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이 마지막 편은 (원작을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그 결말로 나아간다.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필생의 적 볼드모트(랄프 파인즈)가 자신의 영혼을 나눠 숨긴 호크룩스들을 찾아내 파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신변의 위기를 느끼는 볼드모트는 자신의 수하인 ‘죽음을 먹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리 포터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압박해 나가고 그 위협은 호그와트까지 번져나간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그를 위시하는 마법사들은 호그와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리 포터>시리즈는 영웅적인 면모를 타고난 해리 포터의 성장통을 다룬 어드벤처 판타지물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바야흐로 10년이다. <해리 포터>시리즈가 스크린에 살아 움직이는 실물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10년 사이,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제법 눈에 띄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어린 마법사들을 성장시킨 호그와트의 풍경도 어둡고 음산한 세기말적인 기운에 지배당했다. 그 호그와트를, 그리고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청년이 된 소년들이 악과 맞선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바로 그 대단원의 결전을 향해 나아가 닿는 시리즈의 마지막 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해리 포터라는 아이콘을 기다릴 수 없는, 작별의 인사를 던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영화화된 여섯 번째 시리즈까지와 달리 2부로 나뉘어진 마지막 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이 시리즈 안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확보해낸 작품이다. 영화화된 <해리 포터>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라면 (최소한 원작을 먼저 섭렵한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때때로 단점으로 작동하기도 했는데, 이를 테면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밀한 요소들의 재미가 서사의 축약 안에서 손쉽게 손실되는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마다 장대한 서사를 지닌 각 시리즈들이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 것과 달리 시리즈의 마지막을 상하로 나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긴밀한 호흡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야심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상품성이 막대한 이 시리즈의 유효기간을 보다 넓게 확보하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지난 시리즈들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 마지막 시리즈 역시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해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해서 보다 너른 러닝타임을 확보한 이번 시리즈는 이를 바탕으로 원작을 텍스트를 보다 충실하게 이미지로 세워 넣는다. 결말을 위한 전초전으로 완성된 지난 1부를 잇는 이번 작품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음울하며 비장하게 정해진 결말로 걸어나간다. 그 비장함을 상기시키는 건 어둡고 음울해진 세계 속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예이츠는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크린에 불길한 심리 속에서도 성숙해진 아이들의 비장한 면모를 새겨 넣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호그와트에서 펼쳐지는 격전은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클라이맥스다. 그 가운데서 볼드모트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하는 해리 포터가 자신의 생을 걸고 그와 맞서야 하는 외로운 임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한 소년의 통과의례적인 통증으로 와 닿는다.
제각각 완성도의 편차를 지닌 이 일곱 편의 시리즈가 비로소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이벤트다. 그리고 해리 포터를 지켜보며 성장한 팬들에게도 이는 남다른 의미를 품게 만든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크린 진출을 가능케 했던 것이 할리우드 자본의 동원이기 이전에 전세계적인 팬덤으로 이뤄진 시장의 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한다면 이 마지막 편을 목도할 팬들의 심정이란 제 자식을 떠나 보내는 어미의 마음과도 비교할만하다. 호그와트에서 마법에 입문한 아이들은 이제 그곳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로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 스스로 골고타 언덕에 올라선 아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의지로 세계를 구하며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완성해낸다. 비로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영국의 가난한 싱글맘 조앤 K. 롤링을 전세계적인 판타지 작가로 등극시킨, 마법 같은 태생 실화를 지닌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머글들은 그 세계를 동경하듯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고 자란 이들의 감상이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애정을 담았던 그 세계와 진짜 이별을 고하고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애틋함 덕분일 것이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그 애틋한 안녕을 고하는 팬들을 위로하는, 진정한 유종의 미다. 마법은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17살이 되는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맞이하는 건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를 상대할 희망이라 믿었던 호그와트의 교장 덤블도어(마이클 갬본)는 죽었고, 호그와트는 볼드모트를 추종하는 ‘죽음을 먹는 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마법부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는 마법세계로 언론과 권력을 장악한 볼드모트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만 간다. 그리고 해리포터와 론(루퍼트 그린트),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는 볼드모트를 제거하기 위해 덤블도어가 남긴 표식을 따라 볼드모트의 영혼이 담긴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여정에 나선다.
J.K 롤링이 집필한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어둡고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마법세계를 어드벤처처럼 즐기던 호그와트의 소년, 소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갈등에 맞서며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채 세상의 눈을 피해서 고립된 신세다. 볼드모트의 등장과 해리포터의 주변인의 죽음을 묘사하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결말부터 서서히 시리즈 위로 드리워지던 암울한 기운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절정과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승화된다.
결말의 전초전이라 할만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이하, <죽음의 성물 1>)은 덤블도어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담고 있다. 지난 6편의 전작에서 나름대로 천진난만한 마법 세계의 병풍이 되던 호그와트의 보호막이 사라진 <죽음의 성물 1>은 그만큼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된, 심정적인 진통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이 시리즈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는 배우들의 외모와 같이 결말에 이르러 확실하게 시리즈의 성숙을 증명해내는 이번 편은 그만큼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의 여부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최종관문이 될 것임에도 틀림없다.
일단 역대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의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누어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서사적으로 보다 탄탄한 주행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번 영화는 지난 전작들에 비해서, 특히 <죽음의 성물>과 유사한 텍스트량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스토리의 집중과 선택이란 측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을 얻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건 곧 이 시리즈가 쌓아온 모든 역사와 정보가 총집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전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얼마나 잘 기억해내는지에 따라서 재미는 그만큼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전작들에서 설명됐던 어떤 장면들이 단순히 보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말부의 서사를 수식하기 위한 복선의 요소로서 일찍이 장치된 것들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마지막 시리즈는 전작들에 대한 기억력에 따라 보다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팬서비스의 기능성을 품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언급되거나 등장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이는 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동시에 내년에 후속편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이 불완전한 작품이 끝까지 고통과 번민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이미 원작을 예습한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곧 이어질 후속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선사할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위해 마련된 ‘골고타의 언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과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를 연출한 데이빗 예이츠는 지난 전작이 얻었던 호불호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이 든다. 또한 결말로 치닫는 시리즈의 연출을 한 감독에게 연속적으로 맡긴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든다. <죽음의 성물 1>은 전체적으로 암울해지는 마법 세계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이 세계를 주시해온 팬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리즈 자체의 흐름 안에서도 원숙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방대한 정보량을 품은 결말 시리즈를 고스란히 묘사하기 위해 140여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두 편의 시리즈를 마련했다는 것마저도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보다 여유로워진 만큼 서사의 운용력은 확실히 나아진 인상이며 서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간결해진 인상이다. 특히 호그와트의 대전투를 그릴 최종 클라이맥스를 앞둔 이번 작품이 묘사하는 몇 번의 대결신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한 어린 배우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할만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밀착하듯 표정을 잡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 시리즈의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년은 성장했고, 운명에 다다랐다. 달아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비범한 숙명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소년의 숙명과 그 숙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먹구름과 같이 세계 위로 악은 쉽게 드리운다. 그 아래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선이 서서히 빛을 밝힌다. 악에 잠식당한 세계가 불안에 떨 때, 작은 선이 서서히 불을 밝힌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년은 홀로 빛을 옮긴다. 이미 소년의 운명은 자명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대단원으로 이야기는 옮겨가고 있다.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
<킬러들의 도시>는 의뭉스럽게 전진하는 영화다. 인과관계의 원인을 가리고 전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와중에 백치미적인 대사에서 비롯된 유머가 분위기를 띄운다. 그럼에도 좀처럼 품위가 훼손되지 않고 정체 모를 상실감이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의 감춰진 속내가 차근차근 드러나는 과정 한편에서 또 다른 인과관계로 작동할 주변 환경과의 구조적 연계가 디테일하게 구축된다. 흡사 ‘가이 리치’스러운, 우연적인 관계의 교차를 통한 필연적 사건의 재구성처럼 보이기도 하나 남발된 양상이 아니며 차기 장면에서 드러나는 반전적인 상황이 항상 예측 범위를 극복하고야 만다. 일반인으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젠틀한 영국 킬러들의 프로페셔널한 규약은 때때로 웃음의 매개체가 되지만 이는 중후한 느와르적 프라이드를 연출하며 비범한 정서를 끝내 이루고 만다. 궁극적으로 <킬러들의 도시>는 죄책감을 속죄하는 자와 이에 보혈을 내리는 자, 그리고 그 보혈을 요구하는 자에 대한 사연이다. 유머가 발생하나 천박하지 않고 전통적 도시의 풍광만큼이나 고풍적인 정서를 연출한다. 중세의 흔적이 보존된 브리주를 관조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카메라 너머의 풍경과 어울리는 캐릭터들의 능숙한 연기는 하나의 관건이다. 생소한 도시는 유배지가 되고, 무덤이 되며 재생의 도피처가 된다. 비범하게 재기발랄한 성찰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