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에서 따온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란 본래 의미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이란 의미로 변용한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연인이 다시 로맨스에 빠져든다. 엇갈림과 그리움을 매개로 운명적 러브스토리를 연출하고 앙금처럼 내려앉은 추억 속 감정을 현재로 소환한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재회해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묵은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면서도 아련하게 묘사해나간 말미에 발전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긍정적 여운이 아련하게 깃든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 놓인 선남선녀의 자태가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만 순정적인 로맨스의 보편적 감정을 설득력 있게 진전시켜나간다.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화보처럼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운 미소 가운데서도 우아한 깊이가 묻어나는 고원원의 조화도 인상적이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 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무대에서 이를 입증한 이만이 명성을 얻고 성공이란 단어를 거머쥔다. 80년대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페임>은 성공을 꿈꾸는 청춘남녀의 스토리를 담보로 춤과 음악적 묘미를 발산하는 뮤지컬 영화다.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페임>과 2009년의 <페임>은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통해 큰 차별점을 둔다.
알란 파커의 80년대 원작에서 들려진 타이틀 넘버 ‘페임(fame)’을 변주한 동명타이틀곡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페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중문화적 패러다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엠비언트 뮤직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비롯해 현대무용까지 포괄한 대중문화의 변이를 대거 활용한 <페임>은 80년대 원작과 전혀 다른 포장지를 활용함으로써 리메이크물로서의 차별화를 이룬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페임>은 뉴욕의 유명 예술고 입학 오디션에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의 진급과정을 서사적 줄기로 밀어간다. 오디션과 매학년 시기, 그리고 졸업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서사적 챕터로 구분한 <페임>은 학생들의 성장과 관계적 진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그만큼 청춘의 감수성을 밑천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묘미가 마련된다.
다양한 학생들의 단계적 성장을 지켜보는 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까닭에 집중력 있는 성장담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건 <페임>이 성장드라마로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절된 챕터로 구성된 입학과 진급, 졸업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의 진전을 방해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서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건 일면 아쉬운 측면이다. 그럼에도 <페임>은 분명 뮤지컬 영화로서 즐길만한 순간들이 자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빠른 컷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초반부 오디션 장면부터 즉흥적인 연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식당 시퀀스, 그 밖에도 무도회를 비롯한 다양한 가무의 향연이 곳곳에 배치되어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하는 졸업공연은 분명한 볼거리다.
혈기왕성한 도전과 낭만이 깃든 예술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나가며 에너지를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의 덕목은 성취만큼이나 좌절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장하는 학생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도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교사들의 진실된 표정과 솔직한 조언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프로 댄서가 되길 원하는 제자의 실력이 부족함을 냉정하게 조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주는 교사의 얼굴은 경쟁의 본질이란 단지 누군가를 이겨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극복임을 일깨운다. 단지 타인보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바로 경쟁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엄격한 교육문화와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경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결국 그 체제에서의 낙오는 좌절보단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줄세우기를 통해 성공하는 자와 낙오하는 자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어버리는 사회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낭만이 실로 부럽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
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이브 생로랑'을 '디오르(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굴하고 '존 갈리아노'를 디오르의 지휘관으로 발탁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말했다. "검정색 풀오버와 열 줄짜리 진주목걸이로 샤넬(Channel)은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디오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nel)'의 패션을 시대적 혁명으로 정의했다.
샤넬이 파리로 진출했던 1910년경의 여자들이란 그저 남자들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 아니라면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사교계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신분이 천하고 처지가 박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유년 시절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 샤넬 역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샤넬(오드리 토투)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반체제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직업적으로 선망한 여성이라 묘사한다.
1893년, 부모에게 버려져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맡겨진 샤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통해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간다. 물랭(Moulin)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와중에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샤넬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엔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을 만나게 된다. 샤넬의 도전적인 태도에 호감을 느낀 발장은 그녀가 파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샤넬의 오디션은 실패하고 발장 역시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사저로 떠난다. 하지만 발장을 찾아가 그의 사저에 머물며 고위층의 사교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샤넬은 그곳에서 고위층 부녀자의 화려한 패션에 실소를 머금고 자신만의 심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샤넬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연인 보이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을 만나게 된다.
<코코 샤넬>은 샤넬의 스타일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만약 <코코 샤넬>을 통해 샤넬의 스타일을 만끽하고자 티켓을 구매한 관객이라면 만족감을 쥐고 상영관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 될 거다.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샤넬이란 브랜드를 창시한 가브리엘 샤넬의 비화를 다룬 전기적 성격의 영화다. <코코 샤넬>이 묘사하는 샤넬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전문직업인이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샤넬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샤넬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묘사보다도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부에 기대어 화려한 치장을 뽐내며 살아가는 부유층 여성들의 삶을 무료하게 인식하며 무능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끼는 샤넬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자립여성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샤넬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사회적 배경이 <코코 샤넬>의 1차적 자산이라면 샤넬의 삶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2차적 자산이다. 결국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인물의 삶이 빛나는 지점을 다룬 화려한 소품이 아니라 그 삶이 정점에 오르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쳤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사적 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관객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소비를 느끼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샤넬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현재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부여하는 물질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인물의 성장이라는 역동적 소재를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에 가둠으로써 단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감정적 고양을 무마시킨다.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권태로운 감상이 도모된다.
이름만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삶이란 분명 들춰보고 싶게 매력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 인물의 현재를 이룬 기반을 살핀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의 서사적 선택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전히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영화다. 오늘날 명성을 얻은 명품 브랜드의 네임밸류를 만든 건 그 브랜드의 시작을 이룬 누군가의 삶이라기 보단 그 브랜드가 현대의 물질적 욕망과 상응하는 덕분이다. 물론 인물의 삶에 집중한 <코코 샤넬>이 패션쇼 따위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대심리를 배반하는 가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설득할만한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 샤넬>은 설득력 없는 드라마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조로운 드라마를 통해 설명되고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은 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던 패션 아이콘을 투정하는 아이처럼 치환해버린 과소비적 영화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 아이. 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첫 번째 블록버스터 출연작이다. 특별한 감흥이라도 있었나? 채닝 테이텀(이하 ‘채닝’): 말한 대로 첫 블록버스터라 처음엔 매우 긴장을 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시작하고 나니까 그 어떤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기력에 대한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물론 ‘나노마이트’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그런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영화라서 재미있고 즐겁지 않았나 싶다. 궁극적으론 이런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소년 시절의 꿈과 같은 일이 아닐까. 그런 꿈 같은 일을 실행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고 재미있었다. 시에나 밀러(이하, ‘시에나’): 이런 대규모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다는 게 익사이팅했다. 흥미롭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건 내 커리어의 관점에서 메인스트림, 보다 주류의 영화를 해볼만한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영화 산업에서 현실 도피적인, 순수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관객들이 많이 찾는 거 같다. 그런 영화에 도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역할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총이나 무기 관련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무술도 배울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원작만화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채닝: 나는 TV만화로 <지. 아이. 조>를 계속 봐오면서 자랐다. 실제 만화책은 최근 들어서 보게 됐지만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지. 아이. 조>를 봤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선더캣츠>라는 만화에 이어서 <지. 아이. 조>를 보면서 자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네이크 아이즈’와 ‘스톰 쉐도우’였는데 이들 때문에 어렸을 때 닌자가 되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촬영 세트에 와서 내 옆에 실제로 있는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를 보면서 ‘와, 이건 너무 쿨하다!’라고 생각했다. (웃음) 내 어릴 적 꿈을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꿈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가상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블루 스크린 앞에서 연기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생소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채닝: 실질적으로 CG가 들어갈 장면을 상상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감독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로 연기했기 때문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긴 했다. 감독님 머리 속에서 영화가 다 구상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최대한 동작들을 크게 취해야 연기했다. 저기서 폭발물이 터진다, 그러면 와! 하고 반응해야 했고. 그런 CG효과도 많았지만 실제로 촬영한 액션도 많았다. 예를 들면 ‘코브라’가 ‘듀크’와 ‘립코드’를 공격하는 첫 장면은 다 실제로 촬영됐다. 헬리콥터 추락 장면에서도 실제 현장에서 헬리콥터를 떨어뜨리기도 했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 액션이 훨씬 더 많았다.
채닝 씨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인 매니저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덕분에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부분이 있었나? 채닝: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내가 노출된 부분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사실 매니저도 미국 뉴저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미국사람에 가깝다. 그래도 한국말을 잘 알고 내게도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 사실 처음으로 한국에 왔지만 점점 한국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같은 영화도 감명 깊게 봤고,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도 조만간 보게 될 거 같다. 한국영화들이 좀 더 어둡거나 치열하고 빡빡한 느낌들이 있다고 느꼈는데 이런 부분들에 매료됐고 그만큼 사랑에 빠지는 단계다.
<달콤한 인생>은 어떻게 봤나? 채닝: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 씨의 연기에 감명받았다. 차분하면서도 강인함을 나타내는 모습이 감동적이더라. 이런 연기를 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강인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내게 필요한 차분함이 있었다. 잔인하기도 하지만 강인하고 세련된 표현을 재미있게 감상했다. 시에나: 리메이크된다는 것 자체가 원작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대변해주는 게 아닐까. 채닝: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이 원작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김지운 감독의 예술적인 열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돈과 흥행에 집중하는 할리우드에서 그만큼의 예술성이 살아날 수 있을까. 그래도 일단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기대된다.
한국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인다. 원래 관심이 많았나? 채닝: 난 연기 경력이 길지 않다. 한국영화산업이 이렇게 발달됐다는 것도 몰랐다. 내 매니저인 ‘빌 최’가 최근 들어서 한국 영화에 대해 교육 시켜준 덕분에 한국영화산업에 대해서 알게 됐다. 덕분에 그 스타일에 매료됐다.
김지운 감독을 만났다던데. 채닝: 어제 만나서 내가 그 분의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병헌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실제로 그 분이 지금 미국 진출작을 작업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어제 그 부분에 대한 말까진 나누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제 너무 많은 한국 배우들과 감독들을 만나서 모든 이들과의 대화를 소화할 순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시에나: 나는 미국 진출작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은 준비 중이며 대본이 완성되면 우리에게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일해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 그런 단계의 이야기를 할 순 없었지만 대본을 보내주시겠다고 하니 일단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론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만 준다면 어느 누구와 싸워 이겨서라도 출연하고 싶다. (웃음) 채닝: 물론 이병헌은 아니고. (웃음)
이병헌 씨와 많이 친해진 것처럼 보이더라. 이병헌 씨가 처음엔 친해지기 어려워서 고생했다는 말을 했던 거 같은데 본인들은 어떻게 느꼈나? 시에나: 이병헌 씨가 농담한 게 아닐까. (웃음) 난 처음부터 친한 것처럼 느꺄졌다. 촬영하면서 계속 농담도 같이 나누고 장난도 쳤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채닝: 처음 촬영 때 이병헌 씨는 ‘코브라’ 그룹이었고, 나는 ‘지. 아이. 조’ 그룹이어서 서로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프라하에서 같이 촬영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에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나는 이병헌 씨를 직접 보기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고 존경해왔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나이가 그렇게 많은지 전혀 몰랐다. ‘뷰티풀 맨’,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오해는 마라. 난 결혼한 남자니까. (웃음) 정말 미남이라서 더더욱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시아에서 이병헌 씨의 인기가 대단하다. 어떻게 느끼나? 시에나: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체감했다. 일본 프리미어 행사에서 수 천명의 팬들이 비를 맞거나 뙤약볕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아시아에서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다. 채닝: 사실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가 처음인 만큼 이런 세계적인 환영이나 환대엔 익숙하지 않다. 이병헌과 같은 메가스타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인기를 겸손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웠다.
채닝 씨는 부인과 함께 입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채닝: 신혼인데 영화 때문에 아직 신혼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신혼여행도 짧게 다녀와서 우리끼린 미니문이라고 부른다. (웃음) 이번 투어가 끝나면 진짜 허니문, 풀문을 다녀올 계획이다.
시에나는 할리우드의 패셔니스타라고 알려졌는데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시에나: 패션 아이콘이라는 인식이 어디서 시작되고 발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는 건 연기자로서 방해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의적인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한동안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더니 덕분에 왜 이렇게 옷을 못 입고 다니냐면서 악평을 받게 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솔직히 그 말이 싫어질 때도 많다. 채닝: 옆에서 보면 예술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덕분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시에나 씨는 <팩토리 걸>과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래서인지 블록버스터 여전사 이미지가 생소했다. 시에나: 나도 솔직히 내 자신이 이런 역할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많이 위축됐던 것 같다. 그래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이며 재미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한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작품을 할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했고. 솔직히 차별화된 여전사 이미지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이런 역할은 안젤리나 졸리와 같은 배우가 훨씬 더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다양한 무기를 다루고 무술을 배우면서 악역을 연기한다는 건 하나의 도전이었고 이번 영화가 그런 도전을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채닝 씨는 <스텝업>을 통해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이런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건 그런 인지도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채닝: 리스크가 적은 소규모 작품을 주로 해왔던 내가 이런 대규모의 영화를 하게 됐다는 건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내 커리어에서 봤을 때 좋은 기회이자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기반으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만큼 첫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믿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기회가 왔다. 연기를 하게 될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에 빠지게 됐고, 좋은 시기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이 작품 자체가 로또다. (웃음) 그런 만큼 후속편이 나와서 캐릭터를 이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