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행복합니다>가 9일 오후 2시,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소름><청연>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의 세 번째 작품 <나는 행복합니다>는 올해 타계한 이청준 작가의 단편 소설 ‘조만득 씨’를 각색한 작품으로 현빈과 이보영이 주연을 맡았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지리멸렬한 삶을 다루고 있다.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나는 행복합니다>는 환자로 입원한 만수(현빈)와 정신병동의 간호사로 재직 중인 수간호사 수경(이보영)의 사연을 평행처럼 진행시키는데 두 인물은 각자 미쳤거나 미쳐가기 직전의 상태에 몰려있다. 두 인물의 삶은 대칭을 이루듯 펼쳐지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모를 모시는 만수와 암투병중인 노부를 모시는 수경의 삶은 경제적 난국과 그로 인한 연애의 파국을 경험한다는 측면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지난한 삶을 거쳐 과대망상증이란 정신질환자로 규정된 수만과 달리 미쳐버리기 직전에 몰렸을 뿐, 아직 질환자로 판명되지 않은 수경은 정상인이다. 결국 상황 이후의 수만을 상황 이전의 수경이 목격하고 관찰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동병상련은 서로를 보좌한다. 각자가 상대의 처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된 의식 세계로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통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영화는 고단한 수경의 현실을 그만큼이나 고단했던 수만의 과거와 종종 대칭 시키는 동시에 수만의 현실과 대비시키는데 그것은 수경의 비극적 현실의 무게감을 측정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수경으로 하여금 어떤 예정될 것만 같은 미래를 경계하게 만든다. 수만의 현실과 과거를 순차적으로 진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경의 현실이 미묘하게 맞물려 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떤 연대를 모색하거나 노골적인 교감을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은 적절히 동떨어진 위치에서 상대를 관찰하거나 적절한 거리감만큼 서로를 탐색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낙관을 배제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속될 비극의 굴레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희망을 자아낸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희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윤종찬 감독의 주관이 개입한 측면이기도 하거니와 그 결과물의 주제 양식이 그것을 적절하게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이들의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허구지만 그것이 바탕으로 두른 세계관은 결코 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을 예감하게 한다. 종이에 써 갈긴 만수의 수표는 형태적으로 우리가 탐닉하는 지폐와 별다를 바 없다. 비정상인에게 수표로 통용되는 것이 정상인의 눈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통용되는 돈의 가치, 더 나아가서는 재화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역설과도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행복합니다>는 어쩌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역설적 리얼리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처럼 생존 그 자체를 희망이라 붙드는 영화는 역설적인 제목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잴 수 없는 인간적 의지의 표상 같아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축제의 마지막 날, 그 지리멸렬한 비극을 대면해야 하는 어떤 관객들의 상황도 역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이 시대에서 점차 간과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는 희망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축제를 위한 특별한 마침표가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차를 몰고 가던 진(오다기리 죠)은 차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치려다 사람을 칠뻔한 상황에서 잠에서 깬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그 현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랍게도 현장엔 진짜 자신이 꿈 속에서 들이받은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의 용의자는 집에서 자고 있던 란(이나영)이다.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지만 차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무인 카메라에 찍힌 사진마저도 본인이 확실하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는 잠든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기이하게 뒤틀린다. 진과 란은 배타적인 성별의 육체로 구분된 자웅동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지만 진과 란은 그 속세의 진리로부터 타자화된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너무나도 생생한 진의 꿈은 란의 몽유적 현실로 도래한다. 진과 란이 나란히 잠들게 되면 진이 꿈을 꾸고 란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꿈과 현실은 각자에게 역설을 부여한다. 진은 자신의 꿈을 통해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박지아)을 찾아가지만 그때마다 란은 자신이 혐오하는 옛 연인(김태현)에게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는 잊지 못한 사람을 매번 꿈으로 찾아가지만 여자는 지우고 싶은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대면하고 돌아온다. 진의 가상적 행복은 란의 현실적 불행으로 중첩된다. 마치 이란성 쌍생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사(장미희)의 진단처럼 두 사람의 육체는 하나의 자아를 나눠 담은 일종의 경계와 같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白黑同色). 두 사람의 분리된 삶은 별개의 자아가 꿈꾸는 배반적 욕망이다. 진과 란은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배반적인 감정의 형태로 구현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사랑이란 감정의 양극단에서 진과 란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감싼다. 하나의 욕망이 두 개의 극단적 자아로 분리될 때 그 이룰 수 없는 감정은 두 개의 욕망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개의 자아는 서로를 배반하는 형태로 동떨어지려 하지만 결국 자석의 다른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운명으로 점철된다. 결국 진과 란은 동일한 감정이 형성시킨 극단의 양태로 물화되지만 비로소 하나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비몽>은 김기덕 감독의 자의식이 해부한 로맨스의 추상적 견해, 혹은 그로부터 건축된 로맨스의 피상적 추론이다.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미지는 때때로 그 안으로 매몰되듯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의지로 상징적 의도들을 일관된 양식으로 건축해나간다. 남자와 여자, 꿈과 현실, 그리움과 혐오, 재회와 이별, 삶과 죽음. <비몽>에서는 대립적인 형태로 구현된 심리적 잠재태들이 구체적인 양태로 나열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개로 양분된 육체적 자아로서 내면의 너비를 구체화한다. 하나의 감정을 완성하는 양면의 육체가 서로를 향할 때, 그 지난한 사랑도 완전해진다. 잠을 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듯, 꿈과 현실로 양분된 극단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킨 후에야 완벽하게 교감한다. <비몽>은 극단적인 수난을 통해 정신적인 변태를 거듭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양식적 지론이 부분적으로 날것처럼 복원된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적 피탈(避脫)의 경지를 꿈꾸는 열반의 지향점을 그린다. 상징적인 욕망들로부터 구현된 화법은 여전히 김기덕으로 수렴하는 <비몽>은 개인적인 의식에 충실한 만큼 사적인 사유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칭구도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상징성은 극단적인 구체화를 거쳐 우아한 시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궁극적으로 잿빛과 같이 출발되던 세계관은 고요하게 투명해진다. <비몽>은 흑백의 조화처럼 이상적인 공존을 꿈꾸고, 현실로 투영한다. 그 안에서, 얇은 삶 하이얀 죽음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현대인은 수많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포위된 채 살아가고 있다. 길거리에 설치된 무인 카메라는 시종일관 사람들을 감시하고 휴대폰의 전파는 개개인의 동선을 끊임없이 추적한다.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에서 개인의 정보는 검색 한번으로도 수십 차례에 걸쳐 노출된다. 편의를 위해 개발한 자동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눈과 귀에 노출된 채 잠재된 관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글 아이>는 그 수많은 눈과 귀에 둘러싸인 인간들의 편의가 통제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위협의 메시지를 담아낸 액션 스릴러를 표방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제리(샤이아 라보프)는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75만 달러와 자신의 방으로 배송된 각종 첨단 무기들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제리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방에서 달아나라고 경고하고 이윽고 FBI가 쳐들어와 테러용의자로 제리를 체포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레이첼(미쉘 모나한)도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연주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 아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레이첼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평범한 청년과 평범한 싱글맘은 그렇게 미궁 속을 헤매듯 정체 모를 음모의 게임 위를 날뛰는 두 개의 말이 된다.
<디스터비아>를 통해 히치콕의 <이창>을 하이틴 스릴러로 변주했던 D.J 카루소 감독은 전작에서 출연했던 샤이아 라보프와 함께 또 한번 히치콕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이글 아이>는 누명 쓴 남자의 광활한 도주를 그려낸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모티브로 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외부적 형태와 달리 내부적 야심이 좀 더 광활하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주제 의식은 현대SF무비나 근래 액션 블록버스터들에서 줄곧 발견되고 제기되던 일원화된 정보화 시대의 맹점에 대한 경고와 동일하다. 부분적인 이미지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영화의 목록만 열거해도 상당하다. <본 얼티메이텀>이나 <다이하드 4.0>과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차용되던 무인화 정보 시스템의 폐해를 비롯해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의 디스토피아 세계관, 더 멀리 나아가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어떤 대결적 구도의 세계관-직접적인 스포일러라 언급을 피함-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거창한 의식구조는 황망한 내러티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음모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작하고 신호 체계를 조종하는 음모의 주체는 가히 절대자에 가까운 구도로 음모의 숙주들을 내몰지만 정작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식상해진다. 문제는 단지 그것이 식상함으로 내려앉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구현했던 절대적 능력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디지털 신호 체계를 장악한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과감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부터 <이글 아이>는 현저히 무뎌진다. 종래엔 그 음모에 귀속된 인물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글 아이>는 제공권의 야심에 비해 빈틈 많은 전술을 구사한다. 흥미로운 초반설정은 호기심의 제공권을 장악하지만 지나치게 부풀린 궁금증에 비해 결정력이 부실하다. 초현실적 기대감이 비약적 논리로 몰락하는 양상이다. 물론 초반의 카체이싱을 비롯해 킬링타임용 볼거리는 틈틈이 제공된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정권교체의 뉘앙스를 풍기는 정치적 텍스트를 은밀하게 제시하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그마저도 일종의 허세로 치부 당할 여지가 농후해졌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제 각각의 방식의 차이로 소통된다. 긴 연애는 실연이 되었고 갑작스러운 로맨스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현정(문소리)은 실연의 상처에서 달아나듯 상훈(김태우)의 마음으로 도피했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었다고 판단하지만 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눈 가리고 아웅’임을 드러낸다. 현정은 상훈과의 결혼생활에 헌신적이지만 첫 만남 당시의 애틋함은 지속적 일상에서 샘솟는 권태로 희석되고 점차 피해의식마저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민석(이선균)은 봉인된 과거의 그리움을 불쑥 해방시킨다. 풍화되지 못하고 시간에 덮여있던 과거의 연애담은 결혼생활의 권태를 더욱 지겹게 각성시킨다.
현정이 갑작스럽게 결혼을 이루고자 했던 건 실연의 상처에서 기인한 도피욕구이자 충만했던 애정의 결핍이 이간질한 충동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 순간적인 욕구로 메운 욕망의 유효기간이 길리 없다. 정리되지 못하고 위장된 본심은 짧은 세월의 풍화작용만으로도 일시적인 행복의 얕은 밑천이 닳아 없어질 때쯤 다시 본 모습을 드러낸다. 현정은 결국 타성적인 감정에 이끌린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능동적인 태도를 구사하고자 한다. 이별은 민석의 통고에 의한 것이었고 결혼도 상훈의 구애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제 스스로 이별을 고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결심을 도모하는 것도 그녀다. 스스로 자신의 내면적 변화를 주도하고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는 현정의 일련의 과정에서 그녀가 단순히 어느 한 개인으로서가 아닌 여성이라는 전체적 집단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음이 시사된다.
현정은 민석과 상훈에게 각각 사과한다. 그 사과의 어휘는 동일하지만 의미는 반대로 향한다. 민석에게 보내는 사과는 자신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단절을 표방하며 그와 반대로 상훈에게는 스스로 종결하려 했던 상대와 다시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일말의 의지를 전한다. 이는 원래 자신이 먼저 들어야 했던 사과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거나 미처 하지 못한 뒤늦은 대답과도 같다. 갑작스러운 이별통고를 전한 민석의 사과에 뒤늦게 응답함으로써 그 시절에 얻은 상처로부터 완벽히 탈피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거듭남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비윤리적 죄책감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적 미련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로 표방된다. 결국 상훈에게 일련의 사실을 고백하며 남기는 사과는 도피했던 감정이 재정립되어 새롭게 거듭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현정과 상훈, 민석의 삼각구도를 기본골자로 하는 <사과>는 한편으로 현정의 가족을 응시하기도 한다. 명예퇴직으로 돈벌이가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도맡고 있다. 현정의 어머니는 현정이 회사를 그만 두고 상훈을 따라 구미로 내려가겠다고 할 때, 후에 서울로 올라와 출산하고 회사를 다니다 상훈과 이혼하겠다고 선언할 때, 현정에게 집안사정을 언급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듯 현정에게 반대한다. 이는 1세대 가정이 겪는 내부적 진통이 2세대로 옮겨가는 구도로 묘사되는데 실직된 아버지와 회사를 그만두고 실직의 형태로 묘사되는 상훈이 유사하고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어머니는 역시 현정과 유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승적 굴레에서 탈피를 꿈꾸는 현정을 막고 돌려세우는 건 어머니인데 이는 단순히 개인의 피해의식을 뛰어넘어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구성원으로써의 의도로 여겨진다. 결국 그녀가 아버지의 안경을 찾으며 어머니에 대한 책망과 함께 눈물 리는 건 그런 아이러니한 모순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적 방편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단순히 타인의 삶에서 소비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삶을 소비하는 주체적 대상으로써의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각성과도 같다. 결혼이라는 행위가 여성으로써 의무적인 통과의례가 아닌 삶의 수단이 되는 행위이자 중요한 방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는 결국 여자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는다. 단순히 여권의 신장이라는 안티테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통해 깨우쳐야 할 권리적 분위기의 확장을 말이다.
사과란 자신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행위다. 그것은 흔히 상대방과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관계의 결말을 위해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 관계를 종착시키기 위한 선고는 관계 지속에 일정한 간격을 형성시켜 이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벌려나가 종래엔 끊고자 함이다. 사과는 그렇게 관계의 변화를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밀고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제각각 사용된다. <사과>는 사과라는 행위를 통해 변모하는 어느 여성의 심리적 양상을 살피고 그와 함께 변해가는 인식의 상태를 관찰한다. 그 짧은 사과 한마디에 달라진 여인의 삶은 결국 여성의 주체적 삶과 연계된 고민을 제기한다. 남성이 차지한 권위적인 성 역할의 궤도를 배회하던 여성이 주체적으로 그 궤도에 진입하는 변화된 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스스로 고민할만한 과제를 부여한다. 확장된 삶의 기회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과 간과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해 사유한다. 결국 현정의 품 안에서 잠드는 상훈처럼 단절보다는 회유와 용서로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고 지속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능동적인 변화에서 가능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의무가 아닌 권리임을 깨닫는 것. 그 주체로써의 의식의 성장을 말이다. <사과>는 어느 여성의 주체적인 성장통이다.
수출만이 살 길이다. (베트남에서) 이겨서 돌아오라. 대통령 각하 만세. 새마을 운동. 어느 시대를 추억하는 용어들이 이처럼 삭막한 건 그 시절의 낭만이 철저히 억압됐기 때문이다. 통금과 단속이 난무하던 1970년대 유신의 시대에서 낭만은 잡초가 아니고서야 싹을 피우지도, 뿌리를 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고 70>은 그 어두운 70년대에 음지에서 잡초처럼 자라났던 대한민국의 1세대 밴드들, 더 나아가 시끄러운 밤을 열망했던 그 시절 청춘을 위한 일종의 위령제다.
<고고70>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 즉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픽션이다. 야간통행금지로 밤이 조용하던 시절, 밤이 ‘좀 더 시끄러웠으면 좋겠다’는 병욱이 기획한 호텔 지하에서의 밤샘영업공연은 70년대 고고 열풍을 일으킨 실제적 사건이었고, 그 실제적 사건을 주도한 ‘데블스’ 역시 실제로 그 시절에 존재하던 밴드였다. 전작인 <사생결단>에서 치열한 취재를 통해 부산 뒷골목에서 암암리에 이뤄지는 마약거래의 실상을 영화에 그려낸 최호 감독은 <고고70>에서도 시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늦은 밤 고고클럽에 모인 청춘남녀가 밴드의 사운드에 맞춰 고고 댄스에 열중하는 광경은 그 시절의 풍속도가 된다. 시대에 갇힌 낭만의 유일한 출구는 어두운 밤에 울려 퍼지는 통금의 사이렌에 갇힌 지하실로 통한다. 갇혀버린 청춘남녀의 낭만이 지하에 자리잡은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열기를 더할 때 70년대는 가장 뜨거운 시절로 재현된다.
하지만 역시 암울한 시대에서 쿨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퇴폐의 온상으로 규정 당한 고고클럽은 폐쇄되고 ‘몰지각한 땐스광은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내려진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도 더욱 심해진다. 종래엔 퇴폐의 아이콘인 밴드멤버들 또한 형사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한다. 밤은 다시 조용해진다. 멤버의 죽음을 통해 구체화된 불화로 해체의 수순을 밟았던 어제의 영웅들이 고초의 현장에서 다시 대면한다. 무대 위에서 열정을 노래하고 낭만을 외치던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피멍을 새긴다. 경제 부흥이란 마초적 슬로건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낭만을 노래하는 청춘은 뭇매를 맞고 비틀거린다. 썩어빠진 정신을 차리게 만들겠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그 매질은 낭만에 잠재된 자유의지를 꺾기 위한 방편이다.
결국 이 영화는 그 모든 거짓된 논리에 구속되어 청춘을 상실한 70년대의 행진가다. <고고70>의 하이라이트이자 영화에서 발생한 카타르시스의 배출구 역할을 하는 마지막 콘서트 씬은 가히 폭발적이다. 총 10대의 카메라와 국내 굴지의 촬영감독들을 동원했다는 이 문제적 장면은 생생한 음의 질감을 형체로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평할만한 성과다. 무엇보다도 조승우와 함께 데블스의 멤버를 연기하는 이들이 실제 밴드와 뮤지컬 배우로서 경력을 자랑하는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란 점은 이 영화의 무대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구심점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다소 연출적인 흐름이 덜컹거리는 지점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고고70>은 나름대로 음악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시대를 사유하고 낭만의 혈기를 추스르는데 성공한다. 하수상하던 시절에도 낭만은 그렇게 잡초처럼 자라났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번 더 물어야 한다.
요즘의 낭만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가? 시끄러운 밤을 되찾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노래하는가? 최루탄을 씻어내는 영화 속 소방호스의 물세례와 달리 지난밤 물대포에 맞선 청춘과 노래는 함께 했을까? 오늘날 유통되는 낭만은 과연 진심을 소비하고 있는가? 원어도 모르고 외쳤던 그 당시 ‘쏘울’은 투박하지만 자유를 갈망했다. 오늘날 매끄럽게 포장된 노래들은 진정 '소울'을 담고 있나? 지금 자유로운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음악을 소비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며 저항하기 보단 생존의 가능성을 먼저 본능처럼 익힌다.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 살아가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들 역시 그 환경에 천착해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관해질 수 없는 이분법의 운명론에 밀착한 인물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이름없는 민중은 옷을 갈아입듯 자연스레 그 시대적 변화에 편입됐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일제 치하의 권력에 밀착해 풍요로운 삶을 타전하는 이들이 존재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시대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두 부류의 극점 같은 존재들이 일부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모던보이>는 그 시대에 대한, 혹은 그 시대에 함몰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인물에게 좀 더 복잡한 감정적 갈등을 부여함으로써 결말부를 철저하게 변주했다. 원작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변주된 결말부를 위해 캐릭터도 재단됐다. 특히 원작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신스케(김남길)나 원작에 비해 내면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난실(김혜수)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패망한 조국의 역사에 심드렁하듯 조선총독부 1급서기의 직책을 수행하는 경성의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로맨스를 향해 사력을 다하지만 원작과 달리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감정선을 고수한다. 오로지 낭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로맨스에 취해 인생 전반을 소모하는 열혈순정파로 묘사된다.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해명(박해일)과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묘연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은 1930년 경성이란 시대상 속에서 개인과 시대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탐닉한다. 오로지 로맨스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해명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위해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의 순정마저 악용하는 조난실 사이엔 분명 시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서로를 경계하듯 자리하고 있다. <모던보이>는 원작과 달리 냉소주의가 아닌 온정주의로서 개인을 조명한다. 조난실을 사모하던 이해명은 자신의 순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려 하고 개인의 숨겨진 욕구를 은밀히 드러내는 조난실은 끝내 자신이 이뤄내야 할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폭파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는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짙은 비애로 보호색을 띤 시대적 애도다. 단지 그것이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상호적인 시선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변모시키거나 보완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스토리의 폭을 증축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출발점을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는 과거에 두고 이해명과 조난실의 인연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문장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활용하기에 불리하단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해법을 찾았다고 할만한 대목이다. 다만 그 이후 기본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골격으로 둔 사연의 전환 과정이 종종 불완전한 문장처럼 단절된 맥락의 어색함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잠재된 텍스트의 여백을 이미지가 갈무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덕분에 <모던보이>는 전체적으로 원작이 그리는 굵직한 이미지를 연결하며 내러티브의 선을 이어가지만 종종 매끄럽지 못한 개연성을 드러낸다.
<모던보이>에서 크게 눈에 띠는 건 구시대적 바탕 위로 근대화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1930년대 경성의 기이한 풍경이다.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속에서 자주적인 풍속이 촌스러움으로 몰락하던 경성의 모더니티엔 이미지가 존재할 뿐 사상이 없다. 근대화로 위장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야욕이 1930년대 경성을 기이한 풍경으로 재건한다. <모던보이>는 고증에 입각해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명동성당, 숭례문과 같은 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전시함은 물론 CG와 세트를 동원해 스크린에 옮겨 담은 1930년대 경성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볼거리다.
궁극적으로 <모던보이>의 야심은 그 변주된 결말에 자리잡고 있다. <모던보이>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를 사이에 둔 줄타기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소설의 비정치적인 냉소주의를 결단력 있게 비튼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이해명은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에서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나. 그건 사랑마저도냉소하게 만드는시대라는 운명이다. 마지막까지 낭만에 목숨을 건 모던보이의 비정치적 태도는 마지막 로맨스의 가시는 길을 더욱 처연하게 물들인다. 실로 의미 있는 결말이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시대가 그랬다. 어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씨네서울)
동구권 이주노동자를 영국 회사에 중계해주는 직업소개소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는 싱글맘 앤지(키얼스턴 워레잉)는 상사의 성희롱에 발끈한 뒤, 납득할 수 없는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자신의 룸메이트 로즈(줄리엣 엘리스)에게 이런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던 앤지는 그녀에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제안하고 동업을 권한다. 그녀가 제안한 사업 아이템이란 무허가 불법 직업소개소를 차리는 것인데 로즈는 이에 불안해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솔깃해 결국 제안을 수락한다. 결국 ‘앤지와 로즈의 레인보우 인력소개소(recruitment)’를 설립한 앤지와 로즈는 각각 오토바이와 웹사이트를 이용해 기동성 있는 홍보와 신속하고 민첩한 대응, 그리고 미인계까지 동원하며 시장을 확보해나간다. 하지만 자신들이 중계해준 공장에서 직원들의 임금을 체불하기 시작하며 앤지와 로즈는 점차 곤혹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앤지와 로즈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놓인 다리다. 자본가의 시선에서는 노동자에 해당하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본가의 편에 선 일차적 고용주다. 영화는 계약직 노동자였던 앤지가 자본의 순환 구조를 파악한 뒤 자본가의 위치를 점해가는 과정을 면밀히 살핀다. 자본가와 노동가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구체화시키고 그 구조적 문제를 표면으로 끌어낸다. 계약직 노동자들을 공장에 취업 알선해줌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수료를 얻고 계약금을 받지만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불법영업으로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고 고용보험료마저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불법적인 이익을 착취한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겪었던 어려움은 사업의 확장을 고려할 정도로 무마된다. 나이가 서른인데 크레디트(credit)로 연명한다며 자신의 삶을 하소연하던 앤지는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공장에서 임금을 체불당한 이주노동자들의 성화가 자신에게 넘어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만큼은 착실히 수행한다.
<자유로운 세계>는 결코 순탄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는 이 세계의 기이한 순환 구조에 의문을 던진다. 일을 해도 돈을 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수입은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이 세계의 실용주의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마치 자본의 수하로 고용 당한 듯한 인간들의 세태는 불행 속에서 쳇바퀴를 돌 듯 고단하고 피로하다. 계약직 사원에서 직업소개소의 사업가로 변신한 앤지는 고용자에서 고용주로 탈바꿈함으로써 더 많은 수익을 얻고 지위적 여유를 얻었음에도 더욱 불안감에 시달리고 각박해진다. 피라미드처럼 세워진 자본의 유통 구조에서 더 높은 자리를 점할수록 자본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다.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의 괴리감은 그 욕망의 방향성이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돈이 지배하는 금권만능주의 시대에서 자유란 말 그대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논하는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경쟁의 합법적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껍데기의 언어로 몰락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인색함이 속살을 드러낸다. 입 좀 닥치고 고개 숙이는 노동자들을 원하는 자본가와 일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경제적 생산성에 종속 당하고 자본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궁핍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풍경이다.
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영국으로부터 자유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던 아일랜드인의 내부적 갈등과 역사적 소요를 드라마틱한 연출력으로 승화시킨 켄 로치 감독은 <자유로운 세계>역시 탁월한 연출을 통해 직설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보편적인 예술적 언어로 완성시킨다. <랜드 앤 프리덤> <빵과 장미>처럼 억압당하는 피지배 계층의 정당한 의지에 대한 옹호와 지지를 보내던 그는 <자유로운 세계>를 통해 피지배자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그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생시키며 부정한 가치관을 합리화시키는 세계관의 실체를 관찰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인간적인 윤리관보다 실리적 비윤리를 중시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이 어떤 구조로 정착되고 있는가를 살핀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세계의 모순적 합리화는 88만원 세대의 비정규직 문제와 기륭전자의 끝없는 투쟁을 주변부에 두고서도 묵묵히 체계를 유지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도 직결된 사안이다. 부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하고 그 방식은 비윤리적인 노동 착취를 통해서 빈번하게 이뤄진다. <자유로운 세계>는 그 불평등한 자본의 논리로 착취되는 자유의 허상을 이야기한다. 대기업의 횡포와 불법적인 착취는 국가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포장되어 면죄부를 얻고 그 아래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정당한 노동의 의무로 몰락한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진실이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개개인의 기이한 환상이 거대한 모순을 정상적인 것처럼 끌고 간다. 결국 모든 사람이 부자아빠가 될 수 없는, 혹은 부자아빠를 둘 수 없는 현실에서 다수는 괴롭고 일부 그 세계에서 착취에 성공한 부자아빠들과 그의 가족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조차도 더 많은 것을 차지하거나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때론 불안에 떤다. 개개인들이 자본에 의한 지배 논리를 암묵적으로 수긍하는 시스템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그 시스템에 종속당한 대다수는 불행의 쳇바퀴를 고단하게 돌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영화보다도 더욱 거대한 모순을 관찰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매트릭스다. 그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답은 없다. <자유로운 세계>는 결국 그 허세 같은 망상을 지적하는 역설의 훈계다.
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총기난사사건 15주년 추도식을 예고하는 힐뷰고등학교 교정 앞에 선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인 블룸>은 15년 전 다이애나가 그 급박한 기로에 닿기까지의 이전에 해당하는 과거완료진행형의 대과거시제와 15년 후 그 상황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현재진행형의 현재시제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다이애나의 잃어버린 15년은 흔적이 없다. 그녀에겐 단지 15년 전과 15년 후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통해 삭막한 부동산 경제 법칙에 고립되고 잠식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적 갈망을 포착했던 바딤 페럴만 감독의 <인 블룸>은 또 다른 인간의 갈망을 그린다.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총격사건, 더 앞서서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이 떠오른다.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면 그라운드 제로 앞에 묵념하는 미국인들의 포스트 9.11 증후군의 잔상이 어린다. 하지만 <인 블룸>에서 그런 구체적인 현실적 예시문을 언급하는 건 그리 썩 좋은 일이 아니다. <인 블룸>은 현실을 명징한 영화적 소환이라기보단 어느 가상을 통해 고찰하는 현상적 신비다.
현재와 과거가 반복되는 영화적 서술형태는 단지 서사적인 거리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평행적인 서사는 실마리를 알 수 없는 15년 간격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기거나 서로 간에 꼬리를 물 듯 연계되는 속성을 지닌다. 마치 그건 어떤 염원에서 비롯된 염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 15년 전 그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TV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다이애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거나 혹은 현실의 타인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일련의 태도나 행위를 목격한다. 또한 현실의 다이애나가 겪는 착시와 환각은 묘하게 과거와 연동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씬도 긴밀하게 교차되곤 한다.
영화의 끝은 시작과 같다. 그 끝은 시작의 평온함과 달리 커다란 울림을 동반한다. 15년 전과 15년 후의 균형을 유지하던 그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때, 우아하면서도 지독하게 아련하여 서글픈 여운이 슬프고도 고요하게 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기에 심정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실감난다. 죽음 앞에 직면한 자의 삶의 요구가 간절하게 적시된다. 찰나가 영원으로 번져나가고 정체가 모호하던 현실의 환각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과거를 명확하게 비춘다. 일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그 일생의 끝은 너무도 길다. 삶은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지독하게 간절해진다. ‘만약’은 유령과도 같은 단어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추모한다. <인 블룸>은 그 유령 같은 시간을 처연한 신비에 담아 고찰한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에도 꽃은 피고 진다. 고요한 세상 안에서 삶과 죽음은 찰나를 오가며 교차된다. 삶은 죽음 앞에서 더욱 빨갛게 피어오른다.
인간과 요정이 공존하던 시절, 인간의 지배적 욕망은 요정계를 자극하고 결국 두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에 맞선 요정계의 왕 발로는 황금으로 만든 불사의 군대, ‘골든 아미(Golden Army)’를 만들어 전투에 투입하고 전장은 살육의 바다가 된다. 요정계의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살육에 대한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골든 아미를 봉인한 뒤, 인간과 불가침 휴전 협정을 맺는다. 유년 시절 헬보이가 들었던 그 동화의 후일담은 결국 헬보이(론 펄먼)가 대면할 현실이 된다. 지옥의 열쇠가 될 운명을 거부한 붉은 악마는 골든 아미를 찾아 떠나는 어드벤처 미션 <헬보이2: 골든 아미>(이하, <헬보이2>)를 통해 본격적인 2차 성징에 돌입한다.
세상을 구원했다는 칭송은 헬보이(론 펄먼)를 심드렁하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캔맥주와 시가, 고양이, 그리고 리즈(셀마 블레어)를 위해 세상을 보전했다고 한다면 모를까. 지옥을 여는 열쇠라는 육중한 오른손과 거칠게 깎아낸 이마의 뿔의 흔적, 붉게 물든 긴 꼬리, 지옥에서 온 헬보이는 자신의 선천적 운명과 후천적 제약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미성숙한 자의식을 지닌 안티히어로다. 헬보이는 선과 악의 패러다임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강요를 거부했을 뿐이다. 첫 번째 강요를 거부한 헬보이에게 현실은 또 다른 강요를 부여한다. 초자연현상연구사무국(BPRD)의 해결사이자 문제아인 헬보이는 자신을 아들처럼 여기던 트레버 브룸 박사(존 허트)가 (전작에서) 죽은 후, 조직의 통제를 따돌리고 노골적으로 일탈을 즐기곤 한다. 그 와중에 리즈와의 갈등도 심해진다.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적이던 헬보이는 TV카메라 앞에 당당히 나타나며 상부에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반항심이 불거진 헬보이 앞에 새로운 적이 등장한다. 골든 아미를 부활시켜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요정족의 누이다 왕자(루크 고스)는 골든 아미를 부활시키려 하고, 이를 위해 골든 아미를 조종하는 황금 왕관 조각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선천적 운명을 거부한 헬보이가 맞서는 상대는 인간의 반대편에 선 요정의 왕자다. 하지만 헬보이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넌 우리와 더 닮았어. 누아다 왕자의 말처럼 헬보이는 자신이 속한 그 세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배척하고 강제하고 있음을 점점 깨닫기 시작한다. <헬보이2>는 인생의 방향을 가늠한 헬보이가 자아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두 번째 시험대다. 콘크리트 벽을 부수던 거대한 숲의 신이 헬보이에게 제압당한 채 아스팔트 위로 녹색잔해를 남길 때 헬보이는 황망한 허탈감을 느낀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임에도 인간은 되려 그를 괴물이라 손가락질하고 상처를 입힌다. 결국 누아다 왕자와의 사투 끝에 골든 아미를 봉인시키는데 성공한 헬보이는 다시 한번 세상을 구하지만 자신을 향한 또 다른 강압적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대립구도의 뒤처리를 맡고 있음을 깨닫는 헬보이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잡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요정과 괴물, 정령과 마수가 공존하는 <헬보이2>의 세계는 크로테스크한 판타지의 욕망이 산재했지만 순수한 동화적 호기심으로 충만하다. 유사한 이미지의 세계관으로 이뤄진 <판의 미로>를 비롯해 시리즈의 전작인 <헬보이>로부터 <헬보이2>의 미장센은 고스란히 연계되고 있으며 <크로노스>와 <미믹>과 같은 초기작들의 몇 가지 설정들이 아기자기하게 동원되어 <헬보이2>를 채운다. <헬보이2>는 독창적이면서도 경이적인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선사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방대한 결산처럼 보인다. 특히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방대하게 전시한 트롤시장의 풍경을 비롯해 후반부에 펼쳐지는 골든 아미의 거대한 행렬은 그 전체적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백미는 도심 한복판에 소환되는 숲의 신과 대결하는 씬인데 이는 자연에 대한 거대한 경의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인간의 파괴적 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만큼 숭고하다.
다만 <헬보이2>는 때때로 산만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누아다 왕자의 골든아미를 저지하는 헬보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주변부에 이목을 끌만한 거리가 적잖아 종종 이야기의 집중력이 흐려진다. 헬보이의 반항과 고뇌를 필두로 에이브(더그 존스)와 누알라 공주(아나 월턴)의 멜로 라인이 형성되고, 새로 등장한 심령술사 요한 크라우스 박사를 비롯한 서브 텍스트들이 곁가지를 치고 저마다 불쑥 자라 맥락의 일관성을 침범한다. 한편으로 <헬보이2>는 전작에 비해 액션의 비중을 키우고 유머의 빈도를 늘림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인 기능성을 구사한다. 볼거리가 많아진 만큼 눈으로 느낄만한 호사로 가득하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동화적인 이야기의 해결방식 역시도 유아적인 뉘앙스를 남기기 때문에 성인이라면 유치하다 느낄 만한 구석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헬보이2>는 분명 순수한 독창적 에너지로 무장한 경이로운 블록버스터다. 기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미술적 양식이 동화적 순수함에서 기반한 세계관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인간은 또 한번 헬보이로 인해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그를 질시한다. 결국 헬보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리즈와 함께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다. 드디어 헬보이의 진짜 운명이 시작된다. 더 이상 인간의 이기심의 방패로서 이용당하지 않는다. 소년은 그렇게 질풍노도를 뛰어넘으며 진짜 남자가 된다. 여전히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해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헬보이는 또 한번 운명적인 강요에 맞설 것이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좀 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두며 결말을 철저히 변주했다. 역사적 주관을 가미하되,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신기전>과 같은 국수주의적 천박함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세련된 주의다. 스스로를 낭만의 화신이라 지칭하는 이해명은 원작소설처럼 반쯤 껄렁하고 말도 많지만 실로 그 의지도 대단하다. 김혜수를 연상해보진 않았지만 김혜수가 연기한 조난실도 어색하지 않다. 굳이 원작소설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리 알 필요가 없는 정보일지 모르겠지만 원작에서 변주된 스토리가 성공적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가장 크게 변주된 건 결말부인데 이해명의 비정치적 자유관념에서 비롯된 시대적 냉소를 얹은 원작의 결말은 시대와 개인의 선택적 갈등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로맨스적 안타까움이 짙은 농도로 첨가된 비극의 형태로 변주됐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이해명은 마지막 순간조차도 낭만의 화신으로 분하고 있으니. 다만 설명이 부족하던 조난실에 살이 더 붙었고, 신스케는 원작의 기본 설정을 제외하곤 정반대의 기질을 지닌 캐릭터로 변주됐다. 전반적으로 원작의 굵직한 사건들을 재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종종 그 개연성이 매끄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는 점은 지적될만하다. 특히 숲 속에서 해명과 난실이 난투를 벌이다 사건이 무마되는 광경은 다소 감정적이라 석연찮다. 차라리 원작처럼 완전한 감정적 충동을 부르는 형태라면 또 모를까. 그럼에도 <모던보이>는 나름 성과를 거뒀다 할만한 작품이다. 때때로 이것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 난 것마냥 제 이름을 밝히는 큼지막한 자막이 거슬리지만 1930년대 경성을 재현한 CG의 거짓풍경도 그럴싸하다. 물론 가장 큰 만족감은 <모던보이>가 민족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줄타기에 성공했다 할만하단 점이다. 되려 밋밋한 양상으로 결말을 맞이한 소설의 냉소주의보다도 결단력 있는 영화적 결말이 좀 더 맘에 든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낭만의 화신 모던보이는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 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에서 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미치게 하는가. 그건 사랑마저도 냉소하게 만드는 운명이란 원죄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아니면 망하거나 죽거나.
P.S>김혜수의 보컬이 꽤나 훌륭하다. 할리우드처럼 국내에서도 근사한 뮤지컬 영화에 김혜수가 출연한 모습을 상상해봤다. 안무도 노력한 흔적만큼 괜찮은 편이다. 사실 김혜수의 춤은 <모던보이>에서 버라이어티한 이미지가 극대화된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