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부터 ‘랄프로렌’이나 ‘갭’과 같은 의류 브랜드를 비롯해서 ‘버버리’의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한 바 있는 ‘훈남’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건 딱히 놀라운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알렉스 페티퍼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엿보인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로버트 패틴슨이나 <해리포터>시리즈의 다니엘 래드클래프가 그러하듯이,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젊은 배우들은 대부분 특정한 캐릭터의 옷을 입고 태어난다. 페티퍼는 올해 초에 차례로 개봉된, <아이 엠 넘버 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외계인 초능력자로 분한 뒤, <비스틀리>에서 잘생긴 외모를 되찾고자 사랑을 갈구하는 추남으로 변신한 페티퍼는 혜성과 같은 등장을 뛰어넘어 상한가를 달리고 있는 신예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SF스릴러물 <나우>(2011)에서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함께 이름을 올린 페티퍼는 올해 또 한번 새로운 면모를 과시할 전망이다. 어메이징한 영 건, 알렉스 페티퍼를 기억하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된 독일 영화계는 ‘오버하우젠 선언’이라 불리는 뉴저먼시네마의 시대를 주창한다. 전통적인 공업도시 오버하우젠은 필름의 혁명 지대로 거듭났다. 그리고 서독단편영화제에서 출발한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는 올해로 57회를 맞이하는 최장수 국제단편영화제로서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데이비드 린치 등, 영화적 혁명을 지지하고 발굴해 왔다. 5일부터 10일까지, 40개 국가에서 모인 470편의 새로운 혁명이 공개된다.
다채로운 재료 본연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주비빔밥의 고장, 한국의 전주는 매년 4월마다 각양각색의 입맛을 지닌 시네마키드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자유, 소통, 독립’의 슬로건을 내건 전주국제영화제는 인디 필름과 디지털 시네마를 위시한 새로운 영화적 발견의 장을 전통적인 한옥의 도시 전주에 마련했다.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12회를 맞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신선한 영화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디즈니의 공주로서 화려한 데뷔식을 치룬 앤 헤서웨이는 궁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성장통을 헤치며 길을 닦아왔다. 이제 그녀 앞에 길은 열려 있다. 방향을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수룩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을 지닌 소녀 미아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네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았다는 그 백조처럼 사회지도층 왕가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소녀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뒤바뀐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은 할리우드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앤 헤서웨이는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 헤서웨이의 첫 번째 영화로 공개된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가 그녀의 무명 시절을 하루 아침에 지워버린 셈이다.
뉴질랜드의 <천국의 맞은 편>(2001) 촬영장에 있던 헤서웨이가 오디션을 위해 태평양을 건넘으로써 그녀의 첫 번째 전환점이 마련됐다. 미약한 경력을 지닌 헤서웨이가 디즈니 공주의 왕관을 하사 받은 건 누구보다도 커다란 눈과 시원한 미소를 자랑하는 미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처음치고는 괜찮은 경력이 있었다. 1999년, 폭스TV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겟 리얼>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선 16세의 헤서웨이는 이듬해에 영 아티스트 어워드의 TV시리즈 최우수연기자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하지만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연출한 게리 마샬이 단 한번의 오디션으로 헤서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오디션 도중 앤이 의자에서 넘어졌고 이로 인해 캐스팅을 결정했다.” 미아 역을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여자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필요했다. “본래 나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헤서웨이가 바로 그녀였다.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된 헤서웨이 역시 성장통을 건너야 했다. 디즈니의 공주가 되어 화려한 유명세를 드레스처럼 걸쳤지만 이는 점차 그녀를 불편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2>(2004)의 촬영 일정으로 인해 헤서웨이는 출연 성사를 목전에 뒀던 <오페라의 유령>(2004)을 포기해야 했다. 학창 시절 소프라노로 활동한 바 있는 그녀에게 이는 마치 목소리를 잃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겐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전부였고, 이는 당시 내 경력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엘라 인챈티드>(2004)와 <프린세스 다이어리 2>와 같이, 밝고 건강한 미소를 요구하는 가족영화들 속에 갇힌 헤서웨이의 갈증은 점차 심화됐다. 또 한번의 공주 놀이를 마친 헤서웨이는 <하복>(2005)에서 자신의 발랄한 이미지에 욕설을 퍼붓듯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에서 노출 연기와 베드신을 선보인 그녀의 행보는 연기의 질을 떠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질풍노도의 일탈이 아니었다. 발랄한 공주로 박제처럼 남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내가 창조해낸 어떤 것보다도 그 영화가 더욱 자랑스럽다.” 여기서 헤서웨이가 경의를 표한 그 영화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다. 두 남자의 애틋한 멜로드라마인 이 작품은 그녀에게 역할의 크기와 반비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치장했던 젊은 날을 지나 결혼 뒤, 가난에 치여 거칠고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여인의 삶, 헤서웨이의 연기는 지난 날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앤디를 통해 그런 자신감은 구체화됐다. “그건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어떻게 어른답게 선택하는지, 희생의 유무가 어떤 후회를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결과적 차이를 배우는 일이었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서의 고단한 일상이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헤서웨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을 연기해낸다. 점차 패셔너블해지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헤서웨이에게는 몸매관리가 필요했고, 그 탓에 “배가 고파서 에밀리 블런트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지만 이 작품으로 헤서웨이는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던 메릴 스트립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는 건 그녀에게 더 없는 행운과도 같았다.
성취는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다.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랑을 그린 <비커밍 제인>(2007)은 현대판 신데렐라로 익숙한 헤서웨이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 영화가 자신을 위한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의 권유로 마음을 돌린 그녀는 제인 오스틴을 자신에게 맞는 맞춤복으로 완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를 연습하고, 방언을 공부하며 고전적인 우아함에 사실성을 새겨 넣고자 했다. 스티브 카렐과 함께 한 첩보물 코미디 <겟 스마트>(2007)에서 액션까지 소화하는 팔방미인으로서 헤서웨이의 경력은 점차 다채로운 색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2009년, 헤서웨이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는 여인이 누나의 결혼식에 참여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레이첼, 결혼하다>(2008)에서 헤서웨이의 연기는 변신이라는 수사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진화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영화로 인해 생애 처음으로 흡연을 경험한 헤서웨이는 단지 방탕한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짜 몰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의 딜레마와 이로 인해 얻은 상처들로 앙상해진 여인의 지독한 트라우마를 표출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하얀 여왕은 헤서웨이가 팀 버튼의 기괴한 세계관조차 어울리는 배우로 자라났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로 또 한번 제이크 질렌할과의 연기적 궁합을 과시하는 <러브&드럭스>(2010)에서는 파격적인 노출 연기조차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갖춘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언제나 10대가 지나면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건 내게 대단한 변화였다.” 배우는 경험을 입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새로운 경험을 갈아입는다. 헤서웨이는 지금 옷장 앞에 서있다. 자신의 성장에 걸맞은 새로운 옷을 고르고 있다.
빅토리아 항구와 인접한 홍콩섬 북부 지역은 홍콩의 신흥 지역이다. 어퍼하우스는 홍콩의 새로운 중심에서 최상을 자부하는 히든 플레이스다. 당신이 꿈꾸던 홍콩은 거기서 시작된다.
어디론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자가 원하는 ‘새로움’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지금껏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 하지만 홍콩이라는 도시는 이와 다른 차원의 만족을 위한 공간이다. 한두 번 이상은 관람했을 법한 홍콩영화 속의 풍경들이 이 좁은 도시 곳곳에서 데자뷰처럼 당신을 맞이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몇몇 장소들은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기 마련이다. 소위 ‘홍콩 간다’는 말처럼, 홍콩행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건 자신이 꿈꾸던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보겠노라는 의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낯선 이들에게 치이며 보낸 하루 동안의 피로를 해독하기 위한, 최소한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할 수 있는 나만의 휴식처를 찾아내야만 한다.
마천루를 자랑하는 홍콩에서도 홍콩섬의 빅토리아 항구와 인접한 빌딩들은 거대한 스카이 라인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장관을 지지하는 퀸즈웨이에 자리한 ‘퍼시픽 플레이스’는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아이코닉한 쇼핑몰이다. 덕분에 퍼시픽 플레이스 주변에는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최고급 신흥 호텔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다국적 기업 스와이어 그룹에서 설립하고 홍콩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앙드레 푸가 디자인한 ‘어퍼하우스’는 최근 1년여 사이 홍콩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최고급 부티크 호텔이다. JW 메리어트 홍콩 호텔과 한 빌딩을 공유하지만 ‘더 높은(upper)’ 상층부를 차지하는, 이름 그대로 어퍼하우스인 셈이다.
만약 입구 주변에 걸린 거대한 원형의 예술품을 지나쳤다면 다시 한번 이를 주목해 보자. 이는 한국인 조각가 최태훈이 만든 예술품이다. 사람 인(人) 자가 얼기설기 모여 원을 이룬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류의 ‘숲(Forest)’이자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투숙객들이 이룬 또 하나의 세계, 어퍼하우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첫 인사다. 어퍼하우스는 이와 같이 아시아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예술품들로 콜라보레이션을 이룬 거대한 전시관이자 입구부터 최상층의 레스토랑까지, 여행자들을 위한 정화의 의식으로 구상된 거대한 예술품이다. 특히 호텔 곳곳에 놓인 둥그렇고 매끄러운 돌 조각들은 순탄한 여정을 기원하듯 마음을 안온하게 도닥인다.
어퍼하우스가 정의한 ‘시적인 오르막 여정(A poetic upward journey)’은 지상보다 높은 곳을 향함으로서, 일상으로부터 탈피한 여행의 가치로 나아가길 바라는 의식이다. 이는 마치 세속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숙소의 정취 속에 머무르는 호시노야 료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입구를 지난 당신을 맞이하는 건 거창한 리셉션 대신 간소한 프론트의 직원들이다. 그들이 한 손에 든 아이패드는 어퍼하우스가 자랑하는 유니크한 아이템이다. 각 방에 비치된 아이팟과 연계되며 이를 이용하는 투숙객들은 자신의 요구를 일일이 직원에게 설명하는 수고를 덜어낼 수 있다.
짐을 풀고 두 다리를 뻗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당신은 긴 터널과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야 한다. 여행자가 맞이할 여행의 덮개를 벗겨내듯, 어퍼하우스에 들어서기 위한 기다림을 지나면 비로소 편안한 쇼파들이 놓인 로비에 당도한다. 입구에서 본 원형의 구조물이 나무처럼 자라난, 비로소 당신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축하하는 또 다른 작품에 고무되는 기분이 느껴진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바로 옆에 놓인 문을 열고 나간다면 거대한 빌딩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듯 숨어 있는 ‘시크릿 가든’을 만날 수 있다. 작고 아담한 이곳은 당신의 여정에 동참하는 이와 함께 찾아야 할 작은 휴식처다.
홍콩의 어느 호텔보다도 너른 공간을 제공하는 어퍼하우스의 룸에서는 홍콩섬의 너른 풍경 또한 감상할 수 있다. 호텔의 홍보 담당자인 미쉘 라우는 구체적으로 어퍼하우스가 ‘3차원의 시야(three-dimensional view)’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숲(Green), 도시(city), 바다(harbor)까지, 홍콩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행선지를 고민할 어떤 투숙객들에게 이 호텔이 중계하는 모든 풍경들은 처음 마주하는 홍콩의 혜택일 것이다. 이 세 종류의 풍경들은 어퍼하우스가 홍콩 여행에 있어서 얼마나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대변하는 예시로서도 유용하다. 영국식 정원을 옮겨온 듯한 홍콩 공원과 빅토리아 항구, 그리고 빌딩숲까지, 어퍼하우스는 홍콩섬에서 주워담아야 할 풍경들을 병풍처럼 두른 전망대다.
세 종류의 규모로 나뉜 어퍼하우스의 117개 룸들은 세련된 인테리어와 최신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공간이다. 결이 살아있는 원목 재질의 벽에는 장식과 같은 손잡이들이 있으며 이를 잡아당기는 건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리본을 푸는 것과 같다. 여행에 있어서 목욕이란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의식이다. 커다란 창을 통해 풍요로운 정경이 전달되는 욕실의 욕조에 누워 피로를 희석시킨다는 건 마치 호화로운 도시를 홀로 점하듯 설레는 일이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바디용품 브랜드 REN의 어메니티를 구비한 어퍼하우스는 여행용 물품으로 채운 파우치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방 안에 놓인 개인용 바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맥주와 음료수, 커피와 간식거리까지, 모든 것이 당신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스카이 라운지나 다름 없는 그곳에서 마음껏 맥주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무엇보다도 근사한 일이다. 가능하면 방안의 모든 것들을 만지거나 열어봐야 한다. 곳곳에 숨겨진 크고 작은 깜짝선물을 확인하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보다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장관들을 소유하고 싶다면 ‘카페 그레이 디럭스’로 올라가 보자. 어퍼하우스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49층 정상에 자리한 이 곳은 어퍼하우스가 자랑하는 최상의 서비스다. 한쪽에는 오픈 키친의 레스토랑이, 한쪽에는 바가 자리한, 이 공간은 반짝이는 금장 장식과 물결 무늬의 단아한 원목들이 대비적으로 어울리는, 화려하고 온화한 인테리어의 역동적인 인상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정상급 셰프 그레이 쿤즈의 손으로 빚어낸 카페 그레이 디럭스가 2011년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한 개를 얻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주문하게 될 어떤 음식도 당신이 실망시킬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조언이다. 아침 식사가 뷔페식이 아닌 주문식이라는 것도 특별하다. 애프터눈티는 기본이다. 창을 통해 와이드하게 펼쳐지는 홍콩의 전경이 이른 아침에서 늦은 밤까지, 카페 그레이 디럭스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갈아 입힌다. 진미에 풍경을 곁들여 식사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다.
약간의 발품과 기다림을 감내할 수 있는 당신은 어퍼하우스의 인근에 있는 가든로드 피크트램 터미널에서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의 피크트램을 체험한 뒤,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도 좋다. 그곳에서 당신은 홍콩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볼 수 있다. 쇼핑의 천국 홍콩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얼마든지 지갑을 열 준비가 된 당신에게도 어퍼하우스는 분명 최적의 입지다. 호텔 문을 나선 뒤, 길 건너편에 있는 퍼시픽 플레이스의 출입구로 들어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각종 의류 매장들이 즐비하게 펼쳐진다. 인파의 행렬에 휩쓸리듯 자신만의 아이템을 찾기 위한 분주한 경쟁에 시달리듯 공격적인 쇼핑을 감내해야 하는 홍콩의 대형쇼핑몰들과 달리 퍼시픽 플레이스는 넉넉한 보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여유롭다. 3층으로 이뤄진 쇼핑몰은 각층마다 취향을 배려하듯 정돈된 덕분에 동선의 편의가 느껴진다는 것도 좋은 이점이다. 쇼핑 명소가 즐비한 완차이나 침사추이도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퍼하우스는 하루 동안의 여정으로 짜릿해진 감각을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는 안식처다. 홍콩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얻고 싶다면, 홍콩의 중심에 자리한 어퍼하우스를 소유하라. 당신의 감각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홍콩의 히든 플레이스가 거기에 있다.
Recomender
퍼시픽 플레이스 상층부에 자리한 부티크 호텔. 아이팟으로 직접 체크인&아웃은 물론 다양한 룸서비스 주문이 가능하다.
Rooms 117(including 21 suites and 2 penthouses)
Bar and Restaurant Café Gray Deluxe
Facilities Gym, hybrid cars for airport transters and private hire, secondly lawn space and private events, Paperless arrival and departure experience
Features Complimentary In-room bar and espress machine,free Wi-Fi internet, LCD TV with 2.1 surround sound with simple connectivity for PC, Ipod touch,
지난 해 혜성처럼 등장한 캐리 멀리건은 일찍부터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한때 조바심을 냈던 것도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던 탓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꽃이 피어 오르듯, 재능이 만개한다.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두는 2009년 작인 <아바타>와 <허트 로커>가 벌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배우 관련 부문만큼은 두 영화의 세력 다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특히 만년 여우주연상 수상 후보인 메릴 스트립과 헬렌 미렌을 제치고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한 산드라 블록은 수많은 말을 몰고 다녔다. 그리고 시상식 이전부터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던 배우가 있었다. “캐리 멀리건, 스타가 탄생했다.” 첫 주연작 <언 애듀케이션>(2009)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얻어낸 캐리 멀리건은 <타임>매거진의 헤드라인처럼 놀라운 발견이었다.
1985년생, 그러니까 이제 20대 중반을 통과한 멀리건의 이력이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만과 편견>(2005)에서 키티 베넷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할 당시만 해도 멀리건은 딱히 대중의 눈길을 끄는 존재는 아니었다. <언 애듀케이션>을 연출한 론 쉐르픽의 말처럼, “그와 같은 속도로 대단히 유명해질 수 있다는 건 특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쉐르픽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난 멀리건은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매니저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세 살의 멀리건은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도버해협을 건넌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뒤셀도르프는 전세계의 사람이 모여 드는 국제적인 공업도시였다. 그녀가 네 살에 입학한 뒤셀도르프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Dusseldorf E.V.)는 서로 다른 50개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곳은 그녀가 배우로서의 오늘에 다다르는 시작점이었다. 2년 뒤, 멀리건은 교내 연극무대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그녀의 오빠 오웬이 출연한 <왕과 나>에 참여하길 원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어렸던 그녀에게 허락된 건 코러스 석뿐이었고 어린 그녀는 화를 삼킨 채 그 자리에서 무대를 지켜봤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그게 내가 연기를 원하게 된 전부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의 다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필요했다. 후에 다시 가족과 함께 런던의 하이드 파크로 돌아온 멀리건은 자녀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길 원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영국의 명문 가톨릭 여자사립학교인 올딩엄 스쿨(Woldingham School)에 입학한다. 호텔 매니저로서, 대학 강사로서, 바쁜 일상을 보낸 탓에 멀리건의 일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부모에게 기숙사 제도를 지닌 이 학교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비비안 리나 모린 오하라와 같은 여배우를 배출하기도 한 이 학교에는 훌륭한 드라마 부서가 있었고 멀리건은 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자양분을 마음껏 쌓아나갔다. 다른 수업을 무시하듯 오로지 연기에 몰두해 나간 그녀는 <크루서블>이나 <스위트 채러티> 등과 같은 고전 연극 무대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멀리건을 지도한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그녀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옳은 기질과 성공을 향한 투지도 지니고 있었다.”
멀리건의 부모는 그녀가 명문대에 진학해서 학구적인 직업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연기자로서의 미래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성공이 멀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기 전공을 꿈꾸던 그녀는 부모 몰래 선술집에서 돈을 벌며 연기 전공이 가능한 대학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세 번의 불합격 통보였다. 그리고 더욱 암담한 것은 그런 그녀의 비밀을 어머니가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간절한 희망이 묘비에 새겨진 유언처럼 허망해지듯 그녀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올딩햄 재학시절, 멀리건은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각본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줄리안 펠로위스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여교장이었던 다이애나 버논의 친구였던 그는 멀리건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가 쏟아내는 대단한 연기적 열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 후, 버논을 통해 냉담한 충고를 전했다. 내용인즉, 은행원과 결혼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멀리건과 펠로위즈와의 만남은 악연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멀리건은 버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버논은 다시 한번 펠로위즈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달했다. 결국 펠로위즈의 가족식사에 초대받은 멀리건은 자신의 열정을 다시 한번 토로했다. 이는 헛되지 않았다. 펠로위즈의 부인인 레이디 엠마는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오만과 편견>의 제작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제작진에게 멀리건을 소개했다. 조 라이트는 멀리건에 대한 첫인상을 이처럼 말한다. “그녀가 왔고, 훌륭한 캐스팅 멤버였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줬다.” 멀리건의 오랜 집념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출연을 확정 지은 멀리건은 로얄 코트 극단에 입단하며 무대 데뷔를 이루고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며 연기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마련해 나갔다. 같은 해, BBC에서 TV시리즈로 제작한 찰스 디킨스 원작의 <황폐한 집>에 캐스팅될 때까지도 무대에서 거듭 연기를 이어나갔다.
“19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진짜 적절한 관계를 얻지 못했다. 루저 중의 하나였다고 할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는 그녀가 이 캐스팅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이해해줄 ‘관계’의 성립에 고무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재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작은 역할을 거듭하던 그녀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더 그레이티스트>(2009)의 출연을 통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기억될만한 기회를 얻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의 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제작자와 세 번에 걸친 만남의 시작이 바로 그 선댄스영화제였던 것이다.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대로 성공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에 비유된 그녀의 주가는 올라갈 차례만 남겨두고 있었다. 같은 해 제작됐던 <브라더스>와 <퍼블릭 에너미>에서 작은 역할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브리티쉬 인베이전’이라 불릴만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거치며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 올리버 스톤의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와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는 멀리건의 새로운 입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특히 데뷔작 <오만과 편견>에서 주연을 맡았던 키이라 나이틀리와 또 한번 함께 출연한 <네버 렛 미 고>는 불과 5년 사이, 멀리건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증명하는 대조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그녀가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놀라운 직업을 얻었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이는 매우 멋진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즉시 그 느낌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에게 연기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재능이 만개할 그 순간을 인내했다. 바로 지금, 그녀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재능이 여전히 만개하는 중이다.
리부트를 결정한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발탁된 건 앤드류 가필드였다.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새로운 연출자로 선정된 마크 웹은 말한다. "비록 그의 이름이 아직 낯설겠지만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이해할 것."2007년, 가필드는 첫 주연작 <보이 A>에 출연한 뒤, <로스트 라이언즈>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버라이어티>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 10인’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자신의 경력에 자랑스러운 초석을 세웠다. “내 모든 목표는 단지 내 스스로 표현하길 허락 받는 것이었다.”그는 대단한 갈망만으로 희망을 이룰 수 없음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성과는 15살부터 무대에 오르며 연기적 가능성을 닦아온 노력의 산물이었다. 지난 해에 공개된 <소셜 네트워크>와 <네버 렛 미 고>에서 모든 건 확실해졌다. 그가 자신의 재능으로 이름을 닦아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앤드류 가필드는 빛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은 유럽 최대의 무역항으로 꼽히는 항구도시다. 매일 같이 수많은 이국인들이 오고 가며 새로운 문화를 교류하는 이곳에서는 매년 1월 ‘유럽의 선댄스’라고 불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로테르담 영화제는 혁신적인 재능을 발굴하는 ‘영화의 신대륙’으로서 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에도 캐나다 영화계의 새로운 피로 꼽히는 자비에 돌란의 <하트비트>가 개막작으로 상영되는 1월 26일부터 2월 6일까지, 재능의 발견이 이어진다.
‘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15살의 나이로 데뷔한 캐서린 헤이글은 변변치 않은 스크린 출연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기회는 찾아왔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TV시리즈 <로스웰>에 출연하게 된 것. 하지만 헤이글의 이력에서 결정타가 된 건 그녀를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린 <그레이 아나토미>였다. “지금 나는 5년 전과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느낀다"는 말처럼 그녀는 불과 몇 년 사이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다른 삶을 얻었다. 첫 주연작 <27번의 결혼리허설>(2008)을 통해 백치미를 발산한 그녀는 <어글리 트루스>(2009)나 <킬러스>(2010)에 거듭 출연하며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자신의 유리구두가 깨질까 조바심내지 않는다. “당신의 세계는 변할 수 있고 삶의 모든 양상은 다르다. 그러니 더 나은 것을 위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긍정'을 신고 현실을 걸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