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풍경은 최루탄 날리던 시절에도 어린 나이라 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풍경을 실제로 보게 되리라고 짐작도 못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썰물처럼 분노가 밀려나갔다.
마하트마 간디라면 과연 이 현장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부는 멀쩡한 국민을 폭도로 몰고, 그들에게 엄중처벌을 내리겠다고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그것이 자신들이 믿는 힘이라면 결국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능력조차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이명박을 믿고 지지한 이들의 한표가 아쉽긴 하지만 이 사태는 진정 그 한표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역설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적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가 과연 어떤 꼴을 맞이하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21세기에 울리는 80년대의 구호는 서글프면서도 강건하고 결백하여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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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의 제복을 입은 청년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주입된 것인지 깨닫을 새 없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응어리진 분노를 담아 시민을 가격한다. 언론은 입에 재갈을 물었고, 그 와중에 시위에 나간 이들만이 하나같이 몸부림치고 처연한 목소리를 허공에 뿌렸다.
6월 항쟁도 합법 시위였을까? 유관순은 10대가 아니었는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권력의 수호를 위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국민이 외치는 권리를 탄압하기 용이한 법은 무엇을 위시한 것인가.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처연하고 아련하지만 분명 그 안엔 힘있는 목소리가 있고, 양심이 있다. 누군가는 영리하지 못한 일이라 했지만 본질은 그 본질에 가까운 행위로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평화시위를 지피는 불길에 폭력의 찬물을 끼얹은 정부의 행위는 가증스럽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날을 샜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계천 소라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연설을 하고 있다 한다. 방패에 찍히고 곤봉에 맞아 부상자가 속출했다지만 그들은 오그라들지 않았다.
이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난 이렇게 노래하는 그들로 인해 진정으로 가슴이 뛰었고, 눈시울이 젖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이 자명해졌을 때, 투쟁과 항거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자유는, 그리고 정의는 그렇게 완성된다.

조금 더 힘내자. 우린 이 나라의 힘이다.
어린 전경들 너머에 숨어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더러운 작태와 그에 맞서는 순수한 민주주의적 열망은 분명 먼 훗날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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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에서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한인 주부들이 뭉쳤습니다.
 
  많은 미국내 한인 주부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미주 한인회의 성명서 발표에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이들 한인회의 입장이 마치 전체 미주 한인을 대변하는 것인 양 호도되는 기사들에 답답한 마음 금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던 주부들이 뭉쳐 이번에는 우리들의 입장도 발표를 해보자며 온라인 상에서 며칠간 의견을 주고 받으며 공동으로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일부 미주 한인회가 우리와 같은 미국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또 한인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서 결코 미국에 사는 한인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이 성명서를 통해 여러분께 알립니다.
 
  성명서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주부들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을 반대하며 재협상을 촉구합니다!!
 
  가족의 건강과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미주 한인주부들은 금번 미국 쇠고기 협상으로 앞으로 광우병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를 한국동포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에 시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해 미국 내 축산업계는 도축 직전 소의 건강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현행법을 어기고 광우병의 증세가 의심되는 소를 도축하였고 이 업체의 쇠고기가 학교급식용을 비롯 미전역의 시장에 유통되어 결국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쇠고기 리콜을 야기했습니다.
 
  또한 지난달 4일, 캔자스의 Elkhorn Valley Packing LLC 라는 업체는 광우병 위험물질인 편도를 제거하지 않은 채 유통했다가 결국 냉동 소머리 406,000 파운드를 자발적으로 리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캔자스 주 고급 육 생산업체인 Creekstone Farms에서 소 뼈 파동으로 막힌 일본 수출시장을 열기 위해 업체내의 자발적인 전수검사의 의지를 밝혔지만 미 농무부가 이를 최근에 불허하였습니다. 업체의 자발적인 검사마저 가로막는 미농무부의 태도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심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례들은 미국 내에서 조차 쇠고기 안전성 검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이 미국 내에서 동물성 사료는 아직도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지 않았으며, 비인도적이고 비위생적인 축산환경 또한 지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도 되지 않는 광우병 검사비율로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미국 내에서도 유기농 쇠고기나 풀 혹은 식물성 사료를 먹여 키운 쇠고기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호주 및 뉴질랜드 등 광우병 청정지역에서 수입된 쇠고기의 소비 또한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미국 내 쇠고기 소비행태가 이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고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미주한인회는 미주 동포들이 먹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는 무조건 안전하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여 마치 이것이 전체 미주 한인들의 목소리인 양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바, 이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230만 재미동포 중 미 축산업의 실태를 알고 있는 한인들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위생성에 비판적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산 쇠고기 소비에 더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현재 미국의 축산 환경은 육우 사육, 광우병 검사, 도축 그 어느 과정에서도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 이번 협상의 결과로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더라도 한국은 수입거부권조차 없이 국제수역사무국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검역주권도 없이 30개월 이상 소의 살코기와 30개월 이하 소의 뼈, 내장까지 모조리 수입을 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금번 미국 쇠고기 협상결과는 국민의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정부는 국민건강과 검역주권을 포기한 채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해제한 졸속적인 금번 협상을 무효화하고, 재협상을 추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2008년 5월 7일
 
  쇠고기 수입 재협상 실행을 요구하는 미주한인주부들의 모임.

백분 토론을 봤다면 알겠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정이다.

자꾸 정치적인 목적의 선동이라고 정부 스스로가 국민의 목소리를 폄하하는 것도 현실정이다.

여기서 우리의 기회비용은 정치적 견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현실을 지탄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현실을 유린하는 자들의 관점 흐리기에 휘말리지 않으며 현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국민의 혈세를 7억 가량이나 소비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광고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광고에 더 많은 비용을 소모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째서 대한민국 국민이 낸 세금이 미국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광고문구를 위해 소비되야 할까?

정부의 태도는 정말이지 이상할 따름이다. 백분 토론에서도 재차 언급됐지만 어째서 정부는 스스로 우리가 직접 미국산 쇠고기를 먹겠다, 는 논리로서 그러니 국민 여러분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라고 권유할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란 현안에서 우리가 민감한 건 '미국산'이 아닌 '쇠고기'다. 쇠고기가 어디서 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온 쇠고기가 어떤 방식으로 수입되고 있는가가 문제란 것이다.

30개월 미만 소를 전면으로 그것도 미국인의 기준에 맡긴 채 전면 수입하고 그것을 국내에서 3% 샘플링 추출해서 검사하니까 어차피 부작용은 날 수 밖에 없다는 정부측 인사의 발언을 통해 참혹한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을 섬긴다는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미국 쇠고기 유통업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현실을 한번쯤은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어째서 우리가 미국에서 넘어온 소의 잠재적 위협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지 않나?

이건 통계수치로서 확신할 수 있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니까.

이건 인간 대 인간이라는 존엄성 보존의 문제다. 문제가 나면 검역 제한을 하겠다는 정부의 논리는 어떤 희생을 감안하라는 무책임한 태도와도 같다. 결국 그 희생이란 건 우리의 누군가의 몫이나 다름없다. 잠재적인 통계적 수치로 나타나는 확률의 미약함을 과학적이라고 두둔하면서도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그들의 태도는 분명 가증스럽다고 할만한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 도축업자들을 믿을 수 없다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그들의 발언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막막하다. 협상테이블이라는 건 서로간에 발생하는 불신을 제도로서 규정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걸, 전문가라는 그분들이 몰랐을까? 미국에 사는 사람들조차 불안하다는 미국 검역체계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지향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이건 정치적 쟁점의 사항이 아니며 상식의 논리에 위배되는 사항이다.

10대도 뿔났고, 미국에 사는 재미교포들조차도 뿔났다.

당연히 성인의 문턱을 넘은 20대이자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도 뿔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그 누구라도 이런 행위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흔히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한다. 정부는 지금 먹는 걸로 장난치고 있다. 그 뒤에 내려앉은 꿍꿍이 따위는 알 바 아니지만 그들이 바라는 히든 카드를 위해 국민의 권리를 올인하는 것이 그들의 실용주의라면 이건 분명 오만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것이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건 그 오만한 비상식적 믿음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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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MBC

도화지 2008. 5. 9. 03:16



정곡을 찔렀다는 그 문제의 조선일보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8/2008050800030.html

개인적으로 코멘트할 필요도 없는 내용.
이것이 바로 진실.
당신이 주목해야 하는 건 바로 이것.
그건 바로 정치적 핵심이 아닌 현실적 사안.
그리고 MBC에 진심어린 경의를.
언론의 존엄성이란 바로 이런 짧은 코멘트만으로도 정립될 수 있는 것.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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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동아일보)

지난 27일 시청을 점거한 중국인 폭도들이 성화봉송의 출발지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한국인을 집단 폭행했다고 한다.
폭행당한 그는 '티벳 평화연대'에서 나눠준 홍보용지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들에게 바닥에 내팽개쳐진채 발길질을 당했다고 한다.
필자도 한국인을 구타하는 사진을 보고 엄청난 분노를 머금었다. 이는 사람이기에 엄연히 당연한 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팩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 잡아 족치자, 가 아닌 것이다. 감정에 감정으로 대응하자면 끝없는 반복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성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일단 색출이 가능한 중국인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중국에 유감을 표명한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단의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제관계의 역학에서 취해야 할 존비적 정책에 불과하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그것이 지난 일요일 시청에서 길길이 날뛴 오만한 중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메시지로 작용될 가능성은 없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물리적 대응책이다. 경고적인 대응을 끝냈으면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들이 저지른 형사사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단지 중국 정부에 대고 유감을 표명하는 건 그저 국가적 의무의 수순일 뿐이다.
발본색원해서 시위에서 과격한 행위를 한 자들을 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을 때리고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신경질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범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이 앞서는 문제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단지 인터넷에 올라온 얼굴을 보고 비방의 댓글 다는 수순으로 끝나거나 혹은 그들을 마주친 누군가가 멱살잡이를 해서 끌고 가는 것으로 해결되서는 안될 문제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 무질서한 현장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세우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안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이성을 잃은 무지한 분노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가능성이자 그들과 다른 우리의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시위라는 민주적 방식에 대항한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준법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폭도들의 몰지각을 일깨울 우리의 이성적 포용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추후에 이 땅에서 비슷한 일련의 사례를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용을 넘어선 그들의 행위가 어디서든 통할 수 있다는 무례함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책이기도 하다.

P.S1>참고로 사진상에 등장한 전경들의 정지된 컷은 그들의 안일한 대응이라기 보단 1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촬영한 카메라에 담겨지지 못한 그들의 대응이 생략된 팩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손가락질 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다. 또한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을, 성화 봉송에 8000여명의 인원 배치를 지시했음에도 정작 중국의 인해전술을 방관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지시 책임자의 윗선에게도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P.S2>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티벳의 독립은 응원되어야 한다. 엄연한 주권국가에서도 저리 날뛰는 중국인, 그것도 유학생들의 태도가 저리할 정도면 현재 티벳의 상황은 무시무시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 용기에 무의식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목격한 무례한 그들의 태도에 맞서는 또다른 정당성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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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엄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들이 위풍당당하게 한국에 체류하는 티벳인을 폭행하는 장면이다.이들은 그와 함께 미국, 캐나다인 6명을 오성홍기를 앞세워 구타했다. 27일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대낮에, 우리는 단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깡패짓을 일삼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구타당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봐야했다.

개같은 짱개들, 이라고 분노를 피워올리기 전에 당신은 한가지 생각을 먼저 품어야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지는 도로변에는 8000여명의 경찰 특공대가 파견되어있었다. 그들은 '성화봉송을 저지하는 시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 성화봉송자 1인의 주변을 겹겹히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는 무리들을 응징하는 중국인들의 무법천지를 국가는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도 경찰은 투입됐다. 약 10여명의 경찰들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해전술에 맞서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열악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10여 명 남짓의 경찰과, 8000여명의 경찰특공대라는 어마어마한 부등호를 그리게 만든 동시간대의 다른 상황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의를 부른다.

중국의 성화봉송을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8천명의 경찰이 배치된 상황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반대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폭력의 공포를 온몸으로 대면했다. 국가가 보호한 건 국민이 아니라 성화였다. 공권력은 중국에서 벌어질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으되, 그 반대편에서 중국인들의 알력적 폭력에 마치 의도적인양 무관심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경제적인 관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화봉송을 위해 8000여명의 특수경찰을 투입한 건 중국과의 이해관계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완연한 의지에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아니다. 다만 경제적 관념을 떠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마땅할 국가적 존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실용주의가 누구를 위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유력하게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될 공권력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은 없단 말인가? 동시에 자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한 외국인의 무분별한 난동을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지 못하거나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난립하는 중국인들을 두 눈 멀겋게 뜨고 바라봐야했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을 표방하는 건 실권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에게 중요한 건 성화봉송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받고 살 권리가 있는 국민들은 시청 앞 대낮에서 벌어진 공포의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지독한 민족주의를 구호로서, 그리고 폭력적 행위로서 도출하는 중국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양식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건, 그것을 방관하는 대한민국 실권자들의 몰염치한 사대주의적 근성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더더욱 침통할 수 밖에 없다. 제 국민의 안위를 버리고 밖으로 나갈 이익에 눈먼 정부의 방침은 결국 집을 돌보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대한 불신감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믿고 있는 힘이라면 그만큼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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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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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건, 의무의 짐을 더는 것이 아닌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민주주의란 과실을 누리기까지 긴 고난의 역사를 전제로 해야 했다는 걸 이 땅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간과하고 있나 봅니다.

정치가 나날이 자기 목적을 간과하여 권력화되고 민중의 터전을 밑천으로 투기행각을 벌이는 현실에서 50%가 되지 않는 투표율은 그 사항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증이겠죠.

혹세무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자본의 논리에는 민감해 재테크를 논하고 집값을 걱정하는 이들이 그런 걱정을 야기시키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유난히 둔감해지는 형국입니다.

지금은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해내야 할 시기인 까닭은 그 떄문이죠. 행위로서 투쟁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건 현실에 대한 첨예한 지적을 통해 그 행위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성세대들의 정치적 폐단에 당당히 맞섰던 건, 지금의 386세대들, 즉 그 시대의 젊은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혈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푸념은 할지언정, 그 푸념의 근원에 대해서 투쟁하긴 회피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유신 시대냐, 계엄령이라도 선포했냐, 화염병이라도 던질까, 라고 깐죽거린다면 물론 그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유신 시대도 아니고, 계엄령이 선포되지도 않았으며, 화염병을 던질 수 없는 시대이기에 더욱 지성의 날을 세워야 한다고 강변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시야적으로 확보되는 해악적 움직임의 형태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형태가 아닌 관념으로 그것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당신의 눈을 가린 채, 혹은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와중에도 사회적 질서와 관념이 기이한 구조로, 어떤 충돌도 없이 쉽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과거처럼 행위를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고를 통제하는 시대이며 이로써 다양한 무의식의 발현을 쉽게 규합해버리는 질서의 야합적 통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태가 만연한 시대적 속성은 어디로부터 출발했을까요.

다양성을 배제하고 경쟁을 중시하는 첨점 쟁탈의 교육을 거친 세대는 그 시스템의 적용을 벗어나서도 끝없이 트랙 위를 달리는 것을 삶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앞만 보고 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기보단 더 많은 것을 쥐어야만 행복할 것 같다는 관념은 어디서 왔을까요. 대체 우리는 왜 경쟁의 도가니에서 한시도 자기의 삶을 향해 뒤돌아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큰집과 좋은 차, 명품이 성공의 척도가 된 걸 왜일까요.

더 쉽게 예를 들어서 어째서 회사원들은 퇴근시간이 돼서도 상관의 퇴근 여부를 눈치껏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좀 더 나아가서는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시위나 집회 앞에 불법이라는 수사가 따라붙는 걸까요. 어째서 합법적인 시위는 좀처럼 보기 드문 걸까요.

 

우리 사회는 교육을 빙자해서, 혹은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그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관념을 반복적으로 세뇌시켜왔습니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가는 학생을 우대하던 학창시절을 거쳐, 삼성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의사, 검사처럼 자 돌림 직업에 호의를 베푸는 과정을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면 결국 삶의 우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올라서기엔 첨탑의 꼭대기는 너무 비좁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구조에서 열패감을 안고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 구조는 약자의 패배감을 깊게 각인시키기 때문이죠. 결국 그 구조상에서 아래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자신이 사회적 주춧돌에 불과하다는 타성에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MB의 실용주의가 메시아의 전령처럼 작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이의 확대가 더욱 많은 첨탑을 세울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한 경우의 수로서 정함수의 그래프처럼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이 사회가 현재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지독한 우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삶의 질을 위한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수출무역국 10위권의 나라에 사는 국민이 OECD가입국 중 자신의 삶의 질을 최악으로 여기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모두가 다 루이비통을 메고 다녀야만 우리는 행복할까요? 돈 없어도 해외 유학 갈 수 있게 해주는 이명박의 선언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일까요?

당신이 어리석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욕망을 좇는 개인들이 망상이 뭉쳐낸 신기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정욱을 뽑는다고 해서 노원구 주민들이 77장의 삶을 살 수 없음에도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한 어떤 들은 분명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권리를 내준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만약 노회찬을 뽑았다면 그건 사표일까요? 적어도 당신이 던진 한 표가 당선에 유효한 표가 안됐을지 몰라도 그 투표의 의미까지 퇴색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 한 표가 의사를 반영한 행위이기 때문이죠. 투표율 46%의 당선자와 투표율 70%의 당선자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상대를 찍는 움직임이 한 표라도 늘어난다면 견제 당하는 이의 심기는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한 표가 당선자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 한 표는 분명 당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작동합니다.

 

만약 당신이 투표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반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결국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이 책임을 물을 권한이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건 결국 어떤 투쟁 심리를 잃어버린 온순한 사자를 보는 것마냥 재미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견제하는 건 그 권력을 추대한 이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투표율이 46%가 나오든, 100%가 나오든, 결국 누군가는 권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46%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와 100%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의 본능은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정당성은 그 자체로 상실된다는 셈이죠. 결국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 달리 투표권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체념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죠.

 

결국 그런 상황은 당신이 알게 모르게 루이비통을 메는 것이 성공의 척도라는 기준을 고착화시키는데 유용하게 작동합니다. 그런 식으로 권위를 거머쥔 이들은 자신이 누린 호사를 그저 자기 승리로 기만할 따름입니다. 결국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쉽게 자리를 얻은 이들은 스스로가 의무를 위한 존재가 아닌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인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타인을 위한 헌신보단 자신을 위한 투자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민생은 셀프로 여기고, 골프에 매진하는 사태에 육박하는 셈이죠. 지나친 비약이라고요? 성추행까지 일삼은 의원이 관성적으로 재선되고, 정치적 능력이 미약해 보이는 엔터테이너가 유명 당사 메이커를 메고 나와서 당선되고, 우익을 빙자하며 역사를 왜곡하거나 한국에서 열린 자위대 기념행사에 당당히 참석하며 역사적 의식조차 무시하는 이들이 당선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뭘까요. , 이렇게 살아도 난 되는구나, 라는 관성은 과연 배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과거를 뉘우치거나 자신의 몰염치를 반성할 계기란 게 과연 있을까요? 결국 이는 어떤 짓을 해도 첩탐에 서면 된다는 논리를 방조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계승될 따름이죠.

이건 짝퉁이라도 루이비통을 메고 거리를 활보해야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거리의 모습과도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야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이 바로 이 사회 구조의 맹점에서 흘러나오는 착시현상이며 그것이 현상 유지에 걸맞은 삶의 질 찾기를 포기시키는 원인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치적 공작에서 비롯된 사회 제도의 허술함을 떠받치기 위해 지독하게 무리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너무 오래 믿어왔습니다.

 

선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도장 찍고 유세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척박해지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관성적으로 삶을 그러려니 방치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에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발할 수 없었던 구조가 우리의 사회적 행태와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이유 있는 항변을 반항으로 몰아붙이는 구조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줘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무기는 투표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뽑을 사람이 없어 무효표를 던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표가 나머지 56%를 차지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나 당선됐네, 라고 노래를 부를까요?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요? 굳이 루이비통을 얻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자본의 논리로 재편된 계급적 무의식 속에서 열등감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에게 실용주의란 많은 돈을 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 교육을 위해 거액의 학비를 보태야 되는 사회 구조를 척결하는 것입니다. 신기루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신기루를 볼 수 있는가라는 전제가 따를 뿐이죠. 당신은 그 전제 앞에 놓여있습니다. 한번의 기회는 지났고,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겠죠. 그 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앞 똑바로 보세요. 그리고 다음에는 꼭 투표하세요. 누구를 찍던 간에, 정말 실용적인 투표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당신이 젊다면 더더욱 움직이세요. 이건 당신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당신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 휘지 않기 위한 일이자 정당한 대가를 얻기 위해 합법적으로 시위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중요한 의사 표현일테니까.

 

우리가 지금 현실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의료제도 민영화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100% 공공 의료보험의 확대적용을 희망하는 쪽이라야 옳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에서 당신의 한표가 절실해야 할 가장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죠.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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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과도한 방 구조개혁 사업에 몰두한 관계로 중천에 해가 기울만한 시간에 눈을 떴다.

밤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가 투표율 30%대가 어쩌고 하는 뉴스를 봤다. 그래, 가야지. 갔다. 도장 찍고 왔다.


투표소는 한산했다.

빌어먹을 투표소 위치를 잘못 확인한 탓에 뱅 돌아서 엄한곳을 들렸다가 집 옆에 있는 투표소를 겨우 찾았다. 5분 남짓 거리를 30여분에 걸쳐 갔다. 빌어먹을.

그래, 비도 오긴 하지만 나름 산책도 하고 좋다, 이런 기분으로 투표소를 들어섰다.


사람이 없었다. 썰렁했다.

투표용지를 얻기 위해 신분 확인을 하는 곳에는 네 분의 어른이 앉아계셨는데 그 중 한 남성 분께서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이 정도면 오늘 개표는 10시도 안되서 끝나겠는걸.


투표를 한뒤, 집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다시 방정리를 했다.

언제부턴가 내 책상 두개를 지배하며 탑을 쌓았던 잡지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덕분에 내 책상은 간만에 안식을 얻었다. 책상 서랍에 있던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덕분에 쓰레기를 버리러 부지런히 대문을 출입하는 수고가 있었지만 홀가분했다. 두개의 탑을 무너뜨린 반지원정대의 마음이 이토록 후련했을까.


버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가볍게 사는 것도 나름의 묘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무거웠던 방이 가벼워졌다. 나름 효율적인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인터뷰 마감을 위해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한나라당 과반석 이상 확보. 원래 예상했던 일이다. 졸속같은 민주당이 대세를 엎기엔 역부족이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민주당 따위는 한나라당과 함께 개밥으로 주기 딱 좋은 당이니까, 기대하고 싶지도 않다.


까놓고 말하자면 난 비례대표 13번 진보신당을 찍기 위해 투표소에 들렸다. 진보신당은 득표율 3%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난 지금 조금 슬프다. 한나라당 메이커를 달고 나온 듣보잡들, 게다가 유정현이라는 얼치기 마저도 당선이 되는 시국에서 진보신당은 3%의 득표율도 얻지 못했다.


이쯤되서, 한마디 하련다.

만약 당신이 오늘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 있어서 투표를 할 수 없었건 말건, 알바는 아니고.

만약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었건 안 찍었건 투표용지를 만져보지 못했다면 세상 어쩌고 지껄일 생각마라.

난 정치 따위는 관심없어서, 어차피 그놈이 그놈 아냐?

이딴식으로 쿨한 척하려거든, 조까라 마이신이나 쳐먹고 해외 이민 가던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판단할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인정해라. 세상에 염세적이라서, 혹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리지 마라. 당신은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을 방관하고 있는 관념의 아류일 뿐이다.


대놓고 말해서 당신은 자격이 없다. 월드컵 4강 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호프집에서 건배하는 것이 애국심이라 착각하고 투표날을 4년 혹은 5년 마다 돌아오는 휴일 정도로 생각한다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아가리 닥쳐라.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자격없다. 그대가 나와 친한 누구더라도 결코 그럴 자격없다. 그러니 자격없으면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지켜보고 반성하고 느껴라.
당신은 한나라당 과반수에 찬조하기 위해 한표를 던진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라. 기권도 의견행사라고 주장하고 싶거든 투표장에 가서 무효표를 던져라. 그게 기권이다. 당신의 호사스런 방관을 의미있는 기권으로 빙자하진 마라.
인정해라. 그리고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봐라. 다음에 투표를 하던가, 말던가. 그리고 잘 결정해라. 당신의 젊음이 무관심의 관성에 빠져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세상의 풍토에 뒤늦게 푸념하지 않길 바란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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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거북이의 노래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제목조차도 명확히 모르는 그들의 노래가 종종 귓가에서 맴돌았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물론 그들의 노래가 조금 싸보여서가 아니란 말도 못하겠다.

그 단순한 후렴구가 질릴 정도로 단순해서가 아니란 말도 못하겠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노래를 즐겨듣진 않았지만

단순하면서도 발랄한 거북이의 노래가

가끔은 너무나도 익숙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가 쉽게 지겨워져서 즐기지 못했을 뿐,

그들의 행위 자체에 어떤 관념적 비하를 섞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거북이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던 가수도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북이의 리더인 터틀맨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숙연했다.

사실 난 그가 터틀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그가 속한 그룹의 이름을 마치 그의 이름으로 호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건 나뿐만은 아닌거 같다. 모 기자 선배가 나에게 거북이가 죽었다고 네이트온으로 알려올 때, 난 그 순간에도 그래서 누가 기르던 거북이를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건 나뿐만 아니었던 거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 다행이다.


난 연예인을 공인으로 직결시키는 관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단지 유명세를 탄다고 해서 공인이라는 개념은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건 마치 그들에게 전근대적인 강압의 감투를 씌우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유명세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종종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종종 그들의 죽음을 기사로서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연예인의 죽음이란 건 좀 묘한 감상을 부른다.

실제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정체불명의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고야 만다.

어떤 인간적 관계를 맺지 못했음에도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의 부고는 이상한 허망함을 부르고야 만다.

물론 모든 인간의 죽음은 삶에 대한 허망함을 고찰하게 만든다.

어떤 인생도 죽음을 비켜갈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는 누구나 한번씩 겪어야 하는 실증과도 같은 거니까.


어쨌든 그가 끝까지 테이프 음반을 고집했다는 걸 그가 죽어서야 알았다.

그 이유도 그의 골수팬들의 상당수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직업 운전사들이기 때문이란 것도 그가 죽어서야 알았다.

나처럼 고상한 척하는 사람은 언제나 뒤늦게 이런 이야길 들으면 역시나 감동받은 척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족을 돌아왔지만 그냥 고인의 명복을 빈다.

터틀맨이든, 임성훈이든, 누군가에게 즐거운 노래를 들려준 당신의 명복을 빈다.

물론 난 당신의 노래를 여전히 좋아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당신이 적어도 나보단 의미있는 인생을 산 것 같다고 인정하련다.

수고했다고, 그냥 이 말 한마디 전해주고 싶어서 뒤늦게 지나간 길에 인사남긴다. 잘 가라고.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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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자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꼰대들이 너무 많다.

물론 나이많은 어른을 공경해야 되는 건 기본이지만

나이를 무기로 무례한 짓을 서슴치 않아도 된다는 인간들은 역겨워서 그 꼴을 봐줄 수 없다.

자기 행실에 대한 책임감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더욱 신중해지고 견고해져야 할 터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꼴값을 정당화시키려는 묵은 인생들을 보면 어린 애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정말 생각만해도 열받지만 어젯밤엔 정말 인간적인 예의따위는 접어두고 싶을만큼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택시기사분들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꼴같지 않은 엿같은 택시기사와 승강이를 벌인 어제 일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인내심을 발휘한 건 다행이다.

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쌍욕을 날린 것도 되돌아 생각하면 약간 부끄러워진다. 물론 그 인간에게 욕을 날렸다는 것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욕은 그럴 때 쓰라고 만든 것이니. 다만 내가 지키고 싶은 인간적 예의를 스스로 부서버려야 했던 상황에 대한 자괴감이 자리잡았다는 건 스스로에게 치명적이었고 그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내가 더욱 참아야했던 건 나를 위해서였다.

쓰레기같은 어른 앞에서 대범한 청년이 되지 못해서 원통하다.

게다가 그런 이가 모는 게 '모범'택시라니, 기가 찰 지경이다.

암튼 각설하고,

그 엿같은 택시 기사의 사망한 인격을 추모하며.

덧붙이고 싶은 말은 나이 뒷구멍으로 쳐먹지 말자.

그리고 '가다 죽어버려!'라고 나에게 소리지른 아저씨, 오래사세요. 벽에 똥칠하면서.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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