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폭발력과 훈훈한 외모로 무대를 누비던 조정석은 지금 대중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나약할 리 없는 집념으로, 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조정석을 만난다고 하자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나? 그가 평소와 달리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지우는 대신 강렬한 남성의 인상을 그려넣었다. 도발적인 여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야심. 그렇게 조정석을 위한 화보 밑그림이 완성됐다. 촬영 당일,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 장소를 찾은 조정석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에 강인한 인상이 들어찼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조정석은 뮤지컬계의 스타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공연장을 찾지 않은 이들에게 조정석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단지 가리킬 손가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이 가리키는 대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별을 봤다. 5:5 가르마를 탄 납뜩이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에 포복절도했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제복 혹은 수트를 입은 말끔한 외모와 강직한 성격의 훈남 은시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갸우뚱하다 뒤늦게 놀랐다. “인물 자체가 다르니까 “얘가 얘야?”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두 캐릭터를 같이 연기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보여지는 시기가 비슷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첫 영화가 그 뒤에 제작된 첫 번째 공중파 드라마와 맞물린 시기에 개봉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함께 주목받았다. 진정한 ‘골든 타임’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에서 조정석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곧 뮤지컬 지망생들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 <왓츠업>에 그가 캐스팅됐다. “드라마 촬영 일정상 공연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드라마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편성이 보류되면서 1년 동안 지난한 촬영 스케줄이 이어졌고, 경력에 구멍이 생겼다. 주변에선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며 우려했지만 조정석은 시간을 투자하며 담담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건축학개론> 오디션으로 기회를 잡았고, 2011년에 방영된 <왓츠업>을 본 이제규 감독은 그를 <더 킹 투하츠>에 불러들였다. 믿음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더 큰 이윤을 요구할 차례였다.
조정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 된 납뜩이를, 조정석이 납득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용주 감독의 주문처럼 관객을 웃길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에서 TV로 보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커다란 스크린으로 처음 영화를 보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미치겠더라. 중반부터 긴장이 풀렸다. 납뜩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내가 나올 때마다 웃는 거다.” 납뜩이가 없는 <건축학개론>이란 얼마나 심심했을까. “어떡하지, 너?” 같은 납뜩이의 명대사가 조정석의 애드리브였단 사실은 그의 캐스팅이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고 믿게 만든다.
<건축학개론>과 <더 킹 투하츠> 이후로 조정석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한 시대극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의 촬영을 마쳤다. <방가! 방가!>의 감독 육상효의 새로운 연출작으로 80년대 미군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 코미디물에서 그는 ‘민중가요계의 조용필’로 불리며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조정석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교회 전도사의 권유로 한 달간 개인 레슨을 받고 시험을 친 서울예전에 합격했다. 일종의 계시였다. 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그에겐 이미 또렷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지만 조정석은 ‘자신을 굳건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과를 명예처럼 간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한 작품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모두 기억한다.”
무대에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 초까지 조정석의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일복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작품 끝나면 바로 작품하고, 작품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했으니까.” 단 한 번, 연습도 공연도 없었던 2주를 통째로 쉬었던 걸 제외하면 6년간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올랐다. 6개월간 일주일에 8회 공연 그러니까 200회 가깝게 공연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모리츠 역으로 단독 캐스팅됐을 때도 6개월간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그 무대에 올라 모리츠가 되어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매일 죽는 남자’다. 조정석의 믿음이란 그런 성실함과 집념을 담보로 둔 것일지 모른다.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 된다. 칼을 한 번 꺼냈으면 제대로 휘둘러야 되니까.” 공연이 끝나고 자신이 느낀 문제나 새로운 욕심들을 기록해 둔 ‘배우일지’도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한 칼집이다. 그는 단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건축학개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과 조승우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유력했던 <고고 70>이 바로 그것. 하지만 공연 중인 작품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공연 같은 경우, 오래전부터 공연장 대관을 준비하고, 출연 계약도 일찍 한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헤드윅> 때문에, <고고 70>은 <이블 데드> 때문에 포기했다. 영화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 해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겪어온 순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무대란 고향이자 뿌리다. 공연에 입문한 초기 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2005년에 <그리스> 할 때 공연 끝나고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가 택시비가 없으니까 막차 끊기기 전에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찜질발에서 잤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웃고 장난기도 많지만 눈물 흘리는 건 싫어한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게 싫을 뿐이다. 1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홀로 지쳐 쓰러져 울면서도 누군가의 앞에선 의연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경험을 조금 일찍 경험했다. 그래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일흔이 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를 지지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04년, 데뷔작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람도 아닌 1인 다역’을 연기하는 조정석의 무대를 처음 본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셨는데 보고 나서 우시더라.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아들의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어머니였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 어머니와 함께 <더 킹 투하츠>를 볼 때면 TV 속 아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는’ 지금은 ‘아직 아닌 거 같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아한 세계>의 감독 한재림이 연출하는 고려시대 사극 <관상>에서 조정석은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와 함께 촬영을 준비 중이다. <건축학개론>을 본 한재림 감독은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조정석을 추천했고 <더 킹 투하츠>를 본 송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선택받았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이제 다시 출격이다. 출격.” 설렘이 가득한 미소로 내뱉는 단단한 각오. 그것 참, 결코 약해질 리 없는 관상 아닌가.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된 <하이스쿨 뮤지컬>의 마지막 시즌이자 첫 번째 스크린판 <하이스쿨 뮤지컬: 졸업반>(이하, <졸업반>)은 국내 관객에게 분명 낯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TV시리즈라지만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이스트 고등학교 농구부 결승전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그리고 코트 위의 트로이(잭 애프론)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객석의 가브리엘라(바네사 허진스)는 대체 어떤 사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졸업반>을 두둔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의 발랄함이 그 생소함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흡사 안무처럼 펼쳐지는 농구 코트 위의 플레이부터 뮤지컬의 양식을 노골적으로 선사하는 <졸업반>은 그 무대적 기능성을 과감하면서도 세련되게 구사한다. 여백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과 세심하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몇몇 캐릭터의 허점이 여실함에도 완성도가 뛰어난 안무와 노래의 기능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때때로 유치하다 싶은 틴에이저의 감수성이 직설적인 가사에 담겨 전달되지만 이에 동반되는 퍼포먼스의 원숙함이 단점을 보완한다.
사실 <졸업반>이 묘사하는 학창시절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꽤나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그건 흡사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제외시킨 결과가 이스트 고교처럼 보일 정도로 <졸업반>은 꽤나 비현실적이다. 심지어 판타지라 여겨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 지점이 <졸업반>을 비롯한 <하이스쿨 뮤지컬>을 즐기는 묘미다. <하이스쿨 뮤지컬>은 그 이질적인 상황을 만끽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재미로 활용되는 작품이다. 공부 잘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엄친아와 엄친딸들이 모여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쳐내는 곳이 바로 <하이스쿨 뮤지컬>이다. 물론 때때로 자신들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침울해지기도 하지만 이내 낭만적인 로맨스를 노래하고 혈기왕성한 청춘을 누린다. 그곳에서 심각한 고민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때때로 마치 뮤지컬 <그리스>의 건전한 버전을 연상시킨다. 10대의 패기와 에너지가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하게 분출된다.
<졸업반>이라는 부제는 <하이스쿨 뮤지컬>의 종막을 선언한다. 발랄하고 해맑은 청춘들의 사춘기가 지난 일기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가브리엘라와 트로이가 이별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는 어른들의 넋두리처럼 만만찮은 고민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런 고민 따위는 그냥 학사모를 던져버리듯 유쾌하게 날리고 그저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며 즐겁게 춤춘다. 틴에이저의 감수성은 유치하기보단 명랑하고 끈적거리기 보단 담백하다. 뻔한 결말을 앞두고도 두려움 없이 경쾌하다. 뛰어난 가창력과 원숙한 무대 매너, 현란한 안무와 화려한 미장센에 눈과 귀가 즐겁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는 뻔뻔함을 보상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물론 지옥 같은 이 나라의 입시제도 하에서 이런 환상적인 학창시절 따윈 달나라 이야기 같아서 씁쓸하다만.
요즘 대중들은 어떤 노래를 듣고 부르나. 동방신기의 앨범이 30만장 가까이 팔린다던데? 그럼 동방신기 노래 불러봐. 입이 우물거린다. 왕비호가 동방신기의 ‘오정반합’이 무슨 중국집 이름이냐고 놀려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수들은 넘쳐나는데 대중가요가 없다. 고참은 없고 아이돌만 즐비하다. 귓가를 스치는 노래는 좀처럼 흥얼거리기 어렵다. 좀처럼 떠오르는 멜로디가 없다. 그나마 원더걸스의 ‘텔미’를 흥얼거렸지만 이걸론 부족해. 이효리가 ‘유고걸’로 엉덩이를 흔들어도, 엄정화가 ‘디스코’를 찔러도, 눈길은 가는데 흥얼거려지지 않아. 뮤지션은 홍대 인디펜던트로 죄다 숨어들었나. 대중가요가 사라졌다.
서태지가 돌아왔다. 언제나 서태지가 컴백하면 가요계가 활성화되길 기대한다는 기사가 클리셰처럼 작성된다. 지난 2004년에 발매된 7번째 정규 앨범은 48만여 장 정도가 판매됐다. 지난 7월 29일 발매된 8집 싱글 앨범은 대략 20만 장 정도의 판매량이 추산된다고 한다. 요즘 같은 불황에 대박이다. 하지만 서태지도 더 이상 밀리언셀러가 아니다. 서태지만한 바로미터가 따로 없다. 서태지를 통해 음반시장불황이 비로소 확인된다. 서태지가 돌아와도 판은 그대로다. 밀리언셀러의 시대는 무상하다.
Yo! Taiji!
서태지는 쇼를 했다. 코엑스 상공을 나는 UFO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았다. 충남 보령에서 미스터리 서클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검색됐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Made in 서태지다. 한방 먹었다. 역시 서태지야. 그런데 서태지 노래는 들어봤나? 심드렁하다. 앨범 안 샀어? 끄덕인다. UFO도 뜨고 미스터리 서클도 만들었는데 정작 노래를 들어봤다는 이나 음반을 샀다는 인간이 별로 없다. 서태지는 가수다. 뮤지션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서태지를 구경만 할 뿐 서태지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예전만큼 많지 않다. 흥얼거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서태지 컴백 스페셜이 전파를 탔고, 쇼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 한다. 그 쇼를 즐기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서태지는 대중가수다. 그럼 대중들이 서태지의 쇼를 즐기고 있나. 최근 ‘기괴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Eerie Taiji People Festival)’라는,서태지가 기획한 락 페스티벌인 ‘ETP페스티벌’이 열렸다. 페스티벌의 규모는 나름대로 근사했다. 무대도 화려했다. 가장 뜨거운 열기는 헤드라이너가 등장하기 전 공연을 펼친 서태지에게 모였다. 헤드라이너는 마릴린 맨슨이었다. 앰프에서 살짝 쇳소리가 들리기도 했건만 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곤 떠났다. 단지 서태지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마릴린 맨슨을 등 뒤에 두고 미련 없이 공연장을 떠났다. 헤드라이너를 미련 없이 버리고 가는 태지 사람들의 기괴한 락 공연은 새벽 1시 20분 즈음에서야 끝났다.
Good-Bye
기성세대에게 서태지는 ‘난 알아요’란 첫마디 외에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지껄이며 방방 뛰던 78점짜리 신인에 불과했다. 반대로 젊은 세대는 그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따라 부를 줄 알았고, 음반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대형 신인이 탄생했다. 소포모어 징크스도 없었다. 잠깐의 공백 뒤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하여가’의 노랫말은 더욱 빨라졌지만 젊은이들은 그 또한 따라 불렀다. 그들만의 문화가 탄생했다. 그것은 변화였다. 기성 세대의 뽕짝이 득세하던 시절에 젊은 세대에게 랩은 적절한 대안이었다. 젊은이들은 서태지를 따라 했다. 어떤 기성세대는 그것이 불순하다고 눈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귀걸이 한 청년이 늘었고, 넓고 큰 힙합바지를 입고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힘이 생겼다. 서태지는 젊은 세대에게 놀이터를 선사했다. 종종 서태지의 방송출연을 불허했지만 그것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테이프를 분해해서 반대로 감으면 ‘피가 모자라’라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백워드 매스킹(Back Word Masking)’이란 생소한 용어까지 동원됐다.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서태지가 사탄에 들렸다는 촌평을 남겼다. 매스컴이 물기에 좋은 떡밥이었다. 하나같이 서태지의 루머를 전시했고 확산시켰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서태지는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기 앞서 비범한 계획을 세웠었다. 앨범 발표 후 이뤄진 첫 콘서트는 이례적으로 공중파 방송국을 통해 녹화 방영됐다. 하지만 서태지가 3집 앨범으로 공중파 전파를 탄 건 단 10번 남짓에 불과했다. 그것조차도 무대가 아닌 뉴스를 통해서가 더 많았다. 그 와중에도 3집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서태지가 쇼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서태지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입시지옥에 갇힌 청춘을 저주하듯 그 시절의 아이들은 ‘교실이데아’를 연호했다. 그들에게 ‘교실이데아’는 현실의 언어였다.
확고한 고지가 점령됐다. 10대 문화의 총아를 이루던 서태지에게 투사의 낙인이 찍혔다. 젊은 세대의 기조가 서태지란 이름 아래 정립했다. 10대는 서태지를 통해 놀다가 비로소 저항을 배웠다. 서태지는 세대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에서 세대를 항변하는 전사가 됐다. 4집으로 돌아온 서태지는 미소년의 얼굴을 가렸다. 선그라스와 털모자, 그리고 단발머리가 시니컬했다. 미성 대신 일그러진 목소리로 이상한 랩을 구사했다. 갱스터랩이라고 했다.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젊은 세대는 잘만 따라 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이르시니 행하노라. 가출했던 청소년들이 ‘컴백홈’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상이 나타났다. 그 해 음반을 가장 많이 판 가수는 김건모였지만 사람들은 김건모보다 서태지를 이야기했다. 서태지는 더 이상 히트곡을 만드는 인기가수도, 패셔니스타도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음반 사전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시대유감’은 가사가 삭제된 채 수록됐다. 극렬한 저항은 곧 전설이 됐다. 팬들은 서태지를 우러러봤다. 그러나 서태지는 돌연간 은퇴를 선언했다. 말들이 많았다. 팬들은 울었다. 그러나 진짜 떠났다.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1996년 1월의 일이었다.
Come Back Home
서태지는 첫 앨범을 내기 위해 데모테이프를 들고 음반사를 직접 돌았다. 거듭되는 퇴짜 속에서 발품을 팔던 서태지를 받아준 곳은 2류 레이블에 불과한 반도음반이었다. 서태지는 앨범을 냈다. 대박이 났다. 결국 앨범 2장이 모두 삽시간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반도음반은 메이저 음반사로 등극했다. 서태지가 만지면 대박이 났다. 마이다스의 손이 따로 없었다. 존재 자체로 하나의 패션이었다. 삼성연구원은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히트 상품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 발표했다. 서태지라는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연구하고 분석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서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칭송했다. 이는 서태지의 직책처럼 보였다. 서태지는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 사라지고 다시 돌아왔다. 가수들도 서태지를 따라 했다. 서태지처럼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 사라졌다. 그리곤 컴백했다. 가요프로에서 컴백 스페셜이 생겼다. 서태지를 오리지널로 둔 아류들이 생겨났다. 서태지가 사라지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혈전이 벌어졌다. 서태지가 사라진 곳에서 서태지를 말하는 이들은 꾸준했다. 영원히 그리워할 것처럼 그랬다.
서태지가 없어도 가요계는 돌아갔다. 서태지에 관한 말의 횟수도 줄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고 밀리언셀러는 유지됐다. 빈자리가 메워지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지의 빈자리를 메운 건 아이돌이었다. 서태지에 대한 영향력을 언급하는 것도 아이돌이었다. 서태지를 선망하던 청소년들이 서태지의 뒤를 따랐다. HOT도, 젝스키스도, 서태지를 말했다. 하나같이 퍼포먼스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서태지가 아니라 아이들에 불과했다. 혁신도 파격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는 흉내내기 경연장으로 돌변했다. 서태지로부터 양성된 수요를 착취하기 쉬운 아이템이 개발된 것뿐이었다. 엔터테인먼트가 득세했다. 발 빠른 기획자들은 아이돌 댄스그룹을 양산해 내다 팔았고 무대는 가판대가 됐다. 아이들이 모였다. 무대는 와글와글했지만 끓는 점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주 간혹 서태지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풍문이 발 없는 말처럼 천리를 걷곤 했다.
진짜 서태지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은퇴를 선언한지 2년만의 일이었다. 어떤 이는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서태지가 불순하다 지적했지만 어떤 이의 얼굴은 이미 상기되고 있었다. 여하간 말들이 많아졌다. 무대 주변이 웅성거렸다. 거물의 귀환 앞에 대중들은 눈이 커졌고 귀를 세웠다.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서태지는 달랑 앨범 한 장만을 발표했을 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레코드점 앞에 줄이 생겼다. 하루 만에 90만장의 앨범이 팔렸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어떤 이는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담은 ‘Take Two’를 해석했다. 얼터너티브 락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댄스곡은 없었다. 서태지는 이 앨범에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전했다.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서태지의 솔로 복귀작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쇼가 없어 조금 한산했지만 향수에 젖은 팬들은 기꺼이 서태지를 소비했다.
Rock’n Roll Dance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으로 잘 알려진 서태지는 기타 리프를 활용한 멜로디 라인을 만들어내곤 했다. 솔로 앨범을 통해 본격적인 락을 시작했다. 은퇴선언을 통해 서태지는 자신의 얼터에고를 버리듯 아이들과 헤어졌다. 아이들에게 베이스를 잡게 만들고 드럼 스틱을 쥐어줬지만 댄서를 밴드로 꾸미는 건 진짜 광대가 되는 짓이었다. 시나위 시절부터 흑인음악을 듣곤 했다지만 서태지는 궁극적으로 락을 연주하는 베이시스트였다. 하지만 대중이 선택한 건 서태지의 댄스음악이었지, 락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생소하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래도 역시 서태지라서 좋다고 했다. 서태지의 혁신을 즐기던 대중은 서태지의 얼터너티브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보다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서태지가 은퇴를 발표할 때 따라 울었던 고등학생 소녀는 20대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서태지의 파격도 점점 낡은 언어로 뒤쳐져가고 있었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서태지가 진짜 돌아왔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서태지가 입국한다는 공항에 사람이 가득했다. 서태지의 얼굴이 공개되는 건 5년만의 일이었다. 팬들이 몰렸고, 취재진도 모였다. 그 날 공항은 시끄러웠다. 서태지의 새 얼굴이 화제가 됐지만 새 앨범도 함께 돌아왔다. 며칠 뒤, 빨간 레게머리를 한 서태지가 자신의 밴드와 함께 등장했다. 새 앨범은 조금 달랐다. 서태지는 목을 긁어내는 그로울링을 토해냈다. 미성을 긁어댔다. 어김없이 파격이란 말이 들렸지만 한쪽에선 심드렁한 소리를 냈다. 빨간 레게머리의 서태지는 스케이드 보더와 비보이를 동원해 무대를 꾸미고 헤드뱅잉을 했다. 열광하는 팬들 사이에서 식상한 눈빛이 감지됐다. 형태는 많이 변했으나 뭔가 빠져있었다. 그건 파격적 시도라기보단 일종의 흉내에 가까웠다. 레게머리가 유행하고, 하드코어 음악이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보도가 차라리 낯설었다.
서태지가 만들어낸 음악이 혁신이라 평가 받았던 건 그것이 온전한 새것이라서가 아니라 대중음악의 최전선에서 그것들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혁신은 아니지만 시도로서의 긍정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태지의 음악에 혁신이라는 네임밸류가 생겼다. 서태지가 하드코어 장르의 음악을 들고 나오자 반발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홍대클럽의 인디 밴드들이었다. 서태지의 은퇴 이후 가장 큰 수혜를 누린 건 엔터테인먼트였다. 춤추는 아이돌이 무대에서 주목 받는 사이 인디펜던트는 홍대 지하에서 음악을 꾸렸다. 그들이 반 서태지 전선을 형성했다. 반면 서태지의 수혜를 얻어 유명세를 치르는 인디 밴드들도 있었다. 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찾아낸 새로운 장르를 비웃었다. 그건 이미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대중들은 서태지의 음악을 흥얼거리지 않았다. 단지 밀리언셀러의 대열에 참가한 이들 중 온전한 팬들만이 서태지의 무대를 찾았다. 그 반대편에서 안티진영이 독설을 풀었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팬덤의 장벽이 발생했다.
울트라매니아
언제나 현상을 주도하는 건 서태지였다. 서태지가 나타나고 대중이 열광하면 언론이 적어냈다. 서태지가 제안한 변화가 먹히던 시절이 있었다. 대단한 충성심을 지닌 팬들부터 그저 서태지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들까지, 서태지의 음악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상이 변했다. 서태지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보다 서태지를 구경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순수한 ‘울트라매니아’만이 철옹성처럼 서태지를 감싸고 돌았다. 서태지는 100명의 팬보다 1명의 매니아를 원한다고 했지만 단 1명의 매니아를 상대로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태지는 음악적 영향력만으로 소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뮤지션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음악을 만드는 동시에 무대를 기획하고 컨셉을 구상했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가 서태지로부터 얻은 힌트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가수를 육성하는 시스템이다. 역설적이지만 창작을 상업적으로 연계했던 서태지의 노하우가 남긴 건 상업밖에 없었다. 그건 서태지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건 서태지였고 화살이 향하는 곳도 서태지였다.
2001년부터 밀리언셀러가 사라졌다. 많은 가수들이 등장했지만 음반판매량 백만 장을 넘기는 가수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들이 이야기됐다. 음반 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 볼멘소리들이 섞여 나왔다. 요즘은 들을만한 음악이 없어. 평범한 댄스곡 일색의 무대에 사람들이 질식했다. 집집마다 보급된 인터넷은 불법다운로드를 활성화시켰다. 길보드차트라고 불리던 리어카 테이프는 실체라도 있었다. 어떤 노래가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오픈 마켓이라도 됐다. 하지만 클릭 한번으로 얻어지는 음악은 개인의 방을 맴돌 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유통 구조도 변하고 있었다. 음반 대신 음원이 소비되고 있었다. CD플레이어 대신 MP3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음반판매량의 저하는 새로운 시장 개척을 더욱 부채질했다. 덕분에 엉뚱한 이들이 수혜를 누렸다. 핸드폰 연결음이나 벨소리에 사용되는 음원들이 이동통신사에 헐값에 매도됐다. 음악은 핸드폰 신호음으로 몰락했다. 플레이어 대신 컴퓨터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익숙해졌다. 음반시장은 급격히 무너졌다. 거대한 음반매장들이 도산하거나 문을 닫았다. 동네의 자그마한 레코드점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길거리만 나가도 들을 수 있었던 대중가요들이 점점 듣기 힘들어졌다.
2007년, 5년 만에 서태지는 새앨범을 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감성코어라고 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관심을 얻지 못했다. 전파력이 약해졌다. 그 해 최고 음반판매량으로 기록된 서태지의 7번째 앨범은 50만장이 채 안됐다. 서태지의 7번째 앨범은 서태지를 밀리언셀러에서 끌어내렸다. 충심이 강한 팬들은 여전히 서태지를 연호했다. 하지만 그 팬덤의 외벽에 놓인 이들은 점차 냉담해지고 있었다. 웹상에서 서태지 팬과 안티팬은 끊임없이 공방했다. 과거에도 서태지 팬들은 끊임없이 싸웠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달라졌다. 과거 서태지 팬들은 서태지가 제도적 권력에 맞설 때 힘을 보탰다. 하지만 오늘날 서태지 팬들은 제도가 아니라 서태지를 공격하는 대중들과 맞선다. 그 상황에서 서태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서태지의 적은 대중이 아니다. 서태지는 그저 팬들의 보호 뒤에서 무력하게 존재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아류로 분류됐다. 감성코어라는 말이 이모코어(Emotion Core) 앞에서 무색해졌다.
환상 속의 그대
활동 후 잠적은 서태지에게 있어서 철저한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자연인 정현철은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다. 팬들은 무대에 선 서태지만을 기억한다. 그건 그 무대 밖의 정현철을 본적이 없는 까닭이다. 때때로 방송을 통해 집을 공개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노출한다지만 그것 역시 정현철이 아닌 서태지의 연출일 뿐이다. 정현철을 보여주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다. 서태지가 스스로 그 공식에 갇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창백하고 하얀 피부의 미소년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네버랜드의 피터팬과 같은 서태지와 달리 그의 팬들은 나날이 늙고 변하는 중이다. 과거 중, 고등학생 소녀 팬들은 애 엄마가 됐다. 17년이 지나는 사이 서태지는 변치 않았지만 팬들은 변했다. 10대였던 팬들은 20대를 거쳐 30대가 됐다. 더 이상 10대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로 나가 현실에 맞선다. 서태지의 8집 싱글 타이틀곡 ‘모아이’는 모아이의 대자연에서 느낀 신비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태지가 대자연의 신비를 느낄 때, 그의 어떤 팬들은 현실의 추악함을 대면하고 있다. 예전에 자신들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느꼈던 팬들이 더 이상 서태지와 같은 것을 볼 수 없게 됐다. 연대감이 사라졌다.
신비주의는 쉽게 깨진다. 서태지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다. 서태지도 늙는다. 언젠가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쳐질 때가 되면 신비주의도 함께 깨진다. 최근 서태지는 기자회견에서 스스로에게 덧씌워진 신비주의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신비주의는 서태지에게 양날의 검이다.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다. 서태지와의 인터뷰를 허락 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는 인터뷰 중 녹음과 촬영을 불허한다. 그의 인터뷰 사진엔 항상 서태지컴퍼니 제공이란 꼬리말이 따른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어떤 사람들은 서태지가 활동하지 않을 때, 그가 외국에 나가있는 줄로만 안다. 그가 자신의 집 안에서 꿈쩍도 안하고 사는 사람인 줄 모른다. 서태지의 사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일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서태지는 ‘환상 속의 그대’가 된다. 한때는 그것이 서태지의 매력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신비주의가 서태지를 잊게 만든다.
서태지는 항상 자신들의 팬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상대라고 말한다. 팬들도 그런 서태지에게 감동한다. 서태지는 팬들에게 대장이라 불린다. 대장은 선두에 서서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의 서태지는 예전만큼의 활력이 없다. MBC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 스페셜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서태지는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시청률은 10%를 넘지 못했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됐던 ‘황금어장’의 평균시청율은 평균 15%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MBC는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과거 서태지는 말을 낳는 대상이었지, 말을 만드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서태지는 흉가영상을 내보내고, UFO를 띄우거나, 미스터리 서클을 만든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를 기획해 흘려 보내곤 짠하고 나타난다. 그럼에도 반응은 미비하다. 물론 팬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무대에서 내려보니 생각보다 관중이 부족하다.
시대유감
서태지의 신곡 중 ‘T’ik T’ak’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서태지의 노래엔 의미가 모호한 가사들이 많다. 그래서 때때로 해석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곡에 얽힌 풍문엔 묘한 기대감이 얹혀있었다. 실제로 8월 3일 코엑스에서 펼쳐진 게릴라 콘서트 중에 서태지는 시국의 흉흉함을 코멘트했다. ‘시대유감’을 부르기 전이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간 사람들은 때때로 TV를 보면 외롭다고 했다. 전쟁터 같은 종로 거리와 달리 TV는 백치미 같은 쇼가 가득했다. 서태지는 락을 지향한다. 락은 항상 시대에 저항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모인 밴드들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고, 7~80년대 한국의 포크락은 유신에 저항하다 탄압당했다. 유희는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저항이자 강력한 언어다. 사람들은 들을만한 노래가 없다고 한다. 흉흉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로해줄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대유감이다.
서태지의 팬들은 실로 대장을 따른다. 서태지는 점점 풍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겐 진심 어린 팬들이 많다. 그들은 서태지가 어느 쪽으로 가길 요구하기 보단 서태지가 가는 쪽으로 따라간다. 서태지가 고립될수록 서태지의 팬들도 고립되고 나가떨어진다. 서태지가 열려야 팬들도 편해진다. 아군이 늘어야 힘도 난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신비주의의 탈은 서태지를 키운 팔 할이었지만 지금은 서태지를 좀먹는 팔 할이다. 더 이상 젊은 세대는 서태지와 함께 저항하지 않는다. 서태지가 쇼를 해도 보는 사람만 본다. 사전음반심의제 폐지를 요구하던 과거는 이슈가 됐지만 저작권협회와 싸우는 오늘은 크게 부각되지 못한다.
밀리언셀러의 시대는 갔다. 대중가요가 사라지고 있다. 노래를 듣지 않는다. 서태지가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도 서태지와 팬이 나누는 그들만의 추억에 불과하다. 세상의 언어와 괴리되는 추억 속에 그들이 있다. ‘북공고 1학년 1반 25번’서태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나. 서태지의 쇼는 더 이상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노래가 사라진 마당에 쇼는 무력할 뿐이다. ‘난 알아요’를 외쳐봤자 요즘 아이들은 서태지를 모른다. 피아노를 치며 열정을 논하기에 서태지는 생경한 사람이 됐다. 세상의 언어를 노래해야 세상과 멀어지지 않는다. 서태지의 쇼도 그래야 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