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賊)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야연><집결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인 <천하무적>은 사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소매치기 씬이나 소매치기들 간의 결투 장면은 지나친 눈속임으로 일관하다 못해 때때로 한심할 정도다. 잔상이 심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작을 파악하기 힘든 영상으로 무마하는 소매치기 장면에서 디테일한 손놀림 따위를 기대했을 관객의 심리를 뻔뻔하게 반감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소재를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지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일면 타당한 구석도 있다. 사건의 전개보다는 개과천선을 바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그렇다. 사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의문을 야기시키는 그 변화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그 변화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느 정도 허무맹랑한 구석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성찰을 높이 평가할만한 자신은 없다. 변화의 양상이 타당할 뿐, 그것이 깊은 감동을 부를만한 수준은 아닌 덕분이다.
동시에 소매치기라는 소재를 통해 발생하는 기교적 기대감은 철저하게 망연자실해진다.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그릇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천하무적>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확실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점이겠지만. 때때로 허세로 가득 찬 화면과 음악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고의적으로 웃음을 야기시키는 의도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소를 부르는 풍경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유덕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동정을 부르는 느낌이다. ‘천하무의(意)’와 ‘천하무실(實)’의 연속이다. 의미도, 실속도, <천하무적>에선 얻을 수 없다.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네소타 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의 손실을 절감하기 위해선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직원들의 정리해고 절차가 필요하다. 중책을 떠안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은 팽배하다. 적어도 미네소타행 공항에 도착할 때까진 그랬다. 하지만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몰아치는 칼바람에 한번, 그리고 결코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 속에서 또 한번 발을 구르고 치를 떤다.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시크한 생활을 즐기던 루시힐에게 미네소타는 지방의 촌뜨기들이 모여 사는 열악한 구석에 불과하다.
교훈적인 인생지침서처럼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찰적 스토리가 줄기를 이루고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의 무드가 가지를 친다. 따뜻한 마이애미에 익숙한 루시힐이 척박한 미네소타에서 적응해나가는 모습 그 자체가 <미쓰 루시힐>의 관건이나 다름없다.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도시 여자가 지방의 관심을 번거로워하거나 텃세에 갈등을 빚다 결국 소박한 진심을 깨닫고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물론 뻔하다. 전형적이거나 도식적이다. 하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들이 곳곳을 장식하며 소소한 매력들이 소박하게 진열된다. 뜨겁게 달아오를 만한 특별함은 없지만 그 진심에 담긴 온기가 서서히 전해질만큼의 자질은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국내 국내개봉명에 불과하지만) <미쓰 루시힐>이라는 롤타이틀처럼 루시힐이란 캐릭터가 어필하는 매력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루시힐은 르네 젤위거를 본떠 만든 캐릭터라고 해도 될 만큼 배우의 매력이 투과된 캐릭터다. <미쓰 루시힐>의 루시힐은 도도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르네 젤위거의 출세작이라 말할 수 있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처럼 쉽게 망가지고 털털한 내면을 드러낸다. 때때로 과감한 슬랩스틱을 서슴지 않으며 웃음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딘가 심심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조연 캐릭터들에 더욱 정감이 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소박한 얼굴로 영화의 표정을 대변하고 소소한 매력을 더한다.
<미쓰 루시힐>은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가는 영화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 물론 도시와 지방이라는 지정학적 대비는 단조롭고 한편으로 지방의 인심을 지나치게 우상화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물질주의적 풍요와 개인주의적 이기에 젖은 현대도시인들의 삭막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효력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 상투적이고 투박하지만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곧잘 발견된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처럼 <미쓰 루시힐>은 소박한 이미지에 아기자기한 매력을 숨겨둔 귀여운 영화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멱살을 잡힌 채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멀쩡하게 일어서서 눈감지 못하는 쪽도 하나같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어느 곳보다도 현실적인 풍경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이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는 사이 점차 부서지고 파편화되는 가족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낯익은 풍경이다. 지독한 폭력에 노출된 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부조리의 자궁에서 또 다른 증오를 잉태한 채 자라고 엉킨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광경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절망을 관통하고 멈춰선 채 응시한다. 통증을 각성시키고 폭력을 환기시킴으로써 파묻어 부정하던 폐부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유도한다. 따뜻한 위안이기 보단 거친 윽박을 지른다. 당황스럽겠지만 객석에서 일어날 때 즈음엔 진통과 함께 밀려드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구상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은 결국 영화 밖에 있다. 똥파리는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똥 무더기다. 혐오의 대상이 사라져도 혐오의 세계는 남는다. 그걸 걷어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영화가 아닌 관객이다. 바로 당신이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모체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자신만의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이다. 물론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은 전자의 기억을 소환하기 좋은 자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이며 원초적인 호러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달리 물리적인 실체를 동원해 미스터리를 설득시킨다. 폐쇄적이고 음습한 기운이 동화적인 순수와 결합돼 중의적인 심리를 풍기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전형적인 틴에이저 형태의 이미지에 병리학적 컴플렉스 증세를 더하며 인과적 내러티브를 완성해나간다. <장화, 홍련>의 분위기 자체에 매혹된 관객이라면 <안나와 알렉스>를 그만큼 하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다만 연출적 자질은 평범하고 관객의 혼선을 도모하려는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평범하다는 말은 때때로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아무래도 그 중간 즈음에 머문 영화 같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훈훈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하루를 보내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중책을 안고 지방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직원을 정리하라는 것. 팽배한 자신감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루시힐은 미네소타의 추운 기후에 한번,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에 또 한번 발을 동동 구른다. 풍요롭고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하던 루시힐이 척박한 지방의 기후와 문화에 적응해가는 모습은 <미쓰 루시힐>의 큰 줄기다.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정서와 함께 삶의 교훈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생지침서 같은 스토리가 어우러진다. 도시의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여자가 지방의 인심 속에서 갈등하다 끝내 화해하고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다소 뻔하지만 때때로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가 발견된다.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간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이자 영춘권의 계승자라는 엽문(견자단)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무인 곽원갑>이나 <정무문> 혹은 <황비홍>시리즈의 기시감이 드는 건 무리는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망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된 쿵푸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동시에 무예에 조예가 있는 배우의 리얼 액션이 바탕이 된 무술 영화라는 점에서도 전자들과 공통 분모는 뚜렷하다. <엽문>은 일제치하의 역사가 잉태한 시대적 반일 정서를 통해 감정을 고양시킨다. 이는 국내 관객의 동감을 얻을 여지가 있다. 다만 그 민족적 자존심을 시대적 함성으로 승화시킨 광경 속에서 중국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심이 우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혹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물에 익숙한 세대라면 그것들을 보고 난 후와 비슷한 감상을 얻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그 모든 감정적 판단과 무관하게 <엽문>이 중국 무술영화의 양자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견자단은 자애롭고 여유로운 강자의 풍모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유연하면서도 폭발력 있는 견자단의 몸놀림만으로도 <엽문>은 특별하다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우직한 야심을 과감히 뿌리고 거둔다. 과거 중국영화의 향수를 느끼는 세대에겐 반가움을, CG와 와이어액션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묵직한 압권을 전하고도 남는다.
백부는 경극 배우였다. 그는 배우로서 명성을 누렸고,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백부는 광대였다. 광대란 명예를 쌓아 올려도 한 줌 바람에 허물어지기 좋은 운명에 불과했다. “경극배우로 성공해도 멸시를 벗어날 수 없다. 무대를 떠나라.” 백부의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던 어린 원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연기를 가르칠 선생님이 왔다. 백부는 원화에게 무대를 떠나라 했지만 운명은 원화를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매란방>은 배우로서의 삶을 면치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의 운명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된 이름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경극 배우 ‘매란방’의 실존적 삶을 영화화했다는 <매란방>은 한 인물의 인생 속에서 격정적인 사건을 추출해 서사적으로 나열한다.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반복으로 진전되는 상황은 3번의 점프컷을 통해 크게 분할된다. 유년시절 스승으로 모시던 대배우와의 대결, 성장한 매란방(여명)과 맹소동(장쯔이)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미국 진출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린 매란방의 역경. 3조각으로 나뉜 서사엔 저마다 극적인 사연이 존재하며 이는 <매란방>이란 스토리텔링을 분할하는 카테고리처럼 질서정연하게 나열된다. 그 중심엔 어김없이 ‘매란방’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근원이 되는 주체라기 보단 모든 사건에 연루된 객체로서 그 자리를 지킨다. 사건의 배경이 되어 병풍처럼 존재한다.
물론 유년 시절의 서사는 매란방이라는 인물의 기초적인 서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한다. 서양연극을 공부했다는 구여백(손홍뢰)은 원화를 만난 뒤 관료직을 버리고 원화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결국 타성에 젖은 경극 배우들의 전통적 관념에 대항하고자 하는 구여백에게 감화된 매란방은 자신의 스승과 대결을 펼친다. 물론 그 대결의 주체는 매란방이 아니다. 진보적인 구여백과 ‘경극의 대왕(伶界大王)’이라 지칭되던 보수적인 대배우의 대립 안에서 매란방은 승부를 결정짓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국면 안에서 매란방이 느끼는 정서적 애환이 백부의 유언을 환기시키며 일종의 감흥을 부른다. 대배우의 쓸쓸한 몰락과 이를 지켜보는 매란방의 부채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이 매란방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매란방>에서 묘사되는 ‘매란방’은 전반적으로 반사율이 낮은 인물이다. 공허하며 한편으로 단조롭다. 인물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낄만한 여지가 많지 않다. 흥미로운 건 매란방의 주변부를 차지하는 서사이며 그 서사에 참여하는 주변인들이다. 씬의 감정을 지배하는 건 대배우이거나 맹소동이거나, 일본군 장교다. <매란방>에서 ‘매란방’은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면서도 주체적인 감정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실제 인물의 서사가 그러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화상에서는 그렇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유년 시절 이후 여명이 연기하는 매란방의 서사가 이에 해당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시점부터 매란방이란 인물의 관점은 흐리멍텅해진다.
매란방은 대단한 사연 속에서 감정을 지배하는 역할을 선점하지 못한 채 그저 존재한다. 유년 시절 이후로 나열되는 두 번의 큰 사건 속에서 매란방은 무색무취의 형태로 그저 늙어갈 뿐이다. <매란방>은 주인공을 날려버린 배경 사진과 같다. 그 여백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나 주변부에서 고조되는 감정에 흥미를 느낀다면 다행이겠지만 매란방에게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매란방 이야기라는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면 감상 자체가 텅 비는 꼴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찰리 채플린도 영감을 얻었다는 매란방의 실제연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경극이 소리를 절제한 무대극으로서 무성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영화는 매란방의 삶이 관객에게 어떤 영감을 주지 못할 정도로 심심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매란방’이 <패왕별희>의 데이(장국영)가 연기한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인물이 경극배우라는 점에서 <매란방>과 <패왕별희>는 누군가에게 비교하고 싶어지는 영화가 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수순일지는 의문이다. 단지 두 영화가 평행선에 놓기 좋은 비교군의 조건을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경극을 소재로 한 첸 카이거 감독의 작품이란 공통분모가 선명한 까닭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명과 장국영의 연기력을 비교한다거나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한다는 건 사실상 부질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매란방>은 <패왕별희>보다도 훌륭한 기능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존적 재현과 허구적 창작의 너비만큼이나 두 작품은 엄밀히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타고난 환경과 천성이 다른 두 인물의 서사에 우열의 잣대를 부여한다는 건 어딘가 무지막지한 태도다.
사실 118분 가량의 상영시간으로 국내에서 개봉될 <매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떤 면에서 무색한 일처럼 느껴진다. 국내 수입사에서 가위질 했다는 30분의 서사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첸 카이거 감독의 승인을 얻었다지만 감독 스스로도 편집본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결과물을 놓고 이야기한다는 건 어딘가 무색한 일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상에서도 무성의한 편집의 결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매란방>은 위대한 경극배우, 좀 더 포괄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가가 인생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재현하는 드라마다. 30분이 잘려나간 국내개봉판의 모습에서 매란방의 수난이 오버랩된다. 마치 그것은 문화적인 정서나 이해 차이로 경극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멸시하는 타지인들의 무지한 태도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은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 격리된 채 ‘거대렐라’라 불리며 선배(?) 몬스터들과 조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맞서기 위해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위트를 유발하는 해학적 작품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맴돌지만 단순하다고 폄하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까진 아니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다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그보다 다른 의도가 명확한 작품이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구현기술을 통한 시각적 자극의 진일보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운 속성이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흥미롭다. 다만 그 자극이 뛰어난 창작력을 기반으로 삼지 못했을 때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때때로 블랙코미디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이 귀엽지만 그것이 이 영화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긴 쉽지 않다. 기술도 과도기지만 이야기 수준도 과도기적이다.
서양의 신문물과 구시대적 풍습이 공존하는 일제 치하의 경성은 분명 흥미를 끌만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대다. <그림자 살인>은 그 과도기적 시대상을 무국적의 그릇으로 활용한다. 친일 세도가들이 득세하고, 이를 비호하며 밥그릇을 유지하는 관료들이 자리잡은 암울한 시대상 한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민초들의 활력이 거리를 지배한다. “요즘 세상 의리 없이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만시경을 들고 바람난 유부녀의 불륜 현장을 추적해 얻은 사진과 기사를 신문사에 팔아 넘기는 홍진호(황정민) 역시 앞선 대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과 무관하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뒤바뀐 국가 권력의 주체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채워진 그곳은 마치 아나키스트들의 영토 같다.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의 풍경을 무국적성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양식은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시대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그림자 살인>은 역사성을 지워버린 특이성을 통해 장르적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취향을 대변하듯 호기로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복을 차려 입고 플라스크나 비커와 같은 과학실험 도구 앞에 앉은 순덕(엄지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도기적인 시대 이미지를 대변하는 중의적 뉘앙스가 된다. 국적불명의 현실을 굳이 불행으로 치환하지 않는 태도로 장르적 그릇을 마련한다.
사건의 단초는 빈약하지만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 상의 구조적 미숙이 눈에 띈다.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는 초반부는 탐정물의 기본 구조를 축으로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를 가미하며 속도감을 더한다. 특히 경성 스타일의 옥상 추격씬은 나름의 볼거리다. 하지만 그리 영민한 이야기를 밀고 나가지 못한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처럼 신선한 시대상과 복잡한 인물 관계를 통해 후더닛 구조를 발전시켜나가지만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고 나면 되레 정답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스스로 들어선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성공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또한 캐릭터들은 기대되는 역량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변을 겉돌거나 외형적 묘사 이상의 기능적 활약을 선보이지 못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하나 캐릭터의 역할을 위한 제반이 불성실하다. 뛰어난 능력치가 예상될 뿐 그에 적절한 활용 능력이 결여된 양상이다.
실상 야심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르적 연출에 몰입하던 전반부와 달리 시대에 대한 소묘가 적극 가미되는 후반부는 그 기운을 담보로 묵직한 상황을 연출한다. 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후반부의 사연은 직업 윤리와 권력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벌려나간다. 덕분에 전반부와 괴리된 듯한 리듬이 발생하며 말미에 다다라서 발견되는 클라이맥스의 도돌이표가 권태롭기까지 하다. 쌍둥이와 같은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대립적 이미지는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일지 모른다. 이는 분명 흥미로운 접근이나 이를 묘사하는 방식이 또 한번 세심하지 못하다. 게다가 그 지점에서 이미 희석된 탐정추리극이라는 본래 의도가 다시 한번 아쉽다. 결국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이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다 해도 그것 또한 석연치 못한 어정쩡한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