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듯 분주하게, 에디터들은 각자의 취향으로 세상을 감별한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가 모여 매월마다 한 권의 <엘르>로 전파된다.
바야흐로 마감이다. 가을바람이 신선하게 불어오는 이 계절의 주말 한낮에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렷다. 어젯밤 ‘불금’을 보내자고 카톡을 날렸던 친구는 ‘마감’이라고 답하니 ‘달거리 할때구나’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순간 자웅동체라도 되어 에이리언 같은 새끼를 낳아서 놈에게 퀵 배송이라도 보내줘야겠단 상상을 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사무실은 조용하게 분주하다. 컬렉션 기간이 시작되면서 해외 출장을 떠난 몇몇 패션 에디터들의 빈자리가 눈에 띄는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마감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키보드 치는 소리가 거진 들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지금 키보드를 바삐 두들기는 내가 정상적인 마감의 중력에서 이탈하여 비정상적인 궤도 위에서 떠도는 것을 직감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정신차리고, 다시 원고의 경로를 재탐색하자.
여자가 8할인 <엘르> 사무실 책상 하나에 입주한 것도 어느덧 반 년이 지나는 중이다. 제대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축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여하간 벌써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관련 업체 종사자나 이 업계에 어느 정도 이해도를 지닌 이들이 아닌 ‘아주 보통의 사람들’은 내가 <엘르>를 만든다 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응?’ 혹은 ‘와!’ 전자는 수컷이고 후자는 여자다. 내 절친한 친구 놈은 진지한 얼굴로 창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한다는 ‘퓨처’ 에디터가 뭐야?” 잠시 네 놈의 인생을 편집해 주는 직업을 어떨까 생각했다. 한 여성 동지께서 물어보셨다. “<엘르>면 패션지니까, 직원 분들도 다 패셔너블하시겠어요.” “음, 그건요. 일단 제 꼴을 좀 보고 말씀하세요. 하하하.” “호호호.” “…” 그래, 뭐, 나는 퓨처 에디터니까.
며칠 전, 동료 선후배 에디터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서 잠시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다양한 화두 중에 최근 장안의 화제인 <개그콘서트>의 새로운 코너에 등장한다는 ‘꽃거지’로 대화가 흥했다. 한 패션 팀 선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니 후배가 스마트하게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검색했다. 역시, 이런 아이폰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영상을 보던 선배는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감탄했다. “와, 옷 되게 잘 입혔다. 레이어드 너무 잘했는데.”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저거 에세이 떡밥인데?’ 어쨌든 이건 ‘일상의 재발견’ 아닌가. 꽃거지에게도 룩이 존재함을 재발견하는,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패션 에디터만의 멘트. 관심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도 달라지는 법이라더니, 패션 에디터는 꽃거지에게서도 레이어드 룩을 발췌한다.
물론 앞선 문장의 의미 중 절반은 농담이고, 절반은 진담이다. 패션지의 에디터들, 패션, 피처, 뷰티 에디터들이 먹고 사는 방식이란 그들이 지닌 취향을 밑천으로 삼아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이란 말이다. 고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는 생각 이상으로 즐거울 수도, 고될 수도 있는 일이다. 취미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을 좀 더 명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하고, 타인의 취향을 좀 더 폭넓게 수집하고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취향도, 성격도, 일하는 방식도, 심지어 저마다의 책상 풍경도 다르다. 중요한 건 이렇게 서로 다른 개개인이 모여서 한 권의 잡지를 매달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한 권의 잡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부단하고 지난한 노력들을 상세히 읊을 순 없겠지만 그 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서 에디터들은 결국 저마다 하나의 요소가 되어 한 권의 잡지에 저마다 녹아 들어간다. 마감 사무실의 풍경이란 결국 매달 제작되는 한 권의 책으로 기록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한 권의 <엘르>를 만들고 있는 이 사무실 안의 에디터들이란 저마다 특별한 취향을 섭렵해서 감별하고 전파하는, 아주 보통의 에디터들이란 말이다. 마감은 여전히 끝나가는 중이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퓨처’ 에디터가 되고 싶은 밤이다.
뭐, 이미 기사화도 됐고, 숨길만한 이유도 아니고. 프리미어가 폐간됐다. 설이 분분했지만 기정 사실이다. 마지막 호가 된 지난 호에 폐간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 혹은 예감이 결여된 건 그것이 상부에서 일방적인 지침 형태로 투하한 폐간 통보가 이미 마감이 종결된 이후에 이뤄진 까닭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건 이미 지난 주 마감을 끝낸 이후 며칠 뒤였다. 느낌표가 물음표로 변하고 말줄임표가 됐다. 불과 10분 사이에. 물론 내가 프리미어 기자도 아니고, 그저 몇 개월 동안 필진으로 참여하며 원고료를 챙겼을 뿐이고, 지금도 앞으로 2개월 정도는 받아먹을 원고료가 남아있고, 그런 접점을 제외하면 그 폐간에 대해 관여할 바가 아니란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에 대해 노코멘트했던 것도 특별한 이유라기 보단 사측의 공식적 언급이 없는데 주변부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내가 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공언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뒤늦게 이 흔적을 남기는 이유는 여러모로 아쉽기 때문이다. 수입에 나름 짭짤한 도움이 됐던, 혹은 이름을 쏠쏠히 팔아먹었던 매체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맞아.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보다도 아쉬운 건 매체 하나가 이런 식으로 증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충격 먹었다. 그래. 이게 좀 더 사실이야. 영화 전문지에서 엔터테인먼트 잡지로 개편된 이후로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지만 요즘 프리미어는 꽤 재미있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중구난방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개개인의 전투력이 느껴지는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글을 썼다고 해서 이러는 건 아냐. 정말로. 시사지와 문화지의 줄타기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모양새도 재미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경향이라고 느꼈다.
필름2.0이 망했을 땐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뿐이었지. 필름2.0 망해간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익히 들었고, 그때까지 버텼다는 게 사실 용했다. 프리미어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안정적인 모회사가 경제난을 이유로 둔다지만 그리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던 잡지 하나를, 그것도 어느 정도 값어치를 하는 브랜드 네임밸류를 지닌 문화잡지를 단박에 소멸시킨다는 그 결정이, 나로선 꽤나 놀랄 만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소문에 의하면 뉴미디어 사업을 구상 중이라던데, 경제난이 왔을 뿐이고, 새롭게 융통할 자금줄이 희박했을 뿐이고, 지출을 줄여서라도 사업을 해보려는 것뿐이고, 그러니 잡지 하나 그냥 없어질 따름이고.
문화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점차 무가치하다는 시장 판단의 잣대로 내몰리고 있다. 4종이었던 영화 주간지는 2종으로 줄었다. 가판대의 공백이 크다. 그 이전에 망했다는 잡지들을 언급하기도 귀찮다. 뭐, 그렇다. 잡지 망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한다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하루 이틀 꼴로 벌어지는지 미스터리다. 정말 누구 말대로 국민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게냐. 그 이전에 국민 수준을 이 정도로 만든 게 누구냐. 그 모든 문제는 교육에 있지 않나. 인문학을 경시하고 초등학생들까지 5지선다형의 줄세우기 경쟁에 혈안이 된 오늘날의 교육계에서 과연 희망을 찾을 수 있더란 말이냐. 이런 게 비단 그저 우리나라만의 현실인가. 아니면 진짜 글로벌 시대의 세계적 추세일까.
점점 언어를 붙잡고 살아간다는 게 열악해지는 가운데 대어를 낚아보자는 찌라시들의 헤드라인이 대세가 되고 있다. 언어가 점차 낚시용 미끼가 되고 있다. 본질은 중요치 않다. 그저 누군가의 이미지를 팔아먹고 심지어는 누군가의 언어마저 훔쳐다 팔아 치운다. 생산적인 논조 따위는 모르겠고, 그저 중국산 OEM처럼 베껴다가 싼 값에 많이 팔아먹으면 되지. 결국 시장에 나도는 언어 가운데 진품은 없고 죄다 짝퉁이야. 진품이 있어도 구별이 안가. 루이비통인지 루이비똥인지, 알게 뭐냐. 그게 백만 원인지 백 원인지 알게 뭐야. 바야흐로 언어도 짝퉁의 시대. 매체는 죽고 찌라시는 살아남는다. 결국 그 시장에서 진짜가 사라지면 짝퉁은 누가 사나. 자기가 매고 있는 짝퉁의 가치를 보좌하던 진짜가 사라진 마당에 누가 그걸 매고 다니나. 참 이래저래 애석한 일이야. 당신이 프리미어를 싫어한다 해도 이건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건 동의하리라 믿는다. 무관심이 아니라면 적어도 관심은 있다는 의미일 테니 잡지 하나가 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겠지. 특히 요즘 같이 삭막한 세태에서 더더욱 암울하다고 느낄만한 일 아닐까. 모르겠으면 그냥 <아내의 유혹>이나 보고 말던가.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몇 주 동안 가판대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어느 주간지에 대한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해를 넘기고 신년이 되면 출판될 거란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새해가 밝아도 그 주간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간지가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이다. 가히 치명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8주년 기념호를 낸 직후부터였다. '필름2.0'은 그렇게 침전하고 있다. 인쇄 과정의 문제라고 둘러대던 답변도 인쇄 대금의 부족을 고백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한 시대의 획을 그었다 할만한 영화 전문지 하나가 시장에서 점멸하듯 기울어간다. 물론 아직 스스로 선언하지 않은 끝을 논하기엔 시기상조다. 하지만 시장에서 모습을 감춘 어느 잡지의 끝을 예감하는 소문엔 범상치 않은 기시감이 덧씌워진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 너머로 드리운 그림자는 꽤나 낯익은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드라마 전문지를 표방한 '드라마틱'은 지난 해 2월을 끝으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지만 뇌사 진단이 떨어졌다. 미드와 일드의 국내 저변이 넓어지고 국산 드라마의 제작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드라마 잡지의 가능성에 담보를 잡았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드라마에 대한 담론이 전무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고무적이었다. 독보적인 시장 개척이 가능하다 여겨졌다. '드라마틱'은 격주간 발행으로 시작됐지만 월간 발행으로 궤도를 수정했고 끝내 운행을 멈췄다. 길은 열려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했다. 수익에 발목을 잡혔다. 컨텐츠에 대한 열의만으로 자본의 무심함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작년 말, 장르문학을 표방하던 '판타스틱'이 휴간됐다. 폐간되는 것 아니냐. 소문이 분분했다.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던 잡지가 익월에 출간됐다. 하지만 불운한 소식이 연이어졌다. 일년 열두 달마다 발간되던 잡지의 발행일이 연중 네 번으로 줄었다. 월간지가 계간지가 됐다. 기사회생을 위한 일말의 선택이었다. 소설과 만화가 연재되는 장르잡지가 세 달마다 돌아온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척박한 국내장르문화의 토양 속에서 '판타스틱'은 일종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장르 팬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비주류의 소수감성이 한데 뭉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자본이었다. 광고가 붙지 않았다. 자본은 새로운 문화적 시도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TV라는 매체비평을 통해 다양하고 획기적인 컨텐츠를 생산하던 '매거진T'도 새로운 움직임의 한 축이었다. 기사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댓글의 양이 독자들의 애정을 확인하게 한다. 어느 포털 사이트마다 밑도 끝도 없이 악랄하게 인신 공격을 퍼붓는 악플러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컨텐츠를 즐기고 의견을 교류하고 매체에 대한 애정을 남긴다. '매거진T'는 현재 버려진 땅처럼 황량해졌다. 더 이상 기사도 댓글도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매거진T'를 채우던 일원들은 새로운 스폰서를 찾았으나 갈등을 빚었고 결국 기존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장만했다. '매거진T'를 버리고 '텐 매거진'을 꾸렸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사이 주인을 잃은 집은 황폐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새로운 컨텐츠가 아니라 백신에 감지되는 트로이목마다. 버려진 집기처럼 묵어가는 컨텐츠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흉측하게 자리잡고 유저를 급습한다.
'키노'의 폐간은 상징적이었다. 영화 담론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 뒤로도 몇몇 영화지가 시장을 선도하고 온라인 영화 사이트가 성장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예술적 담론이 무너지는 형국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상징적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키노'의 온라인 자매지에 가까운 '엔키노' 역시 '키노'의 폐간 이후 3년이 지나서 사이트가 폐쇄됐다. CJ는 '엔키노'를 인수했지만 컨텐츠를 수급한 뒤 과감히 경영을 포기했다. 거대한 자본을 다스리는 대기업에게 있어서 '엔키노'는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부서에 불과했다. 문화적인 언어의 존명은 중요치 않았다. '엔키노'의 몰락은 여타 영화 사이트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한때 군소 영화사이트들은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파이를 키웠다. 하지만 거대한 포털사이트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영화사이트의 파이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결국 시장 장악력이 떨어질수록 수익은 악화됐다. 컨텐츠의 질적 하락을 부추겼고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은 점차 낡고 고루한 것이 됐다. 오프라인에서 문화적 언어가 남루해지는 사이, 온라인에선 수많은 말들이 찰나를 오간다. 블로그를 장만하며 인터넷에 입주한 개개인은 저마다의 익명을 내걸고 자신만의 사념을 축적한다. 여기저기 발길을 돌리며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크건 작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서로 뒤엉켜 굴러가다가도 무심히 지나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고유의 아이디로 접속한 대중들은 저마다의 주파수를 개설해 자신들의 생각을 송신한다. 저마다 뒤엉킨 생각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고 뒤섞인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트랙백으로 걸고, 링크를 달며, 댓글로 남긴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언어의 바다가 형성되는 것 같지만 개개인의 사유화된 생각이 첨탑처럼 솟아오른다. 거대한 논의의 장이 형성되기 보단 개개인의 각축전이 활발하다. 논의보단 주장이 첨예하다.
포털사이트의 메인화면에 종속된 언론은 언어의 가치를 급속하게 몰락시켰다. 정보의 우열보단 속도전이 중요해졌다. 포털사이트가 뉴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신문을 펴는 대신 모니터를 켰다. 실시간으로 세상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정보의 질적 가치는 중요치 않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언어의 선택이 중요하다. 언어가 가벼워졌다. 짧고 굵은 언어들이 난무한다. 대상에 대한 표피적인 판단이 압도한다. 언론에게 뉴스 공급을 사주하던 포털사이트는 이제 을이 아니라 갑이다. 신문이 시장을 잃어가는 사이 포털사이트는 시장을 독점했다. 남의 안방을 넘보다 자신의 안방을 잃어버린 언론은 머슴살이가 한창이다. 포털사이트가 메인화면에 인심 쓰듯 기사를 올려주면 마냥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뉴스의 팔 할이 연예인에 대한 가십으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한 왈가왈부에 손가락을 쉽게 허락했다. 재미를 본 언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값싼 컨텐츠를 쏟아냈다. 질적 우열과 무관하게 동일한 장소에 진열된 정보들의 가치는 일정하게 하향 평준화됐다. 하나같이 그저 그런 정보로 도매금처럼 취급 당했다. 언어의 가치를 스스로 몰락시킨 언론의 자충수는 신뢰의 기반을 잃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들이 대세가 됐다. 비평은 말장난처럼 따분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이나 섬세한 비유는 인기스타 사진 한 장 앞에서 무색해졌다. 스크롤의 압박 속에서 텍스트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 개개인의 주장들이 난무한다. 저마다 옳은 소리를 내며 분열해 나간다.
시청률 30%를 넘긴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막장 드라마라 불린다. 대중 가요는 아이돌 그룹의 경연장이 됐다.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지만 맥을 짚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의 영토가 상실되니 언어의 주체도 함께 소멸한다. 짧고 자극적인 텍스트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긴 호흡의 언어가 지겹다. 자연히 진지한 논의가 무색해진다. 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워지는 만큼 문화적 담론을 언어로 생산하는 대중문화저널들이 궁핍해진다. 물속에 산소가 부족하면 금붕어는 뻐끔거린다. 생존을 위한 신호를 보낸다.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대중문화 위기의 신호다.
자본의 논리로 모든 것이 선택되고 수급된다. 자본의 선택에 따라 양산된 컨텐츠는 결국 과도한 팽창으로 이어지고 소멸된다. 돈 되는 댄스 가수 일색으로 무대를 채우던 대중가요가 시장을 잃은 것도 자본에 휘둘린 까닭이다. 대중가요에 대한 언어는 무력했다. 영화도 드라마도 비슷한 양상이다. 예술적 가치가 무마되고 자본의 횡포가 도외시될 때 대중문화는 급격히 퇴보한다. 대중문화에 기생한 저널들이 여기저기서 난립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도하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여념이 없다.
창작자가 생산한 컨텐츠에 대한 언어도 일종의 예술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견지되고 새로운 시선을 부여할 때 넓고 깊은 유희가 발생한다. 대중문화저널은 단순히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반자로서 공존할 때 명분이 선다. 오늘날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언어의 가치가 상실되는 가운데 대중문화저널의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데서 온다. 대중문화를 씹어 뱉기보다 되새김질하고 곱씹을 때 대중문화저널에 힘이 실린다. 점점 힘이 부친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언어가 진지한 담론을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다. 정작 그것이 자신들의 시장을 몰락시키는 하나의 형태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