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이란 이름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절대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장르를 설명하는 절대명사다. 히치콕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스타일이며, 규칙이고, 철학으로 군림한다. 히치콕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의 양식을 자신의 창작에 투영하며 오마주의 제의를 치른다. Hitchcockian의 순례를 떠난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아버지, 거대한 수사로 치장한 히치콕은 동세대와 후대의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그 영향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항상 1순위로 언급되는 브라이언 드 팔마는 <드레스드 투 킬>을 통해 히치콕의 양자가 됐다. 너무나도 유명한 <싸이코>의 욕실 살해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드레스드 투 킬>의 관능적인 도입부 샤워신은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 얼마나 매료됐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드 팔마는 스스로의 입으로 ‘히치콕의 영향력’을 공언함으로써 그 명예를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그 후로도 드 팔마는 <필사의 추적>의 우스꽝스러운 샤워신으로 <싸이코>의 샤워신을 다시 한번 재해석한 뒤, <이창>과 <현기증>을 아우르는 <침실의 표적>을 통해 히치콕의 영향력을 온전히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런 드 팔마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두고두고 드 팔마의 발목을 잡는다.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친 드 팔마의 명예는 오늘날에 이르러 드 팔마를 히치콕의 모방자라고 낙인 찍게 만들었다. 사실 드 팔마의 관심은 히치콕에만 집중된 건 아니었다. 드 팔마는 히치콕과 동시대의 거장이었던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리메이크했고,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적 장면이라고 일컫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시퀀스를 <언터쳐블>에서 고스란히 재현하며 에이젠슈타인을 오마주한다. 하지만 일찍이 <그리팅>과 <시스터즈>를 통해 히치콕의 ‘관음증’과 ‘현기증’을 흠모했던 드 팔마는 히치콕의 후광을 통해 영예를 얻었으나 히치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방범으로 전락했고, 드 팔마 스스로도 히치콕과의 비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근작인 <블랙 달리아>는 현재 드 팔마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가까운 히치콕 ‘강박관념’에 빠지고 말았다고 느끼게 만들 정도다. 드 팔마의 불행은 그가 ‘히치콕을 너무 많이 안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거듭 감상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더 배울 만한 게 있다.”이는 마틴 스콜세즈가 영국의 영화지 <사운드 앤 사이트>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다. 드 팔마와 동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기도 하는 마틴 스콜세즈는 보다 영리한 방식으로 히치콕을 흠모했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명장면을 재해석하며 모방의 오명을 썼던 것과 달리 마틴 스콜세즈는 히치콕을 참고하는 방식으로서 그의 장기를 자신의 영화에 녹여냈다. <택시 드라이버>의 오프닝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 트래비스의 눈동자 클로즈업은 <현기증>의 그것에 가깝다. 히치콕의 <오인>을 연상시키는 카메라 기교와 히치콕의 시점이 적극 반영된 듯한 뉴욕 시내의 주관적 묘사로 가득한 <택시 드라이버>의 긴장감은 히치콕을 참고한 영화광 마틴 스콜세즈의 전리품에 가깝다. 히치콕의 작품에서 음악을 전담했던 버나드 허만을 삼고초려한 끝에 그에게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맡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버나드 허만의 유작이 된 <택시 드라이버>는 <싸이코>의 그것만큼이나 감정적 파고를 일으키는 음악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스콜세즈는 히치콕의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솔 바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기도 했다.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 진정한 영화의 시작이 이뤄진다’고 말하기도 했던 스콜세즈는 <좋은 친구들>부터 <카지노>까지 솔 바스가 디자인한 오프닝 타이틀을 사용한다. <카지노>는 결국 솔 바스의 유작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두 사람이 스콜세즈의 영화를 통해 유작을 남긴 셈이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달리 스콜세즈는 히치콕과 함께 수많은 감독들의 영향력을 들먹이는 영화광의 면모를 과시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참고사항으로서 히치콕을 나열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스콜세즈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스페인의 샴페인 광고에서 ‘히치콕이 남기고 간 3페이지짜리 미완성 트리트먼트가 있었다’는 거짓말로 무성 테크니컬러 단편을 만들기까지 했다.
앞선 두 감독과 다른 의미에서 거장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히치콕의 양자다. 스코티의 고소공포증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줌렌즈와 트래킹 샷을 결합해 활용한 <현기증>의 '줌 인 트랙(Zoom in & track out)'기법은 <죠스>에서 해변가의 상어를 처음 목격하는 브로디 서장의 시선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또한 <죠스>는 <새>의 해양버전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는데 무방비 상태로 수면에서 유영하는 인물에게 접근하는 백상어의 모습은 사람 주변으로 한 마리씩 모여드는 새들의 집결만큼이나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았던 J.D 카루소의 연출작 <디스터비아>와 <이글 아이>는 노골적인 히치콕의 차용에 가깝다. 히치콕의 <이창>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각각 차용했지만 두 작품은 히치콕의 작품과 전혀 다른 판본이다. 히치콕의 두 작품이 마치 잘 볶은 원두커피처럼 중후한 향을 낸다면 J.D 카루소의 그것들은 커피우유처럼 가공된 오락영화의 단맛을 뽐내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스필버그는 <디스터비아>가 <이창>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이창>의 판권소유자로부터 피소 당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히치콕이 살아생전에 스필버그를 ‘물고기를 만든 소년’이라 비하하며 만남을 간청하는 스필버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일화만큼이나 굴욕적인 사건이다.
히치콕은 나이와 국경, 분야를 초월하며 매혹을 선사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이야기적 방식인 맥거핀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를 온전히 반영하는 작품이다. 또한 브라이언 싱어의 근작인 <작전명 발키리>에서 슈타펜버그 대령이 히틀러를 테러하기 위해 폭탄을 숨기는 장면은 프랑수아 트뤼포와 히치콕의 유명한 대담 가운데 등장했던 맥거핀 이론의 사례와 명확히 닮았다. 한편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조지. A 로메로의 <나이트라이더스>에 ‘대형 샌드위치를 먹는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며 히치콕의 카메오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한국의 봉준호 역시 히치콕과 비견되는 젊은 감독군에 속한다. 최근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출품됐던 <마더>는 현지에서 공개된 뒤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되며 호평을 얻었다. 오명을 쓴 남자, 관음증, 미묘하게 엇물려 돌아가는 내러티브, 그리고 결과적으로 맥거핀을 이루는 스토리텔링. 히치콕의 미스터리한 이야기 흐름과 서스펜스적인 연출이 깊게 관여한 듯한 <마더>는 히치콕의 영향력이 희미하듯 깊게 배어든 작품인 셈이다. 사실 봉준호가 맥거핀을 선호하는 스토리텔러란 점에서도 봉준호에게 히치콕의 영향력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알려진 것처럼 봉준호에게 <새> 리메이크 제안을 던졌다는 미국 에이전시의 안목은 괜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히치콕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를 바친 건 구스 반 산트다. 히치콕의 <싸이코>를 숏 바이 숏으로 완성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리메이크라기 보단 일종의 필사본이나 다름없다. 문체가 다를 뿐 동어반복의 문장에 가까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원본과 완벽한 대조군을 이루는 필사본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까지 최대한 원작에 밀착한 방식으로 완성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온전히 평단과 관객에게 조롱 당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용감했다. ‘히치콕의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봉준호의 생각을 구스 반 산트는 자기 희생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졸작 <힛쳐>따위가 <새>가 방영되는 TV를 스크린에 노출시키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를 들먹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실로 정직하고 비범한 오마주다. 구스 반 산트야말로 뼈 속까지 진정한 Hitchcockian인 것이다.
칸 영화제는 잘 다녀오셨나요? 만만치 않은 일정을 소화하셨을 것 같은데요. 칸에 가서 당일 하루는 쉬고, 그 이튿날 시사하고요. 그 이튿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15분 간 딱딱 끊어서 인터뷰 쭉 했고요. 영화를 보고 어찌나 박수를 쳐주는지, ‘나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 (웃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다음 이튿날에 한국 와서 하루 뒤에 언론시사회 하고, 오늘은 VIP시사회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게 완전히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하고 있네요.
체력적으로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건강 관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힘들어요. 되게 힘든데, 평소에 건강 관리는 하죠. 운동을 조금씩 해요. 러닝 머신도 하고, 아령 같은 걸로 하는 운동도 하고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운동은 하루마다 하는 건 아니고, 종종 할까, 말까, 한 시간쯤 고민하다가 슬슬 걸어가서 한 시간 반쯤 놀다가 쉬다가 그렇게 하고 오죠. (웃음) 그래도 하고 나면 '난 운동했다' 그런 기분 때문에 하지 않은 것보단 훨씬 기분이 좋아져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전 무조건 자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서요. 그냥 무조건 자요. 자지 않으면 펑펑 터질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 피부도 너무 고우세요. (웃음)
왜 그럴까. 일단 담배피지 마세요. (웃음) 난 이제 담배 끊은 지 12년 째 됐는데요. 그때부터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일에 한번씩 피부 케어도 받아요. 적어도 한 달은 넘기지 않아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보셨나요?
<살인의 추억>은 봤어요.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저는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니까 영화를 극장에서 잘 안 봐요. 비디오 테이프로 나온 다음에 보니까 1년 뒤에나 영화를 보게 되는데 뒤늦게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저런 불란서 영화 같은 영화가 있네, 멋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즈음에 봉준호 감독과 얘기하게 되고, 정말 좋았죠. 내가 좋아했던 영화의 감독이 저에게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니.
봉 감독 별명은 아세요? 봉 테일이라고 하는데.
저도 처음 알았어요. 스태프들이 이야기해주더라고요. 본래 봉 테일이라고. 그러니까 그건 디테일하다는 말이잖아요. 정말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저기에 무슨 소품 하나라도 빠진 게 (머리를 가리키면서)이리로 느껴지나 봐요. 제가 많은 영화감독들하고 일해보진 않았지만 드라마도 많이 했으니까, 그냥 제 느낌으로 보자면 정말로 막 촉수가 이리저리 다 뻗쳤는데도 그게 산만하지 않게 정확히 제자리로 뻗치는 것처럼 보여서 놀랐어요.
봉준호 감독과 영화를 찍게 된다 하니 주변에 계시는 분들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김수현 씨가 옛날에 내가 영화 하려고 할 때 “혜자씨, 영화 하지 마. 영화는 드라마와 달라서 심플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랬는데 이번에는 봉준호 씨가 감독하니까 하면 좋겠다고 하는 거에요. 내가 특별히 누구하고 얘기한 게 없어서 그것밖에 들은 게 없어요.
단편드라마 <여>에 출연했던 김혜자 씨를 보고 봉준호 감독이 <마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봉 감독이 어려서부터 TV를 많이 봤더라고요. <전원일기>도 아주 다 꿰고 있어요. 식구들이 TV를 즐겨보는 가족이었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TV많이 보고, TV에 나오는 배우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그리고 그렇게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닌다고 해요. 그래서 낯 익히지 않은 새로운 배우가 필요할 때 캐스팅하죠. 좌우간 일에 대해서 열정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감독인 거 같아요.
봉준호 감독이 본격적으로 김혜자 씨에게 러브콜을 보낸 건 <살인의 추억> 이후부터라고 들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마치 열렬한 구애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행복한 일이죠. 정말 촉망 받는 젊은 감독이 저를 갖고 어떤 영화를 기획한다는 말 자체가 배우로서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하는 말이었어요. 실현이 되든, 안 되든, 그랬어요. 전 항상, “5년 전에 생각해놓고 중간에 나한테 말한 거 부담 느껴서 자꾸 진행시키려고 무리하지 마라. 난 나한테 말해준 것만으로 고맙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너무 시간도 많이 가고, 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어떻게 내가 20대 아들의 어머니를 할 수 있겠냐.” 그런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 아니면 전 이 영화 덮어요.” 그러면서, “선생님 보이는 대로 찍을 거에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사람들은 김혜자 씨가 안 하면 이거 누구 시킬 거냐고 물었다는데, 그거 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김혜자 선생님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고 만약 안 된다면 없었던 걸로 하겠다고 했다네요. 자기가 계획했던 걸 절대로 바꾸지 않더라고요.
보이는 대로 찍겠다는 말처럼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얼굴이 클로즈업되곤 하더군요.
영화를 보니까 어떤 때는 너무 나이 들게 나오고, 어떤 때는 너무 젊게 나오고. 그런데 이 영화가 그냥 한 장면에 머물러서 저 여자를 관찰할 틈을 안 주는 영화에요. 그렇죠? 엄마의 나이가 상관이 되지 않는 영화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거 같아요.
자신의 표정을 구상해본 적은 없으셨나요?
거울 보고 그럴 틈은 없었어요. 수시로 감정이 변해야 되는 상황에서 거울보고 연습할 새가 있어야죠. 끝나고 나서 방에 들어와서 아까 한 걸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내가 아까 어떻게 했지’ 하고 가끔 본적은 있어요. 자기 전에 세수하고 와서 그걸 해보자고, 거울을 이렇게 보고 그래 봤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요.
김혜자 씨만이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봉준호 감독의 공언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실감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니까 그 의미를 알겠더군요. 진짜 알았어요? 아이, 좋아라. (웃음)
스크린에 쏟아져 나오는 김혜자 씨의 표정 자체만으로도 영화가 놀라웠어요. 그런데 그런 표정의 가능성을 봉준호 감독이 이미 예감하고 접근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워졌어요.
저도 무섭다니까요. 얼마나 영리하고 천재적인 사람일까, 어떻게 나한테서 저런 게 나올 거라 예상했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오게 상황을 몰고 가는 거에요. 그게 일부로 거울 보고 연습해서 지어낸 표정이겠어요? 아니지. 난 깜짝 놀랐다니까. 제 눈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고, ‘어머나!’ 이랬다니까. (웃음) 왜 사람이 환장하면 눈이 돈다 그러잖아요. 진짜 눈이 돌더라니까. 모니터보고, ‘어머나, 진짜 눈이 뒤집히는구나’ 그랬지.
<마더>는 언제 처음 보셨나요.
정식으로 본 건 칸에서였어요. 여기선 떨려서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모니터도 제 방에서 혼자 했거든요. 내가 나오는데 누가 옆에서 한눈 팔고 딴짓하면 다 느껴지잖아요. 이러면 막 짜증나고 신경질 나기 때문에 혼자 문 꾹 닫아놓고 보고 그랬지. 근데 이제 좀 많이 둥그래져서 같이 보긴 하지만 이번에는 같이 못 보겠더라고요. 특히나 기술 시사에선 거의 완성본을 보여준다는데 불 켜고 난 다음에 사람들 표정이 어떨까 무섭고 민망해서 못 봤어요.
<마더>에서 묘사하는 어머니는 일반적인 모성상으로 이해될만한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죠. 어쩌면 그 지점이 <마더>에 대한 흥미가 생길만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런 어머니였기 때문에 하고 싶었어요. 이제 일상적인 어머니를 너무 많이 했잖아요. 물론 <엄마가 뿔났다>같은 경우는 자기를 찾으려고 애쓰는 조금 다른,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깨인 엄마를 연기했잖아요. 그래서 사실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까진 굉장히 공백 기간이 길었어요. 그 정도로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더>도 이런 엄마였기 때문에 한 거죠.
사실 <마더>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미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짐승 같죠. 애미도 아니고 어미에요. 그 여자가 화장터에서,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이러면서 눈이 이렇게 뒤집어지는 걸 모니터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내 눈이 어떻게 저렇게 되냐고. (웃음) 그니까 그건 어미죠. 개나 짐승이 새끼 낳고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으르르하잖아요. 그런 것과 똑같이 자기 새끼를 해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거의 짐승 같았어요, 이 엄마는.
이성적인 합리를 먼저 정립하는 것보다도 본능적인 에너지에 대한 필요성을 먼저 자구할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아마 전 크게 병 날 거에요. 어느 영화보다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연기였기 때문에. 그런데 정신은 굉장히 맑아졌어요. 육체는 피곤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새로워졌다고 할까요.
뭔가 새로운 기운을 얻었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땅을 일군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영화를 하면서 그 동안에 저한테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속을 다시 일군 거 같아요. 비료도 주고, 나한테 고착돼있던 어떤 생각들,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것들이 다시 이렇게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머니로서 <마더>에서 연기한 인물의 모성에 대해서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건 엄마밖에 없다고. 그 말은 곧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자식을 해치려 그러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돼요. 그만큼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 되거든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론 관객들은 좀 놀라겠죠. 그렇지만 놀라면서도, ‘그래, 자식이니까 저러지’ 그러실 거 같아요. 그리고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애니까 측은하고, 내 목숨하고 바꿨으면 좋겠다 싶은 자식이니까. 저도 정말 걔만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책을 읽으면서부터 도준이란 인물이 너무 가슴 아픈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라고는 동네 건달인 진태밖에 없잖아요. 정말 인간 말종이라고, 종자부터 틀렸다고 엄마가 표현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고마운 거에요. 내 아들의 친구가 돼주니까.
연기를 오랫동안 해오셨지만 <마더>에서의 김혜자 씨는 기존에 보여주셨던 연기와 차원이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김혜자 씨께서도 처음이라 할만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처음 해본 게 많아요. 정말. 사실 국내에서는 얼굴을 알아보니까 외국으로 여행을 많이 가도 국내에선 어디 여행을 잘 못 다녀요. 이게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서만 찍은 게 아니고 영화팀과 같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찍었잖아요. 관광지가 아닌 곳인데도 ‘우리나라 산천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라는 걸 느꼈고, 공기도 맑고, 인정도 좋고, 그런데 사니까 두통도 없어지더라고요. 전 평생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두통도 없어지고, 서울에 있을 땐 배고픈 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배도 고프고, (웃음) 그래서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저한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저는 저한테 열정이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한테 감사해요. 저한테 불씨만 남아있던 열정을 다시 타게 해줬으니까.
<마더>는 <마요네즈>(1999)이후로 10년 만에 출연을 결정한 영화에요. 그 사이에 작품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한 작품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같이 하자고 그러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지만 내가 TV에서 너무 많이 했던 비슷한 역할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우선 그런 역할에 싫증이 나는데 누가 그걸 극장까지 보러 오겠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그 분들한테, “이건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키던가 하지, 내가 나가서 하면 무슨 흥미가 있겠느냐”, 그랬어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이건 선생님에게서부터 영감을 얻어서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하신다 그러면 이건 그냥 덮어버린다, 그랬어요.
결국 10년 만에 스크린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셈이에요. 그런 점에서도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웃음) 예. 감회가 남다르네요. 정말로. 이제 막 생각하게 됐어요.
오랜만에 영화 현장에서 작업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드라마 같이 쫓기지 않아서 좋았어요. 말하자면 배우의 창의력이 발휘되기 좋다는 점이 달라요.
아무래도 생각처럼 항상 연기가 잘 되는 건 아니었을 텐데요. 촬영하지 않을 때는 쉬라고 캠핑카가 마련돼있었거든요. 잘 표현이 안될 때는 그 속에 들어가서 울었어요. 답답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밖에 표현이 안되나 싶어서.
사실 영화 속에선 우는 연기가 거의 없잖아요. 감정을 안으로 눌러 담으면서도 그걸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답답한 부분도 적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야 되는 거에요. 물론 우는 것도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우는 건 울면 되니까. 눈물 없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라는데 잘 안되잖아요. 그래서 차에 가서 막 울었어요.
그럴 때 봉준호 감독의 반응은 어땠나요?
감독이 달래주러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나가라고 그랬어요. 해줄 말 있으면 문자로 해주라고. (웃음) 그랬더니 문자를 했더라고, 진짜. ‘아무리 부인해도 세상에 화날 땐 인정하세요’ 괜히 나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지. 잘 안된 건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많이 배려해주지만 자기 맘에 안 드는 연기는 추호도 봐주는 게 없었어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고, 다시 하고, 그런 점이 저하고 같았어요.
문자도 하실 줄 아세요?
제가 <마더>때문에 처음으로 이 핸드폰을 썼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영화사에서 사줬거든요. (웃음) 그리고 봉 감독이 핸드폰에 취미를 갖게 하려고 문자 하는 법도 알려주고 그랬죠.
인터넷은 할 줄 아시나요?
인터넷은 잘 몰라요. 대신 우리 아들이 좋은 얘기 나왔을 땐 와서 보여줘요. “엄마, 여기 재미있는 얘기 있어. 와봐.” 그래서 읽어주다가, “이거 보려면 쑥 내려.” 그리고 딴 데 가요. 그런데 저는 내리다 보면 다른 게 나와요. 그래서, “얘!” 부르면 “아이, 참, 엄마, 그냥 보지 마세요.” 그러곤 하죠. (웃음) 그런데 나쁜 얘기는 안 보여주겠죠. 좋은 얘기만 보라고.
봉준호 감독이 아들처럼 느껴질 때는 없었을까요?
아~니, 전 그 사람 존경해요. 나이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그 사람 하는 거 보면 존경할 수 밖에 없어요. 정말 똑똑한 사람을 보면 존경해요. 그 분은 굉장히 천재적이고요, 정확한 사람이에요. 자기 머리 속에 확실한 그림이 서있어요. 우물쭈물하는 법이 없어요.
봉준호 감독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느낄만한 주문이 있었나요?
"다 좋은데 한번만 다시 해보세요." (웃음) 나도 찍으면서 봉 감독이 오케이 할 때, “아니, 나도 한번만 더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자기가 됐다고 생각하면, “아니요, 됐어요”, 그래요. 정말 못 됐어. 진짜로. (웃음)
어쩌면 뭔가 그 이상을 끌어낼 수 있는 기대감에 계속해서 연기를 요구한 건 아닐까요.
봉 감독이 여러 버전으로 해보길 원해요. 그러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는 좋은 게 나와요. 어쩌면 틀에 박힌 듯이 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그러니까 더 재미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더라고요.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으셨나요? 소통이 불가한 고립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캐릭터의 고립감을 느끼면서 연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맞아요. 그런 점에서 그랬어요. 나하고 소통되는 사람이 없잖아요. 말은 하지만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게 아니고 나 혼자 중얼거렸다가 무시당하고 그러지, 그러니까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많았을 텐데요. 연기적으로 힘들다고 느꼈던 고비가 있으셨나요?
제일 힘들었던 건 뛸 때도 아니고 내 맘대로 연기가 안될 때. 아까 말한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표정 지으라고 써 있는데 그게 안될 때 감독은 ‘그게 바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에요’, 라고 말하지만 어떡하란 말이야, 도대체, 지가 한번 해보라지! (웃음)
영화 안에 모호한 표현이 많더군요. 완전한 정답이나 확신을 주지 않고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책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책 읽을 때 행간을 읽는다고들 그러잖아요. 그런 것처럼 여기 참 숨은 그림이 많구나 싶었어요. 제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아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애매하게 표현된 점이 있어요. 그냥 저 사람들은 모자관계일까, 아니면 모자관계이상일 수 있을까, 그런 것도 아주 그렇게 안개 속같이 표현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약간 그리스 비극 같은 생각도 들고.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잖아요. 골방에 들어가서 사진을 찢을 때도 그 옆엔 애 아빠가 있었겠구나, 이런 암시만 남잖아요. 그러니까 이 남자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한 여자였나, 아니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저러나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구상이 점점 추상으로 가는 것처럼 뭔가 구체적으로 많이 생각했다가 붓 하나 찍 긋는 것처럼 연기는 심플하게 한 거죠.
칸에서도 <마더>를 통해 다양한 평을 얻으셨을 텐데요. 아무래도 김혜자라는 배우에 대한 인식과 선입견이 뚜렷한 국내 관객의 기대나 감상과 다른 신선한 반응을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달라요. 그 분들은 <전원일기>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선입견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원빈의 엄마로 받아들이는 거야. 아마 우리나라 분들은 ‘원빈이 아들이야? 봉준호가 아들 뻘 아닌가’ 그런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기자 분들 책임이야. 꼭 이름 옆에 가로치고 나이를 적어서 그렇다니까. (웃음) 나이가 배우를 결박 씌우는 거에요. 그 분들은 오히려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영화에서 굉장히 늙어 보일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굉장히 젊어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 나이를 너무 잘 알죠. 기자들이 자꾸 써주니까, 친절하게. (웃음) 그러니까 배우 나이는 안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냥 짐작하는 것과 자꾸 이렇게 적어놓은 걸 보는 것하곤 틀리거든요. 제가 몇 살쯤 됐다는 거야 다 알겠죠. 언제적 김혜자인데. 근데 그걸 못박아서 써줄 때와 아닐 때는 또 다를 거 같아요.
사실 중년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다룰만한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드물기도 하죠.
그렇죠. 그런데 자꾸 이렇게 나이 밝히고 그러니까. (웃음) 이건 농담이고요. 사실 젊은 사람들 얘기가 예쁘잖아요. 보고 나면 재미있고. <마더>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연기가 요구되는 경우는 흔치 않겠죠. 그렇죠?
작품을 마치고 난 지금은 마음이 어떠신가요?
저는 꼭 작품이 끝나면 아파요. 지금은 아직 시사도 있고, 기자 분들 만날 일도 있고, 개봉하면 인사도 다녀야 되니까 그때까진 안 아플 거에요, 아마. 그런데 그게 다 끝나면 아플 거에요. 많이 아플 거에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신 적은 있나요?
맥을 놔서 그럴 거에요. 이 엄마가 떠나가면 아파요. 떠나가면서 나를 병이 나게 하고 갈 거에요. 지금은 아직도 이 엄마가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괜찮은 거겠지.
최근 인터뷰에서 레드 카펫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고 밝히셨더군요. 사실 칸 영화제 레드 카펫이라면 배우로서 한번쯤 꿈꿀만한 자리일 텐데요.
저는 이번에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에 활동한지 너무 오래돼서 백상예술대상이나 KBS 연말 대상 시상식 같은 데서도 레드 카펫을 까는지 몰랐어요. 그 때도 ‘여기 뒷문 없어?’ 그래서 뒤로 들어왔어요. 무안해서. 그건 그냥 젊은 사람들이 예쁘게 입고 관객들 즐겁게 해주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지. 저한테 그런 환상은 별로 없으니까요.
올해는 시상식에서 정문으로 들어오시겠죠.
칸에서 그랬으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겠죠. 그렇죠? 이번에도 뒷문으로 가면 저 여자는 해외에서만 저러고 국내에서는 안 그런다고 하겠죠. (웃음)
스스로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자식들한테 약간 폐가 되는 엄마일 걸요. 맨날 한심한 말 하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있고, 밥 좀 먹으라고 몇 번씩 말을 해야 그래, 그러면서 먹고.
보통 어머니들께서 자식에게 밥 먹으라고 하시는 게 보통인데 말이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배가 안 고픈 걸 어떡해.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게 약간 어폐가 있죠.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 허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그 동안 어머니 역을 잘 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하겠죠. 내 사생활은 엉터리였어도.
최근 출연하셨던 <엄마가 뿔났다>의 한자도 집을 나가서 안식년을 갖겠다고 선언하죠. 사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삶처럼 여겨지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자도 상당히 이례적인 어머니 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엄마에요. 그런데 보통 자기 친구들도 만나면서 가끔 자기 즐거움을 찾는 주부들도 정말 안식년을 가져야 된다고 그러는데 전 거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해요. 안식년을 요구할 수 있는 엄마는 정말 가족을 위해서 자기는 하나도 없었던 엄마에요. 이렇게 저처럼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무슨 안식년이 필요 있어요? 이게 안식이지. 오로지 집에서 식구들을 위해 정말 자기를 다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들만 쉬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건데 너도 나도 다, ‘집 잘 나왔어’ 이러는 거에요. 물론 어떤 분들은, ‘아니, 그만하면 살지’ 그러시더라만. (웃음) 어쨌든 저는 그래서 김수현 씨가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에요. 가족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공상해요, 공상. (웃음) 아니면 자요. 복잡하면 잠 오고, 깨 있으면 졸 거 같으니까 그냥 자요. 그렇게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니까 그 때부터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TV도 재미있는 건 보는데 어떨 땐 그냥 안 키죠. 켜면 쓸데없이 하루가 휙 가버리더라고. 얻은 것도 하나도 없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다니까. ‘뭐했을까, 하루 종일’ 이러면서. 그런데 그것도 버릇이더라고요. 눈 뜨면 TV켜버릇하면 그렇게 되요. 그런데 눈 뜨면 좋은 음악을 딱 틀어버리면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 같아.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단 혼자 보내시는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원래 사람들 많이 있는데 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라 그냥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친구가 없으면 참 불행하다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보면 불행한 사람인 거죠. 제가 혼자 이렇게 있는 걸 좋아하니까 옆에 친구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전부 다 저를 보호해주려고 그러는 거 생각하면 난 참 인복이 많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럴 때가 정말 많아요. 내가 이렇게 나밖에 모르고 내 안에만 갇혀서 사는데도 사람들은 날 이렇게 치유해주려고 하니까. 진짜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봉사활동도 활발하시잖아요.
저는 세상을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힘들어요. 그런데 애들은 모르잖아요. 애들은 배고픈 거, 아픈 거, 그런 것만 알잖아요. 애들하고만 있으면 내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다고요. 아픈데 약 발라주면 되고, 그런 것만 해주면 되지, 내가 그 사람 생각에 맞춰서 머리 굴려야 되고 그렇지 않잖아요. 전 그런 걸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앞에 가면 기운이 쑥 빠지면서 졸려요, 금방. 그러니까 사람들 많은데 가면 왜 그렇게 졸린 지 몰라. (웃음) 지금은 인터뷰하는 자리니까 말을 많이 하지. 말도 많이 하면 에너지가 굉장히 소진돼요. 그래서 저는 말도 잘 안 해요. 지금 내가 안 하면 안되니까 하는 거지. 잘 써달라고. (웃음)
연기자라는 직업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일이지만 그 불편함을 상쇄할만한 가치가 있으니 유지가 가능한 것이겠죠?
저에겐 배우가 직업이기 보단 곧 저의 삶이에요. 물론 ‘어큐패이션(occupation, 직업)’ 란에는 ‘액트리스(actress, 여배우)’라고 써요. 그렇지만 전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삶의 일부지.
연기가 삶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니까 제 존재의 의미에요. 제가 연기를 안 하고 보이지 않을 때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요. 살아있어도 제가 작품에 나오지 않으면 그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에요. 아이들 만나고 다니고, 그렇게 반쪽의 삶은 사는 거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에요.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신다고 들었어요.
나, 그 말 젊었을 때부터 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해야지. (웃음)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을 해요. 엄마는 맨날 잘 나온 사진 보면 영정 사진 쓴다고 해서.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사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러니까 항상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가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저희 애들은 아주 질색해. 엄마는 왜 맨날 그러냐고 그러는데 사실이 그러니까. 김중만 씨는 옛날에 한 20년 전에 알았을 때부터 사진을 잘 찍었는데 항상 그 사람이 찍어준 사진보고 이걸로 영정사진 해야지,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매년 영정사진을 바꾼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웃음)
벌써부터 김혜자 씨의 여우주연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말을 참 잘해요. 이거 찍어서 그냥 우리끼리만 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보는 게 두려워요. 그냥 제가 연기를 좋아하니까 우리끼리 찍어서 우리끼리만 보고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만약 나중에 상을 준다면 상 탈 때는 행복하죠. 그런데 상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요.
사실 <마더>까지 단 세 편의 영화를 했지만 그때마다 상복은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영화 <만추>도 마닐라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탔고요. <마요네즈>는 케라라국제영화제에 갔는데 거긴 여우주연상이나 남우주연상이 없었고 작품상만 있는 영화제였어요. 그런데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방영화제 같은 거니까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거기서 <마요네즈>가 그랑프리 탔어요. 유인호 감독님이 가서 타오셨는데 그쪽 신문 1면에 한 장면이 크게 나왔더라고요. 감독님이 그 신문 갖고 와서 저한테 줘서 어디다 잘 간직했는데 지금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해.
허벅지에 침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요. 그 장면이 다양한 해석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신의 기억을 봉인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내가 스스로를 찌르는 고통스러움을 통해 마음 속의 아픔을 잊음으로써 그 기억 자체를 잊으려고 한다고, 그냥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아마 허깨비처럼 살 거에요. 마음은 절벽에서 이미 투신했다는 김남조 시인의 시처럼 그 아들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그냥 허깨비로 살겠죠.
결국 이 어머니 역시 김혜자 씨 본인에게 봉인되는 캐릭터가 될 거 같네요. 그러다가 언젠가 이 캐릭터를 다시 꺼내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요.
저는 흘러간 건 잘 안 떠올리는 편이거든요. 떠올리면 자꾸 잘못했던 것들만 생각나요. 그래서 괴로우니까 안 떠올려요. 그런데 <마더>는 다른 작품보단 저에게 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뭐라고 설명드릴 순 없지만 앞으로도 떠오를 것 같아.
시를 많이 읽으시는 편인가요? 저는 시를 좋아해요. 짧은 단어 속에 너무 많은 뜻이 있어서.
2004년도에 출간된 저서인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에서 헤르만 헤세의 ‘행복해진다는 것’의 시-인생에 주어진 의미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를 인용하면서 이를 반박하셨던 기억이 나요.
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는데 이런 애들을 못 봤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천상병 시인의 시에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아이가 대문 앞에 울고 있다. 오줌을 싼 벌일까. 이렇게 다섯 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가 울고 있다. 그러면서 넌 왜 우니.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 내용의 시가 있어요. 제가 그 시를 적고 그 밑에다가 ‘선생님, 다섯 여섯 살에도 인생이 뭔지 아는 애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썼어요. 다섯 여섯 살에 지네 엄마 아빠가 총맞아 죽는 걸 본 애들도 있고, 이 분도 그 아이들을 못 봤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쓰셨구나 했죠.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시를 쓰셨을까.
사실 천상병 시인도 상당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죠.
그렇죠. 그 분 시가 얼마나 비참해요. ‘아이론(iron) 밑의 와이셔츠 같았다’고 하셨잖아요. 아이, 끔찍해. 정말로. 그게 다리미로 다져질 와이셔츠 같다니.
사실 그만큼 남들이 끔찍하다 말하기 쉬운 삶을 사셨죠. 하지만 한편으로 당사자의 시점에서는 그 삶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하늘로 돌아갔다고, 즐거웠다고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으니까.
결국 자신의 이해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더>의 혜자가 취한 선택 역시도 타인에게는 극악한 선택이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선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방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게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때때로 자신이 이해하는 자신과 타인이 이해하는 자신의 차이를 느낄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가면의 생’이라는 소설 있잖아요. 그런 게 생각날 때도 있어요.
CF를 통해 어필한 어머니 이미지도 강했던 거 같아요. 요즘엔 사실 출연하시는 CF는 없으신 것 같은데 제의는 꾸준히 들어오나요?
맨날 하기 싫은 CF는 끝없이 들어오는데 저는 안 하는 게 좋으니까 별로 관심은 없어요.
CF를 많이 하는 젊은 배우들이 종종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다 생각이 있어서 하겠죠. CF만 많이 하는 배우도 그게 맞는 사람이 있어요. 많이 해도 별로 싱겁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많이 하면 왜 저러냐, 그런 사람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냥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그게 누가 충고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요. 전 누구 충고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도 충고 받는 거 싫어하고, 그냥 저도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자기 생긴 만큼 사는 거니까.
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꽃 좋아하죠. 저는 정말로요. 봄에 땅이 아직도 꺼뭇꺼뭇하잖아요. 커다란 소나무 밑에 시커므리한 곳에서 어쩌다 수선화가 노랗게 펴있는 거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 그늘 밑 시커먼 땅을 뚫고 네가 나왔구나, 싶어서 걔하고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는지 몰라요. ‘너 정말 애썼다. 기특하다. 정말로.’ 예전엔 겨울이라 복도에 들여다 놓은 자스민 한 송이가 펴서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계단 밑에서 자스민 향기가 얼마나 많이 퍼지는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화단도 가꾸신다면서요?
화단 정말로 예뻤는데. 우리 아들이 개를 좋아해요. 개도 조그만 개가 아니고 맹인견하는 레브라도 리트리버 같은 종이니까 걔네 들이 한번 화단을 왔다 갔다 하면요, 꽃들이 다 누워요. 그래서 아들하고 맨날 싸우다 싸우다 제가 포기했어요. 꽃보다는 아들이 중요하지. (웃음) 그래서 한번은 아침에 나가서 봤더니 밤새 개를 풀어놔서 꽃들이 다 짓밟혀 있길래 제가 부은 채로 앉아서 하도 울었어요. 그랬더니 “내가 다 다시 심어줄게.”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들이. 그래서 “다시 심는 게 문제가 아니야. 얘네들도 다 생명이 있고, 생각이 있어. 짓밟혔을 때 생각 좀 해봐.” 그리고 제가 어떤 시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개들을요. 돌아다니는 나무라고 생각하세요.” (웃음) 그래서 그 다음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돌아다니는 꽃이라고. 그 대신 정원은 황폐화됐어요.
OBS에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란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셨는데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질문하시는 모습이 어떤 인터뷰어라도 답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기분이 들더군요.
어머, 그걸 봤어요. 고마워요. 진짜. (웃음) 주철환 씨가 자꾸 그걸 하자고 했어요. 주철환 씨와 20대부터 친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할 수 있대. 그런데 제가 어떤 때는 ‘알았어, 할게요’ 그랬다가, ‘아니, 못해요’, 이걸 수 십번 반복했더니 나중에 내일 신문 보래. ‘주철환, 김혜자에게 배반당해 자살’ 이런 기사 날 테니까. (웃음) ‘진짜로 그러면 어떡하나. 에이, 설마.’ 이러면서도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한번 해보지 싶어서 했어요. 그런데 게스트 오시는 분들에게 항상 부탁하죠. “제가 원래 말하기도 싫어하는데 MC를 하라네요. 그런데 제 말을 못하니까 저 대신 재미있게 얘기 좀 많이 해주세요.” 이렇게 미리 부탁하고 그러니까 그 분들이 오히려 안쓰러워서 얘기를 더 많이 한 거죠. 물론 작가가 있었지만 그 작가가 적어준 건 이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거니까 그걸 참고만 하고 제가 아무 거나 되던 말던 물으니까. (웃음)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무장해제를 시키는 재주가 있다고. 그런데 그건 재주가 있다기 보단 그냥 궁금한 걸 물은 거에요. 끝나고 나니까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네요.
주철환 대표도 봉준호 감독처럼 김혜자 씨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낸 셈인데, 누군가가 자꾸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겐 때때로 놀라운 일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떨 땐 웃겨요. (웃음) 근데 난 주철환 씨가 한번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김혜자는 어머니 역도 잘 하는 배우다. 난 그렇게 써주는 게 좋아요. 무슨 제가 국민엄마에요, 국민엄마는. 솔직히 국민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아서 싫어요. 국민오빠, 국민 아버지, 왠 국민이 이리도 많은지. 이 역 저 역 다 잘하는데 엄마 역도 잘한다, 이런 평가가 더 감사하죠.
10년 만에 <마더>로 스크린에 복귀하셨으니 차후에 영화제의가 들어올지도 몰라요.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마더>가 아직도 꽉 차있기 때문에 충분히 앓고 난 다음에 이게 어느 정도 흥행이 돼서 어느 분께서 제의를 해주신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볼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누가 알아. (웃음)
그러니까 건강 검진도 꾸준히 받으셔야,
싫어. 병 있다 하면 어떡해. 아이, 귀찮아요. (웃음) 난 괜찮아. 우리 아들이 이러면 질색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난 별로 죽는 게 무섭지도 않고, 그냥 내 인생을 언제쯤 잘 끝맺었으면 좋겠어요. 그립다, 김혜자, 그 배우, 그렇게만 끝맺었으면 좋겠어. 일찍 죽고 늦게 죽고 이런 건 별로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그러면서 항상 작품을 하죠. 그리고 사실 몰라요. 진짜 내가 5분 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안담? 그런데 자꾸 이런 얘기하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이러다 백 살까지 살면 어떻게 하나? (웃음)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
지금 벌써부터 <마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반전, 반전, 하게 되는데 그 반전이라는 용어의 쓰임새가 이 영화의 결말을 정의하기 좋은 형태인지 의심스럽다. <마더>의 결말이 놀라운 건 사실이나 그게 극적으로 지속되는 분위기의 예상치를 배반하는 형태의 반전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 이건 말 그대로 의심되는 문제의 객관식 보기 가운데 가장 정답에 먼 형태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만큼이나 놀라운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반전에 목매지 말 것. 물론 결말에 대해선 최대한 눈 감고, 귀 막아라. 모르고 볼수록 온전히 재미를 체감할 가능성이 크므로. 물론 입도 닥쳐주는 센스는 잊지 마시고. 너만 재미있게 본다고 장땡은 아니다.
<마더>는 훌륭하더라. 애초에 신파란 예감은 안 했다. 봉준호가 그럴리 없다고 믿었다. 역시나 그랬다.시야는 넓어지고 관점은 깊어졌다. 무엇보다도 봉준호의 유희가 상당히 효과적인 저항이랄까. 전작들의 기시감도 보인다. 물론 답습의 수준이 아니고 고의적인 느낌이지만 상당히 참신한 복기랄까. 김혜자 선생님은 말할 필요도 없고, 원빈도 괜찮았다. 하지만 진구가 더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 윤제문을 비롯한 조연들의 공헌도도 대단하다. 어느 하나 간과할만한 캐릭터가 없다.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 좋다. 음악과 영상이 달라붙는 게 이거 참 묘기 수준이다. 상당히 고의적 연출 같긴 한데 그게 지나치게 의식적인 결과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병우의 음악 자체도 좋을 뿐더러 홍경표 촬영감독이 포착한 샷과 봉준호 감독의 연출과 잘 어우러진다. 리듬이 대단하다. 근래에 이병우 씨가 한쪽 귀에 장애가 왔다는데 꼭 완치되길 바란다. 만약 그가 음악을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영화계에서도 치명적인 손실이야. 어쨌든 <마더>는 대단하면서도 재미있는 영화다. 스토리의 탄력도 상당하고 영화적 이미지들이 하나같이 훌륭하다. 물론 결말이 충격적이지만 세상 모든 어미가 그렇지 않겠어, 란 설득력이 대단하다. 모성애라는 게 참 고결하지만 한편으론 지독한 것이라. <마더>는 어머니라기 보단 어미의 본능을 그린 영화다. 그만큼 동물적이고 극악하리만치 순수한 영화다. 지금까지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무겁고 음산한 영화다. 홍보팀이 삽질하는 것만 빼면 참 좋은 영화일 텐데. 시사회장인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라. 자리배정 계획은 대체 누가 세운 건지 경력이 의심스럽더라.
군중의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아래,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스팽글(spangle) 도시가 펼쳐진다. <도쿄!>의 오프닝은 미쉘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까지, 됴쿄를 바라보는 세 이방인들의 시선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선을 집약한다. 반짝거리는 빌딩 숲 사이를 가득 메운 갖가지 소음들로 들어찬 도시의 풍경 속에 숨어들어간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형체. 발들일 틈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하게 텅 빈 풍경. 인공 도시 안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단상들이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가늠할 수 없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도쿄!>는 이처럼 뚜렷한 형체가 짐작되지 않는 거대한 실체를 구상한다.
포문을 여는 것은 미쉘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다. 히로코(후지다니 아야코)는 자신의 애인인 아키라(카세 료)와 도쿄로 상경해 친구의 거처인 작은 쪽방에서 머무른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묻는 어느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깊은 우울에 빠져들던 그녀는 어떤 변신을 맞이한다. 공산품처럼 비슷한 크기의 방이나 줄지어 선 자동차보다도 가치가 앙상하다고 느끼는 히로코의 변신은 물질가치의 경도 속에서 스스로 퇴락을 경험하는 현대 도시인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그 불행은 유령처럼 인식되는 자신의 가치를 사물에 빗대어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가볍진 않지만 묵직하지도 않다. 수긍할만한 의도는 존재하지만 큰 감흥을 부르기엔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사물과 공간에 감성을 부여하는 미쉘 공드리 특유의 미술적 감각만큼은 탁월하게 구현된다.
1999년 작, <폴라 X>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은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도쿄 도심의 하수구에서 출현하곤 하는 정체불명의 광인(드니 라방)은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라지곤 한다. 광인은 도쿄의 하수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그 밑바닥엔 대동아 전쟁 시대의 잔재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대일본의 기저에 잠재된 군국주의적 욕망을 도시의 상하구조로 형상화하여 고발하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상흔에서 비롯된 공포와도 연동된다. 정체불명의 광인이 벌이는 폭력적 행위가 부르는 도심의 혼란은 패전국의 역사를 물려받은 일본인의 심리적 반작용을 자극한다. 마치 광인의 재판장은 전범재판소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한다. 광인은 일종의 망령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혹은 짐처럼 짊어진 일본인의 이중적 심리가 유령 같은 형체로 도사린다. 드니 라방의 거칠고 사나운 연극적 연기는 이런 심리적 형상을 끌어내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노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결말부는 둔탁한 맥락을 지닌 이 작품의 모호한 가치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은 다음 상대를 겨누기까지 한다.-메르드의 다음 모험은 뉴욕에서!-
말미에 등장하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와 팬시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9년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적막한 삶을 담담하게 인식하는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마주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를 통해 변화를 겪게 된다. 소품과 같은 상징성과 은유적 태도가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하지만 <흔들리는 도쿄>는 간결하면서도 단출한 테마가 짧은 시간에 잘 숙성된 작품이다.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편집증적 삶에 어지럼증과 같은 흔들림이 찾아온다. 폐쇄적인 안정에 갇혀있던 히키코모리가 우연히 외부와 접촉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은 실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체된 삶에 흔들림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정돈된 삶이 일사불란해진다. 도시의 유령은 비로소 삶의 윤곽을 확보한다. 히키코모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진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에 접속한 봉준호 감독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능숙한 연출력으로 잘 포장된 작품이다.
연출자의 개성이 적극 반영된 개별적 결과물들은 형태적으로 불균질한 패키지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맥락은 도쿄라는 유령이다. <도쿄!>의 세 작품은 도쿄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해 도쿄라는 특수한 이미지를 완성하지만 그것은 도쿄의 실체가 아니다. 그 지점에서 <도쿄!>가 어느 정도 통찰력을 검증 받은 개인의 해석적 관점을 수집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만큼 그것은 보편적인 심리를 아우르는 대신 특별한 시야를 확보한다. 누군가가 문득 느꼈을, 혹은 느낄만한 도시의 단상이 심중하거나 재기 발랄하게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바탕으로 한 기획은 그 도시에 대한 어떤 관심을 볼모로 한다. 그런 점에서 과연 현재 서울이란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