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리얼이다. 리얼을 보장하는 건 실시간이다. 고로 10억의 상금이 걸린 인터넷 생중계 서바이벌 게임은 대세를 아는 기획이다. 문제는 이 서바이벌이 단순히 게임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수준이 아닌, 인생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진짜 리얼 서바이벌이라는 점에 있다.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대인들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듯 거액의 상금을 눈앞에 둔 게임 참가자들의 생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참혹한 세태를 방조한 자들에게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영화는 좀처럼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았고, 그 생존자의 기억을 더듬어 플래쉬백을 전진시키고,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서사의 구조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본질적인 이야기 구조다. 게임의 법칙 안에서 철저한 규칙성이 보장되지 않고, 우연을 필연처럼 눈가림하려는 수작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좀처럼 어리석지 않고서야 그 단점을 알아채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감정들이 연출되곤 하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수준의 비웃음을 유발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시작점을 결말에 전시할 때, 영화 자체의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똘똘 뭉친 이 영화가 내던지는 궁극적 원인이란 건 어지간해서 이해할 수 없는 비약적 현실이다. 물론 현실에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영화적 설득력은 그 어처구니 없음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체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10억>은 좀처럼 설득력이 없는 영화다. 그저 개똥철학을 담은 무책임한 혐오덩어리에 불과하다. 고생한 흔적이 확연한 배우들만 뒤늦게 안쓰럽다.
유년 시절 장난감 좀 가지고 놀아봤다는(?) 남자라면 ‘G. I.유격대’라는 타이틀의 액션 피규어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 아이. 조>)이라는 타이틀 너머에서 어떤 기시감을 발견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러니까 <지. 아이. 조>는 ‘G. I. 유격대’를 기억하는 어떤 한국 남자에게 그것이 ‘G. I. JOE’라는 미국산 본명이 존재했음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물론 ‘마징가Z’가 일본산이라는 진실을 접하고 수많은 아동들을 패닉으로 몰고 갔던 쌍팔년도의 추억에 비하면 이는 놀랍지도 않겠지만.
마블 코믹스에서 서사화된 <지. 아이. 조> 역시 어느 슈퍼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코믹스와 TV시리즈를 통해 큰 인지도를 형성한 작품이다. 하지만 액션 피규어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에 서사의 옷을 입히고 코믹스의 시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지. 아이. 조>는 기존의 코믹스 슈퍼히어로들과 출신 성분이 다른 작품이다. 액션 피규어로 구체화된 캐릭터들에게 세계관을 마련해주고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한다. 코스튬히어로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갖춰 입고 캐릭터의 개성을 대변하는 무기를 소지한 캐릭터들의 외형만으로도 캐릭터에 얽힌 사연이 만들어지고 화려한 액션 신이 예감된다. 마블코믹스가 ‘G. I. JOE’를 코믹스의 세계관에 전시한 것 역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킬 이야기의 잠재력에 주목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코믹스와 TV시리즈가 액션 피규어라는 뼈대에 서사의 살점을 바르는 작업이었다면 영화는 그 피부에 보다 화려한 의상을 착용시키는 과정과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 아이. 조>는 전시적 욕망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현란한 속도감과 거창한 스케일을 원투 펀치로 삼아 현란한 액션신의 공세를 퍼붓는 <지. 아이. 조>는 킬링타임의 목표를 적중하기 위한 이미지의 공세가 대단하다. 특히 단순 명확하게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자리를 잡은 캐릭터들의 대립구도는 손쉽게 대결의 이미지를 선점함으로써 액션을 연출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된다. 캐릭터의 다양성을 통해 다채로운 액션 이미지를 전시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지. 아이. 조>의 기본적인 장점에 가깝다. 히어로 코믹스의 요소들을 죄다 차용한 듯한 <지. 아이. 조>는 액션 블록버스터가 전시할 수 있는 총아적 이미지를 선사한다.
문제는 스토리다. 전시적 욕심에 비해 저능한 스토리가 영화의 오락적 묘미를 감퇴시킨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거창한 액션 시퀀스를 지속적으로 떠내려 보내지만 맨틀 역할을 하는 스토리가 잦은 균열을 일으키는 덕에 전반적인 영화의 완성도도 진동하는 기분이다. 열악한 스토리가 이미지의 쾌감을 증발시킨다. 때때로 심각하게 유치해지는 이야기가 화려한 액션신마저 저급한 수준으로 몰락시킨다. 가장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말할 수 있는 파괴적인 파리 추격신은 비윤리적인 인상마저 남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괴적인 욕망으로 파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광경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미국의 불가피한 사명임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만에 가깝다. 저능한 수준의 스토리에 못지 않게, 악질적인 자만으로 완성된 이미지가 오락적 쾌감이라는 편견을 타고 스크린에 전시된다. 하지만 그 이미지조차도 딱히 발전적이지 않다. 이미 수많은 액션 블록버스터들이 만들어낸 지난 이미지들을 나태하게 나열할 뿐이다. 마치 두뇌 없는 액션 피규어들의 현란한 움직임을 무작위로 감상하는 느낌이다.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쏘고, 베고, 찌르고, 가르고, 치가 떨릴 만큼 잔혹한 이미지가 눈 앞을 오간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더욱 잔혹한 건 그 이후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실로 잔혹한 영화다. 거침없는 시각적 자극을 견디고 나면 동통처럼 짓누르는 심리적 충격이 엄습해온다. 단편적인 이미지의 수준을 넘어 순수의 경지에 다다르는 극악한 세계관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든다. 좀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의문과 함께 감정을 후벼 파는 서스펜스가 한차례 휘몰아친 뒤 후두부를 강타하는 충격적 세계관을 전시한 후, 밑도 끝도 없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마터스>는 어딘가 불순하다고 의식되는 영화다. 극악한 참상 뒤에 베일을 벗는 끔찍한 세계관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의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선의도, 악의도, 결국의 해석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결말은 선의의 여운이라기 보단 악의적 도피처럼 느껴진다. 분명 어떤 의미로든 놀라운 영화다. 감탄과 탄식의 이중주로 놀라움을 채운 뒤 남는 건 끝없는 의문이다. 그러니까 대체 뭘 본거냐. 하지만 끝난 영화는 말이 없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그 불순함을 좀처럼 잊을 길이 없다.
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인 ‘팔레비 샤’왕가가 서독을 방문한다. 베를린에서 그들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발생하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반정부적 조직 ‘독일적군파(RAF: Red Army Faction)’가 창설된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리입트로이)와 그의 연인 구드룬 엔슬렉(요한나 보칼렉)을 주축으로 한 이 청년단체는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폭탄테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직의 방향성을 알린 뒤 시민들의 지지마저 얻는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지만 이듬해에 가석방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진보적 언론인 울리히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는 독일적군파를 행위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 헤롤드(브루노 간츠)는 이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그들의 심리를 추적한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이 증명하는 건 폭력의 전진이다. 이란의 전제군주를 맞이하는 서독 정부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정부에 반발한 시민의 일부는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자행한다. 대립의 형태로 맞선 신념의 구도는 점차 극단적 행위의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는 독일적군파는 점차 그 행위적 명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극단적 행위를 통해 신념을 관철하려는 바더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며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방식의 설득을 중시하는 마인호프는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며 바더와 대립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올가미에 걸려 검거되거나 이에 맞선 총격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단원이 늘어가고 조직은 점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과 테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역사의 몸통 위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자리한 독일적군파에 대한 가치평가를 걷어내고 건조하고 묵묵한 다큐적 질감의 영상을 가미하며 의문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 물론 <바더 마인호프>를 온전한 리얼리즘 필름의 시선으로 주장될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저서 ‘신화의 시간(국내 출판명, 원제 ‘The Baader Meinhof Complex’)’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기 보단 그 주변부에서 제기된 하나의 가설적 형태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을 때 보다 정당해진다. 동시에 <바더 마인호프>가 역사적 증언을 목표로 둔 영화라기 보단 그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서 논의의 진전을 꾀함으로써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작품이라 정의할 때 이런 배후에 대한 설득력이 보다 힘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자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외부자가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록에 근거를 둔 형태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건 그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증인들을 양산해낸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장을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한다는 것이 <바더 마인호프>의 궁극적인 가치다. 혁명과 테러를 오가는 역사적 정의 가운데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현상의 근본을 탐구하게 만든다. 특히 <바더 마인호프>가 그리는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이 단지 그들에게 국한된 역사적 장면이라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더욱 중요하다. 혁명이냐, 테러냐,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쉽게 논하기 어려운 건 그 시대가 머금은 광기가 선의를 악의로 잠식하고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진전시키는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이 폭력의 또 다른 주체가 되길 결심하고 죽음과 파괴를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 커다란 대의의 전진이 아닌 세계의 또 다른 몰락이 목격된다. 양극단으로 몰린 세계의 두 축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순간 또 한번 세상은 어지럽게 들뜬다.
시민들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자행하는 반국가적 테러를 묘사하는 영화적 시선엔 당위를 따져 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관객들은 혁명의 기운에 도취되다가도 테러의 현장 가운데서 깨어나야 한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물음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만 영화는 그저 혼란의 도가니로 관객을 끌어들이고 방치한 채 무심하게 서사를 전진시킬 뿐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 역사의 가치를 설득하거나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자란 괴물의 형태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인간들의 대립은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 대상의 파괴로 변질되어 나간다. 본질은 훼손된 채 극악하게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만약 <바더 마인호프>의 곳곳에서 기시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건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가치관의 명분과 동떨어지게 발생하곤 하는 극단적 성질의 폭력은 좌우의 개념으로 편을 가른 이념의 극단적 대치 상황이 예감되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쉽게 연결될만한 풍경이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권한이다. 무엇이 괴물을 잉태했나. <바더 마인호프>가 발생시킬 궁극적 가치는 그 물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독일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하게도 그 현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미 우리 주변에 잉태되고 자라나기 시작한 괴물의 흔적들을 인지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널뛰기하듯 껑충거리는 서사가 제각각 진행되는 <피쉬 스토리>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인정받지 못하는 선구적 펑크밴드, 세상을 구할 거란 예언을 듣게 된 청년, 수학여행 도중 잠에서 깨지 못해 북해도 항 페리호에 남겨진 소녀, 그리고 지구 멸망을 앞둔 한산한 도쿄의 레코드점. 어떠한 연관성을 짐작할 수 없는 네 덩이의 서사가 지속적으로 나열된다. 하지만 서사를 쫓아가거나 추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다. 두 눈만 멀쩡히 뜰 수 있다면 결말에 다다라 모든 의문은 명쾌하게 해결된다. <피쉬 스토리>는 ‘허풍’이라는 본래의 단어적 의미에 가까운 영화다. 아니면 오해가 부른 거대한 행운이랄까. 엉뚱하지만 기발한 스토리텔링이 때때로 지나친 낙관적 태도로부터 영화를 구한다. 뛰어난 이야기꾼들은 사실 대단한 허풍쟁이다. <피쉬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는 허풍이다. 그러니까 <피쉬 스토리>는 믿을 수 있는 이야기와 믿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후자 쪽인 셈이다. 명랑한 허풍이 지구를 구한다. 그리고 관객마저 구할 것이다.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풍선이 한 가득 하늘을 메운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작은 정원 위로 떠오른 아담한 집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방 안에 앉아 비행선을 타고 세계를 모험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상상처럼 집이 날아오른다. 빌딩 숲을 지나 구름을 스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을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업>은 거짓말 같은 꿈을 진담처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내려앉은 집 안에서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꿈꾸던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피앙새와 다짐했던 꿈을 띄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픽사(PIXAR)’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과 그 집에 사는 노인,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소년의 모험담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공담 <라따뚜이>와 우주 최강의 SF로맨스 <월-E>까지, 픽사의 근작들은 CG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해도 손색이 없는 장관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탄탄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통해 수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모험담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비행선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던 소년 칼 프레드릭슨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우정으로 시작된 소년, 소녀의 인연은 로맨스로 거듭나고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결혼 후에도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모험을 기약한 채 꿈을 저축해나가던 칼과 엘리는 먹구름처럼 일상으로 끼어드는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꿈을 미루고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저금통을 부수고 또 부수다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쌓아나간다. 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칼과 엘리의 서사를 압축한 무성 시퀀스를 지나 노년이 된 칼의 모습에 다다르는 <업>은 비로소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칼과 엘리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넘겨가는 무성 시퀀스는 짧은 순간에 진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농축시킨다. 그 짧은 서사는 <업>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부양시키는 풍선과도 같다. 풍선에 매달린 채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비현실적 광경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건 그 광경 자체가 주는 동화적 아름다움, 혹은 그 광경을 둘러싼 실제적 풍경의 생생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이루기 위한 인물의 결심이 설득력 있는 진심을 전달하는 덕분이다. 비현실적인 동화적 소재에 감정적 색채를 입히고 스토리에 현실성을 주입함으로써 영화를 부양시킨다. 짧은 순간만으로 뚜렷한 정서적 감동이 각인된다.
사별한 부인과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결심하는 칼과 우연찮게 이에 합류하게 된 탐사대 소년 러셀을 중심으로 전진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개 더그를 비롯해 희귀 새 케빈까지 끌어안으며 예상 경로를 이탈해나간다. 사실상 <업>의 서사는 명확한 만큼 단순하다. 하늘을 나는 집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칼과 러셀의 여정을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건 재기발랄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집, 그리고 풍선처럼 떠오른 집을 몸에 매달고 다니는 인물들, 통역기를 부착한 덕분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개 등, <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차례로 등장시키며 창의적인 설계도면을 마련한다. 모험을 동경하던 유년시절을 잊지 않은 노인의 모험담은 요리하는 쥐의 성공담이나 미래로봇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토리와 세계관을 품고 있다. 동심 어린 소년의 꿈처럼 순진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한 유머, 형형색색의 캐릭터로 치장한 스토리는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 역시 <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알갱이 하나하나에 컬러를 입힌 듯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포도 모양의 풍선이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탐스럽다. 자연적인 색채 감각과 사실적인 이미지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그 활약상만으로 실사적 현장감과 만화적 개성을 아우른다. 한편 픽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사실상 3D기술을 시각적 자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단 이미지의 표현방식으로서 수용한다.-여기서 '3D'란 단지 3D렌더링 과정을 통해 공간감을 획득한 CG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국내에서 와전된 형태로 통용된 '3D 애니메이션'이란 용어와 다른 의미인 입체 상영 방식의 3D영화를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됐다.- 즉물감을 부르는 입체효과를 관객의 시각적 눈요기로서 내보내기 보단 공간감을 확보하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좌하는 촉매로서 장치한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우대하는 픽사의 모토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개척지로 지정된 3D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업>은 그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는 나침반이나 다름없다. 또한 <업>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한국어 더빙의 사례로 꼽혀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외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한국어 더빙이 대부분 아동들을 배려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과 달리 <업>의 더빙은 되레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미했다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순수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업>은 선명한 꿈을 꾸는 영화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빠른 속도감도, 대단한 긴장감도, 거대한 스케일도, <업>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업>에 엄지손가락을, 아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지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실로 투명한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유년시절의 모험을, 순수했던 한 시절에 가능했던 상상의 나래를, 지극히 순수하게 눈 앞에 그려낸다. <업>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픽사는 또 한번 관객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선물한다. 사랑할 수 있는 영화를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로맨틱한 재능이다.
<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
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