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지방 중학교에 부임한 국어 교사 미카코(아야세 하루카)는 남자배구부 고문을 맡게 된다. 나름의 열의를 갖고 훈련을 지도하려는 그녀와 달리 배구의 경험조차 없는 다섯 명의 부원들은 그저 새로운 여자 선생님이 고문으로 왔다는 사실에 그저 희희낙락이다. 이에 배구 연습에 대한 열의를 심어주고자 미카코는 지역 대회에서 1승을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들은 이에 가슴을 보여달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응수한다.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게 된 그녀와 달리 아이들의 열의는 나날이 불타오르고, 이를 지켜보는 미카코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야동’ 제목이나 됨직한 <가슴 배구단>은 <몽정기>와 <워터 보이즈>를 적절히 배합시킨 듯한 청춘 스포츠 코미디물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내며 공기 중에서 가슴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성적인 호기심이 팽배한 10대 중학생들의 미워할 수 없는 덜 떨어진 행태를 지켜보는 재미와 그런 아이들을 나름의 열정과 애정으로 돌보며 한층 성숙시켜나가는 여교사의 화학 작용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인 것. 예측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진전시켜나간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빤하지만 의도대로 기승전결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정직하다.
<가슴 배구단>은 가슴을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불타오르는 소년들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의 딜레마가 그 자체로 코믹한 소동극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의 성장과 성숙을 다룬 성장극이기도 하다. 가슴을 보겠다는 열의로 배구에 매진하던 소년들은 점차 향상되는 자신들의 기량을 통해서 성취감을 얻어가고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던 배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또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강박을 떨치지 못했던 미카코 역시 아이들을 지도하던 중 불거진 오해로 인해서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진정한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
순진한 소년들의 정서만큼이나 순수한 영화의 정서는 마냥 선하다기 보단 선한 이들로 이뤄진 정서적 합리를 제시한다. 강스파이크를 노리며 크게 휘두르는 절정을 연출하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기분 좋은 웃음으로 리시브를 받아 올린다. 물론 그만큼 결정타가 없다는 인상도 들지만 결코 경기를 내주지 않는 안정적인 운영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일본 청춘 코미디 특유의 낙관이 지배하는 인상도 들지만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고 깜찍해서 외면할 수 없다.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아야세 하루카의 귀여운 매력도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특히 가슴에 배구공을 넣고 유쾌하게 손을 흔드는 소년들의 안녕은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114,457,768 vs. $39,722,689. 메이저리그의 최고팀과 그 아래에 있는 팀보다도 더 밑바닥에 있는 팀의 간극은 저 수치로 정리된다. 선수 몸값의 총액이 곧 팀의 실력을 대변한다. 수치만으로도 명백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이는 메이저리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종목의 프로스포츠 대부분은 구단의 빈부격차를 통해서 순위의 계층화가 손쉽게 이뤄진다. 뉴욕 양키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통점은 실력 있는 부자 구단이라는 것. 부자 구단들은 한 시즌이 마감되면 자본을 투여해서 스타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하거나 스타를 길러낸 가난한 구단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자 구단의 선수 수집을 넋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디비전시리즈. 3점 차로 앞서고 있던 오클랜드가 양키스에게 역전당하자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끝내 패배. 그해 오클랜드는 양키스에게 리버스 스윕, 즉 시리즈 역전패를 당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라디오가 멀리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오클랜드의 단장이다. <머니볼>은 빌리 빈에 관한, 그 빌리 빈이 이뤄낸 메이저리그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다.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야구기록 통계 시스템에 빠삭한, 야구 경력이 없는 경제학 전공의 직원을 고용하고 기성 야구계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서 자신의 시스템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적 실화가 담긴 경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옮겨졌고, 베넷 밀러의 지휘 아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머니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몇몇 인물의 형태가 영화를 통해서 변형됐고, 연출적 감각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찰나들이 예감되지만, <머니볼>은 드라마틱한 현실에서 길어낸 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영화, 그것도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도식적인 예감을 부른다. 주목할 것은 일찍이 <카포티>로 할리우드 감독상을 거머쥔 베넷 밀러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가인 아론 소킨이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화신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리고 <머니볼>은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전기가 아니었듯이,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로 완성되지 않았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라는 인물보다도 흥미로운 건 그의 행위적 근간이 되는 경험과 심리의 탐색, 그리고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의 관찰에 있다.
상실의 에너지를 페이스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 마크 주커버그처럼, 빌리 빈 또한 실패의 에너지를 파격적인 구단 운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다. <머니볼>은 야구 영화라기 보단, 야구가 등장하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해서 직접 경기를 관람하지 않는 빌리 빈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처럼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서사 속에 내재된 심리를 관객의 감상에 투영해내는데 여념이 없는 작품이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제스처로 자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능한 빌리 빈이 텅빈 그라운드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그 단적인 풍경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적 간극과 고충이 오롯이 와닿는다. <머니볼>은 리드미컬한 서사적 운용과 탁월한 공간감의 활용을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추적하고, 광활하게 펼쳐놓는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텔링을 베넷 밀러가 유연하게 세우고 맞춘다.
배우들의 공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머니볼>에서 브래드 피트는 지휘자와 같다. 마치 더 이상 근사한 외모로서 언급되길 거부하듯이 유려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장악력을 드러낸다. 또한 빌리 빈을 보좌하는 경제학도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피터 브랜드 역의 요나 힐과 오클랜드의 감독 아트 하우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극적인 흐름에 긴장과 흥분을 불어넣는 스페셜리스트의 위치를 점한다. 또한 모든 배우들은 훌륭한 화음을 자랑하는 관현악단과 같이 자신의 파트를 군더더기 없이 연주해낸다. <머니볼>은 팀워크가 뛰어난 영화다. 그랜드슬램 한방보다도 팀 배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루타를 치고 나가며 출루율을 높여나간다.
<머니볼>은 개혁과 진보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그 과정을 이겨내는 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경험적 밑천으로 삼아서 새로운 사고를 실행으로 작동시킨 남자는 결국 그 신의 변화를 주도해내고 갈등과 불화를 견디며 새로운 답안을 정착시킨다. 물론 그 방안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빌리 빈의 정책에 따라서 오클랜드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또한 빌리 빈의 방식을 응용한 다른 팀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빌리 빈의 방식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영화적 시선은 어쩌면 공정한 것이다. 의외성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고 통계에 기대는 기계적인 운영을 통해서 시즌 운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결국 아이러니다. <머니볼>은 결국 그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성취로 환호했던 그라운드의 적막을 홀로 차지한 채 드러누운 빌리 빈의 모습이, 독보적인 스카우팅으로 게임을 지배한 덕분에 거액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게 된 빌리 빈의 선택은, 어떤 통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의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태극기 휘날리며 국가의 위상을 높여주길 바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퍼포먼스는 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는, 혹은 군대 면제와 포상이라는 실물적인 거래로 환산된다. 이는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준 대한민국 1등 국민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지불, 그리고 이를 통해서 국가에 대한 더 없는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홍보 수단으로 변질돼 간다. 스포츠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최고 수단이다.
미키 워드는 WBU 웰터급 챔피언 경력을 지닌 미키 워드는 화끈한 난타전을 불사하는 인파이터로 정평이 난 복서였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메사추세스 로웰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을 포함한 9남매 가운데 유일한 남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프로복서였다지만 약물에 중독된 퇴물 복서에 가까운 형의 트레이닝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푼돈에 가까운 파이트머니를 좇다 아들을 백업선수로 전락시킨 어머니의 매니지먼트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처럼 정신력으로 자신의 삶의 키를 놓지 않고 전진했다.
<파이터>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에 관한 전기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단순히 미키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을 극복해낸 인간의 집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터>는 주인공을 접대하지 않는 작품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아웃포커싱시키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포커싱을 맞춘 작품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키 워드의 인간 승리적 드라마를 정직하게 연출해내는 빤한 방식보다도 그 주변부에 놓여 있는 이들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인물들은 바로 미키 워드의 형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와 그의 어머니(멜리사 레오)를 포함한 9남매들, 그리고 그의 애인 샬린 플레밍(에이미 아담스)이다.
이런 측면은 <파이터>에 대한 장르적인 기대감을 바로 잡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싶게 만)든다. <록키>를 비롯한 아메리칸 드림의 복싱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드라마틱한 스토리, 즉 가난한 복서가 지난한 삶 속에서 결국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은 <파이터>의 골자가 될만한 유력한 스토리 문법에 가깝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전형적인 문법에 따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영화를 원한 것 같다. 쉽게 정리하자면 <파이터>는 어떤 유망한 복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난한 가족에 관한 실화를 재현하는 가족드라마다. 이는 복싱영화라는 측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희석시키고 스포츠영화로서의 쾌감 역시 반감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외적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 의외적인 선택이 되레 전략적인 목표를 거뒀다고 말해도 좋을 결과물로 완성됐다. 이는 저마다의 인물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로 인해 <파이터>는 캐릭터 영화와 같이 캐릭터 자체를 지켜보는 관찰적인 재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건 배우 개개인의 극대화된 역량이다. 마크 월버그가 ‘단단한 주먹’이라면 크리스찬 베일은 ‘현란한 스텝’에 가깝다. 체급을 바꾼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의외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에이미 아담스도 돋보인다. 관록 있는 선수가 경기를 이끌어 나가듯 캐릭터를 운영하는 멜리사 레오는 영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리드한다.
<파이터>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차범위를 활용할 자질의 여분이 부족하다. 이는 되레 이 영화의 연출력과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보다 돋보이게 만든다. 복싱 시퀀스를 마치 중계적인 광경처럼 연출해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이는 <파이터>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적 각색이라는 느슨한 우회론을 택하지 않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탈피해냈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가 지닌 가능성의 단면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 같이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런 장점들은 완전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큰 기대를 품게 만들지 않는 선수의 인상적인 경기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느낌과 같다.
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어머니는 희망한다. 자신의 딸이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길. 그리고 믿는다. 그것이 딸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딸은 희망한다. 미인대회 단상에 서는 것 따위보다 자신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믿는다. 분명 지금과 또 다른 현실이 내일엔 존재할 것이라고. 블리스(엘렌 페이지)는 도회지와 거리를 둔 시골마을의 평범한 학생이자 딸이다. 지극히 평온하여 지루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일탈을 꿈꾸던 블리스는 조약돌처럼 날아든 롤러 더비의 풍경을 목격하고 이는 소녀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결국 그 파문을 따라 헤엄쳐 나가듯 롤러 더비에 발을 들이게 된 블리스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수면 위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물살을 헤치듯 그 삶을 갈라 자신만의 내일로 나아간다.
<위핏>은 평범함을 옳고 바른 삶이라 강요하는 부모의 훈계에 갇혀 있던 소녀가 자신의 역동적인 삶을 찾아 저항하는 하이틴 무비의 혈기를 품고 있다. 사실 성장드라마라는 공식 안에서 지극히 정형화된 범주의 기승전결을 선보이지만 <위핏>은 불필요한 반항적 혈기보다도 자신만의 삶을 갈망하는 10대의 건전한 정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삶을 관철시키는 영민한 태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10대 소녀의 성장을 관통하는 동시에 소녀의 주변 환경을 채우는 인물들의 내면적 진심을 깊이 있게 포착해낸다. 결국 어느 개인의 성장을 이루는 건 그 개인의 영민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바이기도 하겠지만 그 주변 환경의 성숙을 통해서 보다 단단하게 일궈질 수 있음을 <위핏>은 설득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삶의 자극을 꿈꾸던 소녀의 선택을 단순한 관대함이 아닌 진정한 이해의 눈길로서 조명한다.
(국내 관객에겐 다소 낯선 감상을 제공할만한)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 <위핏>은 성장드라마로서 내면적 질량을 채우는 동시에 스포츠 영화로서의 외형적 부피를 확장하는, 밀도가 단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경사진 트랙 위에서 빠르게 내달리는 동시에 거친 몸싸움을 불사하는 여성들의 롤러 더비는 <위핏>에서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이는 롤러 더비의 현장감을 생생히 담아낸 카메라 워크의 탁월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진짜 자신의 육체를 롤러 더비에 적응시킨 배우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바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의 한 켠에서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훈련 과정은 영화를 위해 헌신한 배우들의 진심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는 일찍이 파란만장한 성장사를 견뎌낸 드류 배리모어의 첫 번째 연출작이란 점에서도 보다 특별한 외부적 감상을 부른다. 이른 10대 시절부터 삶의 정체성에 깊은 혼돈을 느꼈던 그녀의 경험담이 역설적으로 보다 담백하고 진솔한 성장드라마의 고민으로서 투영됐다 말해도 좋을 만큼 <위핏>은 서사적 익숙함을 정서적 체온의 깊이로 극복해낸다. 또한 그 연출적 진심을 대변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한 평형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특별한 곡예를 선보이는 선수들처럼 유쾌한 활기와 원숙한 관록을 갖춘 배우들의 앙상블이 영화의 정서를 두텁게 매만진다. 이는 <위핏>의 긍정적 에너지로서 보존된다.
미인대회의 단상에서 본인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연출해내던 블리스는 거친 롤러 더비 트랙에서 자신의 진정한 미소를 발굴해낸다. 스스로에게 강압된 궤도를 이탈한 소녀는 그 새로운 궤도 위에서 자신이 원하던 방향을 찾아 내달린다. 그리고 그 내달림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옥죄던 어머니의 강압에 반항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진심을 설득해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결국 소녀는 성숙한다. 물론 그 성숙 이후로 블리스의 삶이 온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라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보다도 그 경험의 순간들을 지난 소녀의 현재는 분명 남다른 것이다.
<위핏>이 선사하는 결말부의 낙관은 소녀의 도전을 위한 보상을 마련하기보다도 그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끌어올린다. 굳이 승리로서 그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기보다도 그 도전 자체가 이루는 경험적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개개인의 인생이란 승리와 패배로서 주연과 조연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삶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한다. 누군가를 누르고 승리를 만끽할 수 없다 해서 그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건전한 가치관을 탁월한 드라마의 리듬감과 유쾌한 활기로서 설득한다. 그 트랙 위의 질주는 결국 승패보다도 성숙을 위한 것이었음을 끝내 설득한다. 그리고 빠르고 단단한 스포츠 성장드라마 <위핏>을 선보이며 감독으로서 영역을 옮긴 드류 배리모어의 데뷔전은 분명 성공적인 것이다.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