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프랭코는 수많은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다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빠르고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점유해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를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궁극의 에너지원이다.
영광은 일찍 찾아왔다. TV영화 <제임스 딘>(2001)의 타이틀롤을 맡은 제임스 프랭코는 전설적인 미남 스타가 남긴 여운을 재현하며 ‘제2의 제임스 딘’이란 호평을 얻었고, 골든글로브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이는 그를 메소드 연기의 포로로 만들었다. 로버트 드니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시티 바이 더 씨>(2002)에서 마약쟁이를 연기하기 위해서 중독자들과 몰려다니며 길거리를 전전했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출 데뷔작 <소니>(2002)를 준비하고자 게이 스트립 클럽에 드나들며 스트리퍼들의 행위와 습성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자 오디션을 봤지만 결국 해리 오스본 역으로 캐스팅된 <스파이더맨>(2002)은 그의 전세계적인 출세작이 됐다. 하지만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완성하기까지 5년 동안 프랭코가 이룬 경력들이란 대부분 무색한 것들이었다.
“연기가 내 전부였을 때, 스스로에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거듭 말하면서도 내 연기가 나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세 편의 출연작이 공개됐던 2006년은 프랭코에게 있어서 대단한 실망을 안긴 한 해였다. <라파예트>를 준비하며 비행조종사 자격증까지 얻은 그는 <아나폴리스>를 위해서 8개월 간 링에서 복싱을 배웠고, 검술을 연마한 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출연했다. 결과적으로 이 세 작품은 흥행과 비평의 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영화가 잘 되면 행복했고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났다. 배우로서 어떻게든 완성된 결과물에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날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그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외의 결단을 내린다.
2006년 프랭코는 부모의 바람을 등지고 10년 전에 자퇴했던 캘리포니아의 UCLA로 다시 돌아가서 철저하게 학업에 매진했다. 주전공인 문학과 창작뿐만 아니라 과학론, 프랑스어 등 다양한 학문들을 집어삼키듯 공부해나갔고 끝내 62학점을 이수했다. UCLA 수료 후, 프랭코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서 세 개 대학을 옮겨 다니며 문학과 영화, 극작을 공부한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 당시에는 잠시 시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수학은 촬영장에서도 이어졌다. <스파이더맨 3>(2007)를 촬영하는 세트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밀턴과 제프리 초서의 시를 읽었고,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를 촬영하며 16세기 영국 문학을, <밀크>(2008)의 세트장에서는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메소드 연기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연기적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
주드 아패토우가 제임스 프랭코를 처음 본 건 12년 전이었다. 아패토우는 의아했다. 멀쩡하다 못해서 여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끌어낼만한 매력적인 20대 청년이 어째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일까. 아패토우는 당시 TV시리즈 <프릭스 앤 긱스>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부연하자면, <프릭스 앤 긱스>는 제목 그대로 괴물과 괴짜 같은, 문제아들과 얼간이들로 이뤄진, 덜 자란 아이들의 모자란 일상을 엿보는 너드 코미디물이었다. 그러니까 아패토우는 그가 이 작품에 출연을 희망한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프랭코는 원작자인 폴 페이그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있는 미시간까지 날아가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조사했다. 그런 그를 보고 모두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저주 받은 컬트 코미디로 여전히 회자되는 <프릭스 앤 긱스>에 출연하며 주드 아패토우 사단의 웃기는 사내들과 맺은 인연은 결국 대단한 밑천으로 돌아왔다. 이 잘생긴 배우를 가장 고전하던 시기로부터 구원한 것이 바로 그 아패토우 사단의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였다. 세스 로건과 아패토우가 건넨 시나리오를 받아 든 프랭코는 하루 종일 약에 찌든 채 허허실실하며 얼간이 짓을 해대다가 진창 같은 상황 속으로 굴러들어가는 마약상 사울을 연기하며 새로운 연기적 자아를 얻었다. 치열한 준비 과정과 진지한 캐릭터를 도맡았던 지난 경력들과 달리 반쯤은 맛이 간 너드 역할이 일으킨 대단한 반향은 프랭코의 가치관을 흔들었다. “거기에는 많은 자유와 즉흥성, 창의성이 있었고 다른 이들의 조언이 수렴될만한 여지도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밀크>(2008)에서 하비 밀크의 애인 스콧 스미스로 등장한 프랭코는 그 뒤로도 <하울>(2010)의 비트제너레이션 작가 앨런 긴스버그 역으로 동성애자 역할을 맡았다. 이 두 독립영화는 동성애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실존인물을 극화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프랭코의 성정체성에 대한 루머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되레 프랭코는 이런 반응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반규범적인 생활양식 대로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반대 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저 내가 게이일 거라 안다 해도.” 프랭코는 연기를 벗어나서 자신의 행위 자체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거대한 예술적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2009년 9월부터 낮 시간에 방영되는 3류 연속극 <제너럴 호스피털>에 프랭코라는 동명의 인물로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상호연관관계와 그것이 작품의 안팎으로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탐구적 흥미를 직접 칼럼으로 써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잠정적으로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새로운 가능성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걸 잘 점령했다. 기적에 가까운 연기였다.” 협곡 사이로 미끄러지다 떨어져 내린 돌에 팔이 끼어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탈출한 아론 랄스턴의 실화를 영화화한 <127시간>(2010)의 대니 보일은 프랭코를 극찬했다. 비행기를 타고 뉴욕과 촬영지를 오가며 연기한 그는 틈나는 대로 마르셸 프루스트를 읽어가면서 바위 사이에 갇힌 한 남자의 고립된 감정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이 연기로 첫 오스카 후보에 오른 프랭코는 애파토우 사단의 코믹 판타지물 <유어 하이니스>(2010)로 한숨을 돌리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으로 오랜 시리즈의 기원을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
최근 예일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이수한 프랭코는 뉴욕대에서 시를 영화로 변환하는 강의를 맡았다. 지난 해에는 단편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연기 외에도 연출에 관심이 많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1955)에 출연했던 살 미네오에 관한 작품을 연출하고 베니스 오리종티 부문에 출품했다.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도전이며 그 도전들은 보람이고 즐거움이다.” 그는 안주하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즐기는, 정의할 수 없는 에너지를 지닌 배우, 그가 제임스 프랭코다.
엠마 스톤은 TV시리즈 <히어로즈>의 오디션장에서 캐스팅 감독이 경쟁 배우에서 전한 말을 엿듣고 완전히 ‘밑바닥’에 떨어졌다. “10점 만점에 자네는 11점이야.”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스톤은 11살 무렵부터 무대에 오르며 자신을 단련시켰다. 꿈은 이루어진다. 스톤은 영화 데뷔작 <슈퍼배드>(2007)로 수면 위에 떠오른다. 우디 해럴슨과 함께 출연한 코믹 호러물 <좀비랜드>(2009)는 결정타와 같았다. 전기톱을 들고 좀비들을 썰어나가는 당찬 헤로인의 모습에 대중과 평단은 열광했다. <이지 A>(2010)로 주연을 꿰차며 당찬 이미지를 어필한 그녀는 성공적인 평가 속에서 자신 있는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올해 미국 내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에 오른 유일한 영화가 된 <헬프>(2011)로 성숙한 연기력마저 과시했다. “오로지 자신감이 열쇠다.” 그녀는 그 자신감으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엠마 스톤이 진정 대세다.
오는 11월 9일부터 20일까지 제22회 스톡홀름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스톡홀름 국제영화제는 북유럽 최대 규모의 필름 축제다.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2011)를 비롯해서 50여 개 국가에서 모인 160편 이상의 작품들이 ‘북방의 베네치아’ 스톡홀름의 스크린을 수놓는다. 이번 영화제는 프랑스의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위한 평생공로상을 마련했다. 이를 기념하듯 스톡홀름으로 날아든 전세계의 유려한 필름들이 백야의 축제를 장식한다.
브래드 피트는 이제 할리우드의 큰 손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로서 자신을 채워줄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다. 성숙한 자유주의자, 브래드 피드는 여전히 새로운 세계와의 교감을 꿈꾼다.
“그건 테니스와 비슷하다. 당신보다 나은 누군가와 게임을 할 때, 당신의 게임도 더 나아지는 거지.” 브래드 피트의 말처럼, 그에게도 어느 감독의 디렉션이, 어느 배우의 액션이, 조코비치의 강서브를 받아내야 하는 어느 무명 선수의 찰나처럼 버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명확한 리액션으로 리턴하기에는 역부족인 시절이 피트에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 나아지리라 믿는 쪽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게 날 부끄럽게 만들지.” 그는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피트는 촌구석이나 다름없는 오클라호마의 스프링필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피트가 보수적인 침례교도들로 득실거리는 그 촌동네를 견딜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대학시절까지 몸을 담았던 스프링필드를 벗어나 할리우드로 건너온 뒤에 겪었던 갖은 고생담들, 이를 테면 닭머리 인형탈을 쓰고 선셋대로의 레스토랑 앞에서 호객 행위를 했다는 등의 사연은 언젠가 그가 집필할 지도 모를 자서전의 좋은 소재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선셋대로에서 거품 같은 욕망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어떠한 밑천도 없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타고난 외모는 배우에게 있어서 선천적 재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트의 밑천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고된 아르바이트로 꾸린 일상을 배우로서의 미래에 투자하던 피트가 단역을 전전하다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한 계단 올라선 것도 바로 이 선천적 재능 덕분이었으니까. 조지 클루니와 경합을 벌인 <델마와 루이스>(1981)의 오디션장에서 피트가 선택된 건 그의 탄탄한 몸매 덕분이었다. 사실 근사한 외모로부터 기인하는 매력은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를 설명하는 오프닝 시퀀스와 같다. <피플>을 비롯한 유수의 매체가 그를 최고의 섹시스타로 선정했다. 하지만 피트의 섹시함은 온전히 외모의 공이 아니다.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의 고독한 기질과는 다른, 보다 원초적인 반항적 혈기가 피트에게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1992)과 <가을의 전설>(1994)은 피트를 알리는데 공헌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는 할리우드에서의 생존을 위한 연기적 전시를 연마하는 스파링 파트너에 가까웠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이후, 피트는 말했다. “완전하게 이를 경멸했다. 내 캐릭터는 시작부터 끝까지 밑바닥에 있었다.” 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자의식이 있었다. <칼리포니아>(1993)의 날 것 같은 연기는 그런 잠재력을 드러내는 한 뼘이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핀처는 그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위한 무대를 구상할 줄 아는 최적의 디자이너였다. 일곱 가지 죄악으로 예고되는 살인을 수사하는 젊은 형사 밀스로 출연한 <세븐>(1995), 반사회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선동하는 파이트 클럽의 수장 테일러 역을 맡은 <파이트 클럽>(1999), 핀처의 두 작품은 당시의 피트를 위한 최고조의 실전이었다. 특히 <파이트 클럽>의 테일러는 피트가 지닌 가능성의 극단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피트는 종종 성공과 명예를 경계하고 부정했다. “성공은 괴물이다. 그건 실제로 엉뚱한 것을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욕심만 늘어간다.” 핀처는 피트의 그림자를 명확하게 간파했다.
핀처의 두 작품을 잇기 위해서 피트는 몇 편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12 몽키스>(1995)도 그 중 하나였다. 피트는 떠버리 같은 분열적인 캐릭터로 등장한 이 작품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이 리치의 <스내치>(2000)는 이를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협잡꾼들의 얽히고 설킨 복마전 속에서 유일하게 스트레이트한 일관성을 지닌 원 펀치 미키로 분하는 피트는 캐릭터의 직선적인 성격을 통해서 상황과 대치되는 유머를 자아낸다. 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는 피트의 코미디 감각을 제대로 건드렸다. 조지 클루니를 필두로 맷 데이먼, 줄리아 로버츠 등 할리우드의 간과 쓸개를 빼먹었다 해도 좋을 만한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오션스 일레븐>(2001)에서 그는 유머의 한 축을 이룬다. <오션스 트웰브>(2004)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더 이상 할리우드에 수혈된 새로운 피가 아니었다. 심장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는 주목 받는 화제작이었다. 이는 피트의 인생을 뒤흔든 운명이 됐다. 한때 숱한 스캔들로 타블로이드를 지배한 바 있던 그였지만 안젤리나 졸리와의 만남은 제니퍼 애니스톤과의 이혼을 결심할 만큼 강력했다. 스미스 부부로 출연한 졸리와 피트 커플은 점차 브란젤리나로 불리기 시작했고, 익숙해졌다. 피트의 행보도 달라졌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이후, 그는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는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플랜B의 첫 작품이었다. 이듬해 아카데미는 감독상과 작품상의 영광을 <디파티드>에 안겼다. 연기적 행보에도 변화가 발견됐다. 피트는 <바벨>(2006)과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7)로 각각 칸과 베니스 레드카펫을 밟았다. 베니스에서는 남우주연상을 선물 받았다. 할리우드의 아이콘을 넘어서 세계적인 배우로서의 지위와 명예를 얻은 것이다.
피트는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거물이다. 그의 행보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2008년에는 코엔 형제의 <번 애프터 리딩>과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2009년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그의 경력에 추가됐다. 기차를 갈아타듯 거장들과의 작업이 이어졌다. 그는 올해 칸에서 공개된 테렌스 맬릭의 신작 <트리 오브 라이프>(2011)와 함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영화로 인해서 영원한 삶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종교적 의미를 정의하고 규명하려 하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덕이 아닐까.” 그는 더 이상 기회에 연연하는 배우가 아니다. 자신의 성숙한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고, 자신의 세계를 채워나간다. 지금 그의 영혼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세계대전 Z>(2012)의 촬영장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도, 빗자루를 타고 나는 퀴디치 시합도, 호그스미스의 버터맥주도, 이제 안녕을 고할 시간이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에든버러의 남루한 방 한 칸에서 생활하던 싱글맘 조앤 K. 롤링을 세계적인 작가이자 부호로 만든 마법 같은 시리즈 <해리포터>가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로 나아가기까지 말이다. 200여 개의 나라에서 67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4억 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이 시리즈는 영화화되어 1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약 60억 달러에 달하는 흥행 수익을 거뒀다. 올해 공개된 대단원의 결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 닷컴에서 97%의 지지를 얻었고, 흥행면에서도 <트랜스포머 3>(2011)를 여유롭게 따돌리며 올해 전세계 흥행순위의 첨탑을 차지했다. 진정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마법의 시간은 끝났다. 머글의 생은 계속 된다. 물론 추억은 함께 간다.
(beyond 10월호 Vol.61 '2011 ENTERTAINMENT ICONS-MOVIE')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병풍 속에서 자랐다. 열한 살에 얻은 첫 출연작 <샌드맨>(1998) 역시 그녀의 아버지 어니 라이블리의 연출작이었다. 사실 라이블리는 이미 타고난 원석이었다. 진정한 데뷔작 <청바지 돌려입기>(2005)로 스팽글한 미모를 어필한 라이블리는 뉴욕 상류층 틴에이저들의 일상을 그린 TV시리즈 <가십걸>로 아이돌 스타의 궤도에 올라선다. 수직상승한 유명세로 타블로이드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이는 분명 그녀를 주목하는 눈이 그만큼 늘었음을 역으로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최근 <타운>(2010)과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2011)에서의 라이블리는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증명한다. 더 이상 사생활을 파는 가십걸이 아니다. 가공과 세공을 거쳐 태어난 보석처럼, 라이블리도 기회와 경험을 통해서 눈부시게 빛난다. 타고난 미모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지닌, 할리우드의 새로운 보석이 탄생한 것이다.
시카고는 현대 건축의 메카다. 오는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제47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역시 건축의 역사를 자랑한다. 1964년에 설립된 시카고국제영화제는 거장을 발굴하는 터전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존 카펜터 등의 거장들이 시카고를 거쳐 현대 영화의 역사에 발을 들였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A Dangerous Method>(2011)를 비롯해서 빔 벤더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 거장들의 신작이 올해 영화제에서 공개된다. 거장의 역사가 또 한번 새롭게 건축된다.
가련하게 빛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통해서 마리온 코티아르도 ‘장밋빛 인생’으로 피어났다.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행보를 거듭해나가는 그녀의 삶은 여전히 활짝 피어 오른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나리오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탐나는 역할이었다. 비련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대신해서 무대에 오른다는 건 일종의 영광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은 자리였다. 피아프의 노래처럼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피아프를 잘 아는 두 사람을 찾아갔다. 조르주 무스타키는 피아프가 부른 ‘Milord’의 작사가이자 연인이었다. 기뉴 리셰는 피아프와 진심을 나눴던 15년 지기 친구였다. 그들은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결국 무대에 올랐다.
2008년 LA의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마리온 코티아르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진실로 이 자리에 올 수 있길 고대했다. 프랑스 여자에게 이는 매우 특별한 일이니까.” <라비앙 로즈>(2007)로 에디트 피아프를 재현한 코티아르는 골든글로브와 오스카 트로피를 차례로 손에 쥐었다. 프랑스 배우가 오스카 후보로 이름을 올린다는 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영어 대사가 아닌 자국어로 연기한 비영어권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두 여인>(1960)의 소피아 로렌 이후 코티아르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수상은 이례적인 성공담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코티아르는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나름의 경력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앙 로즈>는 꽃봉오리처럼 피어 오르던 그녀의 재능이 활짝 만개하는, ‘장밋빛 인생’의 서막이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코티아르는 루아레의 오를레앙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는 배우이자 스승이었다. 코티아르는 말했다. “어떻게 연기하는지 그 방법을 배울 수는 없다. 감정과 느낌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던 거다.” 코티아르의 부모는 그녀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감정들을 찾아내서 이를 연기로 승화시키는 법을 깨닫게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해.”어린 코티아르의 갈망은 대단했다. 부모의 무대를 보고 종종 그 위에 오르며 꿈을 키운 코티아르가 다시 파리에 발을 들인 건 16살 무렵이었다. 배우로서 보다 폭넓은 기회를 얻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성공한 배우들의 빤한 소회처럼, 코티아르 역시 절치부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도 갖은 오디션을 거쳐 제작자들의 선택을 기다리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온다. 뤽 베송이 제작한 <택시>(1998)를 통해서 그녀의 경력은 서서히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한다. 코티아르는 이후 제작된 세 편의 시리즈에서 꾸준히 드라이브를 이어나갔다. 그 사이, 주연 자리를 꿰차기 시작한 그녀의 이름이 서서히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팀 버튼의 <빅 피쉬>(2003)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뉴욕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일종의 모험이자 계기였다. 영어 대사와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택시>시리즈의 대단한 흥행은 한편으로 코티아르에게 압박을 가하는 사건이었다. “비상업적인 영화에서 진지한 연기가 가능함을 증명해야 한다.” 코티아르에게 <빅 피쉬>는 일종의 피난처와 같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녀의 할리우드 정착을 위한 밑거름 같은 시간이었다.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 맨하탄의 한 아파트에 입주해서 영어를 익히는 한편, 프랑스와 다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성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상업적인 영화를 혹평한다. 그들은 그저 약자 편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성공을 환영한다.” 코티아르의 열정과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질은 이미 그녀에게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코티아르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로맨스물 <러브 미 이프 유 대어>(2003)로 <아멜리에>(2001)의 귀여운 여인 오드리 토투와 비교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티아르는 체질적으로 발랄하거나 유쾌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라비앙 로즈>의 에디트 피아프 이후로 코티아르의 필모그래피가 가련한 여인들로 채워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2009)의 빌리와 <나인>(2009)의 루이자 그리고 <인셉션>(2010)의 맬까지, 이 여인들을 관통하는 건 바로 비극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배신당하고 버려지거나,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거나, <라비앙 로즈>로 시작된 이어지는 코티아르의 비련은 <인셉션>까지 이어졌다. <라비앙 로즈>로 주가를 한껏 올린 코티아르가 이런 캐릭터들을 거듭해서 연기한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항상 희극보다 비극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비극을 연기할 때, 나는 즐겁다. 그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매우 거대한 공간이다.”
앞서 나열된 비련의 여인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매혹적인 뮤즈로 통한다는 것이다. 뭇 남성들과 사랑을 주고 받았던 에디트 피아프와 1930년대 미국 경제 공황기 시대의 전설적인 은행강도 존 딜린저의 연인이었던 빌리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필름 거장 귀도의 아내 루이사와 코마와 유사한 림보를 무릅쓰고 인셉션을 행하는 코브의 아내 맬까지, 코티아르를 통해서 그 매혹을 설명하고 있다. 가련하면서도 강인한 양면성, 코티아르는 우아한 프랑스 배우의 기품과 함께 남미 대륙의 열정적인 매혹이 공존하는 배우다. 가늘게 이어진 턱선이 연약하게 감정을 자극하지만 그 위로 굳게 다문 입이 결연하다. 커다란 눈동자는 갖가지 감정들을 담아내는 호수와 같다.
우디 알렌의 신작 <미드나잇 인 파리>(2011)는 문화적 향취로 그윽한 1920년대 파리로 안내하는 마술 같은 영화다. 이 영화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간 코티아르는 전작들보다 한결 밝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그녀는 만인의 사랑을 얻는 뮤즈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다크나이트>(2008)의 속편에 참여하고 있다. 코티아르는 안다. “나는 동시에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다작을 할 수 없기에 매 순간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그녀는 이 역시 안다. “지금 내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영원히 시들지 않는 피아프의 노래처럼, 코티아르의 ‘장밋빛 인생’도 영원을 향해 피어 오른다.
다코타 패닝과 엘르 패닝은 할리우드의 ‘뜨거운 자매’다. 다코타는 일찍이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 수준을 넘어서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엘르 역시 그녀의 예쁜 여동생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엘르는 선언하듯 말했다. “다코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죠.” 그리고 심상치 않은 행보를 걷고 있다. 지난 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2010)에서 엘르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이다. 화려한 일상을 전전하며 공허한 일생을 채우는 어느 스타 배우가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수식해주는 딸과의 교감을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엘르는 현재진행형의 성숙을 마음껏 자랑한다. 특히 근작인 <슈퍼 에이트>(2011)에서 그녀는 또래의 남자 아역배우들과 비교될 만큼의 성숙한 면모를 과시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사랑할 뿐이에요.”이제 엘르는 더 이상 타코타의 동생으로 불리지 않는다. 준비된 슈퍼 탤런트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스페인 북부의 산세바스티안은 조개 모양의 해안으로 유명한 휴양도시다. 올해로 59회를 맞이하는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의 심벌이 조개인 것도 그래서다.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90년대 이후 대두된 아메리칸 느와르 필름 기획전을 비롯해서 배우에서 감독으로 영역을 확장한 사라 폴리와 줄리 델피의 신작을 소개하는 등 전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짚는다. 드넓은 해변이 닿는 도시가 전세계 영화인의 이목이 모인 축제의 심벌로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