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절 미국에 침투해 잠복해 있던 러시아 스파이들이 일거에 미국 공격을 개시한다는 ‘데이-X’라는 냉전시절 가설에 대한 신빙성을 묻기 전에 이 낡은 가설이 여전히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작품이나 야심의 그릇만 그럴싸한 아류작에 불과하다.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설정 자체가 진부한 이 스파이물은 이를 극복할만한 대안으로 안젤리나 졸리라는 여배우의 매력 자체를 내세워 끊임없이 액션의 보폭만 넓혀 나간다. 어쩌면 단지 우격다짐처럼 액션을 밀어넣을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본래 목적이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 눈요기 역시 그 모든 단점을 덮을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영춘권의 계승자이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엽문>은 <황비홍>시리즈를 비롯해서 <정무문>이나 <무인 곽원갑>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전기영화다. 실존했던 중국 무술 대가들의 일대기를 조명하며 그들의 현란한 몸놀림을 재현하는 쿵푸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활약상을 외세의 탄압 앞에 무너진 민족저항주의적 정서의 고취와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뚜렷한 연관성이 발견된다.
<엽문>을 잇는 <엽문2>는 그런 자질을 명확하게 계승하는 속편이다. 일제 치하 중국 불산을 배경으로 망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된 쿵푸영웅을 그려내던 일대기는 영국의 치하에 있던 홍콩으로 무대를 옮겨 비슷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동족 고수들의 도전을 얻고 그들과의 갈등을 물리쳐야 하는 절대고수로서의 숙명은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외세의 강압에 맞서는 숙명으로 발전된다. 내부의 갈등을 다스린 뒤, 외부의 적에게 맞서 내부의 화합을 도모하는 민족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승화된다.
일본군의 폭압에 저항하며 그들의 결투를 받아들인 엽문(견자단)은 그 결투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총상을 입고 좇기는 신세가 되어 홍콩으로 몸을 피한다. 홍콩에서 몸을 회복한 뒤 도장을 연 엽문은 좀처럼 관원이 들지 않는 가운데 생계난으로 전전긍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도전한 황량(황효명)을 제압한 엽문은 그로 인해 많은 관원을 두게 되고 점차 세를 불려나가지만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던 홍진남(홍금보)의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제자들로 인해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한다.
이소룡, 성룡, 이연걸의 계보를 잇고 있다 해도 좋을 견자단의 출연은 정통무협을 표방한 <엽문>에서 가장 큰 매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엽문2>는 홍금보의 가세를 통해 정통무협으로서의 기대감을 더욱 끌어올린다. 일찍이 <살파랑>에서 한차례 합을 맞추며 박진감 넘치는 결투신을 연출한 바 있는 홍금보와 견자단의 재결합이란 점에서도 기대에 대한 근거는 확실하다. 이에 화답하는 두 사람의 원탁 결투신을 비롯해 어시장에서의 다찌마와리 신은 <엽문2>에 얹힌 기대감을 보답하는 광경임에 틀림없다.
<엽문2>는 <엽문>과 마찬가지로 액션신보다도 인물에 대한 성격을 묘사하는데 보다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작품이다. <엽문>이 볼만한 액션영화를 넘어 전기영화로서의 깊이를 품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태생적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도를 지키면서도 순간적인 폭발력을 자랑하는 견자단의 액션도 그런 영화의 태도와 효과적으로 어울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엽문2>는 클라이막스에 다다라 인물의 비장한 태도에 도취된 것처럼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치장한다. 중화주의적인 영화라는 오명까지 덧씌울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영국 치하의 홍콩에서 불합리한 외세에 억눌림 당하는 자국민의 한을 대신해 링에 오르는 엽문의 결투에는 육체나 정신에 깃든 자존감보다는 미화를 위한 비장함의 연출만이 거듭 확인될 뿐이다. 이는 이전까지 영화가 연출하던 어떤 고무적인 감정을 희석시켜버린다는 점에서 보다 아쉽다.
하지만 <엽문2>는 최근 대작에 심취한 어떤 중국발 블록버스터보다도 내실 있는 압권을 전하는 대륙영화다. 과거 무술영화에 대한 향수를 지닌 관객에게는 더없이 반가울, 혹은 현대영상기술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액션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중후한 체험이라 할만한, 중국 무술영화의 양자로서 손색이 없는 자격을 지니고 있다.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어느 한가한 오후, 아내가 정성껏 차린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어린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의 집에 두 명의 괴한이 침입한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클라이드는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만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아내와 딸의 죽음을 잊을 길이 없다. 범인들은 경찰에 의해 검거됐지만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검찰은 자신의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겠다는 한 명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처벌을 방임한다. 담당검사 닉(제이미 폭스)의 설명을 듣게 된 클라이드는 망연자실하고, 법정의 무죄선고에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부터 뒤돌아 선다.
(본래 작품과 무관한 일이지만) 정직한 제목이 우스꽝스럽게 읽히는 <모범시민 Law abiding citizen>은 문제의식이 뚜렷한 주제를 품고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가 정의적인 질서를 구현하지 못할 때 그 제도적 맹점에 희생된 개인으로부터 체제적 위기가 도래한다. 법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법을 따르는 개인의 배신감은 거대한 복수심으로 변질된다. 선량한 모범시민은 지독한 괴물로 변태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범시민>은 근래 개봉작 가운데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함의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뼈대만 앙상한 제도적 권위 속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건 부조리한 힘과 폭력이다. 개인의 사소한 억울함이 방치되거나 외면당할 때 제도적 정의는 일거에 무산된다. 직접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범시민>의 클라이브는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나 다름없는 셈이랄까. 그만큼 문제제기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비범한 현실적 고민을 품은 작품이라 인정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모범시민>은 그 주제의식의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제도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낼 뿐, 그 결함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물론 문제의식을 전하는 작품이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의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스스로가 표한 그 문제의식은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다. <모범시민>은 문제의식을 손에 쥐고 있지만 단단하게 주무르지 못한 탓에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영화다. 클라이브가 표하는 분노엔 실체가 있다. 그러나 <모범시민>에서 그 실체는 단지 액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스릴을 그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분노로 표방되는 감정적 진화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사건을 발전시키고 비밀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거대하게 부풀려진 비밀 너머의 진실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빌딩을 붕괴시킨 것이 도끼질의 위력이었다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성적 합의를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이다. 제도적 맹점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화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빌미로 발화된 이미지도 인상적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한다.
제이미 폭스와 제라드 버틀러를 비롯해 배우들은 적절히 제 역할을 해낸다. 특히 역할에 걸맞은 위엄을 전하는 비올라 데이비스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영화의 빈틈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양심을 팔아서 재미도 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의미도, 재미도 얻어내지 못하는 모범적인 실패사례다.
“나약함은 힘을 필요로 하고, 배신은 피를 부른다.” 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집단 ‘오즈누’의 수장 오즈누(쇼 코스기)의 대사처럼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리고 라이조(정지훈/비)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자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할만한 첫 번째 살인 임무 이후, 조직에 등을 돌리게 되는 라이조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이라 믿었던 ‘오즈누’를 떠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 달아나고 조직에 맞선다. <닌자 어쌔신>은 폭력적 강압을 강령처럼 받아들이며 유지되던 조직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투쟁을 선혈이 낭자한 살육적 이미지로 담아낸 B급 취향의 액션물이다.
<닌자 어쌔신>이 묘사하는 닌자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이나 다름없다. 유년시절부터 고아들을 모아 살인병기로 키워내는 비밀집단 오즈누는 닌자라는 존재감에 신비를 덧씌워 리모델링한 가상적 세계관이다. 은둔과 잠입을 장기로 뛰어난 암살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닌자의 베일적 존재감 자체를 도화지 삼아 상상력을 덧칠하고 스크린에 전시한다. 사실 이는 서양에서 제작된 오리엔탈리즘 소재의 영화들이 범하는 자아도취적 환상에 가깝게 보인다. 다만 그것이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세계관 안에서 펼쳐낸 과장이라고 납득했을 때 그 착시적 환상을 인정할만한 수준은 된다. <닌자 어쌔신>을 비현실에서 펼쳐지는 허구적 캐릭터들의 피범벅 액션물이라 이해하고 납득했을 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사실 낡은 유물과 같은 닌자를 현대시제 안에서 재현했다는 점만으로도 <닌자 어쌔신>은 이미 시대적 현실감을 거부하는 판타지다. ‘오즈누’가 ‘명성황후’시해에도 관여했으며 현대에서도 암암리에 중요한 암살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유로폴(Europol)’ 수사관의 발언은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구시대의 유물의 존재적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순에 가깝다. 비밀조직의 활약상을 구체화시킴으로써 조직의 연원적 깊이를 설명하고 은밀한 활동범위를 인지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허구적 환상을 실제적 세계관에 이입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다만 ‘명성황후’시해 사건, 일명 ‘을미사변’이 유로폴 수사관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손쉬운 예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그것을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가 배려한) 이벤트로서 마련된 의도적 삽입이라 인식한다면 심각하게 진지해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등장하는 TV속 한국사극은 일종의 애교다.
물론 <닌자 어쌔신>에 조준된 기대감의 팔할은 액션에 놓여 있을 것이다. 피칠갑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닌자 어쌔신>은 상업영화의 포맷 안에서 기획되고 제작되는 안전한 액션영화라고 하기엔 강력한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다. 도입부부터 고어적 수준의 신체훼손 이미지를 노출하며 그 이후로도 잔인한 장면들을 더러 연출해 보인다는 점에서 B급 취향을 과감히 전시한다. 물론 도입부의 살육신을 포함해 라이조와 오즈누의 일대 다수 대결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은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치적 효과보다도 육체적 스턴트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닌자 어쌔신>은 아날로그적 역동성을 만끽하게 만드는 올드한 감성의 액션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액션신이 밤시간과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묘사되고 빠른 몸놀림을 따라잡지 못하는 카메라엔 잔상이 가득한 경우가 많아 시각적 제약이 뒤따른다. 또한 지나치게 건조한 톤의 감정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액션을 구경한다는 것 이상의 흥분감이 동원되기 어렵다. 건조하게 스크린 너머의 액션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될 공산이 크다.
<닌자 어쌔신>은 대중적인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영화라기 보단 마이너적인 B급 취향의 액션영화라고 칭하는 게 보다 어울려 보인다. 게임이나 만화적 세계관에 심취했다는 워쇼스키 형제의 취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오즈누에 반발한 라이조가 그에 맞서 조직을 붕괴시켜나가는 과정은 흡사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의 활약상을 스크린에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이지마다 적절한 미션을 수행하고 그 끝에 다다라 최종 보스를 격파하면 게임은 끝난다. 그만큼 <닌자 어쌔신>은 단순하고 명확한 영화다.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액션신의 향연은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순차적인 수순 안에 놓여있기에 능동적인 예상을 무마시킨다. 예상범위 내에 명확히 갇힌 이야기처럼 그 사연의 진전을 통해 얻을만한 감흥은 얕은 수준이다. 덕분에 클라이맥스가 이루는 감흥의 세기도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디자인된 세계관을 품은 내러티브는 단지 게임적 세계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피소드적 장치에 불과하다.
만약 <닌자 어쌔신>을 할리우드 표준 규격의 대중적 액션영화로서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방향를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B급 취향의 하드고어 이미지를 저돌적으로 제공하는 영화로부터 취향의 소통불가적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을 적절히 감내할 수 있는 관객에게 <닌자 어쌔신>은 적절한 킬링타임을 제공하는 액션영화로서 유효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정지훈의 할리우드 주연작이란 사실에 기대감을 품은 국내관객에게 팁을 하나 주자면, 터미네이터적인 무표정을 일관하고 감정적으로 봉인된 캐릭터 라이조를 연기하는 정지훈은 묵묵한 액션 캐릭터로서 <닌자 어쌔신>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영화적 의도에 적합한 성과를 드러내지만 그 이상의 ‘연기’를 원했을 관객이라면 이 역시 기대적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1인칭 슈팅 게임, 일명 FPS게임을 즐기는 당신이 모니터 너머로 몰입하고 있는 캐릭터가 가상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 사람이라면 그건 과연 게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버츄얼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인간을 조종해서 서바이벌 게임을 펼쳐나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게이머>는 디스토피아의 껍데기를 두른 액션 영화다. 잔혹성을 망각시키는 게임의 폐해를 시뮬레이션되는 가상적 환각에 중독된 인간들이 넘실거리는 미래적 세계관과 연동한다. 현란한 액션신은 기이하게 지겹다. 창의적인 동선을 직조하기 보단 화면만 흔들어대는 통에 되레 시각적 피로감만 축적되는 느낌이다. 동시에 세계관의 디자인 역시 딱히 인상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상의 디스플레이는 미래적인데 어째 세상은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는 걸까. 액션은 진부하고 감동은 고리타분하다. 특히나 전형적인 용두사미적 한계를 여지 없이 드러내는 결말부까지 확인하고 나면 차라리 게임을 즐기기 위해 로그인하는 게 극장을 찾는 것 보다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란 확신을 클리어하게 되는 기분이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