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제프 브리지스는 캐릭터를 갈아입으며 배우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분명 실력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인정 따위는 그저 그럴 수밖에.
저명한 비평가 폴린 카엘은 <위대한 레보스키>(1998)가 개봉할 당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를 이같이 논했다.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그에 앞서 1992년, 뉴욕 타임즈는 <어게인>의 리뷰에서 브리지스를 "그의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저평가된 훌륭한 배우”라고 평했다. 후에 브리지스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저평가됐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변화에 순응하는 것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하나같이 제프 브리지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목된 건 벌써 다섯 번째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데뷔작 <마지막 영화관>(1971)을 통해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브리지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대도적>(1974)으로 또 한 번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후로 <스타맨>(1984)과 <컨텐더>(2000)를 통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크레이지 하트>(2009)를 통해 수상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트로피를 움켜쥔 브리지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받은 이 상이훌륭한영화한편을다시주목받게만들수있다는점이다.”
1949년 12월 4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제프 브리지스는 태생부터 연기자의 운명이었다. 아버지 로이드 브리지스와 어머니 도로시 브리지스 모두 배우였다. 특히 TV를 통해 활발히 활동한 로이드는 CBS에서 <더 로이드 브리지스 쇼>라는 롤타이틀 앤솔로지 쇼를 진행할 만큼 유명한 인사였다. 브리지스는 10살이 되던 해, 역시나 배우로서 활동하는 자신의 형 보 브리지스와 함께 이 쇼에 출연했다. 사실 브리지스의 첫 번째 스크린에 데뷔한 것은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이뤄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출연한 <The Company She Keeps>(1951)에서 제인 그리어의 팔에 안긴 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자로서 진로는 내가 앙앙거리던 생후 6개월에 시작됐다. 그러니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지. 요컨대, 족벌주의의 산물이랄까.”
사실 브리지스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각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라스트아메리칸히어로>(1973)를 끝낸 후였을 거다.” 당시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의 촬영을 마친 브리지스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아이스맨 코메스>(1973)에 그를 캐스팅하기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리 마빈, 프레드릭 마치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거절했다. 그러자 2시간 후,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를 감독한 라몽 존슨이 찾아와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그러고도 배우인가? 진정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화계의 이런 거물들과 일할 기회를 차버릴 수 있지?” 결국 브리지스는 <아이스맨 코메스>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를 직업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는 브리지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작업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이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줄 만큼.”
사실 제프 브리지스는 배우보단 뮤지션을 꿈꿨다. “나는 스스로 배우로서 활동하길 진지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열 편의 영화를 해버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카데미에 두 번째 노미네이트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게 될 거야.’” 일찍이 <사랑의 행로>(1989)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던 브리지스는 <컨텐더>(2000)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킴 칸스와 함께 녹음한 쟈니 캐쉬의 명곡 ‘Ring of Fire’이 오프닝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것이다. 같은 해 제프 브리지스는 유명한 아티스트 마이클 맥도날드와 크리스 페노니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램프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앨범, <Be Here Soon>을 발매했다. “대단한 작곡가이자 내 오랜 친구인 존 굿윈이 써준 세 곡이 앨범이 수록됐다. 우린 함께 자랐지. 심지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내 백업 싱어였다고!”
<크레이지 하트>에서 퇴물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를 연기한 브리지스의 선택도 그의 음악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음악을 찾고자 했다.” 곧 브리지스는 대안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크레이지 하트>는 이미 30년 전부터 준비된 영화였다. <크레이지 하트>에서 음악을 담당한 티 본 버넷과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1980)에 출연할 당시, 함께 연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티 본을 소개시켜줬고,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 중 어디선가 티 본이 보였고, 그도 나에게 대본에 관해 물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생애를 다룬 <앙코르>(2005)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티 본은 <크레이지 하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브리지스는 티 본을 찾아가 물었다. “어때? 관심 있어?”티 본이 답했다. “그래, 만약 네가 하겠다면 나도 하지.” 티 본의 참여로 <크레이지 하트>는 비로소 심장을 얻었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티 본의 가세로 모든 것이 변했다.”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신경 쓴 건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배드의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제프 브리지스는 오랫동안 배우로서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셀레브리티로서 가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정직한 삶은 배우들의 방탕한 삶을 즐기는 대중에게 심심한 사안이었다. 덕분에 제프 브리지스는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각인될 수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너무 깊게 몰두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고수해왔고 큰 성공을 거뒀다.” 브리지스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통해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항상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것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브리지스가 애초 배우에 전념하지 못한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흥미에 흥미가 많았다. 음악과 미술, 그 외에도 내가 진짜 원하던 다른 것들까지.” <스타맨>에서 함께 출연한 카렌 앨렌의 제안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브리지스는 2003년 <Pictures: Photographs by Jeff Bridges>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다. 브리지스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그린 삽화와 낙서로 가득하다.
현재 브리지스는 존 웨인의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에 참여를 결정했고,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SF영화 <트론>(1982)의 리메이크에 참여한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덕분에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배우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상식 트로피를 얻는 것 역시 그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목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브리지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브리지스는 자신이 터득한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 부치지 말아라. 거창한 인생의 과제를 정하지도 마라.” 이보다 확실한 경험담은 없다.
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