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이를 둘러싼 총체적인 매커니즘에 관해 취재해서 긴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뒤늦게 마지막으로 강호순의 얼굴 공개에 탑승한 MBC 보도국 관계자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 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JTBC <뉴스룸>이 성완종 회장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한 것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 방송의 보도윤리란 일반적인 사회적 윤리와 완벽하게 동일한 궤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보원의 엠바고를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일 순 없겠지만 알 권리를 바탕에 둔 보도윤리를 중점에 두고 보도방침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뉴스 관계자의 기류를 판단할 때 참고할만한 사항은 되겠다.
이번 사안이 향후 <뉴스룸>의 행보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으나 <뉴스룸>이, 본질적으로 손석희가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손석희도 잘 알고 결정한 사항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다.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석희는 녹음 파일 공개가 언론으로서의 직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건 손석희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활시위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뉴스룸> 보도국이, 손석희가, 사회적 윤리를 배반했다고 논할 이들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인데 그 국면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손석희의 믿음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석희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내린 판단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으로 그의 자리를 지켜볼 것이다.
1월 30일, 군포여대생 납치살해 용의자로 검거된 강 모씨가 입을 열었다. 경찰은 당일 오전 강 모씨가 경기 서남부 연쇄 실종자 여성 7명을 살해했음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의 본질이 달라졌다. 더욱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사건의 체급이 오른 만큼 언론보도의 비중도 급격히 변했다. 30일을 기점으로 공중파 방송국 3사의 저녁 메인 뉴스는 더 이상 강호순의 실명을 가리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미 27일 첫 번째 현장검증 이후, 일간지에서는 강호순이란 이름 석자가 알게 모르게 활자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강호순의 이름 석자가 고스란히 들려온 건 30일에서였다. 연쇄 살인범의 신원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됐다.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언론과 여론이 함께 술렁였다. 얼굴공개 논란이 얼굴공개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면에 얼굴공개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는 4면이었다. 조선일보가 좀 더 대담했다. 당일 저녁 SBS 8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뒤, KBS 9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이 드러났다. MBC 뉴스데스크가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건 하루가 지난 2월 1일이었다. 역시 하루가 지난 2일엔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타 일간지에서 강호순의 얼굴을 나란히 게재했다. 반면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강호순의 얼굴 대신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신문과 방송
얼굴 사진을 입수한 건 비단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나 방송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미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대한 논의는 각기 내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단지 시점이 문제였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처럼 선정성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손가락질보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대한 주홍글씨가 선명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유력했다. 선봉에 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깃발을 꽂은 것도 그런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난 1월 31일자 지면에서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관한 입장을 게재했다. 중앙일보 유건하 기획전략팀장은, “일일이 제작과정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편집권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내부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SBS와 KBS의 저녁 메인 뉴스가 뒤를 따른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타이밍이었다. “보도국장, 팀장 선에서 간헐적인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단지 추이를 살피던 중이었다. 결국 31일 오전회의에서 갑론을박 논의 끝에 방송이 결정됐다.” KBS 정은천 사회부 팀장의 말이다. SBS의 입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에 따르면, “애초에 편집부 차원의 고민이 있었다. 31일, 보도국 전체 편집 회의 차원에서 논의됐고, 부장 선 토론으로 결정됐다. 조선과 중앙에서 먼저 얼굴을 공개한 마당에 딱히 얼굴이 가려질 의미가 없어졌다는 판단이 우세했다.”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습적인 보도가 방송사를 움직이는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허를 찔린 건 아니었다.
“조선과 중앙의 보도가 공개 논의의 단초가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방송과 신문은 신의의 잣대나 파장이 다르다. 이 부분의 고민이 있었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의 말이다. 누군가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편해질 일이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물꼬를 텄다. 방송사의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준 셈이다. 신문이 정보를 선점했다 해도 방송의 위력은 차원이 다르다. 조간신문의 보도 이후의 저녁 뉴스는 늦은 것이 아니다. SBS와 KBS가 차례로 강호순의 얼굴을 뉴스에 내보낸 시점은 주효했다. 이상한 건 MBC였다. 31일 당일에 침묵했던 MBC는 다음 날이 돼서야 MBC뉴스데스크를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방송국의 인사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타사보도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의아했다. 어째서 하루 늦게 방송을 했을까. MBC가 고민한 지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MBC 역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에 반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은 말한다. “사진은 이미 강호순의 검거 당일에 입수됐다. 다만 이를 공개할 것인가, 라는 내부 논란이 계속됐다. 당일 편집회의에서 보도 시점은 결정된다. 얼굴공개까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30일과 달리 31일엔 논의가 좀 더 깊어졌다. 그리고 2월 1일엔 논의가 무색해진 경향이 있었다. 타방송사에서 보도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얼굴을 가린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MBC는 좀 더 신중했다.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방송의 공정성을 내세워 공영방송 사수라는 기치를 내거는 MBC가 앞장 설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방송에서마저 강호순의 얼굴이 알려진 마당에 MBC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내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니고 있는 정보를 묵힐 수 없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다. 타방송국보다 하루가 늦은 시점에서의 보도는 무색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껍데기는 유효했다. 시의적 효력은 상실됐지만 정보 차원의 목적에서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적인 의사표명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MBC의 내부적 합의는 그렇게 이뤄졌다.
언론과 여론
강호순의 얼굴공개는 달리기가 아니라 꼬리잡기였다. 속도전보다도 탐색전에 가까웠다. 방송사는 두 일간지의 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일간지도 머리는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얼굴공개의 원칙으로 내세운 건 ‘국민의 알 권리’였다. 여론의 요구에 부응한 정보라는 점을 앞세웠다. “기사를 작성한 경위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면에서 충분한 입장을 밝힌 셈이라 본다.”김수혜 조선일보 기동팀장이 잘라 말한 것처럼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자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자사 입장을 기사로 전했다. ‘반 인륜범죄자의 얼굴을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역시 ‘공익을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이름, 얼굴 공개’라는 헤드라인으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즉흥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끝에 여론의 요구가 높아진 끝에 응답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사건이 거듭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여론화되는 시점에서 언론이 방관할 순 없는 사안이다. 신문은 여론은 대면하는 매체 아닌가.”중앙일보 유건하 팀장의 말이다. 방송국의 입장표명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방송국 3사는 이번 얼굴공개가 ‘국민의 알 권리’와 ‘여죄의 제보’를 위한 것이라는 공통적 견해를 밝혔다. 국민을 위한 공익이 얼굴공개의 목적이란 이야기다.
지난 1일 오전, 강호순의 자백에 따른 추가 현장검증을 위해 군포경찰서를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의 질의 대면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어제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는데 심정이 어떠세요?”강호순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대신한 건 오후 5시경 경찰의 브리핑이었다. 군포경찰서 이명균 강력계장은 그 질문을 통해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호순이 심경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전했다. 경찰은 강호순에게 언론의 얼굴공개를 알리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경찰은 당일 현장검증에서 강호순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언론의 얼굴공개가 다음 날 이뤄진 특단의 조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랬다. 현장검증 주변에서는 유족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고함이 빗발친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쓴 강호순을 향한 비난은 때론 주변의 경찰에게 향한다. “경찰 내부에서도 항상 논란이 있었다. 일선 형사들도 마스크를 벗기고 싶어한다. 피의자 인권도 중요하지만 여론 앞에서 피의자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을 리 있겠나.”이명균 강력계장의 말이다. 경찰 역시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강호순의 마스크가 벗겨진 뒤에도 현장검증은 여러 차례 거듭됐다. 경찰은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공개에 충격을 느꼈다고 발표했다. 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일선에서 취재한 모 일간지의 기자는 전한다. “범인의 심경변화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기자들이 확인한 사안은 아니다. 현장에선 실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심경 변화가 있는지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마스크를 벗은 뒤로 고개를 더 파묻는 경향이 있다.”마스크를 벗겼지만 강호순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다. 눌러쓴 모자와 후드로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을 파묻는 행위는 강호순이 마스크가 벗겨진 자신의 얼굴을 의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큰 변화는 강호순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앵글 각도가 변했다. 정면이 아니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간 거지.”한겨레 사회부 김기선 기자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마스크가 벗겨진 강호순의 얼굴을 찍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김기선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공개 뒤로 점점 보도가 선정적으로 변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팩트를 찾기 위한 노력보단 이슈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
언론은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소개해왔다. 그 뒤를 이어 강호순의 과거 행적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살인 수단과 살해 방법, 살인 행적까지 여과 없이 보도된다. 범죄 예방 차원에서 강호순의 범행을 보도하고 추적해 샅샅이 공개한다. 전국적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가 줄었다는 뉴스가 뒤따른다. 그 가운데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인터넷 매체까지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는 테스트를 기사화하고 유포한다. 이수정 경기대 심리범죄학 교수에 따르면, “최근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테스트는 잘못된 정보다. 게다가 싸이코패스 테스트를 비범죄자에게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불특정 다수의 호기심은 일회적이다. 다만 그 호기심에 영합하는 배후는 지속적이다.
“현장의 기자들 중에서도 보도가 너무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온다.”어느 일선 기자의 말처럼 강호순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방식에서 이상기류가 발견된다. 지난 2일, YTN에서 보도된 현장검증 관련뉴스는 단연 자극적이었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던져서 죽이고 그러는데 (강호순 역시) 그런 식으로라도 처참하게 죽여야죠.”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수원의 한 시민이 내뱉은 분노 섞인 언어가 여과 없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언론의 보도가 여론의 흥분상태를 부추기고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다.
원칙과 논란
흉악범 얼굴공개를 입법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를 반박한다. “흉악범에 대한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법에 따른 얼굴 공개가 된 용의자가 후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2차, 3차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 ‘강호순의 고향 특산물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나.”강호순의 얼굴공개와 함께 우리 사회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인식이 드러났다. 죄질에 따라 인권존중이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과 범죄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를 빌미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곳곳에서 설전이 벌어진다. 지난 2월 5일자 법률신문에서는 헌법학자 30명과의 전화 설문조사를 공개했다. 찬성 46.7%, 반대 53.3%. 반대가 앞섰지만 팽팽한 결과다. 법적인 합의 역시 쉽지 않다는 의미다. 찬성하는 쪽이 내세우는 논리의 기반은 알 권리에 있다. 반대하는 쪽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27조 4항에 기반을 둔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반면 알 권리는 헌법이나 실정법으로 규정된 권리가 아니다. 법무법인 드림 정영택 변호사의 자문에 따르면 이렇다. “헌법 21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있다. 여기서 언론, 출판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연관되고 이것이 알 권리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하지만 두 사안이 흉악범 얼굴공개에 대한 찬반 논리를 완벽하게 보좌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알 권리가 얼굴공개와 직결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영택 변호사는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헌법 10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헌법 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한다. 헌법 37조 1항을 근거로 국민 개개인은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초상권 역시 개인의 보장받을 권리에 속한다. 이는 헌법 10조 1항에 따라 개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국가적 의무와 연동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초상권의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외는 있다. 사회적인 공인에 한해서 초상권의 문제는 예외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강호순을 공인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이다. 공인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연예인이 공인인가, 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호순 역시 마찬가지다. 유명세를 치렀다고 해서 공인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호순이 공인이 아니라면 얼굴공개는 초상권 침해에 해당한다. ‘고의 또한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750조에 따른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언론의 얼굴공개 보도는 초상권의 권리를 강호순의 동의 없이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에 고의적인 위법행위로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7조에 따라 과거 행적이 담긴 사진의 게재까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해 패소한 문화일보의 판례도 여기에 해당된다. 얼굴공개에 대한 다양한 유권해석이 존재함에도 언론이 보도를 선점했다는 건 원칙에 대한 고민이 가벼웠거나 이를 간과했다는 의미다.
“언론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의 말은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말과 연동된다. “언론의 보도는 자유다. 상업적이고 부적절한 일이라 해도 거기에 대해 간섭할 필요는 없다. 그 후 그만큼의 책임을 지면 된다.”언론은 뉴스로서의 가치를 먼저 선택한다. MBC가 PD수첩을 통해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표현의 자유에 따라 뉴스 선별과 보도 결정은 언론의 권리다. 문제는 세세한 원칙의 틈새를 파고 든 관행이 거대한 원칙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나워진 여론 위로 강호순의 얼굴을 내던져 대중에게 물어뜯게 한들 사건의 근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존에 고수하고 확립되던 원칙이 흔들린다. 언론을 통해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고, 이를 통해 경찰은 피의자의 마스크를 벗겼다. 공익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실상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소모전이 계속된다. 상처의 치료를 위한 고심보단 당장의 고통을 잊을만한 마약을 처방한 셈이다.
“언론은 사회의 표정 중 하나다. 국민들이 강호순을 얼굴을 보고자 하는 건 국민의 분노가 반영된 것이다. 그 안엔 강호순의 얼굴 자체가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있을 수도 있는 반면 집단적인 광기도 분명 존재한다.”김성환 팀장의 말처럼 언론의 얼굴공개는 사회적 요구의 부응이다. 다만 그 사회적 요구가 현명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MBC가 타방송사에 비해 하루 늦게 얼굴공개를 결정한 건 이런 고민이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MBC마저 확신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린 셈이다. 여론을 악용했다는 비난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분하는 대중을 이성적 판단으로 이끌어야 하는 언론이 오히려 대중적 공분을 흡수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김기선 기자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지난 2일 MBC 뉴스데스크의 클로징 멘트는 그 일부 언론을 향한 것이었다. “몇 년 전 경찰이 마스크를 씌우면서 내규로 슬그머니 시작했듯이, 이번에 일부 언론이 이를 벗기면서 어물쩍 결정했습니다.” KBS의 정은천 팀장은 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클로징 멘트가 KBS를 겨냥한 방아쇠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MBC의 선정성을 지적했다. “우리는 MBC와 달리 강호순의 단독사진만 사용했다. 피의자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을 입수했지만 무관한 제3자의 피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러나 MBC의 클로징 멘트는 비단 KBS를 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MBC 스스로를 향한 손가락이 될 수도 있다. 뒤늦은 합류라 해도 MBC가 그 대열에 들어선 건 마찬가지다. “절차의 실종의 생각의 실종이 될 수 있어서 더 우려스럽습니다.”클로징 멘트의 마무리는 이렇다. 언론의 강호순 얼굴공개 과정이야말로 절차의 실종이자 생각의 실종이었다.
절망과 희망
“어차피 이건 길게 갈 사안이 아니다. 알지 않나.”모 일간지의 팀장급 인사의 말처럼 강호순의 얼굴도 어느 다른 이들처럼 곧 잊혀질 것이다. 문제는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강호순을 통해 유영철과 지존파를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새로운 흉악범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살인의 추억은 되풀이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를 범죄예방효과로 연결하는 논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단지 강호순을 힐난하고 때려죽인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흉악범만큼이나 끔찍한 증오만 양산될 뿐이다. 징벌이 아니라 예방이 필요하다. 강호순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봐야 한다. 강호순의 얼굴은 우리 사회에 잠재된 악의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앉아있는가의 지표다.
개개인의 절망이 모여 사회적 공분을 이룬다. 추악한 사회적 기저에 맞닥뜨린 당혹감이 거대한 분노로 몰아친다. 언론은 여론의 방파제다. 진짜 알아야 할 것과 단순히 알고 싶은 것을 구별해서 떠내려 보내거나 막아서야 하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몫이다. 그저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여론의 돌팔매질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화된 형사정책과 효과적인 교정교화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이수정 교수는 지난 10년간 이에 대해 주장해 왔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강호순의 검거에서 프로파일링 수사가 큰 역할을 했다.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그 프로파일링이 유영철 사건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불행을 통해 절망을 얻기는 쉽다. 하지만 희망을 가늠해야 한다. 강호순은 이 사회의 직설적인 절망이자 희망의 역설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강호순의 얼굴엔 살인마에 대한 친절한 예시 따윈 없었다. 소박하고 온화한 미소에 가증스러움이 더해질 따름이다. 그 끝에 무력한 분노만 잔뜩 걸려들었다.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라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보지 않기 위해선 좀 더 현명해야 한다. 싸이코패스 테스트 따위를 클릭하거나 강호순을 향한 육두문자나 날리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당신 앞에 드러난 강호순의 얼굴을 향해 물음표를 얻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강호순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여론을 위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언론에 되물어야 한다. 살인마의 얼굴을 본 당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구별해야 한다. 절망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 우린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살인마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 따위를 알고자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은 분명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