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은 수많은 반도와 섬으로 이뤄진, 일명 ‘북방의 베네치아’다. 오후 4시 즈음에 해가 저무는 스톡홀름의 11월 이른 밤을 뜨거운 열기로 사로잡는 건 북유럽 최대영화제인 스톡홀름국제영화제다. 오는 17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질 21번째 축제는 선댄스 드라마 부문 대상작인 <윈터스 본>(2010)과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휘파람을 불고 싶으면 불지>(2010)와 같은 화제작들로 스톡홀름의 이른 밤을 밝힌다.
본래 한국은 해외 유명 뮤지션들의 해외 투어 스케줄에서 소외되는 지역이었다. 하나 근래 몇 년 사이 대형 밴드의 내한이 이뤄지며 점차 한국을 찾는 유명 뮤지션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한국 관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소위 ‘떼창’이라 불리는, 따라 부르기를 비롯해서 폭발적으로 열광하는 관람 매너는 되레 전세계를 돌며 무대에 선 해외 뮤지션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형 음악 페스티벌의 성사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된 결과다.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과 지산 밸리 락 페스티벌과 같은 자국 브랜드 페스티벌들은 축제에 목말라 있던 한국의 음악팬들을 위한 오아시스였다. 관객들은 열화 같은 성원으로 페스티벌의 입지를 매년마다 다져나가고 있다. 이런 대형 페스티벌이 서울 인근에 터를 잡고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높은 인구 밀도만큼이나 페스티벌 문화의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서울은 단연 페스티벌의 ‘핫스팟’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올해로 4회를 맞이하는 그랜드민트 페스티벌과 지난 해 시작되어 올해로 2회를 맞이한 글로벌 개더링의 기록적인 예매율은 오는 10월이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한 달이 될 것임을 예감하게 만든다.
(beyond 10월호 Vol.49 beyond SPECIAL ‘ENTERTAINMENT NEW WAVE 2010’)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 기회의 뚜껑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어떤 이는 그 내용물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거머쥔다. <트와일라잇>시리즈로 근육질 ‘짐승남’의 매력을 전세계에 전파한 테일러 로트너는 분명 후자에 해당하는 1인이다. 하지만 “그건 <트와일라잇>이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로트너는 그 대단한 관심이 온전히 자신을 증명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본>시리즈의 맷 데이먼을 보며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며 감탄하거나 <노트북>(2004)과 같은 로맨틱한 영화에 대한 취향을 내보이기도 하는 로트너는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품은 원석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조지 클루니와 같은 대배우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10대 배우의 순진함을 감출 수 없지만 이는 곧 소년이 품은 야망을 드러내는 좋은 예시가 아닐까.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다. 한낮에 단잠을 자고 있었을 게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눈이 뜨였고, 순간 적막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음을 직감한 어린 것은 내심 불안해진 탓에 퍼뜩 잠이 깨어 엄마를 불러댔다. 그리 넓지도 않았던 집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돌아오는 건 빈 공간만큼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것마냥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빽하고 울어내기 시작했다.
울음은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여전히 기억이 난다. 입안에 물려주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사탕을 우물거리는 내 등을 두드리던 엄마의 손. 달아난 울음.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원래 그리도 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어린 시절 그 날만큼은 그랬다. <나홀로 집에>(1990)의 케빈처럼 가족들의 빈자리에 쾌재를 부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진짜 먼 나라 이야기였던 거다.
대식구였던 케빈의 가족과 달리 단 네 명에 불과했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나란히 극장에 앉아서 봤던 영화는 바로 그 <나홀로 집에>였다. 부모님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이야말로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할 영화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내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갔다. 속편이 나왔을 무렵, 또 한번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을 향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도 그 당시 어린 것이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는 모습이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나 보다.
그 날로부터 20여 년 정도가 지난 지금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홀로 집을 지키던 어린 케빈은 나이가 들어서도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그렇게 유쾌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말미에서 케빈은 돌아온 가족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내보인다. 생각해보니 그 미소는 내가 기억하는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이었다. 추억이라 불리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사소하고 하찮기만 하던 것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점차 애틋해지고 간절해진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 있다. 내 울음을 멈추게 했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바로 그런 것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남은 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날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온 것이다. 더 이상 그 단맛을 맛볼 수 없는, 그런 나이로.
<원티드>(2009)를 본 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엄마, 나는 안젤레나 졸리와 같은 액션 키드가 될래요!” 꿈은 이루어졌다. 불과 한 달 뒤, 딸과 함께 대본을 본 어머니는 말했다. “맙소사, 클로이. 네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정확히 네가 원하던 환상적인 역할이잖니.” <킥 애스: 영웅의 탄생>(2010)의 ‘힛 걸’은 그렇게 태어났다. 클로이 모레츠는 마치 <킬 빌>(2003)과 같은 잔혹한 세계에서 귀여운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하게 칼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긴다. 깜찍한 아역 여배우의 패러다임을 비웃듯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터프한 매력을 각인시켰다. 최근 <렛 미 인>(2008)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촬영을 마친 모레츠는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을 비롯해서 다양한 러브콜에 시달리는(?) 중이다. ‘핫 걸’의 질주는 이제 시작이다.
로카르노는 그림 같은 도시다. 병풍처럼 펼쳐진 스위스 산맥 아래 잠긴 호수의 장관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말을 절감하게 만든다. 매년 8월 그 그림 같은 풍경 아래 영화들이 상영된다. 올해로 63회를 맞이하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는 새로운 재능으로 무장한 영화를 발굴하는 전통적인 영화제다.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을 비롯해 총 5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백미는 풍요로운 풍광 아래 펼쳐지는 야간 야외상영이다. 8월 4일부터 14일까지,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필름이 영사된다.
콜린 파렐은 어려서부터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마와 같았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던 삶은 배우라는 단어 앞에서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방탕한 문제아에게 꿈을 제시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 즉 배우로서의 야망이었다.
콜린 파렐은 정제되지 않은 듯한 혈기와 출렁이는 불안을 품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살짝 숙여내린 얼굴로 상대를 응시하는 눈은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흔들리다가도 과감한 반항기를 거칠게 들고 일어선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한 파렐은 그 이전에 가십을 제공하는데에도 바쁜 셀레브리티였다. 최근에도 런던의 술집에서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구설수에 오른 바 있지만 이는 파렐로부터 불거져 나온 과거의 대단한 사건들에 비하면 파파라치들에게 딱히 매력적인 먹잇감도 아니었을 게다. 수많은 여성들과의 염문과 섹스 비디오 유출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상은 호사꾼들을 위한 안주거리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파렐을 주목받게 하는 건 분명 그가 선택한 배우로서의 성공적인 행보 덕분이다.
1976년, 콜린 파렐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더블린 교외의 캐슬낙에서 자란 파렐에게 배우로서의 현재를 제시하고 연기적 재능의 반석을 닦은 건 그의 누나 캐서린이다. 캐서린은 언제나 늦은 시간까지 고전영화들을 즐겨 봤고, 파렐은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같은 곳을 응시했다. 파렐의 시선에서는 말론 브란도나 폴 뉴먼, 마릴린 몬로와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는 그들의 연기에 매혹당했다. 또한 12세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는 누나를 보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찾은 공연장에서 파렐의 꿈은 더욱 부풀었다.
그러나 파렐의 십대는 거칠고 성겼다. 클럽과 슬램가를 전전하며 주먹질을 하거나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데 바빴던 파렐은 지독한 음주와 약물에 찌들었다. 심지어 그는 18세 때를 회상하며 “단지 6개월간 술독에 빠져지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덕분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 그를 진료한 의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왜 당신의 우울증을 이상하게 여기는 거죠? 당신의 쇼핑 리스트를 읽어봤나요?”
하지만 파렐의 방탕한 생활은 그가 품었던 배우로서의 꿈마저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1995년, 그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1년여 동안 호주에 머물던 파렐은 시드니의 교외에 있는 본디에서 유명 사진작가 스튜어트 캠벨을 만난다. 캠벨은 파렐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아일랜드 친구이자 호주국립예술학교(NIDA)의 연기팀장인 토니 나이트에게 소개한다. 나이트는 파렐에게 연기에 매진할 것을 권하며 시드니의 클리브랜드 거리에 있는 아마추어 공개 공연장을 추천했다. 결국 그곳에서 처음으로 스티브 하트의 <Kelly’s reign>으로 무대에 오른 파렐은 후에 이를 회상하며 말했다. “카우보이나 인디언을 연기하며 빵빵거리다 죽는 시늉이나 할 줄 알았던 누군가에게는 완벽해 질 수 있는 기회였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간 파렐은 1996년, 캐서린을 따라 가이어티 드라마 스쿨에 입학한다. 그리고 같은 해, 파렐은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가 출연한 <핀바를 찾아서>(1996)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크레딧에조차 포함되지 못했던 이 작품 이후로 또 한번의 단역 경력을 거친 그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영화 경력은 팀 로스의 <전쟁지역>(1999)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2000년, 파렐의 첫 주연작아저 조엘 슈마허가 연출한 <타이거랜드>가 개봉됐다. 1971년, 베트남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던 미군 병사들이 전장에 가길 꺼리며 탈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낸 이 작품에서 파렐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두각을 드러낸다. 그 후로 악명을 자랑했던 무법자 제시 제임스를 연기한 서부극 <파이브 건스>(2001)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하트의 전쟁>(2002)에서 브루스 윌리스의 상대역으로 출연했지만 두 작품은 비평과 흥행면에서 온전히 참패했다. 그 사이에 파렐은 개인적으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당시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여배우 아멜리아 워너와 만나 2001년 7월에 결혼을 올렸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 것.
하지만 2003년 다시 한번 재기의 시간이 찾아온다. 파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고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작품은 대단한 흥행을 얻었지만 파렐은 되레 작품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곤 했다. “당신은 범죄 예방하는 방법는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확실히 이해했는가?” 조엘 슈마허와 다시 한번 작업한 <폰부스>(2002)는 온전히 파렐의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과 같은 영화였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주연 배우로 짐 캐리와 윌 스미스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신 형식의 연출 방식에 부담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단 12일 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작품에서 공중전화박스에 갇힌 주인공은 파렐의 몫이 됐다. 하지만 영화는 쉽게 개봉되지 못했다. 2002년 11월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무차별 저격 사건이 벌어졌으며 유사한 소재를 지닌 영화의 상영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다음 해 4월에 개봉됐고, 파렐의 열연은 보답받았다. 저명한 비평가 로저 에버트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이와 같이 평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파렐은 에너지와 강렬함을 보여준다.”파렐은 자신이 놓인 공간의 너비와 대조될 만큼 대단한 긴장감을 구사하며 열연을 펼쳤다.
알 파치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스파이물 <리크루트>(2003)는 인상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음에도 파렐의 연기만큼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얻었다. 벤 애플렉이 출연한 안티 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에서 악당 불스아이를 연기한 파렐은 자신의 아이리쉬 악센트를 극속 캐릭터에 적용시키며 캐릭터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가미하기도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물 <S.W.A.T. 특수기동대>(2003)를 시작으로 점차 할리우드의 주연배우로 거듭난 파렐은 점차 높아지는 명성과 부만큼이나 유명한 여성 셀레브리티와의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도 빠르게 전파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한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우린 그저 동료일 뿐, 데이트하는 사이는 아니다.”하지만 파파라치의 사진 앞에서 이는 비겁한 변명 정도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렐은 그 가십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본격적인 연기 경력을 넓혀 나갔다. 올리버 스톤의 롤타이틀 전기영화 <알렉산더>(2004)에서 파렐이 연기한 알렉산더는 논쟁의 중심에 섰다. 대제국을 건설한 고대의 정복자를 양성애자로 묘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파렐은 정복자의 근엄한 초상 위에 불안한 심리를 드리우며 자신의 성격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마이클 만의 범죄영화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그의 진가는 확실히 드러난다. 제이미 폭스와 함께 투톱을 맡은 파렐은 마초적인 강인함과 함께 섬세한 멜로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굵고 예민한 자신만의 성향을 캐릭터로 승화시킨다. 같은 해에 우디 알렌의 <카산드라 드림>에서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형제로 등장하는 파렐은 방탕하지만 나약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연기한다. 뉴욕 타임즈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얌전한 파렐의 연기는 보기 드물게 효과적으로 힘과 느낌을 전달한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마틴 맥도나가 직접 연출하고 브렌단 글리스, 랄프 파인즈와 함께 출연한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파렐의 이런 특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결국 파렐은 생애 처음으로 노미네이트된 골든글로브에서 트로피를 거머쥔다.
<크레이지 하트>(2009)에서 기습적으로 등장하며 빼어난 노래 실력까지 뽐내는 파렐은 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닐 조단이 연출한 <온딘>(2009)에서 알코올중독을 극복하며 신체적 장애를 지닌 딸을 돌보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파렐의 모습은 마치 그의 방탕한 과거와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파렐의 악명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배우로서의 명성은 아직도 미지수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렐은 흥미로운 문제아다. 유일하게 연기를 통해 길들일 수 있는, 여전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악동이랄까.
최근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에서 하얀 여왕으로 등장한 앤 해서웨이의 첫 출연작이자 첫 주연작은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였다. 하루 아침에 공주가 된 소녀의 사연처럼 해서웨이도 하루 아침에 아이돌 스타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돌 스타라는 성을 박차고 나갔다. 퇴폐적인 이미지로 누드신과 베드신을 감행한 <하복>(2005)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메릴 스트립과 함께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로 성공적인 경력을 더한 뒤, 제인 오스틴을 연기한 <비커밍 제인>(2007)으로 우아한 기품을 뽐냈다. 진중한 내면 연기를 펼친 <레이첼, 결혼하다>(2008)는 그녀에게 오스카 노미네이트의 영광까지 안겼다. 최근 필름익스피어리언스는 내년 오스카 노미네이트 후보 예상 리스트에 <Love and Other Drugs>(2010)의 해서웨이를 포함시켰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배우로 자랐다. 마치 공주가 여왕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프랑스 알프스 지대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마을 안시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그리고 매년 6월, 안시에는 전세계 애니메이션과 특별한 손님들이 모인다.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라고 불리는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1956년, 칸국제영화제의 애니메이션 비경쟁부문 행사로 시작됐다. 1960년에 안시에 둥지를 트며 본격적인 집들이를 시작한 페스티벌은 전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의 도래지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안시에서 올해 50주년을 맞이하는 페스티벌의 특별한 손님 맞이가 펼쳐진다.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등불이었다. 첨예한 첨탑의 시대를 벗어나 유연한 아치의 시대로 돌아가는 르네상스의 태반이었다. 일 살비아티노는 고전적 우아함과 현대적 세련미가 어우러진 호텔이다. 르네상스의 중심에서 르네상스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그 자체다.
피렌체에 도착한 건 막 새벽에 발을 들인 2시경이었다. 12시간여의 비행을 지나 로마 공항에 도착한 뒤, 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서야 피렌체에 발을 딛었다. 어두운 피렌체의 정경을 뒤로 밀어내듯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피에솔레 언덕에 자리한 일 살비아티노 호텔을 찾았다. 문을 열고 나온 직원을 따라 골프차에 탑승한 뒤 지그재그로 굽이진 언덕을 올라 호텔에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 들어서니 유럽 중세귀족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나 본듯한 풍경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곳곳에 걸린 초상화가 일렁이는 촛불 위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 밤의 입자가 호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엄숙한 중세 암흑시대의 정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선명한 형광등을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호텔의 실내는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불확실한 경계를 지닌 명암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다. 공기를 관통하듯 뻗어내리거나 대기로 녹아내리듯 분산되거나, 완전하게 공간을 장악하지 않은 불빛들이 어둠 속으로 침전해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높은 천장을 지닌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피렌체의 야경이 반짝거렸다. 일명 ‘돔 뷰 디럭스(Dome View DeLuxe)’라고 불리는 이 방은 높은 천장만큼이나 커다란 창문으로 피렌체의 풍경을 중계한다. 하지만 장시간의 비행과 여정으로 인한 피로감이 낭만을 야경에 대한 감상을 흔들어 깨웠다. 몸을 뉘우기 전에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로들을 씻어내려야 했다. 반짝이는 욕조와 가지런히 정돈된 세면대가 새삼스럽게도 눈길을 끌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장담하건대 만약 당신이 그곳에 들어선다면 분명 이 말에 수긍할 것이다. 깔끔하면서도 우아하게 정돈된 욕실의 풍경은 그곳에 자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로맨틱한 감정을 일깨운다. 욕조에 몸을 뉘우고 몸에 스며든 피로들을 우려내거나 비처럼 물이 떨어지는 샤워 부스를 이용해 피로를 털어내는 것도 좋다. 무거운 피로를 씻어 내리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은 채 단잠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시 낯선 풍경에 시선이 멈췄다.잠을 청했던 지난 밤의 그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커다란 창을 통해 방으로 들어선 빛으로 지난 밤의 어둠은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일 살비아티노의 모든 방들은 자연광을 고스란히 방 안으로 전달하고 광량에 따라 공간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태양의 고도와 함께 빛을 갈아입은 실내의 풍경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연출된다. 한번 즈음 그 풍경을 만끽하며 방에 머물러 있어도 상관없겠다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빛이 골고루 내린 피렌체 시내의 풍경을 창문에 기대어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혜택이나 다름없다.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우리에게 ‘두오모’라고 잘 알려진 산타 마리아 델피오레 성당의 돔을 발견할 수 있다. 호텔에는 총 61개의 룸과 스위트가 있는데 대부분의 방 안에서 피렌체의 풍경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현재를 포함해 과거 이 호텔의 모태가 된 저택을 소유했던 이들의 이름을 딴 6개의 방을 갖고 있는데 이 방들은 호텔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유니크한 기능성을 지니고 있다.
호텔은 그 내관처럼 외관 역시 고풍스러운 대저택의 모습을 두르고 있다. 본래 일 살비아티노는 피렌체가 내려다 보이는 피에솔레 언덕에 자리한 저택이었다. 덕분에 보다 너른 피렌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요지이기도 했다. 호텔 앞을 지나는 언덕길은 호텔을 기준으로 피렌체와 피에솔레를 나누는 명확한 경계다. 일 살비아티노는 피렌체의 접경에 자리한 피에솔레 언덕에서 피렌체를 조명하는 전망대인 셈이다. 사실 일 살비아티노는 르네상스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닌, 유적의 가치를 품은 건물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일 살비아티노는 피렌체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일 살비아티노가 처음부터 지금의 이름을 지녔거나, 지금의 형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현재의 일 살비아티노의 원형이 된 건 14세기, 살비아티(Salviati) 가문이 저택을 소유한 이후였다. 그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팔라조’ 양식의 대저택으로 건물을 재건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당시의 흔적들을 보존해오고 있다.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전반까지,유럽 중세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건 이탈리아의 피렌체다. 피렌체는 일명 암흑시대를 걷던 중세 유럽에서 등불과 같은 도시였다. 날카로운 첨탑의 시대를 벗어나 유연한 아치의 시대로 가는, 신에 대한 일방적 믿음을 강요하던 시대를 벗어나 인간에 대한 탐구를 가능케 하는 르네상스의 자궁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권력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메디치가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탄생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여전히 르네상스의 흔적들이 피렌체의 곳곳을 채우고 있다. 피렌체를 걷는다는 것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발을 들이고 체험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면 일 살비아티노는 르네상스의 시대를 간직한, 르네상스적인 발상으로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전적인 중후함과 귀족적인 우아함을 간직한 전통적인 인테리어 양식 곳곳에는 현대적인 편의를 위해 마련된 배려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관통하는 풍경 안에서 동시대의 취향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TV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클래식한 느낌의 전신거울의 한 가운데에 영상이 떠오른다. 노트북이나 넷북만 있다면 호텔 내부 어디에서나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커다란 창문 위로 드리운 긴 커튼은 손가락 하나로 열리고 닫힌다. 그 한편으로 앤티크한 벽장과 책상을 비롯해 방 안을 채운 대부분의 가구들은 오랜 전통의 나이테를 품고 있다. 지금의 일 살비아티노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이뤄낸 포스트 모더니즘의 르네상스적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 일 살비아티노는 어느 호텔들과 달리 리셉션이 없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대신 일 살비아티노는 모든 직원의 리셉션화를 추구하는 ‘P. A(Professional Assistant)’ 시스템을 도입했다. 호텔의 GM(General Manager)인 시모네 조르지(Simone Giorgi)는 말한다. “호텔에서 직접 1년에 걸쳐 직원들을 교육한다. 다양한 능력을 지닌 덕분에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일 살비아티노는 직원과 손님 사이의 일 대 일 소통을 중시한다. 개인의 편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직원들이 보조하되 개인적인 사적인 프라이버시는 엄격하게 보존한다. “호텔이 아니라 개인적인 빌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일 살비아티노의 자랑이자 목표다. 일 살비아티노의 모든 공간은 오로지 손님을 위한 것이다. 라운지, 바, 테라스 등 타인의 방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또한 모든 직원들은 눈만 마주쳐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마련해줄 것 같은 친절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일 살비아티노는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호텔이라기 보단 일종의 휴양지나 다름없다. 피렌체나 인근의 관광을 위한 숙박을 목적으로 찾기 보단 말 그대로 일 살비아티노에 머무르기 위한 목적 자체로서 찾을만한 곳이다. 특히 태국에서 직접 데려온 마사지사들이 상주한 스파 시설도 매력적이다. 피렌체 출신의 최고주방장이 만드는 갖은 이탈리아 진미들은 영원히 소화되지 않는 추억의 포만감을 이룰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친 일상을 피해 휴식을 목적으로 일 살비아티노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을 한 셈이다. 시모네는 말한다. “단지 피렌체를 감상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호텔 자체로부터 유니크하다는 느낌을 얻길 바란다. 단순히 잘 쉬었다가 아닌, 다른 곳과 다른 진짜 특별함을 느끼고 호텔을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호텔을 나서는 순간, 단지 아쉽다는 감정을 넘어선 어떤 특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일 살비아티노는 오래된 친구처럼 자주 만날 수 없어서 낯설 것 같지만 쉽게 익숙해지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친숙한 공간이다. 고전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가치가 만나 일 살비아티노를 이뤘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르네상스, 즉 포스트 모더니즘 그 자체다. 훌륭한 가치란 언제나 다시 빛을 내는 법이다. 그리고 일 살비아티노는 르네상스의 현대적인 복원 그 자체다. 그 안에 머무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특별한 사람이라 믿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