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개막됐다. 장예모가 연출한 천이백억 짜리 개막식 공연이 화제다. 역시 중국은 쪽수면 장땡, 이란 반응부터 장예모의 블록버스터 클리셰라는 말까지, 물론 호화롭고 웅장했을 것이다. 물론 난 안 봤다.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인지 몰랐다. 맙소사. 그저 오늘 갑자기 잡힌 인터뷰 준비로 2시간 밖에 잠을 못 잤고 날씨가 미친듯이 더웠을 뿐이다. 알았으면 봤겠지. 혀를 차든 우와, 하든 간에 단 한번뿐인 볼거리는 일단 봐두는 게 상책이니까.
어쨌든 올림픽이 개막됐다. 애초에 말이 많았던 올림픽이었다. 베이징에서는 인공강우를 뿌려대고 공장의 생산을 중단하고 차량 2부제까지 철저히 실시함으로써 맑은 하늘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선수들은 심각한 대기오염에 투덜대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이전엔 티벳 탄압으로 인해 올림픽의 평화정신을 훼손하는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 와중에 세계 각지의 성화 봉송엔 테러(?)의 물결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막겠다는 중국인민들의 몰지각한 타지거리점령 행위도 있었다. 우리도 크게 데였다. 시청 한복판에서 중국 애들한테 떡실신당한 한국인이 여럿 있었는데 경찰들도 속수무책이었단다. 자국인들이 자국에서 중국애들한테 멱살잡히고 다구리 맞고 있었는데 한국 경찰들 다 어디 갔었냐고? 성화 보호했다. 걔네 들이 지금 촛불 때려잡고 있는 거다. 어쨌든 이 글의 본론은 이게 아니고.
올림픽 개막식이 베이징에서 한참인 지금, 러시아는 전쟁을 선포했다.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다. 이미 그루지야 기지를 폭격한 러시아는 아마 군대를 몰고 제대로 밟아주겠다고 벼르는 양상이다. 그루지야의 친서방정책에 열받았던 러시아가 남오셰티아 공화국과 그루지야의 영토분쟁을 그루지야를 밟아줄 절호의 찬스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건 전쟁과 평화의 제전이 공존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란 물음이다. 이는 올림픽에 더 이상 평화의 제전이란 수식어가 일종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선포하는 시대적 이미지가 아닐까. 올림픽이라는 매스게임은 이제 메달 따먹기의 장일 뿐, 혹은 말 그대로 스포츠라는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빅매치일 뿐, 그것이 모토로 했던 전세계 화합의 수식어와는 무관해지는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되려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상대에 대한 손가락질이 오가는 형국이다. 자기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메달의 수로 증명하려 하고 그를 통해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는 지금의 올림픽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무조건 1등의 단상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바라봐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작위적인 금빛 드라마가 감동적인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그리스의 올림피아제 기간엔 이에 참가하는 폴리스 간의 전쟁행위도 중단됐다. 적어도 올림픽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평화를 일깨우는 깊은 잠재력이 있다고 비약할 수는 없지만 잠시라도 폭력의 창을 거두고 서로의 육체적 경쟁을 통해 인간적 유대감을 도모하고자 하는 인간적 화합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게 올림픽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올림픽은 그것과 상당히 먼 것이 돼버렸다. 그게 베이징올림픽 탓이냐고? 아,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올림픽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고, 한국축구가 16강을 넘어가길 간절히 고대하고, 적어도 우리가 일본보단 금메달 수가 많아야 할 텐데 걱정하는 것이 올림픽이라면 이미 우리도 글러먹었다는 거다. 물론 이기는 게 뭐가 나빠? 라고 한다면 그건 나쁘지 않다. 단지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금메달 따먹기에 혈안이 됐다는 게 문제란 거지. 결국 메달 따는 편이 우리 편, 못 따면 듣보잡.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무한경쟁체제의 현실 아닌가. 결국 인간들의 땀내나는 경쟁의 의미는 퇴색되고 누가 이기고 지는가라는 성적표만이 중요해질 뿐. 우리에게 올림픽은 이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 정신차려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이처럼 암울했던 건 대한민국의 근대역사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청산의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이제 한번쯤 스스로 기득권을 흔들어야 할 시점이 왔다. 정의를 말하는 것이 결코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나를, 너를, 우리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낡고 낡은 프레임의 구간반복을 거듭하는 세력들의 반허공에 뜬 자기 합리적 주장을 걷어내야 한다. 더이상 그들의 위장된 진술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껏 단 한번도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세계 무역 10대 강국이 되었어도 우린 언제나 경제에 매달려 왔다. 언제나 서민은 가난했다. 그 와중에 대기업은 살찌고 권력자들은 풍요로워졌다. 이젠 한번쯤 잘 생각해봐야 한다.
어째서 우린 가난한가? 우린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지금보다 수출을 많이 하면 우리 집이 풍요로워질까? 우린 지금보다 잘 살고 있어야 한다. 중산층이 점차 줄고 빈민층이 부유층보다 빠르게 확산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수출에 목매달아선 안된다. 모든 건 구조적 부조리와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기득권의 횡포에서 비롯된다. 이젠 그 허물을 벗어던져야 할 시기가 왔다. 더러운 부패로 잠식당한 구조적 폐해를 철저히 걷어내야 한다. 김영삼 같은 작자가 국가를 말아먹고도 당당히 토악질을 해대는 오늘의 현실을 그저 손놓고 봐서는 안된다.
당신이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잘 살기 위해서. 그건 정의를 이루는 순간 복원되기 시작할 것이다. 광장으로 오라. 저 광장에서 뜨겁게 움켜쥔 희망을 위해서.
그들은 인권을 모른다. 그들은 그저 반항하는 상대를 잡아야 하고, 패서 입 닥치게 만들어야 할 뿐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건 당신이 지극히 정상이기 때문이다. 비폭력과 폭력의 경계를 지정하는 물음따위는 필요없다. 이겨야 하는 싸움이 도래하고 있다. 적어도 모니터 앞에서 저 현장을 지켜보는 나나 당신에겐 비폭력을 훈수둘 권리 따윈 없다. 이건 상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지금 상식을 존중하길 거부하고 있다. 그 대답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우린 진실로 응원해야 한다. 광장을 사수하는 그들에게 훈수두지 말라. 적어도 그 현실에 발 딛고 선 자가 아니라면.
외국인들도 아는 것을 한국 대통령이 모를까?
저건 상식이다.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맞고 아님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난 결코 이명박이 상식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하긴 오죽하면 쥐박이란 말이 나오겠나? 하하.
문제는 이런 수준의 인간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의 댓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물건이 불량이라면 반품받을 수 있다.
이명박이 그토록 사모하는 시장경제논리에 의해서라도 우리는 질적으로 불량한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환불받아야 한다. 그의 실용주의는 21세기의 것도 아니고, 그리 발전적인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생색내듯 퍼주고 돌아와 나 모른체 하는 저 천박한 근성에 대한민국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내 적은 저 너머에 있는데 나와 상관없는 애들이 방패로 날 위협했다. 내 적은 너희가 아니다. 이렇게 설득시킬 요량도 없었다. 뚫리면 새된다, 라는 공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으리라.
물대포에도 온몸으로 맞서는 시민들과 함께 고무되어 으쌰으쌰, 하다가 폭력적으로 휘둘리며 날아드는 몽둥이에 맞을까,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날이 밝은 집 주변은 고요했다. 아득하게 밤의 기억들이 가물가물해지려는 듯.
그래도 궁금해 컴퓨터를 켰다. 현장에 남아있는 친구 녀석이 걱정됐다. 아뿔사, 이게 뭔가. 무시무시한 광경이 눈앞을 덮쳤다. 난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은 좀 전까지 내가 보던 그 곳과 또 달랐다. 사람이 쓰러지면 다섯명 가량의 전경이 몰려 발길질과 방패질을 했고, 그러다 실신한 사람을 질질 끌고 갔다. 개처럼 맞고 있었다. 저항하는 목소리 조차도 비호처럼 날아드는 방패에 절규로 바뀌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가슴이 요동친다. 난 도무지 내 할일을 할 수가 없다. 거리로 나갔다 온 지금도 가슴이 저리고 손발이 떨린다. 하나같이 충격과 경악, 공포의 이미지라 불릴 만한 것들이 믿을 수 없게 펼쳐진다. 맙소사, 내가 아는 민주주의는 이렇지 않아. 하소연 할 곳도 없다. 비분강개한 육두문자가 입안에서 허망하게 부서진다.
난 오늘도 운다. 미칠 것 같다. 너무나 맥이 풀리고 기진맥진하여 거리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현장에 대해 궁금해서 또 찾고 또 땅을 치고 혼자 슬퍼한다.
누가 날 미치게 하는가. 아니, 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그건 아무래도 현정부의 오만과 독선이다. 아니, 이명박의 무덤덤한, 그리고 종종 웃음까지 내보이는 저 표정이 날 미치게 한다. 그가 섬긴다는 국민의 정체에 의구심이 났다. 그가 말하는 국민은 실체가 없다. 길에서 나뒹구는 이들은 그의 국민이 아니다. 그의 국민이란 그의 휘하에 있는 강부자 내각부터, 대한민국 5%를 가늠하는 상류층이리라.
뉴스를 보니 이제 대운하에 대해서 가릴 것 없이 추진하겠다고 정부 방침이 정해졌단다. 저 사람은 날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나보다. 순간 또 한번 아찔해졌다. 다시 되물어야겠다. 그 거리에 나가서. 당신의 국민은 누구입니까? 그 전에 몸부터 추스려야겠다. 팽팽하게 당겨졌다 느슨해진 신경들이 하나같이 지끈거린다. 게다가 할일도 밀렸다. 하하하. 웃음이 난다. 이명박은 날 완전히 파괴하고 있구나. 내 생애 가장 무서운 강적을 만났다.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시대를 배반하는 이미지가 눈 앞에서 펼쳐졌다. 유년시절 말로만 들었던 경찰의 시민 폭행현장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하던 진중권 교수도 군화발에 밟히고 방송장비를 죄다 뺴앗겼다고 한다. 진보신당 칼라TV도 박살났다고 한다. 새벽 4시 반 무렵, 정부는 특수진압대를 현장에 투입했다. 대테러진압을 대비해 훈련시킨 그들은 시민들을 거침없이 척살했다. 마치 사냥개처럼 달라들었다. 달아나는 시민들을 미친듯이 쫓아와 곤봉으로 내려치곤 넘어지면 밟고 방패로 찍은 뒤, 질질 끌고 갔다. 맙소사, 저게 뭔가. 난 아연실색했고, 두려웠으며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마치 조련된 군견같았다. 군견은 자기 주인 이외에 모든 사람을 물려고 달려든다.
눈 안에 살기가 가득하다. 피흘리고 실려가는 여자 앞에서 실실 쪼개는 그들은 모습은 가히 경악스러웠다.
전경을 미워하지 말라고, 그들도 사람이라고, 다들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일일 뿐이라고, 난 여전히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을 배신하는 상들을 눈 앞에서 접하지 나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게 아득해졌댜. 아, 내 믿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씁쓸한 미소조차 지을 수 없는 멍한 정경이었다. 동공에 맥이 풀렸다.
전경들은 이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겐 인권의 가치관보단 생존의 전략이 중시되고 있었다.
사실 치열한 시위현장에서 진압하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 그들에게 안전을 중시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즉 가해도구를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대상에게 대응하는 방식을 교육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대치하는 시민들은 맨손이다. 난 지금까지 어떤 대치 상황에서도 전경을 가격하는 시민을 본 적 없다. 게다가 방호복에 방어투구, 방패까지 들고 있는 그들을 공격할 엄두를 내는 시민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시민이 쇠파이프라도 들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맨 주먹과 맨 손으로 그들의 완전무장에 맞서는 시민에게 대응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어폐다.
이해할 수 없다. 난 도무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민을 개잡듯이 때려잡는 그들의 태도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잠도 못자게 한다고 시민들한테 욕지거리를 날리는 전경의 모습은 단지 개인적 인격의 문제일까.
모든 것은 교육에서 온다. 평범한 청년들에게 공권력의 옷을 입힌 권력의 체제는 그들에게 폭력을 주입하고 내부적인 분노를 외부로 쏟아내도록 훈육하고 있다. 주인에게 얻어맞으며 길들여진 개들이 무고한 행인을 마구잡이로 물어뜯듯이 그들은 자신에게 주입된 분노를 무고한 시민에게 풀어내고 있었다.
불법집회를 하니까 그렇지, 라는 사람이 종종 눈에 띤다. 좋다. 시민이 거리를 점거했고 야간에 가두시위를 벌이는 게 현 집시법에서 위반되는 사항이라고 하니 불법은 불법이다. 하지만 모든 시위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집시법의 테두리 내에서 정부가 불법이라 규정하면 모든 집회나 시위는 불법이 된다. 애초에 촛불시위를 촛불문화제로 규정한 것도 정부의 논점 흐리기 의도가 개입된 바라 볼 수 있다.
그저 자신들이 정해준-실제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허용해서 아량을 베푸는 척이라도 하려는- 구역 내에서 놀다 가라는 듯한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시민들이 아무리 어떤 목소리를 낸들,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정부의 태도에 질려 시민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게다가 장관고시까지 강행한 정부의 태도는 결국 자신들에게 돌팔매질이 오지 않는 이상, 그들의 의사에 귀기울이지 않다도 된다는 듯, 뻔뻔하고 위태롭다. 시민이 거리를 걷기 시작한 건, 더이상 쇠고기 문제만으로 원인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선동하지 말라고? 웃기지 마라. 난 당신을 선동하겠다. 당신이 이 글을 잃고 피가 끓었으면 좋겠다. 현실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넘어오는 것인지 당신이 한번쯤은 생각해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이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저 거리에서 진압봉에 맞아 피흘리고 나뒹구는 이들의 행위는 제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강건하지만 폭력앞에 저마다 무력하다. 나도 무력하다. 너도 무력하고, 어떤 이도 무력하다. 하지만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아무리 수많은 전경이 몰려와 시민들을 길바닥에 내 팽개쳐도 그에 굴하지 않는 목소리가 모이면 그 폭력은 되려 무력해질 것이다.
당신과 내가 모여 우리를 만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좌빨이고, 우빨이고, 빨갱이고, 노조고, 나발이고, 우린 그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고 시민이다.
경찰의 치안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꺾는 것이 아니라 질서 유지와 시민들의 보호에 있다.
애초에 이명박은 도덕성 유무 따위가 자신의 지지율에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파악했다.
지금 이 강경진압도 자신의 권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번 작은 도둑질을 해도 사람들이 방관하면 그 다음에는 더 큰 도둑질에 맛들리는 법이다.
우린 지금 그 커다란 도적 행위에 대항해야 한다.
외국에서 소박맞고 돌아와 국민 앞에 깡패가 되는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6월이 됐다.
아마 오늘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정부는 선을 넘었다. 더 이상 쇠고기 문제로 이 사태를 규정지을 수 없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정부가 국민을 때려잡는데 성공한다면 그들의 다음 수순은 뻔하다. 끔찍한 현실이 도래할 것이다. 무언가를 얻는 것은 힘들어도 잃는 것은 쉽다. 계엄령이 아닌 은밀한 매스미디어 공작으로 당신의 귀를 막고, 입을 걸어잠근 뒤, 모든 상황은 당신이 바라지 않는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우린 그 마지노선에 서 있는 것이다. 결코 물러서지도, 물러서도 안될 지점에 서 있다.
소고기로부터 인간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은 수치상으로 희박하다. 광우병은 복합적인 요소(유전인자 등)로 인해 발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광우병 소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꼭 광우병에 걸리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광우병에 걸린 환자는 거의 대부분 M/M형태의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었다. 고로 M/M유전자를 지닌 인간이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외에 M/V, V/V유전자형을 지닌 인간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단지 발병까지의 잠복기간이 더 길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M/M유전자형을 지닌 인간의 광우병 잠복기간이 제일 짧다고 보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일 수 있다. 고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사람들이 광우병에 가장 먼저 걸릴 확률이 높다고 본다.
대부분 광우병 위험요소(SRM)들은 근육질 부위가 아닌 내장 기관과 척수, 골, 눈과 같은비근육질 부위에 대부분 함유돼 있다. 이는 뼈를 우려먹거나 내장기관까지 섭취하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고려했을 때, 한국인의 식습관이 광우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발병 사례가 적어졌다고 해서 5년 내에 광우병이 사멸될 것이라 말하긴 힘들다. 검역의 강화로 수치는 줄었지만 여전히 발병 사례들이 보고되는 바로 광우병이 박멸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신체 접촉, 혹은 타액을 통한 전염 사례도 없다. 대기 중 오염 가능성도 결코 없다.
물의 오염은 가능하다. 광우병 걸린 소의 사체 혹은 그 소를 도축한 기자재가 세척된 물은 광우병 인자를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광우병에 걸린 소를 도축한 기자재가 다른 일반 소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사용하게 된다면, 그 소 역시 광우병에 오염됐다고 볼 수 있다.
30개월 이상 월령의 쇠고기를 철저하게 전수 검사시키는 유럽에 비해 샘플링 검사를 실시하는 미국의 검역은 안전성이 의심될만한 기준이다. 다만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바가 없다는 면에서 나름대로 검역시스템이 불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 불확실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하지 않는 방법 외엔 도리가 없다. 말 그대로 현재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봐서는 미국의 현재 검역 상태는 어떤 면에서는 나름대로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캐나다에서 광우병 의심 소고기가 검역 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데도 미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검역 과정이 느슨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서 실시한 미국산 쇠고기 전수검사에서 위험물질이 발견됐다는 점을 이를 뒷받침할만한 사안이다.
현재 한국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에만 미국기준에 맞춰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 부위인 뇌, 두개골, 눈, 편도,척추 부위, 회장, 혀의 7부위를 제거하고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유럽 기준은 미국의 7개 부위를 포함해 십이지장부터 직장까지의 내장 전부위와 장간막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는 단지 30개월 이상 월령의 쇠고기만이 아닌 그 이하 전체 쇠고기에 적용해야 안전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발생한 다양한 논란, 혹은 괴담이라 불릴만한 몇몇 근거 없는 광우병 관련 설의 주체는 분명 정부다. 정부가 나서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제시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리 끝, 이하 추론=======================================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 광우병 관련 편은 나름 흥미로웠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광우병 연구자들의 답변은 분명객관적이라 신뢰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요한 설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방송상에서 드러난 확률은 객관적인 지표라 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특히 근거 없는 몇몇 설들, 신체 접촉으로 인한 감염 등 지나치게 불거진 광우병 관련 설들에 대한 진실 가리기에 어느 정도 일조할만한 정보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객관적인 지표들이 나열되는 방식이다. 미국의 검역 제도가 허술하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미국의 검역 제도가 잠재적인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30개월 이상 월령의 쇠고기에 전수검사를 실시하는 영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들의 검역 방식에 비추면 당연한 결과이며 프리온(prion)위험 물질로 규정된 부위 기준만을 따져도 명확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등장한 설문결과는 미국의 쇠고기가 광우병에위험한가, 라는 질문이었다. 학자들의 과반수 이상이 그렇지 않다는 쪽의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건 단지 지금 현재 광우병 발병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란 의견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은 이 사실을 다소 간과했다. 이는 분명 팩트이지만 팩트의 배열 상태에 문제점을 제기할만한 것이다.
앞서 M/M유전자의 발병 사례가 많음은 M/M유전자가 광우병에 취약하다기 보다 M/V나 V/V유전자에 비해 발병 잠복기가 짧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괴리감이 있다. 미국의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학자들의 주장을 말미에 배치한 건 미국의 쇠고기 검역이 허술하다는 점을 무심코 간과하기 쉬운 구성이기 때문이다. 분명 잠재적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미국 쇠고기의 검역 체계에 대한 치밀한 설문 요소가 더 존재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의심이 든다.
물론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이 어떤 내부적 의도를 지니고서 이 사안에 접근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이 방송도 나름대로 지각을 지닌 이라면 충분히 그 의미를 나열할 수 있는, 충실한 팩트들도 채워져 있다. 단지 문제는 이 민감한 사안을 단지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지 않다'고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에서 증명했다, 란 식으로 인용할 이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이 프로그램이 지키고자 하는 중립적 시각의 여부를 떠나서 어떤 정치적 혐의를 안길 수도, 혹은 어떤 정치적 시각에 남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수라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시에쇠고기의 안전문제에 대한 우려가 괴담을 형성시키고 이것이 촛불집회와 가두시위로 발전된 것이 아님에도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은 이 모든 상황이 그 사안에 국한되어 발생된 혼란 사태인 것처럼 오해시킬 여지가 있었다. 쇠고기의 위험도 중요한 문제지만 그 이전에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독자적인 밀실행정으로 국민의 권리를 쉽게 지불한 대통령과 정부에게 국민이 책임을묻고 있다는 점을 생각했다면새벽까지 설문에 응한 이의 노고를 힘주어 감사할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은 매체의중립성을 지키려 했을지 몰라도 방송의 공영성을 고려하진 못한 거 같다.
P.S>MBC뉴스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정부에서 발표한 사실 중 거짓이 존재함을 밝혔다. 물론 정부에서 몰라서 미국에서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부 관계자가 깜.짝. 놀란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산 쇠고기 고시 당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회장이라고 부르는소장의 말단 부위 림프소절에 SRM이 집중되므로 이 부위를 현미경으로 조직 검사하여제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포유동물의 소장은 림프소절이 말단 뿐만 아니라 전 부위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수의학 교과서에도 표기됐음을 MBC뉴스데스크가 밝혔다. 또한 포유동물의 경우, 소장의 부위를 확실히 구분하기 힘든 것으로도 알려졌다 한다.
문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곱창 요리의 재료로써 소장이 쓰인다는 점이다. 그럼소장 부위를 안 먹으면 되겠지, 라고 답변하는 이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부위를 돈 주고 수입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그불필요한 부위를 수입함으로써 분리과정의 노동 인건비까지 국내에서지불해야 한다. 결국 먹을 수 없는 부위를 돈 주고 들여와 우리 땅에서 처리하는 셈이다. 이는 분명 이명박이 말하는 실용주의와 엄청난 괴리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곱창까지 맘 놓고 먹을 수 없게 생겼다. 우리가 밤잠 못 이루는 까닭은 이런 기이한 정책적 폐해 때문이다.
허나 선동당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우리는 어리숙해질 수 밖에 없다. 이끄는 주체가 확실하지 않은 집단적 상황에서 누군가가 시위를 주도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 함께 와, 하는 분위기로 몰려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다소 위험하다. 프락치만큼이나 위험한 일부 과잉 선동 세력에게 종종 끌려다는 양상은 우려된다.
물론 지금 이 주장은 경찰이 주장하는 시민 매도용 도매금 규정과 맥락이 다르다. 그들은 어떻게든 시위자들을 반사회주의적 인간들로 몰아넣으려는 까닭에서 선동을 외치는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선동은 순수한 시위자들을 이용하려는 몇몇 정치적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행위가 몇몇 시위자들로 인해 적발되곤 했다.
프락치 논란도 위험해보인다. 프락치는 진압세력이 시위내부의 정보를 캐내려는 공작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위험한 상황이 야기되는 건 내부적인 분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할 시위대가 내부적으로 서로에 대한 의심에 빠져든다면 분명 내부적으로 위험요소가 될 것이 뻔하다. 이 경우 결국 필요한 건 믿음이다. 적을 분별하기 위한 날카로운 시선도 중요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건 내부적 결속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다.
중요한 건 대부분의 시민이 선량한 의지로 거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염려되는 건 그래서다. 결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서는 안되는 순수한 세력들이 몇몇 소수 집단과 몰염치한 정부세력의 작태로 희생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헌신적인 목표를 지닌 이들의 순수한 행위가 3자의 불순한 의도로, 그리고 더러운 권력가들의 토끼몰이에 짓눌려 몰락하지 않길 바란다.
이 광경이 문득 초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정국은 서로 무관한 젊은 청년들을 이토록 대치하게 만든 것일까. 전경도 무고하고, 시민도 무고하다. 결국 이 싸움을 야기한 주체는 무고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어디선가 또 다른 방패막이 활용전술을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인가, 에 대해서는 난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란 건 알겠다.
우린 그동안 지나치게 안일했다. 어르신들이 피땀 흘려 한걸음 전진했던 민주주의를 우린 완성됐다고 쉽게 믿어버린 것만 같다. 그 사이, 보수의 탈을 쓴 기득권들은 사익에 나라를 팔고 그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쉽게 진압할 수 있도록 판을 짜버렸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10년 동안 보수 기득권 층은 칼을 갈고 있었다. 게다가 진보라고 명명되던 세력들은 하나같이 안일했고, 나태했다. 사실 진보는 없었다. 그저 보수의 상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보수조차도 그저 이익 구조를 통해 정체성 없이 두른 이상한 대립관계만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진보는 무너졌고, 보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장구조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대적 흐름에 맞춰 자신들의 사익 기반을 철저하게 유리한 방향으로 꾸려나가려는 이들의 체제적 구실로서의 이념일 뿐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 단지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에 불과한 것일까. 그들은 이 정국의 흐름에 대한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다. 단지 쇠고기는 마지노선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이대로 쉽사리 그들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그 무기력은 5년 동안 반복될 것이다. 동시에 지금 이명박 정부가 시위를 강하게 진압하는 것도 이와 맞닿아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대운하, 공사 민영화, 등, 반발이 강할 정책들을 차례로 내밀어야 할 판이니 정책 초기부터 국민을 다스려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어차피 도덕성 따위가 자신의 대통령 되기에 흠이 되지 않음을 알았던 이명박에게 도덕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제도적으로 그는 개인의 도덕성을 기회비용처럼 여기고 경제적 실리를 원한 이들의 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이다.-물론 그것도 벌써 신기루였음을 대부분 깨달았겠지만-
중요한 건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린 5년 간 이보다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권초기부터 여론을 괴담으로 몰고, 그에 저항하는 국민의 평화적 시위를 폭력으로 다스리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거나 혹은 아예 뿌리뽑지 못한다면 우린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넘었던 예수처럼, 처절하지만 숭고한 마음으로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모든 무기력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좀 더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더이상 애꿎은 방패막이를 양산하지 않는 길이며, 동시에 그들과 부딪히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는 불가피한 저항인 것이다. 우린 좀 더 먼 곳을 찌르기 위해서 일단 지금 그 자리를 밀어내고 전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