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Nowhere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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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Nowhere Man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정지우 감독이 <은교>라는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다고 할 때까지도 몰랐다. ‘이적요라는 노시인의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사실 원작을 읽기 전까지는 잠깐 노인 분장을 하면 되겠지 생각했죠. 그렇게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당황스러웠죠.” 계속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70대 노인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의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정지우 감독은 말했다.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내면보다 외형이 더 빨리 변하는 것 아닐까요. 환경보다도 그에 익숙해진 느낌들이 빨리 변하지 않듯이.” 동의할 수 있었다. 선택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4시간이나 소요된 첫 테스트 분장이 끝난 뒤, 거울을 본 박해일은 생각했다. ‘이게 이적요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배우의 얼굴을 가리면서도 드러나야 하는 그 작업은 ‘기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리에이티브한 미술작품’이었다. 완성도 있는 특수분장은 ‘단서를 잡아야’ 했던 박해일을 위한 첫 번째 단서였다. 70대 노인이 되기 위해서 박해일은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했지만 그 ‘방대함’은 오히려 ‘큰 숙제’가 될 뿐이었다. ‘노시인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려 할수록 어색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시인 이적요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화두는 ‘노인처럼 보이는가’라는 기능적 측면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떨림까지 잡아낼 수 있는 특수분장을 했지만 결국 저는 한 꺼풀 뒤에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박해일이라는 자연인이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되어 솔직하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부담도 덜어지더군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거였죠.” 박해일이 찾은 키워드는 결국 ‘자제’와 ‘절제’였다.
어느 새 연기경력 10년을 훌쩍 넘긴 박해일은 그 이름값에 비해서 딱히 드러난 바가 없다. 자연인 박해일은 정적 그 자체와 같았다.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가 작품과 함께 사라진다. <은교>의 노시인 이적요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공적으로 거룩하게 추앙 받는 시성의 대가가 10대 소녀에게 연정을 느끼다 깊은 애정으로 치닫는 과정은 시구로서 기억되는 천재성과 비범함을 배신하면서도 자연인으로서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양면성은 사실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수없이 동원된 단어다. 사회적인 위치와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예상치 못하게 번져버린 뜨거운 감정 앞에서 주저하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적요의 감정은 그의 나이를 감안해봤을 때 굉장히 열정적이고, 폭발적이죠.” 박해일에게 그 감정은 단순한 욕망이 아닌 간절함이었다. “한 순간의 욕망이든 갈망이든 그런 매혹에 빠지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했을 때 그 상황들의 감정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단지 노인의 감정을 이해한다기보단 이 정도의 일을 겪은 사람의 감정을 많이 느꼈나 봐요. 원래 한 작품이 끝나고 캐릭터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우울함이나 외로움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적요의 측은한 면이 아직 깊게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지난 해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최종병기 활>이 박해일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동적인 영화였다면 <은교>는 가장 정적인 영화일 것이다. 박해일에게 <은교>는 여러 모로 새로운 작품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어려 보이는 외모를 지닌 박해일은 단 한번도 자신의 나이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적이 없었다. 또한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성격파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그가 절제라는 단어로 설명해야 할 내밀한 인물로 분한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절제되는 인물의 매력이 굉장히 큰 걸 알았어요. 더 설명하려 하거나 더 표현해보려 하거나,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안에서 계속 꿈틀대는 걸 최대한 절제하는 것도 매력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번 경험은 큰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매번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8시간의 특수분장을 인내해야 했던 그는 ‘참을 인’ 자를 마음에 새겼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는 그는 70대 노시인을 연기하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각자 본인 나이와 상관 없이 저마다의 삶은 그들 각자에게 의미가 있어야 해요. 어느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게 오히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번 작품을 끝내고 나면 책꽂이에 책 한 권을 꽂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박해일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상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고요하고 안정적인 정적 속으로.
(ELLE KOREA 5월호 No.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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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은, Beautiful Stranger
운명은 언제나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나 뒤늦게야 필연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김고은이 ‘배우 김고은’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김고은은 ‘심심하면’ 집 인근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도 그랬다.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재학 중인 학교 무대에서 단 한번 자신의 연기를 봤던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김고은은 알고 있었다. <은교>가 영화화될 것이며 은교 역에 어울리는 신인배우 오디션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은교 역할을 맡게 될 여배우 꽤나 마음 고생하겠네.’ 하지만 몰랐다. 마음 고생할 그 여배우가 자신이 될 줄은. <은교>의 의상 감독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정지우 감독을 만나는 자리로 바뀐 뒤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2시간 만에 읽어버렸던’ <은교>는 탐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이 만만치 않은 노출신이 예정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작품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10분 뒤, 방에서 나와 딸의 고민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 또 다른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네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 한마디에 김고은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꼈다. “이렇게 욕심이 나는데 두려움 하나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하는 제가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의심과 욕심 사이에 놓여있던 김고은이 확고한 의지를 쥐게 된 순간이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녀는 현장 적응력도 남달랐지만 카메라만큼은 낯설었다. 정지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방법을 찾았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엉덩이로 이름도 쓰면서 망가져보는 거였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낯선 집을 혼자 둘러보는 신이었는데 카메라가 바로 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카메라가 무서웠고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 장면만 20번 정도 갔어요.” 김고은은 8시간의 분장을 마친 박해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당일에 계획했던 분량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송스러워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을 높여주고자 ‘카메라 밖에서 시선을 맞춰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격려하는’ 박해일의 배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배운다는 입장으로 갔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편해졌죠.”
작품 경력 하나 없는 22살 남짓의 신인배우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주목 받고 있다. 어쩌면 검증된 배우 박해일과 김무열 사이에서 트라이앵글의 한 각을 차지한 신인배우를 향한 관심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기 주관을 드러낼 줄 아는 김고은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은교는 겉으로 봤을 때 굉장히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운 아이에요.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이야기하고 잘 웃잖아요, 하지만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고민했죠.”
김고은은 호기심이 강한 소녀 은교를 닮았다. 박범신 작가는 은교의 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맑은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전해지지만 다양한 의문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순수와 관능의 파도가 철썩거린다. “제가 호기심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제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하대요. 저도 궁금한 거에요. 그 눈이 뭘까.” 이제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여배우에게 대단한 상찬은 어쩌면 독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만개할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꽃봉오리처럼 눈이 가는 배우다. 가혹한 부담감을 되레 ‘일상적인 연기를 보다 훌륭하게 해내야 한다’는 야무진 각오로 승화시킨 그녀는 <은교>를 관통하며 긴 야심을 품었다. 단단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은 그렇게 피어 오른다.
(ELLE KOREA 5월호 No.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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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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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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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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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씨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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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캐스팅은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특히 이장. (웃음) 정재영 씨가 머리를 삭발했던데. 하지만 감독님이 믿음이 강하더라. 워낙 신뢰할만한 배우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믿어야지.
만화가 아닌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변주한 타인의 창작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 있을 거 같다.
처음 영화를 계약했을 땐 어떤 분이 연출할지도 몰랐고 내 나름대로 상상만 해봤다. 배우는 누구, 감독님은 누구, 이렇게. 어쨌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를 벗어난 그 이상의 조합이 나왔다. 그래서 너무 기대가 커졌다. 일단 제일 기분 좋은 건 박해일 씨의 캐스팅이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박해일 씨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님께 내가 박해일 씨 팬이고, 류해국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소개시켜주더라. 그때는 그냥 조심스럽게 만났는데 나중에 캐스팅이 확정됐다고 하니까 속으로 ‘아싸!’했지. (웃음)
류해국이 박해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박해일 씨를 모델로 류해국을 만들었다는 게 재미있다.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더라. 왜냐면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사람은 와이셔츠나 벨트, 바지, 이 이음새가 맞지 않아도 막 입고 다니잖아. 양복 뒷주머니도 일간지가 아닌 벼룩시장 같은 거나 넣고 다니고. (웃음)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박해일 씨를 많이 응용했다. 항상 뭔가에 찌들어있고,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애매모호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도 탐나더라. 계속 그 모습을 머리에 넣고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관여하는 건 없나?
전혀. 어쨌거나 연재가 완료되기 전에 계약이 된 상황이라 계속 회의는 해나가야 했다. 정지우 감독님도 계속 물어보시고. “그러니까 이영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웃음)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해온 사람이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또 그게 말로서 내 입으로 나오면 내가 그 말을 들어도 재미없다. 어떻게 이 분을 감동시킬까 고민이 되니까 설명도 잘 안되고. 완결되고 난 지금은 여러 문제로부터 후련해졌다. 만화로서는 일단 여기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고 시나리오도 변형을 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폼이 생긴 거니까 그 분들도 편해졌고. 사실 5월 말에 연재를 끝내려고 했는데 8회 분량이 연장돼서 그 분들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걸.
8회는 왜 연장됐나?
원래 기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거기서 재미를 느꼈고 분량이 늘어난 거지. 뒤에 수습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몇 회를 더 해버리니까 결말부까지 길어져 버렸다. 아직도 내 생각엔 3회 정도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미디어 다음(Daum)’측 사정도 있고 해서 거기서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결말부도 불충분했다고 느끼나?
조금은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예정된 템포대로 진행했다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그걸 한 회에 몰아가다 보니까 급해진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이끼>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읽어내고 그런 해석을 반영한 댓글이 많더라. 실상 그렇게 읽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처음 잡았던 기본적 설정과 무관하게 연재 과정에서 관찰하거나 목격한 외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극적으로 수정이 가미된 요소는 없었나?
애초에 <이끼>는 노무현 정권 때 기획됐다. 애초에 현정치상황이 <이끼>에 반영된 건 없었던 거다. 작은 권력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작은 권력에 빈정 상한 사람의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인공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돼버렸다. 창작물은 사실 생물과 같다.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이야기가 확장되니까. 결국 애초에 내 머리 속에 구성돼 있던 것들이 너무 시시해져 버린 거다. 덕분에 뉘앙스가 수정된 부분이 있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내 예정대로 갔다고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라난 분량도 생겼으니 그 이후로의 진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계획했던 결말의 형태가 변하진 않던가.
원래 결말까지 이야기를 다 짜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방금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자라나버린다. 그게 내가 간과한 문제였건, 단순한 실수였건, 독자들은 그걸 믿고 간다. 그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나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라 해도 독자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은 정당한 거니까 그것들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줘야 한다. 그런데 내용상 이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애초에 내가 잡았던 것만큼 갈 수 없게 됐다. 크게 봐서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가 잡았던 대로 가야 했던 거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류해국 아버지가 갑자기 도인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관념 자체가 확 팽창돼버렸다. 결국 내가 애초에 잡았던 설정들이 시시해져 버린 상황이 된 거다.
애초에 잡았던 결말과 지금의 결말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말부분은 사실 비극적으로 끝내려고 했다. 류해국 같은 주인공이 자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초에 자기 생각과 습관을 다시 끌어와서 이 사건을 만든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네가 네 스스로 싫다고 느껴서 버리려던 성격이라면 네 성장을 위해서 완전히 버렸어야 했는데 왜 다시 그걸 또 쥐어 잡았냐고, 그런 생각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그에 대해서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거 아니냐고. 사소한 정의라도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는 사회보단 개인 우선으로 관점을 두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품 밑에 달리는 댓글 같은 걸로 인해서 어떤 사회성을 발견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류해국이 이기는 쪽으로 색채가 달라져 버렸다. 대신 류해국의 방법으로 이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검사한테 손을 뻗고, 검사도 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런 식으로 류해국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융화형 인간으로 그리게 됐다. 검사도 유들유들한 타협적인 인간에서 주인공처럼 선이 분명해진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주인공의 파멸이야기였다가 한 40화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게 된 거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이끈 주변 사람이 궁금하다.
<이끼> 40회 즈음에 영화판권 계약을 했고 그 후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한) 정지우 감독님을 만났다. 정 감독님이 내 원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정도 들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솔직히 윤 작가 생각에 동의가 안 돼요. 나는 내가 바로 류해국 같은 사람이라 믿는데 내가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그렇게 죽일 놈인지, 고민에 빠지네요.” (웃음) 계속 “류해국이 뭘 잘못했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검사한테 조금 더 점수를 준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박검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거나 말거나 어차피 사회의 주류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더라. 결국 왜 박검사가 승자가 되고 류해국이 패자가 되냐는 물음이었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파멸로 가는 건 아니란 생각이 굳어지더라. 검사한테 갈 역할이 류해국한테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끝이라고 도장 찍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인 류해국에게 맡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말씀하시길, “류해국 같은 사람의 가치관은 지금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가치관인데 이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스토리 안에서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거였나?
류해국을 포함해서 다 죽고 이영지만 살아남는 거였다. 사실 직접 그리기 시작하면서 콘티를 짜기 전까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버전도 한 스무 개 정도 나왔었다. 영화사마다 아직 연재 중인 만화니까 계약하기 전에 결말을 알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사에 한번 써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또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영화사엔 또 다른 버전을 써주고, 이러니까 영화사마다 각자 본 버전이 다 다른 거다. 정 감독님한테 얘기할 때도 이건 확정적인 건 아니고 나도 솔직히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듀나(DJUNA)’라고 하나?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번 “작가도 <이끼> 결말을 모른답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글이 있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항상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시작점과 끝점은 있는데 인물 위주로 가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설계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지. 사건 위주로도 정해놓고 프리(프로덕션)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야후>와 함께 <이끼>를 비롯해서 최근 연재했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건의 뇌관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자관계가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념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건달 생활 비슷한 걸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야반도주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자꾸 신변이 위험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싫어졌는데 점차 이 사회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거 같더라. 처음엔 단지 내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서 ‘아버지 일기’라는 것도 써보고 그랬는데 인식이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지다 보니까 그냥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다고 느껴지더라. 정치인들은 여성들도 굉장한 마초 근성을 갖고 남성화돼서 움직이잖아. 이런 게 진짜 혐오스럽더라. 난 아직도 아내를 부를 때 ‘누구 씨’라고 부른다. ‘누구 엄마’ 이러는 것도 싫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나 남자야’라고 뻐기는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야후>를 봐도 남자라고 폼 잡고 나오는 애들은 진짜 남자같이 나온다. 아주 권위적으로 여자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의식이나 분노가 굉장히 많은 거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랄까.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경제적 문제로서 크게 두드러지는 시대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결국 세대간의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류해국은 기성 세대와 대립하는 젊은 세대로 치환해도 좋은 인물이다. 결국 그 적의를 사회적 행위로서 내보이고 이를 통해 자기 부정적 파멸마저 도모한다. <야후>도 사실 그런 세대적 적의에서 비롯된 자기 파멸적 이야기다. 원래 계획했던 <이끼>의 결말을 듣고 보니 <이끼>도 <야후>와 비슷한 비극적 파국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 볼 수 있었겠다. 다만 두 작품이 결말에서 극명한 차이를 두게 된 건 외부에서 얻은 영향력이 그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작품의 변화가 스스로의 생각 자체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이제 지는 걸 이야기하긴 싫어졌다. 어떻게 보면 파멸을 그리고 싶다는 건 사소한 동기일 뿐이다. 내겐 엇나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굉장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네 만화 정말 재미있어.” 그럴 수록 막 엇나가고 싶어진다. (웃음) 정말 마이너한 정서지. 액면으로 느껴질 만한 선의의 칭찬이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자랐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찰흙으로 잘 빚어놓고서 ‘에이, 이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란 식으로 막 뭉개버리는 애들 같은 마음이랄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정지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게 너무 사소한 태도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줄 때 욕심을 내서 더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촛불집회만 봐도 과거와 (시위가) 형태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386세대들이 변절해가는 과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과거를 또 비난하고, 적의를 갖고, 그런 건 너무 비참한 삶이 아닌가. 그래서 한번이라도 그 안에서 승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싶더라. 비록 그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 스스로도 분명한 선을 갖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도 둘이나 낳았고. 이제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더라. 내가 포기하는 싸움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멈추지 않은 이상 지는 싸움이란 건 없는 거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만화에 <불의>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는데 이게 그냥 추모만화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했다. 불은 저절로 또 생겨나겠지만 불 끄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런 열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개입됐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야후>는 여전히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야후>는 <이끼>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두르고 메타포적 이미지를 적시한 작품이다.
<야후>에 나왔던 사건사고들은 지방에 살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진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TV를 보니까 마치 컴퓨터그래픽처럼 다리 중간이 내려앉아 있고,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마치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토픽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할까.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엔 며칠 만에 사람들이 구조됐네, 이런 뉴스를 보고 세상이 정말 원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관심사를 만화로 그렸던 거다. 사실 난 사회발언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별자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 한 명에게도 구조라는 게 있지 않나. 사회와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있고. 결국 드라마라는 게 사람 이야기고,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나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종교도 들어가고, 모든 게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졌다. 꼭 기독교나 천주교 같은 특정종교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영역에 마음을 담아두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종교적 의도가 되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부분이다.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도 다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별자리 배우면서 성경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자연스럽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겹쳐졌다. 인물을 우물처럼 깊게 보는 관점도 생겼다. 결국 <이끼>할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이끼>가 <야후>보단 관념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잘 잡아서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야후>보단 <이끼>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큰 건가?
원래 <야후>에서 주인공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첫 아이가 생기면서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뒤로 가면서 해프닝 위주의 사건들이 채워졌고, 결국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절반밖에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끼>에서는 뭐건 간에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밀도까진 들어가봤다는 느낌이 남더라.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다.
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류해국이 이장 집에 찾아가기 전에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밀도로 채워져 있다.” <이끼>는 대사량이 적은 만화가 아니다. 동원되는 대사의 표현방식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덕분에 해석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고. 그림만큼이나 언어를 동원하는 방식에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스토리를 쓸 때 종이를 한 장 옆에 두고 대사를 반복해서 써봤다. 일단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았지. 그 다음에 표현이 많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문장이면서도 읽어봤을 때 적재적소에 쓰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괜찮다는 느낌이 좋더라. 평이하지만 날 선 느낌? 그래서 대사는 반복해서 써보고 판단했다. 가장 훌륭한 대사는 폼 잡거나 많이 부풀려진 대사가 아니라 그 상황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대사니까. 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그런 대사가 있지.
대사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사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함축적이라 이해되는 대사도 많고.
<야후>마지막 권에서 주인공과 신무학이 죽기 직전 “잘 가라.” 할 때, ‘아, 이런 맛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송지나 작가가 <모래시계>에서 “나 떨고 있니?” 이 대사를 쓰기 위해 7일 간 고민했다는 것처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가장 쉽게 의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얘네 나이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죽기도 바쁜 애들이 무슨 대사를 질질 끌면서 하겠냐 싶더라. 그래서 결국 “잘 가라.” 한마디로 가게 됐는데 그때 내 스스로 느낀 거지. 대사는 각 잡을수록 후지게 나오는 구나. 대사의 선이 분명해버리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져줘야 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 여러 해석이 나올만한 대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사회 비판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어려운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마치 식자층 같은 대사를 쳐대거나 사회적 발언을 해버리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대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옆집 사는 아저씨가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 정도 수준의 대사가 필요했다.
캐릭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만한 대사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건가?
맞다. 무엇보다도 <이끼>는 분명히 그림은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관념적 만화라서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끼>를 하면서 어떤 분명한 걸 지적하듯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만큼 불분명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선이 뚜렷한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진 못하겠더라. 각자 처지에 맞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싶었다.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보고 <살인의 추억>이 연상됐다. 인간적이라 이해되는 지방성의 이면에 감춰진 잠재적 폭력성이라던가, 소박한 환경 내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한 심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압축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더라. 무엇보다도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그 자체로 작품에서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런 마을을 상상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차량의 주행속도를 10km/h정도 높이기 위해 곡선을 최대로 줄이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만큼 굉장히 폭력적으로 건설됐지. 한번 그 도로를 타고 고향집을 갔다가 올라오는데 어떤 터널에서 나오니까 소음 방지벽 너머에 가둬진 작은 마을이 보이더라. 돈을 몇 푼이나 받았을지 몰라도 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었겠지. 도로 아래 교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낯선 사람은 저 마을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조차도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갈 마음도 들지 않는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저런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들도 인상 자체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의 모티브는 어디서 시작됐나?
그 공간에 대한 호기심 이후로 사연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전제가 뒤따랐다. 종종 시골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서울에 계속 살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무서웠거든. 시골에 살면서 보면 가끔 시골에서 막걸리 같은 거 마시고 그러다가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다. 낫도 흉기가 되는 물건인데 눈 한번 돌아버린 사람 주변에 그런 게 놓여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농사를 짓고 힘을 쓰다 보니까 체격도 좋은데 저 사람이 순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지. 그래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순박해 보이지만 눈 한번 핑 나가면 살벌해 보일 수 있는 느낌의 캐릭터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장 같은 경우, 딱 봤을 때부터 재수없어 보일 만큼 혐오스런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를 모아 놓은 거다. 대머리에, 광대뼈에, 음흉한 큰 눈까지. 주인공인 류해국은 척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게끔 훌쭉한 느낌을 줬고.
한 마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그런 관계에 잠재된 은밀한 사연과 그 사연의 발굴을 통한 갈등과 충돌이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만큼 캐릭터의 내외를 디자인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거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도 존재하겠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진 않았을까.
사실 모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인물마다 하나씩 죄를 집어넣었던 거다.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얘는 무슨 죄, 얘는 무슨 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이입했다. 이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원죄, 그리고 전석만은 어린 아이를 죽이고 할머니도 죽게끔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인간의 몸뚱이로 장사하며 이를 통해 그 누군가를 죽인 죄, 간접 살인을 한 죄, 이런 식으로 죄를 부여해놓고 그 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성격들을 접목시킨 거다. 살다 보니 죄를 짓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격을 만든 다음에 죄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이해하는 힌트로 적용시킨 거다. 인물 파일을 만들 때 본래 타고난 이 사람의 성격을 먼저 설정한 뒤, 그 사람의 서사를 만들게 된 거다.
마을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라면 이장은 뿌리와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이장은 다른 캐릭터보다도 극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존재를 구상하는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사람 많지 않나? 특히 사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점유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화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수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몰리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더라. 만약 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틀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순간, 이제 이장 같은 사람이 되겠지. 그런 흔한 성격을 극대화시킨 거다. 사실 류해국 아버지 같은 사람도 흔하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봐왔는데, 작은 교회에 가보면 마치 절대자인 양 행사하는 목사가 많다. 목사가 없으면 전도사가 그 역할을 하고 앉았다. 권사만 해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똑같은 시골 촌부인데 권사네, 장로네, 이런 이유만으로 어른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 정식으로 교단에서 인증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고 그로부터 추출해온 성격을 약간만 세게 변형시켜버리면 <이끼>같은 집합이 생긴다.
마을은 죄의식의 연대로서 은둔하는 장소다. 그 공간의 성격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사람이 독립적인 거 같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의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춰야 될 것이 많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부분이나마 노골적으로 감싸주는 방어막이나 울타리 같은 존재를 항상 염원한다. 예를 들어 집단 섹스를 해도 서로 용인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죄의식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운 거지. 그래서 결국 그 마을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거고. 예를 들어서 기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인데 왜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주고 그랬을까. 그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대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위로를 얻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악마를 키우는 거다.
<이끼>에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 많다. 특히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호감을 끌어내기 보단 지나친 자기 아집과 오기로 뭉친 인간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증발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반에 보면 류해국 보고 ‘얘 뭐냐, 진상이냐, 이 새끼 뭐냐. 진상이다. 짜증난다’ 이렇게 욕하는 댓글도 많다. (웃음) 나도 공감한다. <야후>할 때도 선배들이 그랬다. “야, 걔가 주인공 맞아? 걔 너무 찌질해!” (웃음) 내가 그런 모호한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인물의 정서에 동의를 해주고 싶다가도 그런 인물이 막 싫어지기도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에 옮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끼>의 이장은 단순히 악인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실적인 윤리 안에서 분명 악으로 규정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물만의 명확한 합리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부조리 자체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내가 작은 세계에서도 상처받고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보니까 자신을 합리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 방어기제가 잘 발달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류해국 아버지를 보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고, 이장은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 둘의 충돌을 그리고 싶어졌다. 자살에 있어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스스로 숨을 멎게 해서 죽지 않나. 인간으로서 정말 할 수 없는, 자율신경까지 점해버린 사람이다. 결국 그 극단적인 죽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박탈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장이 그 마을의 절대적 메시아라면 마을 사람은 그에게 고해를 받고 구원을 얻은 존재다.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쫓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마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하는 침입자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순환하던 마을의 생리를 훼손하는 바이러스이거나 박테리아 같은 존재로 마을사람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믿음 자체를 통해 평온한 연대적 삶을 이루던 집단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한편으로 <이끼>가 종교적 믿음의 형태에 대한 도발을 던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아, 정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사실 내가 어릴 때 나름대로 교회를 진지하게 다녔다. 그래서 <이끼>의 기도원 신을 그리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렸던 거 같다. 특히 맨 마지막 회 작업할 때, 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예전에 같이 교회 다녔던 선배 형이 군화에 교련복 상의, 군복바지를 입고 기도원 샤워실로 나를 끌고 가더니 나를 두들겨 패더라. 그래서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잠을 확 깨버린 거죠. 덕분에 안 그래도 <이끼>마지막화 분량이 많았는데 잠까지 설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도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교적인 죄의식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그게 도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하나님, 예수님, 이런 용어는 절대 쓰지 않고 절대자, 신, 이런 단어만 썼던 것도 다 그걸 피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어떤 특정종교에 국한돼서 해석되는 건 위험했을 거다.
그런 식으로 한정되게 이해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절대자에 대해 탐닉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던 거지.
믿음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숭고하지만 그 행위적 목적은 때로 불순하고 도피적이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살인범을 면회 갔을 때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도연 씨가 대사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널 용서하냐.” 개인적인 신앙은 때때로 공공적인 윤리를 무력화시킨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한다. 결국 이장에 대한 신앙적 믿음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은 현실적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마을이라는 도피처에서 살아간다. 결국 류해국은 그런 도피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다시 출렁이게 만드는 존재다.
헤집어버린 거지. 다시 원래대로 세팅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곤란해지고.
어떻게 보면 류해국은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인간들의 나약한 양심을 뒤집어 끌어냄으로써 그 실체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되레 자신의 부조리한 정서마저 극복하게 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각각 5년 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 정권을 빼앗긴 세력들이 항시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사람들은 지금 야당인데 전혀 야당같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오히려 정권을 잡은 쪽이 계속 힘들어하고, 이제 다시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언제 우리가 뺏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잡아왔던 사람들처럼 쉽게 안착하고. 이 사람들은 어쩌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와서 자기네 룰을 헤집어 놓는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처가 쪽 집안이 좀 잘 산다. 그런데 처가 쪽 친척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촛불집회하고 그럴 시기였다. 처가 쪽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작은 아버님 한 분께서 그때 노무현 전대통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새끼가 어디 대통령이나 했다고 저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숙모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왜들 저래. 지금 대통령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응원은 못할망정 촛불집회나 하고 있어.” 그 양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 당선됐을 때부터 욕을 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응원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나에게 한나라당 입당 원서까지 주셨던 분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은 병균 보듯이 하고, 마치 급이 다른 녀석이 어디 와서 까불고 있냐는 식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던지고. 그 때가 <이끼>를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쓸 때, 조직과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 깊게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힘으로 구축한 정의라고 할까.
정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들끼리의 룰이지. 그곳에 류해국이 들어가서 하나씩 툭툭 건들기 시작하니까 얘네들은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쁘고, 점차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와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에 걸친 많은 해석들이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그런 건 그 분들 마음이지.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런 외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나는 무아의 경지에서 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담고자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나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은 내 작품이 보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정치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댓글을 다는 건 그 사람들 마음이고 자유로운 권리다. 내 만화에서 그런 코드를 읽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걸 내 만화를 통해서 본 것뿐이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대단하다 싶은 해석들이 댓글로 달리는 건 어쩌면 내 작품에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겠지. 나는 <이끼>나 <야후>가 우화 같은 풍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내러티브보단 인물에 관심이 많다. 어떤 반전을 넣어서 깜짝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기승전결의 감동보다는 이 인물을 따라가다가 혹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사건을 배치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야심 차게 머리를 돌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류해국이 부정하려 하는 맞은 편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류해국의 아버지나 이장이나,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메시아적 능력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류해국의 아버지는 이장에게 눌리고 이장은 류해국의 손에 처단된다. 권력적 관계가 결과적으론 인간에게 얼마나 허망한 게임인지를 인식시키려는 대목아닌가. 권능에 가까운 위력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던 인간일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게 힘을 발휘해왔는지를 드러낼 때 그 내면에 놓인 인간의 존재 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별자리 배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나에겐 훌륭한 변명거리지. 나는 박탈감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의미부여하지 말라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죽을 사람들이고.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이 있고, 기왕에 사는 거라면 삶의 색채를 더 밝게 가져가는 게 맞겠지. 자기가 자기를 긁어가면서 사는 거보단 조금 무책임해 보일 정도로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겠더라. 처음에 류해국을 처단시키자고 결정했지만 나중에 류해국을 처단하지 않고 포지티브한 영역으로 끌어올리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발전적 고민의 결과였던 거다.
그런데 그 별자리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순정만화가 이황주 씨와 친했는데 그 분이 우연찮게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래서 김준범 씨와 같이 공부했지.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
별자리를 공부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점지하는 것을 배우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진 않았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시작한 거라서 남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많더라.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한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생일이 언제냐고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 쉽게 단정하려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실례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고 제 머릿속으로만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은 잘 모르잖아. 정보가 부딪히는 거지. 어떤 면에서 이건 폭력이다. 그래서 난 그런 게 싫다. 그 사람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그런 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됐나?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명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렇구나,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많고, 탐욕스런 과거가 떠오르거나 낭비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들과 오해를 일으키고 그런 오해를 쌓아둔 부분들에 대해서도 왜 그런 문제에 좀 더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쉽게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스스로 대인 관계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얼마나 닫힌 성격이었냐 하면,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긴 다음에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도 그만 두고 나왔는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화실에서 선생님들이 화투를 치면서 새벽마다 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한번 화투판을 엎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조운학 선생님한테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집단으로 난리가 났지.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거다. 난 왜 그럴 때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이끼>의 류해국이나 <야후>의 김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캐릭터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 반영된 측면이라 봐도 될 거 같다.
그럴 거다. 자기 반성적인 면은 그래서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죽였거나 죽이려 했던 셈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캐릭터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음, 그렇다기 보단 나를 캐릭터에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나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반영된 이 캐릭터들도 이 사회에선 안 되겠구나, 라는 식으로 접근된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구나 싶었던 거지. 그러니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소멸이 돼야 맞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한쪽으로 굉장히 오만한 구석이 있다. 내 속에 오만한 탑이 하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는 폐허 같은 정서가 채워진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나에게 남을 굉장히 잘 깔보는 태도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되다 보니까 어차피 얘네들도 이 사회에 적응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회와 융화할 수 있는 타협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끼>는 결과적으로 <야후>에 비해 그런 정서를 덜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만큼 스스로도 변한 게 아닐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사소하게 차끼리 시비가 붙었던 걸 보게 됐다. 서로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싸우면서 “야, 쳐봐, 쳐봐!” 이러면서 길 한가운데서 뒤엉키더라. 그 길 옆에 많은 차가 있는데도. 나는 남의 눈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하거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공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사는 구나 싶었다. 그게 내 눈엔 천박해 보이지 않는 거다. 나는 쪽팔려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 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깡이 놀랍더라. 아이 낳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소한 거라도 싸워서 쟁취하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나는 결코 그렇게 안 되더라.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종의 박탈감을 느낀다. 형태를 떠나 그 너비나 크기로서 중요한 존재감을 행사하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 인물들은 결핍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세상에 대한 분노나 다른 세계에 대한 공격성으로서 충만하려는 것만 같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만약 내가 박탈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만큼의 실패나 상실을 맛보게 되면 그 반대영역에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생길 거다. 특히 내가 그런 게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런 게 강하게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이끼>의 류해국도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설정하려 했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바꾸게 된 거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변해간다. 엄한 데서 보상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안에서 싸워야 한다. 상실감이 있으면 싸워서 얻어내든가,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든가. 지금 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지녔다 해도 다음 투표 때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다면 이건 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상실감을 엄한 데서 채우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거지. ‘세상 이렇게 됐으니 나도 모르겠다. 투표고 뭐고 그냥 여행이나 다니자.’ 이러지 말자는 거다. 자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석에서 그걸 다시 챙기고 뚜렷하게 싸워야 한다.
류해국을 죽일까 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결국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주변의 요구가 어쩌면 시대적 요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류해국은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덕분에 박 검사도 힘들어졌고. (웃음)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모른 체할수록 자신의 안위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들춰보고 캐내고 찌르다 보니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어려운 건 그런 피곤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불편한 정의보다도 편한 불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그런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뤄진 게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런 가치에 대한 보상심리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만화에서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위로 받아야 할 곳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 국가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니 각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만화가로서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 ‘아고라’를 보면 종종 ‘벌써 죽었냐? 촛불집회 그거 그냥 유행이었냐?’ 이러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원하는 정권으로 교체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다 대변해주는 건 아닐 거다. 그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궁극적으로 현 정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항시 환기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서로 위로해줘야 한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해서 대기업의 비리가 정의롭게 파헤쳐진 적 있었나? 결국은 그 너머에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단지 이명박 대통령 욕하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닌 거다. 단지 표면적으로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노골적인 문제가 발견되니까 그렇게 거대한 시위적 형태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거대 기업, 자본, 흔히 말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과의 싸움은 대를 이어서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구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게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줬다 믿으니까.
<이끼>는 제도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고,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합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후>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다. 어쨌든 <야후>나 <이끼>처럼 정치적 해석이 동원될만한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작품으로 인지도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나?
그런 부담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론 창작자지, 사회 운동가는 아니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안에는 사회관찰자 입장으로서의 피가 많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이 나를 점유해버릴 수는 없지. 그걸 경계하기도 하고. <이끼>도 특별히 정치적으로 풀어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마 그런 목적을 노리고 시작한 작품은 <야후>가 유일했다. 다만 우연찮게 <이끼>를 독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엮다 보니까 나도 문득 ‘이렇게도 풀이가 가능하구나’라는 지점이 생겼다. 나는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야후>에서 나오는 수경대의 비행용 바이크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특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명백히 허구지만 막강한 공권력의 도구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구가한다. 요즘 세태에 너무 잘 어울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의 세태에 대한 기시감을 뒤늦게 느낀다. 비행용 바이크라는 날아다니는 기체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애초에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오토바이 기동대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지엽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날아다니는 걸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워의 특성이 강한 서울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지상은 어렵겠다 싶더라. 어쨌거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고, 그만큼 기동력을 확보할만한 수단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헬기도 생각했는데 사실 헬기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비행체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던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쯤 있으면 어때?’란 생각도 하게 됐지.
사실 <야후>에서 수경대만 빼면 리얼한 시대극 만화가 된다. 그리고 그 수경대의 비행기체는 <야후>에서 만화적 상상력으로서 발휘된 가장 특별한 이미지다.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한번은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 교수를 하는 선배가 너무 안타까워하는 거다. 선배가 수업 중에 계속 이야기했단다. “너희 <야후>라는 만화 꼭 봐라. 우리 시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마 <야후> 6~7권 즈음에서 수경대 비행바이크가 나오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야, 이거 뭐니? 정말!’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는 거야. 오토바이로 해도 됐잖아. 왜 이걸 넣는 거니?” 이렇게 너무 안타까워하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그걸 진짜 넣고 싶었거든. 그때만 해도 주인공이 서울 시내를 날아다니면서 벌이는 총격전을 보여주는 내용을 생각했으니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와서 ‘아싸!’싶었던 게 있다. <야후>최종 권에서 50미터 탄이라고 50미터 넘으면 뻥하고 터지는 총알이 나오는데 그 총알이 최근에 개발됐다 하더라. (웃음) 거리를 정해서 쏘면 엄폐물 너머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서 화약이 터져서 사상을 입히는 거다. 그 뉴스를 보면서 ‘아, 내 머리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어.’ 싶었지. (웃음)
<야후>도 그렇지만 <이끼>에서도 분량이 늘어날수록 그림체의 변화가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하는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슬램덩크>조차도 첫 단행본과 마지막 단행본의 그림체가 판이했으니까. (웃음) 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어쨌든 작가로서는 뒤늦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일 거다. 사실 <이끼>의 댓글에서 종종 ‘작화붕괴’라는 말이 보이더라. 심지어 후기에 직접 그걸 거론하기도 했고. (웃음)
거기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한다. (웃음) 사실 80회씩이나 되는 장편을 하다 보니 사람이 그 정도 그리다 보면 뭐가 늘어도 늘거든. 보다 능수능란해지면서 더 잘 그리게 되는 거지. 특히 나는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잘 그리지 못한다. 학창시절에 보면 만화를 잘 베껴서 그리는 애들 있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걸 잘 못해서 남의 그림을 베껴본 적은 별로 없다. 거의 내가 만들어서 그림을 그려봤지.
모사가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 애들은 로보트 태권V, 마징가도 잘 그리는데 내가 그리면 뭔가 비율도 맞지 않아 보인다. 태권V라고 할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결과는 태권V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렇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다 보니까 류해국 같은 주인공은 제발 같은 그림으로 나오기 쉽게 개성을 분명히 담아보려 했다. 그 삐쭉하게 만든 코 같은 거. (웃음) 그런데 박 검사는 개성이 모호하다 보니까 매회마다 자꾸 얼굴이 바뀐다. 사실 이현세 선생님처럼 개성을 강하게 주면 작화붕괴가 일어날 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쓰는 그림체가 그런 경향을 더 심하게 가중시키는 탓도 있다.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모니터 하나에 실제 그림 사이즈보다 200%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얼굴을 그릴 때도 눈썹 하나만 모니터에 꽉 채우고 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를 그리고 있는 건지 모니터만 봐서 잘 모를 때가 생긴다. 선 하나 그리고, 축소해서 다시 보고, 다시 키워서 또 그리고. 물론 이게 변명은 안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니까. (웃음)
인물들의 신체비율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웃음) 그런데 그런 불균형한 느낌이 후에 오묘한 특징으로 인식된다는 기분도 들더라. 뭔가 상당히 기괴하다고 할까.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런 어설픈 방식도 몇 회를 가면서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이 맞춰주더라. (웃음)
<이끼>엔 스크린적인 이미지가 많이 동원된다. 롱테이크가 연상되는 컷도 이어지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핸드헬드적인 이미지가 연출되는 느낌도 들더라. 컷 자체에 기능적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하지만 특별한 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일반적인 출판 만화는 정보가 양 페이지로 한꺼번에 확 들어온다. 예측이 가능하지. 그런데 웹툰은 작가가 하기에 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한 장면만 눈에 띌 수 있게 구성이 가능하고 계속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봐야 하니까 잔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잔상을 이용하기 위해 반복컷도 많이 쓴다. 매번 다른 컷들로 이어지면 잔상이 남을 여지가 없어지니까 비슷한 표정의 컷이 반복돼야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예상치 못한 컷이 떡 하고 올라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크롤 만화의 장점이 그런 거다. 독자들의 점유력이 세진다고 해야 하나. 말한 대로 한 컷 한 컷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출판 만화엔 배경이 없는 컷도 무지하게 많으니까 주인공 얼굴로만 때워도 되는 컷도 있지만 웹툰에선 매 컷마다 컷 자체의 밀도를 유지시켜줘야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배경도 계속 깔아줘야만 된다. 그런 전제로 가다 보니까 작업 자체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리듬이다. 재미도 리듬에서 생기니까. 처음엔 그 스크롤만의 리듬을 못 잡아서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게 정말 재미있나?’ (웃음) 의심도 들었다. 반복해서 볼수록 나는 익숙해져 버리니까 제3자들의 반응을 모르겠더라. 다행히 10회 정도 지나고 보니까 어느 정도 조절이 됐다.
방금 했던 말처럼 강도하 작가와 같은 기존의 만화가들은 테두리의 구획에 정확히 색의 경계가 나눠진다는 느낌인 반면 <이끼>의 색감은 회화처럼 번지는 느낌을 준다.
포토샵 툴 중에 직선을 그리는 툴이 있다. 사실 이걸로 대부분 라인을 따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문하생들한테 작업을 시킬 때도 그걸 못 쓰게 한다. 다 손으로 따서 그리게 만든다. 비뚤어져도 상관없다고, 흔들려도 상관없으니까 손으로 그리라고 한다. 유리라면 모를까, 실제 건물벽을 흙으로 미장센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직선은 아니거든.
매체의 변화에 따라 그림체에서도 변화가 생기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엔 인물을 그리는데 그 툴의 사이즈를 너무 두껍게 했다가 가늘게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작화붕괴니, 그림체가 다르니,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게 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던 거지. 후반부로 갈수록 체계가 잡히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도 사라졌다. 사실 스크롤 만화가 영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매 컷마다 그림 사이즈를 다르게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최대한 컷은 유지한다. 그렇게 와이드 컷을 유지하다 특정장면에서만 변형을 시켜줘도 그게 별로 충격을 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덕천이가 할머니 귀신을 보는 신에서도 비슷한 사이즈가 유지되다가 마지막 컷이 길어지니까 독자가 봤을 때 공간감이 확 넓어진다고 느껴져서 순간 놀랐을 거다. 갑자기 정보량이 많아진 거니까. 이장이 주인공 아버지 목을 잡고 훈계하는 신에서는 거의 이장 얼굴만 쭉 나온다. 독자가 마치 이장에게 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장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독자한테 이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에서 “이번엔 날로 먹었네?”하기도 하고. (웃음) 이현세 선생님이 그리는 까치는 어떻게 그려도 까치다.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 쪽 작가들은 그림이 조금만 변형돼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나도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린다는 게 부담이 크다. 특히 나같이 동일한 얼굴을 잘 못 그리는 작가는 카메라 각도만 바뀌어도 새로운 얼굴형이 막 나오거든. 그니까 그 클로즈업을 하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부담인데 그걸 날로 먹었다고 하니까 황당하긴 했다. (웃음) 하여튼 스크롤 만화는 그런 장점이 있다. 두 페이지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절대 못 가거든. 갈 수가 없다. 왜냐면 많은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와버리니까.
웹툰을 하면서 그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방식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결말부로 갈수록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다 보면 속도감이 부여되는 신이 있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아웃 포커싱되는 느낌의 컷이 많았다. 동시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릴수록 프레임의 속도감이 연출되는 기분이 들더라. 기존의 웹툰과도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웹툰 작가들이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토샵 툴을 쓴다. 솔직히 내가 그런 기능을 전에는 몰랐던 거지. (웃음) 하다 보니까 포토샵 기술이 늘어서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해서 알게 된 것들을 쓴 거였다. 아마 초반부부터 그 기능을 알았다면 초반부부터 적극적으로 썼을 거다. 다만 초반부는 좀 정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었으니까. 물론 후반부도 정적이지만 영화로 치자면 풍경 자체는 정적인데 왠지 드럼 소리가 사운드로 깔리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리고 만화에는 사운드가 없으니까 이미지로 그런 느낌을 좀 주려고 했던 건 있었다. 굳이 내가 실험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끼> 단행본도 발간되고 있는데 애초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의 <이끼>와 같은 형태는 불가능했을 거다.
머릿속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서 책으로 나올 거니까 책도 고려해야 돼. 이렇게 작업은 못 하겠더라. 왜냐면 웹툰에 적응하고 웹툰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버겁고 힘드니까 출판까지 고려해서 작업한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이렇게 보여줘야지, 이런 건 전혀 없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하다 보면 문하생 때 배워왔던 관성대로 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법도 쉽게 가고. 그러니까 만약 웹툰에서 실험적이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점점 늘어간다는 거?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발견을 느끼면서 ‘이런 것도 넣어봐야지. 이것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컬러링 작업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작업도 천차만별일 텐데 웹툰에 컬러가 들어간다는 것도 과거와 작업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발생한 시도적 차이도 있었을 테고.
진짜 힘들지. 출판 만화할 때는 먹만 필요했다. 흑백만화다 보니까 제일 센 표현이라면 먹칠이었다. 그런데 컬러 만화이다 보니까 어디에 포인트를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 자기 색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색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까 작정한 게 차라리 전체적으로 톤을 다운시켜버리자는 거였다. 아예 무채색 계열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리고 대신 빛으로 음영을 묘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통일감도 주고, 음영이 생기면 좀 더 인상이 강렬해지는 게 있잖아. 색을 쓴다는 기분 말고 빛을 묘사한다는 기분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색을 쓰는 건 기본적으로 작업시간도 더 걸릴뿐더러 색에 대한 계획도 갖고 가야 하니까 힘들거든.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신이 생각나는데 류해국 아버지가 기도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는 복도 신에서 시체들을 음영으로 표현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차라리 구체적인 실물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어서 실루엣만 감지시켰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 자체가 보다 증폭되는 것 같더라.
아무리 어둡게 해도 노트북 모니터로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 그래서 최대한 노트북에서조차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게끔 하려고 그렇게 어둡게 해놨는데 누가 그 조잡하게 펜터치 돼있는 걸 포토샵으로 완전 밝게 만들어서 댓글에 올려놨더라. (웃음) 그때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미안한 게 또 그 밑에 사람들이 댓글로 욕을 써놨더라. 알아는 볼 수 있게 해놔야 될 거 아냐, 하면서 욕을 써놓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여튼 그렇게 어둡게 된 장면도 웹툰에선 적극적으로 쓸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해놓으면 인쇄가 떡이 져버린다. 스크릴 톤을 여러 번 붙여놓게 되면 미세한 알갱이들이 인쇄하면서 다 뭉개져 버려서 효과가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컬러만화라서 채도 만으로도 색을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이끼>는 항상 도입부에 어떤 중요한 풍경을 프롤로그처럼 전시한 뒤, 타이틀 컷을 배치하고 본격적인 작품을 밀고 나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키를 쥐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먼저 전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적인 컷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경묘사에 공을 들이고 빛과 음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혹시 만화보단 회화적인 부분에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는지 궁금하더라.
컬러만화를 하게 되니까 회화를 많이 보게 됐다. 최근의 모던회화 말고 클래식한 거 있지 않나. 네덜란드 풍경화 같은 걸 많이 봤지.
사실주의적인 고전회화 말인가?
그렇다. 풍경을 많이 담았던 고전주의 회화 같은 거. 특히 <이끼>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 묘사되는 장면 같은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참고한 거다. 회화만 쫙 올려놓는 블로거들 있잖아. 달빛이 정말 대낮처럼 환한 밤을 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계속 살펴보게 됐다. 그러면 구름은 이렇게 묘사하고, 이건 이렇게 묘사하고, 이런 걸 계속 분석해보고 내 작품에 적용해보기도 하는 거지. 강도하 같은 경우, 나무 숲을 그릴 때 윤곽을 잡아서 색을 넣지만 나는 나뭇잎을 다 그린다. 터치가 많이 들어간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사실 강도하처럼 그리는 게 애니메이션적인 기법인데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를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수채화 전공의 입시미술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색에 대한 직관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경험적 기반이 있어서인지 회화작품들을 참고한 게 도움이 됐다.
원래 미대를 진학하려고 했다던데.
실패했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웃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품은 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이미 만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만화 전공 대학이 없으니까 당연히 미대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자기가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설정은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미술을 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만화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대를 선택했던 건가?
비슷하다. 만화는 너무 좋았지만 만화가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고, 만약 직업이라도 하나 갖는다면 화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했던 거지. (웃음) 그렇게 ‘미대 갈까?’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졌고, 우리 집 경제상황이 나를 재수시켜서 대학에 보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가 돼야겠다’가 된 거지. 학교 다닐 때도 진로 상담을 받지 않나. 난 항상 ‘그걸 왜 하지?’라고 생각했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진로가 없나?’ 생각했지. (웃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왜 고민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몰라도 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화학을 좋아한다는 애가 경영학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웃음)
결국 미대 진학이 좌초되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고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항시 어려웠지. (웃음)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명확한 진로가 잡힌 게 아니었을까.
만화 그리러 서울로 올라온 것부터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루트를 모르니까 만화학원을 가게 된 거지. 그런데 그 만화학원 원장님이 만화가 협회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싸운 적이 있어서 전화번호조차 가르쳐주지 않더라. (웃음) 결국 나 혼자 앞길을 찾아야 했던 거지. (웃음) 한때 아파트 벤치에서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벤치 생활하던 멤버 형이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들을 만나게 돼서 연락처를 받아와서 나한테 가르쳐주더라. 결국 허영만 선생님이 계시는 은마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알게 됐고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노숙도 했던 경험이 <야후>에서 김현에게 반영됐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상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아까 말한 아버지에 관한 심상도 그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목하는 부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 특별한 감상을 얻는 게 아닐까 싶더라. <야후>의 단행본 표지에 그려진 건 항상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이끼>의 단행본 표지 역시 얼굴이더라.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면적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사람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모티브나 소스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찰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에겐 상실이나 결핍의 정서가 굉장히 많다. 어릴 때 미술대회에서 받아온 상장을 벽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놨었다. 그런데 남의 집에 가보고 나서 상장은 액자에다 걸어놓는구나, 처음 알았지. (웃음) 어쨌든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는데 우리 집을 사러 온 사람이 벽 안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본다면서 그 벽지를 다 찢더라. 그래서 상장이 남아있는 게 한 장도 없다. 내 상장이 찢어지는 걸 내 눈을 목격하기도 했고.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데, 상도 많이 받는데, 왜 내겐 항상 그 다음이 없지?’ 싶더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그 다음이 없는 거다. 상실감 같은 거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 칠판의 절반을 내주셔서 분필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숙제 검사조차도 그림 연습으로 대체해줄 정도로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집에서는 왜 인정을 못 받을까, 이런 생각들.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도 아버지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 그 까짓 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놓고 본인이 다 망한 뒤에 자신 없을 땐 “너 대회 나가서 상 받았냐?”고 얄밉게 물어보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이 안타까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짠하고,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란 생각을 자주 품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보니까 별자리 공부도 하게 된 거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
그래서 결국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나?
그냥 난 또 다른 걸 무언가를 위해서 결핍이 돼있구나, 라는 거. 다른 뭔가를 강화시키려다 보니까 이런 결핍이 된 거구나, 라고 인정하게 됐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각자 다른 미션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까. 그 미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옵션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강화된 옵션이 있는 반면, 결핍된 옵션이 있는 셈이지. 마치 야구팀 운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구단주 게임을 예로 들면, 자금이 한정돼 있지 않나. 선동렬 한 명 산다면 나머지 선수는 리틀 야구단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 퀄리티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주력 선수 몇 명을 올리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누구나 똑같이 100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90이 한 면에 몰려있는 거다. 어떤 회장이라는 사람은 전생에 조상이 나라를 구해서 그게 돈 버는 쪽으로 갔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그게 아닌 거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많이 강화된 사람이더라. 그런데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런 결핍에 대한 포지티브(positive)한 보상이 항상 있다는 거다. 물론 네거티브(negative)한 보상도 있고. 네거티브는 사람을 파멸로 몰 수도 있지만 포지티브는 그 결핍으로 되레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고 할까. 8년간 별자리 공부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도 넓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는 선이 뚜렷해졌지. 얼토당토않은 걸 탐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잃거나 기회를 빼앗기지 말고 확실히 하자. 사실 이 회사에도 그런 각성이 없었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나니까 내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뿐이지, 남이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자화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혹시 요즘 주시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있나?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빤하게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에 ‘수유 너머’라는 곳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면 8년 동안 배운 별자리를 다 소진한 상태라 이걸 다시 끌어와서 국물을 우려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스로 처참해질 때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생활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러나와야 진짜 좋은 내용이 나오는 건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남의 책을 뒤적이고 남의 영화를 살펴보고, 그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수면 위로 뭔가 떠올리기 전에 그 수면 아래에서의 활동이 좀 바쁘게 필요하겠더라.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강의도 많더라. 문화강의도 많고. 그렇게 뭔가 배워보려 한다.
강단에도 서고 있다고도 들었는데.
세종대학교에서 하고 있다.
강단에 서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전한다는 건 어떤가?
강단에 서는 친구들은 막상 자기가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얻어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학비가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그 학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수업 준비를 해보니까 6~7시간 걸리는데 마감해가면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얻어오긴 뭘 얻어와. (웃음) 그 애들이 수업 끝났을 때 ‘아, 오늘 뭐 좀 들었네.’ 이런 느낌이 들 정도가 돼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진중권 씨가 쓴 ‘미디어 아트’란 책을 읽으면서 ‘아트 앤 스터디’라는 문화교양 웹사이트에 매달 돈 십만 원씩 내고 유료강의도 들었다. 내가 애들한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웹툰을 고민하지 말고 디지털 만화를 고민해라.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창작자라고 생각해라. 만화도 창작의 한 범위니까. 우리 시대에 너무 흔해져서 가치 없는 말이 많다. 정의, 도덕, 교양. 특히 교양이란 말은 원래 의미에 비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쓰이지.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교양이다. 창작자는 교양인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계속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발표하게 만들어서 그 애들을 발가벗기려 한다.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단편만화를 가르치는데 단편 만화 기획서를 써오라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한 명씩 발표시킨다. 이걸 왜 기획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설득해보라 한다. 핵심적인 건 이거다. 말로 하지 못한 관념은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글로 써보고 말로 표현해놔야 된다. 그리고 말 못하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 없다. 글을 잘 쓰려면 말도 잘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앞뒤 분명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말은 어눌해도 상관없다. 대신 앞뒤를 맞춰라. 그래서 여기 앉아있는 네 동료들이 네 작품을 사가야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입장에서 네 생각을 최대한 매력 있게 설명해라. 그렇게 먼저 기획서로 전부 다 심사한다. 그 다음에 콘티를 짜오게 한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가 콘티에서 어떤 리듬으로 표현됐는지 프로젝션으로 쏴서 이 장면은 어떻게 그릴 거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했다는 걸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걸 그리기 위해 어떤 사진자료를 취재했는지 그 과정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그 과정에 걸맞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점수를 주는 거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배운 성취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만화가로서의 기능력보다 생활력을 학습하는 교육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 출판사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연재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면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인의 어떤 능력을 알고 같이 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할까라는 거다. 최소한 자신의 매력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한 분야를 이끄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던지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지. 뽑아낸 작품도 별로 없는데 중견이 돼버렸으니까. (웃음)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갔을 때 허영만 선생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허영만 선생님은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이미 한 100타이틀 가까이 그린 작가였으니까. 나는 아직 20타이틀도 꼽지 못한다. 만화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모를까.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책임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에피소드 형태의 단막극으로 진행되는 웹툰이 서사적 호흡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사적 연재로 이뤄진 웹툰을 주목 받게 만든 시초는 강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서사적 형태의 웹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독자의 주목을 얻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끼>도 그런 흐름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면 출판 작가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서사가 없는 작품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서사적 형태가 작품의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개그물을 한다 해도 서사가 있는 개그물을 하고 싶지. <아색기가>같은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 있질 않다. 사실 흥미도 별로 없고. 물론 (양)영순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내가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사실 웹툰으로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은 했다. 원래 웹툰은 유머 사이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만화적인 패러디물을 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그런데 기성작가로서 그런 후배들이 만들어놓은 웹툰이란 판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들어온다는 게 실제로 굉장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도 됐고.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나도 후배들이 했던 것처럼 간결하게 치고 나가는 형식을 따라 한다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강풀이나 강도하가 몇 년에 걸쳐서 서사적 만화 폼을 웹툰에 안착시켰고 나는 다행히 서사라는 게 웹툰에서 인정받는 시기에 여기 들어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서사적 폼으로 웹툰에 들어오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그 역할을 똑바로 맡고 싶었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 작가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 대표적인 웹툰 작가다. 반대로 당신은 기성 매체 작가로서 매체의 변화에 편입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매체에서 적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굉장히 부끄러웠지. 그리고 못하면 어쩌나 싶었고. 예를 들어서 가령 댓글 개수조차도 액면으로 쫙 나오지 않나. 이게 개그작가보다 못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웃음) 물론 작품의 경종을 극화냐, 개그냐, 로 나눌 수 없지만 좀 더 둔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함의도 못 잡아내면 처참할 것 같았다. 특히 경력이 20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기존의 웹툰 작가들만큼의 흥미도 못 끌어내고, 싸구려처럼 말하자면 낚시 정도도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닌가 싶더라.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웹툰에서 작업하던 후배들보단 많은 돈을 받으니까 그만큼 돈 값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서 연재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이끼>를 끝내고 나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갔지. 이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강풀 보면 신기해죽겠다. 어떻게 연달아서 저렇게 뻥뻥 터뜨릴까. (웃음) 나는 한 3년 헤매다가 이제 이야기 하나 나왔는데, 신기하지.
결과적으로 <이끼>는 웹툰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도 사실 거의 안 만난다. 강도하, 이충호 씨, 아니면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 이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에는 댓글만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댓글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가 생기더라. 누가 댓글로 이슈 하나 던져놓으면 그 의견에 시비 걸기 위해서 내 만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 거다. 그럼 결국 만화하곤 정말 상관없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 판단이 드니까 댓글이 수백 개, 천 개 달려도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다는 건가 싶어지는 거다. (웃음) 그리고 조회수로 고료를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다음은 네이버에 비해 조회수가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냥 ‘난 아직 멀었네?’라는 생각만 들고. (웃음) 그래서 또렷하게 내가 뭘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사실 웹툰하면서 영화 계약한 후배들이 많다. 다만 강풀 말고는 이슈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나는 이슈 메이커라고 할만한 강우석 감독님이 연출을 맡으면서 그 덕을 꽤 본거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과연 <이끼>가 반응이 있나 싶더라. 길 다니면서 누구한테 사인을 해줄 일도 없었고, 동네 아파트에서 동대표 나와라, 이러면 나가고. (웃음) 네이버 ‘한국인’에 실리고 이랬을 때 요즘 내가 조금 이슈가 되나 보다, 이 정도지.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런데 (강)풀이는 만나보면 확실히 그런 태도가 있다. 지금 웹툰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그만큼 자기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기준점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그걸 각성하고 산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 그냥 풀이가 “형, 이렇게 해보죠.” 그러면 “그래.”하고, 내가 풀이 등을 타고 간다는 생각이지. 아직은 내 위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어차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지우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님께서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 말고 의미부여를 해주시니까 너무 송구스럽고 감사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아서 허투루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영만 작가님도 다음에서 <꼴>을 연재했다. 현재 출판만화의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그 대안으로 웹툰이 부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존 출판만화에서 중시했던 만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밟히기도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기본적인 기능적 자질이 부족한 작품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런 과정에서 종종 기성 작가들과 웹툰 작가들 사이의 신경전도 없지 않은 거 같다. 매체의 변화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분명 고민이 있지. 나는 만화가들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출판만화의 어법을 왜 고정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든다. 나도 거기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만화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웹툰이 가진 좋은 장점이 많다. 출판만화가 포기했던 장르의 다양성이라던가, 그 동안 출판만화가 도외시했던 독자층의 흡수, 이런 것들은 웹툰이 가진 큰 장점이라고 본다. 대신 출판만화는 신인작가가 등용해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그 신인작가도 출판만화의 관습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자기의 개성을 보이기 보단 편집장 한 사람의 안목을 통과해야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출판만화니까. 그런 점에 비해서 웹툰은 순기능이 많다. 기본적으로 웹툰이 아닌 디지털 만화를 염두에 둔다면 모바일이나 이북(e-book)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시 어마어마한 환경변화가 이뤄질 거다. 이랬을 때 언제까지 출판만화의 폼에 대해 고정적 확신을 주장해야 하겠나. 물론 그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그쪽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웹툰이 출판만화에 대한 관심도를 흡수해버린다는 이유로 공격 아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저하시켜버렸다나. 그런데 본격적으로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들이 먹고 살만큼의 고료를 받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안팎이다. 그런데 출판만화는 3~40년이나 된 분야다. 자기들이 자신들의 어법을 고민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밀리게 됐는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파이가 좀 넓어진 상황에서 그 넓어진 파이에 대해 돌 던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자멸하자는 뜻이지. 스스로 내적인 고민을 하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변해야 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출판만화를 책으로만 파는 게 한계가 있다면 이게 디지털 컨텐츠로 전환됐을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으면서 여전히 일본만화만 수입해오고, 그러면서 수입구조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의 마인드에 너무 많은 한계를 지어준다. 출판만화의 형식이 정확한 폼인 것처럼 강요한다던가. 그런 게 나는 못마땅하다.
안에서 느끼는 갈등이 생각보다 깊나 보다.
기성매체가 웹툰을 공격하는 논리는 딱 그거다. 결국 웹툰은 수입구조가 없으니까 허상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 인터넷 IT 비즈니스라는 게 끊임없이 개발되는 중이고 계속적으로 도구가 개발되고 모델이 나오면서 또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웹툰 시장만 보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정작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포털의 웹 구조만 보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IT환경에서 많은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하는데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허수네, 뭐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굉장히 비겁한 행위일뿐더러 나라 전체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도 그건 아닌 거다. 성공을 기원해줘야지. 그렇게 힘을 합쳐서 자기네 컨텐츠도 잘 되게끔 가야지. 웹툰이 망한다고 자기들이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으면서 왜 거기에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앉아있는 사람끼리 뛰어가는 사람 다리 걸지 말고, 같이 뛰든가, 손을 내밀든가 하자는 거다.
류해국처럼 뛰어들어서 뭔가를 헤집어 놓을만한 발언이다. (웃음) 만화가로서의 기능적 창작력을 넘어 산업적인 생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만화 그리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말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야 한다. 자기의 시효가 끝났을 때는 독자 앞에서 사라져도 되지만 나를 대체하는 누구 때문에 내가 밀려나는 상황은 없어야지. 적어도 몰개성적인 작가는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만의 작가적 역량을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자라는 분명한 자기 태도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말한다. “나는 극화 만화가가 꿈이야, 이렇게 단정하지 마라. 말이 다 빚이 된다. 너희가 경험할 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예전에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에 같은 화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화잡지를 보면서 “이건 너무 일본풍이야. 이건 너무 상업적이야.” 그랬는데 그 말들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다 빚이 돼서 돌아온다. 괜히 자기가 말한 상업적인 만화 그려놓고서 우리끼리 만나면 불필요한 죄책감에 빠져있지. “사실 나 요번에 상업적인 거 좀 했어.” 이러면서. 그게 뭔 상관이냐. 우리가 배운 게 상업만화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웃음)
어쨌든 <이끼>의 연재를 끝내고 나서 남는 단상도 많았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나 속이 팽창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사로운 동기나 아이템을 캐치해서 작품을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부풀려진 상태다. 왠지 대부분의 생각이 딱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부담감이라면 부담감이랄 수 있고. 설경구 씨도 <역도산>으로 살 찌운 상태에서 바로 뭘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빨리 본래 상태로 축소시켜서 옛날의 예민했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반짝반짝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 물론 <이끼>는 내게 너무 고마운 작품이다. 다만 빨리 이 사이즈를 줄이는데 집중하려 하고 있다. 호흡조절을 해줘야지.
이제 댓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후련하겠지. (웃음)
댓글에 괜히 욕 써놨다가 다른 팬들에게 융단폭격 맞을까 봐 그런지 메일로도 욕을 하더라. (웃음) 댓글로 하면 몇 줄로 끝날 수 있는 말이 메일로 오니까 더 강렬하게 오는 거지. 그냥 멋도 모르고 클릭해서 열어봤다가, 어이구. (웃음)
지면 연재를 병행했는데 앞으로 또 웹툰에서 연재를 계획하는 바가 있나?
원래는 있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이끼>때문에 그것들이 지금은 시시해져 버렸지. (웃음)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 아이템들에 대해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 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상황이지.
스스로에게도 <이끼>가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나?
포지티브의 확신, 긍정의 힘을 느꼈다. 연재가 끝나고 댓글을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긍정으로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로를 받았다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게 가장 큰 성과였나 보다. 나에게는 그 동안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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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 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씨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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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리얼이다. 리얼을 보장하는 건 실시간이다. 고로 10억의 상금이 걸린 인터넷 생중계 서바이벌 게임은 대세를 아는 기획이다. 문제는 이 서바이벌이 단순히 게임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수준이 아닌, 인생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진짜 리얼 서바이벌이라는 점에 있다.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대인들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듯 거액의 상금을 눈앞에 둔 게임 참가자들의 생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참혹한 세태를 방조한 자들에게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영화는 좀처럼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았고, 그 생존자의 기억을 더듬어 플래쉬백을 전진시키고,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서사의 구조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본질적인 이야기 구조다. 게임의 법칙 안에서 철저한 규칙성이 보장되지 않고, 우연을 필연처럼 눈가림하려는 수작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좀처럼 어리석지 않고서야 그 단점을 알아채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감정들이 연출되곤 하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수준의 비웃음을 유발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시작점을 결말에 전시할 때, 영화 자체의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똘똘 뭉친 이 영화가 내던지는 궁극적 원인이란 건 어지간해서 이해할 수 없는 비약적 현실이다. 물론 현실에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영화적 설득력은 그 어처구니 없음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체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10억>은 좀처럼 설득력이 없는 영화다. 그저 개똥철학을 담은 무책임한 혐오덩어리에 불과하다. 고생한 흔적이 확연한 배우들만 뒤늦게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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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단평 (2) | 2009.07.29 |
<모던보이>개봉이 늦어졌다. 개봉이 늦어질수록 배우는 결과물이 더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
다른 사정에 대해서 난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반 작업이 중요했으니까 결과적으로 큰 힘이 된 거 같다. CG는 시간과 공력이잖아.
간담회 때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는데 울 거 같더라.
진짜로 난 울다 갔다. 우리 배우 셋이서 손 꽉 잡고 영화를 봤는데 셋 다 울었지. 만약 옆에 해일 씨 스타일리스트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태 많이 안 좋았을 거다. 특히 난 화장도 했으니까, 휴지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면서 울었지. 물론 내가 내 연기하는 거 보면서 울고 그런 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진데 그냥 그때 다들 개인적인 감정들이 생각났을 거다. 나도 그 때 당시 내 마음이 너무 생각났는데, 그러니까 진짜 눈물 나더라. 그래서 사실 영화가 끝난 다음에 간담회를 할 감정이 안 돼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안 하면 안 되는 거 알긴 아는데 혼자서 있고 싶었지.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깊은 까닭일 수도 있지만 현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바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장분위기는 일할 때 내 개인적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다. 촬영장이 어수선하다고 내가 해야 될 걸 못하진 않으니까. 내가 못해서 못한다면 모를까, 촬영장분위기가 진지하고 조용하다고 내가 의기소침해지거나 이렇지도 않고. 내가 진지해야 할 무대에 있을 땐 개인적인 문제건, 일 때문이건 상관없다. 물론 촬영장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좋진 않지. 그렇다고 그게 치명적인 방해가 되는 건 아니다. 일 끝나고 촬영이 종료되면 그냥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얼굴 없는 미녀>가 안 그랬던 것 같다. <얼굴 없는 미녀>를 통해서 거친 여러 가지 감정의 여운들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좀 그랬다. 조난실이란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게 아니라 조난실이란 캐릭터를 통해 이 작품을 만나고 이를 통해 겪은 과정에서 얻어진 감정들이 다시 상기됐다. 사실 작품 끝내고 오래 전에 쉬었던 만큼 쉬는 동안은 괜찮았다. 편안했지.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그때 그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 같더라.
영화를 직접 보고 난 느낌은 어떤가?
일단 원작과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건 원작을 보셨으면 아실 테고. 다만 그게 우연히 그리 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정해져서 된 거니까. 난 개인적으로 영화가 전체적으로 맘에 든다. 이게 완벽하게 뛰어나서라기 보단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그냥 맘에 든다. 분야마다 개개인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고. 물론 마음 속으로 고통을 겪어가면서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그런 과정은 대부분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여운들이 남을 것 같은 영화라서, 난 그 지점들이 좋다.
원작을 먼저 본 건가? 아니면,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원작을 봤다.
원작을 먼저 접해서 그 내용을 맘에 들어 했다면 시나리오에 납득하긴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지. 성격이 너무 다르니까. 재기발랄함과 발칙함, 그리고 감히 우리가 범접할 수 없을 만한 그 시대의 어떤 기운, 원작엔 그런 기운이 충만하잖아.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지. 사실 내가 했던 영화 중에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정도 아닌가? <타짜>도 전혀 다르고, 시대가 달랐고 개개인도 다르고 정마담조차 아예 다른 캐릭터였고. 그런 변화를 대중들이 얼마나 많이 공감하느냐의 문제겠지. 하지만 일단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고 이에 배우들도 동의했고, 애초에 우리가 본 시나리오가 원래 그랬으니까. 이미 그렇게 결정된 엔딩에서 시작한 시나리오니까 그 핵심적인 기운은 원작과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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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를 썼습니다. mingun@nate.com by 민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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