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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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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