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위성사진의 부감이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버지니아 CIA본부의 복도, 그리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엄청난 예감을 일으키는 오프닝이 환기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예감은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 박자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비범한 척하기 좋은 농담과 같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얻을 게 없는’결말로 종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번 애프터 리딩>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CIA분석가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의 해임 장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사건을 부풀려나간다. 오스본과 이혼을 고민하는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국무부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내연의 관계이며 그와 전혀 무관한 스포츠센터엔 전신성형을 꿈꾸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낙천적인 동료 채드(브래드 피트), 인자한 상사 테드(리차드 젠킨스)가 있다. 동떨어진 구석에 자리한 두 맥락의 인물들이 동일한 문단에 포섭되는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스포츠센터에서 발견한 CD한 장이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가며 거창한 음모론이 꿈틀댄다. 작은 오해는 불미스런 갈등으로 발전하고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의 자장 안에 들어선다.
실상 사건의 맥락엔 어떤 본질 자체가 없다. 그저 그 허무맹랑하게 커지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도가 발견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관계도 속에서 맞닥뜨린 개개인들은 불필요한 해석을 덧씌우며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의 수순에 이르고 만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사람도, 사건을 스스로 확대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산출된다. 그러나 그 해프닝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득력을 갖춘다. <번 애프터 리딩>은 구심점이 없는 인과관계만으로 온전한 스토리텔링을 형성한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녹록하다. 허풍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구술엔 어떤 허세가 없다.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다.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란 해프닝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과장된 음모론에 도취된 이들은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거나 그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이라도 결국 본질은 없다. 결국 그 모든 악화일로는 그저 실없는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망상을 통해 음모론을 확장하는 인물들과 그 추이를 관찰하는 건 CIA정보부다. 그들은 린다나 채드의 상상처럼 대단한 음모의 중추가 아니라 그저 퇴임한 정보분석가의 뒤처리나 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결국 그 망상의 음모론은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마치 살상무기 없는 이라크 전처럼, 그건 그저 해프닝이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속이 빈 형태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블랙코미디의 자격을 거머쥔다. 실체가 없어서 완벽한 해프닝을 이루는 <번 애프터 리딩>은 그 자체를 통해 거대한 음모론의 지지자들을 완벽하게 조롱한다.
'모든 것은 사소한 법(It is all small stuff)’이다. 다만 그 사소함이 때론 대단한 해프닝을 낳는다는 것. 물론 심각할 필요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저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를 즐기는 바보들의 향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저 그들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즐기면 된다. 하나같이 이름값이 대단한 배우들의 부조리한 앙상블 역시 또 다른 백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코엔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를 통해 깊이와 너비를 모두 갖춘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재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재능이 스스로의 삶을 위한 유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앞선 전례가 있음에도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변화와 정체가 혼재된 과도기의 이미지는 시대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희석시키며 장르적 발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그릇임에 틀림없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을 자신만만하게 내건 <그림자 살인>은 살인의 배후를 쫓는 전형적인 후더닛 구조의 미스터리로 시작된다.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의 구조가 미숙하다.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까지 동원하며 너비를 벌리지만 수집된 양식을 펼쳐 보이기 급급할 뿐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동시에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면 정답을 유출시키는 이야기는 영민한 편이 아니다.
이야기보다도 캐릭터가 눈에 띈다. 그러나 캐릭터들도 장르적 매력에 기인하는 건 아니다. 배우들의 표현력은 나쁘지 않다. 캐릭터 설정의 문제다. 애초에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다. 사건에 개입되는 당위부터 확실치 않은 캐릭터들은 역할에 대한 설득력을 명확하게 차려 입지 못한다. 추리물을 표방했지만 야심은 다른 쪽에 걸쳐 있다.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을 마다하지 않으며 직업 윤리와 고위층의 도덕적 해이마저 도발하는 후반부는 전반부와 분위기가 판이하다. 말미에 다다라서 반복되는 클라이맥스는 도돌이표처럼 권태롭기도 하다. 어쩌면 동일한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이미지야말로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이미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르와 역사 의식이라는 이중주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처럼 보인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거나.
아이들의 어울림이 낳은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운 정원엔 햇살이 가득 들어섰다. 어머니의 75번째 생일을 맞아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이 한 집에 모였다. 오랜 추억을 공유한 형제들의 옛집에서 그네들의 손자와 손녀가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는 중이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어느 새 할머니가 사는 집이 됐고,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자신의 사후에 유산 처리를 정리하는 중이다. 집안 곳곳에서 놓인 예술품과 고가구, 집기들은 그저 낡고 오랜 삶을 증명하는 소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고가를 자랑하는 미술품과 앤티크한 양식의 고가구들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탐낼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적 유산이다. 형제의 추억이 자리한 그 집엔 그만큼이나 값진 가치를 품은 예술적 유산들로 이뤄졌다.
인상파 화가 카밀 코로와 상징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오딜롱 르동의 그림, 화려하고 귀족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들부터 작은 찻잔 하나까지, 문화적 가치가 온전한 산물로 곳곳을 채운 그 집은 마치 박물관과 같은 사명을 띠고 있다. 오랫동안 엘렌느(에디뜨 스콥)가 손수 모은 미술품과 고가구의 보호소를 지키는 근위병처럼 벽을 세우고 문을 열고 닫았다. 하지만 그 집은 자신의 여생이 길지 않을 것을 직감한 엘렌느와 운명을 함께 한다. 엘렌느는 자신의 사후에 그 유산들을 자식들이 잘 처리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을 전해들은 큰 아들 프레데릭(샤를르 베르랭)은 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다짐한다.
벽에 걸린 그림과 곳곳에 놓인 가구들은 형제들의 추억과 함께 묵어온 것이다. 그것이 고가의 미술품이거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가구이기 전에 프레데릭은 추억으로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다. 그러나 각기 미국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과 제레미(제레미 레니에)는 감상보다도 실리를 추구한다. 더 이상 프랑스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 오랜 추억이 놓인 집을 보존한다는 건 딱히 이로운 일이 아니다. 프레데릭의 계획은 형제간의 이견을 통해 무산되고 결국 집안의 모든 집기들의 일부는 팔려나가고 대부분 미술관에 기증된다. <여름의 조각들>은 사라지는 것과 보존되는 것의 형태를 관찰하는 영화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형제들의 구심점이 되던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처분될 상황에 놓이고 그 집에 놓인 유산 역시 뿔뿔이 흩어질 운명을 맞이한다.
오르세 미술관 20주년을 기념해서 기획된 <여름의 조각들>은 오랜 예술적 가치가 보존되기 힘든 현실과 그것이 현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고 있는가를 제시하는 보고서와 같다. 집 안의 미술품과 고가구들은 형제들의 기억 속에 걸려 있거나 놓여있다. 그들의 추억을 차지하던 지난 일상의 흔적들이 팔려나가고 미술관에 전시되는 상황 속에서도 추억은 온전하다. 단지 그 흔적들이 지난 추억과 달리 온전하게 조립되지 못하고 흩어진 형제처럼 각기 다른 곳에서 보존된다. 아이러니하지만 현대의 미술품들은 더 이상 인간의 삶 속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금고 속에 감춰지거나 혹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전시될 운명에 놓였다. 개개인의 삶에 영감을 주고 함께 공존하는 소품으로서 장식되기 보단 금전적 가치로 평가되고 제도적으로 보호되는 유물로서 가려지거나 보호된다. 물론 이에 대해 불평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 현대로부터 이 가치 있는 산물들을 지켜내고 유전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가치를 공유할 수 없는, 혹은 개인의 추억으로서 사유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유산들이 오랜 세월을 전해져 오는 동안 인간의 가치관은 수없이 변모한다. 시대에 따라 부각되는 삶의 기호와 공유하는 의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예술적 가치에 대한 견해가 존중될 것이란 예상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전세대는 후세대를 위해 지켜야 할 것을 보호하고 그것들을 온전히 물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 <여름의 조각들>은 변하는 것 가운데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비록 그 선택이 자신의 추억이 담긴 현실을 분해하고 나누는 일이라 쓸쓸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위대한 유산이 누군가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추억이기 보단 깔끔한 카탈로그처럼 짜임새 있게 전시되고 설명되는 파편의 역사로 잔존할 수 밖에 없다는 건 한편으로 애석한 일이다.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선 이별을 감내해야 한다. 그저 화창한 볕 가운데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너머의 풍경처럼,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은 보존될 수 없는 현실에서 흐릿해지지만 그만큼 그리움이 깊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추억은 더 이상 예전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공유된다. 개인의 소유에서 공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부여하는 미술관의 기능성은 이처럼 이롭다. 하지만 한편으로 능동적인 삶의 터전에서 문화적 서사를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건 한편으로 씁쓸한 일이다. 물론 현명한 답을 얻기란 힘들다. 다만 그런 고민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과업이자 현대의 풍요를 미래로 전해주기 위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의 조각들>은 학술적인 동시에 예술적이며 현실적 고민 속에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그리는 작품이다. 또한 현실의 예술적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프랑스의 제도적 고민과 달리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성이 요구된다. 건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제도를 통해 인류의 유산을 보존하는 선진국의 가치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엄숙한 신앙적 금욕을 강요하는 가정의 속박으로부터 도피해 알록달록한 동화적 세계관을 남몰래 간직한 월 프라우드푸트(빌 밀러)는 순진하고 유약한 소년이다. 덕분에 윌은 짓궂은 동갑내기 리 카터(윌 폴터)에게 이용당하다 결국 아마추어 영화공모전을 노리는 리의 영화작업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우연히 보게 된 <람보 First blood>에 반한 윌은 자신을 ‘람보의 아들’이라 지칭하며 연기에 빠져들고 두 소년은 우정을 쌓아나간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로맨틱한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영화화했던 가스 제닝스의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이하, <판타스틱>)은 전작만큼이나 아기자기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미쉘 공드리를 연상시키는 수공예적인 특수효과나 순진한 취향은 기발하고 독특한 매력을 구사한다. 때때로 통제되지 않고 산만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거슬리긴 하지만 <판타스틱>은 종잡을 수 없는 유년기의 호기심처럼 건강한 영화다. 지나친 관심에 예속되거나 무관심에 지친 소년들은 연대와 갈등을 통해 각기 성장해나간다. <판타스틱>은 종잡을 수 없는 악동처럼 사연을 콜라주하지만 동심의 세계처럼 깊고 너른 순수를 채색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두려움을 심기 좋은 소재가 된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많은 작품들이 낯선 곳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을 서스펜스의 발원지로 삼는 것도 비슷한 연유다.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실제적 사건들이 서스펜스를 보좌하는 리얼리티의 배후로 지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 영화에 영감이 불어넣곤 한다. <실종>도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 영화다. ‘보성어부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김성홍 감독의 변처럼 <실종>은 장르적 외피를 걸치고 세상에 나와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주력하는 영화다.
의좋은 자매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핸드폰 동영상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자매에게 닥칠 비극을 더욱 짙게 체감하게 만드는 보색효과로 기능한다. <실종>은 극초반부터 살인마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분위기를 급속하게 냉각시킨다.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추리적 물음엔 일말의 관심이 없다. 장르적인 눈속임보단 캐릭터를 통해 발생하는 살기 그 자체를 장르적 중추로 장착한다. 감정적 대립을 이루는 캐릭터 관계를 명확히 노출시킨 뒤, 눈덩이처럼 불거지는 이야기를 굴려나간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서스펜스는 캐릭터 본연의 존재감 자체를 통해 발산된다. 판곤(문성근)은 관객의 심리 안에서 불안하게 예측하는 수순들을 여지없이 이루고 만다. 변태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살인마는 여자를 납치하고, 감금한 뒤, 변태적 성욕을 채우다 결국 살해한다. 그 모든 과정은 캐릭터의 끔찍한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묘사의 방식에 가깝다. 이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나 동정의 여지로부터 관객을 괴리시키기 위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공들이는 양식처럼 보인다. <실종>은 궁극적으로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한 악의를 품길 원하는 영화다. 인면수심의 싸이코패스, 더 넓게는 사회적인 악에 대한 적의를 품게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스크린에 살기를 가득 채우고 악의적인 눈빛으로 객석을 응시한다.
사악한 캐릭터의 본능을 묘사하는 전반부의 파괴력은 인정할만하다. 그것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건,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이건,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곤은 분명 끔찍하고 불쾌한 공기로 객석을 지배한다. 하지만 캐릭터의 잔혹한 본성이 밑천을 드러낸 전반부를 지나 반전의 기운이 담긴 후반부에 돌입하면 그 지배력이 서서히 쇠락한다. 캐릭터의 사악한 기운을 바탕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던 방식을 통해 전반부를 소진한 영화는 같은 양식으로 후반부를 운영하지만 기시감이 가득한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지배력이 떨어진다. 캐릭터가 발생시킨 파괴력의 효력이 떨어질 때 즈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별다른 장치가 발견되지 않는다. 특별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느슨해진 플롯의 여백을 채우는 건 지속적인 불쾌함뿐이다.
불쾌함은 <실종>의 본질적 의도이자 착시적 판단이다. <실종>은 스릴러라는 장르에 복무하기 보단 현실에 대한 언질을 위해 마련된 영화처럼 보인다. 실종된 동생 현아(전세홍)을 찾아나서는 현정(추자현)의 여정은 판곤에 대한 적의를 복수와 징벌로 매듭짓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다.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실종>은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공적 시스템이 개인의 복수를 부추기고 이를 방치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생시킨다. <실종>에서 실종된 여자를 찾아 뛰는 건 <추격자>와 매한가지로 경찰이 아닌 개인이다. 하지만 <실종>은 이런 문제의식을 하나의 단계로 삼을 뿐, 발전시킬 의도가 없다. 그보다도 오히려 개인의 복수를 정당화시키는 수순으로서 태도를 심화시킨다.
순간적인 복수심에 몰입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태도다. 제3자가 당사자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논한다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주장하는 건 다르다. <실종>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이다. 가치 판단의 주체가 될 관객의 몫을 영화가 낚아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덧붙게 되는 에필로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 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복수를 묘사하는 수순을 넘어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 <실종>은 덧없이 불순해진다. 제도적 태만이라는 공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하고 되려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며 이를 희석시킨다. 동시에 말미에 다다르면 흡사 희생자를 향한 조롱마저 감지된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두 아가씨가 나이 든 어부에게 배를 태워달라는 가운데 노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너머로 따라붙는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불순하다. 본래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태도가 감지된다. <실종>은 불순한 착취로 가득한 영화다. 낙후된 지방성의 이미지는 영화의 말미에 다다를 때면 원시적 기운의 악이 은둔하는 은신처 즈음으로 몰락하고 악랄한 남성을 묘사하기 위해 폭력에 움츠린 여성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그 와중에 복수를 정당화하고 공적 물음이 간과된다. 불쾌함의 근원은 단순히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현실의 악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의혹의 잔상이 강하다. 스릴러에 대한 장르적 접근을 배제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면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동시에 그것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이해의 접근 방식이라고 판단된 사안이라면 더욱 우려스럽다. 결국 스릴러적인 묘미도, 현실에 대한 환기도 실종된 채 일그러진 정치적 욕망만 발견된다. 배우들의 열연마저도 착취된 것마냥 안타깝다. 어쩌면 <실종>은 농촌 스릴러라 불리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살인의 추억>과 좋은 대조군이 될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무질서의 형태에 잠재된 질서를 뜻하는 카오스 이론은 <카오스>가 내거는 일종의 허세나 다름없다. 지성적 추리를 요구하는 영민한 영화처럼 포장됐지만 플롯에 빈틈이 많다. 뉴스와 신문 보도의 콜라주 시퀀스로 대략적인 전사를 개연한 뒤 그 사이에 숨겨진 복선을 뒤늦게 개방하는 양식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노리지만 그리 놀랄만한 결과물에 다다르지 못한다. 지능적인 대사를 던질 뿐 실상 지능적인 스토리텔링을 장만하지 못한다. 오히려 <카오스>에서 재미를 느낄만한 구석은 형사물의 관성이라 할만한 버디 무비로서의 자질이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다혈질 형사와 인텔리 출신이지만 육박전을 불사하는 신출내기의 조합은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새로운 터프가이의 양자로 떠오르는 제이슨 스태덤은 그 자체로 매력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카오스>는 제목과 달리 자신이 내건 질서보다도 무질서를 어필하는 오락영화다. 물론 그 전도된 매력을 큰 성과라고 말하기엔 무색한 게 사실이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문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는 매력적인 대학원생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를 통해 늦깎이 사랑에 들어선다. 자신의 감정이 원나잇 스탠드로 해소될만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야기하는 권력의 우열관계에서 아래 놓인 자신을 자각한다. 자신이 홀로 남게 될 때마다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소유욕이 강해진다. 그 불안은 결국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 감정을 좌초시키도록 스스로를 유도한다. <엘레지>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기품 있는 영상 속엔 우아한 관능적인 클로즈업은 우아한 곡선 위로 흐르고 그 여백마다 서정적인 격랑이 찬찬히 모이고 흩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야기되는 고독과 슬픔이 고요한 침묵을 통해 드러나고 상실과 죽음의 공포가 차분한 이미지로 다가와 머무른다. 뒤늦게 자신의 마음이 쓸쓸함으로 텅 비었음을 깨닫게 된 남자는 그 공허함을 통해 체감한 진심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일정한 범위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그저 반복적인 만남과 이별 속에서 살아가던 남자는 비로소 사랑을 갈망하고 정착한다. 감각적인 언어, 감미로운 멜로디, 감성적인 이미지, 감정적인 연기, <엘레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슬픔을 통해 허물어질 듯 삶을 이룬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하는 시도, 슬픔을 연주하는 악장도, 그 너머를 갈망할 때 더욱 애잔한 법이라는 걸 잘 아는 영화다.
스피아톤의 화면 너머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거구의 경찰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년은 심문 당하는 중이다. 거칠게 날아오는 손바닥이 얼굴을 강타하는 동시에 질문이 날아온다. “이름?”곧바로 교차된 화면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돈 다발이 떨어지는 욕조의 풍경이 낯설게 삽입된 후, 선명한 조명 아래 제 자리를 잡은 컬러톤의 화면 너머로 퀴즈쇼 사회자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년의 표정은 역시나 상기돼 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자말 말리끄(데브 파텔)가 2천만 루피(20 million rupees) 상금을 얻기 위해선 (퀴즈쇼에서) 단 한 문제만 통과하면 된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통과)했을까?” 4지 선다형의 질문. 그리고 상황은 다시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경찰의 구타와 퀴즈쇼의 긴장이 연속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동일한 질문이 서로 다른 상황을 관통하다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그 와중에 어떤 상념이 다시 끼어든다.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이 점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하나의 정답을 맞추면 상급 단계로 넘어가는 퀴즈쇼처럼 자말은 인생을 돌고 넘으며 높게 자리잡은 염원을 향해 나아간다. 비극적 테두리에서 시작되는 자말의 거칠고 험난한 인생사는 물음표를 통해 소환되고 정답처럼 나열된다. 폭력이 지배하는 원초적 기운의 사회에서 착취와 유기에 내몰린 자말은 잇따른 상실을 건너며 상흔을 품고 성장해 나아간다. 자말을 성장시킨 수많은 정답들은 그가 염원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건 그저 순리적인 과정들에 불과하다. 모든 우연은 필연을 이루고 끝내 운명으로 명명된다. 모든 지나간 시간은 운명이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이하, <슬럼독>)는 삶을 가로막고 선 수많은 물음표 사이로 전진해나가는 자말의 인생을 통해 풀어나가는 퀴즈쇼다. 물음이 던져지면 과거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 놓인 정답이 드러난다. 현재의 물음을 통해 소환되는 과거는 관객에게 일종의 퍼즐과 같다. 관객은 퀴즈쇼를 통해 자말의 서사를 조립하고 그 운명의 조각들을 수집해나간다.
<슬럼독>은 분명 운명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는 운명에 순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운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운명을 이야기한다. 배반과 상실의 경험을 덧칠해나가던 자말의 인생은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매번 역류를 시도한다. 수많은 물음표가 향하는 정답을 수집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리를 뒤따르는 방식이 아니다. 단지 그 정답이 드러난 후에야 뒤돌아 확인하게 되는 지난 과정들이 마치 이미 준비된 운명처럼 인식될 뿐이다. 퀴즈쇼는 자말의 운명을 되짚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점차 고단위의 문제들이 출제될수록 자말은 평정심을 찾아간다. 경험의 반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에 스스로 익숙해져 간다. 문제의 간극을 파고드는 과거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필연의 방식으로 현재를 재구성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마다 익숙한 경험의 실마리를 통해 발견된 정답 역시 지나갈 운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말은 자신의 염원으로부터 주춤하거나 때때로 물러서야 하는 지난 운명들을 배반하듯 이내 전진한다.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라는 물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치 않다. 그저 라띠카(프리다 핀토)를 만나는 것이 그가 염원하는 유일한 운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염원을 운명으로 개척하기 위해 자말은 답을 고른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그 지난한 여정은 <슬럼독>의 피날레를 완성하기 위한 도움닫기와 같다. <슬럼독>은 인도라는 특별한 국적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다. 운명을 뒤쫓아 달리는 자말의 서사는 사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절반 정도는 되감기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기 위해 마련된 것과 다름없다. 퀴즈쇼와 심문의 빠른 교차를 통해 출발하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오가며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돌입하기 위해 기지개를 편다. 이미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둔 자말의 현재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사실상 이미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놓인 운명들을 관객들이 복기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운명에 대한 설득력을 마련하는 셈이다. 결국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위해 복무하는 운명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에게 오늘의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경험의 예시이자 뒤따를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운명을 이룬다.
각색을 맡은 사이몬 뷰포이는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가 집필한 ‘Q&A’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슬럼독>을 완성했다. 대니 보일은 이에 완전한 이미지를 덧씌워 스크린에 투영해냈다. <트레인스포팅>만큼이나 혈기왕성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스토리는 거칠고 성기지만 유쾌하고 끝내 낙관적이다. <슬럼독>은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완성된 발리우드 감성의 영화다. 원시성이 잔존한 인도의 부조리한 현대적 풍경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지만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최대한 배제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필터링되지 않은 온전한 이국의 풍경은 생경함을 뛰어넘어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한 이미지로 연출됐다. <슬럼독>은 이국적 세계의 관습과 양식을 충실히 보존하는 겸손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현지의 양식에 입각한 방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 특성을 습득하고자 하는 열의를 느끼게 한다. 지정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할리우드의 글로벌 전략은 분명 주목할만한 태도다. 올해 아카데미가 <슬럼독>을 지원 사격한 것 역시 그런 흐름 자체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큰 존중을 얻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년은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달려 결국 운명을 따라잡는다. 그 운명 속엔 자말을 무너뜨리기 좋은 비극적 기제들이 넘실거리지만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염원을 쫓아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자말의 약속은 좌절을 건너 거대한 기적을 이룬다. 그 염원은 개인을 넘어 온 국민들의 염원으로 발전하고 이내 기적처럼 완성된다. <슬럼독>은 우연이 한데 모여 필연을 이루는 과정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 끝에 이뤄지는 결말은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으로 완성된 운명이다. 그 모든 건 애초에 운명이다. 그 운명을 납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모든 뒤쳐진 순간들은 이미 운명이 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분명 어떤 선택을 통해서 결정된다. <슬럼독>은 그 운명적 선택을 설득하는 흥미로운 사연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통해 <슬럼독>을 본다면 그 역시도 운명이다. 물론 그 운명 역시 어떤 선택을 통해 이뤄진 것이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볼’을 영화화한다니! 뒷감당을 생각한다면 분명 용기가 가상한 기획이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이하, <드래곤볼>)은 원작 팬들의 심금을 울릴만한 배반의 향연으로 이뤄졌다. 원작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어떤 독자라면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손오공(저스틴 채트윈)의 모습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나의 드래곤볼은 이렇지 않아, 라며 스크린을 향해 ‘에네르기파’라도 쏘고 싶은 애증이 한데 모여 ‘원기옥’을 띄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어떤 면에서는 영리한 선택이다. ‘드래곤볼’의 본래 자태를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집념은 만화와 영화의 괴리감을 무시하는 무지로 판명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드래곤볼>은 코스프레 무비로 스스로를 몰락시키지 않겠다는 듯이 만화적 세계를 거침없이 허물어 나간다.
그러나 그 특수한 세계관을 변주한 자신감이 특별한 묘미로 연동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색한 일이다. ‘기’를 아느냐는 직설적 대사로서 그 세계관을 일축하려는 대사는 흡사 ‘도’를 아십니까, 류의 질문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무국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방대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할리우드식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적 철학으로 채색되고 있는 건 심히 유감이다. 내가 아는 ‘손오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의 손오공이, 그리고 그 세계가 본래의 형태를 훼손할만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까닭에서 <드래곤볼>은 유감스럽다. ‘드래곤볼’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야심 자체가 7성구를 모아 신룡을 소환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드래곤볼>을 보면 그렇다. 엔딩 크레딧 너머의 영상을 통해 발견되는 후속에 대한 암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착각의 늪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든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와 스미스의 수중 격투 장면을 통해 ‘드래곤볼’의 실사버전을 연상했던 지난 한 때의 기대감이 서러울 지경이다.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