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이미 끝장난 세계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생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단지 살아남았고 죽을 수 없어서, 혹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유효하지 않은 생이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그 삶엔 인간적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근거가 없다. 이미 인간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가 없다. 폐허로 내려앉은 문명의 지난 흔적들은 인간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역사를 거짓말처럼 되돌린다. 거대한 재의 기둥이 된 나무들은 하나씩 쓰러져가고 바다마저 잿빛으로 물든 세상엔 한기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그 끝장난 세계의 풍경에 에워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아이는 묻는다. “우린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선을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한 세상에서 부자(父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들이 그 빌어먹을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발 남은 총알을 장전하기 망설이는 건 그 두 발의 총알이 자신과 아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총알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아들부터. 그리고 그 전까진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옮기는 사람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 너머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건, 불행히도 그 부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이다.
<더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종말을 지나쳐버린 인간들의 껍데기만 남은 일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얇은 껍데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단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해치지 않기 위해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한다.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부자는 남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 발걸음엔 어떤 의욕이나 야심이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 걸어도 걸어도 희망 없는 내일을 향해 살아나가서 전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를 환기시키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참혹한 풍경에서 몇 발치 벗어나 스크린을 응시할 누군가가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대지 구석까지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는 되레 보는 이의 현재를 환기시키고 그 세계 속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부자의 전진을 통해 제 삶을 살필 것이다. 그 황폐한 세계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전진하는 부자는 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음습한 세상에서 입김을 내면서도 종래까지 인간적인 양심의 체온을 잉태시키고 유지해나간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세의 관념 따윈 온전히 증발해버린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을 고민한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약 원작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하여 <더 로드>에 좋은 평을 내릴 수 없다는 지적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 있고, <더 로드>가 있었다. <더 로드>를 추켜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원작에 예속돼버린 것들이다. 그 황폐한 세계관의 디자인은 작가의 손으로서 이미 기록된 것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 아래 매몰된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러한 영화의 결과물을 보고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건 영화의 입장에서 분명 억울한 일이 될게다.
<더 로드>는 분명 비범한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는 원작의 유려한 활자를 장엄한 영상으로 치환한 <더 로드>는 비범한 텍스트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만으로도 일단 성공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현성이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 원작의 비범한 양태를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것이 품은 감정적 내면을 원작과 다른 판본의 틀 안에서도 온전히 전달해낸다. 텍스트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거나 연상했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자리를 잡고 시선을 압도해낸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네오이마주 백건영 편집장님으로부터 개편 축사를 부탁받았다. 게으름과 축적된 업무 처리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개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랴부랴 작성한 글. 늦은 밤에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써내려갔더니 두서가 없다. 어떤 대단한 야심도 없이 불필요한 잡담이 팔할이다. 맙소사. 아침에 맨 정신으로 보니, 지저스 크라이스트. 어쨌든 그래도 네오이마주는 온라인의 열악한 텍스트 사이에서 나름대로 진중한 영화 보기를 추구하는 비평 사이트다. 영화에 대한 깊은 견문이나 애정이 충만한 이들이라면 한번 정도 구경해보시라. 이하는 개편 축하글 전문.
“강한 놈이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여.” <짝패>에서 나오는 그 대사처럼, 정말 살아남은 자가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뜬금없지만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다름아닌 매체의 증발을 통해서였죠. 작년에 사라진 ‘필름2.0’을 비롯해서 올해 사라진 ‘프리미어’까지, 나름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잡지들이 2년 사이에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리미어’에 꾸준히 원고를 보내던 입장이기도 했던 차라 약간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나름대로의 역사를 지니고 있던 매체 하나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침통한 기분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알다시피 영화 전문지라는 이름으로 발행되는 잡지는 현재 주간지 2종, 월간지 1종이 남았습니다. 게다가 심심찮게 어느 잡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풍문마저 돕니다. 아니, 사실 풍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설득력이 대단한 소문이 돌곤 하죠. 시장의 상황이 그런 설득력을 부채질하는 바도 없지 않군요. 아쉬운 일입니다. 영화전문지라는 매체가 시장장악력을 지니지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에요. 점점 영화를 이야기하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글들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그리고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때때로 속상합니다. 온라인도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온라인이 대세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제가 녹을 먹고 있는 ‘무비스트’를 비롯해서 전문영화사이트를 표방하는 온라인 매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거대한 포털사이트의 파이에 잠식당해 왔고 지금까지도 존폐의 위기를 건너고 있습니다. 또한 포털 사이트에 종속되지 않고 개별적인 독립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영화 홍보사들이 매체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꼴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영화지와 일간지, 그리고 무가지를 비롯한 오프라인 매체와 수많은 닷컴 온라인 연예뉴스 매체들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영화사이트에게 남은 할당량이 떨어집니다. 4~50개 정도의 인터뷰를 했다는 배우나 감독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배우들이 지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마케터 입장에서는 인터뷰도 하나의 마케팅의 영역이며 같은 1시간을 쓰더라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있는 매체에게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수긍할만한 입장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효과를 목전에 둔 시야가 때때로 야속한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영화만을 고집하고 최대한 영화를 위한 언어를 추구하는 공간에 어떤 배려가 따를 순 없는지 종종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들에게 당장 중요한 건 영화 한편의 성공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영화를 위한 공간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자가 아니라 제물을 노리듯, 자극적인 떡밥으로 완성된 헤드라인이 난무한 인터넷 매체의 기사들을 보면 그 기사를 위해 1시간 가량을 소비했을 어떤 배우와 감독의 노고가 안타깝습니다. 그런 단발적인 이벤트성 기사들이 속출하는 건 개인적으로 그 시장의 공모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일부 인터넷 매체들의 수준 낮음을 탓할 일은 아니죠. 그런 상황을 부추기는 배후는 분명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영화담론의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게 만드는 풍토에 어느 정도 이바지 했다고도 저는 확신합니다. 단지 요즘 사람들이 글을 읽기 싫어해서라고 떠넘기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일 거에요.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손쉬운 마케팅의 장으로 숙성시켜버린 원인은 분명 쌍방에 있습니다. 영화라는 고유의 가치를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성숙된 매체를 만드는 건 단지 어느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배려가 아쉬울 때가 적잖은 게 사실이에요. 오프라인 영화전문지가 사라지는 아쉬운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영화만을 고집해 온 영화사이트에 대한 시장의 배려가 아쉽습니다. 속 좁은 투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적어도 이 문제제기가 작게나마 시장에 어떤 자극이 될 수 있다면 말이죠. 물론 제가 훌륭한 문장력을 구사하지 못한 탓에 대단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만.
영화기자나 평론가는 영화인의 범주에 속하는 일원이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하나의 생산품이라 본다면 영화기자는 2차적 생산자 즈음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공정에 참여하진 않지만 생산된 물품을 판매자에게 넘기기 전 면밀히 검토하는 입장이 되곤 하니까요. 요즘은 일반적인 관람객들이 그 대열에 합류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포털 사이트에 산재한 무성의한 평 사이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영화가 등급을 매기기 좋은 단순한 소비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 역시도 이름 석자를 걸고 별점을 매기는 한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 개인의 별점이, 혹은 다수의 평균이 그 영화의 절대적 가치를 대변할 순 없는 겁니다. 개인마다의 고유한 감상이 결과적으로 그 영화가 창조한 우주가 될 겁니다. 모든 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소우주에 잠재적으로나마 영향력을 남긴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우주들이 접점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감상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때 우주는 확장되고 팽창되어 새로운 우주를 이루겠죠. 그리고 네오이마주는 새로운 우주의 확립을 도모하는 공간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누군가를 안드로메다로 날아오르게 할만한 빵상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잡소리가 길었죠. 하지만 이젠 불필요한 주행을 줄이고 결론에 접근해야겠습니다. 결승점을 앞에 두고 옆길로 돌아 동네 8바퀴 반을 돈 기분이지만 이젠 결승점을 통과해야겠습니다. 네오이마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제가 이 공간에 대한 축사를 남길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 3주년 기념 축사를 백건영 편집장님으로부터 부탁 받았지만 게으름을 피우다 시일을 넘겼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모를 압박이었음을, 또한 이번에도 또 한번 게으름을 피우면 네오이마주에 발붙였다가 발모가지 날아갈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껴 한밤중에 부랴부랴 개편 축하라는 주제를 위해 쓸데 없는 문장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요.
사실 저보다도 이 공간에 깊은 애정을 품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매일 같이 정성스레 작성한 글을 송고해주시는 독자회원 님들을 비롯해서 네오이마주의 편집 스태프 분들까지, 사실 제가 네오이마주의 개편을 축하할만한 자격이 없다는 건 그들에 비해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충만한 입장이었는지 증명하기가 무색한 까닭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네오이마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접점들이 사라지고 영화에 애정을 표하는 문장들이 자리를 잃어가는 요즘, 그 언어에 목마른 이들이 집결할 수 있는 곳이 사이버 스페이스 그 어딘가에 위안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건 한편으로 고무적인 일일 겁니다.
전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영화기자가 된 건 영화를 보고 주제넘게 참견하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사랑해요, 라는 간지러운 고백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영화가 저에게 낙을 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생계유지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누구 등쳐먹고 사는 건 아니니까 불순분자로 낙인 찍진 말아주세요. 때때로 빈약한 두뇌 회전율을 대체하는 엉덩이의 인내력으로 의자에 빌붙어 문장들을 최선을 다해서 있는 힘껏 싸지르며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요. 그래서 때때로 네오이마주의 애정 어린 고백들을 보면 숙연한 마음을 느낍니다. 그 문장들을 구현하는 원동력은 아마도 애정 그 자체겠죠. 때때로 다크서클을 통해 중력의 힘을 체감하는 생활에 지쳐서 날림처럼 문장을 배열하곤 배째라 신공으로 모른 체 넘어가던 문장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을 깨닫곤 합니다. 특히나 어떤 물질적 대가를 위한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신의 열정과 애정을 통해 산고의 고통을 견뎌낸 듯한 어떤 글들은 객관적인 완성도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순수한 열정은 어떤 기교보다도 참신한 자극을 주는 법이니까요.
세상이 추악할수록 아름다운 것이 보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이 불필요한 문장을 읽고 있는 그대라면 그 아름다운 것이 영화가 될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전 그 아름다운 것을 이 세상과 공유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저는 영화가 인간과 이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소통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영화에 흥미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지점에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 나름대로 자신만의 기준을 통해 영화에 애정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 애정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순 없겠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고백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건 중요하겠죠. 네오이마주는 어쩌면 여러분의 충만한 애정을 배려하는 장소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마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테고요.
어쨌든 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살아남아주세요. 그래서 네오이마주를 살려주세요. 영화를 통해 꾸준히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보는 그 아름다움을 세상과 공유합시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복수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노는 것만큼 훌륭한 저항은 없거든요. 영화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당신, 여기서 잘 놀아주세요. 그래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아남아 봅시다. 사족이 길었지만, 개편 축하 드립니다. 이 짧은 말을 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라도 알리던 병사처럼 비범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전 원래 문장 낭비벽이 심한 사람이니 이해해주세요.
네오이마주 편집장인 백건영 평론가님의 부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긴 했으나 순위를 뽑는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간 올해 개봉했던 한국영화 리스트를 쫙 펼쳐놓고 작품을 걸러냈다.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한국영화의 목록은 이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밤과 낮> <님은 먼 곳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멋진 하루> <비몽> <영화는 영화다> <미쓰 홍당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과속 스캔들>까지, 순서는 대략 개봉 순이다. <우린 액션배우다><경축! 우리 사랑>은 보지 못했고, 장률 감독의 <경계> <중경> <이리>를 비롯해서 <어느 날 그 길에서><작별>도 놓친 관계로 결과에 반영될 수 없었다. 여하간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5편을 선정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으로 좌우된 리스트일지도 모르니 지나친 간섭은 자제를 요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리스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누가 최고라고 부추겨주지 않아도 고유의 가치는 보존되는 법이다. 순위는 그저 사족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여하간 내년에도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편 만나길 고대한다.
1. <밤과 낮> 홍상수 감독
홍상수의 남자들은 언제나 비루하게 흔들리고 홍상수의 여자들은 그 흔들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잘도 열었다 닫곤 한다. 밤과 낮이라는 차별적 서사 안에서 파리와 서울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반대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동시간에 놓인 반대의 영역적 공간이 물리적 시간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서로의 차이를 동일하게 보존하고 있음이 체감될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신비롭다. 무덤덤하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되풀이 되는 순간들이 경이롭게 발견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말하는 쿠르베의 그림처럼 일상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밤과 낮>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실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이 아닐까.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
<미쓰 홍당무>는 올해의 발견이다. 물론 <추격자>도 발견이라 말해야겠지만 <추격자>는 그보단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추격자>가 문법적 응용이라면 <미쓰 홍당무>는 문법의 창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박찬욱 감독의 영향력이 종종 엿보이긴 했지만 <미쓰 홍당무>는 분명 이경미 감독의 신선한 재능이 앙칼지게 드러난 수작이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태도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생경한 드라마로 호응을 이끌어내고 종래엔 동감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이경미 감독만큼이나 공효진과 서우도 발견이라 할만한 재능을 드러냈다.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창의력으로 말이다.
3.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오래 전 헤어졌던 전처가 찾아왔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이상한 만남에 이어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이상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동선과 감정의 궁극적 종착지는 낭만을 통한 치유에 있다. 서울 곳곳의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드넓다. 카메라의 탁월한 구도 감각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행하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되는 인상이다.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동행엔 지난 로맨스의 낭만이 깃들기도 하고, 삭막한 현실의 암담함이 그늘지기도 한다. 그 만남은 결국 도피적 일탈이 아닌 치유적 여행이 된다. 350만원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의 금액은 희수의 태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넘치는 병운의 낙관적 태도는 그 예측불가능한 동선을 그린다. 삭막해서 무료한 삶에 생기가 돈다. 지난 로맨스에서 비롯된 채무관계가 추억을 복원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해프닝 같은 사연으로 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지극히 사소한 방식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선사한다.
4.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감독
골목을 빽빽하게 메운 차량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의 복귀 명령에 다시 회사로 달려가야 할지 모를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그런 비극 같은 상황을 엮어내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극적인 재미가 충분하다. 관계가 뒤엉키는 찰나가 파국으로 빚어지는 여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펼쳐진다. 정치적인 메타포들이 하나같이 극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때떄로 시치미 뚝 떼고 제 얘기를 한다. 가볍게 유희적이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엄숙하다. 소심한 척은 다하면서 극단적인 세기를 보여준다. 2년 만에 개봉했다는 게, 그리고 고작 4개관에서 개봉됐다는 게 아이러니할 정도의 수작이다.
5. <추격자> 나홍진 감독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됐다. 하지만 <추격자>는 분명 중요한 영화다. 날것의 기운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기운이 장르적으로 밀착해서 완전한 몰입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영역을 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범한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의 성공이, 탄탄한 내공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의 성공이,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 관객들의 움직임이, <추격자>의 진면목이다. 정서적으로 암울하고 지독하게 잔인한 이 영화의 악랄함이 끌어낸 호응의 수치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솔직한 정서에 가깝다. 수많은 시상식이 이미 이 영화의 가치를 지겹게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어떤 요소가 분명 <추격자>에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우린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배경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추격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