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두기봉 가라사데, 내 사전에 명장면 없는 영화란 없다. 국내에서 좀처럼 개봉하지 못한 두기봉의 작품을 세트로 완비한 이번 부산영화제는 어쩌면 국내에 유랑민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홍콩영화팬의 심금을 울리는 은총의 장이 될지도 모른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두기봉의 신작 <복수>는 두기봉의 필모그래피에서 첨탑을 차지하진 못해도 두기봉의 업데이트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 두기봉표 느와르일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참새>의 개봉을 기다리다 목이 빠진 당신이라면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복수>를 직관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이미 불타오르지 않을까.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오른 <복수>는 어쩌면 당신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꼭 봐둬야 할 단 한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TIP.나 두기봉 영화야. 기봉이 형 믿지?
<공기인형 Air Doll>
10/10 CGV 센텀시티 7관17:30 (GV)
10/13 CGV 센텀시티 3관12:30
10/15 씨너스 부산극장 1관19:30
아시아 영화의 창 | 2009 | 고레이다 히로카즈 | 배두나, 오다기리 죠, 아라타 | 116분 | 일본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인형으로 배두나가 낙점됐다. 낭만적인 인형의 꿈이냐고? 천만의 말씀, 그녀는 섹스돌(sex doll)이시로소이다. 담담하듯 안온한 풍경 속에서 시니컬한 정서를 자아내는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신작 <공기인형>은 인간이 된 인형의 관점을 관통하는 현대문명 속 인류에 대한 고찰이다. 버려진 아이들의 침묵을 담담히 그려내던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최근작인 동상이몽 속에 놓인 가족들의 시니컬한 속마음을 은밀하게 드러낸 최근작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은밀한 냉소가 인형의 낯빛을 한 배두나의 눈길을 통해 조명될 것이다. 올해 봉준호의 <마더>와 함께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던 <공기인형>은 토론토영화제 등에서 이미 호평을 인증 받은, 둘도 없는 기대작임에 틀림없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박찬욱의 신작 <박쥐>의 10분 추가 영상이 포함된 확장판 버전을 굳이 부산에서 또 볼 필요가 있느냐고? 당신이 올해 <박쥐>에 낚였다며 육두문자를 살포한 1인이건, 스크린 앞에 무릎 꿇고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외치던 1인이건, 발동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극장을 찾았던 이라면 단 10분의 추가 분량만으로도 <박쥐>는 분명 유효한 떡밥이다. 또 한번 격음이 난무하는 화법을 동원해 영화를 패대기 치건 할렐루야를 외치며 두 손을 모으고 찬양 크리에 들어가던, 중요한 건 <박쥐> 확장판은 부산영화제에서만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부산영화제에서 업데이트된 박찬욱의 강화된 떡밥을 모른 체 하기에 당신의 호기심이 이미 동하고 있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닥극사.
TIP. 10분 추가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떡밥. 일단 물어봐.
<브라이트 스타 Bright Star>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16:30
10/12 대영시네마 3관17:00
10/15 시너스 부산극장 1관16:30
월드시네마: 마스터즈 | 2009 | 제인 캠피온 | 에비 코니쉬, 벤 위쇼 | 119분 | 영국, 프랑스, 호주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브라이트 스타>는 <피아노>와 <여인의 초상>을 통해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여성주의 감독 제인 캠피온의 섬세한 감각이 되살아난 성공적인 귀환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존 키츠와 패니 브라운의 실화적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 <브라이트 스타>는 두각을 나타내는 영국 배우 벤 위쇼와 신성으로 떠오르는 애비 코니쉬의 브리티쉬 앙상블에 초점을 맞춰도 좋을 영화다. 음울한 감수성을 문체로 승화시키던 영국 음유시인의 도전적인 러브스토리. 어쩌면 <브라이트 스타>는 유려한 문장과 단정한 음율이 격정적이고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 끝내 낭만적 파고로 몰아칠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가 아닐까.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을 피해 피난민들은 철교 밑 터널로 몰려들었다. 깜깜한 어둠 너머로 하얀 안광이 빛나고, 터널을 채운 침묵 속에서 종종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오면 엄마들은 그 입을 막곤 했다. 터널 밖으로 인기척이 밀려온다. 사람들의 심장이 뛴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터널 속을 빗발치는 총알들이 휘젓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소리가 들끓던 터널은 점차 식어가는 주검들의 체온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故박광정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의 연대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당신의 피는 붉은 색이리라.
<아이 엠 러브>는 중후하고 섬세한 이탈리아 밀라노 상류 재벌가문의 그리스 비극적 몰락을 그린다. 가문의 영광은 세대의 균열과 감정의 변절을 통해 서서히 기둥 뿌리가 흔들려 간다.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치열하게 따라잡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파국의 형상을 우아하게 따라잡으며 역설적인 심상을 자극하는 <아이 엠 러브>에서 방점을 찍는 건 아무래도 틸다 스윈튼의 열연이다. 2002년도에 이미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라는 가족 다큐멘터리로 틸다 스윈튼과의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루카 구아다니노는 결국 틸다 스윈튼의 열연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장편을 완성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를 수상한 작품이자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틸다 스윈튼을 올해 부산에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놓치지 말 것.
TIP.이탈리아 명문가가 죄다 마피아일 것이란 편견은 버려.
<피시 탱크 Fish Tank>
10/9 대영시네마 2관14:00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14:00
10/15 대영시네마 1관16:30
월드 시네마 | 2009 | 안드레아 아놀드 | 마이클 패스빈더, 해리 트레더웨이, 키어스틴 워레잉 | 124분 | 영국
2006년 칸영화제에서 자신의 첫 번째 장편 <레드 로드>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는 올해도 자신의 두 번째 장편 <피시 탱크>로 <박쥐>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하며 명성을 이어나갔다. 두 편의 장편 연출작으로 두 번의 칸영화제 트로피를 쓸어담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뛰어넘다 못해 박차버린 셈이다. <피시 탱크>는 전작 <레드 로드>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시적 생존본능에 짓눌린 인간적 체온을 구원하기 위한 진심을 담고 있다. 감정적 격발을 유도하는 문제적 결말을 향해 서서히 달궈져 나가는 서사는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의 체온마저 끌어올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리라.
제62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현지시간으로 24일 오후 7시 경, 칸 뤼미에르대극장에서 열린 폐막식 및 시상식을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리고 최고영예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으로 <화이트 리본>의 미카엘 하네케가 호명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제인 캠피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켄 로치, 이안, 라스 폰 트리에, 두기봉등, 거장들의 신작이 대거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별들의 잔치라 불렸던 이번 칸영화제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경악의 연속이었다. <박쥐>를 시작으로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리스트>를 비롯해 잔혹하고 폭력의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기대를 모았던 몇몇 작품들은 평이한 반응을 얻으며 실망감을 더했다. 그런 가운데 제인 캠피온의 <브라이트 스타>와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좋은 평을 얻으며 조심스럽게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을 예상케 했다.
결국 지난 2001년 <피아니스트>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2005년엔 <히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던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에 앞서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심사위원대상에 호명됐다. 지난 해 로랑 캉테의 <더 클래스>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황금종려상 트로피가 프랑스 영화에게 돌아갈 기회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앞서 역시나 혹평의 중심에서 논란을 면치 못했던 브릴란테 멘도자의 <키나타이>가 감독상을 거머쥐며 야유까지 얻었고, 역시나 범작이라는 평이 우세했던 로우 예의 <스프링 피버>도 각본상을 수상하며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한편, 지난 2004년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박쥐>의 박찬욱 감독은 <피쉬 탱크>의 안드레아 아놀드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했다. 이로서 박찬욱 감독은 유일하게 칸영화제 트로피를 2개 이상 소유한 한국영화인이 됐다. 기대를 모으던 송강호의 남우주연상은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의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돌아갔다. 브래드 피트보다도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쳤다는 중평이 많았다. 또한 칸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이라 꼽히던 <안티크리스트>에서 자학적인 연기를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샬롯 갱스부르는 여우주연상으로 이에 보답 받았다. 한편 <무성한 잡초 Wild Grasses>를 발표하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누벨바그의 거장 알랭 레네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됐던 봉준호의 <마더>는 현지에서 고른 호평을 얻었지만 지난 23일 칸 드뷔시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학생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씨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출품된 조성희 감독의 중편 <남매의 집>은 씨네파운데이션 3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62회 칸 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Palme d'Or): <화이트 리본 The White Ribbon> 미카엘 하네케 심사위원대상(Grand Prix): <예언자 A Prophet> 쟈크 오디아르 심사위원상(Jury Prize): <박쥐 Thirst> 박찬욱, <피쉬 탱크 Fish Tank> 안드레아 아놀드 (공동수상) 감독상(Award for Best Director): <키나타이 Kinatay> 브릴란테 멘도자 각본상(Award for Best Screenplay): <스프링 피버 Spring Fever> 로우 예 남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or):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 Inglorious Basterds> 크리스토프 왈츠 여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ress): <안티크리스트 Antichrist> 샬롯 갱스부르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 for his work and his exceptional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cinema):알랭 레네
<박쥐>에 대한 긴 글을 쓰고 싶다. 이래저래 생각은 많은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지난 주말에 한번 더 보니 이 영화에 대해 품은 생각이 한 차례 업데이트됐다. 방출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다. 아, 심란하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좀 쌓였다. 그리고 또 쌓일 일이 한 바가지. 원래 <똥파리>에 관한 글도 한번 시간에 밀려 포기했고,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와 <굿나잇 앤 굿럭>을 연결한 만평적인 글도 생각만 가득하다 시간에 밀려 포기했다. 하지만 <박쥐>는 한번 작심하고 써내려 가고 싶다.
난 박찬욱의 욕망이 순수하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박쥐>가 지나치게 인공적이고 통제된 영화라 불편하다지만 난 그 형태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순수한 유희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진보주의자다. 그는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 극단적인 순수를 이룬다.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 혹은 그 이전에 <복수는 나의 것>, 아니면 <공동경비구역 JSA>라도, 박찬욱이 만든 어떤 영화를 보고 감탄을 마지 않았던 그 누군가가 <박쥐>를 보고 침을 뱉었다고 해서 그것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변명이 아니라 그저 내가 이해한 박찬욱을 기록해두고 싶다. <박쥐>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할 생각은 없다. 단지 결코 폄하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사견을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다. 텀이 길어지면 영화를 한번 더 보려 한다. 두 번 봤다고, 혹은 세 번 봤다고 내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노라, 찬미할 생각은 없다. 단지 뭔가 기억해두고 싶은 장면이 좀 더 세밀하게 관찰됐고 더 되리라 본다.
참고로 지극히 평범한, 어떤 비범한 관람 욕망이 전혀 없는 내 여자친구의 가벼운 소견에 따르면 <박쥐>가 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뭔가 한번쯤 봐둘 만한 영화인 거 같다고 하더라. 대단한 재미는 없지만 뭔가 볼만한 것을 본 것 같다고 했다. 그 반응이 흥미롭다. 물론 그 한 점에 불과한 반응을 거대한 평면으로 오해하는 짓은 않으려 한다. 다만 내가 착석했던 그 상영관에서 동시에 자지러지다, 동시에 숙연해지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그게 흥미로웠다. <박쥐>는 회화적인 영화다. 그게 영화적으로 불순하다고 생각진 않는다. 단지 어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조차도 난 지지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박쥐>는 전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겠다. 단지 악담으로 도배될 영화는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악의적인 방식으로 숭고해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걸 좀 풀어내보려 한다. 그러려면 좀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의 목적이 뭐냐. 말 그대로 날 위한 수갑이랄까. 이렇게 적어놓고 못하면 좀 쪽팔릴까. 그러니까 일종의 압박을 스스로 채우는 셈. 어떻게든 꼭 해봐야 겠다. 마치 예고 홈런과 같은 거다. 물론 내 글이 홈런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파울플라이 정도?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