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오랜 대화라도 나눈 사람처럼, <미생>을 말한다. <미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택시에서 스마트폰으로 <미생>을 보다가 울컥했다. 눈물을 훔치니 택시 기사가 사연을 물었단다. 말해봤자 알겠나 싶었지만 <미생>이란 만화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허허!’ 웃더니 물었단다. “아니, 그 <미생>이란 만화가 대체 뭐요? 얼마 전에 한 여자도 뒤에서 갑자기 펑펑 우는 거야! 그래서 뭔 일 있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그 <미생>인가 뭔가를 봤다네? 아니, 그게 뭔데 그리 울어?” 친구의 소주잔을 채우면서 전해들은 경험담이다. <미생>이 연재된 포털사이트의 댓글 게시판엔 이 같은 사연이 차고 넘친다.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를 쏟아낸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 <미생>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미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다.
<미생>은 어느 실패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에 바둑연수생이 된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뒤 7년 만에 프로바둑기사라는 꿈에서 이탈한다. 낙오한다. 돌을 던진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소년이 고졸의 낙오자가 돼서 사회로 나온다. 바둑판에서 추방된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해서인걸로 생각하겠다.’ 아픈 말로 자신을 누른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킬만한 핑계는 많지만 그 핑계마저 자신을 찌르는 일이니 차라리 스스로를 짓누른다.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란 대부분 성공으로 역전되는 희망의 송가로 귀결된다. <미생>도 희망을 찾는 작품이다. 하지만 ‘성공’에 관한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지인을 통해서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장그래는 2년 간의 계약직 사원 근무 끝에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 그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고졸이기 때문이다. 그가 머물렀던 조직의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고,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일 때, 독자들은 뜨거워졌다. ‘이만하면 장그래도 정직원 자격이 있네! 정직원 되겠네!’ 응원했다.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단순히 이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되레 현실을 직시했다. 장그래는 ‘정직원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말했다.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뜨겁기만 한 빈말보단 차가운 척 따뜻하게, 정말로.
<미생>이 그리는 건 이 사회의 전형적인 관료제다. 겉으로 보기엔 언뜻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듯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체계와 질서의 합의와 균형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맹점을 지적하고 질타하기 보단 그것이 합리화되고 안착할 수 있는 배경을 살핀다. 그 끝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돼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을 얻고, 사람을 쓰고, 사람을 통해서 계획이 수립되고, 정책이 시행되고, 결과가 완성된다. 제도가 완전해도 사람은 불완전하고, 결국 체계도 불완전해진다.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를 막기 위해서 제도는 보완되고 방파제처럼 강건해진다. 예외란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단어다.
“이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장그래에게 직속 상사는 답한다. “안 될 거다.” 이유란 이렇다. “세상은 원래 불완전한 거니까.”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아닌 불완전함. 본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은 절망이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희망이다. 단지 그곳이 당신의 세상이 아닐 뿐이란 말이니까. 거기서 다시 <미생>은 말을 건다. 장그래에게 어쩌면 당신에게.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은 대단히 이상적인 팀이다. 직속 팀장인 오차장은 “일은 뺏겨도 사람은 안 뺏겨”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원활하다. 서로를 존중한다. 홀로 작은 바둑판 위에 집을 짓고 부수던 장그래는 사회로 나와 바둑알 같은 존재가 돼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자신과 함께 집이 되는 바둑돌들을 마주한다. 기대고, 부딪히고, 마주본다. 사람을 얻는다. 세상을 익힌다. 삶을 내다본다.
<미생>의 끝, 정확하게 1부의 끝에서 장그래는 다시 자리를 찾는다. 불완전한 세상을 가르쳤던 오차장이 둔 포석에 합류한다. 미생이 모인다. 완생을 꿈꾼다. 2부는 거기서 시작된다. 바둑연수생을 포기하고 기원에서 나오던 장그래와 계약직 만료 메시지를 받고 회사에서 나오는 장그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패배감이 사라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이 패배만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단단하게 여문 장그래를 통해서 당신도 어쩌면 성장했다. 막연한 희망을 품었을 때 현실은 가혹해진다. 정확한 대안을 찾을 때 현실은 생생해진다. 깨닫는다.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나도, 당신도 미생이니까. 꿈꿀 수 있다. 살아야 한다.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건강했고, 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죠. 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병원 관계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거짓말 같은 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거짓말 같은 삶. 아버지는 기로에 섭니다. 6년간 함께 했던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현존하는 일본의 거장이라 해도 좋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번져나가는 동심원의 파문을 조용히 살피듯이, 무거운 주제를 사소하고 차분한 풍경 속으로 담담하게 떠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정작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은 그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당사자들의 선택을 객석에서 응시하듯 상황을 그려나갑니다.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란 게 희박합니다. 특정한 인물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시점이란 게 좀처럼 발견되질 않죠.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영화 속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고로 사실상 이 영화에 개입하는 존재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그리고 영화적 사연에 대한 판단을 극 속의 캐릭터들이 주도하는 상황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도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갈등을 담아낸 드라마 같지만 영화는 결과적으로 더욱 큰 범위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객석에서도 어떤 판단에 동참하길 원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강력하게 어필한다는 말이죠.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후자의 미래 그리고 사회를 보다 존중하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대안가족’의 형태라고 할까요. 인간의 갈등을 그리는 개인적인 드라마 같지만 결국 그 사소한 영역의 이야기엔 우주 같은 주의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결말부에서 전달되는 거대한 진폭의 감동이 그 강력한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고 증폭시키는 인상마저 듭니다.
물론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자는 사회운동적인 메시지가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일종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에겐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겠지만 결국 이 사회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우린 다음세대를 위한 어른이 돼야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해도 부모와 같은 온기와 지혜를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그런 어른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대단히 감동적이고, 숭고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이토록 거대한 메시지를 이토록 사소하고 담백하게 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일 테고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야말로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군요.
청춘을 낭만이란 단어로 수식하기가 무색해진 건 정확히 IMF 금융위기 이후부터였다. 사회 전반의 경제 구조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취업난이 가속화되고 지독한 스펙 경쟁이 일반화됐다. 고학점은 기본이고 아마 그 시절 즈음부터 토익 고득점이 필수적인 요건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유학이나 해외연수 경험이란 이력서에 꼭 들어가야 하는 항목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로 부익부 빈익빈이 본격적으로 교육적 환경에까지 적용되는 상황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됐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는 헝그리 복서 이야기처럼 낡아갔다. 강남 기반의 서울 부유층 자제들의 서울 명문대학 입학률이 점차 높아지며 교육을 통한 사회 계급 상승을 노릴 수 있는 확률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힘든, 부자들을 위한 사회로서의 채비가 갖춰지기 시작했다는 것.
최근 고대에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를 통한 20대의 정치적 목소리 찾기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논쟁 자체가 무력화된 20대가 정치화된 건 필연적으로 이명박 덕분(?)이다. 사실상 20대의 경제적인 무력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고삐에 잡히듯 끌려가던 10대와 20대의 불안이 분노로 발화되기 좋은 시점이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던 거다. 그 징후는 촛불 시위 당시 교복소녀들의 등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치적 이념이 증발된 21세기에서 10대와 20대가 광장의 집회에 동참한다는 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망 혹은 본능을 읽게 만드는 대목이었으며 그 분노의 대상이 명확하게 자신들에게 어떠한 것도 해주지 않는 기성세대, 더 나아가선 자신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이 어른들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인상의 정부와 사회에 대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필연적인 방향성이었던 것. 나아갈 광장이 마련됐으니 나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고.
한때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 ‘20대 개새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성세대가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적 인프라의 최대 피해자는 현재의 10대와 20대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입학금과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 요건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요구되는 가운데서 은행에선 학자금 대출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정작 피해의 당사자들을 위한 발언권이 전혀 없다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광장으로의 출연을 유도했고, 정치적인 발언이야말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임을 깨닫게 된 것. 물론 세대 전반을 관통하는 화두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세대 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은 곧 다수의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세대론의 새로운 규정을 가능하게 만들 움직임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정치적인 이념보다도 실리적인 필요에 의한 정치적 정체성의 확보란 점에서 대학가 대자보 릴레이를 통한 20대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은 대단히 중요한 징후로 보인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교육적 시스템 안에서 좌절을 부르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확보를 청년 세대 스스로의 고민을 통해서 일부나마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자보를 통해서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은 청년 세대가 아니라 현재 30대를 포함한 예비 기성세대 이상의 기성세대군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청년 세대의 물음에 답변해야 할 의무는 질문을 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바로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안녕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로 당신의 안녕을 묻고 싶다. 응당 그래야한다. 안녕을 묻는 20대의 안녕하지 못함을 지켜보는 나는 안녕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이 대답했으면 좋겠다.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마약 운반 혐의로 2년간 프랑스의 교도소에 억류됐다는 한국인 여성에 관한 실화 말이다. 어쨌든 2006년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이 기구한 사연은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여론을 통해서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의 보도가 환기한 것은 국가 기관의 어이 없는 작태였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던 외교통상부 산하의 주불대사관에서 이국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국민을 외면해버린 진실은 국내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여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절절하고 속이 끓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건 바로 전도연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은 심장과 같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객석 곳곳으로 피가 돌듯이 오롯한 심정이 전달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질주 신에서 전도연의 얼굴은 삼라만상 같다. 공터 같은 표정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 ‘연기력’이란 기능적인 단어로 그녀의 연기를 설명하길 꺼려지게 만든다. ‘경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한 연기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문장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정말 좋은 배우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때때로 신과 신의 이음새에서 성급한 인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실화와 가공된 허구를 재단하고 접목해서 영화적인 언어로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쥐어준다. 인물의 고난을 전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을 가혹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추적하고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당신이 공감하는 건 단순히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감한다면 그건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와 국가가 영화적 비극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은 여자에게 지극히 인기가 없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진실된 사랑을 꿈꾸는 남자이기도 하죠. 그런 팀은 만 20세가 된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만 20세가 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비밀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팀은 이 능력으로 여자를 사로잡겠다고 다짐합니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거죠. <어바웃 타임>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방식이란 이처럼 사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타임’이란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건 단지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팀은 자신의 시간을 거듭 되돌리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더 나은 기회를 얻는 방향으로 삶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꿈꾸던 미래로 나아갑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를 만나서 그토록 꿈꾸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이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과정은 그가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되돌려서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고 다른 결과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오차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식의 존재 여부에 변수를 만들어버린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시간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우린 시간 속에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피할 수 없죠. 그 덕분에 추억을 품을 수 있다는 건 시간이 낳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지난 시간들이 언제나 오늘이었고, 지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바웃 타임>이란 제목은 그 지금에 깃든 모든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바웃 타임>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보다도 소중한 지금에 대한 송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바웃 타임>을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이 사랑할만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입니다. 완벽하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대문호 코맥 매카시가 쓰고 거장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카운슬러>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마이클 패스벤더와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페넬로페 크루즈가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카운슬러>라는 영화를 기대한 건 살아있는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가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대단히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구사하며 황량한 풍경에 황폐한 정서를 담아내는데 능하면서도 대단히 비정한 여운을 남기는 작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미국 서부시대의 야만을 관통한 <핏빛 자오선>이다.
단언컨대 <카운슬러>만큼 비정한 작품을 보기도 힘들 거다. 이 영화는 당신이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혹은 이상의 결말로 나아간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를 비범하다고 여길 수 있게 만드는 핵심이기도 하지만 <카운슬러>는 날카롭지만 핵심을 찌르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 영화엔 대단히 중후하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등장하는데 궁극적으론 설계돼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하는 말키나의 대사. “정확한 사실엔 온도 따윈 없는 거야.” 이 대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카운슬러>는 온도가 없는 영화 같다. 영화 자체가 어떤 감정을 품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는 말. 물론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이 예감되는 스토리의 복선과 파괴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영화다. 덕분에 영화적이라기 보단 문학적인 비범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감정의 발화점이 존재하지만 끊는 점이 없다.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가열되는 열기가 느껴지지만 서서히 끓어오르기 보단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듯한, 액화가 아닌 기화되는 느낌의 영화랄까. 영화는 파괴적인 이미지를 묘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가닿는 건 단지 그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한치의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 비정함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와닿는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한 낯빛으로 칼을 찌르듯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정함 자체가 일상 같아서 그 세계에서 두 발 딛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두려움이 <카운슬러>에 있다.
그리고 이 비정한 세계관을 굴려나가는 배우들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서 관객의 목을 쥐는 듯한 박력과 긴장을 주입하는데 특히 감정이란 것을 온전히 추출해낸 듯한 말키나를 연기하는 카메론 디아즈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다만 <카운슬러>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라기 보단 코맥 매카시의 영화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영화보단 문학으로서 보다 인상적인 순간들이 엿보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풍광들은 영화의 직접적으로 묘사로 소품화되기 보단 소설의 구술을 통해서 상상할 때 보다 인상적일 것도 같다는 감상이 남는다. 덕분에 코맥 매카시의 원작 시나리오가 굉장히 보고 싶어진다. 리들리 스콧보단 코맥 매카시의 인장이 강해 보이는 작품이랄까. 어쨌든 <카운슬러>를 보고 나면 멕시코라는 나라의 근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벽하게 휘발될지도 모른다. 길을 가던 남자와 툭 부딪혔더니 목을 죄어 들어오는 올가미가 걸려들어와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숨이 절로 나와서 땅이 꺼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