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놓고 말하면 피차일반이다. 키 작은 남자가 루저라는 어느 여대생의 발언이나 공공연하게 못생긴 여자를 까대는 어느 남자들의 키득거림이나 천박하긴 매한가지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서 발언되느냐의 차이에 있다. <미수다>에서 떠들어댄 그 여대생의 문제는 자기가 지금 누구 앞에서 떠들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있었던데 있다. 제 친구들과 콩다방이든, 별다방이든, 제 방구석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상황이든,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을 게다. 루저니, 혹은 좆병신이니 해도 상관없다. 그건 잡담이고, 농담이고, 뻘소리고,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으로 방송되는 공중파 TV카메라 앞에 앉아서 쏘쿨하게 ‘키 작은 남자들은 루저’라고 떠드는 순간, 그것이 솔직한 생각이었건, 방송국PD가 시켜서 날린 뻐꾸기였건, 제 얼굴에 평화의 댐에 고인 구정물을 방류하는 짓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한 마디로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여대생만 생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냐. 생각해보자. 도대체 그 놈의 글러먹게 쏘쿨한 솔직함은 대체 누가 훈육한 것이냐. 걔가 특별히 잘나서 혼자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 말은 아니올시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그게 일반적인 사회적 풍경의 한 단락 아니더냐. 성형한 년 싫다는 남자들도 일단 착한 얼굴과 몸매 앞에선 질질 싼다. 여자라고 질것이냐.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자. 그 여대생의 잘못이라면 좀 멍청했다는 것뿐, 그 솔직함이 비단 그 여대생뿐만의 천박함이던가. 에라, 이 쌍년아, 하고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런 썅년을 만나서 혹하지 않을 정도의 눈썰미를 기르고, 심미안을 키우시라. 그것이 당신이썅년이라 손가락질하는 그녀를 진정한 루저로 만드는 길일 테니. 만약 그걸 못하면 정말너야말로 평생 루저로 사는 거야. 네 방구석에 쳐박혀서 딸딸이나 치다가 쫑나는 인생인 게지.
그나저나 시발, 요즘은 대학교 학비도 비싸다는데,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개념이라도 좀 어떻게 안 되겠니? 헐.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격양된 목소리 너머로 사진과 기사가 흐른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프로레슬러의 전성기가 언어로 구술되고 이미지로 비춰진다. 영광의 나날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환호와 열광이 빗발치던 지난 세월을 넘어 눈앞에 들어서는 건 어느 적막한 대기실의 풍경.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인다. 영광의 세월을 지나 노쇠한 육체는 여전히 그 세월을 연장하기 위해 부딪히고 내던져진다. 사나이는 여전히 자신의 전설을 놓지 못한다. <더 레슬러>는 전설을 먹고 사는 어느 루저를 위한 송가다.
영화 속 대사처럼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게 맞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더 레슬러>는 그 합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들춘다. 과격한 퍼포먼스가 링 위를 지배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도 역시 배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허구의 노동은 실로 헌신적인 육체적 공갈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합을 맞추고 과정을 숙지한다 해서 노동이 부정되는 건 아니며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연출을 고려하고 내러티브를 유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정교한 합이 어울려야 한다. 그 퍼포먼스가 실제적인 고통과 고단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수난이 심할수록 관객의 열광도 더해진다. 링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자학적인 수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실로 절박한 진심을 담고 있는 피학적인 거짓말인 셈이다.
랜디 램(미키 루크)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테크닉을 통해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링의 전설로서 군림했다. 링 위에서 영웅으로 연호되는 레슬러지만 그는 사실상 남루한 삶을 살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모금에 갖가지 약을 삼킨다. 작은 임대 트레일러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형마트에서 잡일을 하고 주말마다 링에 오르는 랜디의 삶은 패배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링을 떠날 수 없는 까닭 역시 그 삶과 연관돼있다. 링을 떠나면 랜디는 진짜 패배자의 삶에 갇힌다. 그의 삶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링에 서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링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얻는 것만이 그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동정의 여지로 가득한 랜디의 삶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된다. 다큐적인 질감을 품은 카메라 기법은 <더 레슬러>를 페이소스로 가득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구출시킨다. 종종 랜디의 뒤를 차분히 뒤따르곤 하는 카메라는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그 남자가 걸어나가는 그 세계를 같은 눈높이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링에 오르던 랜디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집주인이 잠근 열쇠를 열지 못해 비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는 과정은 실로 대조적이다. 또한 온몸에 스탬플러가 박혀 피투성이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랜디의 모습을 먼저 비춘 뒤, 끔찍한 유혈을 동반한 경기 과정과 경기 중에 얻은 상처를 대기실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교차시켜서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엔 어떤 과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동반한 배열상의 편집은 있지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노력은 극도로 절제된다. <더 레슬러>가 <록키>와 명확한 차이를 두고 있는 지점이다. 인물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객관화시켜서 그 세계를 응시하고 인물에 대한 관찰을 요구한다.
물론 랜디라는 레슬러에 대한 감정일체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루저의 삶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극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연출의 묘가 좀 더 객관화된 감정을 야기시키고 이를 통해 그 인물 너머로 확대된 세계관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사모하는 랜디의 감정을 온전히 순정적인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으며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로부터 박대 받는 랜디의 모습을 동정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은 상황 그 자체로서 판단하게 만들 뿐, 어떤 감정의 매개체가 되어 객석을 유린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상황의 응시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더 레슬러>가 정서적인 통증을 동반하는 건 그 덕분이다.
전설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랜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숭고함보단 처절함에 가깝다. 그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존이란 물질적 가치의 잉여를 위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 비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유일한 존엄성의 뼈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뿐일 따름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때로 그 현실을 한심할 정도로 나약하게 대비시킨다. 고통을 무릅쓰고 링에 올라서는 사내의 뒷모습엔 현실의 무력함이 깊게 배어있다. 더 이상 진짜가 될 수 없는 영광의 껍데기만 두른 고독한 삶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로서의 삶에 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자신의 링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로맨스에 천착한 그 삶은 지독하게 비루하다. 그럼에도 그 삶을 책망할 수 없는 건 그 삶이 무가치하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흔과 혈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담긴 영광의 세월을 폄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는 그 삶을 통해 감정을 완성하기 보단 그 삶 자체를 조명한다. 무엇보다도 미키 루크는 캐릭터로서의 연기적 영역을 넘어 배우 본연의 삶을 투영하는 양상이라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배우의 삶이 투영된 듯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실로 적나라한 루저의 일생이 배우의 삶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부여하는 덕분이다.
그 삶엔 어떤 낭만도 포용되지 않는다. 스러져가는 육체를 겨우내 지탱하는 사내가 해묵은 언어로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전설에 몸을 던질 때, 희망보단 절망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응시하는 건 그것이 진심이 담긴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영광이라 해도 그 자체를 위한 삶의 진정성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 건조한 영화가 품고 있는 일말의 낭만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비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남다른 생의 의지가 빛난다. 박동이 약해진 심장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움츠림을 거듭하듯 낡아가는 전설을 삶의 최전선으로 연장하려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삶이란 단어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라 해도 그 사내는 끝까지 전설을 삶의 테두리로 보존하려 한다. <더 레슬러>는 실로 처절하지만 그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담담한 그 인생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정신적 자존을 부지해 보려는 사내의 삶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루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진짜 루저의 삶을 그린다. 전설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 껍데기를 유지한 채 그저 걸어간다. 영광의 뒤안길에 선 삶을 고스란히 발가벗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다. 남루하지만 꿋꿋한 삶의 의지가 아련하게 빛난다. 그 삶에 어떤 감정 이입을 가하지 않고 그저 따라 걷을 뿐이다. 훌륭한 위안이자 현명한 연대로서 진심을 전한다. <더 레슬러>의 담담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운데 먹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