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부팅’ 그러니까 컴퓨터를 다시 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러니까 영화를 리부트한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부트는 그 대상이 되는 원작이 깔아놓은 철로에 개량된 열차를 올려놓는 작업이 아니다. 열차뿐만 아니라 철로를 싹 갈아엎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작업이다.
변주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시리즈의 정체성만은 유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엔 배트맨이 있고, <맨 오브 스틸>(2013)엔 슈퍼맨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없는 <007>시리즈가 존재할 리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의 미래를 보장하는 뿌리이자 줄기이며 잎이자 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엔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리부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배트맨이든, 슈퍼맨이든, 스파이더맨이든, 한결 같이 ‘태생의
비밀’을 안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리부트
영화들이 ‘프리퀄 무비’로 시작되는 건 다분히 전략적인 셈이다. 리부트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돼서 새롭게 설계된 이야기 위에서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다. 이를 테면 <007: 카지노 로얄>(2006)이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과 같은 작품은 프리퀄의 형식을 빌려서
시리즈의 리부트를 시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서사의 발판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구축한 뒤, 나아가버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노력보다도 손쉽게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방법론이다. 게다가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증명한 것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의 너비란 그야말로
우주처럼 넓고 광활하다. CG의 발달을 위시한 영상 기술의 발달도 리부트를 부채질한다. 과거의 기술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구현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을 놀라운 볼거리로 발바꿈시키는 것만으로도 리부트의 가능성은 보다 무궁무진해진다. 리부트
열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프랜차이즈들이 리부트의 대열에 합류 중이다.
리부트 열풍은 영화계를 넘어서 TV시리즈까지 강타하고 있다. 내년에 방영될 예정인 <히어로즈> 시즌 5는 이미 기존의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또한 고전 시리즈로서 인기를 모았던 슈퍼히어로물인
<플래쉬>도 새롭게 리부트될 예정이다. 또한
리부트 열풍은 영화와 미드의 경계를 넘어선 스핀오프 기획으로 진화 중이다. <어벤져스>의 성공에 힘입은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기획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을 주인공으로 둔 또 다른 <배트맨> 프리퀄 시리즈가 미드로 제작 중이다. 스크린과 TV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리부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건 단순한 영웅전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오늘날의 슈퍼히어로 무비들과 또 다른 전형이다. 혼돈과 절망을 건너 끝내 세상을 구원하는 배트맨의 여정은 여전히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장편 연출 데뷔작 <미행>(1998)은 단돈 6천불의 예산과 게릴라 슈팅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이는 미국 내 단 두 개의 상영관에서 개봉된 뒤 4만 8천여 불의 수익을 거뒀다. 최근 놀란이 지휘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초라한 규모를 지닌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다. <미행>의 파편적인 서사의 운용은 놀란을 세계적인 입지의 감독으로 승격시킨 <메멘토>(2000)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의식은 <인셉션>(2010)과도 흡사하다. 실제로 <미행>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인셉션>의 코브와 동명인 또 다른 코브가 등장하는데 그는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어떤 의미로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는 타인의 꿈에 침투해서 기억을 조작하고 개인의 삶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미행>의 도둑질이 곧 ‘인셉션’인 셈이다.
놀란이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적임자로 임명됐을 당시, 화두에 오른 건 문에 붙은 배트맨 로고가 등장하는 <미행>의 한 장면이었다. 그가 일찌감치 배트맨의 팬보이였다는 소문이 전파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배트맨에게 시행한 심폐소생술은 탁월했다.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1989)이 할로윈의 코스튬 카니발이라면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테러를 주목하는 영화였다. 그러니까 팀 버튼의 그것이 철저하게 악몽 같은 코믹스의 세계관 안에서 복무하며 현실과 괴리된 존재들을 비추는 대신 놀란은 최대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 세계의 폭력 위를 누비는 영웅의 고단함을 추적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 수트의 부품 하나하나의 근원과 기능까지 짚어나간다. 결과적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다크 나이트>(2008)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위한 충실한 매뉴얼이다. 반도체의 단자들을 연결하듯 배트맨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인과관계에 크고 작은 디테일을 새겨 넣는 과정을 통해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라는 이중적 자아가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장을 마련한다. 이는 단순히 놀란의 고집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인식이자 철저한 기준, 즉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 가치를 대변한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상영관을 벗어난 관객이 자신의 영화적 체험을 곱씹을 때, 영화 속 고담과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그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되고 이로서 완성된다.
<배트맨 비긴즈>가 놀란의 배트맨을 스크린에 세우는 작업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면 <다크 나이트>는 그 완성된 배트맨을 도구 삼아서 고담, 즉 이 세계의 곳곳을 비추고, 살피는 ‘놀란의 본격적인 시선’에 가깝다.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동원된, 전작에 비해서 광대해진 스케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어루만진 디테일의 연결을 통해서 보다 손쉽게 확장된다. 물론 히스 레저의 목숨을 건 열연이 <다크 나이트>가 지닌 자질 이상의 성취를 더했다는 걸 간과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사회를 관통하는 시선과 영웅에 접근하는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다크 나이트>는 ‘이 사회의 대중이 진정한 영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가?’라는 물음을 품었다. 고담을 유린하던 조커가 배트맨이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자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시민들은 배트맨을 비난하고 자수를 촉구한다. 조커는 대중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심리를 파고 들어 헤집는다. 이를 통해서 영웅을 끝내 궁지로 몰아넣는다.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대단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럼에도 이 사회에 영웅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다크 나이트>에서 스스로 권위의 추락을 선택한 배트맨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고담을 구원할 흑기사가 된다. 배트맨에게 기생하듯 등을 맞댄 숙적 조커와 달리 베인은 철저하게 반체제의 선동가로서 배트맨을 마주보고 선다. 놀란은 말한다. “조커는 확실히 혼돈에 가까운 무정부주의자이자 사악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서 특별한 악당의 전형을 보여줬다. 내게 베인은 이 영화를 위한 밑천이었다. 이번 영화에선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조커가 고담을 흔드는 바람, 즉 혼돈 그 자체를 유희하는 악마였다면 베인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망의 화신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베인에게 뭇매를 맞고 나뒹굴던 배트맨이 끝내 허리가 꺾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광경에서 묘한 통증을 공유했을 것이다. 기댈 곳이 없다는 건 세상의 끝으로 몰린 절망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세상의 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물론 이성적인 질서와 규범이 무법적인 폭력에 의해 와해되는 풍경을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만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인 절망이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비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배트맨이 구원한 고담에서 자라난 누군가는 정의로운 신념으로 영웅적인 채비를 차리고, 세계로 나아간다. 배트맨은 말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배트맨의 탈을 쓴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란, 이 세계의 정의란 그런 것이다. 결국 놀란은 이 세계를 좌우하는 건 배트맨도, 베인도 아닌, 객석의 개개인이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놀란의 영화는 항상 진실에 대한 물음을 품고 있다. 그 물음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진실을 마주하기까지의 고난과 목도했을 때의 충격을 중요하게 다룬다. <프레스티지>(2006)는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면일지도 모른다. 마술은 트릭이다. 눈속임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시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훈련된 눈속임이 아니라 위장된 진실이라면? 최고의 마술을 꿈꾸던 두 마술사가 경쟁 끝에 도달하는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놀랍고 끔찍하다. <프레스티지>는 바로 놀란이 품은 진실게임이다. 놀란은 말한다. “자신만의 세계와 논리를 가진 영화들이 관객이 보는 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당신이 바라보는 영화적 세계가 스크린 너머의 허구일 때 우린 안전하지만 그것이 때때로 현실로 튕겨져 나올 때, 영화란 더없이 위험한 도구처럼 보인다. 최근 콜로라도 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총기 사건도 영화의 잠재적 불안을 조커처럼 속삭이고 부추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세계를 망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놀란이 전하는 진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린 믿어야 한다. 당신이 지켜야 할 모든 가치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BOX)왜 아이맥스인가?
“아이맥스가 영화를 위한 최고의 포맷으로 발명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다. 상업영화 최초의 사례였다. 심지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작의 두 배에 달하는 55분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70mm 아이맥스 필름에 담긴 광대한 비주얼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놀란은 단순한 볼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다. “<인셉션>은 그 특이한 풍경을 포착하기보다 꿈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게 중요했기에 아이맥스 대신 핸드헬드 카메라의 현장감을 활용했다. 반면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아이맥스의 거대한 캔버스에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 차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방식에 의존한 결과였다.”놀란이 재발견한 아이맥스에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다.내년에 개봉될 <스타트렉: 더 비기닝 2>와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으며 스티븐 스필버그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중이라니, 3D를 잇는 차세대 영화 플랫폼은 아이맥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다크 나이트>가 선사한 광활한 충격을 맛본 당신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주님일 거다. 무한한 혼돈과 같은 조커를 이겨낸 배트맨은 존재 자체로 파괴이자 절망에 가까운 강적 베인에 맞서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또 한 번 일어서서 소돔과 고모라가 될 고담시를 구원해야 한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잇는 트릴로지의 피날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164분의 러닝타임 안에서 다시 한 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영웅의 소비 실태를 고민하고 제시한다.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는 미국 내 사회에서 월가 시위와 같은 계급적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현실이 적극적인 메타포로 동원된 인상이기도 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결국 자본과 계급이라는 21세기의 시민사회를 관통하는 히어로계의 <시민 케인>이라 할만하다. 배트맨은 여전히 고뇌의 간지를 풍기고, 베인은 압도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훅을 날리는 건 캣우먼이다. 한두 가지 결정적 순간이 전체적인 완성도 안에서 살짝 뒤쳐지는 인상이지만 결말은 가히 복음이 되어 배트맨을 성배로 만들고야 만다. 개별적인 작품의 완성도에서 봤을 때 <다크 나이트>를 넘지 못하는 듯하나 3부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기 이야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하는 수작이다.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분량만 72분에 달하는데 이걸 과연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안보고 배기는 것이 정상일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광대하고 웅장하며 처절하나 결국 경배할 수밖에 없는, 영웅 대서사시. 과연 이런 3부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출처가 불명확한 것이다. 어떤 이의 말로는 이것이 어느 일반인의 팬질이라 추측하지만 이 떡밥을 '나는 믿고 싶다'. (이 떡밥은 내꺼다! 덥썩!)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2011년까지는 목숨을 연명해야 할 필사적인 이유가 생긴 것이리라. 히스 레저와 함께 조커가 분실된 이상, 조니 뎁 옹의 리들러라도(!) 결코 보고 싶다.
아이맥스 카메라의 앵글에 비춰진 광대한 도시의 밤 풍경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고담시의 어두운 밤거리, 고층빌딩 위에서 그 거대한 진풍경을 내려다보는 배트맨은 실로 고단하다. 짙게 드리운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배트맨은 홀로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광대한 고담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은 배트맨이 짊어진 고단함의 무게를 대변한다. 도시를 지배하는 암묵적 질서가 부패한 정경유착의 뿌리를 내리고 악의 편의를 손쉽게 도모할 때, 배트맨이 홀로 일으키려는 정의는 과연 그 도시에서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도시의 밤을 고층 빌딩 위에 홀로 서서 관조하는 배트맨은 고민이 깊다. 그래서 그의 형상은 실로 고독하다.
범죄로 얼룩졌던 고담시의 거리는 밤마다 거리를 누비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의 청결한 의지로 미화되고, 고담시의 밤을 지배하던 갱들은 죄악이 행해지는 곳에 어디든 나타나는 배트맨의 서치라이트 아래 몸을 사린다. 하지만 배트맨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그는 악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을 뿐, 박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적 공포로 고담시의 밤거리를 지배했을 뿐, 그가 홀로 악을 몰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배적인 억누름만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에게 희망은 제도적 질서의 복원이다. 배트맨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를 도시의 구원자라고 지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한 살충제를 뿌릴수록 강한 해충이 나타나는 것처럼, 고담시의 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배트맨의 앞에 무시무시한 상대가 등장한다. 자본에 연연하지 않고 혼돈에서 비롯된 순수한 공포를 신봉하는 조커(히스 레저)는 순수한 악으로써 배트맨의 뒷면을 차지한다.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 배트맨은 조커에게 존재의 목적을 부여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기반을 전복시키며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죽이겠다는 조커의 경고에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외친다. ‘무법자가 무고한 시민의 목숨보다 중요한 거요?’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쓴 배트맨 앞에서 갈등한다. 어둠을 지배한 배트맨은 악당을 지배하는 과시적 존재인가. 그의 영웅놀이가 되려 시민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일까.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는 거지.
<다크 나이트>에서 중심포석은 당연히 배트맨이다. 하지만 수를 던지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제압하는 배트맨의 영웅수기가 아니다. 되려 반대로 배트맨의 존재적 가치를 시험하는 조커의 광기를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통해 배트맨의 가치적 양면성을 조명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커는 배트맨을 비추는 거울이자 배트맨에 대한 불완전 연소를 돕는 촉매이며 그의 드러나지 않은 뒷면의 표정이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블랙슈트를 착용한채 악을 소탕하는 배트맨의 형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체제의 오류를 증명하는 바나 다름없다. 악이 지배하는 도시의 질서를 암묵적으로 수긍한 채 무기력하게 형태만 갖춘 권위 없는 제복의 사회. 도시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패와 강탈이 암묵적인 질서로 사회 밑바닥을 제압해버린 살풍경. 배트맨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부실한 팀워크를 돌파하는 단독드리블 주자다.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오류이며 사회적 시스템의 악순환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배트맨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배트맨의 존재는 결국 사회적 시스템의 한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의 지표를 떠받드는 주춧돌에 가깝다. 배트맨의 월등한 기능성과 신속한 가동성은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심리적으로, 활동적으로도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결국 그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평화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조커가 배트맨의 위기를 부각시키는 건 그 지점이다. 배트맨은 제도적 구속을 탈피한 개인의 능력으로써 제도의 지지를 견인하지만 이는 결국 제도적 허점의 정곡을 찌르는 행위에 가깝다. 조커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공격한다. 가면을 쓰고 폭력을 통제하는 이의 폭력이 실은 제도적 질서를 유린하는 것임을, 폭력을 제압하는 필요악의 존재로써 배트맨을 규정하고 그의 결백한 정의를 자극한다. 자신의 폭력성과 배트맨의 폭력성이 양면의 동전처럼 맞닿아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 와중에 시민들은 배트맨으로 인해 얻었던 평화의 기저에 억눌려 있던 폭력의 잠재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고 인식한다. 정의를 구현하던 영웅 배트맨은 고담시를 조커의 표적으로 내모는 악의 소환자로 몰락한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갈등하고 고민한다. 선을 넘어버린 영웅은 더 이상 돌아갈 수도, 돌아갈 곳도 없다.
조커는 일종의 사회학적 행위실험자에 가깝다.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가 개입되는 건 조커일 것이다. 제도적인 모순을 공격하는 행위자, 조커는 결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양식으로써 작동되는 현대의 질서가 과연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를 되묻는 발의에 가깝다. 조커의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오류조차도 다스리지 못해 제도 밖의 능력을 빌어오는 현시대의 질서가 과연 보존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되묻는 상징적 부호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조커의 끔찍한 기억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입가의 흉터가 그에게 미소의 형상을 부여한다는 아이러니와도 결합된다. 배트맨이 구축한 고담시의 평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그는 힘으로써 힘을 봉인했지만 결국 그건 방편적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그가 정리한 쓰레기들을 정화하는 건 고담시의 법적 질서여야 하지만 제도는 더디고 무력한 검증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조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고담시는 혼란에 빠진다.
배트맨이 억눌렀던 폭력은 되려 조커의 광기를 입고 예전보다 거대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배트맨은 가면을 벗을 수 없다. 배트맨의 가면은 제도의 한계가 만들어낸 기형적 마지노선이다. 부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의의 예외적 방편으로써 배트맨은 존재한다. 결국 배트맨의 가면은 보존된다. 하지만 그 보존을 위해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희생된다. 그와 함께 스스로가 증명하고자 했던 정의의 구원자마저 타락한다. 배트맨은 더더욱 고립되어 간다. 블랙슈트의 아우라가 감추던 인간적인 나약함이 <다크 나이트>에서 넘쳐흐른다. <다크 나이트>는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처연한 응답과도 같다.
강렬한 액션 시퀀스조차 널뛰기적인 흥분을 발생시키지 않는 건 <다크 나이트>를 철저히 통제하는 어떤 지배력 덕분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듯한 캐릭터들의 깊은 트라우마가 연동되어 <다크 나이트>의 내러티브에 거대한 감정의 바다를 형성한다. 강렬한 씬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러티브의 심리가 영화의 형태를 장악한다. 박쥐를 두려워하는 브루스 웨인이 박쥐형상을 한 배트맨으로 내면적인 공포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처럼 자신의 찢어진 입을 광대와 같은 유희적 화장으로 가리는 조커는 (불분명한) 외부적 충격으로 학습한 경험적 공포를 외부로 확산시켜 나간다. 두 인물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공포로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맞닿아 있다. 유사한 통과의례를 거쳤으나 이질적인 내면을 지니게 된 두 인물의 심리적 격돌은 격랑처럼 거칠지만 심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감정을 압도한다.
조커가 형성한 공황장애적 공포는 영화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정점을 찍는 건 투페이스다. 조커가 <다크 나이트>의 키워드라면 투페이스는 키홀더다. 궁극적으로 투페이스의 존재는 <다크 나이트>가 증명하고자 했던 역설의 종착역과도 같다. 인간의 나약한 심리는 때론 강건한 의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덧없이 몰락한다. 자신이 믿던 정의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믿는 투페이스의 잔혹한 얼굴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빚어내는 비극적 양상을 연출한다. 그건 정의를 위해서 이중생활을 도모해야 하는 배트맨의 고단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좋은 답변이기도 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결국 체제적 오류를 발생시킨다. 모든 선악의 기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작동된다. 끊임없이 제도는 인간의 변동적 심리로부터 도전을 얻는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은 제도적 결함을 발생시킨다. 결국 그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건 일부 개인의 희생과 헌신이다.
무력한 질서를 유린하는 조커의 시험은 결국 정의로운 질서의 구축을 희망하던 배트맨을 패배자로 내몰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통한 질서의 전진을 선택한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희생양으로 몰락하거나 그 비극적 기제 안에서 더욱 지독하게 타락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의 손가락보다도 배트맨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자신이 희망으로 삼았던 정의적 선봉장의 타락이다. 분노로 인해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는 결국 배트맨의 영웅적 권위를 상실시킨다. 제도의 타락적 패배를 지우기 위해 배트맨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으로써의 명예를 스스로 반납한다. 배트맨은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한다. 세계를 구원하려던 개인적 헌신은 몰락해도 체제적 정의의 숭고함은 강건해진다. 무력하게 흐르던 체제의 몰락은 비범한 영웅의 희생을 볼모로 갱생한다. 영웅을 갈망하면서도 결국 영웅을 몰락시키는 모순적 체제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해묵은 슈퍼히어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는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명확해졌다. 배트맨의 기원을 다룬 <배트맨 비긴즈>는 단순히 시리즈의 부록이 되기 위한 프리퀄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배트맨의 기원뿐만 아니라 배트맨 슈트의 기술적 가능성까지 설득해버린 이 영화의 반도체적 세심함은 <다크 나이트>의 양식이 어떤 설득력을 포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만드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의 말미에 고든(게리 올드만)이 배트맨에게 내미는 조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묻혀 있던 야심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팀 버튼이 유아적인 악몽처럼 채색한 <배트맨>시리즈의 세계관과 평행한 지점에서 자신만의 치밀한 소묘를 채워 넣는다. 만화적인 양식을 배제하지 않되 완벽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재창조해냈다. 어쩌면 좀 더 논리정연하고 개연성이 확고한 반도체적인 히어로 무비를 완성시키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그러했듯 <다크 나이트>는 그가 슈퍼히어로 만들기의 야심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는 초현실적 비범함으로 무장한 영웅의 슈트 안에 웅크린 인간의 내면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점점 정치로, 사회로, 세상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렸다.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배트맨의 뒷모습처럼 영웅은 점점 외롭고 고단해진다. 배트맨은 과연 그 고단함을 견딜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은 잠들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웅을 보존할 수 있을만한 그릇이 되는가. 이는 과연 촛불이 어둠을 밀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처럼 힘겹지만 현실에 발붙인 이들이 지녀야 할 절박한 물음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시리즈의 위기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작품이 나온 이상, <배트맨>시리즈의 차기작을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을 거에요.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시리즈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적어도 캣우먼까지 한번 욕심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싶네요.
<다크 나이트>를 봤습니다. 뒷골을 맞은 듯한 충격, 따위는 없었어요. 단지 보는 내내 스크린에 눈알을 박고 손톱을 물어뜯었답니다. 덕분에 제 왼쪽 엄지손톱은 만신창이가 됐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미국 평론가들의 설레발을 태평양 건너에서 보고 마음채비를 갖추고 있던 어린 놈의 쉐이가 그 설레발을 수긍할 수 밖에 없고, 절대적으로 지지해야 함을 가슴 뛰는 기분으로 만끽하고 있다면 그건 필시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니까요.
어쩄든 히스 레저의 빈자리가 뒤늦게 태평양 바닷물이 사라졌음을 직감하듯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과연 이 영화만큼 상업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겸비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전 쉽사리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엔딩 너머로 고요한 슬픔에 짓눌렸어요. 예수는 이런 심정으로 골고타 언덕을 넘었겠죠. 우리가 신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다크 나이트>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거죠. 전 그저 어린 양입니다. 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죠? 맙소사. 아무리 생각해도 전 오늘 정말 엄청난 것을 봐버린 겁니다. 마이클 조단의 페이드 어웨이 만큼이나 그건 말도 안되는 느낌이라고요.
다들 부천에 다녀온 이야기다. 난 뭘 봤어. 뭐 괜찮더라. 그래? 난 이거 봤는데 좀 그랬어. 하지만 엄청난 비공세에 부천행을 접고 주말에 집에서 은둔한 1인은 할말이 없었다. 기필코 보리라, 세르지오 레오네, 라는 굳은 결의도 집에서 홀로 하얗게 불태웠다. 어쩄든 그나마 낼 모레 <다크 나이트>를 보기 위해서 <배트맨>과 <배트맨 비긴즈>를 복습했다. 투페이스가 나오는 관계로 <배트맨 포에버>를 다시 한번 볼까 생각도 했지만 불필요한 시간 낭비 따위는 걍 접기로 했다.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를 위해서 토미 리 존스-토미 리 존스 지못미 ㅠ-의 투페이스를 참고할 필요 따위는 결코 없는 게 분명하다.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팀버튼의 <배트맨>은 꽤나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에 봤던 작품이라 새살이 돋아나듯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게 꽤나 재미있었다.
그 당시 잭 니콜슨의 연기가 어린 마음에선지 사악한 싸이코패스 정도로 간단히 입력됐었나 보다. 지금 다시 보니 정신질환적인 연기가 세심하면서도 유순하게 녹아들었다는 인상이 느껴졌다. 지독한 또라이라기 보단 아티스트 기질이 농후한 광대기질의 사이코에 가깝다. <다크 나이트>의 몇몇 예고편을 본 결과, 히스 레저의 조커는 상당히 인상이 강해보인다. 광대 분장에 가깝던 잭 니콜슨의 분장보다도 착란적 기질이 강해서 공포스럽고 괴기한 느낌도 세보인다. 잭 니콜슨의 광대적 조커가 웃는 얼굴로 등에 칼 꼽을까 두려운 상대라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앞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겹게 만들 인상이다. 게다가 그것이 히스 레저란 점에서 더욱 놀랍고도 궁금할 따름이다. (이쯤 해서 고인에 대한 명복을 한번 더..아, 히스 레저....ㅠㅠ)
무엇보다도 <배트맨>과 <배트맨 비긴즈>를 연속으로 보니 시대적 변화에 따른 고담시의 디자인 차이를 확 느낄 수 있었다. 팀 버튼은 코멘터리에서 시대성을 지우려고 노력했다지만 역시 그 당시의 시대적 외관이 상상력의 맥시멈으로 작용했던 것이 분명해보인다.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고담시는 나름 21세기적이니까. 또한 팀버튼의 <배트맨>이 원작을 배반한 전형이라고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에 비하면 좀 더 유아적인 형태에 가깝게 느껴져서 되려 코믹스의 느낌을 독창적으로 컨설팅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놀란의 배트맨에 비해 좀 더 만화적인 느낌도 들고. <배트맨 비긴즈>는 그에 비해서 촘촘한 그물망처럼 느껴진다. 과거 <배트맨>시리즈가 영화적 허용을 최대한 활용했다면 놀란의 <배트맨>시리즈는 모든 인과관계와 장비의 기능성을 디테일하게 세공한다. <다크 나이트>가 기대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이란성 쌍둥이라기 보단 샴쌍둥이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팀 버튼이 버린 기자재까지 놀란은 최대한 건져올려서 현실적인 배트맨을 직조한 것처럼 느껴진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머리를 지닌 한 아이처럼 보인다. 어쩄든 미국 현지의 반응에 완전 달아올랐다. (꺄오! +_+)
어쨌든 네오이마주 세미나 준비는 개코도 못하고-어찌합니까!- 계획은 완전 파편처럼 날아가고,-어떻게 할까요오~!- 오늘 예비군 통지서까지 받고 짜증에 쩔었다. (GG) 어!째!서! <스타워즈: 클론의 전쟁>시사회가 있는 날에 난 군복 따위를 입고 지겨운 킬링 타임에 도전해야 하는 걸까! 설마 <헬보이2>까지 그 와중에 겹친다면 현역 때도 꿈꾸지 않았던 탈영 생각에 우울해질 것 같다. (제발 ㅠ) 어쨌든 픽사 20주년 기념전과 매그넘 전시회, 그리고 세계 미술 거장전에 가고 싶은 1인으로써, 초딩 시절부터 터득한 깨달음이지만 시간표대로 움직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흑.
그래도 <다크 나이트> 볼 생각에 벌써부터 불타고 있는 1인은 과격하게 설레고 있다. +_+ 물론 <월E>와 <엑스파일>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P.S>원래 짧은 글을 쓰려했는데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뻘소리가 대거 추가됐다. 난 잡담조차도 도저히 짧게 쓸 수가 없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