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예의를 모르는 손녀 앞에서 한번, 이웃에 이사온 동양계 가족 앞에서 한번. 아들의 말처럼 50년대를 사는 사람이다. ‘포드’에서 일생을 보낸 그에게 ‘도요타’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유산만 노리는 아들은 개탄할 현실에 불과하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성조기를 집 앞에 매단 것처럼 그는 뼈 속까지 보수적인 미국 국민이다. 이웃의 동양인들은 하나같이 눈엣가시다. 하지만 그 동양인 이웃들이 늙은 보수주의자를 변화시킨다. <그랜 토리노>는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변하는 건 보수적 신념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하던 보수주의자가 희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이 그 변화의 본체다. 결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종교적 영험에 다다를 정도의 감동을 선사한다. 표정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생 자체를 영화에 투영한 느낌이다. 동시에 촌철살인의 대화가 살가운 웃음마저 마련한다. <그랜 토리노>는 노장의 인생이 반영된 역작이다. 자신의 삶을 관통해온 신념의 무게를 온전히 보존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복수가 아닌 징벌의 혜안을 마련한다. 그 거룩한 희생을 밟고 선 대안 세대는 빛나는 전통에 탑승해 미래로 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하여, 아멘.
유행가 가사의 기원을 찾아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이하, <슬픔보다>)는 정리하자면 이렇다. 좀 더 친절히 말하자면 어떤 유행가 가사에 담긴 실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승철이 연기하는) 이승철은 자신의 필이 꽂힌 어느 무명 가수의 노래말을 작사한 작사가를 찾아 가지만 찾을 수 없다. 그 사연을 얘기하자면 길다. 그리고 <슬픔보다>가 바로 그 사연을 담은 이야기다.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이라고 서로를 지칭하는 남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인이 아닌 동거인으로서 살아간다. 부모가 죽었거나 떠난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케이는 크림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고백할 수 없다. 그의 플라토닉한 사연은 그가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영화는 이미 초반에 그 사연을 드러내버리므로 이는 명백히 스포일러가 되지 못한다.- 그는 걱정한다. 자신이 떠나면 크림은 혼자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고민한다. 크림을 위해 좋은 남자를 마련해주겠다고. 흡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미개가 새끼를 위한 식량을 비축하는 심정과 다를 게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이건 필히 비현실적인 러브스토리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슬픔보다>에선 순정만화의 체온이 느껴진다. 때때로 낯간지러운 비유적인 대사들이 차고 넘치며 유행가 가사를 넓게 풀어헤친 듯한 사연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그 비현실적인 관계와 사연 속에서 신파가 흐른다. 문제는 그 모든 감정들이 딱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체감되지만 특수한 사연이라 이해한다면 일면 그럴 듯한 내용이라 감안하지 못할 건 없다. 세상의 모든 사연들은 타인의 입장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니. 다만 그 감정마저 인공적인 뉘앙스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심각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의 옆에 좋은 남자를 남겨줘야 한다는 남자의 태도가 다분히 비현대적이다. 순수한 사랑이라기 보단 마초적인 기운이 은연중에 감지된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사가의 존재 여부는 그냥 허탈하게 웃고 말일이다.
사랑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는 이야기 속에서 장황하고 능숙한 언어적 비유는 되레 허망해진다. 게다가 그 비유를 품고 있는 사연의 테두리가 작위적인 혐의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양상 속에서 언어는 갈 길을 잃고 홀로 반허공에 뜬다. 남자의 일방적인 선택이 알고 보니 다른 한쪽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고 있으며 또 알고 보니 또 다른 이의 헌신에서 비롯된 사연이더라, 란 식의 완벽한 우연에 기댄 삼각구조 신파 모드를 보고 있노라면 껍데기만 남은 감정들이 전시되는 쇼윈도를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투명하다기 보단 표백됐다는 말이 어울리고, 순수하다기 보단 유치하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신파인 척 포장된 거짓말이 나쁜 거지. <슬픔보다>는 그런 거짓말이다. 감정을 팔아먹는 문장으로 채워진 하이틴 시집마냥 언어로 포장된 텅 빈 감성에 불과하다. 슬픔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특히 후반부의 내레이션 구조는 최악의 고문이나 다름없다.
엄숙한 장례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을 메운 하객들 가운데 홀로 서있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짧은 백발과 뚜렷한 주름의 굴곡은 그의 세월을 짐작하게 만드는 나이테와 같다. 부인에 대한 애도로 굳은 표정이 일그러진다. 엄숙함이 지배하는 장례미사 가운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들이 눈 앞에 가득하다. 장난을 치며 히죽거리는 손자들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손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바쁘다. 그의 입술 한 쪽이 일그러진다. 장례미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는 옆집에 이사온 동양인들을 보게 된다. 그의 입술 한 쪽이 또 한번 일그러진다. 그가 사는 동네엔 동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주의자인 월트 코왈스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개탄할만한 변화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예의는 점점 씨가 말라간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엔 그 예의마저 가르치기 힘든 이방인들의 유입이 넘쳐난다. 그는 가치관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젊은 세대의 무례함을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들의 유입을 경계한다. 자신의 일생이 투영된 ‘포드’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그에게 ‘도요타’에서 근무하고 일제차를 운전하는 아들과 그 내외는 탄식할만한 현실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대화가 껄끄럽지만 한낱 물려받을 유산이 남아 있는 삭막한 관계에 불과하다. 어린 손녀조차도 할아버지의 재물을 탐내고 사후 처리를 묻는다. 이웃에 입주한 동양인들 역시 그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월트가 상종할 수 없는 족속이라 믿었던 새로운 동양인 이웃은 그의 시니컬한 삶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들을 마련한다.
어느 날 저녁, 동양인 양아치 갱단의 난입으로 벌어진 이웃의 소란에 월트가 개입한다. 결국 총구를 들이밀고 그들을 물리친 월트는 이웃의 감사와 함께 거듭되는 사례를 얻지만 그것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아는 월트에게 호의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후로 월트가 우연한 계기로 이웃의 소녀 수(아니 허)를 한차례 더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은 말문을 트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수는 자신의 남동생 타오(비 뱅)를 월트에게 접근시키고 두 사람의 친분이 형성된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자식들과 괴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월트의 고독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산물에 가깝다. 세대의 교류가 불필요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 세대는 쓸쓸히 늙어간다. 반면 동양인 이웃엔 살가운 가족주의적인 풍요로 가득하다. 두 집안의 문화적 대비만으로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차이는 월트의 편견을 일깨우는 상대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월트의 허전함을 자극하는 무언의 구실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동양인 남매는 월트의 강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예외적인 호의를 가능케 한다. 젊지만 의외로 예의 바르며 이방인이지만 무례하지 않다. 편견을 넘어 인간적 호의가 발생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랜 토리노>는 어느 완고한 보수적 노인의 존엄한 결정을 비추기 위한 영화다. 자신의 우직한 신념을 키로 삼아 인생에 시동을 걸며 외길을 주행하던 월트가 그 시동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펼치는 마지막 레이스를 숭고하게 묘사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견을 후회하거나 그로 인한 지난 과오를 참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신념의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뿐이다. 월트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를 찌푸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근거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의가 없고, 존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월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그들에 현재를 힐난하기 위한 수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방조하거나 야기시키는 풍경 너머의 근본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다.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예의를 잃어가고, 이방인의 사회에 편입되어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도는 유색인종들은 비뚤어진 폭력의 연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월트는 그 모든 표면적 문제로부터 타오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 그 근본을 해결하지 않고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너비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어떤 결심을 굳혀나간다.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종교적 영험함에 다다를 정도로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그 위대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만만찮은 위트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월트가 내뱉는 촌철살인의 독설은 사실 욕쟁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살갑다. 독설로 포장된 위트에 가깝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유희로 소화된다. 한편 <그랜 토리노>를 지배하는 대단한 박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월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제스처와 구체적 행위를 더하는 것만으로 씬의 공기를 변화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씬을 지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로 4년 여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통해 벌어들인 내공의 깊이와 너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모양새를 구축한 연출력 역시 관건이다. 기복 없이 구획이 명확한 플롯과 감정적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그랜 토리노>의 완벽한 행열을 이룬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인물 간의 관계가 희극과 비극의 팽팽한 구도를 완성한다. 우직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세심하게 진전되는 캐릭터의 구도와 심리적 양상이 너비와 깊이를 함께 구축한다. 계산적인 정공법이라기 보단 경험적인 방식의 이야기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단순한 제스처의 반복이 거대한 복선으로 장착되고 미약하게 감지되곤 하던 어떤 암시가 거대한 전율로 확장된다. 계산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양식으로 보좌되는 플롯과 내러티브의 구축은 <그랜 토리노>의 주제를 보필하기 위해 마련된 탁월한 부속품들이다.
(스포일러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그랜 토리노>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깊은 혜안을 담고 있다. 월트는 문 앞에 성조기를 내걸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이해되며 타민족의 활발한 유입은 국가주의적 결속을 해치는 무분별한 난입으로 이해될만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개인적 악의로서가 아닌 전체적인 존속을 위한 고민으로서 그런 편견을 유지하고 지탱해나간다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시동을 꺼버리지 않고 그 해결점이 모색될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새로운 주행방식을 설득시킨다. 월트의 ‘그랜 토리노’가 단순히 그의 지난 자부심을 위한 전시물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물려지는 산물로서 거듭날 때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시대를 배려하는 대안적 정책으로 거듭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나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 된 오늘날의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감한 백발 노인의 보수적 신념은 자신의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과 우직한 결심으로 발전된다. 외부인의 유입을 막을 수 없는 현실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모색한다. 차별과 편견을 통한 억제가 아닌 선별과 교화를 통한 육성을 제시한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는 전장에서 짊어지고 온 살육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명예로운 훈장의 치욕적 진실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현실적 고독도 대부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별한 부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신부 (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부탁한 것도 그런 상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에 맞선다. 그에게 지난 비극은 당면해야 할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온전히 자신의 책무로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의 결심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비극을 잉태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는 고집만큼이나 비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건 자신의 기득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에 젖어 염치없는 망발을 일삼는 어느 보신주의자들의 얄팍한 보수주의 퍼포먼스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예의가 망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려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육체를 공익적 방도로 삼아 사회에 환원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될지라도 소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돌진한다. 자신의 노쇠한 육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사회의 비료가 되길 희망한다. 자신이 점지한 대안 세대에게 폭력의 책무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서 그는 복수가 아닌 징벌을 택한다.
<그랜 토리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아들과의 괴리감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월트는 딸을 그리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와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랭키와 달리 월트는 자신이 응원하는 후세대의 좌절을 짊어지고 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후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제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삶을 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라스트 씬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전통의 주인이 된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고 사라지는 저편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대의 존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태운 어느 노장의 깊은 철학이 이룬 성과다. 롱테이크로 비추는 그 풍경에서 변하는 건 비단 인간을 통해 움직이는 차량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변한다. 인간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한다. 결국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도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라는 고민이 대칭을 이룬다. <그랜 토리노>는 그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묵직한 답변을 남긴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냉철한 시각에 담긴 따뜻한 혜안을 그린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되 그 신념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 공정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념이다. 기득권의 보신을 위해 보수주의의 문패를 내거는 알량한 거짓 연기와 다른 진짜 보수주의자의 덕목을 숭고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거장의 철학을 또 한번 설득시킨다. 언젠가 노장은 죽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랜 토리노>는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걸작이다. 마치 누구나 탐내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서로를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이라고 부르는 남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인이 아닌 동거인으로서 살아왔다. 순정만화의 체온이 느껴진다. 다분히 비현실적이라 규정될만한 관계 속에 신파를 그려 넣는다. 그 사연 속에 은유적인 대사들이 차고 넘친다. 유행가 가사에서나 들어 봄직한 사연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비유로서 사랑을 설명하는 것에 능하다. 하지만 사랑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는 이야기 속에서 언어적 비유는 쉽게 허망해진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 좋은 인연을 점지해주고 떠나간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선택이 아닌 쌍방의 암묵적 이해 관계로 거듭나고 삼각관계의 신파로 승화될 땐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문장의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특히 크림의 시점으로 반전되는 후반부의 내레이션은 고문에 가깝다. 투명하다기 보단 표백됐다는 말이 어울리고, 순수하다기 보단 노골적이라 유치하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이 너무나도 작위적이라 그 감정마저 노골적인 매물로 전시되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진다. 인공적인 감미료 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신파인 척하는 게 나쁜 거지. ‘슬픔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야기’라 불려도 억울할 게 없는 영화다.
이미 영화화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 ‘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 ‘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가면을 뒤집어 쓰고 독자적으로 제작한 제복을 걸친 히어로들이 밤거리를 누빈다. 아노미 상태의 도시와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자발적 본분 아래 세상을 감시하고 범죄를 다스리고 종래엔 조직을 정비해 힘을 결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개인들의 이념과 성격 차이로 간격이 벌어지거나 충돌이 발생하던 중 정부의 코스튬 히어로 활동 금지를 담은 ‘킨(Keene)’ 법령이 제정되고 히어로들의 활동권은 영구히 박탈당한다. 그들은 더 이상 강대한 미국의 새로운 신화를 자처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선전도구이거나 이를 거부한 채 추방당하거나 쫓기는 불순한 음해세력에 불과하다. 가면을 벗은 은퇴한 히어로가 되거나 정책에 대항해 아나키스트처럼 살아간다. 체제적 감시와 음모, 그리고 대중적 멸시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영웅으로 살아가던 과거를 그리거나 멸시하며 살아간다.
잭 스나이더는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도사린 우중충한 음모론의 시대를 그린 <왓치맨>을 묵시록의 이미지로 승화시켰다.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히어로들의 번뇌와 고민이 강렬하게 투영된 원색의 사각 프레임을 음울하고도 우아한 그로테스크의 스타일리쉬로 변주한다. 거친 질감으로 구현된 원색 바탕의 이미지와 방대한 대사량과 내레이션의 여백까지 삽입된 직사각형 틀의 일정한 간격은 프레임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대체되고 온전히 구현된다. <왓치맨>은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선택했다. 원작을 미리 접한 이라면 마치 코믹스의 움직이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강한 원색 톤으로 이뤄진 원작의 날카로운 색감과 달리 영화는 회화적인 색감과 대비적인 음영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물론 세세한 구석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원작의 내러티브 가운데 일부는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제외됐다. 스토리텔링의 큰 줄기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선별된 삭제 범위는 현명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160여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은 원작의 너비가 그만큼 방대함을 상대적으로 입증한다.
<300>의 비쥬얼을 염두에 두는 관객이라면 <왓치맨>에서도 그 기대감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다. 물론 <왓치맨>과 <300>의 비주얼을 영화적 결과값으로 설명하는 건 원작의 차이를 간과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두 작품의 영화적 결과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이다. 잿빛 필터를 씌워놓은 듯 톤 다운된 채도에 극대화된 명암 속에서 혈기왕성한 전투씬 사이마다 고속촬영을 통해 우아한 움직임을 새겨 넣던 <300>은 분명 스타일리쉬의 한 정점을 찍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팽창된 근육질 사내들의 육체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300>의 직선적인 세계관과 달리 <왓치맨>은 다양한 캐릭터들간의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의 맥락들이 제각각 어지럽게 보존된 세계다. 정신분열적인 산만함이 난해함을 부르지만 심오한 상징과 은유의 체계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성이 각기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은 복근 하나로 팀워크를 과시하던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음영을 강조한 듯한 컬러는 도시의 비열한 정서를 이미지로 각인시키고 영화의 무게감을 한층 더한다. <300>과 마찬가지로 우아하면서도 과감하게 묘사되는 이미지즘의 향연은 <왓치맨>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배트맨과 유사한 슈트를 입고 비행선을 조종하는 나이트 아울(패트릭 윌슨)을 비롯해 신적인 능력을 지닌 푸른 사내 닥터 맨하튼(빌리 크루덥), 끊임없이 변하는 데칼코마니 형상의 복면을 음침하게 뒤집어쓴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날렵한 액션을 구사하는 여성 히어로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 뛰어난 지력과 속을 알 수 없는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불한당 마초 히어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까지, 제 각각의 캐릭터들은 모든 슈퍼 히어로의 판본을 되새김질하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한다. <왓치맨>은 그 다양한 캐릭터의 사연이 담긴 원작의 스토리를 간과하는 바없이 스크린에 전시하고 나열해나간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적 표본의 한 전형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왓치맨>은 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탁월하게 이양했다. 원작의 열렬한 팬이라면 분명 이 작품에 열광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유명한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 <왓치맨>은 덕분에 가면 너머의 캐릭터들의 익명성을 객석까지 공고히 다지는 인상이다. 그 이전에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이루는 캐스팅이 실로 성공적이다.
다만 그 흔한 히어로물들을 상기하고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왓치맨>은 지독하게 무겁고 엄숙한 장례미사나 다름없을 가능성이 크다. <왓치맨>은 광활하고 방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히어로 무비에 대한 관성적인 기대감을 품고 <왓치맨>을 본다면 자신의 기대와 무관한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원작에 숨어있는 시대적 메타포를 향유할 수 없는 관객에게 <왓치맨>은 그저 끔찍하게 긴 제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작품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자신의 의지에 걸맞은 성취를 이뤘다. <왓치맨>은 분명 난해하고 심오한 원작 그래픽 노블의 새로운 전시관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한다. 결말부의 미세한 변주 역시 영화적인 설정으로서 좋은 선택이었다 평할만하다. 영화적인 재해석을 포기했다기 보단 좀처럼 재해석이 불가능한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곁가지를 쳐내고 주요한 설정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시대적 기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디테일의 수선을 마쳤다.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을 선보이진 못했다 해도 원작의 명성을 공고히 다질만한 스크린작은 하나의 명예에 속한다. 원작의 팬이라면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또한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읽고 싶어질 관객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후자보단 전자의 쪽이 영화와 원작을 섭렵하는데 있어 좀 더 우월한 감상의 위치를 선점할 가능성이 생긴다. 원작보단 영화가 좀 더 친절한 편에 속하는 까닭이다.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자가 아니다. 신이라 불려도 될만한 닥터 맨하튼조차도 실험적 실수에서 비롯된 후천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기술과 자본의 힘을 빌린 메카닉으로 무장하거나 예기치 않게 돌연변이가 된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독한 신념을 품고 신체를 단련하거나 이상을 고취시키는 것뿐이다. 닥터 맨하튼을 제외한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련된 사람들일 뿐이다. 실제로 앨런 무어의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는 히어로 코믹스의 영향력에서 코스튬 히어로가 등장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왓치맨>은 단지 초인들의 활약과 특별한 고독을 묘사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를 은유하고 사회를 관찰하며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 특수한 가면과 의상으로 정체를 가린 히어로들은 제각각 모순된 사회를 바라보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주체가 된다. 결국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한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필요악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거대한 선을 구축하거나, 혹은 이에 동조하거나 그저 무기력해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고 선택한다. 그들의 코스튬은 비범한 특수성을 위시하는 이미지라기보단 내외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처참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결말부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구조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누가 왓치맨을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Watchman?)’라는 질문은 단순히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 갇힌 고민만은 아니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은 모든 작은 것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움직임을 끊임없이 주시하지 않을 때 세상은 때때로 위태로워진다. <왓치맨>은 그 심오한 질문을 내던지기 위한 새로운 그릇이다. 또한 <왓치맨>은 익숙한 대답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영웅을 악당으로 변모시키는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등장했던 그 시기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를 넘어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이 도래했다. 슈퍼 히어로 코믹스를 한 단계 진일보 시켰던 1980년대의 변혁을 상기시키듯 21세기 다크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영웅을 악당으로 변질시키는 건 단지 영화 속의 시대상에 불과한가? <다크 나이트>와 <왓치맨>을 보게 될 21세기 관객들은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세기의 그래픽 노블들은 왜 21세기의 스타일을 입고 다시 구현되는가. 가상의 세계를 수놓은 화려한 비주얼 너머로 도사린 의미심장한 물음엔 어쩌면 우리가 얻어야 할 어떤 조언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왓치맨>의 원작에서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모든 건 네 손에 달렸어.'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진동하는 핸드헬드와 거친 입자가 부유하는 캠버전 영상은 영화의 정서를 관통하기까지의 추이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실험적 기제처럼 보인다.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근본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언니인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킴(앤 헤서웨이)은 대사를 앞둔 집안의 공기를 불안정하게 덥힌다. 킴과 가족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을 부수기 위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담긴 거친 언어가 쏟아진다.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흔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반목 속에서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혈연이라는 구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존재만으로 폭력처럼 행사되던 가족이란 속박이 서로를 위한 배려로 거듭난다. 단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가족은 오랜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의 카메라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볼 따름이다. 단지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앤 헤서웨이의 놀라운 연기는 그 의미를 돈독히 다지는 강력한 지원군이다.
<킬러들의 도시>는 의뭉스럽게 전진하는 영화다. 인과관계의 원인을 가리고 전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와중에 백치미적인 대사에서 비롯된 유머가 분위기를 띄운다. 그럼에도 좀처럼 품위가 훼손되지 않고 정체 모를 상실감이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의 감춰진 속내가 차근차근 드러나는 과정 한편에서 또 다른 인과관계로 작동할 주변 환경과의 구조적 연계가 디테일하게 구축된다. 흡사 ‘가이 리치’스러운, 우연적인 관계의 교차를 통한 필연적 사건의 재구성처럼 보이기도 하나 남발된 양상이 아니며 차기 장면에서 드러나는 반전적인 상황이 항상 예측 범위를 극복하고야 만다. 일반인으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젠틀한 영국 킬러들의 프로페셔널한 규약은 때때로 웃음의 매개체가 되지만 이는 중후한 느와르적 프라이드를 연출하며 비범한 정서를 끝내 이루고 만다. 궁극적으로 <킬러들의 도시>는 죄책감을 속죄하는 자와 이에 보혈을 내리는 자, 그리고 그 보혈을 요구하는 자에 대한 사연이다. 유머가 발생하나 천박하지 않고 전통적 도시의 풍광만큼이나 고풍적인 정서를 연출한다. 중세의 흔적이 보존된 브리주를 관조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카메라 너머의 풍경과 어울리는 캐릭터들의 능숙한 연기는 하나의 관건이다. 생소한 도시는 유배지가 되고, 무덤이 되며 재생의 도피처가 된다. 비범하게 재기발랄한 성찰이 돋보인다.
격양된 목소리 너머로 사진과 기사가 흐른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프로레슬러의 전성기가 언어로 구술되고 이미지로 비춰진다. 영광의 나날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환호와 열광이 빗발치던 지난 세월을 넘어 눈앞에 들어서는 건 어느 적막한 대기실의 풍경.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인다. 영광의 세월을 지나 노쇠한 육체는 여전히 그 세월을 연장하기 위해 부딪히고 내던져진다. 사나이는 여전히 자신의 전설을 놓지 못한다. <더 레슬러>는 전설을 먹고 사는 어느 루저를 위한 송가다.
영화 속 대사처럼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게 맞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더 레슬러>는 그 합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들춘다. 과격한 퍼포먼스가 링 위를 지배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도 역시 배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허구의 노동은 실로 헌신적인 육체적 공갈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합을 맞추고 과정을 숙지한다 해서 노동이 부정되는 건 아니며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연출을 고려하고 내러티브를 유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정교한 합이 어울려야 한다. 그 퍼포먼스가 실제적인 고통과 고단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수난이 심할수록 관객의 열광도 더해진다. 링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자학적인 수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실로 절박한 진심을 담고 있는 피학적인 거짓말인 셈이다.
랜디 램(미키 루크)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테크닉을 통해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링의 전설로서 군림했다. 링 위에서 영웅으로 연호되는 레슬러지만 그는 사실상 남루한 삶을 살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모금에 갖가지 약을 삼킨다. 작은 임대 트레일러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형마트에서 잡일을 하고 주말마다 링에 오르는 랜디의 삶은 패배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링을 떠날 수 없는 까닭 역시 그 삶과 연관돼있다. 링을 떠나면 랜디는 진짜 패배자의 삶에 갇힌다. 그의 삶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링에 서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링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얻는 것만이 그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동정의 여지로 가득한 랜디의 삶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된다. 다큐적인 질감을 품은 카메라 기법은 <더 레슬러>를 페이소스로 가득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구출시킨다. 종종 랜디의 뒤를 차분히 뒤따르곤 하는 카메라는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그 남자가 걸어나가는 그 세계를 같은 눈높이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링에 오르던 랜디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집주인이 잠근 열쇠를 열지 못해 비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는 과정은 실로 대조적이다. 또한 온몸에 스탬플러가 박혀 피투성이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랜디의 모습을 먼저 비춘 뒤, 끔찍한 유혈을 동반한 경기 과정과 경기 중에 얻은 상처를 대기실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교차시켜서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엔 어떤 과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동반한 배열상의 편집은 있지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노력은 극도로 절제된다. <더 레슬러>가 <록키>와 명확한 차이를 두고 있는 지점이다. 인물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객관화시켜서 그 세계를 응시하고 인물에 대한 관찰을 요구한다.
물론 랜디라는 레슬러에 대한 감정일체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루저의 삶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극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연출의 묘가 좀 더 객관화된 감정을 야기시키고 이를 통해 그 인물 너머로 확대된 세계관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사모하는 랜디의 감정을 온전히 순정적인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으며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로부터 박대 받는 랜디의 모습을 동정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은 상황 그 자체로서 판단하게 만들 뿐, 어떤 감정의 매개체가 되어 객석을 유린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상황의 응시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더 레슬러>가 정서적인 통증을 동반하는 건 그 덕분이다.
전설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랜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숭고함보단 처절함에 가깝다. 그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존이란 물질적 가치의 잉여를 위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 비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유일한 존엄성의 뼈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뿐일 따름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때로 그 현실을 한심할 정도로 나약하게 대비시킨다. 고통을 무릅쓰고 링에 올라서는 사내의 뒷모습엔 현실의 무력함이 깊게 배어있다. 더 이상 진짜가 될 수 없는 영광의 껍데기만 두른 고독한 삶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로서의 삶에 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자신의 링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로맨스에 천착한 그 삶은 지독하게 비루하다. 그럼에도 그 삶을 책망할 수 없는 건 그 삶이 무가치하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흔과 혈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담긴 영광의 세월을 폄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는 그 삶을 통해 감정을 완성하기 보단 그 삶 자체를 조명한다. 무엇보다도 미키 루크는 캐릭터로서의 연기적 영역을 넘어 배우 본연의 삶을 투영하는 양상이라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배우의 삶이 투영된 듯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실로 적나라한 루저의 일생이 배우의 삶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부여하는 덕분이다.
그 삶엔 어떤 낭만도 포용되지 않는다. 스러져가는 육체를 겨우내 지탱하는 사내가 해묵은 언어로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전설에 몸을 던질 때, 희망보단 절망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응시하는 건 그것이 진심이 담긴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영광이라 해도 그 자체를 위한 삶의 진정성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 건조한 영화가 품고 있는 일말의 낭만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비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남다른 생의 의지가 빛난다. 박동이 약해진 심장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움츠림을 거듭하듯 낡아가는 전설을 삶의 최전선으로 연장하려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삶이란 단어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라 해도 그 사내는 끝까지 전설을 삶의 테두리로 보존하려 한다. <더 레슬러>는 실로 처절하지만 그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담담한 그 인생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정신적 자존을 부지해 보려는 사내의 삶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루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진짜 루저의 삶을 그린다. 전설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 껍데기를 유지한 채 그저 걸어간다. 영광의 뒤안길에 선 삶을 고스란히 발가벗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다. 남루하지만 꿋꿋한 삶의 의지가 아련하게 빛난다. 그 삶에 어떤 감정 이입을 가하지 않고 그저 따라 걷을 뿐이다. 훌륭한 위안이자 현명한 연대로서 진심을 전한다. <더 레슬러>의 담담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운데 먹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원인불명의 괴질에 감염된 사람은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출혈을 일으키다 발작 끝에 심장이 멈춰 사망한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이 이 괴질로 초토화된다. 그 모든 것이 도쿄에서 시작된다. 일본 열도 전체가 정체불명의 괴질에 감염되어 국가 전복의 위기에 처한다. 문득 <일본침몰>이 기시감처럼 상기된다. 하지만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은 그보다 좀 더 스케일을 요구하는 영화다. 단순히 일본의 패망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멸망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황량한 도쿄의 풍광을 스크린에 노출하는 건 <블레임>의 욕망이 그 영화들 못지 않게 거창하다는 걸 증명하는 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최대한 비슷한 규모의 풍경을 선사하고자 틈틈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간격을 채우는 스토리텔링은 역부족 그 자체다. 디테일의 한계가 선명한 내러티브는 완벽한 결함이다. 거대한 세트의 물량공세를 통해 이미지를 확대시키지만 그 이미지를 연결하는 스토리는 심각하게 허황되기 짝이 없다. 이미지의 내부에 자리잡은 사연들이 실로 앙상하다. 욕망과 성취의 격차가 지나치게 아득하다.
끊임없이 죽음을 묘사하고 비장한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 감정에 경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막을 통해 질병의 확산을 설명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지만 어떤 비범함도 감지되지 않는다. 거창한 화면과 달리 전이되는 긴장감은 빈약하다. 재난영화의 테두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메디컬 드라마로 삐끗하더니 탐정물의 동선을 기웃거리고 호러적 연출에 추파를 던진 뒤 종래엔 멜로로 외도해버린다. 사족이 끊이지 않더니 옆길로 새어 나간 뒤 그 자리에 정착해버린다. 맥락 자체에 대한 구심이 없고, 연출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부재하며, 전체적인 형태를 조립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됐다. 몸집을 키우고 싶어할 뿐, 내실을 다스리지 못한다. 믿을 수 없게 멋대로 흐르는 전개 속에서 가능한 건 이 영화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무의미한 호기심뿐이다. 그마저도 자폭에 가까운 결말을 확인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싶어진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세주2>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꽤나 무색한 일이다. 홍보카피만으로도 이미 기대감 따위를 낮춰버린 자충수는 꽤나 유효하다. 명품 코미디가 어쩌고 따위를 도배하고 뒤통수를 시속 250마일로 가격하는 듯한 어떤 조폭 코미디 따위에 비하면 꽤나 양심적이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개그임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여러모로 윤리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속편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떠드는 이의 허세는 실로 처량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카피만큼이나 영화가 후지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를 내팽개치고 배우들의 개인기 공세를 펼쳐 객석의 반응을 끌어냈던 <구세주>만큼의 미덕조차 없다. 클리셰 범벅의 내러티브를 분석할 요량 따윈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적어 내린다 해도 그것을 스포일러라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세주2>의 스토리텔링은 심하게 열악하다. 그건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세주2>의 상영관을 찾는 어떤 관객에게 완벽한 내러티브와 플롯의 부재를 설득하는 행위는 재래시장에서 명품백을 팔지 않는다고 진상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각한 문제는 영화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조차 볼품 없다는 점이다. 유명 개그맨과 연예인을 카메오로 동원하고 슬랩스틱을 비롯해 자학 개그 세트인 화장실 개그와 구타 개그를 결집시켜도 유머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적어도 <구세주>는 시종일관 웃겨주기라도 했다. <구세주2>는 그 재능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웃기지 않는 농담처럼 무색한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웃기지 않는 농담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할 때는 더더욱 괴롭다. <구세주2>는 그만큼 괴로운 영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스태프들의 자축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미어지는 기분마저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