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마라톤 출전 선발전에서 1등을 한 조선인 준식(장동건)이 일본의 마라톤 유망주로 촉망 받던 하세가와(오다기리 조)를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1등으로 호명되는 건 하세가와였다. 분노한 조선인 관중들은 일본인과 뒤엉켜 싸우고 그 결과, 준식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으로 징용된다. 그곳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준식은 새로운 부대장으로 임명된 하세가와를 마주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던 준식과 하세가와의 인연이 전장에서 새로운 악연으로 거듭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독일군 포로들을 검사하던 연합군은 동양인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느꼈다. 독일군 군복을 입은 동양인은 자신을 ‘꼬레아’라고 소개했다. <마이웨이>는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제 치하 한국인에 관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된 소설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오게 된 한국인의 감춰진 사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호기심을 당기고 상상력을 부추긴다. 결국 <마이웨이>는 사진 한 장, 즉 파편과 같은 소재를 뼈대 삼아 그려낸 작품이란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뽐낸 바 있는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다. 빠른 속도로 컷과 컷을 쪼개며 스피디하게 다각도의 이미지 정보량을 소나기처럼 쏟아 넣고 핸드헬드로 현장감을 주입한다. 결과적으로 <마이웨이>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라기 보단 그 전쟁신 자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웨이>는 강제규 감독의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전시하기 위해 마련된 그릇 같다. 일제 치하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고 반목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터에 서게 되고, 핏덩어리가 되어 뒹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도 끝내 서로 살아남아 노르망디 해안에서 해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사실상 네 차례 정도 전시되는 전쟁 시퀀스를 조성하기 위한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저마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전쟁신이지만 반복적으로 비슷한 것을 보고 있다는 감상 안에서 그 위력이 무마된다. 그 간극을 차지하는 건 야만적인 시대성 안에서 탈이데올로기적 경험을 차례로 경험하는 두 남자의 여정이다. 조선에서 몽골로, 러시아로, 독일로, 그리고 노르망디 해변으로, <마이웨이>는 영화의 감정적 체온으로 보자면 악연에서 인연으로, 지독한 갈등에서 극적인 화해로 나아가는 멜로적인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로드무비적인 여정도, 이 모든 사연을 비극적인 멜로로 봉합하는 스토리텔링의 감정도, 전쟁신을 끼워 넣기 위한 액자처럼 보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여정이 분명 효과적으로 감정을 툭툭 치는 찰나가 있지만 그 감정적인 총합이 끝내 클라이맥스의 파고로 넘치는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스펙터클의 눈요기가 익숙해질 무렵, 예상 범위 안에서 딱 떨어지는 서사에 대한 흥미도 반감된다. 결국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서 페이소스가 소모되는 양상이다. 특히 스펙터클의 풍경 안에 선 중심 캐릭터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합에서 구르는 탓에 이입하기가 어렵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투어를 하는 기분이랄까. 150여분에 다다르는 러닝타임을 이런 식으로 견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노릇이다.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지인의 부탁으로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배우론(?)을 짧게 녹음하게 됐다. 버리긴 아까워서 원고를 남긴다. 12명은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선정했으며 그 기준은 대종상 수상자 명단에 두고 있다 한다.
원래 원고상에서는 경어체 문장을 썼으나 다시 문어체로 바꿨다. 배우는 가나다 순으로 나열됐다.
김윤진
한류스타로 불리고 있지만 이건 좀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그저 해외에서 인기만 있으면 한류스타라고 부른다. 그 전에 미국에 한류가 있긴 하나? 실체 없이 너무 남발되는 용어다. 어쨌든 현재 김윤진은 <로스트>의 성공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통용하는데 성공했다. <쉬리>의 흥행으로 관심을 얻었지만 그 이후로 그럴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했던 그녀가 해외에서 되려 성공해 국내에서도 관심을 얻었다. 이건 마치 국내에서 관심을 얻지 못하던 상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국내로 역수입된 현상과 비슷한 거다. 그 이전에 그녀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영어를 잘한다. 이는 국내배우들이 해외활동을 함에 있어서 지닐 수 밖에 없는 선천적 장애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언어의 장벽을 돌파하지 않고선 쉽지 않은 일이란 거다. 어쨌든 해외의 상종가는 최근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그녀가 열연한 <세븐 데이즈>가 흥행했다. 지적인 변호사의 이미지와 절절한 모성애가 잘 융합됐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쉬리>에서 보여준 연기도 이중적인 태도였다. 아직 김윤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부족하다. 그건 반대로 이 배우에게 볼만한 기대치가 아직 많이 남았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김혜수
건강미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에서 관능적인 이미지의 연기파 배우로 진입하는데 성공한 배우이자 명랑한 소녀의 이미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의 성장통을 잘 견뎌낸 케이스다. 사실 그녀는 성실하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며 성장한 배우는 드물지 않나. 물론 건강미 넘치는 이미지로 소모되던 그녀가 섹스심벌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한몫 한 것도 있다. 하지만 2000년도에 들어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변신은 상당히 눈부신 것이다. 그녀의 육체적 가치는 캐릭터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얼굴 없는 미녀>와 <타짜>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을 보라. 팜므파탈이라는 용어로 간단히 정의될 수 있겠지만 노출만으로도 상당히 파격적이다.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장점을 캐릭터에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위치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헌신적이고 열의가 넘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좋지 아니한가>?
문소리
최근 드라마로 발을 넓히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더 많은 걸 보여준 것이 확실하다. 그녀가 자신을 각인시킨 건 <오아시스>였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그녀는 연기가 아니라 완전 장애인이 됐다. 실제로 그 영화를 보고 문소리가 실제 장애인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그건 연기적으로 평가될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면 말 그대로 묘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하지만 그 태도는 중요하다. 어떤 여배우가 그런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게다가 그건 매우 고통스럽게 보인다. 차기작인 <바람난 가족>에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노출도 헌신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그건 김혜수의 노출과는 다른 의미다. 김혜수의 육체가 자신에 대한 가치 증명을 겸한다면 문소리의 육체는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 그 자체를 위한 소품으로서 위치한다. 그녀는 배우로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결국 오늘날 문소리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도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그녀는 쉽게 말해서 소위 연기 잘 하는 배우다.
박중훈
정말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다. 안성기와 함께 출연한 영화도 많다. 8~90년대 국내영화를 주름잡았던 배우이며 <마누라 죽이기>나 <투캅스>시리즈에서 보여준 능청스러운 입담과 표정 연기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지나쳤던 것인지 90년대 이후 코믹한 범작들에 연이어 출연했고, 결국 그 이미지가 배우의 자질을 한정시켰다. <게임의 법칙>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코믹한 이미지로 한정돼선 안 되는 배우다. <세이 예스>에서 그의 진지함이 역설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폭소를 유발한다는 건 비극적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한 때 그렇게 됐다. <인정사정 볼것없다>는 그런 면에서 훌륭했다. 이 배우의 장점이 탁월하게 구현된다. 게다가 자신의 오랜 파트너 안성기와의 연기니 호흡도 좋았다. 몇 년 후 다시 안성기와 호흡을 맞춘 <라디오 스타>는 그간 한국영화가 이 배우를 소비했던 얄팍한 태도를 고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올디스’를 ‘구디스’로 끌어올리는 건 배우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몫이기도 하다. 박중훈 씨 같은 배우를 썩히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다.
설경구
캐릭터와 배우의 간극이 크지 않아 보이는 배우, 굳이 규정하자면 성격파 배우랄까. 최근작인 <강철중: 공공의 적 1-1>으로 이어진 <공공의 적>시리즈에서의 강철중은 어쩌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온전히 끌어들인 게 아닐까 싶은 인상이 강하다. 어딘가 삐뚤어졌지만 밉지 않다.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게다가 희극적이다. 인간미가 발생한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인상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이 배우가 지닌 능동적 자질은 상당히 강렬하다. 덕분에 다소 경직된 캐릭터를 붙여놓으면 스스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상도 나타난다. <공공의 적>과 <공공의 적2>를 비교해보자. 아무래도 전자가 좀 더 자연스럽다. 현재 그는 재난 블록버스터 <해운대>에 참여했다. 아마도 그 결과가 나오면 <괴물>의 송강호와 비교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둘 다 동물적인 배우다. 다만 날 것의 느낌이 다르다. 설경구가 좀 더 맹수적인 느낌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잘 다스리면서도 본인을 제약하지 않는 캐릭터를 선택하는 쪽이 그에겐 좋을 거 같다.
송강호
모든 역할을 자신의 캐릭터로 소화해내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배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연기력과 함께 어느 정도 흥행성이 보장되는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어쩌면 과거 한석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송강호가 수렴할 수 있는 캐릭터의 너비가 한석규에 비해 광활해 보인다. 송강호는 분위기를 장악한다. 어떤 배역도 자신의 옷처럼 걸치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코디한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미장센으로써 영화를 장악하기 보단 좋은 추임새를 넣는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겐 둘도 없이 좋은 파트너가 될 거다. 문장의 형태를 해치지 않는 탁월한 수식어의 역할을 하는 덕분이다. 본인도 원톱보단 그런 역할이 더욱 편해 보인다.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이런 기라성 같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는 배우가 바로 송강호다. 어쩌면 이보다 더 좋은 설명도 없겠다.
이영애
애당초 ‘산소 같은 여자’라는 CF이미지로 떠오른 미인이다. 애초에 연기자 지망생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만큼 활동 초반엔 연기 못하는 배우 축에 꼈다. 그런 그녀가 오늘날 배우라는 프리미엄을 얻게 된 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인식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맡아준 사람이 박찬욱 감독이다. 만약 이영애가 <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하지 못했다면 과연 배우로서 반등할 수 있었을까? <친절한 금자씨>도 마찬가지, 성공적인 변신은 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그것이 파격적일 때 위력은 더한다. 사실 그녀에게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는 그녀의 활동 시기에 비해 많은 편이 못 된다. 그리고 CF는 전지현만큼이나 많이 찍는다. 그래도 그녀를 전지현처럼 비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건 출연작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명품의 가치를 창출했다. 기회를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꿰차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누가 그녀를 산소 같은 여자라고 부르나? 전지현이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에 머무르고 있음을 상기해보자면 이영애의 명품가치가 좀 더 실속 있어 보인다.
장동건
스타로서 상품성을 과시하지만 어느 정도 연기력도 인정받는 배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사실 상품성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그것이 국내를 넘어서 해외로 나아가는 상황이란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사실 그도 한때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친구>를 통해서 완전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그 전에 출연했던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더욱 주요했다. 쓰임새가 한정적이던 주연배우가 조연배우를 자청하며 무엇을 터득했을까? 파격적인 캐릭터를 입고 이미지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결과가 <친구>와 <해안선>이다. 그 큰 눈망울이 표독스러워졌다. 다들 거기서부터 장동건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완전히 야심을 완성됐다. 다만 현재의 그는 그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 <태풍>의 최명신에서 그 표독스러움의 유효기간이 드러낸 느낌이다. 하지만 이 배우가 보여준 고민은 중요하다. 자신의 스타성을 과시하는 요즘의 젊은 배우들은 한번쯤 그의 모험적인 경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요즘 배우들은 시도를 무서워한다. 어쩌면 김태희가 배우의 이미지를 얻고 싶다면 장동건의 필모그래피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진영
사실 최근에 출연했던 대작 드라마 <로비스트>의 시청률이 부진했다. 게다가 몇 년 사이에 출연작의 흥행도 부진하다. 배우라면 분명 스트레스 받는 일일 테다. 사실 그녀의 출연작 중에 눈에 띄게 흥행한 작품은 <싱글즈>가 유일하다. 그런데 왜 이 배우의 이름이 이토록 영향력을 발휘할까? CF에서 그녀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녀의 캐릭터가 상당히 눈에 선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싱글즈>이후로 그녀는 좀 더 자립적인 여성상을 연기하게 됐다. <청연>의 박경원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까지, 그리고 흥행과 무관하게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연애, 참>을 통해서는 다양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젠 파격이 무뎌진 시점에서 좀 더 내밀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녀가 <소름>에서 보여준 연기를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전도연
성장하는 배우의 얼굴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증명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국내에서 여배우가 극복해야 할 한계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한 사례이기도 하고.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하기까지 이 배우가 보여준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과감하면서도 영화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캐릭터마다 몰입도 훌륭하고 자세도 진지하다. 솔직히 외모로 치자면 예쁜 배우는 아니겠지만 전도연은 분명 아름다운 배우다. 현재 연기에 대한 믿음 자체만으로 이만한 신뢰감을 부여하는 여배우가 누가 있나? 찾아보라. 전도연이 한국영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무게감의 현재형은 그만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녀가 이렇게 성실한 필모그래피를 유지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앞으로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데 좀 더 신중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상당히 성실하면서도 훌륭하다. 박수를 받아도 마땅한 배우다.
최민식
최근 몇 년 사이 이 배우를 보기 힘들었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몇 년 사이 정치적인 제스처로 작품 활동이 어려웠다. 이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의 손실이다. 이 배우의 주연작들을 보라. 대부분 쉽게 넘어갈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현재 활동하는 배우들의 이상이기도 했다. 현재 30대를 넘어선 배우들과의 인터뷰를 해보면 종종 최민식 씨의 연극을 보곤 했다, 는 답변이 나온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감정들이 분출되는 화수분과 같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언제나 고뇌를 동반한다. 고단하고 피로하면서도 끈질기다. 트라우마에 짓눌리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저 웃고 넘긴다. 잡초처럼 생명력이 강한 인상을 탁월하게 남긴다. 그런 배우에게 3년 간의 공백이 생겼다. 누가 아쉬워야 하나? 그는 얼마 전 히말라야에서 전수일 감독의 새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을 찍었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보고 왔을까? 이 배우의 인생 자체가 어쩌면 드라마가 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기를 본다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짊어지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걸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장인이라고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황정민
극단적인 이중성을 오가는 얼굴을 지녔다. 예를 들어서 <너는 내 운명>의 김석중과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을 비교해보라. 얼마나 극단적인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농촌총각의 얼굴에서 도시의 비정함에 찌든 갱단의 중역을 오가는 그 모습이 저마다 녹록하지 않다. 극단 목화 시절 무대에서부터 키워나간 경험적 내공이 상당한 덕분이겠지만 꾸밈새를 조금만 달리해도 이 배우의 인상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돌변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중간 지점이 애매합니다. <검은 집>에서의 그는 뭔가 좀 망설이는 기분이 든다. 어느 한 쪽으로 무게중심을 잡았을 때 이 배우의 진가는 드러난다. 물론 복합적인 응용은 가능하다. <행복>에서 영수는 그런 케이스다. 정말 나쁜 놈이지만 삿대질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픽션의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정이입을 부른다. 그만큼 이 배우의 표정이 수많은 감정을 내포할 수 있는 그릇이란 의미이기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