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아, 글쎄, 이소라 누나가 부른 것처럼 바람이 분다니까. 그리고 김동률이 노래합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 정말 어떻게 안될까.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라서였을까. 그 뒤로 우린 네 번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연애의 온도>는 장영(김민희)과 이동희(이민기)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난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어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개차반 같은 공방이 펼쳐진다. 뒤에선 울고 불고 짜다가도 앞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회복된다. 거짓말처럼 붙어먹는다. “나 너랑 처음 하는 것처럼 떨려.” “나도 그래.” 몇 번이나 함께 뒹굴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 자는 것처럼 말하고 진짜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대체 왜 싸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뭐 대수인가.
희한한 일이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망쳐놓은 뒤에야 풍요로웠던 시절이 간절해진다는 것이. 누구나 러브 스토리를 꿈꾼다. 솔로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금이야 옥이야 물고 빨며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귀엽고 예뻐죽겠지. 그리고 점점 변한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이 정도도 못 참아?’에서 ‘이 정도로 해줘도 저래?’로 진화한다. 편하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다 이해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결국 그 관성은 이별에 부딪혀서야 멈춰서고 되돌아본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덕분에 헤어진 연인 가운데 몇몇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 헤어진다.
<연애의 온도>는 이별의 과정 이후의 결과를 전시하며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재회를 통해서 이 남녀가 일찍이 어떤 방식으로 헤어졌을지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동어반복이다.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서 잘될 확률은 3%’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로또에서 1등이 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라는데 매주마다 1등이 나온다’니 희망을 갖고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미안하지만 관계에서 로또는 없다. 당신의 애인은 복권이 아니다. 그러니 서로를 기꺼이 감내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당신 혹은 내가 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난 그녀와의 다섯 번째만의 이별에서야 그걸 알았다. 당장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그걸 알 때 비로소 진짜 이별했다. 그날은 잠도 잘 왔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어도 선명한 금은 남는다. 더 이상 예전의 접시가 아니다. 박살난 관계에서도 금은 선명하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사실 그 금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 없다는 속설이 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이별했다. 이별했었다.
<연애의 온도>에서 배우는 실전 연애 팁
DO 기다림
헤어지자는 그녀 혹은 그를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버려라. 즉흥적인 흥분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니 일단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라.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도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당장의 어떤 노력에도 되돌리기 힘들 거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감내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Don’t 진상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뭐,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야!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부터 “남자(여자) 생겼어? 그 새끼 누구야?” 같은 막말을 내뱉는다면 당신 역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잡고 싶으면 당신부터 잡을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깊은 배려라면야 어쩌겠냐마는.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널 위해서야. 하지만 실상 상대방은 구속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상대를 위한 일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위한 일이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때로 자꾸만 어긋나고 벌어지는 일이라면 차라리 참는 게 낫다. 그걸 몰랐던 건 아닐 거다. 막상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지. 감정이라는 건 언제나 충동적이다. 하지만 벌어진 상처는 통증을 유발한다.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생채기를 내는 실험은 무의미하다. 그 상처엔 어떤 의미도 없다. 난 굳이 그걸 하고야 말았던 것 같다.
세 번 정도 반복된 이별의 끝은 결국 다시 이별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나고 나면 후회가 물밀듯이 쳐들어와 날 쥐고 흔든다. 아침까지만 해도 예감할 수 없는 말이 저녁 즈음에 내 입에서 새어 나오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말이라는 거 알면서도 하고 있었다.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었다. 때론 즉각적인 반응보다도 좀 더 시간을 갖고 감정을 삭힌 뒤 내뱉는 말이 현명할 수 있음에도, 난 그걸 모른 체했다.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변명에 불과하다.
우린 너무 다른 것 같아요. 그 아이가 말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서로 다른 것 같다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단지 그 차이가 감내하기 힘들어졌다는 선언일 따름이다. 서로의 차이를 좁히기가 어렵다는, 이제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부분의 이별은 서로의 차이를 알게 돼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난 그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대의 손을 잡지 않은 채 혼자 건너고 있었다. 뒤쳐진 상대는 점점 멀어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따라잡을까, 아니면 포기할까. 그 때 앞서가는 상대는 뒤돌아와 그 상대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지 못했다. 상대가 뒤돌아선 뒤에야 뒤를 돌아봤지만 생각보다 멀었다.
그 아이와 4번째 이별을 했다. 3번째까지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물론 어젯밤엔 잠이 잘 안 왔다. 생각이 많아지니 잠을 자기가 힘들다. 그리움과 함께 자조가 스며든다. 하지만 어떤 자포자기가 밀려온다. 그 아이에게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하기엔 내가 너무 무기력해졌다. 아직도 그 아이에게 줄 사랑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접어야겠다. 그 아이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난 조급해했고,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줄곧 의심해왔다. 제자리를 찾아가려 노력하는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얘기해놓고 주지 않는다 툴툴거렸다. 혼자 기대하곤 혼자 무너졌다. 그렇게 쓰러지곤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힘들었나 보다. 난 너무 빨랐고, 우린 벌어졌다. 그리고 헤어졌다. 안녕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멀어졌다. 누군가의 현재에서 영원을 기약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바스러질 운명이 됐다. 참 애석한 일이다.
이별이라는 거 실감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견뎌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인지 아직 확신이 들진 않지만 지금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겠다. 차마 염치가 없어서 말하진 못했지만 그 아이가 나름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와 함께 나눌 시간이 없다는 게 종종 후회되길 바란다. 이기적이지만 그렇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거, 실로 무의미한 듯하면서도 간절해지는 일인가보다. 그렇게 신년의 소원을 빌게 됐다. 이런 소원을 빌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