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쩌면 볼 수 없는 세 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명백한 판타지다. 장동건과 같은 오로라적 외모를 지닌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가설만으로도 이미 명백한 판타지지만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격려하는 그 세상은 이미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그것을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때로 영화란, 혹은 예술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혹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묘사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꿈꿀만한 거짓을 현실처럼 위장한 영화다. 특히 올 한 해 두 명의 전임 대통령을 잃은 우리에게 뼈에 사무칠만한 감상을 부를 정도로 ‘인간적’인 대통령을 그리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우리가 보고자 하는, 혹은 봤으면 싶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을 나열한다. 그 판타지가 때때로 과잉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지나치게 전형적인 타입의 이상을 그려나감에도 감히 그것이 잘못 됐다 말하기 힘든 건 그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어느 정도 위안이 될만한 손길로서 기능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장동건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이전에 장진이라는 네임밸류를 걸고 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전형적인 예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수순으로 나아가는 소동극의 양상은 장진 영화라고 부르기에 지나치게 평범하다. 물론 현실정치에 던지는 발언이 미묘하게 감지되는 가운데 대중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코미디 연출은 무난한 웃음을 부를만한 것이다. 그러나 재기발랄함이건, 치기어림이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감안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감각적으로 낡은 영화다. 세 대통령의 임기 중 굵직한 세 사건을 각각 나열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마치 인터미션이 없는 연극 세 막을 연달아보는 것과 같은 옴니버스적 장편영화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클라이막스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나름의 특이성을 확보하지만 그 순간마다 과잉된 음악으로 감정적 공감대를 자극하려는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소재로부터 발생하는 기본적 흥미를 반감시킨다. ‘인간적인 대통령’이라 제시되는 세 인물의 성격 또한 지나치게 보편적이다. 주제나 소재의 압박에 작가적 취향을 양보한 인상이다. 때때로 절묘한 소동극을 자아내긴 하지만 해피엔딩을 직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경직된 스토리는 대통령 훈화를 듣는 것만큼이나 식상하다. 지나치게 공익적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도 대중적 평준화를 지향하는 장진 영화는 호불호의 기준을 떠나 분명 심심한 일이다.
과거 드라마나 영화 더빙 경력이 많으셨으니까 더빙 자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엔 어려움이 없었어.
그렇지만 혹시 애니메이션 더빙과 실사영화 더빙 사이의 어떤 차이를 느끼신 바가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만화영화에서의 표현은 조금 과장되거든. 인물이 소리지르거나, 호흡한다거나, 과장이 많죠. 그래도 <업>은 사실적인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 공상과학영화나 치고 받는 액션 영화는 외형적인 걸 중시하니까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영화 같은 경우, 과거의 고전이나 명화 같은 작품은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과거의 명배우들이 나와서 표현하는 건 개인적인 톤 깊이가 있으니까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 후시 녹음에서 그런 걸 보완할 수 있겠느냐란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 건 오히려 자막을 흘려서 관객들에게 배우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정서를 부여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만화는 그렇지 않고, 약간 과장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표현이 단순하니까, 아마 그런 차이가 있을 거에요.
애니메이션 더빙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 그랬지. 무슨 만화 더빙까지 하라고 그러냐 싶었어. 그런데 주최측에서 상당히 간곡하게 요청을 하더라고. 캐릭터가 성격상 나하고 비슷하다, 영화가 아주 좋다, 그러면 한번 보자. 그래서 봤더니 아주 좋아. 특히 요즘 어린이용 만화라는 게 죄다 살벌하고, 삭막하고, 거칠고 좀 그렇더라고. 어린이용 만화는 좀 환상적이어야지. 그래서 어린애들이 그 만화를 보고 꿈을 그릴 수 있어야 돼. 맑고 깨끗하고 고운 정서를 집어넣어야 되는데 거칠고 전투적인 것들이 횡행한단 말이야. 지금도 텔레비전 보면 여러 만화가 나오는데 그림도 이상하고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메시지도 없고. 그런데 <업>은 환상적이면서도 사랑이 있고,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대단히 감동적이고 상당히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들어요.
웬만한 실사영화보다도 디테일한 표현력을 구사하기도 하죠.
그럼, 표현이 아주 디테일하잖아요. 대단히 사실적이죠. 내가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이런 만화영화는 봐라. 거기에 연기의 기본이 담겨있다. 2중, 3중 적인 연기의 깊이가 나오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연기의 개념은 이 작품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다. 표정이라던지, 제스처라던지, 발성이라던지, 이런 부분을 심도 있게 보면서 연기의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얘기란 말이에요. 애 표정도 그렇고, 영감 표정도 그렇고, 인형이 나올 뿐이지 사람이 나오는 것과 똑같아. 아주 기본에 충실한 영화란 말이에요.
작년에만 드라마 세 편을 하셨고, <라이프 인 더 씨어터>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신 적은 없으셨나요.
사실 우리 부계 쪽은 (체질이) 좀 약해요. 그런데 다행히도 강한 모계 체질을 타고 나서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감사하고 있지. 매일 같이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정이 과제처럼 나오는데 아직까진 한번도 그 과제들을 빼먹은 적이 없어요. 거의 다 수용했단 말이죠. 오늘 같은 날도 어제 (새벽) 4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촬영이 끝났단 말이에요. 지금 내 파트가 3개 정도 남았는데 내 앞에 임시 파트를 찍고 나서 2시 반부터 촬영을 시작했다가 한 3시 50분 정도에 끝났나. 그런데 내가 오늘 8시에 MBC 골프동호회 때문에 필드에 나가야 된단 말이에요. 약속이 돼 있으니까, 못 가면 안되지. 그래서 거의 못 자고 거기 가서 골프치고 온 다음에 지금 여기에 온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책임감이 중요해요. 내가 맡은 일은 쓰러지기 전까진 충실히 이양해야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그렇게 하게 되는 거지.
<굿모닝 프레지던트> 촬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영화도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2006년도 즈음에 <모두들, 괜찮아요?>와 <파랑주의보>로 오랜만에 영화에 복귀하셨죠. 그 이후로 다시 첫 영화입니다.
70년대 중반까지 하고서 거의 못했으니까 한 20년 동안 공백기가 있었던 거지. 그 다음부턴 한국영화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생긴 영화들은 너무 젊은 영화라 우리가 출연하기엔 적절치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한 3~4년 전에 잠시 나와서 한국영화의 현상 변화를 봤더니 너무 많은 변화가 왔다라는 거에요.
아무래도 공백이 길었던 만큼 현장 시스템의 변화를 절실히 체감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정도로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않았나 싶은데요.
7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영화가 주저앉아버렸던 거지. 그리고 8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작품이 적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흥행감독들조차 안되겠다 싶어서 작품 세계를 바꾸면서 자기 변신을 시작하던 때란 말이죠. 그렇게 성공한 케이스가 임권택 감독인데 어쨌든 난 그 무렵이 한국영화의 변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무렵에 상대적으로 텔레비전이 바빠지기 시작하니까 영화 쪽에 신경 쓸 수도 없었고, 이상하지만 그 동안에 프로포즈도 없더라고. 내가 인위적으로 기피한 건 아니야. 그런 조건 때문에 영화에 뜸했던 거지. 게다가 아무래도 테레비 드라마 작업 조건 때문에 스스로 찾아 다니면서 영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생긴 공백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요즘 한국영화가 작품성보단 흥행성에 기준을 두고 제작되고, 그렇기 때문에 젊은 주인공 위주의 영화를 만들게 되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던 거지. 물론 TV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근래 와서 한 명, 두 명, 나이 먹은 배우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얻게 되니까 점점 참여 폭이 넓어지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이런 일환으로 이번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최근에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씨가 있기 때문에 <마더>가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배우를 존중하는, 그리고 배우의 관록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그런데 외국에서는 다 그렇잖아. 영화의 영역이 다양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역량 있는 배우들을 가지고 연기 중심의 영화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메시지를 만들 수도 있는 거고, 그럴수록 화제가 다양해지니까. 서양에서는 아직도 그런 가치가 공존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유행하는 소재가 하나 생기면 다 그 쪽으로만 몰려가서 어느 한쪽이 비어버린다고. 그 동안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영역이 없었지. 한 땐 텔레비전도 그랬으니까. 젊은 배우들 고액 출연료를 주다 보니 출연료 문제도 생기고, 그러니까 다른 부분은 다 빼버리게 되는 거에요. 무슨 홀어머니, 아니면 홀아버지,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경향도 생기고. 그런데 요즘 많이 달라진 게 그것만 가지곤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현시점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아. 요즘 텔레비전에서도 다양한 소재가 생기고 영화에서도 생기고, 이런 것들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도 뭔가 진로를 모색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영화에서 노수사관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셨던 적이 있었죠.
김성종 씨의 미스터리 작품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작품에서 나오는 오영수라는 캐릭터가 상당히 재미있단 말이에요. 외국에서도 나이 먹은 배우들이 노련미를 발휘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들이 있잖아요. 그런 경향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의 다이나믹한 액션도 필요하겠지만 노련한 수사관의 관록을 보여주면서 신구(新舊)가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과거 불란서에서 장 가방(Jean Gabin)이 알랭 들롱(Alain Delon)과 같이 출연한 갱 영화-<암흑가의 두 사람>(1973)-처럼 말이죠. 관록 있는 배우의 노련미가 관객에게 신뢰를 주고 영화를 버텨나가게 만드는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라는 게 사실 대단히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분야라서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만큼 쉬운 장르는 아니겠지만 배우로서 한번 해볼만한 재미있는 조건이 아닐까 싶은 거에요.
요즘 각광받는 후배 배우들 가운데 연극 무대 출신 배우가 많습니다.
당연한 건 지금 화술들이 다 엉망진창이라고.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젊은 친구들 보면 말이 안 돼. 말을 못해. 말은 못한다는 게 벙어리란 뜻이 아니라 일상용어가 그런대로 통할 뿐 캐릭터가 구축이 안 된다는 말이야. 왕을 하면 왕이 나와야 되는데 왕 같지가 않고 모자라고 바보 같은 왕이 나온단 말이지. 그런데 그 왕들이 그런 왕들이 아니란 말이야. 인물을 표현하고 해석할 땐 이중, 삼중의 깊이를 가지고 표현해야 되는데 단순히 표피의 일면식만 가지고 표현해버린단 말이야. 껍데기만 보인단 말이지. 결국 시늉만 하고 마는 거야. 학예회 수준이라고. 그런 건 누구나 다 해. 변호사면 변호사답게, 젊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수준에 어울리는 지적 표현이 나와야 할 텐데 그게 안 된단 말이야.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좋은 조건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와서 뭔가 얘기하는데 맨날 지적 표현이 안 되고 있어. 쉽게 얘기하면 깡패나 양아치는 잘 하는데 그 외의 캐릭터는 잘 안 된단 말이야. 본인들도 의식해. 그게 왜 그러냐. 화술이 안되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배우의 필연적 조건은 언어구사력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요즘 무시되고 있다고.
아무래도 배우로서의 경험적 내공보다도 자신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할만한 캐릭터에 치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보다도 그런 사람들을 선발해서 쓰는 조건이 잘못된 거에요. 충분한 훈련을 시켜서 화술을 터득시키고 이만하면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때 등장시켜야 되는데 이건 초벌구이도 안하고 그냥 나온단 말이야. 과수원에서 과일 따다가 농약도 안 닦고 그냥 내놓는 거란 말이지. 사과 하나를 따더라도 일일이 포장하고 이만하면 먹음직스럽겠다 싶어서 내놨을 때 팔리는 거지, 농약 묻은 거 그냥 따가지고 내놓으면 팔리겠냔 말이야. 우리가 지금 드라마를 그런 식으로 만들고 있는 거야. 사실 우리 젊은 친구들이 좋은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훈련을 안 시킨 거란 말이야. 기초가 취약한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건 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안타까운 문제고,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지.
대학교 강단에도 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내 수업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이에요. 단지 내가 그것만 하려면 학교 나가는 의미가 없어요. 그걸로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이 정 필요하다면 내 시간을 할애하마, 그렇게 한 7년 전부터 워크샵을 시작한 거야. 한 학기 동안 레퍼토리를 준비해서 석 달 동안 매일 연습합니다. 저녁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일단 화술부터 진행해. 말부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석 달을 매일 연습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6~70% 밖에 안 돼. 그 때 말하지. 봐라, 연기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거란 말이야. 너희들 TV보고 그게 연기의 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번엔 다시 학부 3학년들을 데리고 똑 같은 작업을 가을에 해야 돼요. 그걸 7년째 하고 있다고.
학생들이 힘들어하진 않나요. 일단 선생님도 힘든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나한테도 그래. “괜히 고생해서 할 필요 없지 않냐.” 사실 나도 월급이라고 주는 거 별거 없거든.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어. 소위 연기를 하려는 애들에게 보탬이 되지 않아. 내 양심에 비췄을 때는 그래. 내가 비는 시간은 매일 나가요. 그럼 일주일에 4~5번은 나가게 된다고. 최소한 3번 정도는 나간단 말이야. 내 작업 끝내고 밤 늦게라도 가니까. 사실 이 아이들도 일주일에 내 강의는 4시간만 때우면 되는데 매일같이 나와요. 그게 보통 힘든 게 아니란 말이야. 옆에서 그러지. “저녁에 놀기도 해야지. 괜히 시간 아깝게 이럴 필요 없지 않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야. 재미있는 건 석 달 동안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는 거. 한 명도 안 빠져. 자기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밤 새면서 같이 작업하는 거야. 이게 지금 7년째 내려오는 거야. 그러니까 2학년이 들어오면 나한테 하는 첫 인사가 이거야. ‘3학년 될 때까지 계실 겁니까’ 물어보는 거야. 왜? 지네 선배들한테 듣는 게 다 있거든. 그렇게 해야 연기를 좀 터득할 수 있는 거에요.
연기에 대한 기술적 지도와 함께 연기에 접근하는 자세를 함께 수업한다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연출자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화술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새가 모이를 물어다 먹이듯 초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방송이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기본이 안되면 창의력도 발휘될 수 없어요. 배우가 되겠단 아이들이 대사는 못하면서 괜히 춤추고 노래만 한단 말이야. 희곡이나 영화에서 지적이고 철학적인 캐릭터나 대단히 높은 수준의 인격체가 될 땐 대사만으로 그 캐릭터가 나와줘야 되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어떻게 그런 캐릭터가 나오겠냔 말이야. 그걸 석 달 동안 훈련하는 거야. 내 방식이 다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배우니까 비슷하게는 가르칠 수 있단 말이지.
그래도 칭찬해주고 싶은 후배 배우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후배들 많지. 용모나 자질은 다 훌륭해. 다만 좀 더 구체적인 훈련을 더해서 연기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고 말하는 법, 표정 쓰는 법, 동선, 이런 것도 터득시켰으면 하는 거지. 이런 걸 뛰어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한 6개월만 가르쳐도 좋은 재목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그네들 문제가 아냐.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그러다 보니 그 좋은 소재를 가지고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한 두 작품 하다가 안타깝게 밀려나는 거란 말이야. 좋은 배우들은 많지. 여자 같은 경우는 여럿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고두심, 김해숙, 김영애, 이런 일련의 배우들, 김혜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김희애, 그리고 하희라, 이런 애들, 아주 야무지게 잘한단 말이야. 제대로 연기를 해요. 남자들도 마찬가지고. <베토벤 바이러스>를 같이 했지만 김명민 같은 경우 캐릭터를 대단히 깊게 연구하고 만들어냅디다. 자세도 진지해. 그런 배우들이 좋은 배우가 되는 거야.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거란 말이지. 단순히 돈 버는 스타의 개념하곤 다른 거야.
톱스타의 위치를 점하면서 좀처럼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배우들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죠.
연예인도 수익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이것 저것 다 하긴 해야 되는데, 저게 배우인지 연예인인지, 모델인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아. 배우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연극을 하든, 출연해서 연기를 함으로써 그 진가가 나오는 거지. 광고만 하면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단 말이지. 적절하게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제 연기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작품에 출연했으면 하는데 왜들 출연도 안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야. 결국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한 40대쯤 되면 그 동안 쌓아왔던 게 다 없어져버리는데.
<업>처럼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는 건 모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 결과가 중시되고 과정이 간과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결과를 쫓아가면서도 과정을 무시하는 풍토가 그런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거야. 우리는 탁월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야. 개체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나라 똑똑하지. 능력 있고 잠재력이 있어. 스포츠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도 대체적으로 걸출하잖아요. 삼성을 일부로 띄우는 건 아니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삼성의 기술력은 확실히 세계적인 거 아니오. 이렇게 훌륭한 우리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된다고. 사실 그 동안 목표만 향해서 뛰다 보니까 그냥 지나친 데가 많단 말이야. 기본이 약해졌다 이거지. 이젠 그런 걸 착실하게 다져나가잔 얘기야. 그런 바탕을 다시 다지는 거지. 과거 우리 때는 여러 가지로 분배의 문제가 있었단 말이야. 분배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요령을 써서 뒷거래를 한다거나 해서 그걸 채워 넣으려 했거든. 그래도 지금은 차이가 느껴진다 해도 대체적으로 잘 나온단 말이야. 그러니 이젠 차분하게 하나씩 인성 같은 부분을 잘 다져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선진국형 인격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나. 늘 우리 대학생들한테도 얘기하는데 ‘너희들 시집, 장가 가면 애들 잘 키워라. 인성을 바탕으로 해서 제대로 키워라. 어른 보면 인사 꼬박꼬박 잘 하는 아이들, 사회 질서 잘 지키는 아이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로 키워라’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된단 말이죠.
교육에 대한 문제도 항상 개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육이란 게 사회 발전의 잠재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적 가치관은 지나치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이라는 건 학교와 가정이 일치가 돼야지, 학교 따로, 가정 따로 하면 안 돼요. 학교 선생한테 가서 애 벌 세운다고 따지고, 이딴 짓 하지 말란 말이야. 선생이 애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 이상, 그건 참견하는 소리나 다름없지. 어디 선생님 귓방망이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그딴 놈이 어디 있냔 말이야. 그런 놈이 사회에 나와서 뭐가 되겠어. 가까운 나라에선 다 그렇게 하고 있잖아. 일본 같은 곳도 백 년의 교육적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고. 옳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이놈의 입시교육으로 집약돼서 나머지 교육은 지나치게 무시되고 있어요. 얼마 전에 교육부 장관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대학 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기본 인성교육이다. 3살, 4살짜리 유아들의 인성교육부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유치원부터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초등학교로 가자 이거야. 이런 것도 관심을 좀 가지라고.
예전에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도 하셨습니다. 요즘 시국이 어지러운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안타깝지. 지금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하나의 문제점을 느끼고 있단 말이에요. 과연 국회가 저렇게 극단적인 두 개의 평행선으로 달려야 되는 건가. 한국의 정치 현실이 그런 건가. 지금 우리의 위상이 그 정도 밖에 안되나. 안타깝기 그지없단 말이에요. 중요한 부분은 뭐냐. 어쨌던 간에 우리가 사는 터전은 대한민국이고, 정치의 궁극적인 몫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대한민국 국민의 복지라고. 난 그 가치관엔 여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조건을 두고 왜 타협을 못하고 조정이 안되냔 말이야. 왜 무조건 상대한테 반대만 하려 하고, 왜 무조건 밀고 나가야 되느냔 말이야. 이젠 그 놈의 정치가 좀 선진화돼야 될 거 아니야. 과거엔 국민들이 정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정치가 우리 수준을 못 따라오는 거 같아요. 이런 부분에서 심각한 자기 반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정치권과 국민들과의 소통이 좀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몇 가지 정책들이 논쟁 사항이 되고 있습니다.
정책이라는 걸 오픈해서 같이 검토하자는 거야. 지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비정규직법이나, 미디어법이라던가, 4대강 문제라던지, 그게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고 구체적으로 까보자는 거야. 국민들한테 구체적으로 설득을 해보라 이거야. 어느 한쪽의 논리만 주장할 수 없는 거 아냐. 상호간의 장단점이 다 있을 테니까. 국민을 설득하도록 만들자 이거야. 그렇게 가야지, 무조건 된다, 안 된다, 이게 뭐냔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소위 A라는 시스템이 집권했을 때 어느 정도 이룬 발전이 있다면 그 다음에 정치 입장이 다른 B라는 시스템이 집권한다 해도 그 바탕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이게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죄다 엎어버리면 맨날 제로섬에서 시작된단 말이야. 이건 국가발전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반대로 정치는 더욱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정치가 우리 사회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이젠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어. 그럼 시야를 돌려서 밖으로 평정을 해나가야 될 시기란 말이야. 그러려면 인위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다양한 역량 가운데 좋은 역량들을 결속하고 합의해서 다 같이 일률적으로 밀고 나가야 될 거 아니야.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될 텐데 뭐 하는 짓거리냐 이거야. 그것도 집권을 안 해봤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 집권해 봤잖아. 이제 정권교체도 가능해졌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책 개발을 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라고 국민들이 선택한 거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국민들이 선택할 가치가 없어지고, 목표가 없어졌다면 이건 대단히 한심한 얘기가 돼버린 거란 말이야. 그러니 이제 정치가 좀 선진 수준으로 가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내가 내용을 잘 몰라서 큰 관심을 두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정부 차원의 자체적인 판단이 문제가 된 거지. 일단 나도 정치라는 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런데 그것도 사실 과거 정권에서 코드 정책으로 싹 입수해버린 결과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앞의 정권에서 한 일도 따져야 한다 이거야. 과거 보수 언론에서도 문제를 지적했지만 한예종도 그렇고, 영화진흥위원회도 그렇고, 그게 예전에 잘 됐다면 누가 뭐라고 말 못한다고. 그런데 결국은 부실하단 말이지. 그러면 이제 새로운 정권에서 문제를 따진단 말이야.
경험적으로 느끼신 바라도 있나요?
내가 중랑구에서 문화원장을 할 때 얘기를 좀 해보자면 그 당시 구청장이나 위원들은 다 내 반대쪽이었어요. 내가 중랑구에서 아직까지 사회복지회 회장을 하면서 이 지역의 복지시스템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하는 것도 싫어해. 특히 이상수 (국회의원) 같은 사람은 내가 정치를 더 이상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얼씬거리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야. 내가 지역 도내이션(donation)으로 임기를 유지하면서 그때까지 5년을 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구청장은 어쩔 수 없이 날 모신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성을 냈어. "염려하지 마라. 내가 이걸로 정치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랬지만 이미 내부적인 실무 인선은 자기 식구로 만들어 놨어. 사무국장부터 말단직원까지 자기 식구들로 다 박아놨다고. 나만 외톨이야. 그런데 내가 5년 동안 이 친구들하고 일하다 보니 이 친구들이 결국 나한테 다 동화되더란 거야. 그런데 구청장이 다시 내 쪽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젠 이 친구들이 내 쪽에서 눈에 가시처럼 보이니까 또 다시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내 아래 사무국장이 우리 쪽이 아니라고 쫓아내려고 드는 거지. 그래서 내가 동반으로 관뒀다고. 왜냐. 이 사람 열심히 했다 이거야. 나하고 정치 입장이 다르지만 열심히 하면 내가 분명히 알아줘야지. 내 밑에서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했는데 이제 우리 쪽에서 자기네 식구를 동원해야 한다고 싫어하는 거야. 새로 온 구의원 놈들이 뻣뻣하게 군다고 싫어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씹어서 갈아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왜 갈았냐?’ 그랬더니 어쩌고, 저쩌고, 뭐라 그래. 그래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니 나도 관두겠다.” 이러고 나와버렸지. 나는 내 돈으로 밥 먹고, 내 교통비 가지고 다녔지, 거기서 판공비 백원 한 장 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운영하는 나한테 하자가 없는데 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었던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자르냔 말이야. 사무국장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왜 나만 1년 더 하느냐고, 할 수 없다고 동반 사퇴했어. 그러니 지들이 깜짝 놀라지.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오히려 내가 오냐, 그렇게 해라. 그럴 줄 알았지.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실무적인 인사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자리잡지 못하고 정치적 파워가 모든 구조를 좌우해버린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스스로가 코드 인사로 참여했다고 생각되면 정권이 바뀔 때 그냥 나와야 되는 거야. 임기가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앉아있으면 안돼. 자기 역량을 잘 판단해서 자리를 잡아야 된단 말이야. 과연 내가 여기서 적임자인가. 내가 지금 여기 순수하게 능력으로 들어온 것 같나. 만약 코드 인사로 들어왔다 싶으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그 이전 정권하고 신의를 지키는 거지. 너는 나가도 나는 결단코 고수해야겠다. 이런 매너라면 좀 촌스럽다는 거야. 난 거기서부터 후유증이 나온다고 본다고. 새로 올라온 놈들은 바꾸고 싶지. 말 안 들으니까. 내각이 바뀌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임기제를 무시하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정권이 바뀌어서 코드가 안 맞은 사람이라면 그냥 나와야지. 그런 원칙이나 양식이 있으면 별 문제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그 부분에선 정리가 안 된다는 건 소위 테크니컬(technical)한 실무진이 딱 정확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거야. 내가 볼 땐 윗대가리들이 갈려도 실무진은 그대로 있어야 된다는 거지. 그런 시스템으로 빨리 발전해야 된다고. 그러려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는 기준이 생겨야 되는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늘 얘기하는 거라고. 저번에도 경기도에서 고위공무원 특강을 해달라 해서 그때 이런 얘길 했어. ‘삼국지’만 읽어봐도 거기 다 나와있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용기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지혜가 있어야 된다. 그 위에 필요한 게 덕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리고 그걸 다 갖춘 뒤엔 운이 따라줘야 된다 이거야. 삼국지를 보면 다 나오잖아. 유비가 말이야. 자기를 죽이려던 적장이 붙들려와도 명장이면 잘 모시고 다스려서 자기 사람 만들잖아. 결국 그 사람이 평생을 같이 하고. 이게 치덕이라 이거야. 정치 논리?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박사 논문을 써도 그 이상의 답이 없다고. 제갈공명이 젊은 선비인데 일국의 지도자가 삼고초려를 하잖아. 우리 같으면 와라, 가라, 할 텐데 삼고초려를 해서 그 사람을 모신다 이거지. 이게 인재등용의 안목이라 이거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자꾸 모신다고. 그 사람이 칼싸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그 덕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만드는 거야. 수호지도 마찬가지지. 송강은 조그마한 글방 선생이라고. 그런데 그 밑에 백팔호걸이 모이는 것도 덕으로 인재들을 끌어안은 거란 말이야. 옳은 일을 해서 나가는 거란 말이지. 원칙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아무래도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런 원칙을 얼마나 잘 뿌리내리느냐가 중요할 테니까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공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당분간은 개인의 행복권을 포기해야 돼. 행복 누리고, 권세 누리고, 이런 모든 걸 포기하고 오로지 내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자기를 희생해야지. 그렇게 국민을 감동시켜라 이거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단 한 명도 국민을 감동시킨 대통령이 없어. 노무현도 마찬가지라고. 51%로 당선됐지만 49%의 반대가 있다면 이게 절대적인 반대야. 편을 가르면 이게 평생 반대가 된다고. 그래서 고생을 한 거야. 그 중에서 10%라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는 거야. 대통령이 되면 나를 격렬히 반대한 놈도 국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런 안목에서 접근해야 된다 이거야. 지금도 그걸 못하고 있잖아.
지금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촬영 중이고, 가을 즈음에 <거침없이 하이킥 시즌2>도 시작할거라고 들었습니다. 올해도 계속 바쁘시겠네요.
그리고 아마 겨울에는 작년에 찍으려다 못 찍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거 들어가야 돼. 그것 때문에 내가 SBS프로그램도 하나 포기했거든요. 9월 초에 시트콤도 시작할 거고. 그렇게 두 작품을 하게 되면 거의 풀(full)로 뛰어야 돼. 그러면서도 이제 저녁에 비는 시간엔 학생들과 씨름해야지. 쉴 시간이 없어.
처음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시트콤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던 경험이 어쩌면 오랜 연기 인생에 있어서 파격적인 결심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이번에 애니메이션인 <업>의 더빙을 결정한 것도 파격적이라 느껴질 만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이번에 했던 고민은 먼저 거하곤 또 다른 거란 말이에요. 구성도 다르고, 인물도 달라지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작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대본을 봐야 되겠지만 이전 것과는 달라져야 된단 말이야. 그걸 연구하고 있는 거니까. 시트콤이라는 게 아무래도 외형적 설정도 필요하고, 순수한 드라마와 달라요. 나중에 감독과 구체적인 상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외형의 변모를 가져올 것인지 고민이고, 결국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된단 말이야. 아무래도 잘못 표현하면 먼저 작품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그래서 되도록 예전과 달리 표현해야 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요.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작가나 연출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에요. 그 동안에 그 사람들의 업적이 있고, 내가 <하이킥>을 하면서 충분히 상업적 코미디를 잘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내가 믿는 거지.
이제 연세가 고희(古稀)를 넘기셨는데 아직도 연기자로서 어떤 꿈을 꾸시나요?
지금은 아직까지 날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필요로 한다면 그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맞춰나가야지. 그래서 아직은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 해야 될 과제들이 자꾸 있으니까. 다만 나이 먹었으니까 이제 앞날을 장담은 못하지만 지금 내 컨디션으로 봤을 때 아직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나이가 되면 문제가 되는 게 대사 암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하고, 점점 이제 신호가 오는 거야. 녹화현장에 가서도 똑 같은 곳에서 4~5번 NG를 낸다거나 이러면 곤란하구나 싶어지겠지. 연극을 2시간씩 끌고 나갈 때, 혹시 이 대목을 다시 봐야 되나, 이런 위기를 느끼면 이제 관둬야 되는 거야. 그 전까진 필요하면 계속할 생각이야.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풍선이 한 가득 하늘을 메운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작은 정원 위로 떠오른 아담한 집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방 안에 앉아 비행선을 타고 세계를 모험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상상처럼 집이 날아오른다. 빌딩 숲을 지나 구름을 스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을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업>은 거짓말 같은 꿈을 진담처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내려앉은 집 안에서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꿈꾸던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피앙새와 다짐했던 꿈을 띄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픽사(PIXAR)’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과 그 집에 사는 노인,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소년의 모험담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공담 <라따뚜이>와 우주 최강의 SF로맨스 <월-E>까지, 픽사의 근작들은 CG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해도 손색이 없는 장관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탄탄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통해 수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모험담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비행선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던 소년 칼 프레드릭슨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우정으로 시작된 소년, 소녀의 인연은 로맨스로 거듭나고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결혼 후에도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모험을 기약한 채 꿈을 저축해나가던 칼과 엘리는 먹구름처럼 일상으로 끼어드는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꿈을 미루고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저금통을 부수고 또 부수다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쌓아나간다. 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칼과 엘리의 서사를 압축한 무성 시퀀스를 지나 노년이 된 칼의 모습에 다다르는 <업>은 비로소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칼과 엘리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넘겨가는 무성 시퀀스는 짧은 순간에 진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농축시킨다. 그 짧은 서사는 <업>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부양시키는 풍선과도 같다. 풍선에 매달린 채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비현실적 광경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건 그 광경 자체가 주는 동화적 아름다움, 혹은 그 광경을 둘러싼 실제적 풍경의 생생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이루기 위한 인물의 결심이 설득력 있는 진심을 전달하는 덕분이다. 비현실적인 동화적 소재에 감정적 색채를 입히고 스토리에 현실성을 주입함으로써 영화를 부양시킨다. 짧은 순간만으로 뚜렷한 정서적 감동이 각인된다.
사별한 부인과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결심하는 칼과 우연찮게 이에 합류하게 된 탐사대 소년 러셀을 중심으로 전진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개 더그를 비롯해 희귀 새 케빈까지 끌어안으며 예상 경로를 이탈해나간다. 사실상 <업>의 서사는 명확한 만큼 단순하다. 하늘을 나는 집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칼과 러셀의 여정을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건 재기발랄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집, 그리고 풍선처럼 떠오른 집을 몸에 매달고 다니는 인물들, 통역기를 부착한 덕분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개 등, <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차례로 등장시키며 창의적인 설계도면을 마련한다. 모험을 동경하던 유년시절을 잊지 않은 노인의 모험담은 요리하는 쥐의 성공담이나 미래로봇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토리와 세계관을 품고 있다. 동심 어린 소년의 꿈처럼 순진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한 유머, 형형색색의 캐릭터로 치장한 스토리는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 역시 <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알갱이 하나하나에 컬러를 입힌 듯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포도 모양의 풍선이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탐스럽다. 자연적인 색채 감각과 사실적인 이미지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그 활약상만으로 실사적 현장감과 만화적 개성을 아우른다. 한편 픽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사실상 3D기술을 시각적 자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단 이미지의 표현방식으로서 수용한다.-여기서 '3D'란 단지 3D렌더링 과정을 통해 공간감을 획득한 CG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국내에서 와전된 형태로 통용된 '3D 애니메이션'이란 용어와 다른 의미인 입체 상영 방식의 3D영화를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됐다.- 즉물감을 부르는 입체효과를 관객의 시각적 눈요기로서 내보내기 보단 공간감을 확보하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좌하는 촉매로서 장치한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우대하는 픽사의 모토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개척지로 지정된 3D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업>은 그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는 나침반이나 다름없다. 또한 <업>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한국어 더빙의 사례로 꼽혀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외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한국어 더빙이 대부분 아동들을 배려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과 달리 <업>의 더빙은 되레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미했다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순수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업>은 선명한 꿈을 꾸는 영화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빠른 속도감도, 대단한 긴장감도, 거대한 스케일도, <업>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업>에 엄지손가락을, 아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지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실로 투명한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유년시절의 모험을, 순수했던 한 시절에 가능했던 상상의 나래를, 지극히 순수하게 눈 앞에 그려낸다. <업>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픽사는 또 한번 관객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선물한다. 사랑할 수 있는 영화를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로맨틱한 재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