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엄숙한 장례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을 메운 하객들 가운데 홀로 서있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짧은 백발과 뚜렷한 주름의 굴곡은 그의 세월을 짐작하게 만드는 나이테와 같다. 부인에 대한 애도로 굳은 표정이 일그러진다. 엄숙함이 지배하는 장례미사 가운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들이 눈 앞에 가득하다. 장난을 치며 히죽거리는 손자들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손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바쁘다. 그의 입술 한 쪽이 일그러진다. 장례미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는 옆집에 이사온 동양인들을 보게 된다. 그의 입술 한 쪽이 또 한번 일그러진다. 그가 사는 동네엔 동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주의자인 월트 코왈스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개탄할만한 변화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예의는 점점 씨가 말라간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엔 그 예의마저 가르치기 힘든 이방인들의 유입이 넘쳐난다. 그는 가치관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젊은 세대의 무례함을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들의 유입을 경계한다. 자신의 일생이 투영된 ‘포드’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그에게 ‘도요타’에서 근무하고 일제차를 운전하는 아들과 그 내외는 탄식할만한 현실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대화가 껄끄럽지만 한낱 물려받을 유산이 남아 있는 삭막한 관계에 불과하다. 어린 손녀조차도 할아버지의 재물을 탐내고 사후 처리를 묻는다. 이웃에 입주한 동양인들 역시 그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월트가 상종할 수 없는 족속이라 믿었던 새로운 동양인 이웃은 그의 시니컬한 삶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들을 마련한다.
어느 날 저녁, 동양인 양아치 갱단의 난입으로 벌어진 이웃의 소란에 월트가 개입한다. 결국 총구를 들이밀고 그들을 물리친 월트는 이웃의 감사와 함께 거듭되는 사례를 얻지만 그것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아는 월트에게 호의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후로 월트가 우연한 계기로 이웃의 소녀 수(아니 허)를 한차례 더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은 말문을 트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수는 자신의 남동생 타오(비 뱅)를 월트에게 접근시키고 두 사람의 친분이 형성된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자식들과 괴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월트의 고독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산물에 가깝다. 세대의 교류가 불필요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 세대는 쓸쓸히 늙어간다. 반면 동양인 이웃엔 살가운 가족주의적인 풍요로 가득하다. 두 집안의 문화적 대비만으로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차이는 월트의 편견을 일깨우는 상대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월트의 허전함을 자극하는 무언의 구실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동양인 남매는 월트의 강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예외적인 호의를 가능케 한다. 젊지만 의외로 예의 바르며 이방인이지만 무례하지 않다. 편견을 넘어 인간적 호의가 발생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랜 토리노>는 어느 완고한 보수적 노인의 존엄한 결정을 비추기 위한 영화다. 자신의 우직한 신념을 키로 삼아 인생에 시동을 걸며 외길을 주행하던 월트가 그 시동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펼치는 마지막 레이스를 숭고하게 묘사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견을 후회하거나 그로 인한 지난 과오를 참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신념의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뿐이다. 월트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를 찌푸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근거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의가 없고, 존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월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그들에 현재를 힐난하기 위한 수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방조하거나 야기시키는 풍경 너머의 근본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다.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예의를 잃어가고, 이방인의 사회에 편입되어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도는 유색인종들은 비뚤어진 폭력의 연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월트는 그 모든 표면적 문제로부터 타오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 그 근본을 해결하지 않고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너비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어떤 결심을 굳혀나간다.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종교적 영험함에 다다를 정도로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그 위대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만만찮은 위트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월트가 내뱉는 촌철살인의 독설은 사실 욕쟁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살갑다. 독설로 포장된 위트에 가깝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유희로 소화된다. 한편 <그랜 토리노>를 지배하는 대단한 박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월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제스처와 구체적 행위를 더하는 것만으로 씬의 공기를 변화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씬을 지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로 4년 여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통해 벌어들인 내공의 깊이와 너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모양새를 구축한 연출력 역시 관건이다. 기복 없이 구획이 명확한 플롯과 감정적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그랜 토리노>의 완벽한 행열을 이룬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인물 간의 관계가 희극과 비극의 팽팽한 구도를 완성한다. 우직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세심하게 진전되는 캐릭터의 구도와 심리적 양상이 너비와 깊이를 함께 구축한다. 계산적인 정공법이라기 보단 경험적인 방식의 이야기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단순한 제스처의 반복이 거대한 복선으로 장착되고 미약하게 감지되곤 하던 어떤 암시가 거대한 전율로 확장된다. 계산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양식으로 보좌되는 플롯과 내러티브의 구축은 <그랜 토리노>의 주제를 보필하기 위해 마련된 탁월한 부속품들이다.
(스포일러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그랜 토리노>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깊은 혜안을 담고 있다. 월트는 문 앞에 성조기를 내걸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이해되며 타민족의 활발한 유입은 국가주의적 결속을 해치는 무분별한 난입으로 이해될만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개인적 악의로서가 아닌 전체적인 존속을 위한 고민으로서 그런 편견을 유지하고 지탱해나간다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시동을 꺼버리지 않고 그 해결점이 모색될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새로운 주행방식을 설득시킨다. 월트의 ‘그랜 토리노’가 단순히 그의 지난 자부심을 위한 전시물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물려지는 산물로서 거듭날 때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시대를 배려하는 대안적 정책으로 거듭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나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 된 오늘날의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감한 백발 노인의 보수적 신념은 자신의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과 우직한 결심으로 발전된다. 외부인의 유입을 막을 수 없는 현실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모색한다. 차별과 편견을 통한 억제가 아닌 선별과 교화를 통한 육성을 제시한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는 전장에서 짊어지고 온 살육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명예로운 훈장의 치욕적 진실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현실적 고독도 대부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별한 부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신부 (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부탁한 것도 그런 상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에 맞선다. 그에게 지난 비극은 당면해야 할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온전히 자신의 책무로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의 결심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비극을 잉태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는 고집만큼이나 비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건 자신의 기득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에 젖어 염치없는 망발을 일삼는 어느 보신주의자들의 얄팍한 보수주의 퍼포먼스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예의가 망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려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육체를 공익적 방도로 삼아 사회에 환원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될지라도 소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돌진한다. 자신의 노쇠한 육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사회의 비료가 되길 희망한다. 자신이 점지한 대안 세대에게 폭력의 책무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서 그는 복수가 아닌 징벌을 택한다.
<그랜 토리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아들과의 괴리감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월트는 딸을 그리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와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랭키와 달리 월트는 자신이 응원하는 후세대의 좌절을 짊어지고 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후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제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삶을 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라스트 씬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전통의 주인이 된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고 사라지는 저편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대의 존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태운 어느 노장의 깊은 철학이 이룬 성과다. 롱테이크로 비추는 그 풍경에서 변하는 건 비단 인간을 통해 움직이는 차량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변한다. 인간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한다. 결국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도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라는 고민이 대칭을 이룬다. <그랜 토리노>는 그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묵직한 답변을 남긴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냉철한 시각에 담긴 따뜻한 혜안을 그린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되 그 신념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 공정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념이다. 기득권의 보신을 위해 보수주의의 문패를 내거는 알량한 거짓 연기와 다른 진짜 보수주의자의 덕목을 숭고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거장의 철학을 또 한번 설득시킨다. 언젠가 노장은 죽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랜 토리노>는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걸작이다. 마치 누구나 탐내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