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성분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출신성분이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에서 다른 의의를 읽어야 한다. 맷 데이먼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출신이란 그의 과거는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을 첨언하는 수식어로서의 의미에 불과하다.
“본드는 항상 1960년대의 가치관에 밀접해 있었다. 마이크 마이어가 자신의 스파이물 <오스틴 파워>로 부자가 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맷 데이먼의 코멘트처럼 이제 <007>의 제임스 본드는 낡은 유산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 안티히어로 제이슨 본이다. <007>시리즈로 대변되던 기존의 스파이물과 달리 체지방 비율을 줄여버린 <본>시리즈의 담백함은 실로 신선한 것이었다. 심지어 21세기와 함께 마초적 환골탈태를 시도한 <007>시리즈가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추측엔 부인할만한 여지가 없다.
<본>시리즈는 스파이물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뒤엎은혁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건 제이슨 본, 그리고 맷 데이먼이었다. 묵묵한 인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차분함, 낭비가 없는 동작의 신속 정확함, 단단한 육체에 비견되는 비범한 두뇌, 그리고 묵직한 양심적 고뇌까지, 맷 데이먼은 작은 제스처부터 커다란 동선까지 제이슨 본을 이루는 자질 그 자체였다. 양미간을 찌푸리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제이슨 본은 분명 섹시한 물건이었다. 질주와 고뇌의 <본>트릴로지를 완성하던 맷 데이먼은 다른 한 편에서 유쾌한 무용담으로 또 하나의 트릴로지를 키우고 있었다.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가 즐비한 <오션스>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은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개의 트릴로지 이후, 맷 데이먼는 완전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200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 35인으로 꼽힌 맷 데이먼은 같은 해 ‘피플’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Sexist men alive)’로 선정됐다. “나는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다.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배우들이 지나쳐 보낸 대본이 남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제 오래된 문장처럼 낡아버렸지만 맷 데이먼의 말처럼 그의 과거는 분명 그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미를 갖는 아이였고 그것이 여전히 그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 맷 데이먼의 어머니 칼슨 페이지의 말대로 맷 데이먼은 어려서부터 특별했다. 칼슨 페이지는 8살의 어린 맷 데이먼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는 제가자라면무엇이 되길 바라는지알아요.” 어머니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대답은 명확했다. “배우요.” 이 일화만으로도맷 데이먼이 4년간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 두고 배우로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만하다. <스쿨 타이>(1992)와 같은 청춘물로 경력을 시작한 맷 데이먼은 <제로니모>(1994)에서 큰 배역을 거머쥐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단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아편에 중독된 군인을 연기하기 위해 100일 동안 4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해야 했다. 훗날 이에 대해 맷 데이먼은 말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지혜를 얻었다.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이나 꿈이 아닌 이상그건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굿 윌 헌팅>(1997)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상과 다른 현실을 헤매던 맷 데이먼은 비로소”왜 내가 여기 앉아있지?”라는 생각을 품었고, “내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절친했던 벤 애플렉과 함께 각본을 써내려 간 <굿 윌 헌팅>은 할리우드의 언저리를 맴돌던 두 배우를 온전히 다른 궤도로 올려 보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역시 하버드 영문과 출신답게 작가적 재능이 있었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대본에 투영된 재능에 미래를 걸 생각이 없었다. “각본을 쓰는 건 말할 수 있는 내 길을 말하고 시스템을 비틀 수 있는 기회였다.” 같은 해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맷 데이먼은 그 기회를 배우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소진했다.
<굿 윌 헌팅>의 세트장에서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했다. 비로소 오디션에서 벗어나 러브콜을 얻었다. 이윽고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에서 살인마 톰 리플리를 연기하며 연기적 보폭을 넓혔다. 문제작 <도그마>(1999)에서 벤 애플렉과 다시 손을 잡은 뒤 구스 반 산트의 <게리>(2002)에선 각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마치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일했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쉬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정작 맷 데이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뿐이다.”
<본>시리즈와 <오션스>시리즈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서도 맷 데이먼은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이력을 쌓아나가야할지 판단이 명확했다. “마틴 스콜세지가레오나르도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나는 무조건 예스였다.” <디파티드>(2006)를 결정할 당시 맷 데이먼에게 출연료 협상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란 점이 주요했다. “빌 모나한의크레딧이 있는각본이라면을 통해 진짜 연기할만한 것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잘 아는 배우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굿 셰퍼드>(2006)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맷 데이먼은 한 토크쇼에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해 이와 같이 말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후로 나는 분명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말할 수 있게 됐다.”
근래 공개된 스티븐 소더버그의 블랙 코미디 <인포먼트>(2009)에서맷 데이먼은 14kg가까이체중을 늘렸다. 소더버그의 <인포먼트>가 맷 데이먼에게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과 꿈’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2009)와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 존>(2010)에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린 맷 데이먼은 최근존 쉐인의 서부극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 출연을 확정지었고,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실화를 다루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차기작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와 동성애 연기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무산됐다지만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도 여전히 건재하다. “만약 내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안전한 선택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길로 가길 원치 않는다.”오래 전 자신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결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청년기를 거쳐 비로소 모두가 바라는 배우로 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돈 치들 등과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기구를 통해 아프리카의 수질 개선과 식수 공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난 해엔 오마바를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매케인 진영을 초토화시키며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천했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시도하기 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 꿈을 실현한 맷 데이먼은 이제 세상을 구한다. 그는 진정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이퍼 리얼 히어로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우린 그것을 전통이라 부른다. 그 전통 위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바르셀로 라발 호텔은 전통과 새로움을 함께 보여준다.
길에 들어서자 행위예술가들의 다양한 퍼포먼스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이주빈민들의 거처였던 람볼라 거리는 1980년대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아티스트의 거리가 됐다. ‘MACBA(Museu d’art Contemporani de Bacelona)’와 같은 현대미술관이 설립되고 다양한 문화 교류의 장이 마련됐다. 지금의 람블라 거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바르셀로나의 중심이자 최고의 번화가라 불리는 ‘람블라 거리(La Rambla)’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부의 항구를 잇는 거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중간계다. 벽돌 한 장까지도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인 위엄을 풍기는 가우디의 건축물, 중세시대의 엄숙함을 뾰족하게 드높인 고딕지구, 람블라 거리엔 시간의 중력을 거스른 옛 역사의 향취가 곳곳을 지배한다. 풍요로운 바다를 곁에 두고 플라타너스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느긋하게 어제 속 오늘을 걷는다. 하지만 람블라 거리에도 분명 변화가 도래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서 변화와 흐름이 감지된다. 거리 곳곳을 밀물처럼 채우고 썰물처럼 비우는 사람들은 그 거리를 모자이크처럼 채우고, 콜라주처럼 보태며 거리의 표정을 바꿔나간다. 개개인이 수집한 트렌드의 조각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거리의 패션을 이룬다.
넉넉한 플라타너스 잎사귀로 수놓인 람블라 거리에서 도보로 불과 5분 정도 걸리는 ‘바르셀로 라발(Barcelo Raval)’ 호텔은 건축가 ‘조셉 M. 블랑코’가 건설설계사 ‘CMV’와 협력해 완성했다. 지난 2008년 여름에 개장한 4성급 호텔이다. 항구에 인접한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를 달리자 람블라 거리를 거쳐 ‘람블라 델 라발(Rambla del Raval)’에 들어섰다. 거대한 원기둥 형태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바르셀로 라발 호텔이다. 마치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를 보는 듯한 바르셀로 라발을 멀리서 보면 유리로 덮인 거대한 알루미늄 캔처럼 생겼다. 외벽 전체에 스테인리스 재질의 와이어 망사를 덮은 탓에 다소 어둡지만 그 위에 씌운 크리스탈 마감재가 뛰어난 반사율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그 독특한 형태의 호텔 외벽이 지닌 기능이 중요하다. 투숙객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철저한 방음, 시내의 전경을 고스란히 전시하는 투명한 외벽은 태양의 열기를 온전히 차단해낸다. 360도 타원형으로 이뤄진 건물의 높이는 37.5미터, 지름은 무려 1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망대나 다름없다.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테라스나 수영장이 있는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전경은 바르셀로 라발이 제공하는 가장 훌륭한 서비스다. 파노라마 필름을 재생한 와이드 스크린을 통해 바르셀로나를 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탁 트인 바르셀로나의 전경은 보기만 해도 포만감을 준다. 총 182개의 룸은 바르셀로나 시내를 향한 창문 덕분에 제각각 특별한 경관을 뽐낸다. 만일 바르셀로 라발을 다시 찾는다면 결코 같은 방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수집하는 재미를 얻을 것이니까.
바르셀로 라발은 젊고 실용적인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곡선미가 두드러지는 외형처럼 실내 인테리어 또한 곡선의 디테일을 강조했다. 포괄적인 테두리부터 세심한 디테일까지 모던한 감각과 실용적인 편의를 자랑한다. 모서리의 흔적을 지워낸 가구들의 곡선 테두리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감상과 편의가 공존하는, 화려함과 안정감의 조화로부터 바르셀로 라발의 체온이 느껴졌다. 73개의 채널을 비롯해 아이팟 로더까지 제공하는 32인치 평면 TV와 작은 업무용 테이블,네스프레소 커피메이커까지, 모든 방은 투숙객들의 편의와 취향을 배려한다. ‘듀퐁’ 계열의 인조 대리석 전문기업 ‘코리안(Corian)’에서 마감한 욕실의 매끄러운 바닥재는 관광으로 쌓인 여독을 우아하게 씻어내린다. 사우나와 체육관 시설을 찾는다면 여독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방을 비롯해서 로비와 루프 테라스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 묵는 고객이라면 사업적인 미팅을 비롯해 연회와 컨퍼런스를 열 수 있는 대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다. ‘A bird told me(Un Oiseau m’a dit)’, 즉 투숙객의 요구에 제공되는 카운터 서비스는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한다.
바르셀로나의 젊은 트렌드를 만끽하고 싶다면 레스토랑 라운지 바 ‘B라운지’를 찾는 것도 좋다. 코스모폴리탄 콘셉트를 표방한 B라운지는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르디 갈리(Jordi Gali)’의 작품이다. 블랙 앤 화이트의 투톤 컬러가 대비를 이루는 라운지 내부는 LED조명의 다채로운 색감을 갈아입으며 세련된 멋을 더한다. 테크놀러지에 결합된 심플한 감성이 돋보이는 복도와 정문도 조르디 갈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무채색과 단색의 배치를 투명하게 보좌하는 LED조명이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총 125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B라운지는 엄선한 요리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카페라운지다. 주방장 후안 고메즈(Joan Gomez)는 말한다. “가장 신선한 재료를 모아 즐거운 미식을 제공함으로써 여행의 묘미를 전한다.” B라운지는 혁신적인 메뉴를 개발한 퓨전 레스토랑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뽐내고 있다.
바르셀로 라발은 바르셀로나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혁신적인 건축물이다. 전통적인 색채가 강한 바르셀로나에서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바르셀로 라발은 불과 1년 여만에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로 그 입지를 굳혔다. 바르셀로 라발의 진가는 심플한 레드 색상의 정문을 들어설 때 확인할 수 있다. 디테일과 규모, 실용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랑하는 바르셀로 라발은 현대적인 디자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바르셀로나엔 전설이 하나 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항구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카날레타스 샘물을 마시면 바르셀로나에 매료되어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바르셀로 라발은 새로운 전설이다. 바르셀로 라발을 찾은 고객은 다시 한 번 새로운 풍경의 조각을 수집하고자 그 문을 두드릴 것이다. 람블라 거리의 전통과 바르셀로 라발의 현대적 안락함은 마치 시간 여행을 즐기는 듯 유쾌하고 즐겁다.
회사를 그만 둔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를 옮긴다. 무비스트를 떠나 새롭게 둥지를 틀 곳은 아쉐뜨 미디어에서 발간하는 비욘드다.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촌놈이라 잘 모르지만 대한항공 기내지다. 투썸플레이스와 같은 커피점에서도 볼 수 있다. 나도 몇 번 거기서 봤거든. 개인적으로 기획이 좋은 잡지라고 생각했고 자료로서 소장해도 좋을 만하다 느낄 만큼 유심히 읽었던 기억도 여러 번이다. 주제 넘게 원고 청탁을 몇 번 받아서 원고료를 챙겨먹은 적이 있긴 한데 녹을 먹게 될 줄 몰랐다. 모든 것이 11월 중에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반 허공에 뜬 기분도 없지 않다. 초현실적이었다. 제안이 오고, 면접이 이뤄지고, 절차를 밟아, 통보를 받은 뒤, 회사를 떠나고 새로운 회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됐다.
정확히 2년 10개월 간 머물렀던 직장을 떠난다. 이미 애초에 내가 처음 앉아 있었던 그 사무실로부터 여러 번 이사한 뒤지만 어쨌든 그렇다. 다사다난했던 직장이었다. 그래도 다들 말하듯 다행이다. 대부분 말하는 바에 따르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들어와서 가장 잘 됐을 때 나간다. 그래, 그건 사실이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많은 일을 만든 건 회사가 어려웠다는 사정이었다. 제대로 월급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만만치 않게 이어지기도 했고, 한 때는 모든 걸 접을까 회의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직원이 채 10명 남짓도 되지 않아 손을 호호 불만큼 한산함을 느끼기도 했으며 때론 사무실을 무겁게 짓누르는 침울한 분위기가 싫어서 좀처럼 사무실에 나가기 꺼려질 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내 덕분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버티는데 한몫을 거들었다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게 됐다.
시원섭섭하다. 새로운 일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자라기도 했고, 뭔가 반복적인 권태 속에서 자라나는 의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는 건 그만큼의 긴장과 설렘을 유발하는 일이라 다양한 채널로서 내게 고무되는 일이다. 걱정조차도 새로운 경험적 자극이란 점에서 유효하다. 더욱이 날 믿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도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오프라인 잡지를 만드는 일원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 될 터이니 개인적으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지금 이 정도 경력 즈음이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데도 무리가 없는 시기란 점에서도 분명 좋은 시점이라 생각했다.
첫 직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떠나 보낸 적은 있었지만 내가 떠날 입장이 되리라 생각해 본적은 많지 않았다. 아니, 불과 정확히 1년 전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지만 어찌하다 무마된 뒤로 예상치 못했던 사안인 건 분명하다. 이별이라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딱히 많은 교감을 이룬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마주 보던 대상과의 익숙함을 잊는다는 건 여러 모로 섭섭한 일이다. 글쎄다. 내 빈자리에 쾌재를 부를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생했다는 한 마디로 인사를 던지며 아쉬운 표정을 남기는 이들의 얼굴을 거듭 마주하다 보니 주제넘은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머쓱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난 세월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며 살진 않았던 것 같다. 잘나지 못해서 아쉬웠던 적은 스스로 많았다. 다만 적어도 못난 꼴은 남기지 않았나 보다. 그게 다행이다.
회사를 떠나던 날, 자리를 정리했다. 내 다음 사람에게 물려줘야 할 자리에서 최대한 내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컴퓨터 휴지통마저 정리했다. 책상에 내려앉은 먼지도 닦아낼 수 있는 만큼 닦아냈다. 누구라도 내 빈자리를 채우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뒤에 올 사람을 위해 지난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흔적 따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그대로 사라지면 된다. 남은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게 한편으로 후련하다. 무비스트에서 머물렀던 동안, 난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 참견했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키우다 끝내 포기하거나 싸워대다 이래저래 심산이 무너지곤 했다. 한편으로 그 모든 문제들로부터 달아나는 기분도 들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던 이들과 그런 공적인 사안으로서 얼굴을 붉히고 화해해야 한다는 건 여러모로 괴롭고 고된 일이다. 새로운 직장에선 어지간하면 말을 아끼련다. 보다 체계가 철저한 곳이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내가 편해질 것 같다.
내일 당장 새로운 직장으로 나간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이러다 다시 예전 직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다. 내일 출근하면 바로 마감에 투입된다. 다음주까진 정신이 없겠지. 긴장된다. 그 긴장감이 좋다. 그 긴장감 덕분에 설렘도 동반되는 기분이다. 어쨌든 회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묘했다. 샤워를 하다 조금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나도 모르겠다. 마음이 따뜻했다. 잘 가라는 인사도, 잘 됐다는 축하도, 아쉽다는 찡그림도, 하나같이 애틋한 것이라 뒤늦게 견디기 어려웠다. 난 아직도 어리고 한참 모자란 인간이다. 하지만 덕분에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사람 구실하고 살았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계기를 얻었다. 그러니 난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겠다.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누군가를 통해 이뤄진 내 삶을 난 좀 더 소중하게 아끼겠다. 그러니 난 잘 살 것이다. 고마웠다. 당신들이 날 잊더라도 난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 not forget you.
기괴하고 우울한 팀 버튼의 페르소나 즈음으로 여겨졌던 조니 뎁은 해적선에 오른 후, 롤러코스터적 캐릭터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니 뎁은 괴팍하고 수상한 낭만주의자다. <퍼블릭 에너미>의 존 딜린저가 심상찮아 보인 것도 팔 할은 조니 뎁 덕분이다. 전설적인 갱스터는 로맨티스트로 환생한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나이 조니 뎁의 육체를 빌어서.
1987년, 약관의 절반을 넘어온 조니 뎁은 폭스TV에서 방영된 <21점프스트리트>를 통해 아이돌 스타로 떠오르며 대중들의 시선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이른 나이에 성공을 맛본 아이돌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훗날 조니 뎁은 이 당시에 대해 이와 같이 회상했다. “억지로 ‘상품’역할을 강요 받아야 했던 그 당시는 정말 끔찍했다. 내가 그것을 조종할 길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바라던 조건이 전혀 아니었고,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조니 뎁에서 산업적인 드라마 현장은 이상한 나라였다. 배우로서의 비전에 투항하기엔 조니 뎁의 영혼을 채울 고삐가 없었다.
”단지 그 누군가의 결정이 아니라 나를 위한 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면 할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작업이든 비참한 실패든.”조니 뎁은 스스로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닦이지 않은 길로 뛰어들었다. 브라운관의 아이돌을 버리고 조니 뎁이 선택한 첫 번째 스크린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팀 버튼의 <가위손>이었다. “설명한지 10분만에 수락했다.”조니 뎁의 말처럼 <가위손>은 팀 버튼과 조니 뎁의 운명적 만남이나 다름없었다. 제작자 스콧 루딘은 “기본적으로 조니 뎁은 팀 버튼의 모든 영화에서 그를 연기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조니 뎁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니 뎁에 따르면, “<가위손>의 에드워드는 십대 당시 팀 버튼의 무능을 전달하려 했고, <에드 우드>의 에드 우드와 벨라 루고시와 유사한 팀 버튼과 빈센트 프라이스의 관계를 반영하려 했다.”그 후로 7편의 작품을 함께 한 팀 버튼과 조니 뎁은 감독과 배우의 영역을 벗어나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료로서 거듭났다.
단순히 팀 버튼의 기괴하고 영특한 페르소나 즈음으로 자리를 굳히던 조니 뎁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2003년에 찾아왔다. 디즈니 테마 파크에서 모티브를 얻은 해적물이자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작자로 유명한 제리 브룩하이머가 참여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 역으로 캐스팅된 것. 1억 4천만 불짜리 대작에 조니 뎁이 캐스팅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공공연히 우려를 표하던 투자자들은 ‘키스 리처드’에 영감을 얻은 조니 뎁이 가냘프게 흐느적거리며 성정체성마저 모호해 보이는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할리우드의 실권자나 다름없는 제리 브룩하이머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캐리비안의 해적>은 6억 5천만불이라는 거대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시리즈물로 기획됐다. 후에 제리 브룩하이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묘사한 캐릭터가 성공하는 것을 한번 보여줘야 그들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연출을 맡은 고어 버빈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잭 스패로우가 조니와 실제로 밀접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가장 쉬운 것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찍을 당시 팀 버튼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결정지은 조니 뎁은 말했다. “뮤지컬에서 심각한 킬러에 관해서 연기할 기회가 얼마나 많겠나?”잭 스패로우를 통해 얻은 대단한 성공 이후로도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선택했던 조니 뎁이었다. “사실상 <캐리비안의 해적>을 했던 것이나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했던 것이나 멋진 종류의 작품을 한다는 건 마찬가지다.”잭 스패로우를 통해 큰 흥행을 얻었지만 정작 조니 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작업을 선택하고 접근하는 과정에 대한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가 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것을 거듭 해오고 있다. 나는 단지 내 할 일을 한다.”조니 뎁은 그 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 트로피를 거머쥔다. “나는 단지 누군가가 잘못 포함시킨 것이라 생각했다.”골든글러브 7번, 아카데미 3번, 지금까지 조니 뎁이 자신의 이름이 노미네이트에 오르고 내려간 것을 지켜본 건만 9번이다. 그 이전에 조니 뎁은 자신이 수상과 결코 무관한, 아니, 무관할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내 머리나 마음 속의 어둡고 깊은 곳에서조차 결코 갈망하지 못했던 종류의 사건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 사이 제리 브룩하이머의 해적선과 팀 버튼의 몽상을 오가며 비현실적 세계의 아우라를 구축하던 조니 뎁은 <스위니 토드>이후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전설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마이클 만이 연출한 <퍼블릭 에너미>에서 전설적인 은행 강도 존 딜린저로 출연한 조니 뎁이 실화적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궁금증을 자아낼만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위험 속에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조니 뎁의 생각에 존 딜린저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기보단 누군가 하지 못하는 것을 특별히 해내는 사람에 불과했다. 동시에 존 딜린저는 갱스터라기 보단 락스타와 같이 대중들의 환호를 얻었다. “존 딜린저가 공공의 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은행들이 공공이 적이었지. 그는 그저 대중적이었다.”
“존 딜린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조니 뎁은 존 딜린저에 관한 책이나 그가 등장하는 영상을 모두 찾아봤다. 그리고 점차 그가 일반적인 악당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존의 권력에 당당히 맞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갱스터의 모습에서 자신이 동경했던 락스타의 아우라가 감지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점차 자신과의 유사한 지점들에 대해서 발견해내기 시작했다.“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내 고향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얘기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때 우리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이 통해 존 딜린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야구, 영화, 좋은 옷, 빠른 차, 위스키…그리고 당신. 그 밖에 또 무얼 알고 싶소?(I like baseball, movies, good clothes, fast cars.. and you. What else you need to know?)”빌리 프리셰의 마음을 사로잡은 존 딜린저의 대사는 지나치지 않게 로맨틱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리고 남성적인 힘과 여성에 대한 배려를 담은 존 딜린저의 대사가 조니 뎁의 입술을 통해 내뱉어질 때 그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 된다. “내 몸은 일기장이다. 뱃사람들이 그러하듯, 모든 문신은 당신 스스로 흔적을 남기고 싶을 만큼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을 어디서나 남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조니 뎁의 왼팔 이두근엔 ‘위노 포에버(WINO FOREVER)’라는, 옛 연인 위노나 라이더와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마치 한 여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거는 존 딜린저처럼 조니 뎁도 자신의 지난 사랑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니 뎁의 몸엔 현재 그의 딸과 아들과 어머니를 비롯해 13개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조니 뎁은 말했다. “나는 여전히 수많은 실패를 소유하고 있다.”여전히 조니 뎁은 말한다. “나에게 너무나 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조니 뎁은 할리우드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사람이다. 테리 길리엄의 연출작이자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도 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과 팀 버튼과 또 한번 손을 맞잡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차례대로 개봉을 기다리는 가운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새로운 시리즈와 <씬 시티>의 차기작에 그의 이름이 예정돼 있다. “할리우드나 산업적 정의에 따른 영화들은 내게 훌륭한 결과물이 되는데 실패했다.”조니 뎁은 가장 비할리우드적인 방식으로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그건 어쩌면 그의 재능을 알아주는 이들을 잘 만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실패란 딱히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가야 할 길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앞두고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말의 낭만처럼, Bye bye my blackbird. 물론 조니 뎁의 마지막 인사에 취하기엔 아직 시간이 이르다. 조니 뎁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주드 로의 연인으로 통용되던 시에나 밀러는 이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를 구원한 건 죽은 뮤즈였다. 잇걸은 이제 아이콘의 삶을 선택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누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자극적이야. 놀라움으로 가득해(Who wouldn’t get off on the way she makes heads turn? She’s sweet, fun, original, exciting, full of surprises).”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중 하나인 니키를 설명하는 알피의 독백은 어쩌면 시에나 밀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시에나 밀러는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어필하는 여인으로서 스크린에 섰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니키를 비롯해서 <레이어 케이크>의 타미도, <카사노바>의 프란체스카도, 매력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고 심장을 녹였다. 소매치기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남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진정한 뮤즈였다.
정작 관객에게 시에나 밀러는 존재감이 약한 배우였다.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건 로맨스였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된 이후로 그녀의 이미지는 스크린의 한 장면보단 타블로이드의 사진 한 장으로 각인됐다. 배우라기 보단 가십면을 장식하는 셀레브리티로서 익숙했다. 동시에 슈퍼모델 케이스 모스에 비견될만한 뉴욕의 패셔니스타로서 이미지가 더욱 공고히 전파됐다. 2004년 글래스톤베리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은 보헤미안과 히피의 스타일이 혼재된 의미의 ‘보호-시크(Boho-chic)’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됐다. 그녀의 룩은 유행처럼 번졌고, 시에나 밀러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에나 밀러는 소외됐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녀의 알맹이는 연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할 뿐, 그 껍데기를 부수고 알맹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에나 밀러를 꿈꾸는 연기 지망생은 없지만 시에나 밀러를 닮으려는 그녀의 아류들, ‘시에나 밀러스(Sienna Millers)’와 ‘시에나스(Siennas)’가 넘쳤다.
2005년, 주드 로와 쌓아왔던 2년여 간의 정분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주드 로의 외도를 알게 된 시에나 밀러는 결국 7개월 전에 맞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재회를 거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에나 밀러는 ‘꼴도 보기 싫은’주드 로와의 헤진 사랑을 기워나갈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시에나 밀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결심이었다. 단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별 이후로 시에나 밀러는 배우로서 중요한 경력을 맞이한다.
‘비교적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시에나 밀러에게 주드 로와의 이별은 삶을 두텁게 감싸던 두려움을 파괴하는 계기가 됐다. 시에나 밀러는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밥 딜런의 로망이기도 했던 그녀, 에디 세즈윅에 관한 전기영화이자 시대극인 <팩토리걸>의 주연으로 낙점됐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를 위해 준비된 것마냥 찾아왔다. 앤디 워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뮤즈로 날아오르다 한 순간 나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에디 세즈윅의 스물 여덟 인생사는 시에나 밀러에겐 적잖은 관심을 불렀다. “지난 여름에 인내해야 했던 ‘개인적인 큰 사연’을 통해 에디 세즈윅에 대한 영감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궁극적으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은 단순히 연기적 집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체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디 세즈윅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이다. “대본에 끼워 보내진 에디의 사진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사진이 나를 강타했고 이 역할로 뛰어들게 했다. 에디의 눈동자엔 비범하고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상처와 흠도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그녀에게 매료됐다.”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한 눈에 반했던 에디 세즈윅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이었다. 시에나 밀러는 에디 세즈윅에 반했고 그때부터 에디 세즈윅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들췄으며 연구했다. “내 머리 속이 에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안 심각한 고뇌에 시달렸다. 그녀는 한 순간 무너져버릴 수 있는 길을 걷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파괴적인 누군가의 호기심에 끌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런식으로행동했는지이해하고자 했고 나아가 그녀의 결정에 동감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결국 <팩토리걸>은 시에나 밀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단순히 남성들을 치장하기 위해 영화에 전시되는 인물을 벗어나 영화에 삶을 새겨 넣는 인물로서 자리했다.
미쉘 파이퍼와 로버트 드니로, 클레어 데인즈 등과 함께 출연한 <스타더스트>에서 시에나 밀러는 과감히 자신을 버렸다. 비중이 대단한 역할이 아님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버리고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출한 <인터뷰>는 시에나 밀러 속에 감춰진 시에나 밀러의 진가를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신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타블로이드 정치부 기자가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하룻밤 동안을 그린 <인터뷰>에서 시에나 밀러는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녹록하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카티야는 대중의 주목과 혐오를 동시에 얻는 셀레브리티의 명예와 고단함을 한 몸에 드러내면서도 스스로의 본심을 끝내 감추는 스타의 내면적 신비를 구현한다. <인터뷰>를 통해 시에나 밀러는 제2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뉴욕의 잇걸이 인디영화계의 뮤즈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던 <피츠버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며 피츠버그를 ‘쉿츠버그(Shitsburge)’라 비하한 탓에 구설수까지 오르다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시에나 밀러의 행보는 인상적이다. 뉴욕 태생이지만 유년시절을 런던에서 보낸 시에나 밀러는 스스로를 ‘뼈 속까지 영국인이라 주장한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두른 그녀의 감수성은 LA의 태양과 런던의 구름을 닮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사랑의 순간>에서 시에나 밀러는 불안과 인내를 한 얼굴에 담아 간절한 애증을 전한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은 기존의 시에나 밀러를 잊게 만들 만큼 낯선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특유의 금발머리를 가리고 흑색 가발을 착용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악역 배로니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은 시에나 밀러 자신에게 있었다. “선악을 오가는 캐릭터라 소화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육체적으로 강인한 스타일은 아닌데 액션 신을 잘해 내기 위해 6주 동안 무술 훈련을 받았다. 사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규모를 완전히 벗어난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큰 규모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블루매트 위에서의 액션은 그녀에게 온전히 새로운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블록버스터는 독립영화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모험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에나 밀러는 그렇게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내년 초로 결정된 후속편의 촬영을 또 한번 고대하는 중이다.
“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이란 허풍을 믿지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그 믿음처럼 시에나 밀러는 지금 제 삶을 결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시에나 밀러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세기 희곡 <미스 줄리>를 현대적 배경으로 각색한 <애프터 미스 줄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한 바 있는 시에나 밀러에게 어쩌면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팩토리걸>은 분명 시에나 밀러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에디 세즈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뮤즈는 과거완료형의 삶이다. 시에나 밀러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산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쳤다.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뮤즈는 성장한다.
히치콕이란 이름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절대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장르를 설명하는 절대명사다. 히치콕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스타일이며, 규칙이고, 철학으로 군림한다. 히치콕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의 양식을 자신의 창작에 투영하며 오마주의 제의를 치른다. Hitchcockian의 순례를 떠난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아버지, 거대한 수사로 치장한 히치콕은 동세대와 후대의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그 영향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항상 1순위로 언급되는 브라이언 드 팔마는 <드레스드 투 킬>을 통해 히치콕의 양자가 됐다. 너무나도 유명한 <싸이코>의 욕실 살해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드레스드 투 킬>의 관능적인 도입부 샤워신은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 얼마나 매료됐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드 팔마는 스스로의 입으로 ‘히치콕의 영향력’을 공언함으로써 그 명예를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그 후로도 드 팔마는 <필사의 추적>의 우스꽝스러운 샤워신으로 <싸이코>의 샤워신을 다시 한번 재해석한 뒤, <이창>과 <현기증>을 아우르는 <침실의 표적>을 통해 히치콕의 영향력을 온전히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런 드 팔마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두고두고 드 팔마의 발목을 잡는다.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친 드 팔마의 명예는 오늘날에 이르러 드 팔마를 히치콕의 모방자라고 낙인 찍게 만들었다. 사실 드 팔마의 관심은 히치콕에만 집중된 건 아니었다. 드 팔마는 히치콕과 동시대의 거장이었던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리메이크했고,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적 장면이라고 일컫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시퀀스를 <언터쳐블>에서 고스란히 재현하며 에이젠슈타인을 오마주한다. 하지만 일찍이 <그리팅>과 <시스터즈>를 통해 히치콕의 ‘관음증’과 ‘현기증’을 흠모했던 드 팔마는 히치콕의 후광을 통해 영예를 얻었으나 히치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방범으로 전락했고, 드 팔마 스스로도 히치콕과의 비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근작인 <블랙 달리아>는 현재 드 팔마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가까운 히치콕 ‘강박관념’에 빠지고 말았다고 느끼게 만들 정도다. 드 팔마의 불행은 그가 ‘히치콕을 너무 많이 안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거듭 감상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더 배울 만한 게 있다.”이는 마틴 스콜세즈가 영국의 영화지 <사운드 앤 사이트>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다. 드 팔마와 동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기도 하는 마틴 스콜세즈는 보다 영리한 방식으로 히치콕을 흠모했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명장면을 재해석하며 모방의 오명을 썼던 것과 달리 마틴 스콜세즈는 히치콕을 참고하는 방식으로서 그의 장기를 자신의 영화에 녹여냈다. <택시 드라이버>의 오프닝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 트래비스의 눈동자 클로즈업은 <현기증>의 그것에 가깝다. 히치콕의 <오인>을 연상시키는 카메라 기교와 히치콕의 시점이 적극 반영된 듯한 뉴욕 시내의 주관적 묘사로 가득한 <택시 드라이버>의 긴장감은 히치콕을 참고한 영화광 마틴 스콜세즈의 전리품에 가깝다. 히치콕의 작품에서 음악을 전담했던 버나드 허만을 삼고초려한 끝에 그에게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맡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버나드 허만의 유작이 된 <택시 드라이버>는 <싸이코>의 그것만큼이나 감정적 파고를 일으키는 음악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스콜세즈는 히치콕의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솔 바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기도 했다.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 진정한 영화의 시작이 이뤄진다’고 말하기도 했던 스콜세즈는 <좋은 친구들>부터 <카지노>까지 솔 바스가 디자인한 오프닝 타이틀을 사용한다. <카지노>는 결국 솔 바스의 유작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두 사람이 스콜세즈의 영화를 통해 유작을 남긴 셈이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달리 스콜세즈는 히치콕과 함께 수많은 감독들의 영향력을 들먹이는 영화광의 면모를 과시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참고사항으로서 히치콕을 나열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스콜세즈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스페인의 샴페인 광고에서 ‘히치콕이 남기고 간 3페이지짜리 미완성 트리트먼트가 있었다’는 거짓말로 무성 테크니컬러 단편을 만들기까지 했다.
앞선 두 감독과 다른 의미에서 거장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히치콕의 양자다. 스코티의 고소공포증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줌렌즈와 트래킹 샷을 결합해 활용한 <현기증>의 '줌 인 트랙(Zoom in & track out)'기법은 <죠스>에서 해변가의 상어를 처음 목격하는 브로디 서장의 시선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또한 <죠스>는 <새>의 해양버전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는데 무방비 상태로 수면에서 유영하는 인물에게 접근하는 백상어의 모습은 사람 주변으로 한 마리씩 모여드는 새들의 집결만큼이나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았던 J.D 카루소의 연출작 <디스터비아>와 <이글 아이>는 노골적인 히치콕의 차용에 가깝다. 히치콕의 <이창>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각각 차용했지만 두 작품은 히치콕의 작품과 전혀 다른 판본이다. 히치콕의 두 작품이 마치 잘 볶은 원두커피처럼 중후한 향을 낸다면 J.D 카루소의 그것들은 커피우유처럼 가공된 오락영화의 단맛을 뽐내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스필버그는 <디스터비아>가 <이창>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이창>의 판권소유자로부터 피소 당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히치콕이 살아생전에 스필버그를 ‘물고기를 만든 소년’이라 비하하며 만남을 간청하는 스필버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일화만큼이나 굴욕적인 사건이다.
히치콕은 나이와 국경, 분야를 초월하며 매혹을 선사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이야기적 방식인 맥거핀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를 온전히 반영하는 작품이다. 또한 브라이언 싱어의 근작인 <작전명 발키리>에서 슈타펜버그 대령이 히틀러를 테러하기 위해 폭탄을 숨기는 장면은 프랑수아 트뤼포와 히치콕의 유명한 대담 가운데 등장했던 맥거핀 이론의 사례와 명확히 닮았다. 한편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조지. A 로메로의 <나이트라이더스>에 ‘대형 샌드위치를 먹는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며 히치콕의 카메오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한국의 봉준호 역시 히치콕과 비견되는 젊은 감독군에 속한다. 최근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출품됐던 <마더>는 현지에서 공개된 뒤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되며 호평을 얻었다. 오명을 쓴 남자, 관음증, 미묘하게 엇물려 돌아가는 내러티브, 그리고 결과적으로 맥거핀을 이루는 스토리텔링. 히치콕의 미스터리한 이야기 흐름과 서스펜스적인 연출이 깊게 관여한 듯한 <마더>는 히치콕의 영향력이 희미하듯 깊게 배어든 작품인 셈이다. 사실 봉준호가 맥거핀을 선호하는 스토리텔러란 점에서도 봉준호에게 히치콕의 영향력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알려진 것처럼 봉준호에게 <새> 리메이크 제안을 던졌다는 미국 에이전시의 안목은 괜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히치콕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를 바친 건 구스 반 산트다. 히치콕의 <싸이코>를 숏 바이 숏으로 완성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리메이크라기 보단 일종의 필사본이나 다름없다. 문체가 다를 뿐 동어반복의 문장에 가까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원본과 완벽한 대조군을 이루는 필사본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까지 최대한 원작에 밀착한 방식으로 완성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온전히 평단과 관객에게 조롱 당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용감했다. ‘히치콕의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봉준호의 생각을 구스 반 산트는 자기 희생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졸작 <힛쳐>따위가 <새>가 방영되는 TV를 스크린에 노출시키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를 들먹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실로 정직하고 비범한 오마주다. 구스 반 산트야말로 뼈 속까지 진정한 Hitchcockian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