 덕분이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의 선로를 보면서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과연 몇 미터일지 갑자기 궁금해하다가 역무원에게 물어본다.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얼마나 되죠?” 역무원이 자신있게 143.5cm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왜 열차 선로가 143.5cm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니까 그건 기차 폭에 맞춘 거라고 답한다. 그럼 왜 기차 폭이 그렇게 된 거냐고 묻자 역무원이 드디어 짜증을 낸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데 그 궁금증이 계속 되니까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된 거다. 찾아보니까 그게 중세 마차의 바퀴 폭이란 걸 알게 된다. 중세 마차와 이 열차의 메카니즘엔 하등의 관계가 없는데 불구하고 마차의 폭이 143.5cm라서 기차의 폭이 143.5cm인 거다. 그럼 왜 마차 폭이 그런 걸까 찾아보니 그건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시대까지 닿는다. 로마시대에 말 세필이 끄는 마차가 있는데 말 세필을 일렬로 세우면 폭이 그 정도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로마시대 말 세필로부터 만들어진 메카니즘이 열차를, 선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지금 로켓의 연료통 모양과 설계도 거기서 출발한다. 로켓의 연료통을 나사에서 출발대까지 기차로 옮겨야 되니까 그걸 기차 폭에 맞게끔 길게 제작된 거다. 로마시대의 메카니즘이 로켓으로 이어진 거다. 뭔가 대단한 메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수 있는 일이지. 결국 그게 그냥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로켓까지 규정해버리는 우스꽝스런 내용을 전하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 무슨 용기를 얻었다는 건가?
상업적이다, 비상업적이다, 라는 구분이 나에게 143.5cm의 허울처럼 보였다. 상업영화라는 메커니즘은 사실 할리우드가 백여 년 만에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이걸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이걸 근거로 삼을만한 것인지 헷갈리더라. 맹신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요즘 시스템이 우울한 건 창작자로서도 스스로 과연 이게 상업적으로 될까라는 생각에 얽매여야 한다는 거다. 지금 시스템은 영화 한편 찍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장될 수 있는 각박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러 모양의 영화를 여러 루트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된 게 아니라 지금처럼 몇 개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산업적으로 차지하는 파이가 큰 상황에서 거기서 143.5cm같은 허울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대로 찍어야 관객이 좋아하는 거라고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의 고민을 포기한 채 수용해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걸 온전히 지키고 표현하는 감독들은 이런 상황에서 몇이나 될까. 물론 관객이 즐겁게 보길 바라지만 관객이 즐겁게 보는 영화의 공식은 누가 무슨 근거로 쥐고 있는 건지, 우린 왜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공동작업이었던 전작과 달리 개인으로서 이름을 올린 첫 작품인 만큼 의미가 남았을 텐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이런 거 하나는 있는 거 같다. 언젠가 해영이도 똑같이 느낄 건데 사실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득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난해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래서 그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둘이서 작업할 때는 그 과정을 우리끼리만 한 거 같다. 그게 한편으로 좋고,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대부분을 우리 안에서 만족하고 끝내버리면 다른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소홀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그 대상들과 다 함께 소통해야 되는데 두 사람의 소통이 너무 강력하니까 이미 설득의 과정을 둘에서만 해소하게 된다. 이번 영화는 어쨌거나 편한 설득의 대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노력을 배우와 스태프들과 나누게 됐다. 덕분에 영화를 찍는 과정이 이래야 되는 거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둘이나 하나나 외롭긴 매한가지더라.
아무래도 혼자가 됐다는 게 오히려 더 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나 보다.
그전엔 감독의 고민은 감독들끼리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지금은 감독의 고민과 방향에 대해 스태프들이나 배우들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가고 있는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어느 지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런 걸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거지.
강우석 감독이 제작에 관여했다. 사실 강우석 감독은 상업적인 마인드가 강한 감독이다. 반면 <김씨표류기>는 실험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강우석 감독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그 143.5cm의 허울을 근거라고 계속 제시하는 제작사 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님은 투자자이기 전에 선배감독님이기 때문에 이야기나 영화 본연의 재미를 봐주셔서 투자가 이뤄지고 제작이 가능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믹싱 때 즈음 내가 오히려 배우와 흥행의 압박을 느끼고 원래 계획되지 않았던 것 가운데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음향적인 뭔가를 더 추가했었다. 그런데 그걸 딱 보시더니 영화 잘 만들어놓고 너무 쓸데없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고, 왜 코미디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냐고 하시더라. 개봉 직전에 코미디의 품위를 말할 수 있는 한국의 유일한 투자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투자자와 과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정말 많은 용기가 됐다.
<김씨표류기>외에 영화화를 생각하는 다른 이야기가 3개 정도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야기였을까.
시나리오도 아니고, 시놉시스가 있었던 것도 아닌 구상 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좀 다양하고 많은 걸 해보고 싶다. 지금 슬슬 너무 아기자기하고 영화의 묵직한 힘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는데 덕분에 콤플렉스 같은 것도 쌓이기 시작했다. 직업감독으로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의 요구를 받게 될 때가 온 거 같다.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감독으로 정형이 되야 할 시점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나 <김씨표류기>와 전혀 다른 영화에 도전해야겠다는 건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직업감독으로서 ‘이런 건 못하잖아’, 아니면 ‘계속 또 그것만 해’, 그런 시점들이 생길 거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직업감독으로서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어떤 프로젝트든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시킬 수 있는 직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금 다른 방식의 경험도 해봐야 될 거다. 나도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소재의 제한이 있었다면 <김씨표류기>는 형식의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왜 이렇게 제한을 두고 할까, 이런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이 애초에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요소를 갖고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즐거움이 담겨있는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망도 한편에 있다. 내가 아까 말하지 못했던 구상 가운데 몇 가지는 더 말도 안 되는 제한 속에 놓여있거나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전에 재영 선배와 우리 김정수 촬영감독과 술 마시면서 그런 아이템을 잠깐 얘기했더니 쌍수를 들고 반대하더라. (웃음) 물론 일종의 오기도 있다. 앞으로 점차 넓혀지겠지, 라고 남들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나는 조금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갈만한 무지막지한 아이템들을 꺼낼 수도 있거든. 일단 두고 보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인간인지 더 살펴봐야겠다.
(무비스트)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 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이런 상황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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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를 빼서 영화를 찍었다던데.
이제 다시 찾아야지. (웃음)
인터뷰를 상당히 많이 했더라.
한 4~50개는 했을 걸. 진짜 ‘Breathless’야. 숨을 쉴 수가 없어. (웃음)
제법 유명인사가 됐다. 방금처럼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고.(오픈된 1층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가운데 싸인을 요청하는 팬이 있었다.)
좀 불편하더라. 밖에서 많이 알아보지 않는 게 좋지. 그런 걸 즐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한텐 별로 즐길 거리가 안 돼.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너무 많아졌거든.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좋지. 시사회가 열린 극장 9백석에 8백 명 이상이 꽉 차있는 걸 보면 잠깐 ‘와!’하지만 뒤돌아 서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다 길 가다가도 날 알아보는 거 아닌가 싶어지니까. 그래서 수염 깎고, 머리 길러야겠네, 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웃음) 물론 아까 그 분은 감사하지. 그렇게 부드럽게 들어오시면 좋거든. 그런데 거칠게 오시는 분들이 있어. 좋은 건 좋아도 싫은 건 싫은 게 인간의 속성이잖아. 아까 그 분은 날 불편하게 하지 않잖아. 그런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 언젠가 관객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겠지. 그때까지 짱 박히려고. (웃음)
일반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매 번마다 관객 반응이 폭발적이더라.
서울극장 무대 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극장에 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내가 누군가를 열광시키려고 만든 영화는 아닌데 이 사람들이 되게 열광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한번쯤은 누가 뱉어내 줬으면 하는 이야기였는데 아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누가 했어. 좀 나쁜 비유 같지만, 처음엔 불편한데 거기에서 내가 미워하는 놈을 누가 대신 때려주는 기분을 느끼는 거야. 그러면서도 자기가 직접 대하고 싸우면서 풀지 못하고 누군가가 대신해줬다는 게 약간 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어쨌든 <똥파리>를 보면서 대리배출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 누구나 쏟아낼 게 있는 만큼 쏟아내야 되는 거 같다. 굳이 아낄 필요도 없고, 있는 대로 쏟아내야 될 거 같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온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내 대신 뭔가를 막 쏟아내고 있는 거 같더라. 막 지르잖아. 에너지가 엄청난 배우지. 다 배출시켜버리잖아. 그냥 내 대신 뭘 뱉어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엄청난 에너지를 담아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최근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봤나?
그건 못 봤다. 사실 사람들이 모르는 <크루서블>보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신은 죽었다!’(포효하듯) 이러는데 죽겠더라고. 우리들이 가진 에너지보다 굉장히 큰 거지. 그 사람은 배우이기 이전에 배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랄까.
자신을 위해 만든 영화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자전적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닌 거 같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 그 안에 내 마음이 다 담겨있다지만 내 얘길 이야기에 가져다 붙일 수는 없잖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영화에 그대로 투영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건 복사를 하는 거지.
만약 <똥파리>와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영화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럼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증오로 가득가득 차 있겠지. 그걸 누가 보겠어.
그렇다면 자신을 위한 이야기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범위로 활용된 것인지가 궁금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나. 일기를 쓰는데 남의 일을 쓰진 않잖아. 소설을 통해 완전한 픽션을 만드는 분들조차도 자신의 숨결들을 넣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나오고. 그렇게 자신의 일부가 차용된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온 삶과 환경, 주변의 친구들의 삶과 환경, 그리고 앞집이나 건너 집에 있었던, 내가 봤거나 들었고 그로 인해 느꼈던 것들이 다 들어있지. 그냥 내 마음은 한껏 들어갔다. 가족에 대해 싫다고 느꼈던 마음들은 다 들어갔지.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서 죽였나, 아니면 내가 용역소에서 일을 했나. 그건 아니지. 단지 어떤 봐왔던 것에 완전한 상상력이 결합된 산물이지. 다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 속이지 않으면 될 것 같다.
아까 말했듯이 일반관객과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 볼 땐 나도 영화에 몰입하는 입장이었지만 두 번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틈틈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상훈이 욕설을 할 때 낄낄거리던 관객들이 바로 뒤이어 적나라한 폭력에 돌입하니 다들 ‘헉!’하더라. 상당한 충격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은 영화적 수위의 경험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라 그 폭력적 현장을 바라보는 생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이 들더라.
1부터 10까지의 레벨에 따른 수위 차이는 있겠지만 최소한 1정도를 안 겪어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떤 기간 동안은 부모와 살아야 한다. 그 과정이 항상 좋았던 건 아니라는 거지. 고마움도 있겠지만 분명히 부딪힘도 있었을 테고. 특히 한국에선 가족이 고마움보단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나. 개념상으로는 제일 가까워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일 멀고 스스로를 제일 힘들게 하는 존재처럼 느끼곤 한다. 집이 부자고 가난하고를 떠나서 그런 개념이 발생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나?
외국 같은 경우는 성인이 되면 적절히 알아서 나가거나 내보내는데 한국은 움켜쥐고 있잖아. 내가 대신 무언가를 해야 되고, 아니면 해줘야 될 것 같고, 이상하게 갖지 않아도 될 부담감들을 지니고 사는 것 같다. 자유로워야 되는데 자유롭지 못한 거랄까. 왜 그렇게 살까. 나는 이제 독립한지 7년 반 정도 됐다. 진작 나왔어야 됐지만 나 역시도 용기가 없어서 늦어졌지. 어쨌든 당연히 나와야 되잖아. 부모님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 건가. 그래야 여자친구도 만나서 여자친구가 집에 올 수 있고, 야한 것도 하지. (웃음) 그게 삶이잖아. 물론 꼭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자기 일생에서 친구도 만나고 자기의 공간이 있어야 자기 삶에 대해서 고민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 중간에 누구 하나 없이 스스로 혼자 남게 될 때 들 수 있는 생각들이 있잖아. 그런데 집에선 문만 열면 가족인 거야. 연희 같은 경우도 (손가락을 작게 벌리며) 요따만한 집에서 꾸역꾸역 모여 사니까, 문만 열면 가족이 보여.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365일, 24시간 계속 따라오면서 보인다면 미치는 거지.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할수록 불행에 쉽게 노출되는 게 아닐까. 가난할수록 집도 좁아지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간섭도 커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독립이 늦어질수록 가장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요구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경제력이 집안의 화목과 직결될 가능성이 커진다. 가난할수록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가난을 방조하는 사회가 그 모든 불행의 배후일 수 있다.
물론 100% 가난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의 가난보다도 이 사회가 가난했고 한국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일본에게 지배도 받고, 한국전쟁도 겪고, 그렇게 역사적으로 힘이 없어서 불행했던 나라였던 거지.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니까 계속 나가서 돈 벌어오는 기계가 돼버렸고, 엄마는 자기 삶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이전에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돼버린 거다. 자식 교육은 엄마, 돈 벌어오는 건 아버지, 그렇게 나뉘어버렸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임무를 마땅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는 거지. 그냥 같이 더불어 자유롭게 살면 좋을 텐데, 누가 누굴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이 생기니까. 어쨌건 그래도 엄마는 자식들과 싸우건, 친하게 지내건, 부대끼면서 살기라도 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돈 벌어야 되니까 나가서 사느라 가족들과 소통할 시간도 없지.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좀 소통이 안되잖아.
<똥파리>는 그런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영화 같다.
내 가족 안에서 출발했겠지. 주변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도 그렇고. 친구들과 중학교 때 가끔 술 먹고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난 싫어! 아버지가!” 이러는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면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가 따로 나가서 살고, 그래서 미워하지만 한편으로 그리움이 있다. ‘애’와 ‘증’이 있지. 대개 그랬던 거 같다.
결국 부모를 부정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똥파리>의 증오도 결국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위해 증오를 묘사하는 영화가 아닐까.
아버지가 폭력의 괴물이다, 라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런 괴물을 만들었다는 거지. 아버지가 누굴 괴롭히거나 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칼로 죽이고 싶어서 그랬겠어. 사회가 압박을 가하는데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보니까 풀어낼 곳이 없지. 그게 이상하게 제일 편하고 쉽게 대할 수 있는 가족 안에서 풀어지는 거지. 사실 불쌍한 거야. 살아가는 숨통이 없으니까. 집에서 셋방살이하듯 소통도 안 되고, 가족으로서 대접도 못 받고, 그렇게 집에 와도 외로워지는 거지. 폭력적이지 않은 아버지들도 마찬가지고. 가장이라는 짐이 왜 아버지에게만 얹어져야 할까. 나는 네 어머니야, 나는 네 아버지야, 나는 당신의 아들이고, 너는 내 아들이야. 이런 구별을 통해 서로 의무를 얹혀주기 보다 좀 친구 같이 살 수 없을까, 라는 고민이 들더라.
상훈은 주먹질과 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증오만큼이나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단지 그 안에서 고립된 거다. 연희와 소통할 수 있는 건 연희가 그 증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 쳐주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상훈이 삶을 바꿔보려는 결심을 품는 것도 연희가 어느 정도 계기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 궁금한 건 눈 딱 감고 상훈을 위한 해피엔딩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만약 (결말부의 상훈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똥파리>가 <피와 뼈>처럼 됐을 거다. (웃음) 사실 그 자체가 내겐 화해가 되는 거지. 상훈이 죽었다는 건 단지 어떤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훈이 사라짐으로써 당연히 사라져야 할 어떤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끊어야 했을 어떤 고리를 이 지점에서 끊기 위해서 라이타 불로 상훈의 제를 지낸 게 아닐까라고,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계속 느껴지는 게 그렇더라. 결국 상훈을 죽임으로써 화해를 신청하는 거다. 이는 내가 서른 두세 살이 돼서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 같다. <똥파리>는 2006년의 양익준이었던 셈이다.
결국 상훈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던 증오와 미움이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가 아니었다면 <똥파리>는 어떤 이야기가 됐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만약 지금 이런 얘기를 한다면 다른 선택을 했었을 수도 있겠지. 이야기 구조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고. 어쨌든 내가 지금 <똥파리>시나리오를 다시 쓴다면 조금 변화된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건 확실하다. 만약 그 이전에 썼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고. 이제야 조금씩 이해도가 생기다 보니까 지금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거고 살가워질 수 있지만 만약 20대 사이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더 무거워지거나 악랄해지고 아팠을 거다.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미운 사람들로 표현됐을 거고. 나도 이제 많은 고민을 해오면서 가족 개개인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지.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사실 아버지의 뒤에는 사회가 있는 거니까 난 결국 사회를 미워하는 것과 같다.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사회인 셈이다.
<똥파리>는 어쩌면 당신에게 필요했던 비상구였을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이지. 그냥 다 뱉어버릴 수 있는 화장실. 그런데 지금 시원해, 이런 건 아니다. 그냥 난 만들어놨고, 관객들은 감흥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걸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되겠지. 영화적 고민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고민을. 가족이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 그게 <똥파리>이후에 내 고민이 되겠지. 그 고민이 얼추 끝나서 <똥파리>가 정리되고 다시 내 생활을 찾게 되면 그 다음부터 다른 영화를 고민할 수도 있을 거다. 당분간 아무것도 안될 거야. 지금은 그냥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겠지. 내 영화는 순위에서 한참 밑에 있을 거니까 그런 거 개의치 않고 다시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고. 난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똥파리>를 만든 게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었던 표현의 통로가 영화밖에 없었던 거지. 10년 동안 했던 게 영화니까.
“우물쭈물하는 새끼가 제일 싫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더라.
내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너무 선택을 못해왔던 사람이라서 내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거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어. 관객을 일단 배제해버렸으니 남은 건 나지. 그 다음이 내 주변 친구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관객들, 이 사회, 순위가 그럴걸. 우물쭈물하면서 살지 말라는 1순위도 나인 거지.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예전에 여자친구 있을 때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실까 선택하지 못하고 40분 동안 끌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겨울이라 덜덜 떨고 추워죽겠다는데. (웃음) 난 항상 선택이 느리다. 식당에서도 메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은 항상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선택하지 못하고 중간지점에 머무르곤 하다 보니까 항상 불안하고 어떻게든 해야 되겠다는 압박을 느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다. 만식이를 좋은 놈으로 그릴까, 나쁜 놈으로 그릴까, 고민에 봉착한다. 그걸 한동안 오래 고민하면 답이 안 나와. 짧고 굵게 고민해야 된다. 좋은 놈으로 하자. 그럼 그 순간, 나쁜 놈은 없어지는 거지.
그 전에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굴라 그래.”라는 대사도 기억난다.
원래 정인기 씨가 자기 와이프 때리는 연기하는 장면에서 원래 좀 더 이어지는 다음장면이 있었다. 상훈이가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군다”고, 정인기 씨를 막 때리는데 와이프가 미친 듯이 맞는 남편을 위해서 상훈에게 울면서 그만 하라고 하잖아. 그 다음 장면이 있었어. 상훈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여자를 구해준 거잖아. 그런데 이상한 거야. 너를 이렇게 폭행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가 이렇게 패주는데 얘는 왜 막지? 그래서 쪼그리고 앉아서 그 여자도 뺨을 막 때리면서, “왜 그렇게 병신같이 사냐?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용기를 내! 용기를 내라고!” 원래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넘어가거든. 그런데 일단 내 연기가 좀 안 좋아서 잘렸지. 한참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차라.
용기를 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건 이 세상에 사는 엄마들한테 하는 소리다. 엄마들은 선택을 못하면서 살아왔고 그 삶이 늪인 줄 알면서도 그 익숙함에 빠져버렸다. 맨날 너희 때문에 도망 못 간다고 핑계대지만 명확하게 생각하면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못나가는 거거든. 물론 그것도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까닭이지만 분명 선택할 수 못하고 사슬에 묶여있는 거지. 어머니와 대화를 오래해 보시면 알 텐데, 어머니도 자기가 제일 행복해야 한다는 걸 안다. 자식을 위해서 반드시 먼저 살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라는 익숙함에 빠져 있다 보니까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못하는 거다. 정말 살기 힘들면 나가야지, 이혼해야지. 왜 굳이 붙어있으면서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데. 그래서 상훈이 부르짖는 거지. 용기를 내라고. 그러니까 그 우물쭈물하게 되는 순간에 제일 나약하고, 불쌍하고, 멍청해지는 것 같아. 일단 선택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거든.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지하도가 있고 지상이 있어. 둘 다 도착해서 만나는 지점은 똑같아. 그런데 어디로 가지, 망설이다 보면 결국 터널과 지상 사이의 돌기둥에 부딪혀서 사고가 나거든. 사실 내 경험담이다. (웃음) 내가 운전한 건 아닌데 한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나는 지상으로 가면 된다, 그러고 있으니까 운전자가 어쩔 줄 모르더라. 진짜 부딪힐 뻔 했다니까. 막판에 그 친구가 알아서 꺾더니 가까스로 지하로 갔지. 상훈이 후반부에 선택한 것도 그거겠지. 마지막에 부딪힐 순 없으니까. 일단 내가 죽겠거든. 이제 조금 편해지고 싶은 거지. 막장까지 보고 나니 ‘아, 이제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좀 더 사람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겠지.
한강에서 상훈이 연희와 함께 캔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상훈이 자신의 진심을 유일하게 내뱉는 장면이랄까.
연희한테 ‘느그 부모는 잘 사냐?’라고 말하는 거. 은연 중에 비교해보고 싶었던 거겠지. 우리 부모는 이따위로 사니까. 연희 사정을 은연 중에 알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잘 산다니까 한번 대충 떠보는 거지. 친구들끼리도 우리 집이 거시기할 때, 잘 사냐고 물어보잖아.
“부모한테 잘 해라.” 라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던데.
지가 그렇게 못 살아왔으니까.
상훈에게 있어서 희망이 되는 대상은 형인이다. 때때로 상훈은 형인이에게 형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한 모습을 연출한다. 유일하게 자신의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최대한 지켜줘야겠다는 본능이 강해지는 대상이다.
상훈이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어머니나 아버지도 선택을 못하고 살아왔는데 형인이마저도 선택을 망설이며 살고 있다. “플스(PS) 사줘, 말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해. 근데 상훈이 가는 건 싫고, 그러면서도 사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고. 상훈이가 볼 땐 그 모습에서 아마 자기가 느껴졌을 거야. 과거에 동생이 아빠를 말리러 가는 걸 그냥 지켜만 봤잖아. 그때 자기가 말려줬다면 어땠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런 꼴이 보기 싫으면 말리던가, 차라리 집을 나가던가, 뭐라도 선택하면 되는데 그냥 계속 집에서 보고만 있어. 또 그러다 말겠지.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순간에 누가 죽어. 영재 뺨을 때리면서 ‘우물쭈물대는 순간에 네 주변에 있는 한 사람 죽어나간다’는 말을 하는 건 자기 마음의 연장이지.
상훈이 영재에게 보내는 감정도 미움은 아닌 느낌이다. 뭔가 자꾸 거칠게 배려하는 것 같다고 할까.
영재는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애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거기서 나가고 싶게 만드는 거겠지. 여기로 오지 못하게, 이게 두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끔 하는 상훈의 제스처지. 미워서 때리는 거 같진 않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상훈은 자신에 대한 보호 본능만 남은 존재다. 자신이 배출하는 혐오를 통해서 타인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생존한다. 적도 아군도 모조리 패는 사람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연희만큼은 밀어내지 않는다.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이 되겠지. 혼자 다니는 늑대들은 외롭다. 혼자 먹잇감을 사냥해야 되고 추운 겨울도 혼자 나야 되니까. 이런 놈이 돌아다니다가 같은 늑대를 만나게 된 거야. 얘네 둘은 안 싸워. 왜냐면 비슷하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어쨌든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야. 이복누나 같기도 하고, 죽은 여동생 같기도 하고, 형인이 같기도 하고, 왠지 나 같기도 하고. 교복 입은 X만한 고삐리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강해 보여. 악은 꽉 차있는데 한쪽은 껍데기가 다 벗겨져서 피가 질질 흘러.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는 거지. 그냥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어.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나랑 비슷한 건 알아보잖아.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지만 어느 새 자신의 부모를 닮아간다. 자신이 혐오하는 것들을 부정하면서 어느 새 그와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똥파리>도 안 닮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거는 방법이지.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그래야 변화의 시작점이라도 생기지. 그런데 발버둥을 안 치니까 문제인 거야. 오리도 물에 떠있으려면 발을 굴려야 되는데, 우리는 발짓조차도 안하고 있잖아.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덮어놓겠다는 거지. 그 밑엔 진짜 징그럽고 무서운 게 있고 그걸 열어보고 소각을 하던, 어디 묻어버리던, 뭐라고 해야 될 텐데 그냥 가려만 놓는 거잖아. 어떤 제스처라도 취해야지. 나는 취한 제스처가 이 <똥파리>지.
상당히 강한 제스처다.
세게 풀지 않으면 똑같이 반복된다. 다시 똑같이 돌아간다. 연기할 때 뺨 때리는 장면 있잖아. 미안해서 대충 때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돼. 한번에 때리라고 하잖아. 내가 뭘 풀어놨는데 대충 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지. 그러니까 세게 한번 내보내는 거지. 왜 우물쭈물해. 그냥 확 저질러버리는 거지. 한번씩은 다 선택하잖아. 그런데 가장 불편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아. 삶에 있어서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가족이잖아. 그 안에서의 문제를 제일 먼저 고민하고 풀어야 되는데 그걸 놔두고 다른 걸 먼저 하고 있어. 그게 일단 해결이 돼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기 삶을 사는 거지. 계속 내 삶이 가족으로 인해 지배당하고 영향력을 받는데 어떻게 다른 삶이 가능해. 나는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상훈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연기한 건 아닌 거 같다. 본인의 잠재된 진짜 감정을 캐릭터에 쏟아낸 느낌이랄까.
당신도 화가 날 때가 있을 거다. 그리고 다들 여러 개의 본인을 갖고 있지 않을까. 나한테도 증오에 차 있는 양익준이 있고, 사랑 받고 싶은 양익준도 있고, ‘푸르나’를 보고 싶은 양익준이 있기도 하겠지. (웃음) 그렇게 수억만 개의 양익준이 있는 건데 그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감정들이겠지. 양익준이 갖고 있는 감정들. 다만 평상시엔 상훈처럼 살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런 표현들을 하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버스 운전하는 걸 보면 상상으로, “날 죽일 셈이야? 이 XX놈아, 전화기 안 꺼!” 이러는데 현실에선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겠지. 그런데 그 상상은 가짜일까? 그거 진짜잖아. 평상시에 그렇게 발설하지 못할 뿐이지 정말 불쾌할 때, “야, 이 XX!”하고 싶잖아. 그런 진실된 상상을 영화 안에서 뿜어내는 거지.
상훈은 당신이 한번쯤 상상하던 상상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상훈은 당신이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엔 아버지한테 “왜 그랬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지. “왜 그랬어요! 왜! 잘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잘 하기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좀 알게 된 거다. 이 세상이 잘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어쨌건 인간한테는 숨구멍이 있어야 된다. 내게는 <똥파리>영화가 숨구멍인 거고, 연기가 숨구멍이었던 거고. 아까 기능적인 연기가 아닌 거 같다는데 나 그렇게 안 한다. 그런 건 할 줄 모른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할 뿐이지.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연기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안 하는 거고.
김꽃비 양에게도 들었지만 디렉팅을 전혀 하지 않았다던데.
왜냐면 내 영향을 주고 싶지 않거든. 그 사람들은 자기네 것을 표현하고 쏟아놓는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들한테 “이렇게 쏟아내 줘.”라고 하면 그 사람들 숨구멍은 어디 있겠어. 누구한테 지시 받는 표현은 재미없지. 만약 그렇다면 나도 영화를 찍을 필요가 없고. 캐스팅할 필요도 없고. 아역배우한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달라는 말 절대 안 한다. 알아서 해야지.
예전에 연출했던 중편 <바라만 본다>에서도 연기를 겸했었다. 상훈은 자신이 연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들어간 건가.
<바라만 본다>는 원래 어떤 친구를 캐스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워크샵에서 시나리오가 너무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하다가 시나리오를 확 바꾸게 됐다. 그때 캐릭터가 변하더라. 그러다 보니까 그 친구에게 이 캐릭터는 좀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네 사랑이 투영된 이야기 아니냐고, 네가 해보라고 부추기는 거다. 나도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고, 결국 하게 된 거지. 하지만 <똥파리>는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한 거였다. 하지만 다음엔 모르겠다.
클라이막스에서 약간 헷갈리는 점이 있다. 영재의 우발인지, 만식의 지시인지.
우발이다. 사실 그 부분은 서로 이해도가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 환이가 많이 연습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집에서 너무 많이 고민해오고 그러길래 시나리오 보지 말라고, 시나리오에 빠지지 말라고 했지. 네가 하는 거니까 제발 그 캐릭터에 빠지지 말라고. 너라면 어떻게 할 건지 판단하라고, 네가 겪어왔던 환경이나 감정을 넣으면 된다고. 자꾸 생각을 통해서 제3의 것들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였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환을 캐스팅할 필요가 있나. 차라리 사람 죽인 사람을 캐스팅하지. (웃음) 그런데 환이가 연습을 많이 하고, 제가 볼 땐 자꾸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끌어오는 친구였다. 사실 나는 100% 우발을 생각했다. 그냥 휴지 달라고 해서 휴지 꺼내다가 망치를 발견했고, 망치는 자기 고참을 그걸로 때리니까 뺏어서 챙겨온 거뿐인데 그 때 손에 잡힌 거지. 그래서 내가 이걸 챙겨왔나, 멍해진 찰나에 상훈이가 돌아봐. 어떡하지. 아, XX!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거기서 연출의 역량과 배우의 표현력이 관객에게 혼돈을 준 부분이 있다. 그건 인정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영재한테도 차곡차곡 쌓인 게 있으니까. 자꾸만 때리면서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하잖아. 상훈은 얘를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영재한텐 그게 스트레스였던 거지. 사실 영재도 얼마나 불쌍해. 영재가 진짜로 상훈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겠어. 세상에 부르짖고 싶었던 거겠지. “왜 나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왜 너는 나보고 병신이라고 해. 나를 좀 내버려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자신도 모르게 망치로 표현이 된 거지.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되면 엄청난 후회와 번민이 생길 거다. 누군가를 그렇게 해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을 죽여서 시원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만약 영재가 계획적 지시에 따라서 이해하게 된다면 만식을 정말 악역으로 인지하는 셈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전복되고 이야기에 대한 접근까지도 변할 수 있다. 결국 영화적 의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디렉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나.
준비를 많이 해오고 자기에게 확신이 없는 배우가 있다. 환이가 그랬던 부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아마 다음 작품에서 자기 것들을 많이 보여줄 수 있을 거다. 시행착오의 시기는 누구나 있는 법이다. 그 땐 그 자유로움에 좀 부대껴도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넘어가게 되면 대개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지거든. 그런데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계속 힘들어지지. 자율성을 줬는데 자유롭지 못하면 어떻게 해. 항상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면 오히려 혼란에 빠지기 쉽다.
결말에서 영재를 보면 절망적인데 연희를 보면 한편으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어쨌든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천(question), 쩜쩜쩜(…)이다. 나도 잘 모르니까, 나도 그걸 생각하는 과정 중이거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방향을 설정해선 안 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각자 선택하는 거지. 제가 계속 얘기한 것도 선택이잖아. 스스로 결정하고 우물쭈물하지 않으면 돼지. 이 영화가 무슨 답을 줘. 어떤 책이 누구에게 답을 줄 수 있나? 1 더하기 1은 2다. 그런 산수 문제 정도? 도덕 책이 답을 줘?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결국 어떻게 살까 제시를 해주는 것뿐이지. 거기서 선택을 해야 되는 거다. 히틀러가 히틀러의 독재를 선택한 것처럼, 양익준은 양익준으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다 보니까 <똥파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선택을 한 거고. 어떤 관객은 <똥파리>를 보고 진짜 짜증나서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XX놈아, 한번 해야겠다.” 싶어서 했더니 의외로 아버지가 “시원하냐?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럴 수도 있고. (웃음) 그렇게 각자 선택을 하는 거지. 이 영화에 결말은 없다. 이 세상에 결말이 어디 있어. 내가 80살까지 살다 죽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 다만 최대한 우리가 고민해서 조금 더 환경이 나아지면 누가 편할까. 본인들이 편하겠지. 그렇게 본인들이 최대한 편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우물쭈물하면 장기적으로 힘들어 진다. 그리고 나만 힘드나. 내 주변, 가족, 다 힘들어진다. 누군가는 선택해야지.
이 영화가 99%의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1%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 그 부분에 있다. 영화는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건 관객이다. 결국 영화 밖에 희망이 있다. 이 영화가 절망으로 가득함에도 일말의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바로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마주한 두 손바닥의 간격을 벌리면서) 세상의 규정이 이만큼이라면 언젠가는 이만큼 넓어질 수 있다. 증오가 희망으로 변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이 백 명을 움직일 수도 있는 거다. 나는 <똥파리>를 만들었고 누군가가 그걸 보고 난 이후에 그게 가능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똥파리>를 보게 된 어떤 관객 가운데 누군가는 영화 속의 현실을 자신의 체험처럼 간직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나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충격을 얻지 않을까. 사실 내부에서 보는 것보다 외부에서 목격하게 될 때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 <똥파리>가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진 않나.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가족 안에서 살아왔다. 7년 반 전까지,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 상황은 조금 달랐을 지 몰라도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 단지 내가 지금 얘기를 안 하는 건 이게 개인영화로 비춰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 개인사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영화로서 보여줬으니 된 거다. <똥파리>가 거짓말하지 않는 그런 영화로만 비춰지면 되는 거다. 내게는 내 개인의 영화고, 어떤 관객이 보면 그 개인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거고. 다만 그들이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고민하고 나는 나대로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반추하기도 하겠지. 나도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좀 잘 살아오고 있어.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된 사람들이 상훈을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가 오겠지. 그럼 상훈이처럼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내포되지 않았을까.
상훈은 대한민국 가족이라는 부조리한 조직에서 잉태된 최악의 괴물이기도 하지만 가장 불운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정도 차가 있을 뿐, 대한민국에서 아들, 딸이라고 불렸던 대다수의 마음 속엔 잠재적으로 상훈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에 이런 가족 문화가 60%는 될 거라고, 물론 <똥파리>는 영화인 만큼 특정한 관계의 수위를 더 강하게 묘사했지만 대충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했더니 누가 그러더라. 60%는 개뿔, 100%지! (웃음)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으신 분이 그러더라.
한국에서 자식으로 살아본 사람치곤 <똥파리>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참 이상한 일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똥파리>라는 영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의문이 든다.
한 70%는 다운시켜야지. 완전히 없어지길 바라지도 않아. 그래서 여전히 엔딩에서 영재는 그런 일을 하는 거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각자 그 이후를 살아가면 되는 거지.
오래 전에 했던 짧은 인터뷰를 보니까 <똥파리>이후로 연기와 연출 중 한가지 길을 선택하겠다고 했던데.
그건 그 기사를 쓴 기자 분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그냥 고민을 해보겠다 그랬지. 한번 해서 맛이 들렸는데 연기든 연출이든 그만 두진 않을 거다. 그냥 조금 더 두고 봤으면 좋겠다. 아니면 관심을 끊던가. (웃음) 그냥 내가 살아가면서 결정하면 되는 거니까. 누가 백마디 천마디 하지 않아도 난 이미 내 스스로 결정할 준비가 남들보단 조금 더 돼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똥파리>가 좋다면 <똥파리>를 좋아하면 되지, 나한테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50개관에서 개봉된다. 어쩌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만큼의 제약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거 가지고 또 싸워야지. 돈 생기면 이제 지원받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영화 찍으면 되잖아. 그래도 모자라면 그때 또 만들었을 전세 빼지. (웃음) 한번 해 봤는데 두세 번 못 하겠어? 한번 해보면 자신감이 붙는다. 나에게 믿음도 생기고. 한 달에 백 만원도 없이 살아본 적도 있는데, 어떻게든 살겠지. (자지러지게 웃음)
<똥파리>는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영화 같지만 결국 그 본심은 자신의 증오와 그로부터 자행되는 폭력을 극복해야 자신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결국 그 선택은 각자 자신의 몫이다. 당신도 그런 선택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 <똥파리>도 그 선택의 일종이었고.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에게 주어진 바가 있을 거다. <똥파리>라는 선택이 당신에게 남긴 건 뭔가?
좀 더 많은 가족과의 대화와 통화? 그리고 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내가 노출되는 부분에서 오는 장점도 있다. 부모님이 TV를 통해서 내가 여태껏 영화 했던 흔적을 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냐고 안쓰러워해 주시더라.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움을 알게 되는 거지. 같이 살면 그립지 않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하게 되고. 조금 떨어져 살면 더 좋은 관계가 이뤄진다. 대신 한 달에 한두 번씩 자주 만나면 되잖아. 그 정도면 되지, 아닌가? 부모님 두 분끼리 같이 잘 사시고, 난 내 할일 하면서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잘 살면 되고. 다만 너무 안 찾으면 문제가 되지. 가끔씩 전화도 드리고, 찾아야지. 그렇게 살면 그리움도 적정하게 유지되고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많은 분들 빨리 자립하세요. (웃음)
자립한 1인으로서 자립하는 시기는 언제가 적당하다고 보나?
좀 없을 때 나오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래야 세상을 살면서 성장에 필요한 촉진제를 얻을 수 있는 거 같아. 어떤 부모님이 천억을 갖고 있어서 아들이 백억 갖고 나오면 그게 재미있나? 집에서 사는 거나 거기서 사는 거나. 한 천억 가지고 있으면 집이 한 천 평 되려나? 그럼 같이 살아도 되겠네. 저 멀리서. (웃음) 약간 모자라고 약간이나마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자립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탄력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비타민C’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영화는 어떤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단 당신이 원한 건 구체적인 대안에 접근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똥파리>가 무슨 답을 내리는 영화는 아니다. “이걸 이렇게 해라”라고 하는 건 골 빈 선생님이 하는 짓이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에게, “너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한번 배워보는 게 어때?”라고 제시할 순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배워, 그림 해! 너는 그림 해야 돼.”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할 필요가 있나.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해주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대신 희망을 줘야지. 사람이 잘한다 그러면 진짜 잘한다니까. 그런데 못한다 그러면 진짜 못해. “너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면 자기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사랑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고민을 한다니까. 그런데 “너 정말 X같이 생겼다. 너 정말 애가 왜 그러냐?” 그러면 정말 그 말에 빠져서 그렇게 된다니까. 희망을 줘야지, 사람한테. 이 세상도 X같은데, 니기미.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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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를 보면서 <미쓰 홍당무>가 생각나기도 했다. 혹시 <미쓰 홍당무>를 봤나?
<미쓰 홍당무>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약간 비슷한 데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직 <미쓰 홍당무>를 못 봤다. 시나리오도, 영화도 아직 못 봤다. 사실 의도적으로 안본 측면도 있다.
영향력을 받을까 두려웠던 건가.
맞다. 영화를 위해서 해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미쓰 홍당무>에서 의식할만한 지점이 발견되면 원치 않게 피해가야 할 부분이 생기거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까 봐. 하지만 이제 봐야지. (웃음)
<우리집에 왜왔니>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예전에 준비했던 <세탁소>라는 작품이 정황상 지연됐다. 강혜정 씨는 그때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다. 그 사이에 시나리오를 좀 수정하게 됐는데 시나리오를 쓴 김지혜 작가님이 이 기회에 구조를 완전히 틀어보자고 하더라. 그 무렵에 어떤 소녀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집에서도 그 친구가 나가서 노숙을 하는지 몰랐다. 발견되고 나서야 알았던 거지. 우리에게 있어서 그건 처절한 일이잖아. 그런데 이 친구는 과연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었을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처럼 처절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잖아. 이 친구처럼 우리 캐릭터도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보면 어떨까 싶었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남자 캐릭터는 우편물이라는 단서를 통해 끌어내 보자고 김작가님과 이야기했고 그렇게 시작됐다.
방금 말했던 <세탁소>는 필모그래피로 검색되더라.
시나리오만 있지.
간단한 시놉시스와 아까 말했듯이 주연 배우로 강혜정 씨가 등록돼있더라. <세탁소>와 <우리집에 왜왔니> 사이에 얼마나 연관관계가 있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세탁소>를 놓고서 변주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자체에 혼선이 생긴 거 같다. 자살기도에 관한 부분이나 캐릭터들에게 뭔가 결핍돼있다는 부분이 새롭게 가미됐다. 하지만 아마 보면 알겠지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영화다. 그리고 강혜정 씨는 <세탁소>에서 <우리집에 왜왔니>로 시나리오가 바뀌고 나서도 같이 작업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계속 가기로 했었다. 사실 <세탁소>와 전혀 다른 얘기가 됐는데도 그냥 가줬다. 특별히 시나리오를 보고 이런 것도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를 흥미롭게 봤다. 상처 입고 때묻은 피부와 옷감을 부분적으로 접사앵글을 통해 비추면서 호기심을 키우다가 결국 한 여성의 시체를 등장시킨다. 그 자체로 비극을 연출하기 좋은 죽음을 등장시키지만 비극적인 인상은 없었다. 결국 그 시퀀스 자체가 마치 이 영화의 전체를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판단하기 좋은 어떤 일부의 이미지기 전체로 확장되지만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사실 프롤로그에서 계속 보여주고자 했던 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일부들이 전체를 대변하는 이미지처럼 보인다는 말은 맞다. 상처를 비롯한 신체의 일부가 비춰지다가 점점 샷이 뒤로 빠져나오면서 전체가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큰 그림을 먼저 보여주면서 전체적으로 열어주고 파고들어가는 게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빠져나가면서 열리는 방식이랄까. 그런 접근방식으로부터 전체적인 양상으로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로부터 최대한 동떨어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최대한 인물의 감정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로서 거리감을 두는 느낌이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까지 상경하는 과정 자체가 관객 입장에서는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수강이가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상투성은 항상 현실에 존재한다. 유행의 문제가 아닌 거지. 하지만 민감한 부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가능하면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수강이는 굉장히 담담하고 태평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게 그런 식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길들여진 이야기의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왜곡시켜서 보여주되 뒤로 갈수록 점점 진정성에 가까워지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심문 받는 장면에서 형사와 병희의 관점에 따라 앵글의 선명도에 차이를 둔 것도 고의적이다. 형사의 시점에서 병희를 바라볼 땐 선명하지만 병희의 시선에 놓일 땐 흐릿해진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 <우리집에 왜왔니>는 관점의 차이를 통해 사건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심각한 범죄적 행위들이 민감한 감상을 부르지 않는 것도 영화가 그런 태도의 관점을 이미 선점했기 때문이다. (웃음)
민감한 부분들이 정말 많지. 폭행, 아동 성추행, 치정, 많다. (웃음) 그런데 다들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내 감정에 충실해서 외부적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가 있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외부적인 해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쇼크를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병희는 아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아내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어떤 가정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조금씩 어긋나거나 균열이 생길 때부터 문제는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냥 단순하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수강이 지민에게 어느 순간 반했을 뿐이니까 거기까지 해석될 여지는 없지 않나. 그냥 좋았고, 그에 따른 감정에서 비롯된 시간들을 갖게 될 뿐이지만 외부적인 시선에 따라 죄명이 따라붙을 수 있는 것뿐이다.
수강이란 캐릭터 자체도 특이하지만 캐릭터가 두르고 있는 환경 자체도 평범하지 않다. 일단 스무 살인데도 고등학교를 다니고, 산에서 혼자 살고 있다.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만드느냐라는 지점이 중요했다. 사실 너무 현실적이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현실적이어도 안되니까. 일단 이 친구에게도 분명한 현실적 히스토리가 있다. 어려서 가족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된 후로 원래 가족들이 살던 곳으로 보내졌고, 그런 까닭에 고등학교도 늦게까지 다니게 됐으며 생활보호 대상자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들을 적절히 가리거나 노출시키는 밸런스가 중요했다. 캐릭터 자체가 사회성이 없는 감정적인 인물이다 보니까 너무 띄워놓을 수도 없고, 땅에 발붙일 수도 없었다. 마치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지 모를 거 같은 캐릭터를 그려보고자 했다. 그렇게 보여져야 이 친구가 지닌 감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 감정이 영화 전체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캐릭터의 행위에 대해서 완전히 납득하지 못할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캐릭터가 이래야 되지 않냐고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에 로직(logic)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시나리오를 쓴 김작가님이나 내가 항상 했던 이야기가 얘는 원래 이런 애라는 거다. 난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라는 모든 질문에 항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사람은 그렇다고 받아져야 하는 부분들인 셈이다.
김병희의 집 벽지가 인상적이더라. 외부에서 보는 집의 외관은 낡은 느낌인데 집 안의 인테리어는 모던한 느낌이다. 의도적인 건가. 혹시 단순히 취향 때문은 아니겠지. (웃음)
100% 내 취향인 건 아니고. (웃음) 사실 외관과 내부가 다르다는 건 병희에게도 집이라는 것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병희에게 있어서 집은 지켜내야 될 공간이다. 외형과 상관없이 내부 자체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대로 꾸며놓고 싶은 거다. 사실 병희와 함께 죽은 병희 와이프의 캐릭터를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공간 자체에 대한 심심함을 덜어내는 느낌도 있다.
우리 집이라는 공간이 너무 한정돼 있고 그 공간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되기 때문에 미술적인 깊이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엌이 보인다거나, 계단이 보인다거나, 굉장히 한정된 사이즈의 앵글 밖에 보여줄 수 없어서 그 안에서 어떤 환기가 이뤄져야 된다는 생각에 그런 패턴을 가져간 것도 있다.
겉과 안의 풍경이 다르다는 것도 이 영화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인물의 겉모습을 통해 타인에게 감지되는 삶의 형태가 자신 스스로 감내하는 것과 다른 양상이 될 수 있다고 할까.
내부와 외부의 이질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영화 전체에 크리스마스적인 정서가 흐르는데 크리스마스라 하면 따뜻한 쓸쓸함이 떠오른다.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집 안엔 따뜻한 불이 밝혀져 있지만 밖의 공기는 차갑다.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미지랄까. 그런 느낌이 병희 집에 묻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봤을 땐 차가운 느낌이지만 내부로 들어갔을 땐 다른 톤이 발견될만한.
방금 말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사실 부조리다.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따뜻한 날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추운 날이 되니까. 결국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병희와 수강의 관계 자체도 상당한 부조리다.
모두가 수강을 미친 년이라고 불렀지만 병희 시점을 통해서 수강에 대한 다른 해석이 발생한다. 죽음 자체만해도 그렇고. 수강의 죽음을 형사가 보는 톤과 마지막에 병희가 보는 톤은 다르다. 형사가 본 수강의 죽음이 바로 단순한 외부적 시선이지만 병희의 시선을 통해 들어가면 수강의 사연을 알게 된다. 전혀 다른 해석이 되는 거지.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부딪히게 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측면에서 부조리적인 코드들이 보인다.
병희의 독백을 통한 물음과 함께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 집에 왜왔니?’라는 질문은 사실 정답이 있는 것 같지만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말 그대로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결과적으론 우연이 아닌가. 하지만 그 우연에도 어떤 의미는 생기기 마련이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희망과 공간이 일치될 때, 우린 그걸 집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놓여있는 공간에서 누군가 함께 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게 될 때 집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생겨난다. 우연의 일치와 같다. 사실 수강한텐 한 평짜리 작은 노숙자 박스조차도 내 집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이 한편으론 관의 이미지도 갖게 되고. 예를 들어서 몽타주 씬에서 수강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레퀴엠 같은 음악도 들린다. 주변이 빛 바래지면서 모든 게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내 집인 그 박스만은 빛을 잃지 않는 상황이다. 단순히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심볼이랄까.
그냥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와 ‘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서브 플롯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가긴 한다. 수강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마치 회귀본능과 같다. 내가 살았던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행위로 인해서 사실 되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 자체가 어떤 속죄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지민이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속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행 같은 과정이지 않나. 크리스마스라고 카트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설레기도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그렇게 걸어가는 거 자체가 수강에겐 고행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집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지만 사실 병희라는 인물과 함께 지내던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귀결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박희순 씨의 내레이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내레이션은 상당히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방식인데 박희순 씨가 잘 소화해낸 거 같다. 때때로 위트를 발생시키는 기능적 효과까지 거둔다.
그렇다. 내레이션 영화지. (웃음) 사실 나는 영화에 있어서 굉장히 ‘안티(anti) 내레이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교감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단순히 설명해주는 부분들도 있지만 사실 인물간에도 내레이션을 통해서 교감하거나 소통하기도 한다. 병희가 수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수강에게 읽히기도 하고. 그런 재미들도 발생하는 만큼 단순히 설명의 수단이라 말할 순 없다. 어떤 순간에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레이션을 삽입한다는 게 단순히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작업이기도 하고.
내레이션이 있다는 게 상당히 부담이었다. 영화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굉장히 힘든 부분이었다. 내레이션 자체가 서술적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독백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실 박희순 씨가 문어체를 힘들어 하시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대사에도 문어체가 많았는데 나름대로 어떤 부분들에선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꿔가기도 하더라. 그리고 처음에는 플랫(flat)하게 가다가 그게 점점 독백이 될 땐 선 자체가 감정적으로 바뀔 거다. 그런 순간엔 그림 자체도 덤덤하게 가줬다. 그런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무덤덤함 자체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영화가 어떤 감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영화 자체가 그 감정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느낌이다.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을 묘사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게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건 그저 이 인물이 겪었던 일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토론해보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지점에 대해서는 조금 힘을 놓고 가야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수강이 과거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생활을 하고, 서울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건, 노숙자 생활을 했건, 중요한 건 외부의 환경이 아닌 수강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병희도 마찬가지다. 병희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병희가 겪어가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로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외부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요인들도 중요하겠지만 이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겪어가는 과정에 초점이 가야 된다. 외부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설명이 많이 가해지다 보면 인물 자체가 그걸 스쳐 보내고 있는데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이 인물을 멈춰 세우는 꼴이 된다. 그럼 결국 감정 자체도 훼손되고 인물이 자꾸 덜미를 잡히게 되는 꼴이 되니까 그런 부분들은 오히려 좀 툭툭 스쳐 지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야기를 위한 소재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강변되기 위한 본질은 아니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인물이 그런 환경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자체가 보여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자체를 부여한다는 건 오히려 불필요한 행위 같다.
예산상의 부족으로 포기해야 했던 물리적인 분량이 있었나?
그런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게 큰 부분들은 아닌 거 같다. 본질에 가까운 것들은 챙길 수 있었던 거 같다. 덜 화려하거나 덜 매끄럽거나 그런 부분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해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유연하지 못하거나 좀 더 매끄럽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들은 있지만 중요한 부분들은 해치지 않았으니까.
최근에 박희순 씨를 만났었는데 당시 <우리집에 왜왔니>에 대한 이야길 잠깐 했다. 자신이 찍은 영화 중에 가장 힘들게 찍었던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박희순 씨 같은 경우는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거다. 감량도 있었고. 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는데 예산이나 일정과 같은 물리적 한계가 많다 보니까 체력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다. 그리고 한번 결박을 묶으면 촬영하는 동안 계속 그걸 풀지 않는다. 묶었다, 풀었다 하는 게 더 힘드니까. 거의 하루 종일 묶인 상태로 계시기도 했다. 그리고 병희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의심의 과정부터, 심리적 장애로 인한 증상까지 겪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연기로서 넘나드는 것 자체도 힘드셨을 거다.
영화를 보고 나니까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 북받칠 때는 그걸 쏟아내야 편해지는데 이 영화에서 박희순 씨는 자꾸 그걸 안으로 삼켜야 한다. 충만해지는 감정을 쏟아낼 수 없는 배우 입장에선 분명 힘든 작업이었을 거 같더라. 배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축적되는 감정에 시달렸을 거 같다.
말한 것처럼 병희를 절제시킨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내의 죽음 같은 경우, 그 상황은 예고되지 않은 당혹스러운 순간인 만큼 충격이 워낙 큰 일이다. 하지만 앞에서 아내가 죽고 나도 총알을 맞고 저 앞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듯이 당장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부분들이 사실 당사자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히려 희순 씨에게 그런 부분들이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드렸고 그래서 나온 게 딸꾹질이었다. 눈물이 나기보단 너무 놀라서 그 순간 의외의 것들이 뛰쳐나온다고 할까. 딸꾹질처럼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것들이랄까.
슬픔보다는 그 상황 자체의 통증이 자각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인물이 스스로 그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건 위험한 발상일지도 모르는데, 난 말미에서 배우가 울고 싶어한다 해도 그 후에 울어야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순간 모든 것을 터트려 버리면 그 감정들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미에 두 사람이 만날 때, 분명히 뭔가 내면에 꽉 차있다는 게 보이고, 마음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게 보여지는데 그걸 물리적으로 함께 터뜨려버리면 이 영화 안에서 감당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 터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사자에겐 절제하기가 힘든 일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병희가 다시 살게 됐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꿈꾸던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은 죽음이다. 삶을 꿈꾼다는 건 삶이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선 조금 의미가 다른 거 같다.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기 보단 기존의 희망이라 믿었던 죽음이 희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서 살아가야 된다는 걸 직감하는 느낌이다.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라는 영화가 완벽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 이제 ‘세상은 아름다워’라는 걸 깨닫는 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앞으로 잘살 수 있을 것 같다기 보단 이젠 밖에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그러니까 반 걸음 정도를 떼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두려운 삶이란 그 이후의 삶이라는 게 어떤 걸 보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끝내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어딘가 멈춰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서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다면 최소한 거기서부터 열려있을 수 있다. 그게 이 영화의 희망이다. 엔딩 직전에 병희가 수강이 찾아오는 꿈을 꾸는 것도 사실 병희에게 조금 더 힘을 내게 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수강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면서 병희를 깨우고 움직일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대신 병희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배려를 남긴 셈이다. 그런 부분들이 쓸쓸한 동시에 따뜻하다. 결국 작게나마 희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우리집에 왜왔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을 담은 영화다. 혹시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거부감은 없지만 경계하는 부분은 있다. 세상엔 모두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것들을 패턴화시키거나 정립시키려고 한다. 그런 걸 가장 무서워하기도 하고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일상도 들여다보면 매일이 사고고, 드라마다. 단지 그런 극적인 상황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이 적을 뿐이지. <우리집에 왜왔니>와 같은 상황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렇게 밖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나는 매일매일 매 순간이 다 부조리인 거 같다. 그냥 그게 당연한 거 같다.
일상적으로 그런 부조리한 풍경이 많이 인지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진짜가 뭔지 잘 보려고 할 때가 많다. 그건 머리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거 같거든. 진짜를 본다는 건 머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강은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려 하고, 지민은 수강을 떼내려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선언을 통해 파국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이미지와 흡사하다. 단지 영화는 좀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갔을 뿐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일단 깊은 감정에 빠지게 되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잡고서 그 감정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강하고 지민이가 책 읽는 장면이 수강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진실의 한 부분이 된다. 다만 그게 덧날 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이 친구가 그걸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진짜 감정이 거기 있는데 그 진짜 감정이 어떻게 바뀔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의 본심을 이 친구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는 버거워서 마음이 떠난 거지. 견딜 수 없이 지치다 보니까 너무 싫어졌고,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관계가 돼버린 거다. 단지 수강한테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거지. 항상 어떤 관계라는 게 엇갈릴 땐 그렇지 않나. 마음이 같은 속도로 가지 못하다 보니까 헤어지는 거지. 그리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 명은 그 변화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한 명은 변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와 수강이는 과거에 어떤 연인이었다는 느낌보다는 가족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가 너무 좋지 않은 남동생과 누나처럼 정말 지긋지긋해서 가족이라고도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관계처럼 읽힌다면 좋겠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캐릭터들을 연출하는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당사자 입장이 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을 것 같고.
내가 수강처럼 살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수강처럼 행동에 옮기거나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충분히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을 거다. 병희와 비슷하게 가까운 사람의 사고를 겪어보진 못했지만 어떤 의심의 단계라던가, 그 의심이 상상으로 변질되면서 어떤 덫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듯한 경험은 있는 거 같다.
혹시 연애에 대한 큰 상처를 받아봤나? (웃음)
모든 연애는 항상 같은 양상으로 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연애라는 게 좀 비정상적인 거 같다. 외형적으론 너무나 흔한 스토리 중에 하나지만 감정이 개입되면서 되게 비정상적이고 파국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디가 결핍돼있는지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땐 민감해지거나 가장 여린 부분들이 외부로 노출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까 되게 작은 일도 큰 파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경우까진 몰라도 적어도 한번씩은 느낄 거다.
병희는 폐쇄적인 남자다. 수강은 그 폐쇄성에 침입하는 여자다. 결국 병희는 침입을 당한 셈인데 결국 이를 통해 삶의 변화를 얻게 된다. 때때로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다가오는 우연적인 일들이 자신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줄 때가 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다 준 부분은 없을까?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놓기만 하는 작업이라면 영화 자체도 흥미롭지 않을 거 같다. 이 영화를 찍기 이전에는 이해를 한다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머리로 이해를 하던, 가슴으로 이해를 하던, 이해를 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하고 나서 느껴지는 내 개인적인 변화는 이해한다기 보다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한 일이구나, 라는 변화를 겪게 됐다는 거다. 그리고 수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배운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마지막 꿈 장면을 찍기 위해 세트에 있다가 잠깐 촬영이 중단된 상태에서 혜정 씨와 그 장면에 대해서 이런저런 뜬금없는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수강은 사실 욕망을 가지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 모든 욕심을 버려버리는 부분들이 있다. 수강을 통해서 오히려 그런 걸 배웠다. 욕망이 없어지는 거, 그러니까 욕심을 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약간은 배운 듯한 느낌은 들었다. 물론 또 다시 욕심부리게 되겠지만 욕심 없이 뭔가에 다가가는 것, 정말 원하는 게 있을 때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됐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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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공개된 <매란방>의 러닝타임이 147분으로 알고 있다. 어제 내가 본 건 118분이었는데 중국에서 상영된 건 어떤 버전인가?
중국에서 상영한 것도 베를린 버전과 같은 147분짜리였다.
혹시 118분 버전은 봤나? 편집에 어디까지 관여한 건가?
공교롭게도 아직 보진 못했다. 사실 영화사 측으로부터 한국 사정에 맞춰서 러닝타임을 줄인다는 말은 미리 들었다. 배급사에서 나름대로의 사전에 맞춰서 부탁한 것이라 생각하니 반감을 갖거나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다. 일단 러닝타임을 줄였다고 하니 조정된 부분이 어떤 부분일 거란 예감은 든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요청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다만 수입사의 판단이 옳은 방향이길 바랄 뿐이다.
예전에 펑 샤오강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펑 샤오강 감독은 아시아에서 제작되는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펑 샤오강 감독이 그때 어떤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감독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국도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자신의 나라가 지닌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를 영화에 담아내고 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국 영화 중에서도 훌륭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영향을 준다. 실질적으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미국 문화 자체가 우세한 위치에 놓인 건 확실하다. 만약 한국이나 중국 감독이 자기 나라의 역사적인 전쟁을 영화로 찍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 대부분을 이해시키긴 힘들 거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경우는 다들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만큼 쉽게 받아들인다. 만약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인도감독이 인도영화처럼 찍었다면 세계시장에서 지금처럼 인정받기 힘들었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 속의 중요한 부분들을 우리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란방>에서 일본군 장교가 경극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그런 맥락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이 위대하다는 의도로 접근한 대사는 아니다. 실제로 매란방은 일본으로 서너 번씩 건너가 공연을 했고, 이를 통해 일본 친구들을 알게 됐다.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일본군은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문화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했다. 영화에서 일본과 중국의 갈등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5분 정도의 분량을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는데 만약 그 장면이 남아있다면 이런 부분을 좀 더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경극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건 <패왕별희>와 같은 중국영화의 영향력 덕분이기도 하다. 혹시 중국 내에서는 경극을 소재로 한 다른 장르나 매체가 제작되고 있나.
아직도 중국 내에서 많은 관객들이 경극을 좋아하고 보기 때문에 여전히 공연이 이뤄진다. 특히 북쪽지방 사람들은 더더욱 경극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해서 다른 컨텐츠를 만들기 보단 여전히 경극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 경극은 높은 경지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이므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지만 지금 현재로선 완전히 대중적인 예술이라 말하긴 힘든 측면이 있다. 물론 예전엔 아주 대중적인 예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경극은 현실주의적인 예술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어떤 동작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작이나 표정으로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경극이 서양에 끼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유명한 감독, 배우, 평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들 가운데 경극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과 매란방은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는 친구관계였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가령 예를 들어서 컵을 들고 물을 마신다면 실제로 컵은 없지만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동작만 하지 않나. 사실 이런 것들이 매란방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은 영향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은 매란방이 연기하는 장면을 실제로 찍었었고 여전히 그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매란방은 단지 중국에 국한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세계의 대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란방이 세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당신의 작품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가 있을 거다. 15년 전 상영됐던 <패왕별희>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 영화를 통해 경극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자신의 작품이 타국인들에게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의식해본 적 있나? 혹은 반대로 자신이 타문화의 영향력을 얻었다고 할만한 경험은 없나?
실제로 내가 다른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줬는지 스스로 잘 느끼긴 어렵다. 나는 문화혁명을 겪은 세대였고, 문화혁명으로 당시에 노동자가 됐다. 사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나를 영화 대가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문화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가 가진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더더욱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고. 물론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서양의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 우리 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서양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싶진 않다.
<매란방>은 예술가에 대한 일대기를 담은 영화다. 예술가라 할 수 있는 당신이 그 이야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계기가 있을 텐데.
<매란방>은 예술가가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되는 어려움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영화다. 자신을 버리고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배우다. 유일하게 서방국가에서 경극을 보여줬던 배우이기도 했다. 일본 침략기엔 자신을 버리고 다시 배우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종이 족쇄를 차는 백부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예술인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다양한 매체와 접하지 못하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 예술가로서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이다.
<매란방>은 크게 세 맥락으로 구성된 영화다. 사실 세 번의 사건 속에서 매란방보단 그 주변부를 차지하는 인물에게서 얻어지는 극적인 감정이 크다. 궁극적인 의도가 궁금하다. 그리고 혹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구상해보진 않았나?
실제로 매란방이란 인물에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되는 세 부분을 단락으로 나눠서 각자 세 명의 인물을 거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처음에 스승님과의 대결에서 매란방이 비록 승리자가 됐지만 사실 승리 이후에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걸 느낀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조차도 그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쟁과 같은 어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대에서 자신의 예술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어떤 예술가에게라도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매란방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세 단락을 통해 매란방이란 인물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약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 매란방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패왕별희>는 15년 전 작품이다. <매란방>은 실재 역사적 인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패왕별희>와 전혀 다른 작품이다. 일단 연기하는 인물들이 다르지 않나.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데이는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라 할 수 있는 중심인물이 아니라 변두리의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늘 긴장관계를 지니고 살았다. 결국 그 사회가 발전하는 변화 속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서 매란방은 그에 반해서 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매란방은 물처럼 흘러가는 인물이었다면 데이는 불처럼 꺼져가는 운명이다. 매란방은 부드러운 저항가란 점에서 실제 아시아인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화두는 없을까?
인물이 다르긴 하나 두 인물을 통해서 느껴지는 바는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 같다. 단지 나는 매란방이 이를 더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매란방>을 통해서 포용하는 인간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매란방>의 여명을 비교한다면 어떤가?
장국영이라는 배우는 굉장히 민감하고 내적으로 불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서 여명은 마치 차분한 검객처럼, 혹은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처럼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다.
몇 년 전부터 아시아 합작영화들이 활발히 제작됐다.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아시아인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소재나 주제를 이용해서 아시아인들끼리 좋은 영화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젠 이런 합작영화가 더 이상 소수의 사례가 아니라 보편화된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합작영화에 참여해보고 싶기도 하다. 한국도 괜찮고, 일본도 괜찮고, 혹시 어느 회사랑 합작하면 미래가 밝을지 당신이 알려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웃음)
혹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
그리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 다만 어떤 이야기들은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거 같고, 어떤 이야기들은 관객들이 과연 그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는 내가 소년 시절 문화혁명 당시, 남쪽 지방인 운남 열대야 지방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평범한 삶이긴 했지만 자연환경 속에서 얻었던 역경과 사랑, 이상을 비롯한 청춘 시절의 충동 같은 감정들과 그로 인한 다양한 사연에 대해서 한번 꼭 다루고 싶다. 다만 그게 관객들이 보고 싶어할만한 이야기일지 잘 모르겠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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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의 원작이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그 시나리오를 선택하기 이전에 본인이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없었나?
개인적으로 쓰던 시나리오가 몇 개 있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잘 안 풀리기도 하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감독님께서 이 시나리오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살펴보고 결국 하게 됐다. 내가 만든 이야기보단 원작이 있는 이야기로 첫 연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고, 더 많이 배운 거 같다. 그래서 나에겐 더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고.
김기덕 감독의 원작 시나리오로부터 가장 크게 각색됐다 할만한 바가 궁금하다.
전체적인 뼈대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원작의 느낌들은 그대로지만 일단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화법을 각색함에 있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화법을 선택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타는 강패와 대등한 관계였던 게 아니라 지금보다 좀 더 비중이 적었다. 원래 7:3(강패:수타)에서 6:4정도였던 걸 반반 정도로 각색했다. 물론 두 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와 시나리오가 같은 이야기란 건 맞지만 원작에선 강패 이야기의 비중이 더 컸다. 그리고 봉 감독에게 코믹한 요소를 많이 가미한 점도 있고.
아무래도 원작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았나 보다. 영화상에서 캐릭터 무게중심이 수타보단 강패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느낌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두 남자의 비중을 대등하게 변화시킨 의도는 뭔가?
김기덕 감독님의 원작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서로 다른 삶을 동경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처음부터 비중이 비슷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슷해지면 두 남자를 모두 각자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영화와 현실의 비중도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과 연이 닿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대학교 때 학생회위원을 했는데 학교 축제에 저명하신 분들을 초청해서 특별강의 같은 걸 하는 명사 초청강연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김기덕 감독님께 와서 해주십사 연락 드렸고 그 인연으로 가끔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졸업하면서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드렸다. 감독님께 답장이 왔는데 지금 들어가는 영화가 있으니 여기서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일단 해보라고 하시더라.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하게 됐고 그 후로 여기까지 온 거다.
김기덕 감독의 촬영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은 건가?
일단 <사마리아>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끝나고 한번 <신부수업> 연출부로 참여했다가 다시 <빈집>연출부로 참여하고, <활>과 <시간>의 조감독을 맡았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과 일반적인 영화 현장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차이가 많다. 내가 다른 영화현장을 많이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김기덕 감독님의 현장은 굉장히 빠르다. 현장에서 순발력 있는 상황대처를 보이시니까 촬영진행속도가 빠른 것 같다. 날씨나 외부적 환경요인으로 인해서 촬영이 어려운 날이 생겨도 그런 여건에 맞게 현장상황을 즉각 바꿔서 결국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담아내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배우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안 하신다. 뭔가 얘길 해보면서 배우들이 못하겠다고 하면 그걸 강요하진 않는다. 나 같은 경우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게 약간 있나 보더라.
<영화는 영화다>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돼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화 속에서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한 감정 같은 게 생기진 않던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겐 두 캐릭터의 삶이 먼저 보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 이후에 영화와 현실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물론 아이러니는 많았지. (웃음)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실제로 연기를 했는데 카메라 뒤에선 그렇게 활발하던 스태프들이 카메라만 보면 자꾸 도망가는 거다. 그래서 스태프 연기시키기가 너무 힘들더라. (웃음) 스태프 연기시키는 날엔 촬영도 오래 걸리고.
낙원상가 옆에서 촬영한 씬에서 촬영장의 스태프들과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강지환 씨의 모습이 대비적이라 재미있었다. 전문연기자와 비 전문연기자들이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의 대비가 발견되는 느낌이랄까.
차이가 크다. 사실 영화에서 스태프를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화에서 좀 더 리얼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 찍었는데, 막상 찍어보니까…..안 찍는 게 좋겠더라. (웃음) 물론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사실 갈수록 스태프들의 연기가 늘었다. 스태프들도 모니터하면서 자신들의 연기가 느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촬영현장이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적 리얼리티와 현실적 리얼리티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이라면 현실적 리얼리티를 고려하면서도 영화적 리얼리티를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영화란 진실을 보여주기 보단 진심을 담아내는 작업에 가깝다.
진짜가 있고, 정말 진짜 같은 게 있다면 사람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진심처럼 느껴지게 잘 전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이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후자다. 그게 정말 리얼해서가 아니라 리얼한 느낌을 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리얼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때론 그게 약간 슬프기도 하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정직하게 찍으려 했던 부분이나 배우들과 그렇게 작업했던 분위기는 영화에 담긴 거 같아 다행이다.
수타와 강패란 이름은 상당히 직설적이다. 명쾌한 은유지만 반대로 노골적이다. 한편으론 희화화된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고민이 좀 있었겠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 그래서 고민도 좀 했는데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서 그대로 갔다. 제목도 사실 원작 그대로인 만큼 수타와 강패란 이름도 그대로 가보고 싶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게 좀 코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봉 감독은 상당히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이다. 아무래도 감독 캐릭터란 점에서 감독인 당신과 비교하고 싶어진다. 당신과 봉 감독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차이가 좀 있지. 봉 감독은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적 설정을 진짜로 찍는다. 그런데 나라면 봉 감독처럼 그렇게 못한다. 영화는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지 않나. 만약 싸우는 씬을 찍고 난 다음날 싸우기 전 씬을 찍어야 한다면 실제로 싸움을 한다고 했을 때, 배우 얼굴에 상처가 나면 사소하게 나마 맥락적 연결상의 문제도 생기니까.
실제적인 공간의 형태를 과감히 드러내는 느낌이다. 그 공간의 기시감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는 느낌도 얻었다.
실제로 찍을 때와 전체적으로 컷들이 붙었을 때, 공간의 느낌이 달라졌다. 총체적으로 오는 느낌이 찍을 때보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주더라. 더 자연스러운 느낌도 있고. 인사동도 그렇고, 갯벌도 그렇고, 그 공간의 느낌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더라.
인사동이나 낙원상가처럼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인파를 통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종로는 어차피 골목 앞을 막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으니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인사동은 완전히 열려있으니까 거의 전쟁이었지.
게다가 소지섭에 강지환이라,
그 심각한 엔딩 장면을 찍으면서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다 이러고 있으니, (웃음) 전쟁이었지. 우린 사람이 죽어가는 심각한 장면을 찍고 있는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이러면서 웃으며 사진 찍고, 우리는 통제하느라 정신 없고. 사실 그걸 찍으면 진짜 리얼한 건데 말 그대로 그건 영화가 아니니까. (웃음)
상황 자체가 현실과 영화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인사동에서 옆으로 빠지는 골목 안에 폐지 수집하는 곳이 있다. 몇 차례 헌팅을 갔을 땐 조용하다 싶어서 한적한 골목을 헌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촬영날은 폐지 수거하는 날이라 끊임없이 폐지를 실어 나르고 자동차도 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왔다 갔다 하시고, 개도 있고. (웃음) 그런데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소지섭, 강지환이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런 점에선 무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런 점이 노인분들의 생활고가 느껴지는 측면이라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영화라는 결과물을 위해서 작업한 것이지만 그 현장 자체가 나에겐 현실이었고, 그런 부분들이 소중한 경험처럼 느껴졌다.
액션도 꽤나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에서 액션연출을 경험해봤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을 텐데.
마지막 갯벌 장면 같은 경우엔 두 배우가 지칠 때까지 싸우는 느낌을 담고 싶었고, 결국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런 바가 화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걸 담아내기 위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지섭 씨는 촬영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도 귀에서 갯벌 흙이 계속 조금씩 묻어나올 정도라니까, 고생 많이 했지.
사실 갯벌은 계획된 로케이션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그게 뻘에서 하는 액션은 아니었다. 내가 각색하면서 조금 수정된 부분인데 두 배우가 뭔가에 흠뻑 젖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컨셉에서 강패는 블랙이었으면 좋겠고, 수타는 화이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옥상씬을 보면 강패는 블랙을 입고 있고, 수타는 화이트를 입고 있지 않나. 그리고 봉 감독의 영화 안에서도 강패는 계속 정장 안에 검은 셔츠를 입고, 수타는 흰 셔츠를 입고 있고. 나중에 둘 다 뻘이 묻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아졌다는 느낌. 그래서 갯벌을 생각하게 됐다.
그 갯벌씬에서 강패는 결국 수타와의 싸움에서 진다. 결국 주인공이 이긴다. 그건 어쩌면 검은 돌을 지워나가던 강패가 스스로 흰 돌에 둘러싸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 갯벌씬은 온전히 영화적인 현실에 대한 자조처럼 보인다.
수타가 이겨야만 하는 어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실 영화 한편이 만들어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의 느낌이랄까. 관객들이 보는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완성된 영화다. 스크린에 걸리기 위해 촬영됐지만 극장에 안 걸려서 상영이 안 되는 영화들도 있고, 촬영이 다 끝났지만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래서 극장에 걸리는 건 사실 행복한 경우인데 관객들은 그런 영화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기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느낌이나 스태프들이 얻는 그 순간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선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목적했던 결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목적대로, 시나리오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완성되고, 그래야만 한다.
그 라스트 씬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건가?
원래 원작의 엔딩이다. 원작에서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했고.
사실 갯벌씬은 엄밀히 말해서 영화적 영역의 성취인 셈이다.
영화만의 쾌감이지. 영화적인 만족감이고.
그에 반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엔딩은 대비적이다. 영화적 결말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려는 현실적 거부감처럼 느껴진다.
현실이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캐릭터로 얘기한다면 수타는 성장하고 변모한다. 그런데 강패는 변하지 않는 캐릭터다. 변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은 캐릭터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옷을 입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슬픈 거 같다. 현실의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마지막은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은 그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이 뒤로 빠지고 크레딧 올라가기 전에 프레임이 하나 더 생기지 않나. 그런데 그게 극장에서 상영할 때 많이 잘리더라. 그 극장의 이미지가 객석의 한 세줄 정도는 보이고 더 넓어야 하는데 객석은 안 보이게 잘리는 경우가 있더라.
스크린의 비율 문제 때문에?
맞다. 그래서 혹시 관객들이 그 부분을 놓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결국 그것도 영화였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극의 말미에 피칠갑을 한 강패가 수타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객석을 노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소지섭 씨가 연기한 강패가 강지환 씨가 연기한 수타에 비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건 종종 영화 속의 악인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강패의 눈빛은 그 영화적 환상에 빠진 관객에 대한 경계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과 악이라는 경계에 대한 사유도 가능할 것 같다.
난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기 보단 모든 사람에겐 두 가지 면이 다 있어서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패는 악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도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고 더 매력적인 부분에 끌린다. 사실 그것도 좀 슬픈 거다. 재미없는 선보단 재미있는 악에 더 끌리니까. 물론 강패가 악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사회적인 입장이 다른 건 스스로 선택한 어떤 초기의 결정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매번 그런 판단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은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갯벌 장면은 정말 처절했다. 얼굴이 갯벌에 반쯤 잠긴 강지환의 얼굴이 열의를 대변하더라. 이런 장면을 주문하는 감독은 얼마나 악랄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웃음)
악랄하겐 안 했다. (웃음) 그냥 두 배우들이 스스로 열심히 했다.
강패와 수타를 바라보며 봉 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로 완성되는 배우들을 지켜보는 과정은 여러모로 즐거운 일일 거다.
굉장히 즐겁겠지.
똑같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본인에게도 비슷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 같다. 강한 열의를 갖고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을 지켜볼 수 있는 감독의 입장이라면 봉 감독 못지 않게 즐거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배우들은 무지하게 고생했지만 솔직히 난 속으로 즐거웠다. (웃음) 배우들한테는 고생해서 마음이 아파요, 이렇게 얘기했지만. 영화에 그런 강렬한 느낌들을 주니까 그런 광경을 찍을 수 있어서 즐겁지.
그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에 봉 감독과 강미나가 주고 받는 대사가 생각난다. 두 배우를 격려하고 돌아온 봉 감독에게 미나가 괜찮겠냐고 묻자 봉 감독은 ‘감독이라고 뭐, 다 아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미나가 그럼 감독님은 뭘 아느냐고 되묻자, ‘내 배우 끝까지 믿어야 된다는 거’라고 답한다. 그 대사가 어쩌면 감독 본인이 하고 싶은 대사였을지 모르겠더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봉 감독이 대신하는 대사가 조금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봉 감독 캐릭터를 위한 대사다. 코믹하긴 하지만 결국 감독이니까 감독다운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를 믿고 가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때론 갈등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감독이 배우를 신뢰할 수 있을 때 결과물의 가능성도 더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배우들과의 소통은 어땠나?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각자 캐릭터에 대한 애정들이 느껴졌다. 두 배우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패, 수타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해온 부분이 있지 않나.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캐릭터가 있고. 근데 두 배우가 많이 고민한 부분을 내가 일방적으로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된다고 지도하진 않았다. 일단 배우들이 만들어온 캐릭터를 최대한 담고 싶었고, 그게 전체적으로 큰 톤에서 벗어날 때만 얘길하는 편이었지. 어찌됐든 소지섭의 강패, 강지환의 수타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편했다. 배우들과는.
사실 첫 영화부터 캐스팅이 화려하다. 일단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촬영 내내 흐뭇했지. 어떻게 잡아도 그림이 나오니까 편한 것도 있고. (웃음) 두 배우가 굉장히 길지 않나. 만약 어느 한 쪽의 다리가 짧거나 머리가 컸다면 투샷을 잡기 보단 상대적인 표정 위주로 잡아야 되고 이런 걸 신경 썼을 텐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 카메라도 편하게 잡았다.
감독으로서 두 배우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두 배우와 작업하게 된 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섭 씨나 지환 씨가 각자의 캐릭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만약 컨트롤한다고 생각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 같다. 그런데 컨트롤한다기 보단 같이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거 같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배우를 처음으로 경험해본 셈이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는 없나?
아직 정의를 내릴 정도로 경험을 해본 것 같진 않다. 다만 누구나 자신과 결혼할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형이 있다. 그런데 결국 만나는 사람에 맞춰서 달라지지 않나. 실제로 만나게 된 사람을 그 이상형으로 맞출 순 없으니까, 서로 같이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같이 잘 살아야 된다. 감독과 배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강패와 수타가 달리기를 하면서 테이크가 반복되는 장면은 마치 강패의 현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화적 현실을 안착시키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건 봉 감독이 강패를 길들이는 광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독의 입장에서 배우를 다스려보고 싶었던 바는 없었나?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 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마찰하거나 충돌했던 점은 없었다.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냥 배우들이 원하는 걸 선택했다. 대부분 내가 특별한 주문을 안 한 상태에서 기본적인 동선만 정해주고 배우들이 잡아온 캐릭터로 테이크를 갔다. 물론 만약 내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 표현돼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원하는 바를 배우들한테 얘기해서 한번 더 테이크를 갔다. 의견 충돌의 느낌은 없었고 그 테이크 중 좋은 걸 쓰면 됐다. 그래서 오히려 작업이 빨랐던 거 같다.
사실 고창석 씨가 연기한 봉 감독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꽤나 삭막해졌을지 모른다.
봉 감독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두 캐릭터가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이 가능해지기도 하고,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남자로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꽤 귀여운 캐릭터였다. (웃음)
무대인사 다닐 때마다 관객 분들이 귀엽다고 하더라. 봉 감독님이 인사하면, 귀여워요! 이러니 매번 봉 감독님께서도 당황하셨지. (웃음)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이런 소릴 듣게 될 줄 몰랐다고 얼굴이 많이 빨개지시더라. (웃음)
말미에 강미나의 말처럼 끝까지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인간미가 느껴진다.
인간적인 매력을 주고 싶었다. 사실 감독님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나도 김기덕 감독님을 많이 봤지만 현장에서 있어 보이게 폼 잡고 있기 보단 대부분 편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작품 자체에만 몰두해서 계신다. 현장에서 본인이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것보단 그런 게 오히려 멋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 김기덕 감독의 현장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보편적으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김기덕 감독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김기덕 감독님과 작업해보거나 개인적으로 만나오신 분들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나보면 재미있고 귀여운 부분도 있다.
귀엽다?
약간 개구장이 같은 부분이 있다. 음, 여하간 그렇다. (웃음)
혹시 김기덕 감독에게 원작 시나리오의 모티브나 소재를 얻게 된 경로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본 적 없나?
원작은 오랜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시나리오라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돼야만 하는 것 같다. 감독님께서 보시는 배우들에 대한 느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조폭들에 대한 느낌, 그런 부분들에서 아마 시작되지 않았나 싶더라.
사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대중과의 충돌이라 할만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런 일련의 상황을 김기덕 감독의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김기덕 감독이 얻은 몇몇 어려움에 대한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감독님이 많이 외로워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감독님을 생각하는 오해적 이미지들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도 감독들이 대체로 좀 외롭지 않나. 현장에서 얘기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일적인 얘기를 해도 그 전체를 보는 사람은 감독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다 이해해 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외롭게 보이더라.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작품을 깊게 들어가다 보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아는 얘길 하면 공감을 많이 할 수 있듯이. 그런 부분들이 어려운 거 같다. 내가 한번 김기덕 감독님께 유치하게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영화가 더 힘든가요? 현실이 더 힘든가요? 그렇게 여쭤봤더니, 당연히 현실이 더 힘들지,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영화 찍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얘기하시더라. 영화를 찍을 때 제일 행복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시는 거 같다. 나도 이번에 처음 찍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배우들 고생시키고, (웃음) 고생시키면서 나도 고생하고, 그렇게 몸은 힘들어도 정말 행복하더라.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 자체가 애증을 동반한 느낌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애증이랄까. 현실을 넘을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하고, 현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성취에 대한 선언 같기도 하다.
영화에선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가능하다. 거기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거 같다. 다만 굳이 그 차이에 얽매여서 영화와 현실을 대비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물론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반면, 영화를 보는 현실의 사람들은 영화를 모방하려고 한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따로 봤을 때 오히려 그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정말 리얼한 걸 보고 싶다면 현실을 일상적으로 스치듯이 지나치지 말고 차분하고 주의 깊게 뭔가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보면 된다. 그럼 좀 더 리얼한 걸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영화와 현실 사이엔 그런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실과 영화의 우열관계를 나누기 보단 평행우주라는 대등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 같다. 하지만 결말부의 뉘앙스는 아무래도 영화보단 현실에 비중을 준 느낌이다.
영화도 현실을 위해서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패와 수타라는 두 캐릭터가 대립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은연 중에 서로에 대한 묘한 애정이 오가는 것 같다. 약간 가볍게 말하자면 싸우면서 친해지는 관계 같기도 하고.
그런 게 느껴졌으면 했다. 사실 더 친하게 보이는 테이크들이 더 있었다. 그런데 너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찍으면서도 배우들과 얘길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은 있지만 너무 친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보단 느슨해졌을 것 같다.
둘이 너무 친해지면 그것도 너무 영화적인 거니까. 사람이 또 그렇게 쉽게 친해지지도 않지 않나.
사실 <영화는 영화다>에서 강패를 비롯한 조폭들이 현실적인 조폭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영화에서나 등장할만한 느낌이랄까.
일단 조폭 영화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폭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솔직히 강패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조폭들을 만나서 취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고. 한국 조폭이라기 보단 한국 영화 안의 조폭이랄까. 기존 영화들에서 묘사된 느낌들만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룸싸롱이나 공사현장처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상황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되는 부분도 실상 영화적으로 가져온 부분들이다. 스타 영화배우와 조폭의 부두목이란 직업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동경한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개인적으론 꼭 깡패일 필요가 있고 스타일 필요가 있는지가 중요하기 보단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경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일단 영화에서 그렇게 설정을 한 이상 캐릭터 자체의 삶은 리얼하게 보여야 되는 부분이 있다. 그걸 개인적 의도에 의해서 소모시키거나 조금 사소하게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또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설정 안에서 최대한 캐릭터의 삶을 살리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현실보단 영화적 참고 사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태양은 가득히>와 <무간도>가 떠올랐다. 두 남자가 각자 살아보지 못한 서로의 삶을 동경하는 느낌이나 정서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그 부분을 굉장히 중시했고 영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인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강패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겪는 일은 영화적인 부분들이 많다. 연애만 해도 수타의 연애는 현실적인 연애고, 강패의 연애는 영화적인 연애다. 바닷가에서 키스하거나 그런 전형적인 영화적 느낌들이 강패의 연애에 있다.
아무래도 두 남자가 겹쳐지는 국면의 세기가 상대적으로 그 주변부에 배치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보다 눈에 띄기 때문에 어떤 주변 캐릭터는 간과되게 느껴질 공산도 있을 것 같다. 아까 말했던 그 연애적 형태의 대비도 본인의 의도에 비해 가볍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을 것 같고.
둘의 이야기에서 중심축을 이뤄야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주변부의 비중이 커지면 둘의 에피소드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질 것 같았다. 둘에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부로 키우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를 통해 변화를 느끼는 지점도 있지만 각자 서로 사랑하는 여자를 통한 변화의 느낌은 부수적으로 주고 싶어서 그렇게 설정했다.
사실 결말을 배제한다면 강패는 배우로서 더 좋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엔딩은 감독으로서 캐릭터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셈인데 좀 가혹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이 가혹한 거 같다. 현실은 잘 안 바뀌지 않나. 사람도 쉽게 안 바뀌고. 그런데 역으로 난 정말 사람들이 보다 좋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들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희망사항을 영화적인 만족감으로 적용한 채 끝내고 싶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는 그렇게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가능한 변화의 지점들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적인 대리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엔딩에서 드러내는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안전거리처럼 보인다.
안전거리라는 표현을 해서 그런데 영화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그게 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결국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결국 마지막엔 이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이성적으로 감안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바람이 있었다.
드라마틱하게 흐르던 영화가 가장 노골적인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며 엔딩을 맞이하는 셈인데 한편으론 도발적이면서 그만큼 위험한 시도처럼 보인다. 허무함을 느끼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단 점에선 위험을 무릅쓴 선택 같기도 하고.
위험하지. 후반 작업 하면서 그런 의견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처음에 이야기가 출발된 지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부분이 표현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관객들이 허무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관객을 영화에 계속 참여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 만든 사람만의 영화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창작자의 화법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살짝 거리를 두고 빠져 나온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수정을 많이 했다. 화면이 빠지는 타이밍이나 음악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결국 영화가 하려던 얘길 변질시킬 순 없는 거니까 강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했던 거지. 그런데 결국은 객석이 좀 잘려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안타깝다. (웃음) 그리고 사실 지섭 씨는 이 엔딩 때문에 이 영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남는 장면은 어딘가?
개인적으론 뻘 씬도 애착이 가고 다 애착이 가지만 지환 씨와 지섭 씨가 많이 얘기했던 부분이 있다. 지환 씨는 강패를 보는 수타 입장에서 강패가 부하랑 공사장에서 가짜 액션하는 장면을 많이 좋아한다고 했고, 지섭 씨는 수타를 보는 강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까페에서 은선이랑 둘이 차 마시는 장면이라고 하더라.
그 두 장면은 각자 캐릭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론 강패의 가짜 액션 장면이 가장 좋았다. 사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땐 결과를 알고 봐서인지 그 장면에선 꽤나 슬픈 느낌이 나더라.
그 시점에선 유쾌한 느낌을 주지만 그게 결과적으론 좀 슬픈 장면이다.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강패가 느끼는 영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대적으로 더해지니까.
수타는 결국 성장했고, 강패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는 건 수타가 아니라 강패다.
하지만 그게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이라거나 정말 기분 좋은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다. 되려 웃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슬픈 느낌을 대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본인의 이야기로 연출을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거다. 본인이 주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뭔가?
사람에 대한 부분이다.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이 중요한 거 같고.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그런 부분들이 영화에 반영되지 않을까. 그리고 선악에 대한 이야기도 매력이 있는 거 같다.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경계가 그렇지. 어느 상황에서는 그게 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느 상황에선 그게 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미묘한 경계에선 분명한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선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물론 공포 빼곤 대부분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잘 못 본다. (웃음)
첫 영화였던 만큼 지나고 나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많지. (웃음) 지금은 무대인사 다니느라 바쁘지만 무대인사 끝나고 이제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다. 사실 빨리 혼자 있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무대인사를 열심히 다니고 싶고. 그 이후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내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내 스스로 다시 한번 공부해봐야 될 거 같다. 어떻게 찍었으면 더 좋았을까라는 부분, 아쉬운 부분들은 왜 아쉬운지, 그런 부분들을 공부해야 개인적으로 영화가 마무리될 거 같다.
영화는 개봉했고 첫 번째 작품은 본인의 손을 떠났다. 기분이 어떤가?
홀가분한 느낌도 있고, 일단 배우들과 함께 무대 인사 열심히 다니면서 잘 되길 빌어야지. 그리고 빨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웃음)
(무비스트)
어쩌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란 영화가 이 사무실의 벽면과도 같은 형태가 아닐까 싶다.
설마 저 트뤼포 같은? (웃음)
당신이 지닌 취향들의 콜라주(collage)같은 영화다.
그렇다! 이건 미술로 따지면 콜라주고, 문학으로 따지면 인덱스(index)지. 내 취향이 많이 들어간 거지.
순제가 어느 정도인가?
순제는 28억 5천, 마케팅비를 포함한 전체제작비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겉보기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진 않은 것 같다. 대작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많이들 그러더라. 그래서 순제를 말하면 다들 놀라지.
30회차라고 들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36회차로 알고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 회차가 제일 짧다.
노사단체 협약이 이뤄진 이후에 당신이 처음으로 찍은 영화다.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됐구나.
30회차로 타이트하게 찍었다 해서 혹시 그 부분에 대해서 염두한 바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전혀 상관없다. 내가 <아라한 장풍대작전>(이하, <아라한>) 이전까지만 해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24시간 동안 촬영하고 그런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아라한>때부터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12시간 촬영시간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라한>이후부터는 현장에서 시간을 운용하는 것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내 영화 현장은 강도가 세다. 일단 찍어야 될 컷들도 많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철저하게 촬영 스케줄을 짜고 움직였어야 했을 텐데.
태도 자체를 영화의 기본 컨셉에 맞춰보고자 했다. 아예 옛날 방식의 영화 만들기 스타일을 추구했다라고 할까. 제한된 예산환경과 빠듯한 스케줄, 그걸 스스로 절제한 게 좀 있다. 이런 한계를 돌파해나갈 때 나타나는 것이 이 영화엔 진짜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영화 만들 때처럼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겠지.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그런데 그건 이 영화의 방향과 잘 맞지 않다고 느껴졌다. 직선으로 내지르는 현장,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 안에서 모두가 다 흉내 내고 어물쩡거리는 B무비 말고 진짜 B무비를 만들어보자 싶었다.
요즘은 워낙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현장 규모가 크고 그렇지 않나. 그런 건 사실 돈으로 이뤄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정말 최소한의 순수한 형태의 것들을 가지고 영화를 완성시켜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 영화 현장이 되게 가난하고 궁색해 보이는 현장이었단 말은 아니고. (웃음) 정신과 태도의 문제겠지. 진짜를 체험하는 것. 그건 사실 관객들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런 한계지점을 돌파해봤을 때 뭔가 얻어지는 게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실제로 얻은 게 많았다. 108회 차 촬영도 해본 내가 이제 30회차 촬영도 해보니까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더라.
<다찌마와 리>는 한국 영화의 전통과 오늘날 관객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싶다. 단순히 뻔뻔한 유머를 즐기는 관객도 있겠지만 개중엔 의도적으로 차용된 한국고전의 장면들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나 후자보단 전자의 태도로 이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월등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고전영화들의 명맥이 그만큼 현대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여지다.
그건 지금 우리 영화문화의 현실일 수도 있겠지. 분명 아는 만큼 <다찌마와 리>를 더 즐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극장 안의 같은 프린트를 보는 것뿐이지, 보고 나올 때는 전부 다 다른 영화를 보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지점에서 갈리는 문제가 생긴다. 난 관객들의 반응을 보자면 이 영화가 희한하게 일종의 게임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야 말로 어쩌면 인터랙티브(interactive) 영화다. 이 쪽에서 뭔가 던져졌을 때, 반대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다음 상황이 다르게 읽혀진다. 지금 말한 한국고전들, 그리고 아시아의 유치한 6~70년대의 활극영화들,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서는 007시리즈까지, 이런 것과의 연결고리가 있는 관객일수록 이 영화와 더 잘 맞아떨어지긴 할거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내게도 처음으로 이런 류의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 있었을 것 아닌가. 저런 식으로 연기를 하다니, 저런 대사를 쓰다니,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게 여겨지는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고, 그 자체로 낄낄거릴 수 있었다. 그런 정보가 단절됐더라도 즐길 수 있는 방식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로 그런 유희를 즐기면서 역으로 과거를 찾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런 시선은 내겐 부담스럽다. 사실 이 영화가 과거의 영화들에 대한 존경만 담아낸 영화는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역사를 잇는다는 엄청난 사명을 띠고 만든 것도 아니고. (웃음) 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가 오늘날엔 워낙 드물다 보니까 접근이 어렵다. 그래도 최근 영상자료원에서 활발히 프로그래밍 하고, 영화제 회고전를 통해서 소개되기도 하니까 어쩌면 다행이다. 지금보다 이런 상황이 더 나빠지기야 하겠나.
예전 영화들에 대한 존경만이 담겨있는 영화가 아니란 말은 애증처럼 들린다. 결국 <다찌마와 리>엔 자신의 소스가 된 고전에 대한 조롱 섞인 위트가 포함된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조롱의 태도는 B급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도 상통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지금 현대 관객들에겐.
사실 그것이 본래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유희였던 것과 달리 오늘날엔 일부의 특별한 취향이 되어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다찌마와 리>도 실상 매니악한 범주의 영화에 더 근접해 보인다.
지금 난 과연 순수한 형태의 매니아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모두가 다 인터넷 뒤로 숨어버린 것 같고. 만약 이 영화가 한 10년 전에 나왔다면 B무비 말고 컬트란 용어를 쉽게 갖다 붙이기 쉬웠을 거다. 근데 컬트는 장르의 개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지구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순수하고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재관람하고 그런 행위 자체가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한 뒤, 그것이 주류문화에까지 강렬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심지어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A와 B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됐지. 산업구조자체가 A와 B를 용납할 수 있는 산업구조가 아니다. 모두가 그냥 메인 게임을 뛰어야 되고,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 시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B무비를 만든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예전에 비디오 시장이 있을 때는 진짜 그런 게 있었지. 하지만 소수의 취향만을 노리고 가는 건 이제 너무나 무모한 시도다. 물론 내가 <다찌마와 리>가 온 국민이 좋아할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 명백하다. (웃음) 당연히 취향을 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국인이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강점이 확실히 있다고 봤다. 약간 모자라 보이는 영웅, 그리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무의식 중에 지닌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주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패턴들, 이런 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분명 소위 매니아라고 지칭되는 소수집단보단 훨씬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해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떤 감독과 비교되곤 했다.
매번 그랬지.
종종 그에 대한 반박을 피력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상투적인 표현들과 비교가 좀 지겨웠다. 물론 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인 만큼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다만 영화에 대한 오해가 생길 때, 그런 지겨움이 가중된다. 얘는 그런 쪽이야, 라는 판단으로 접근해서 영화를 완전히 다르게 파악해버린다. 심지어 영화를 좀 봤다는 사람조차도 그럴 땐 이건 좀 어리석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류승완 감독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관객들 사이에서도 매 영화마다 반응이 갈리는 것 같더라.
팬이라기 보단 일종의 지지층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그 지지층이란 것도 재미있는 거다. 사람들이 내가 비슷한 류의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영화 사이의 간극이 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가 비슷한 거 같지만 장르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아라한>과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와 <짝패>, <짝패>와 <다찌마와 리>. 서로 많이 떨어진 영화 아닌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같은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착각한다. 게다가 그 영화마다 지지하는 층이 다르다. 내가 만든 영화 중에 <아라한>을 제일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만 제외한 나머지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 난 류승완에 대한 팬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관심을 가져주는 건 있겠지. 개별 영화의 지지자들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영화에서 장르영화의 형태를 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당신의 영화를 장르영화의 포맷을 규정하고 싶은 욕구들도 때론 강한 탓일 수도 있다.
그게 편하니까 그렇겠지.
아까 언급한 것처럼 어떤 외국 감독들과 종종 비교되는 것도 국내에서 장르영화감독으로서 선례를 보여준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외국에서 비교군이 될만한 대상을 찾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 장르영화라는 게 어느 정도 정착기에 접어들고 있지 않나? 명백하게 한국형 공포영화의 형식이 존재하고, 한국형 범죄 영화들이나 필름 누아르, 활극 액션영화, 여러 범주로 한국화된 영화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심지어 올 여름에 웨스턴까지 나온 판에 한국에서 장르는 이제 일상적이다. 이전에 멜로드라마는 워낙 강했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오히려 특별한 거 같진 않다. 동세대 감독들이 다들 장르의 자장 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만든 6편의 영화들은 액션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지만 각각 장르적 분자들이 다른 영화다. 범죄스릴러나 느와르, 활극, 등 저마다의 추임새는 확실히 구분돼야 마땅하다. 다만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액션들이 어디선가 봤다 싶은 흡사한 이미지처럼 느껴지는 게 장르적 착시를 부르는 게 아닐까. 사실 그건 독창성의 문제가 아니라 클리셰의 영역이다. 그런 이미지를 희귀하게 인식시키는 희소성이 당신을 특수한 영역으로 구별 짓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도 내 영화에서 액션으로 펼쳐내는 장면이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액션을 둘러싼 방식에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짝패>에서 마지막 세트의 미장센 때문에 <킬빌>과의 비교가 굉장히 많았다. 영화의 내용이나 전체적인 형식에 담긴 모든 것들이 굉장히 동떨어져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시감을 갖게 되는 거다. 물론 그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다. 내 의도와 다르지만 그렇게 자꾸 받아들여진다면 나조차도 뭔가 오해 받을 짓을 한 것일 테니까.
<다찌마와 리>의 드라마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내러티브가 아니라 씬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난 이 영화의 드라마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드라마의 구성과 구조가 다른 지점인데도 그걸 착각한다. 이를테면 <다찌마와 리>엔 어떤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있다. 임무를 수여 받아서 어디로 떠났지만 거기서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가 다시 기억을 되찾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원래의 임무를 다시 수행하다 보니 앞서 깔아놨던 사건들이 뒤에서 함께 작용하면서 앞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 맞부딪히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영화가 내가 만든 영화 중 그런 복선 구조에 가장 충실한 영화다. 좀 덧붙이자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유의점은 말투를 쫓다가 말뜻을 놓치게 되면 실패하게 된다는 거다. 이 게임에서 지는 거지. 이 영화에서 대사들의 스타일은 쉽게 얘기해서 사투리라고 보면 된다. 이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말투가 그냥 이런 거다. 이 게임의 룰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론 이야기에 집중해야 극장을 나오면서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올 수 있는 거다. 거기에 실패하면 간장게장 집에 가서 간장에 밥만 비벼먹고 게의 속살 맛을 놓치고 나오는 거다.
하지만 이야기에만 집중하기엔 그것을 방해하는 유혹이 많다. 장치들이 좀 현란하다고 할까.
과잉된 이미지로 이뤄졌으니까 그런 것에 헷갈리다 보면 길 잃어버리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거지. (웃음) 깔려있는 카드도 봐야 되고, 이 골목의 구조도 봐야 되고, 언뜻언뜻 나타나는 엉뚱한 존재들에게도 신경 써야 하고, 그렇게 노닥거리다 보면 자기가 오던 길을 잃어버리는 거지. 나도 몰랐는데 반응을 보니까 양념 맛이 너무 세서 사람들이 그 맛에 넘어가는 거 같다. 사실 그 모든 상황은 얽히고 얽힌 관계를 읽으면서 진행돼야 하는 건데 사람들은 표면 위로 흘러가는 것들을 쫓아가다가 딴 데로 가버리는 거다. 이 영화가 좀 정신 놓은 영화 같지만 사실 관객들은 빡세게 봐야 하는 영화다. 정신 바짝 차려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인터넷 버전인 <다찌마와 LEE>보단 매뉴얼이 복잡해진 거 같다.
난 이 영화의 오리지널 역할을 하는 인터넷 버전도 있었으니까 관객들이 지금까지 내가 만든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준비된 상태에서 극장에 올 거라 생각했다. 이럴 땐 기대치가 너무나 명확한 관객들이 너무 위험하다. 각자 머릿속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영화들을 보려 오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거부감을 느끼게 되니까. 그 영화가 원래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것인데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 영화가 틀렸다고,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다찌마와 LEE>가 <다찌마와 리>의 원류임은 확실하지만 그 원래의 소스만으로 이 영화를 채워내기란 무리이기도 하다. 그 첨가된 새로운 소스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이런 식의 센 유머와 설정만으로 3~40분 이상을 끌고 가기 힘들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한편의 영화 안에서 장르를 이동시키면서 세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지게끔 하는 전략을 택한 거다. 사실 만주 장면에서 희한한 음악을 깔거나 썰렁하게 갔으면 그 장면의 대사들이 여전히 웃긴 대사들이 됐을 거다. 그런데 진지한 음악을 깐 이유는 그냥 앞에서 봤던 것과 이건 아예 다른 거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거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관객은 능동적인 관객들이다. 팔짱 끼고 앉아서 어디 한번 웃겨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 영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거다. 류승완이 무릎팍도사에 나왔는데 쟤 좀 웃길 거 같다더라, 혹은 자기가 영화 좀 봤으니까 류승완 영화도 내가 한번 봐주지, 이러면 100% 실패다. 그냥 이 영화의 텍스처(texture)만을 보고 들어와서 메인 타이틀 시퀀스가 뜨기 전까지 게임 설명 안내를 숙지하고 타이틀이 뜨면 그 타이틀을 좀 즐긴 다음에 본편에 들어와서 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면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수수한 미장센들이나 ‘설마’와 같은 말장난들을 하나하나씩 보고 즐길 때, 그리고 그게 뒤에서 하나하나씩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볼 때,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이기는 거다.
아이템을 수집하듯 봐야 한다는 말 같다.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장철의 <독비도>나 <서극의 칼>, 그리고 주성치 영화를 비롯한 몇몇 영화들의 특정 장면이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차용한 장면들도 눈에 띤다. 아무래도 그런 장면들을 선별하고 배열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일단 ‘007’의 패턴 안에서 생각했다. 그건 옛날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일종의 첩보영화들이 기본적으로 007이 되고자 하는 전원일기 팀의 욕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사나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예전 한국영화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그런 스파이 영화들을 참조했다. 부분적인 액션 장면들은 당신이 언급한 영화를 비롯한 어떤 다른 영화들의 영향이 있었고. 다만 더 넣고 싶지만 넣을 수 없었다거나 이런 건 특별히 없었다. 사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갔던 거니까.
사실 ‘다찌마와 리’처럼 호환이 수월한 캐릭터도 없다. 이 작품이 그걸 증명하는 셈이고.
난 그래서 이렇게 위험한 캐릭터도 없는 거 같다. 대표적으로 이런 캐릭터 시리즈가 실패한 케이스가 ‘어니스트’ 시리즈다. 뭔가가 더 재미있는 게 나올 거 같았는데 점점 이상해졌으니까.
2000년도에 인터넷 버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당시에 그걸 극장판으로 만들어봐야겠단 생각을 해보진 않았나?
그 땐 다른 영화들이 더 당겼으니까. 예전에 무비스트에서 했던 장문의 인터뷰에 실린 적도 있지만 사실 <다찌마와 리>는 다른 영화를 준비하는데 중간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바람에 갑자기 시간이 붕 떠서 가게 된 거다. 사실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뭔가를 해야 하니까, 지금 당장 시나리오를 써내려 갈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작년 추석 연휴 때 이거나 한번 써볼까 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연휴 3일 동안 초고를 다 썼다. 그리고 사무실 나와서 돌려보니까 사람들이 낄낄대고 보길래 이거다 싶었지. 그래서 숟가락 빨고 있을 순 없지 않느냐, 이걸 하자, 이렇게 된 거였다. 먹고 살려고 찍은 거지. (웃음)
인터넷 버전을 찍게 됐을 때처럼 돌발적인 기획이란 점에서 맥락이 비슷하다.
그렇지. 2000년도에도 사실은 느닷없이 제안 받고 맘대로 알아서 해보라고 했으니까.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만주 씬과 <다찌마와 리>의 만주 씬은 안드로메다급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비교하고 싶어진다. (웃음)
그러게. 사람들이 다들 그러더라.
<놈놈놈>은 만주에 직접 가서 찍었지만 <다찌마와 리>는,
영종도에서 찍었지. 만주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지나치는 땅에서. (웃음)
솔직히 그냥 만주라고 잡아뗐으면 영종도인지 몰랐을 거다.
우리가 찍은 장소는 사실 지평선이 뻥하고 뚫린 곳이 아니었다. 좀 넓은 공간이긴 했지만 나중에 촬영하고 나서 걸리는 장면들을 CG로 닦아내고 지운 거다. 사실 만들어진 이미지다.
만주에 가지 않고서도 만주를 찍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었던 건가?
갈 돈이 없으니까 못 간 거지. 거기에 무슨 자신감이 있겠어. (웃음) 지금 <놈놈놈>이후에 얘기되고 있는 만주 웨스턴 영화들을 보면 과거 개발되기 전의 한강 둔치를 만주라고 찍어놓은 노골적인 장면들과 비슷한 거다. 그러니까 옛날엔 그런 것이 영화와 관객과의 일종의 규칙이었던 거 같다. 만든 사람들이 그냥 이런 거라 하면 관객은 그냥 알았다고 끄덕이는 암묵적인 동의지. 가짜 외국어의 사용도 사실 그런 거고.
자막처리는 정말 파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설정도 스스로 착상한 건가?
그렇다. 난 요즘 현대미디어에서 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과거와 다른 형태로 변질됐다고 생각한다. 사실 저래도 되나 싶지만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미 영상매체에서 활자를 하나의 미장센으로 즐기고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단순한 활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 자체의 디자인을 즐기기 시작한 거다.
최근 버라이어티 프로에서 보여지는 자막이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맞다! 사실 최근 버라이어티 쇼에서 활자와 이펙트 사운드(effect sound)를 걷어내면 되게 썰렁한 장면들이 많지만 활자가 개입함으로써 뭔가가 더 강렬하게 증폭되는 면이 있다. <다찌마와 리>를 만들 때 내부에서 그 자막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는데 난 자신 있었다. 현대 관객들에게 활자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TV나 UCC에서는 가능한 걸 극장에서 못할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만강, 압록강, 흑롱강 씬에 사용하는 활자의 서체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라던가, 다운로드 족들이 사용하는 자막들, 그런 건 남들이 안 하는 것이기도 했고. 물론 내가 <주먹이 운다>를 하면서 이런 걸 할 순 없는 거니까.
사실 압록강, 두만강, 흑룡강 씬이 <다찌마와 리>의 농담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면 만주 씬은 그로부터 극단적으로 떨어진 정반대의 지점이 아닐까 싶다.
만주와 오페라 극장 씬은 좀 정색하고 찍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무게중심을 둔 고민은 농담과 진담의 수위 조절, 가짜와 진짜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뻥도 한두 번 들어야 재미있지, 시종일관 계속 듣고 있으면 질리지 않나. 어느 순간 정색하면 오히려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또 풀어지면 그대로 즐기면 되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쨌건 스스로에게 질문은 계속 던졌다. 그런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영화 만드는 내내 생각했다.
만주 씬의 스펙터클한 액션 씬은 다소 가볍던 영화에 일순간 비범함을 부여한다.
아무리 가벼운 영화라고 한없이 가벼워지게 하기엔 이 영화를 통해서 움직이는 자본의 크기를 무시할 순 없다. 마음이나 태도는 가볍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본을 운영하면서 굴러가는 현장 자체를 놀이터로 만들 수는 없는 거다. 그건 내 일이니까 내 일 자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철부지 같은 짓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화 감독으로서 나의 직업윤리랄까. 농담과 진담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아마 그런 지점 같다. 핵심을 가져가면서 사람들이 영화를 체험했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이 만드는 사람에게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감정적인 배우의 어떤 연기일 수도 있고, 화면의 스펙터클일 수도 있지만 TV쇼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의 동영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 그러니까 스크린에서만 봐야 할 어떤 것, 그게 중요했다.
<다찌마와 리>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영화들은 일종의 데이터 수집과도 비슷해 보인다.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매 영화마다 장르적 노선을 달리하면서 자신의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바꿔서 수집한다 할까.
학습의 차원에서? 그런 바가 없진 않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 스스로에게 쌓이는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이고. 전작의 성공이나 실패, 그건 부분적인 것부터 영화 전체를 포함한 경우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이 내 다음 작업에 영향을 준다. 성취한 것들은 성취한 것이니까 그걸 다시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 혹은 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던 것을 치열하게 복기하고 그 다음작업에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성향이 있다. 지금까지 계속 그런 패턴의 연장이었다. 매번 영화마다 성취한 지점도 있지만 놓친 지점도 있고, 그렇게 반복되는 것 같다.
<다찌마와 리>는 어쩌면 당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쉬어가는 페이지나 일종의 중간결산이 아닐까?
전과에 있는 만화 페이지처럼? (웃음)
한편으론 화가가 아니라 목수가 되고자 한다는 출사표처럼 보인다.
영화를 찍으면서 생각해보니까 나란 사람은 예술가로서보단 기술자로서 영화에 접근할 때 훨씬 더 능동적인 태도가 생기는 거 같더라. 사실 나란 사람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란 생각을 하니까 내 영화에서 숭고한 예술적 가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만들려는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어떤 세계 안에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 어떤 방식일 것인가의 문제다. 이런 고민으로 대본을 쓰고, 배우를 만나고, 영화의 쇼트를 계산해놓고, 그런 자체가 기능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그렇게 기능적으로 만들었던 어떤 영화가 아주 좋은 손재주를 보여준다면 그것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찌마와 리>에서 썰매 씬 같은 경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경험치도 없고, 쉽게 제어되는 상황도 아니니까. 임원희 씨 말로는 스노모빌에 끌려 내려간 적도 있다고 하던데.
스노모빌로 끌고 가기도 하고, 보트에 태워서 밀어 넣기도 하고, 사람 따로 모빌 따로 달리기도 하고. 우리도 처음 찍어봤고,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어서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뭐, 완전 난리통이었다. 사실 국내촬영현장에서 운용되는 장비들 중 한국형으로 개발된 것들이 많다. 야매라고 할 수도 있고. (웃음)
뭔가 능동적인 시도들이 발생한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경험적 수치를 얻은 바도 있었을 것 같고.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규모가 큰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일단 내가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세컨 유닛(second unit)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결국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유닛으로 어떻게 현장을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된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의 후시 녹음이 독특해 보이지만 지금 헐리웃의 주류영화 대부분인 90%가 후시녹음을 하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절박한 환경을 돌파하면서 학습한 것들이 많다.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측면이랄까.
어쩌다 보니 정두홍 감독과 함께 한국액션의 프랜차이즈가 됐다. 그 상황이 때론 정두홍 감독과 류승완 감독을 한국액션의 마지노선처럼 보이게 만든다. 뭔가 내부적으로 느끼는 희소성의 위기를 두 사람의 이미지로 극복하려고 한다는 인상도 든다.
난 내가 액션영화 감독이란 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니까 좋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내게 뭔가 막 짊어 지우려고 하는 게 있다. 아니,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싶은 거지. (웃음) 솔직히 나와 정두홍 감독이 함께 작업한 작품은 별로 없다. 난 그게 그냥 붙이기 쉬운 방식이고, 말하기 쉬운 방식이니까 그렇게 끌고 가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유하 감독과 신재명을 붙여서 뭔가 하는 건 이상하니까, 더 따지자면 정두홍은 김영빈 감독과도 묶였었고 장현수 감독과도 묶였었고, 오히려 김성수 감독과 묶였을 때 더 빛났다. 심지어 김지운 감독과 <반칙왕>으로 묶였었다. 그런데 나와 자꾸 묶이는 건 어쨌건 액션이 강하게 등장하는 한 감독의 세편의 영화에서 관련된 무술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이미지의 결정적 요인은 <짝패>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게 컸겠지. 본질적으로 뭐가 어떤가를 떠나서 그냥 얘네들이 계속 일 저지르고 다니는 거 같으니까. (웃음)
젊은 액션배우를 발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내가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 애들 키우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내가 무슨 배우까지 키우겠어. (웃음)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다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예를 들어서 <스페어>에 출연한 임준일이라는 친구는 굉장한 액션 배우다. <짝패>에서도 나왔지만 뛰어난 기량도 갖고 있고, 연기도 잘할 수 있는 친구다. 다만 내가 부담되는 건 내 영화 찍기도 바빠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방금 말했던 것처럼 정두홍, 류승완이 액션영화계의 뭐다, 그런 걸 인정하는 순간 그런 의무감이 막 요구된단 말이다.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건 난 엑션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까지 액션 장면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앞으로 액션이 완전히 빠진 영화가 떠오른다면 그걸 만드는 게 내 임무다. 물론 지금까지의 행위를 보자면 난 액션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이런 걸 해줘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의무를 짊어질 이유는 없지 않나. (웃음) 물론 좋은 액션배우가 있다면 좋겠지. 지금 정두홍 감독과 주축이 돼서 새로운 액션배우를 뽑은 ‘라이징 액션스타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 배우들이 존재한다면 언제든 내 영화에 기용해서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고, 그런 배우가 내 영화를 빛나게 해준다면 역시 좋은 거니까. 근데 그게 마치 의무사항인 것처럼 오해가 형성되면 부담이 된다.
사실 액션을 비롯한 장르영화 애호가로 많이 알려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엔 장르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지금은 장르에 별로 흥미가 없어졌다. 다만 어떤 특정장르들이 몸에 붙는 감은 있지.
<주먹이 운다>의 말미에서 보여준 권투 장면은 고의적으로 시선에 거리를 둠으로써 외부에서 감정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움직임을 통해 내부적인 감정을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로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당신의 영화에서 액션이 어떤 이미지적 목적만을 지닌 것은 아닌 것 같다.
피로감이라는 부분은 굉장히 정확한 표현이다. 액션 장면을 구축할 때, 그 영화를 지배해야 될 정서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를 테면 지금 말한 장면에서는 인물의 어떤 피로감이 중요했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분노의 폭발이 중요하다거나 혹은 분노한 자가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서 겪는 애처로움이 중요하거나, 아니면 <다찌마와 리>처럼 통쾌함과 박력이 중요하다던가, 장면들을 구축할 때 매번 그 장면을 지배하는 정서를 생각하게 된다. 전해들은 말인데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 영화관계자가 홍콩에서 견자단을 만났다가 <주먹이 운다> 얘길 했는데 견자단이 권투장면을 그렇게 찍는 건 처음 봤다는 거다. 그건 잘 찍었다, 못 찍었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처음 봤다는 거다. 박진감 넘치는 권투장면을 보여주겠다 했다면 교차편집의 패턴으로 진행했다던지, 좀 더 빠르게 편집해서 카메라를 타이트하게 들이밀고, 머리에 물 좀 묻혀서 주먹이 강타할 때 물방울 좀 흩날리고 그런 테크닉들을 많이 구사했겠지. 그런데 전혀 멋있지도 않게 헛방질이나 하고, 그렇게 인물들의 지쳐가는 느낌이 중요했다. 그 영화와 그 장면을 지배하는 정서가 그래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몸과 몸이 부딪힌 후에 발생하는 극도의 피로감이 당신의 영화적 정서와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건 영화마다 다르다. <다찌마와 리>같은 경우, 내가 다찌마와 리가 피로한 모습은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웃음) 어떤 세계 속에 어떤 인물들이냐, 어떤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느냐, 그걸 지배하는 정서가 어떠해야 되느냐, 그 영화가 요구하는 게 뭐냐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애호는 있다. 그런 인물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점도 있고. 그러니까 내 필모그래피에서 그런 장면들이 많은 이유가 그런 까닭이겠지. 하지만 ‘핑크팬더’시리즈를 만들면서 그렇게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웃음)
만약 2000년도의 <다찌마와 LEE>를 접하지 못하고 다른 영화를 통해 당신의 팬이 됐다고 말하는 관객이라면 <다찌마와 리>를 통해 당신에게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비스트에서 보니까 승완이형은 어쩌고 하면서, 이렇게(엄지손가락을 내리는 시늉으로) 돼 있던데. (웃음) 보는 사람들 생각이니까, 그 생각을 틀렸다고 할 순 없지 않나. 만드는 사람과 다른 입장일 순 있겠지.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엔 내가 이젠 너무 나이 들었다. 늙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진심이 전달되는 게 아니란 걸 이젠 알아버린 거다. 오해나 편견에 대해선 내가 만든 영화로 명확한 해답을 주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그렇지 못한 지점이 있었다는 이야긴가?
오해 받고 그러면 욱하는 건 있었지. 그래서 당신 잘못 본거야, 이러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다르게 볼 수 있지.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한 대사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난 진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건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거다.
어떻게 보면 <다찌마와 리>는 겉으로 헐렁해 보이지만 정교한 계산에 따라 조작된 영화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애드립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장문의 문어체 대사들이 정해진 합에 맞아떨어져야 의도된 유희가 발생하니까. 결국 그 계산된 재미를 즐기지 못한 관객은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은 이 영화는 온통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한 대로 정교함의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되게 반대의 입장으로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교함을 가장한 헐렁함이 곳곳에 배치돼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좀 허세부린다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진지한 체하거나 정교한 척하거나 허술한 척하는 영화인 거 같다. 이것이 진짜로 정교하거나 허술한 것이라기 보단 정교한 척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허술한 척하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게 허세인 거다. 호방하다, 잘 생겼다, 온갖 것들이 다 허세니까. 결국 주인공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 라고 외친다. 허세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대략 난감으로 끝나는 거지. 이 영화의 재미는 그런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과연 자기 속에 있는 진심을 얼마나 밖으로 표출하면서 살아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러니까 영화는 특히 더 그렇고, 또 영화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말들은 더 그렇고.
요즘은 점점 유희적인 형태의 감각적 자극을 요구하는 관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블록버스터 규모의 스케일에 열광하는 관객들이나 버라이어티의 자막들이 주는 현란한 효과들이 통용되는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진심으로 소통하길 바라는 감독의 입장이란 실로 고단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가 점점 정보가 돼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영화 끝나자마자, 심지어 영화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 컷의 대사를 하고 있는데 문쪽 커튼이 촥 열리면서 직원이 나오고 나가는 문 이쪽이라고 자세를 잡는 순간 불이 탁 켜지면서 관객을 막 내보내지 않나. 사실 지금 극장들이 안 그래도 된다. 예전 단관극장 시절엔 다음상영들이 많이 막힐 수 있고 영사실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그랬다지만 지금은 영화와 영화 사이 텀도 기니까 관객들을 내쫓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쫓기듯이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고 즐기는 태도 자체가 거기서 그냥 시간을 때우는 거다.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는 시간이 소중한 건 한편의 영화를 본 뒤 그 영화를 상징했던 음악들을 다시 한번 들으면서 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한번 정리함으로써 자기 안에 영화가 쌓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 나라의 영화제를 다니면서 느낀 건데 대한민국 극장이 세계에서 제일 빨리 극장에서 불을 켜는 것 같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의 문화가 그럴 정도인데 다운받아서 보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 진심을 얘기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 됐다. 하지만 입은 열려있으니 말은 해야 되겠고. (웃음)
그렇다면 대중영화라고 하는 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이 다 대중영화인 거지. <우린 액션배우다>도 대중영화고, <놈놈놈>도 대중영화고. 만드는 사람들이 대중을 대상으로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에. 물론 크기의 차이는 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차이도 있고.
우리나라 관객들의 성향이 많이 변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미 변한 지는 오래됐다. 난 사실 수년 동안 급격한 패턴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니까 영상매체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바뀐 거 같다. 예를 들면 최근 재개봉 된 <영웅본색>을 20대 여성들이 박장대소하면서 본다더라. 성냥개비를 무는 순간 막 박수치고 웃고. 그 사람들은 우리가 본 <영웅본색>과 다른 걸 보는 거지. 몇 사람이 웃는 게 아니라 박장대소를 한다더라. 강호의 도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 거지. (웃음)
사실 <다찌마와 리>가 차용한 영화들도 그 당시엔 비범한 자태를 뽐내던 영화들이다. 그것들이 지금 와서 보니 꽤나 우스운 영화가 된 거랄까. 그런데 당신의 영화도 실상 10년 뒤에 어떤 식으로 비춰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냥 이런 영화가 있는데 사람들이 괜찮은 거 같다고 보면 성공한 게 아닐까? 사실 요새 남 생각 별로 안 한다. 내가 만드는 영화가 제일 중요하지. 다른 사람을 신경쓰기엔 내 일이 너무 중요하다. 할 일도 너무 많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엔 행동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다. 절박한 것들도 많고.
막연한 미래를 생각할 만큼 현실에서 여유가 없다는 말인가?
막연한 공상하고 있을 시간에 차기작 대본 한 줄이라도 더 치열하게 쓰는 게 낫다. 그러니까 난 지금 현재의 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다음에 만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쓰는 게 중요하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도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완성했으니까 이제 다른 살길을 찾아가는 거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구입한 8mm카메라기 결국 오늘날의 계기가 된 셈인데 그 카메라는 아직 갖고 있나?
있다. 집에 있는데 이젠 안 돌아가지.
어쩌면 그 카메라에서부터 류승완이라는 역사가 시작된 거라 봐도 될 것 같다. 어쨌든 당신도 언젠가 하나의 전통으로 남게 될 텐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나?
예전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내가 지금 준비하는 영화 대본 한 줄이라도 열심히 쓰고, 내가 만들 영화를 생각한다. 어차피 사람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은 좀 사치스러운 생각 같다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 태도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야차>는 어떻게 된 건가? 정보를 검색해보면 간단한 줄거리와 천호진 씨에 대한 캐스팅 정보만이 확인되던데.
수년 째 그렇다. (웃음) 지금으로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9월말이 돼야 모든 것이 결정 난다. 지금의 시장 규모에서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갈 영화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기록적인 어마어마한 예산을 쓸 건 아니지만…… 하여간 지금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건 사실 조심스럽다.
차기작은 <야차>가 아닐 수도 있겠다.
차기작에 대해선 조심스럽다. 작년에 <야차>사태를 겪고 나니, (웃음) 되게 조심스럽다.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모든 것을 공개하고 싶다 이전에 내가 뱉었던 말들이 나한테 돌아오게 되니까 신중해진다. 책임질 수 있는 만큼 발언을 해야겠구나, 정확하게 발언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예전엔 쉽게 얘기했었지만 지금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다만 뭔가는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비워낸 것을 서서히 다시 채워가야 할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일단 어떤 구체적인 작품이나 장르가 아니더라도 뭔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 있나?
사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거 같다. 내 취향이 좀 바뀐 거 같다. 그래서 작업 방식이나 접근 방식도 바뀐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세계에서 움직이는 이야기인가가 궁금하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 안에서 어떤 드라마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인물, 인물과 인물의 관계,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발생된 사건,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그에 관해 몇 가지 메모를 해놓은 것이 있다. 사실 내 조감독을 오랫동안 맡았고 작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액션 스릴러 부분 대상을 받았던 친구가 이번에 데뷔작을 만드는데 그 대본을 내가 써줬다. 그것이 이제 곧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내가 작가로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지금 나에게 닥친 것 중 제일 시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초고만 넘겨놓고선 알아서 쓰라고 했는데, (웃음) 그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중요할 거 같다.
혹시 석환과 상환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순 없을까?
배우로서는 이미 은퇴했다. (웃음) 난 배우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웃음)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