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다.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시골로 전향된 김순경(엄태웅)을 비롯해 교수 임용을 위해 멧돼지에 관한 거창한 논문을 기획하는 변수련(정유미), 손녀의 복수를 위해 식인멧돼지 사냥에 나서는 천일만(장항선), 최고의 포수로 가오가 대단한 백만배(윤제문),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신형사(박혁권)까지, <차우>는 각자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다섯 인물을 통해 서사의 밑그림을 그린다. 한강괴물을 연상시키기 좋은 거대식인멧돼지와 함께 그 뒤를 쫓는 캐릭터 머릿수까지 <괴물>의 가족과 엇비슷하게 이뤄진 <차우>는 분명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중력에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괴수영화로서 <괴물>과 비교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환경을 무대로 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활용에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킬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는 유사한 소재와 환경적 구조를 선점한 두 작품의 후발주자로서 비교 대상의 운명에 놓였을 뿐, 봉준호의 두 작품이 <차우>를 포괄하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기시감이 명백할 따름이다.
소박한 표정 너머로 흉악한 인상이 감지되는 시골성의 전복적 기운과 거대 괴물의 출몰과 함께 그려지는 아수라장의 이미지까지, 한국의 토착성을 부조리하게 수식하는 사건들이 열악한 지방성의 감춰진 욕망과 함께 뒤엉켜 구른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소굴이자 기형적인 욕망으로 비뚤어진 인간들의 늪처럼 쇠락한 도시인이 모여들고 상승의 욕구로 팽배한 지방인들이 자리한 삼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의 풍자를 위해 가공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포악한 기질을 응축한 다큐적 질감의 오프닝 시퀀스는 <차우>가 본질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적 목적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노골적으로 증명한다. <차우>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낳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되레 그 괴물을 포획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안티-휴머니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예측불허의 슬랩스틱부터 엉뚱한 경로에서 끼어드는 캐릭터들의 난동극까지, B급 취향에 근접한 마이너 코드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의 기대감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다. 순수제작비 60억 대의 메이저 상업영화로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유머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는 <차우>를 불순하게 수식하는 동시에 특수하게 치장하는 배반적 장기로서 활용된다. 종종 위태로운 이음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플롯의 공백과 무뚝뚝하고 성긴 액션신의 연출이 매끄럽지 못한 장르적 자질을 인식하게 만들고, 연출력의 공백을 감지하게 만들지만 예측불허의 지점에서 난입하듯 발생하는 유머가 상황을 불식시킨다. 엉뚱하지만 때때로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괴수영화로서 영화적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차우>는 분명 배반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멧돼지와의 추격신과 액션신이 후반부에 집중된 건 CG예산과 관련된 집중력 문제에 있겠지만 ‘리얼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의 기대감을 양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분명 불만을 얻을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차우>는 쏠쏠한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괴수물로서의 위용과 B급 유희가 맞물리는 조합은 컬트적인 호응에 다다를만한 근사값을 이룬다. 대자본을 활용한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코드의 결과물은 무모함과 과감함의 너비를 확보한다.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적확하지 않다. 예측불허의 코미디 괴작이랄까. 예상하지 못했던 유머의 코드가 강하다. 유머의 속성도 예측범위 바깥에 있다. <차우>는 괴수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덧붙인 토착적 코미디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기시감은 선점된 이미지로서의 영향력이 크다. 부조리한 풍경 속에서 발췌되는 유머 코드도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 성격이 판이하다. (적어도 한국에선) 대작이라 불릴 만한 60억 예산의 괴수영화라는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정서의 유머 코드가 과감할 만큼 도처에 널려있다. 엉뚱하지만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다만 취향에 따라 몹쓸 시도나 배반적 결과로 구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토리 흐름의 이음새가 눈에 띄게 덜컹거리는 것도 단지 영화적 기운의 특이성을 넘어 연출적 공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괴수영화로서의 위용이 기괴한 유머와 맞물리는 조합은 가히 컬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장르적 기대감을 품은 어떤 관객에겐 배반적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분명 쏠쏠한 묘미가 있다. 상업영화로서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진다.
에로스에 대한 다섯 개의 시선.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누드 이미지를 내건 티저포스터는 <오감도>가 구사할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모종의 기대감과 동떨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오감도>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옴니버스이자 기획에 따른 기대감을 배반하는 결과물이다. 창의적인 해석력도, 과감한 묘사력도 선보이지 못한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에 가깝고,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에피소드를 통과할수록 티끌과 같은 권태가 쌓여나간다. 또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축적된 권태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행이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
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
화장실에 갇힌 호준(김재록)은 자신이 박대하던 계상(강지환)으로부터 구출된다. 아는 게 많은 호준은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계상을 박대하지만 정작 계상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방문자>는 결코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떤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버디무비이며 코미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 때, 우스꽝스러운 사연이 발생하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한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다.
계상을 멸시하던 호준이 계상에게 마음을 열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카림(마붑 알엄)과 ‘3m’떨어져 걷던 민서(백진희)도 어느 새 카림과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인 <방문자>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다. 카림은 계상을 닮았고, 민서는 호준을 닮았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똑부러지는 민서의 염세적인 표정은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정작 냉소와 비관밖에 거듭하지 못하는 호준의 무력한 표정을 연상시킨다. 그런 민서에게 카림은 ‘방문자’다. 계상과 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민서와 카림도 ‘반두비’가 된다. <반두비>는 별개의 세상에 놓여있던 두 사람이 하나의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방문자>를 연상시킨다.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반두비>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에 나열된 정치적 부조리를 스토리텔링의 근간으로 둔다. 고액의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서의 모습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는 재문(박희순)과 상사로부터 야간 출근을 통고 받은 예준(장현성)이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방조하게 된다는 과정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하기엔 현실적 리얼리즘이 지독하게 녹아 들어간 살풍경을 곧잘 묘사한다. <반두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떼먹고 부도를 낸 사장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영어에 목맨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희롱하는 백인 영어선생님 앞에서 방긋 웃는다. 비상식이 평온히 내려앉은 기이한 부조리는 정치적 메타포를 노골적으로 함유한 영화적 소재에 가깝다.
사실 현정권과 특정인물을 겨냥한 직설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정치적 색채가 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물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의도한 정치적 발언이 스토리텔링에 녹아 든 메타포의 양식으로 밑그림처럼 삽입되던 것과 달리 <반두비>는 좀 더 직설적인 강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정치적 발언을 던진다. 간접적인 매체와 사건을 통한 은유가 직접적인 행위나 대사를 통해 보다 쉽고 강하게 어필된다. 사실 <반두비>는 실상 징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신도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적 강제성에 대한 저항적 신념을 직설적인 이미지에 담아낸 <방문자>와 비슷한 양식의 저항적 변화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자>가 제도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소신을 정당하게 담아내는 것과 달리 <반두비>는 비난과 조롱의 수순에서 멈추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쾌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퇴보적이다. 또한 여고생인 민서와 이주노동자인 카림의 신분은 <방문자>의 두 남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징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반두비>의 정치성이 전작들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시간대의 현실을 인식시킬만한 소품들을 영화적으로 이양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적 리얼리티가 강렬한 탓에 때때로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하는 듯한 감상이 부여된다.
신동일 감독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매력은 정치적 주제가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치 피자빵에 얹혀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정치적 컨텍스트와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서로에게 녹아 내리듯 밀착한 채 함께 진전된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버디무비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상징을 연상시킬 때, 텍스트와 이미지에 입체적 풍요가 부여된다. 버디무비의 구도 안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자질까지 내포하는 <반두비>는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만큼이나 이야기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반두비>의 직설은 현실적 통쾌함이 보장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잠식하고 있는 듯한 비효율적인 불편함이 감지된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창작력을 침해할 만큼 현실의 정치적 공정성이 심각한 부조리의 수순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반두비>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 탓이다. 직설적인 정치적 언어가 강하게 인식되는 탓에 허구적 자질이 때때로 잠식되곤 할 뿐, 스토리텔러로서 신동일 감독의 재능은 <반두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단독 컷처럼 분리된 세계관에서 살아갈만한 두 인물을 투샷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설득력은 <반두비>에서도 탁월하며 이는 신동일 감독의 정치적 뜨거움보다도 대단한 성과다. 하이틴 무비의 경쾌함을 밑천으로 버디무비의 유쾌함과 로맨틱코미디의 순수한 자질을 흡수하고 블랙코미디의 감수성으로 아우르는 <반두비>는 작지만 다부진 민서의 눈빛만큼이나 강단이 뚜렷한 영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만한 백진희와 마붑 알엄의 기묘한 조합 역시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작품을 ‘반두비’라고 쓰고 ‘친구’라고 읽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두비’라고 읽고 ‘친구’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반두비>라는 제목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친구’가 아닌 ‘반두비’인 이유는 ‘반두비’는 ‘반두비’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반두비’는 영원히 ‘친구’로 해석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단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반두비>를 불순하게 인식하는 이라면 자신이 과연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건 세상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런 것만 보니까 그 따위로’사는 거다. 때론 현실의 편견을 부수고 불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밑천이 된다. 그리고 <반두비>는 그 가능한 변화들을 위한, 작지만 당찬 목소리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VIP시사회 때 어느 누구도 초대를 못했어요.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염려스럽고, 저도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 윤석 씨와 짝을 해서 그런지 보시고 난 분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조금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젠 다 돈 주고 보라고 하려고. (웃음) 5%정도 긴장감이 풀어지긴 했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니까 조금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중이죠.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텐데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저 어느 부분에서 연기가 좀 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했죠. 한두 군데 정도 캐릭터와 조금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라고 할까? 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몰라도 본인은 보이거든요. 아, 저기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게 있죠. 늘 보여요. 그래서 한번도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제작보고회 때는 데뷔하는 심정으로 연기했다고도 하셨죠. 아무래도 드라마 위주로 연기활동을 하다가 영화를 한다는 게 그만큼 부담이 되는 일이었나 보죠?
부담스럽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보여준 느낌이고, 그만큼 다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배우일 텐데 아무래도 스크린에선 괜히 달라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영화 촬영이 여러 방면에서 좀 더 섬세해요. 그래서 긴장을 받게 되는 것도 있고. 늘 어떠한 방면이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무슨 얘기할까 고민되는데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일단 마음이 신인 같아. 제가 신인의 자세로 찍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무 농담처럼 얘기한대. 진짜라니까! (웃음)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신인이라는 단어엔 설렘과 부담의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엔 너무 운이 좋았어요. 김윤석이란 배우와 같이 그냥 업혀가는 느낌이랄까? 거북이 등에 탄 느낌? (웃음)
김윤석 씨 때문에 영화를 선택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제 연기가 대형스크린으로 보여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영화는 거의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는 상대배우가 김윤석 씨라고 하니 너무 혹하는 거에요. 그러면 대본이라도 좀 봐야겠다 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종용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된 거고요. 만약 윤석 씨 얘기 못 들었으면 대본도 안 봤을 거에요.
대본을 보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돼요. 자신의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열과 성을 다하면서 뼈를 깎아가는 느낌으로 썼을 텐데 그걸 보고 나서 ‘저 안 해요’, 이러기는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못할 거 같으면 아예 안 봐요. 사실 영화는 워낙 제가 해보지 못했던 장르잖아요. 그리고 오래 전에 한번 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요. 그 이후로 작업도 철저해야 하고, 집중력도 요하는 작업이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도 아예 안 봤을지 모를 일인데 윤석 씨가 출연한다는 말에 보게 된 거죠.
김윤석 씨의 이전 출연작은 얼마나 보셨나요?
<타짜>도 봤고, <추격자>도 봤어요. <추격자>는 남편하고 둘이서 제일 마지막 걸 봤는데 보고 나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너무 섬뜩한 거에요. (웃음) 사실 우리 애기 아빠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자 배우 둘 다 너무 매력 있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는 배우가 ‘김윤석’, 그러니까 ‘정말?’ 되묻더라고요. (웃음)
좋은 연기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건 연기자로서 당연한 욕망이겠죠. (웃음) 반면 이연우 감독은 <거북이 달린다>가 첫 번째 장편 입봉작입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에 신인감독이라니 불안한 점은 없었나요?
저를 정말 편안하게 해줬어요. 사실 제가 프로포즈를 받고 한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못한다고 했었거든요. 상대배우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봤고 너무 작품도 좋았지만 그 땐 가족문제가 있었어요. 작년에 아이가 수능시험을 봐야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쉴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였죠.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하겠다 그랬는데 그걸 한달 동안 다 받아주셨어요. 제가 촬영장에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니까 자기가 적응하게 해 드릴 거라고. (웃음) 사실 저는 그래요. 일을 하기 전에 사람을 보고 반하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일하기가 참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이연우 감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이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배우한테는 이런 건가요?’ 물어보니까, ‘원래 배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게 영화’라며, ‘영화를 한편하고 나서 이 매력에 빠지면 다신 드라마를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설렘을 많이 줬죠. (웃음) 윤석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전에 이미 이연우 감독을 많이 믿게 됐고요.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원한다니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왜 꼭 자신을 선택하려 하는지 궁금하진 않던가요? 이연우 감독님께 한번쯤 여쭤보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봤죠. 대본을 보고 왜 꼭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데 처음 한마디가 ‘예뻐서요’, 이래요. (웃음) 사실 그래요. 나이 든 아줌마한테 예쁘다고 하면 좋죠. 그래서 막 웃었지만 ‘그건 제가 썩 좋아하는 답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어쨌든 저 아니면 안된데요. 사실 저 아니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저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충분히 다른 느낌의 조 형사 부인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그 쪽에서 견미리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프로포즈를 하니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조형사 아내가 어떤 걸까, 그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그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걸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에 약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고.
사실 대부분 시골의 아줌마를 연상한다면 조금 살도 찌고 느슨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의 아내는 오히려 그와 반대적인 이미지라 흥미롭더군요.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조금 더 변형을 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다섯 살 연상이고, 생활에 찌는 아내라면 기미도 거뭇거뭇하게 올라와 보여야 되고, 머리도 좀 부시시한 파마머리로 갔어야 되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너무 통속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아이들 머리도 한 올 한 올 다 빗겨서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게 딱 묶어주잖아요. 또순이 같이, 뭐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그런 느낌의 여자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좀 깐깐한, 깡 진 느낌? 제 나름대로 그렇게 바꿔보자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건 제 모습이 조금 고왔다는 거? 예뻤다는 게 아니라 조금 생각보다 곱게 보였어요. 사실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라인 하나도 안 그릴 정도로 화장을 거의 안 했어요. 그런데도 화장기가 있어 보이는 게 좀 아쉬웠죠. 그래서 다음에는 저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본래 얼굴이 어디 갈 순 없죠. (웃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신만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그 동안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회지 여성의 이미지로 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더 평범해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돼요. 체형 자체도 너무 슬림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슬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엉덩이에 속옷도 더 넣고 그랬는데도 영화로 보니까 조금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이 이래요.
결과적으론 그런 외모를 통해서 억척스러운 여자라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억척스럽다’는 단어가 표현이 강하게 들려서 그렇지, 사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형태에서는 이게 맞고, 저런 형태에서는 저게 맞을 뿐, 각자 거기에 잘 맞춰서 살다 보면 다들 억척스럽게 살 수 밖에 없죠. 보통 아줌마들을 보고 억척스럽다고 얘기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줌마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로서 그런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조형사가 주인공이라서 나중에 멋있어 지는 거지, 그게 실제 남편이라면 속 터져 죽을 거에요. (웃음) 생각을 해봐, 그게 무슨 형사야. 손가락 잘리고 들어오고, 무술 한답시고 어설프게 폼 잡는 거 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정경호를 때리려다가 맨날 다른 곳을 찍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를 치면서) 진짜 남편한테 뭐라 그랬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저러고 살겠냐고. 너무 영화에 몰입한 거지. (웃음)
조형사의 아내야 말로 진짜 내조의 여왕이죠. (웃음)
진짜 그래요.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양말 뒤집어 가면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웃음)
조형사의 아내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여자입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섬세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경험이 요구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굉장히 연기를 잘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20대 초반인데도 4~50대 감정을 다 표현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 친구들도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순 없겠죠. 아무래도 저희 같은 나이의 배우들은 자신 자체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내 남편이 누워있고, 내 새끼가 내 앞에 와 있고, 내가 부업을 할 때, 리액션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일상이니까.
상대배우의 안정감이 주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고요.
저희가 하루 만에 만화방에서 세 신을 다 찍었는데 마치 드라마 촬영하듯이 드르륵 찍어서 굉장히 편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만큼 윤석 씨가 잘 받쳐줬고, 잘 맞았다고 할까. 스폰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체형에 맞춰서 흔들리는 물침대? 라텍스 침대에 누우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하든 갭이 없게 안착을 해주는, 그런 느낌의 배우였어요. <거북이 달린다>에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보여주지만 사실 사이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심리적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저 거북이 등에 탄 느낌이었으니까.
영화에 대한 부담감을 적잖게 말씀하셨는데,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드라마는요. 오랜 시간 시청자들을 젖어 들게 해요. 그래서 처음엔 만약 영자로 시작을 했더라도 끝에 가서 견미리가 되죠. 오래하다 보면 다 제 화(化)되는 거죠. 제가 안 하고 다른 배우가 했다면 또 그 화(化) 되는 거에요. 그렇게 젖어 들어요. 제가 스크린이 무섭다는 건 농담이나 겸손한 말이 아니라 진짜 스크린이 무서워요. 드라마는 ‘쟤 왜 저래’, 그러다가도 그 다음 장면이 나오면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잘하면 되죠.
드라마는 매회마다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배우에겐 영화보다 좀 더 관대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죠. 모니터를 꼭 하고 나서 이번 주 저 신에서 제가 너무 아니었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수 있는 신이 있어요. 오늘 못했다면 내일 만회하거나 다른 신에서 강하게 임팩트를 주면 되고, 끝날 때쯤 평가를 한꺼번에 하거든요.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영화라는 건 깜깜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만큼 들통나거든요.돈 내고 영화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면 한마디씩 꼭 하잖아요. 그런 순간순간의 평가가 다 오죠. 적어도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 듣는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웃음) 기왕이면 잘 봤다 소리를 듣고 싶죠. 그런데 오히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이런 말보단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그냥 뭐가 좋았는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너무 강해서 딱 보고 나면 뭐가 좋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보단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면 벌써 그 연기에 젖어 들었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는 분절된 형태로 방영이 지속되는 만큼 연기톤의 변화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연기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이 있겠죠.
그런 것도 있어요. 그만큼 그 두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를 했을 땐 그 캐릭터에 젖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를 해보고 나니까 다음엔 발랄한 거 내지는 그렇게 삶에 찌든 억척이 아니라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의 억척스러움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고. 그러니까 작품에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죠. 영화배우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영화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브라운관에 비해 스크린이 크다는 점도 영화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결국 정말 잘해야 된다는 거, 공동작업인데 나 때문에 (한숨쉬면서)‘아~’, 이렇게 되진 말아야 되잖아요. 물론 어떤 일에나 그런 부담은 늘 있어요. 드라마에도 있고.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좀 더 큰 거죠. 그리고 스크린이 크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좀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된다는 점도 있죠. 드라마는 약간 생방송 같다고 할까. 드라마는 원투쓰리(카메라)로 순발력 있게 탁탁탁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서로 약속하고 다짐하듯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장르적으로 요구되는 연기가 다르죠. 그런 면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장르적 느낌을 다르게 만들긴 해요.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로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라 말해도 좋겠어요.
남의 등을 타서 넘었죠. 솔직히! (웃음) 저 혼자 막 달려가라고 하면 두렵겠지만 너무 푸근한 상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리드하는 대로 몸만 흔들어주면 될 정도로 편했으니까요. 정말 해피한 거죠. (웃음)
사실 그 동안 영화 제의가 없진 않았을 텐데 그 제의를 20년 가까이 뿌리쳤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시나리오를 본 영화는 거의 없어요. 강제로 집까지 보내서 2~3개 정도 본 건 있지만 대부분 보기 전에 일단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스크린이니까 자신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었던 거에요.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왔던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있었죠. 있었지만 저보다 괜찮은 배우들이 대신 하셨기 때문에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 제의가 왔을 때,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못하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이 했기 때문에 진짜 좋아졌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저도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전 그 감독한테 전화해요. 거보라고, 나 아니어도 너무 좋지 않냐고. 그건 진짜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욕심이 없다기 보단 그게 시청자나 관객을 위한 진짜 배려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제가 영화를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신기해해요. “이번에 영화 했지? 보러 가야지.” 이러면 “그래, 봐.” 이러면서도 보면서 뭐라 그럴까 걱정이 앞서요. 그리고 ‘뭐, 늘 저랬는데’, 이럴까 봐 걱정되고요. 배우로서 차라리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늘 똑같지’, 이러는 건 조금 섭섭하고 서운하죠. 제가 너무 많이 보여진 연기자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들이 좀.
사실 드라마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의 시골 형사 아내는 그 이미지만으로 특별한 변화라 인지될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제가 기존에 몇 년간 해왔던 캐릭터들이 야무지고 도시적인 느낌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제가 사극에서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해요. <거북이 달린다>에서 아내는 그런 면에서 다른 역할이긴 하죠. 장르를 옮겼기 때문에 시청자가 아닌 관객들이 제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영화 계통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했어도 윤석 씨가 잘 맞춰줬을 테고,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나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 별로 안 하거든요. 저희가 선택 받을 때, 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행복하긴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저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색깔이 달라지긴 하겠죠.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 배우의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역할에 따라서 사람을 멀게 느끼거나 가깝게 느껴는 거 같아요. 예전에 제가 <인현왕후>라는 사극을 할 땐 모든 분들이 다 저한테 착하다고 했어요. ‘아, 착한 사람 왔네’, 그랬어요. 왜 착한지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됐죠. 그런데 <대장금>을 하고 나니까, ‘어휴, 미워죽겠어! 어쩜 그렇게 독하게 해!’ 이러고. (웃음) 그러니까 역할을 잘 맡아야 돼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그래요. “엄마, 이젠 그렇게 악역 같은 거 하지마. 사랑 받는 역할만 해.”
자제 분의 수능준비 때문에 <거북이 달린다>를 고사하려 했다는 얘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악역을 맡지 말라는 자제 분들의 사소한 말이 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에겐 큰 고민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어쩌다 보니까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제 직업이 배우가 됐죠. 어느 순간에 제가 배우로 평가 받게 된 거에요. 직장인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 그런 사실을 평가해주겠죠.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연기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앞만 보고 뛰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연기자라고 평가해준 거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직업보다도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런 거 물어보시잖아요. “일이 더 중요해요? 가정이 더 중요해요?” 대부분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해요. 하지만 전 가정이 더 중요해요. 이상하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일도 중요하지만 제 가족들이 제가 일을 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럴 때 제 일을 찾는 거지, 제 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남편이나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돼요. 아이들이 조금 크다 보니까 점점 제 역할을 보게 돼요. 깍쟁이 같은 역할이라도 하면, 그런 역할 말고 집에 있는 평범한 엄마하라고. 그럼 이제 제가 설득을 시키죠.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도 있고, 선악이 분명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이렇다니 나도 조금 그렇게 해볼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웃음)
(웃음) 그럼요. 집안이 편해야 나와서 일도 잘되죠.
84년도에 탤런트 공채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84년 3월부터 입사를 한 걸로 됐지만 사실 83년도에 입사했어요. 제가 83학번이라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저는 연기의 ‘연’자도 몰랐죠. 원래 연예인에 꿈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가수 전영록하면 ‘와~!’하는 세대였는데 저는 그런데 무덤덤했고 오로지 무용밖에 몰랐거든요. 제가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오로지 무용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어쩌다 연기자로 입문하신 겁니까?
엄마가 우연히 원서를 갖고 와서 “얘, 한번 원서라도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이런 거 내면 큰일나.” 그랬더니, “얘는, 네가 되겠니. (웃음) 그냥 사진 하나 붙이고 한번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 빤빤하게 빗고, 엄마 블라우스하고 언니 큐롯(Culotte)바지 입고, 구두 하나 신고, 그렇게 원서 사진 찍어서 하나 붙여 보낸 게, 1차, 2차, 3차 다 통과해버린 거죠. 제 수험번호가 3316번이었어요. 그때 한 6천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스무 명 정도를 뽑았거든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런데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까 여자 10명 중에선 저 하나, 남자 10명 중에서 딱 한 명만 연예인의 ‘연’자도 모르는 친구였던 거죠. 있어요. 그 친구도 지금은 그만 뒀는데, 그 친구와 저만 카메라나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였어요. 남들은 다 연극이나 CF경험이라도 있었거든요. 방송국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 어디론가 가요. PD중에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찾아가는데 항상 둘만 그 자리에 앉아있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앉아있는 거죠. 오리엔테이션에서 워크샵으로 작품을 하나 해보는데 암기력만 좋지, 연기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서 헤맬 때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땐 1년 전속계약을 해서 월급을 줘요. 한편 출연하면 5천원을 의무적으로 주는 거죠. 1년 동안 월급을 받고 이걸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는 휴학했고 1년 동안 열심히 다녀야겠다,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안 해본 역할이 없었거든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었어요. 왜냐면 그땐 집전화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화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제가 항상 연락이 되는 사람 중에 껴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가면 뭘 시켰느냐, 더빙을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가 대부분 후시녹음이었잖아요. 군중 박수, 이런 것까지 나가서 해야 되는 거에요. 초인종 ‘딩동’소리 듣고 ‘누구세요’, 이런 것까지 입맞춰서 이펙트를 넣어주고. 제가 사실 더빙의 천재에요. 그때 1년 동안 다 배웠거든. (웃음) 그리고 그 1년 동안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걸로 제가 연기를 배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전속이 풀렸는데 365일 바쁘던 애가 이젠 일이 없는 거에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싶었죠. (웃음)
그게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의 시작이었군요. (웃음)
만약 제가 하고 싶었던 무용을 계속 했다면 아마 사랑 받는 무용가가 돼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분명한 건 제가 그냥 욕심이나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앞만 봤다는 거죠. 어떤 사심이 없었다는 거에요. 동기들이 주인공을 할 때 어쩌면 어린 마음에 아무래도 부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막상 질투하기 보단 내가 저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이걸 잘해야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저를 연기자라는 자리에 있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 일에 욕심내면서 스타가 되고자 했던 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오히려 다 없어졌어요.
사실 연기의 ‘연’자도 모르고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엔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연기자로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의 자각이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주기적으로 와요. 딱 십 년 된 해였는데 그 전까진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기를 했거든요. 일단 대본을 받으면 너무 예민해지고 두려웠어요. 맨날 대본을 껴안고 잤죠. 한 십 년간 정말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욕심도 없어지죠. 그런데 십 년 차엔 뭐랄까, 내 연기가 가짜구나 싶었어요. 그 때 45일 동안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대에 서는 게 도살장에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관객들 눈이 너무 무서웠고 미치겠는거지. 이건 가짜 연기인데, 이 연기를 갖고 매일 이 관객들 앞에 서는 게 옳은 일인가, 정말 몸살을 했죠. 그래서 그 연극이 끝나고, 그 다음에 들어온 드라마를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 둬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아마 본능적으로 열심히 했을 거에요. 그 전까진 제 연기를 모니터할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생각했죠. ‘아, 그래. 너도 조금 가능성이 있는 아이구나.’ 그렇게 십 년을 넘겼어요. 그런데 또 한번 십 년 차가 되니까 또 그게 오더라고요. 예전에 <사랑공감>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때 또 한번 느꼈죠. ‘아, 이게 또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잘해야 된다는 느낌. 그걸 지내고 나니까 그 다음이 다시 좀 쉬워졌어요.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 같은 일을 이십 년 정도 하니까 좀 익숙해지는 거 같아. (웃음)
그런데 <사랑공감>덕분에 상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웃음) 그런 것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자신의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날 밤에 문득 창가에서 제가 여태껏 어떻게 연기자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운 거에요. 사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버릴 수도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싹싹 잘도 빠져 나왔는지, 어쩜 그렇게 잘 버텼는지, 참 아무 생각 없이 버텼네 싶어서요. 어쩌면 욕심이 없어서 버텨진 거 같아요. 최고가 돼야겠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 스타가 돼야겠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걸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까 가능해진 거죠. 자기가 밑바닥부터 올라갔으면 몇 계단쯤 올라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건 쉬워요. 그렇게 어느 순간 딱 떨어지면 어떡해요. 그 괴로움을 참기 힘들죠. 그런데 학연이나 혈연, 지연이 없이 제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 오히려 저를 연기할 수 있게끔 해준 거 같아요.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가도 어느 틈엔가 인기 없이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와요. 그냥 툭, 툭, 툭 내려오면 되지, 뭐. (웃음)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도 왜 자꾸 자신에게 연기적인 기회가 주어지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요. “지금 당장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만 보면서 열심히 가다 보면 누군가 너를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더라. 그걸 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지마. 주변에서 함께 만들어주는 거야. 주변에서 너 최고야, 라는 소리가 나와야 최고지. 네 자신이 너 혼자 아무리 최고라고 해 봤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네가 최고가 되겠니.” 지나고 보면 참 운 좋았다 싶어요. 저도 자신이 없는데 누가 저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누군가 늘 찾아줘서 행복하게도 늘 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순간순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픽 나요. ‘어머, 네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웃음) 사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늘 감사해요. <사랑공감> 때는 주인공을 맡고 상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에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의 연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보다 훨씬 스타였던 분인데, “야, 너 이제야 그런 거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런 역할을 해?”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어요. “저는 그냥 견미리니까요.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그냥 배우니까요.” 제가 그 맛을 한번 봤다지만 그거 아닌 다른 걸 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배우라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 역할에 대해서 크기나 질, 양을 따지겠어요. 질이나 양은 제가 만드는 거죠. 5분을 나와도 5분 동안 제가 충실하면 아마 남을 거에요.
그런 생각들도 사실 당시엔 몰랐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일지도 모르죠.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게 아닐까요.
십 년 지나고 이십 년 지나니까 이런 말을 하지, 십 년 차 되는 해에도 너무 아팠고, 이십 년 차 되는 해에 또 아팠고,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오면 그 땐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때도 또 힘들어 지겠죠. 아마 그때마다 힘들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 아팠던 게 지금은 너무 많이 도움이 되니까 앞으로도 참아야겠죠.
나이에 따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아뇨. 그런 것보단 곱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기자는 너무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 젊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죠. 참 맞추기 힘들어요. (웃음) 그래도 저는 주름진 얼굴이 친숙하고,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비춰지고 싶어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터넷이 무서워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공인이라 그런 무서움을 감수하지만 아이들이 크니까 그게 아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줘요. 그래서 어느 때는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걔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있는 얘기만 하면 괜찮아요. 어느 때 보면 제 딸도 아닌데 제 딸이라고 올라와있을 때도 있다니까요. (웃음) 다만 기분 좋게도 예쁜 애들만 올라와있어서 다행이지. 내 딸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야. 그냥 추측해서 올렸나 보죠. (웃음) 그런데 어쨌든 걔들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연기자일 뿐이지,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이슈가 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거죠.
<거북이 달린다>가 본인에게 준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요?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 시나리오는 다 받아서 읽어봐야지! 이런 자신감을 줬어요. (웃음)
다음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났더군요. 주인공이라던데.
아, 그렇게 나갔더라고요. 사실 해볼까 생각하다가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홍보가 먼저 나가버렸죠. 연령대가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영화 개봉했으니까 이제 조금 더 쉬어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몇 달 지나가고 찬바람 불 때쯤 다음 작품 생각해보려고요. 이번엔 좀 많이 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생선가게 아줌마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 후딱 해버리니까요. 제 마음 저도 몰라요. (웃음)
<블룸형제 사기단>은 범죄물에 순수한 동화적 판타지를 결합한 또 다른 장르적 이종교배다. 백치미스러운 하이틴무비에 느와르적 서스펜스의 양각을 새겨 넣은 <브릭>과 전혀 다른 방식의 장르적 접합을 선보인다. <스팅>에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는 <블룸형제 사기단>은 버디무비 사기범죄물이라는 그릇을 고스란히 차용하되, 우정을 형제애로 변주한다. 스토리텔러와 액터, 마치 허구적 창작자와 유사한 사기꾼 형제의 역할분담을 통해 진전되는 사기행각은 한편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완전하다기보단 엉뚱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은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다채로운 동선을 이어나가며 영화적 매력을 더해나간다. 궁극적으로 <블룸형제 사기단>은 장르적 그릇보다도 그 안에 담긴 로맨스와 형제애라는 정서적 감흥이 중요해지는 영화다. 그만큼 결말에 다다라 이야기로서의 묘미가 손실되는 인상을 부르지만 장르적 쾌감을 대신할만한 감동적 자질은 폄하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블룸형제 사기단>을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유쾌하게 넘겨버린 라이언 존슨의 재능은 분명 현재진행형의 기대감을 얻기에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