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폭발력과 훈훈한 외모로 무대를 누비던 조정석은 지금 대중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나약할 리 없는 집념으로, 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조정석을 만난다고 하자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나? 그가 평소와 달리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지우는 대신 강렬한 남성의 인상을 그려넣었다. 도발적인 여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야심. 그렇게 조정석을 위한 화보 밑그림이 완성됐다. 촬영 당일,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 장소를 찾은 조정석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에 강인한 인상이 들어찼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조정석은 뮤지컬계의 스타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공연장을 찾지 않은 이들에게 조정석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단지 가리킬 손가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이 가리키는 대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별을 봤다. 5:5 가르마를 탄 납뜩이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에 포복절도했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제복 혹은 수트를 입은 말끔한 외모와 강직한 성격의 훈남 은시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갸우뚱하다 뒤늦게 놀랐다. “인물 자체가 다르니까 “얘가 얘야?”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두 캐릭터를 같이 연기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보여지는 시기가 비슷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첫 영화가 그 뒤에 제작된 첫 번째 공중파 드라마와 맞물린 시기에 개봉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함께 주목받았다. 진정한 ‘골든 타임’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에서 조정석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곧 뮤지컬 지망생들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 <왓츠업>에 그가 캐스팅됐다. “드라마 촬영 일정상 공연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드라마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편성이 보류되면서 1년 동안 지난한 촬영 스케줄이 이어졌고, 경력에 구멍이 생겼다. 주변에선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며 우려했지만 조정석은 시간을 투자하며 담담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건축학개론> 오디션으로 기회를 잡았고, 2011년에 방영된 <왓츠업>을 본 이제규 감독은 그를 <더 킹 투하츠>에 불러들였다. 믿음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더 큰 이윤을 요구할 차례였다.
조정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 된 납뜩이를, 조정석이 납득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용주 감독의 주문처럼 관객을 웃길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에서 TV로 보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커다란 스크린으로 처음 영화를 보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미치겠더라. 중반부터 긴장이 풀렸다. 납뜩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내가 나올 때마다 웃는 거다.” 납뜩이가 없는 <건축학개론>이란 얼마나 심심했을까. “어떡하지, 너?” 같은 납뜩이의 명대사가 조정석의 애드리브였단 사실은 그의 캐스팅이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고 믿게 만든다.
<건축학개론>과 <더 킹 투하츠> 이후로 조정석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한 시대극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의 촬영을 마쳤다. <방가! 방가!>의 감독 육상효의 새로운 연출작으로 80년대 미군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 코미디물에서 그는 ‘민중가요계의 조용필’로 불리며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조정석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교회 전도사의 권유로 한 달간 개인 레슨을 받고 시험을 친 서울예전에 합격했다. 일종의 계시였다. 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그에겐 이미 또렷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지만 조정석은 ‘자신을 굳건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과를 명예처럼 간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한 작품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모두 기억한다.”
무대에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 초까지 조정석의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일복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작품 끝나면 바로 작품하고, 작품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했으니까.” 단 한 번, 연습도 공연도 없었던 2주를 통째로 쉬었던 걸 제외하면 6년간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올랐다. 6개월간 일주일에 8회 공연 그러니까 200회 가깝게 공연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모리츠 역으로 단독 캐스팅됐을 때도 6개월간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그 무대에 올라 모리츠가 되어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매일 죽는 남자’다. 조정석의 믿음이란 그런 성실함과 집념을 담보로 둔 것일지 모른다.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 된다. 칼을 한 번 꺼냈으면 제대로 휘둘러야 되니까.” 공연이 끝나고 자신이 느낀 문제나 새로운 욕심들을 기록해 둔 ‘배우일지’도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한 칼집이다. 그는 단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건축학개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과 조승우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유력했던 <고고 70>이 바로 그것. 하지만 공연 중인 작품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공연 같은 경우, 오래전부터 공연장 대관을 준비하고, 출연 계약도 일찍 한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헤드윅> 때문에, <고고 70>은 <이블 데드> 때문에 포기했다. 영화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 해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겪어온 순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무대란 고향이자 뿌리다. 공연에 입문한 초기 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2005년에 <그리스> 할 때 공연 끝나고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가 택시비가 없으니까 막차 끊기기 전에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찜질발에서 잤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웃고 장난기도 많지만 눈물 흘리는 건 싫어한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게 싫을 뿐이다. 1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홀로 지쳐 쓰러져 울면서도 누군가의 앞에선 의연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경험을 조금 일찍 경험했다. 그래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일흔이 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를 지지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04년, 데뷔작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람도 아닌 1인 다역’을 연기하는 조정석의 무대를 처음 본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셨는데 보고 나서 우시더라.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아들의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어머니였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 어머니와 함께 <더 킹 투하츠>를 볼 때면 TV 속 아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는’ 지금은 ‘아직 아닌 거 같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아한 세계>의 감독 한재림이 연출하는 고려시대 사극 <관상>에서 조정석은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와 함께 촬영을 준비 중이다. <건축학개론>을 본 한재림 감독은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조정석을 추천했고 <더 킹 투하츠>를 본 송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선택받았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이제 다시 출격이다. 출격.” 설렘이 가득한 미소로 내뱉는 단단한 각오. 그것 참, 결코 약해질 리 없는 관상 아닌가.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물었다. 건축가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 팀장. <두 남자의 집짓기> 저자.
구승회 디자인크래프트 대표이사. <건축학개론> 제주도 ‘서연의 집’ 설계.
김찬중 더_시스템 랩 대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설계.
전숙희 와이즈 건축 소장. 다세대 주택 ‘Y하우스’ 설계.
‘건축’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두 편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다.
구승회(이하 ‘승’):약간의 의무감으로 <말하는 건축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짠하더라. 목욕탕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한테 “이거 지으신 분 아세요?” 물어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는데 그 옆에 정기용 선생님이 앉아 있다. 건축가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반인들이 잘 쓰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는 모른다니 찡했다. 한때 윗세대 건축가들이 국제적이지도 않고 디자인도 못한다고 폄하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분들만큼의 퀄리티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울컥하더라.
김찬중(이하 ‘찬’): 정기용 선생님께 개인적인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좀 울었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공간에 대한 사소한 경험이 기억의 인자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잘 보여준다. 두 영화는 건축가들이 ‘어떤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전숙희(이하 ‘숙’): <말하는 건축가>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봤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정기용 선생님 회고전을 출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이전부터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단 말을 들었는데 회고전 준비에 관해 듣고 마음이 덜컹했었다. 건축계가 이분을 보내드릴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회고전이 많은 건축가들을 묶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살아생전에 메이저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했다는 것도 건축계만의 파티가 아니라 건축계 밖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건축학개론>은 아직 못 봤지만 구승회 소장님의 작품이 나온다니 궁금하다.
구본준(이하 ‘본’):사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높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느낀 건 건축영화제였다. 건축영화제 1회가 1주일이나 더 연장상영을 했다. 지난 2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그래서 두 영화가 절묘해 보인다. <말하는 건축가>는 공공건축을 다루지만, <건축학개론>은 사적으로 건축을 다루니까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한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인가?
찬:만약 집이라는 결과물만 중요했다면 <건축학개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일을 맡겼더니 어느 날 집이 완성됐더라, 이런 건 소위 집장사라면 모를까, 건축가에게 어려운 일이다. 건축주가 집 짓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그렇지 않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의뢰인이나 환자로부터 좀 더 많은 부분을 끌어내는 거니까.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 그에 대한 기억까지 함께 넘겨야 된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런 과정의 기억 또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본:예쁜 집을 짓기 전에 하자 없이 지으려면 시공업자가 건축가의 설계를 잘 지키면서 짓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게 감리라는 영역인데, 시공업자가 설계해서 짓고 검사해서 괜찮다고 넘어가는 건, 자기가 문제 내놓고 100점 맞았다는 거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대신해서 튼튼한 집이 나오도록 시공업체를 견제하고 압박을 가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 무엇보다도 집을 짓고 나면 건축사가 영세해서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S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 지을 때 복덕방부터 간다.
숙: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만든 금호동 다세대 주택이 보도되면서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뢰가 있었는데 정작 성사되는 건 없었다. 대부분 건축가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건축주의 요구사항에 맞는 시공자를 만나도록 돕는다. 시공자는 최대 이익을 원한다.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 내에서 최대한 값싼 재료를 쓰고 쉬운 방식대로 짓는다. 건축가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체를 봐주는 거다, 그게 돈을 잘 쓰는 방법이다.
찬: 사실 수많은 아이템이 들어가는 큰 덩치의 건축물이 30년 동안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완성한다는 건 어렵다. 재료의 속성도 변할 수 밖에 없으니 분명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생활 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 불만을 말한다. 그 불만들을 긍정으로 바꾸긴 힘들다. 사실 문 손잡이가 흔들거려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따진다. 종합적인 책임자로서 건축가의 위치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 없을 때 아버지 집을 설계했었는데 덕분에 평생의 욕을 먹고 있다. 하물며 전구 나가는 것도 내 탓이니.(웃음)
승: 이사가면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우리 집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지금까지도 매일 혼난다. 와이프가 건축주라서.(웃음) 자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건축가에게 어떤 믿음을 싣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움찔하다가 ‘저는 공사는 안 합니다’ 하면서 책임소재에서 빠져 나온다. 많이 얽힐수록 힘든 게 사실이니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이가 알아서 잘 해주고, 되도록 싸게 하면서도 좋은 퀄리티를 바라는 건 당연하긴 하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바라는 바를 건축가로서 잘 듣고 있는지 고민한다. 단순히 액수를 깎아주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외국도 많이 다녀서 본 것도 많고 좋은 재료나 디테일은 많이 아는데 막상 그것들을 조합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잘 모른다.
본: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디자인 감각이 워낙 다르니까.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에 길들여져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는 사람이 90%니까. 솔직히 자기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취향도 없고. 아파트는 편리한 대신 디자인 감각을 거세시킨다.
숙:어떤 공간을 좀 강조한다면 그 건너편은 조용한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대부분 강조되는 것만 고른다. 종합적인 공간을 보지 못하는 거지.
취향은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숙: 최근에 집 짓는 것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시공사들이 공급하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들이 짓는 집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한 시공사에서 찾아왔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걸 개척해보려 한다는 거다. 적당한 규모의 땅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수요계층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거다. 주거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라 생각한 게 아파트를 쫓지 않는 세대들이 나왔다는 거다. 사실 집값이 비싸다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절망을 준다. 특히 아파트는 재산 정도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지, 어느 지역인지, 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단정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주거 형식은 다양성의 가치와 깊게 연관돼 있다.
본: 제일 중요한 건 일상에서의 건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외국에서 본 골목길은 예쁘던데 우리 동네는 왜 이런지, 쓰레기통 같은 건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일 수 없는지, 길에 분전함은 왜 저렇게 많은지, 이런 것들. 가로수길이 좋은 이유는 길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길 위에서 액티비티가 발생하고 길에 붙어있는 건물과의 상호작용도 좋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도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 집이 중요했는데 주택 하나가 예뻐지면 그 동네에 또 예쁜 집이 들어서고, 이런 건 의외로 쉽게 번질 수 있다.
찬: 역사적으로 건축이 선발 산업으로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후발 산업에 가깝게 포지셔닝된다. 산업, 문화, 예술을 포괄한 종합적 성격이 강해지는 탓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문화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다. 그런 시점에서 아까 말했던 두 영화가 때를 잘 맞춘 셈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시장성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르고.
본: 의사나 변호사는 인생 최악의 순간에 만나지만 건축가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 만난다. 일생 동안 집을 두 번 짓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아직도 대부분 건축가가 아니라 시공업체를 찾아가서 집을 짓는다. 정기용 선생님도 목욕탕이나 마을 공설운동장 같은 걸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하니까 확실히 좋다는 걸 알려준다. 2003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건축가가 하니까 그런 배려들이 생긴 거다. 심지어 순천시청 안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전담하는 행정과가 생겼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도서관 하나가 굉장히 많은 걸 바꿨고, 공공건축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실제로 건축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승: 서울의 특성은 아파트다. 어떻게든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아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나올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안 좋으니 쓸어버리자는 건 결국 지저분한 집들 다 쓸어버리고 반듯하게 짓자고 하는 무대포 마인드와 다를 게 없다. 요즘 가로수길 말 많지 않나. 이제 옛날 가로수길 아니라고, 너무 상업화됐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게 정상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고, 사람들이 모이고, 가치가 올라가니, 대기업들이 몰려와서 꼭지를 잡고, 그 사람들이 이동한다. 내 생각이 이상적인 건지 좋아지는 곳이 있으면 쇠락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서울시 모든 곳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찬:다양성이 인정되는 도시라는 면은 좋다. 다만 흑백논리로 구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사는 동네가 있으면 못 사는 동네도 있고, 지저분한 동네도 있으면 깨끗한 동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서울이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 각각의 영역들은 정체돼있지 않고 늘 변한다. 적응력도 굉장히 빠르다. 좋은 걸 인정하거나 나쁜 걸 바꾸려는 의지도 강한데, 그런 양면을 잘 순화시켜서 조화로운 관계성으로 정립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숙: 뉴욕은 볼거리가 집중된 맨해튼이 있지만 그 밖은 험악하기 이를 때 없다. 지하철 타면 누군가 뒤통수 후려칠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밑은 악취도 심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에는 산재된 풍경들이 있고, 살만한 공간으로 확산된 도시다. 다만 최근에 양산된 건물들이 많아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다이나믹함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가 없다. 뉴욕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인테리어였다. 건축물을 지어볼 기회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다들 혈안이 돼서 달려든다. 그만큼 서울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영역이다. 다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짓기보단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들이 변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서울에는 아파트가 맞다. 서울에서 어떻게 단독주택을 짓겠나. 땅값도 비싸고. 다만 기왕 짓는 아파트라면 조금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은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거라서 많은 가구수를 고려하지 못한 도로와 붙어있다. 그래서 차도 많이 밀린다. 좀 걸어 다닐만한 길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도시 좀 예뻐해 보자는 생각이 필요하다. 서울의 가장 큰 매력은 제멋대로의 도시라는 점이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나? 모든 실험이 가능한데. 나는 서울이 좋다.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지닌 지역이나 공간을 꼽는다면?
본: 종로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대표할만한 건물도 없고, 분위기도 성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된 거리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런 특징이 거리 특유의 분위기로 발전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축이 중첩되며 공존하는,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거리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숙:소년기를 강남에서 보냈고 유학을 마치고 2년 전 강북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조직이나 경관에 끌리는 편인데, 지리, 지형적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강북의 도시조직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몽촌토성에서 도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승: 한강 둔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답답할 때마다 찾아갔다. 성수동 일대나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관심이 있다. 문화적 환경이 도시 공간의 변화를 끌어낼 지역이 아닐까 본다.
찬:고등학교 때부터 가로수길의 변화를 경험했다.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상권과 땅값,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도시의 진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영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 모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본: 외국건축가를 들여오는 인식이 문제다. 명품백 사듯이 유명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외국 건축가를 잘 고르면서 국내 건축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고 최선의 경쟁을 시켜야 한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 등을 보면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에만 매달린 느낌이 강하다. 최고의 작품을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찬: 해외건축가들의 국내영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해외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만 우리 문화에 대한 단편적 사고로 완성한 결과물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건축은 단편적인 일상의 기억을 유지시켜주는 틀로서의 속성이 있다. 브랜드 파워라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맡긴다는 건 잘못된 거다. 국내 건축가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직적인 대응과 관리는 떨어진다. 고질적인 문화적 사대주의와 국내 건축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연동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승: 건축주의 눈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니 해외 건축가에게 의존하던 시기는 지나갈 거라 생각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대중들에게 건축가 정기용을 알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있을까?
본:이일훈 씨와 주대관 씨의 사회적 건축. 제한된 조건을 어떤 아이디어로 풀어냈는지, 어떤 생각을 펼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축가들의 참여가 어려운 저예산 건물과 일상의 건축에서 이뤄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축적되는 것이다.
승: 김성홍 교수가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한 ‘중간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건축물을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숙: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조성룡 선생님의 재생건축도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동료건축가로 등장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아쉽다.
찬: 능력 있는 건축가 대부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설계비는 창피한 수준이다. 공사비를 아끼면 건물이 나빠지니 설계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은 도면 10장으로도, 100장으로도 지을 수 있다. 다만 고민과 검증의 무게가 다른 만큼 고스란히 공사비의 차이로 연결된다. 고민과 검증이 치열할수록 공사비 운영도 정확해지고 절감 효과와 품질 향상이 따라올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지속적이었지만 요즘에 이르러 보다 활발한 것 같다.
숙: 소비자들에게 자기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를 조직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것 같다. 다른 비즈니스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이미 구축된 브랜드 가치가 보여지는 공간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효과적이다. 패션과 건축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경험의 소비’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기능적 필요를 넘어서 이미지 소비의 영역에서 패션과 건축은 분명 비슷한 양상이 있다.
본:장 누벨이나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요즘은 팝스타가 된 건축가가 많다. 그들의 명성이 브랜드에 부여됐을 때 얻어지는 상업적 작용이 있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기능에 구애 받지 않고 럭셔리하게 작업하면서도 조형성이나 파격성, 추상성을 강하게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구성이야 기본적인 공간의 원칙만 지키면 되지만 데코레이션은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에 있는 건물들이 스타 건축가와 럭셔리 브랜드의 욕망이 딱 맞아떨어진 사례다. 일반인들도 오모테산도 프라다 매장 앞에 가서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물이 도시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극소수의 스타 건축가들이다. 건물의 부가가치도 높이면서 대중의 주목까지 끌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럭셔리 브랜드들은 건축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찬: 1900년대 중반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라는 건축가가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자기가 설계한 집의 공간을 찍었는데 자기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와이프의 뒷모습도 나온다. 내가 받아들인 건 공간과 의상, 집기들까지 포괄한 토털 아이덴티티, 종합적인 공감각이었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스페셜리티의 공감대와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전반을 대변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거다. 사실 인더스트리의 속성에서 건축이 훨씬 오래됐지만 패션은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건축에도 트렌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의 팬시한 폼이 그렇다. 심지어 그녀는 패션 분야에서도 리터치를 하고. 건축물이라는 게 엔지니어링이기도 하지만 표피적으로 트렌디해서 패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요즘 건축계에서 ‘서피스(surfac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질감이라는 고유 영역은 패션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본: 사실 오래 전에는 건축이 모든 것이었다. 건축의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공이었다. 화가라는 개념도 16세기까지 없었다.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건축의 개념에 다 포함돼 있었다. 근대적인 개념 안에서 회화, 아트, 디자인으로 쪼개진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어쩌면 본래의 총합적인 형태로 돌아간 건축일 수 있는 거다.
건축이란 분야가 복합적인 만큼 건축가라면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할 것 같다.
중: 학생들에게 늘 건축 외의 것도 많이 봐두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부터 사회현상까지 살펴야 한다. 건축가를 마스터의 개념으로 규정한 교과과정이 있는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아니라 형태적인 관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실제로 일을 하면 너무 힘든 거다. 실버 하우스를 짓거나 유치원을 짓겠다는 사람이 노인이나 아이들 심리는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설계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자기 영감에 의존해서 혼자 죽여주는 걸 만들면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런 엘리트주의로 건축주를 가르치려 드는 악순환들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탈피하고 있다.
본: 건축은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 설계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거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나 건축주의 이래도 예측해야 한다. 예지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집이 뭔가를 고민해야 된다. 그게 인문학이다. 건축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다. 어떤 식으로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철학책 읽으라 한다고 짜증내지만 건축은 항상 사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인 기술이다. 자주 쓰는 예인데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과 유사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었다. 한번은 몬드리안 추상화와 똑 같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 가격이 몬드리안 그림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예술은 쓸모가 없어서 비싼 거다. 쓸모를 초월하는 거다. 건축은 쓸모가 있다. 결국 예술이 될 수 없는 거다.
찬: 건축에서 쓰는 소재 대부분은 건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거다. 알루미늄이나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 같은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부유물들을 재활용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다. 건축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요즘 등장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çade)도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에서 끌어온 방식인데 다른 장르에서 10년 정도 활용된 방식이 건축적으로 전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단열 개념도 그랬고. 어쩌면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그런 인더스트리의 사이클을 잘 알았다고 본다. 이런 사이클을 이해해야 장기적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 트렌드는 영속적이지 않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긴 방향을 알려준다.
본:실내 건축 같은 경우 차용이 더욱 쉽다. 티타늄 강판을 건축소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행기나 안경에 먼저 쓰이고 건축으로 왔다. 건축은 보수적이라 안전하게 검증된 것들만 채택한다.
건축가에 대한 로망을 말하는 여자들을 종종 봤다.
승: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들이 단지 직업 때문에?(웃음)
찬: 우리 집사람이 내가 <엘르>에서 토크한다니까, 자기를 하라더라. 피부에 와닿는 말 다해준다고.(웃음) 공대생들 가방에서는 공학용 계산기나 공학 관련 책이 나오는데 건축공학과는 스케치북도 나오고 철학책도 나온다.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결합된 느낌이라 인간적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고집이 세다. 아마 건축가의 DNA가 그런 것 같다. 그 정도 고집도 없으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다. 직업인으로 봤을 때는 집중도도 높고 낭만이 있어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생활인으로 봤을 때는 나이 들면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생 밖에 없다.(웃음) 고집이 센 반면 어느 순간 탁 놔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데리고 살기에는 살얼음 같이 불안한 느낌이 있을 거다. 게을러서 옷도 맨날 까만 색만 입고.
본:그런데 또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원래 무채색은 모든 색에 코디가 가능하다고, 모든 색을 함유한 색이라고(웃음).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사실은 진짜 첫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이 완공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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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는 건 일종의 판타지다.
판타지지.
첫사랑은 언제였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직도 연락한다.
진짜?
학교 다닐 때 모임에서 만난 친구라서 아직도 연말에 망년회할 때 본다.
당신이 좋아했다는 걸 아나?
우린 사귀었으니까.
아~!
난 승민이 같은 경험은 없다. 결국은 사귄다, (웃음)
실제로 건축 일을 했다던데.
대학 졸업 후 4년 정도 설계사무소를 다녔다. <건축학개론>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다. 기획 당시만 해도 영화인의 정체성보다 건축인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컸다. 사실 건축일 할 때 주택 한 채를 설계해보고 싶었다. 결국 못했지. 주택 프로젝트가 흔치도 않았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대사처럼 그런 의뢰를 받을 위치도 아니었고.
주택?
여러 건물을 설계했지만 주택이 가장 쉬운 듯 어렵다. 설계사무소도 안 하려고 한다. 공력은 오피스 짓는 것과 비슷한데 돈이 안되니까. 주택은 사실 모든 설계사들의 꿈이다.
‘구성원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의뢰하면 건축가가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 게 건축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오피스나 관공서 같은 건물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니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면 오히려 반칙이다. 주택에는 개인의 취향만 존재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정말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집주인이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욕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에 따른 모델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썼나?
2003도였다.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장대했다. (웃음) 한 세 번 엎어졌나. 첫 제작사에서는 캐스팅이 안됐다. 다음에는 캐스팅이 됐지만 제작이 안됐고,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했고. 사실 <불신지옥>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시작했다가 한번 더. (웃음) <건축학개론>과 30대를 보냈다. 애초에 미련을 버렸으면 진작 입봉했을 거라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많이 말렸다. 괜히 시간 날리지 말라고.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은 얻었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순진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에 흥미를 지닌 사람이 많지 않았나.
많았다. 하지만 엄한 제작자가 흥미를 가지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나도 고생한다.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했다. (웃음) 그 생활을 3~4년 하니까 순수해질 수가 있나. 누군가 세팅을 해야 가능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어쨌든 찍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께서 우연히 시나리오 보시고 하자 하셨다. 만약 심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안 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하고 그랬다. 하지만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면서 투자도 안되고, 캐스팅도 안되고, 그런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게다가 <불신지옥>으로 입봉했지만 흥행에서 망한 감독이라 그 이후에도 힘들었다.
<불신지옥>에 대한 평가는 좋았는데.
어리둥절하더라. 그때는 입봉 자체가 목표였다. 영화 감독 되려고 이 판 들어와서 10년을 보냈는데 영화 한편 못 찍고 주저앉느니, 은퇴하더라도 영화 한편은 찍어야지 싶더라. 약간 변질된 느낌이지만 사실 영화판에 그런 케이스가 많다. 멜로는 A급 배우가 붙여줘야 비로소 투자가 되는데, A급 배우는 입봉 감독과 하지 않으려 하고, 캐스팅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캐스팅 부담이 덜한 장르로 접근했다.
공포 영화가 감독들의 입봉 수단이란 말도 있지.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공포가 워낙 안되니까. 나 역시 쉽게 입봉했다 말할 수 없고. 아는 후배가 한다 그러면 말릴 거다.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멜로 영화 각색에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제대로 써본 건 <건축학개론> 하나였다. 작가나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멜로 외에 다른 걸 쓸 수 있을지 두렵더라. 그래도 입봉하려면 뭔가 쓰긴 써야 했고, 다른 걸 해보고 싶기도 했다. 멜로는 감정극이니 상황극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시작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불신지옥>이 짓기 위해 지은 집이라면 <건축학개론>은 짓고 싶은 집인 셈이다. 초고와 영화 사이의 차이가 궁금하다.
현재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는 비슷하다. 10년간 각색하면서 현재를 다루는 게 힘들었다. 시작할 때가 서른 넷이었고, 지금이 마흔 넷이니까, 나이 먹으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지더라.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
물론. 얘가 사귀자는데 왜 싫다는 거지? 속상해서 많이 울었다. (웃음)
연애는 얼마나 했나?
많이 했다. <건축학개론>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대학 시절 소개팅하고 다섯, 여섯 번 봐도 안 맞으면 헤어진다. 그 헤어지는 형식에 대한 비겁함이랄까. 예를 들어서 여자가 연락을 기다리는데, 연락 안 해주면 그대로 페이드 아웃. 굉장히 비겁한 거지. 어릴 때는 더더욱 그렇고. 그에 대한 반성?
90년대 학번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내가 90학번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인 96년도에는 취업해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할 때 주변에 컴퓨터 있는 친구도 없었고, 삐삐 같은 것도 없었다. 대학교 2학년 즈음 노래방 생기고, 클럽 생기고 그랬다. 급격하게 디지털화되면서 IT라는 단어도 처음 생기고, 인터넷은 좀 나중인가.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뭔가 빠르게 변했다. 90년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기 보단 그 시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많다. 그 시대를 관통한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접근한 셈이다.
촌스럽지만 반갑더라.
5년 전만 봐도 촌스러운데 10년이면 엄청나지. 10년 동안 <건축학개론> 준비하면서 어떤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지금 드림콘서트 보면 되게 촌스럽다. 최근에 98년에 데뷔한 핑클 멤버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 본적 있나? (웃음) 시간이 그렇다. 그래서 정겹기도 하고.
처음 컴퓨터를 가진 건 언제인가?
94년도? 입대하기 전에 교양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리포트를 워드로 제출하라는 거다. 손으로 쓰면 안 된다나? 학교 앞에 손으로 쓴 리포트를 타자 쳐주고 출력해주는 인쇄소 비슷한 게 있어서 돈 주고 맡겼다. 짜증났지. “이런 걸 왜 해?” 막 이러면서. 그런데 군대 다녀오니까 죄다 컴퓨터로 하더라.
다른 건 몰라도 삐삐는 정말 유물 같더라.
그런 첨단기기가 시간의 척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 친구가 시티폰 쓸 때는 웃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기잖아. 나는 사실 삐삐를 안 좋아했다. 카페에서 ‘호출하신 분!’ 부르고 그러면 되게 이상해 보였다.
옛날 물건들 가진 거 있나?
알바해서 처음 산 CDP가 아직 있다. 그런 거 모아놓는 편이다.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고, 버리긴 아깝다. 지금도 작동되고.
손 탔던 물건 못 버리는 편인가?
그런 건 아닌데 부피만 크지 않으면 기념이 될만한 물건은 두고 본다. 대학 다닐 때 갖고 다니던 학생수첩도 아직 갖고 있다. 그 당시 썼던 전화번호부 보면 내가 예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도 떠오르고. 자주 보진 않지만 그 정도는 남겨뒀다. 큰 건 너무 짐이고.
영화 준비하면서 자주 꺼내봤겠다.
개봉하고 영화 내리면 정리 좀 할거다. 너무 오랫동안 그 짓을 했더니 지겹다. (웃음) ‘기억의 습작’도 못 듣겠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원래 좋아하던 곡인가,
좋아했지.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뒀던 곡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만지면서 곡도 계속 바뀌다가 나중에 ‘기억의 습작’이 어울려 보였다. 노래도 좋고.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더라. 김동률 씨가 대학 과후배거든. 만나본 적이 없다. VIP시사회에 잠깐 왔다던데 인사도 못했다. 나나 그 친구나 건축도 안 하는데 학과 선후배가 무슨 소용이냐.
조정석의 재수생 연기가 압권이다. 주변에 재수했던 친구는 없었나?
내가 했다.
재수할 때 연애했었나?
난 모범생이었다. (웃음) 연애하면 대학 떨어진다고 믿고, 공부만 했다.
재수까지 해서 연대 건축공학과에 갔다. 원래부터 건축을 좋아했나?
고3때 연대 건축과 썼다가 떨어졌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성격도 약간 꼼꼼하고,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엄마한테 이사 가자고 조르지 않나. 본인이 사는 공간에 불만이 있는 거다. 나도 그랬다. 오래된 중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내 방은 창이 밖으로 나지 않고 복도로 나있었다. 창에 대한 갈증이 많았지. 어릴 때 어머니한테 그런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 집을 그저 부가가치,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신 거다. 그런 불만은 그저 사치였다. 나는 공간의 질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건축과에 간 거 같다.
어디 살았나?
정릉 토박이인 승민처럼 38년을 동부 이촌동에서 지내면서 초중고 다 나왔다. 지금은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 어릴 때 뛰어 놀던 공간들을 보면 기억이 살아난다. 사실 다른 동네에서 사는 게 여전히 이상하다. 어머니는 아직 거기 산다.
동네친구도 많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사는 동창들이 많았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얼마 전에도 이촌동에서 모였는데 난 바빠서 못 갔다. 한 친구 전화로 일곱 명이 돌아가면서 인사하더라. (웃음) 12년을 한 동네에서 복작복작하던 친구들이니 유대감도 깊다.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같은 대학까지 간 친구도 있으니까. 맨날 만나서 농구하고, 레코드점 가서 LP사고, 서로 판 빌려 듣고, 옛날 기억이 선하다. 이촌동은 아파트가 많은 동네인데, 그 아파트들을 보면 여긴 누구네 집이란 식으로 인식된다. 여전히 거기 사는 친구도 많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승민과 닮았다. 개인적인 경험이 캐릭터에서 반영된 것 같다.
맞다. 게다가 승민이처럼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랑 둘이 살았고, 어머니께서 장사도 오래하셨다. 집에 대한 불만도 그렇고, 승민이에겐 내가 녹아있다.
“정릉이 어떤 왕의 능인지 알아?”라는 영화 속 대사 때문에 찔리더라.
대부분 모를 걸. 왕이 아니라 비의 능이지. 별 의미 없지만.
건축학개론 수업 장면에서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의 시작은 자기 동네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수업 중 들었던 말인가?
내 생각이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처럼 지도에 루트를 그리는 건 대학 다닐 때 실제로 친구들과 스터디에서 했던 일이다. 교통지도를 분해해서 전도만한 지도로 조합했는데 나름 재미있다. 통학로나 친구집으로 가는 노선을 지도에 그려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다시 보인다.
되는 면이 있다. 일종의 도면화 작업?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공간을 재발견하는 느낌이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디일까. 처음 시나리오 구상할 때, 화두는 이거였다. 고향이라 하기에 서울은 너무 넓은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승민은 태어나면서 한곳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을 꿈꾸는 친구라면 서연은 이 동네 저 동네 부유하다가 정착을 꿈꾸는 친구다. 둘의 만남은 성장통이다. 결국 그 이후에 승민의 공간이 넓어진다면 서연은 비로소 고향에 정착하는 셈이다.
정릉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서울의 한 동네에 오래 살았다는 설정에 어느 동네가 어울릴까 생각하니 정릉이 그렇더라. 내가 원한 건 명확한 구획이 있는 동네였다. 강남은 구획이 안 된다. 길 하나 건너면 다른 동네가 되고, 서로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고. 예를 들어서 이촌동은 한쪽이 한강, 한쪽이 철길,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획화됐다. 마치 섬 같은 여의도처럼. 강북에는 그런 동네가 많다. 그래서 바운더리에 대한 인식도 강하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건 정릉에 버스 종점이 많다는 거다. 도시의 끝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710번 버스는 정릉에서 개포동으로 이어지는, 서울 강남북을 가로지르는 황금노선이다. 예전에 비슷한 소재로 단편도 찍었었다.
어떤 내용인가?
내가 타는 버스의 반대 방향 종점은 내게 가장 먼 곳이다. 그 당시 동부 이촌동에 38번 버스가 있었는데 월계동은 우리 집 방향의 반대쪽 종점이었다. 30년을 넘게 한 동네에 살면서 38번 버스를 타고 항상 노선도를 봐왔는데 어느 순간 그 월계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른 넘어서 버스 타고 종점까지 혼자 가면서 단편을 찍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르다.
사실 서울에서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지 않나?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서울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어떤 동네에 대해서 비하하기도 하고. 심지어 강북을 두려워하는 강남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호기심을 당긴다. 시나리오에 그런 생각이 반영됐다. 과거가 거시적인 공간이라면, 현재는 미시적인 공간. 과거의 인물들은 도시를 돌아다니고 교외까지 나가며 경험을 확장하지만 현재의 인물들은 공간으로 파고 들듯 기억으로 들어간다.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지더라. 어디인가?
서귀포 위미리. 명필름과 제작 합의한 다음에 제일 먼저 집 알아보러 내려갔다. 열 군데 부동산을 돌면서 찾았다. 영화에 어디가 적합할지 보러 다니고 결정한 다음에는 그에 맞춰서 시나리오 각색했다.
제주도에서 증축된 집은 실제로 지었나?
처음 나온 벽돌집은 진짜 집이고 증축되는 건 세트다. 설계하는데 두 달 반 걸렸다. 그런데 명필름에서 진짜로 공사 들어간다. 다만 영화 속 디자인과 똑같이 지을 수 없어서 세트 디자인을 했던 구준회 소장이 다시 설계하는 중이다. 거의 끝났다더라. 5월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공 예정이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대학 출신이다. 1년 차이 학번이던데, 원래 아는 사이였나?
전혀 몰랐다.
연대 영화 동아리가 유명하다.
한번 가입했다가 이상해서 나왔다. (웃음) 난 사진부였다. 조선희 사진작가가 동기다. 이번 포스터도 선희가 찍었다. 벌써 22년지기다. 서클 선배 감독도 한 명 더 있네. 임상수 감독님. (웃음)
건축학과 출신이니 만큼 세트 제작에 관심이 많겠다.
당연하지. 나는 미술감독 두 명 달라 그런다.
건축일은 왜 그만 뒀나?
재수까지 해서 건축과를 갔고, 그만 두리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설계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척박한 현실을 각성했다. 내 성향 탓이겠지만 ‘이렇게 못살겠다’는 생각했지. 건축은 좋은데 건축 현장이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회사 생활 2년 즈음 됐을 때부터 흥미가 떨어지면서 겉돌았다.
그럼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컴퓨터에 관심이 생겨서 사진도 찍고 했으니 혼자 관련 책을 사서 포토샵 공부하고, 일러스트레이터 해보고, 이런 낙으로 살았는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Premiere)’를 손댄 게 화근이었다. (웃음) 재미를 붙이다가 결혼을 앞둔 절친한 과동기를 위해서 결혼식에 상영할 영상을 편집해줬다. 어릴 때 사진 스캔 받고, 그걸 동영상으로 편집하면서 음악도 깔고, 나중에는 영상 파일을 CD로 구워서 친구한테 보여주고, 그게 내 인생의 첫 시사였다. (웃음) 그러다가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해서 아까 말한 단편을 찍었고, 한겨레 문화센터 등록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화하겠다 마음 먹었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포기하기가 쉬웠나?
사실 건축설계사들은 이직이 심하다. 2년 정도 다니면 자연스레 직장을 옮긴다. 그런데 옮기자마자 IMF가 터져서 선배들 잘리는 거 보니 정나미 떨어지더라. 나는 언제 잘릴까 싶고. 앞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는 게 요원하게 느껴졌다. 봉급도 더럽게 짜니까. (웃음) 솔직히 그래서 영화도 엄두가 안 났지.
그런데 왜 선택했나?
IMF 터지고 연봉 재협상하면서 초봉 수준으로 월급이 깎여버렸다. 뭔 차이인가 싶더라. 처음에는 방송 PD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IMF 터지니 PD도 안 뽑더라. 그런데 MBC에서 기습적으로 공고를 냈다. 그때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어서 점심 시간에 방송국까지 걸어가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일요일에 여의도 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그것도 언론고시라서 1년은 준비해야 된다더라. 해볼까 했는데 그 해가 응시 자격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지막 해더라. 역시 불합리하다. (웃음) 그냥 영화하자 했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살인의 추억> 후에도 영화를 계속 해야 되는지 고민했다. 봉 감독님이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셔서. (웃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도 생각했다던데.
입봉을 못하니까. (웃음) 다들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연출하고 싶다 하면 다른 말을 한다.
어쨌든 오랫동안 염원하던 작업을 이뤘다. 후련한 기분도 들겠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장대한 시간이었다. (웃음)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확실한 건 이제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아무리 좋아하는 이야기라 해도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상처도 많았고, 창피했지. 순진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까?”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10년 전에 뭐하고 있었나?
10년 전이면 <살인의 추억> 연출부 시절이다.
그때 10년 후를 생각해봤나?
감독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마 그때 2009년도에 겨우 입봉할 걸 알았다면 그만 뒀을 거다. (웃음) 2005년 즈음에는 입봉하리라 생각해서 준비했다가 이 꼴 났다. (웃음)
정말 치가 떨렸나 보다.
나이 서른 넘어서 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한 달에 모든 생활을 50만원으로 할 때였으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친구도 못 만나고, 외출도 못하고, 어머니 걱정도 심해지고, 간혹 만나는 친구들도 술 사주면서 걱정 하고.
어머니 반대도 있었을 텐데.
2년만 해보겠다고 약속해놓고 어겼지. 좀 더 있으면 감독 될 거 같아, 막 이러면서 속이고. 어느 순간 어머니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신 것 같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입봉하고 나서 비로소 인정하셨지.
그때 반응은 어땠나?
좋아하셨지. 청룡영화제 각본상 받아서 TV 나오니 인정하시더라. 그 전까지는 안 좋아하셨다.
부모님들은 상 받으면 좋아하지.
TV 나오니까. (웃음)
10년 뒤를 생각하나?
한다. 나는 내일, 이번 주, 1년 뒤 어떻게 살지 습관적으로 계획하는 편이다.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중에 알았다. 막연하게 10년 뒤도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바람도 섞여 있고. 건축설계사 하면서 싫었던 건 1년 뒤, 3년 뒤, 10년 뒤 자리가 정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영화일은 1년 뒤를 예측할 수 없다. 다른 직업도 그렇겠지만 특히 그렇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더욱 필요한 거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매력 있다.
예상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두렵지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 안정적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겠지. 안정적이란 말은 결국 딱 그 정도라는 말이잖아. 어쩌면 답답한 일이지.
<1박 2일>의 엄태웅이 배우로 돌아왔다. 열혈형사로 분한 <특수본>이 바로 그것. 사실 엄태웅은 <1박 2일>로 전국을 돌던 와중에도 언제나 현장에 있었다. 단지 그 동안 우리가 배우 엄태웅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배우 엄태웅이 돌아왔다.
“저는 원래 배우였으니까요.” 그랬다. 엄태웅은 원래 배우였다. <1박 2일>이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부활>이나 <마왕>과 같이 어둡고 무거운 톤의 드라마에서 힘있는 연기를 선사하며 ‘엄포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는 <1박 2일>의 출연과 함께 그야말로 딴사람이 됐다. 족구 시합 중에 헛발질을 하며 ‘개발’이라 놀림을 받고, 김장 중에 생선 두 마리를 뽀뽀시키며 주변에 화색을 돌게 만들며 엄태웅은 대중 곁에 친숙하게 가 닿았다. 사실 배우에게 예능 출연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캐릭터들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 출연진의 성격이나 취향을 적나라하게 벗겨내는 요즘 예능의 입담에 투신하기란 분명 꺼려지는 일일 게다. 엄태웅 역시 몇 달간 출연 요청을 고사했다. 결국 <1박 2일>은 실보다 득이 많은 선택이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강한 인상을 지닌 배우로 인식되던 엄태웅이 동네 청년과 같은 소탈한 자연인의 인상을 드러낼 때, 배우 엄태웅에 대한 인상도 새롭게 발견된다.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들의 가면 아래 드러난 엄태웅의 진짜 표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매주 방송되는 <1박 2일>의 촬영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엄태웅은 남은 ‘4박 5일’을 연기로 채워나갔다. 그의 9번째 영화 <특수본>(2011)은 경찰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수사본부의 형사들이 경찰 내부 비리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그린 범죄액션물이다. FBI 연수 중인 심리학 박사 김호룡(주원)과 짝패를 이룬 열혈형사 김성범을 연기했다.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니었지만 신체의 위협은 느꼈어요.” 너스레를 떨 듯 말하지만 실제로 맨몸으로 뛰고 구르는 스턴트 액션까지 소화해내는 엄태웅은 현장에서 ‘엄액션’으로 통했다. 처음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적응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특수본> 촬영을 병행하는 것도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태웅은 이 모든 과정을 즐기고자 노력했다. “일단 예능은 처음이라서 힘들었죠. 게다가 영화도 어떤 장면이 잘 안되거나 할 때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일이 있으니까 계속 해야 할 것 같고,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거죠.”
사실 엄태웅은 오랜 무명 시기를 견뎌내고 오늘까지 왔다.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1998)에서 단역 출연을 계기로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한 그는 긴 시간 동안 작은 역할에 자신의 꿈을 재워두고 기회가 무르익어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는 첫 번째 기회였다. 비록 단역이었지만 충무로를 주름잡는 수많은 남자 배우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엄태웅은 묻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2004)과 <공공의 적 2>(2005)으로 이어진 강렬한 인상으로 스스로의 자질을 인식시켜나갔다. 진정한 기회는 브라운관을 통해서 찾아왔다. 드라마 <쾌걸춘향>의 변학도 역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자신의 인생을 비극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이들을 향한 복수를 감행하는 동안 내적인 갈등을 느끼는 1인 2역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전시한다.
“역할의 비중이 커지고, 개런티도 늘어나면서 부담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결국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는 건 좋은 일이겠죠.” <부활>이후로 엄태웅의 경력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진정한 주행이 시작됐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고, 그의 캐릭터들은 항상 극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을 점했다. 사실 엄태웅의 연기에는 그 캐릭터의 강도와 무관하게 일관적인 망설임, 즉 반박자 느린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어떤 역할을 연기할 때마다 그 캐릭터가 뭔가 과하게 보이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게 좋아요.” 그의 캐릭터들은 한결 같이 어떤 확실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 그것이 그의 캐릭터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지금까지 스스로 시원하게 연기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엄태웅 스스로의 조심스러움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은 다가올 경험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와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능 출연이 쉬운 일이 아니었듯, 점차 넓어지는 연기적 보폭이 그의 발전을 대변하는 바로미터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지난해 270만 관객을 동원한 <시라노; 연애 조작단>으로 흥행배우 대열에 올라선 그가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건 때로 지나친 겸손처럼 보인다.
엄태웅은 말한다. “연기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 이상이 아니에요.” 하지만 또 다시 말한다.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제 안의 모습이 하나하나씩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그럼 언젠가 저만의 연기 스타일이 보이겠죠.” 엄태웅에게 중요한 건 분명 삶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연기한다. 하지만 연기는 그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발전을 바란다. 무엇보다도 엄태웅은 동료 연기자들로부터 유독 ‘인간적’이라는 평판을 많이 듣는다. 촬영 현장 곳곳의 풍경을 차곡차곡 쌓아둔 그의 미니홈피 사진첩은 정이 많은 인간 엄태웅을 드러내는 창과 같다. 그는 삶과 직업의 경계를 넘어서 구수한 된장 내음처럼 퍼져가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쉬었다가 오는 듯한 <1박 2일>” 사이사이로 연기적 경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벌써 <특수본>의 차기작인 <네버엔딩 스토리>의 촬영을 마친 그는 벌써 그 이후의 차기작인 <건축학개론>의 촬영에 들어갔다. 구수한 된장처럼 친숙하지만 깊이 있는 매력을 지닌 배우 엄태웅은 그렇게 삶을 담그며 스스로를 숙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