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학생들이 모인 교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독백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일인칭 시점의 서술로 일관되는 소설의 구어체는 유코의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설의 화법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부하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단지 교훈적인 메시지에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목적에 충실한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다섯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의 양상을 중계하며 결말부를 제외하면 내러티브의 흐름 또한 동일하다. 하지만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는 건조한 톤의 문체로 일관된 원작과 다른 범위의 감상적 접근을 유도한다. 영화는 보다 인위적인 연출적 과장이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미끈하게 정돈된 이미지가 유려하게 흐르는 <고백>의 영상은 유코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진실에 다다라 비로소 그것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이질적인 포장에 가까운 결과물이자 위장에 가까운 고의적 연출이라는 진실에 접근한다.
활기찬 교실의 풍경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침전돼 있다는 사실은 곧 그 교실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과정은 세련된 영상으로 포장된다. 이는 일종의 위장이다. 진실을 폭탄처럼 안고 있는 아이들은 그 불안감 속에 스스로 잠식되고 도피하듯 공격성을 발휘하다 이내 쉽게 폭발의 위협에 꺾이고 만다. 이는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공격성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평온한 외형에 대한 은유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작은 괴물들이 자라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삶을 유린한 뒤,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의 룰을 완성한다. <고백>은 이 모든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한 학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압축하고 확대해나간다. 그리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으로 구현해낸다.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영상이 감상의 흐름을 막아서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냉소적인 영화는 결국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말해도 좋은 결과물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의 지옥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기준조차 깨닫지 못한 악마로 길들여지고, 또 다른 지옥을 함께 만들어간다. <고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동시에 결코 낯설지 않은, 소름 끼치는 경고이자 진단이다. 당신의 아이는 안전한가? 그 전에 당신은 안전한 사람인가?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는가?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당신의 무관심까지 집어삼킬 게다.
풋풋한 아이들로 가득한 어느 교실의 풍경, 하나 같이 손에 우유를 들고 마시는 아이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의 풍경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질로 가득하다. 교탁 앞에서, 그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말이 학생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실 속 아이들의 무관심한 소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충격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자신의 반 학생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유코의 일인칭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일인칭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소설은 다소 충격의 강도가 높은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일인칭 화법의 구어체 서술로 진전되며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의 놀라움을 감정적인 감상으로 전달하기보단 이성적인 이해로서 응시하고 해부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또한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플롯 자체에 충실한 냉소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중계한다. 하지만 텍스트로 읽히는 소설과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가 동원되는 영화는 두 매체의 형식적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건조한 화법을 유지해나가며 감정의 온도차를 발생시키지 않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가 좀 더 격양된 톤의 분위기를 지닌 결말을 연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작품은 분명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차이란 기본적인 스토리의 태도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 <고백>은 건조한 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연출 기법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담담한 문체의 저변에 놓인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은 활기찬 교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려한 영상의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잠재돼 있음을 전해 듣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인 영상의 느낌과 영상 속에 잠재된 분위기가 뒤틀려 있다는 감상은 고백의 시작과 함께 그것이 일종의 위장과 같은 전술적 의도임을 깨닫게 만든다.
<고백>은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폐쇄적 관계 회로 속에 매몰된 이들의 출현으로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관한 의식을 전달한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세대차,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살해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이 세대의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삶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을 형성해 나간다는 진리,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단지 단 하나의 학급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다만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플롯과 영상이 자연스러운 감상을 방해하는 단점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쩌면 의도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 냉소적인 영화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온전히 구현해내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소름 끼치는 충격에 가깝다. 당신의 사회는 안전한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고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4시 반 시사회를 보기 위해 회사 앞에서 왕십리로 가는 버스를 탔었다. 몇 정거장 즈음 지나니 중학생 정도 되는 애들이 선생님 인솔 하에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한 아이가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가방에 밀렸다. 아이에게 한 마디가 넘어왔다.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마구 앉으면 어떡하니?" 무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례하게 받아쳤다. "아, 이 인간 뭐야. 짜증나게."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더욱 깊숙한 뒷 빈 자리를 찾아갔다. 아이는 거듭 투덜대고 있었다. 버스를 꽉 채운 아이들은 마냥 시끄러웠다. 문득 <고백>의 오프닝 시퀀스가 떠올랐다. 통제하기 쉽지 않은 미성숙함의 아수라장. 요즘 어린 애들은 예의가 없다는 클리셰 같은 말이 떠오르는 꼰대스러움. 잠시 어지러운 생각이 뒤엉켜 버스 안을 뒹굴다 사라졌다.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