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은 기록이 묘연한 실체다. 그림은 전해지나 그에 대한 삶은 알 길이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신윤복의 실체는 상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신윤복에 대한 관심은 그의 풍속화가 조선후기 양반들의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신윤복의 화폭에 담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 과연 남성적인 관점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TV시리즈 <바람의 화원>과 동명원작소설은 그 의문에 상상력을 동원한 바다. 불분명한 역사적 실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이됐다.
팩션(faction)은 테두리가 모호한 밑그림에 색감을 넣은 결과물이다.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에 여성성을 대입한 <미인도>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만약’이라는 의심을 위한 반어적인 자기 방어에 가깝다. 여성으로 치환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둔다는 점에서 <미인도>는 <바람의 화원>과 비교군이나 대조군의 영역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인물에 접근하는 양식이 비슷하다 해도 두 작품은 엄밀히 다른 태도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여성성을 조명하는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만큼 두 작품의 연관성이 연동된다는 걸 애써 배제하긴 힘든 노릇이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만으로도 여실하다. 도화서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광경을 화폭으로 구현하는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과 실제로 눈 앞에서 마주한 현실을 화폭으로 옮겨 담아내는 <미인도>의 신윤복(김민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 그려내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열려 있던 인물이 그려내는 눈을 대변한다면 <미인도>의 신윤복이 그리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인물이 만난 세상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만큼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갇혀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바람의 화원>보다 <미인도>가 두른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물론 단점이 아니다. <미인도>가 <바람의 화원>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만큼 인물을 해석할만한 여지를 더욱 넓힌 바가 분명 존재한다. 허구의 텍스트가 어떤 상상을 걸치는가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을 소비하는 내러티브가 실질적으로 평이하다. <미인도>는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된 인물의 평범한 내면을 드러내겠다는 <황진이>와 비슷한 야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이나 <미인도>의 성과도 미약하다.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조명하는 직설적인 표현양식들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윤복을 제물로 삼아 시대를 조명한 양상이다. 결국 신윤복이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면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무(김남길)와 신윤복의 로맨스로 돌입하는 순간, <미인도>는 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제지간인 김홍도(김영호)와의 치정 관계 또한 불미스럽고 불필요하게 가지를 친다.
<미인도>는 신윤복을 전시할 뿐, 신윤복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 신윤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굳이 왜 신윤복인가, 라는 의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수화 같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도 조선의 은밀한 에로티시즘 욕망보다도, <미인도>에 얹혀질 만한 기대감은 신윤복이란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신윤복에게 보고 싶었던 건 단지 저고리를 풀어헤친 속살의 섹슈얼리티만은 아니었을 터. 결국 <미인도>는 무책임한 욕망을 덧씌운 무심한 자화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신윤복은 없다. 그저 편애하기 쉬운 이야기와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즐비할 따름이다. 그나마 설화를 연기한 추자현이 종종 눈에 띤다. 소재의 비범함은 지나치게 평범한 관점을 거듭 확인시킬 따름이다.
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렛 미 인>은, 궁극적으로 원제인 ‘Let the right one in’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소녀를 초대하는 주문이다. 이는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감정적 의미다. 소녀가 소년에게 듣고픈, 혹은 소년이 소녀에게 전하고픈 진심의 언어다. 그것은 투명하게, 때론 창백하게 느껴지는 스크린의 중의적 질감과 무관하지 않다. 눈빛에 반사된 자연광처럼 투명한 광량을 보존하던 스크린은 때때로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처럼 질겁한 인상으로 돌변하곤 한다. <렛 미 인>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맥락의 평면성은 특별한 장치적 소재 하나로 입체적 양상을 띤다. 동심에서 비롯된 순수한 로맨스는 귀엽고 천진난만하지만 그 관계의 배후엔 경악할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이란 이엘리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란 점에 있다. 다시 한번 이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는 낮에 죽어있고, 밤에 살아나는 존재, 즉 뱀파이어다.-스포일러라고 판단하지 말 것. 어차피 영화는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미 이 정도의 정보는 이 영화의 홍보상에서 배포되는 실정이다.- 그녀의 존재는 <렛 미 인>에서 역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호러 장르의 제스처를 안고 간다는 점을 암시하게 만드는데 그에 따라 영화상에서도 잔혹한 방식의 호러적 장면들이 연출되거나 등장하곤 한다. 또한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의 지속적 한계를 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양면성을 획득한다. 별개의 지점에 놓인 두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소통시킨다.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스웨덴의 평화롭고 적막한 풍광이다. 다소 이색적이긴 하나 끔찍한 상황에서는 항상 기이하게도 유머가 발생한다. 풍경에서 발생하는 역설적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태도와 함께 기이한 슬랩스틱을 발생시킨다. 자연이 잘 보존된 그곳의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그 적막함이 모종의 살인을 기획하기 좋은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장소에 대한 모순이 공포와 유희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투명한 채광이 창백하게 돌변할 때 정서적인 긴장감만큼이나 어떤 적막한 고립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 홀로 선 오스칼의 모습도 외롭기 짝이 없다. 심지어 친구들이 소변기에 버린 바지를 봉지에 주워담고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엔 한겨울의 한기만큼이나 외로움이 담담하게 서린다. 오스칼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소년이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동병상련의 상대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은신처다. 처지가 비슷한 건 이엘리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갈망한다.
오스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년에게 세상은 무심하고 창백한 곳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은총이다.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자 절대적인 신뢰가 가능한 상대다. 그 은밀한 연대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감정을 투명하게 보존한다. <렛 미 인>은 초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황홀하게 완성한다. 간혹 무덤덤하게 접근하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지만 <렛 미 인>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애틋한 멜로다. 괴로움이 직면한 낮에 창백하기만 하던 소년은 소녀가 살아나는 밤을 기다리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년을 한 뼘 성장시키고 소녀를 살아가게 만든다. 소년의 밤은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 밤엔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가 있으므로, 소년은 빛난다. 무엇보다도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선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판타스틱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경악할만한 로맨스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새로운 징조였다. 젠틀한 매너로 본드걸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남 스파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22번째 ‘007’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이하, <007 퀀텀>)는 전작의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받은 새로운 작전명이다. 전작의 아크로바틱한 오프닝만큼이나 육중한 카체이싱으로 포문을 여는 <007 퀀텀>은 근육질로 대변되는 터프한 마초적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았음을 무심하듯 시크하게 증명한다.
<007 퀀텀>은 정체불명 글로벌 조직의 배후를 추적하고 그들의 음모를 소탕하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활약을 그린다. 동시에 전작 <007 카지노 로얄>의 결말부에서 목숨을 잃은 연인 베스퍼(에바 그린)의 복수를 노리는 제임스 본드의 사적 심리를 끌어내기도 한다. 제임스 본드의 호화로운 스타일은 유지되지만 그는 더 이상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지나간 연인에 대한 깊은 향수가 제임스 본드를 지배한다. 말없이 묵묵한 인상에서 단호한 의지가 보인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정형화된 대중성은 그렇게 변주된다.
‘007’이란 프랜차이즈는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007 카지노 로얄>은 냉전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고착화된 브랜드를 갱생시키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다. 선악의 개념으로 대비되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경계가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함께 죽은 언어로 퇴색하고 제3세계의 약진으로 재편된 세계 질서 속에서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질 것 같았던 시리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옷을 갈아입는데 성공했다. <007 퀀텀>은 시도를 통해 고무된 새로운 선언과도 같다. 제임스 본드는 이익에 따라 손을 잡거나 등을 돌리는 전세계적 질서 사이에서 더욱 돈독해지고 치밀해지는 음모의 배후를 추적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첩보원의 존재는 시대착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정보의 소유가 거대한 이익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접근은 더욱 절실해진다. 제임스 본드의 육체가 더욱 부각되는 건 그만큼 더욱 복잡하게 움직이는 정보의 뒤를 쫓아야 하는 현대 첩보전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첨단기기를 총동원해 세계를 감시하는 디지털 첩보전의 공백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제임스 본드는 당연히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적격이다. 그의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세대를 영접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의 적자나 다름없다.
육해공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다채로운 액션씬은 <007 퀀텀>을 스파이물보다 액션물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을 비롯한 ‘본’ 시리즈의 영향력인지 정교하면서도 묵직한 육박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심지어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처럼 장소를 불문하고 시종일관 달리고 또 달린다.-실제로 <본 얼티메이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던 댄 브레들리가 <007 퀀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도망자 제이슨 본이 아닌 추격자 제임스 본드는 고뇌의 무게보단 저돌적인 과감함을 선택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기존의 제임스 본드들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그 클래식한 느낌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캐릭터의 형상은 겹쳐지지만 태도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이미지를 보존한다. 뉴타입으로 개조된 제임스 본드는 또 한차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시대는 변했고, 제임스 본드도 변했다. 하지만 '007'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의 성공적인 귀환이다. 잭 화이트의 기타 훅(hook)과 알리샤 키스의 소울풀한 창법으로 새롭게 변주된 오프닝 넘버는 신세기 제임스 본드의 본격적인 재출범을 알리는 강렬한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근사한 데코레이션의 케이크가 먹음직스럽다. 한 조각 잘라 한 입 베어 물어보니 부드러운 빵 사이를 채운 촉촉한 생크림이 달콤하기 그지없다.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을 때 그 혀끝에 전해지는 달콤함은 행복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을까. 잠시나마 오로지 홀로 느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이 혀끝에서부터 달콤하게 녹아 내린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인생의 너비를 깨닫고 미세한 행복을 찾아가는 네 남자의 사연이다.
일본의 베스트셀러이자 국내출간 시에도 큰 인기를 모았던 순정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원작으로 한 <앤티크>는 원작의 레시피와 데코레이션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배달했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같이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트렌디한 취향이 적극적으로 총아를 이룬다. 구체적으로 나누자면 동성애를 소재로 한 퀴어 무비이자 케이크 가게의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 전문직 드라마, 그리고 꽃미남들의 메트로섹슈얼한 이미지를 근사하게 엮어낸 캐릭터 무비다. 이 모든 것들이 <앤티크>의 화려한 데코레이션 양식을 완성하는 요소다.
<앤티크>는 네 남자의 사연이 조각처럼 모여 완성된 하나의 케이크와 같다. 네 남자가 모인 케이크가게 ‘앤티크(Antique)’는 각자의 사연 속에 내재된 상처를 서로에게 고백하는 장소다. 봉인된 트라우마를 풀어내듯 네 남자의 비밀스러운 사연이 공개될 때 그 상처와 대면한 멤버들간의 연대감은 더욱 돈독해진다. 또한 네 남자는 각자의 특별한 사연만큼이나 개성이 강하지만 그들의 어울림도 자연스럽다. 제 각각의 맛이 다르지만 진열장에 나란히 세워두기 좋은 조각케이크처럼 돋보이는 조합을 형성한다.
TV미니시리즈의 형식으로 몇 회 분량에 나눠 방영해도 좋을 만큼 확대해도 좋을 만한 사연을 집약적으로 추스르고 연결해 나가는 <앤티크>는 그 사연의 간격을 매듭짓고 연계하는 방식으로 시각적인 편집효과를 적극 활용한다. 컷어웨이나 와이프와 같은 장면 전환을 적극 활용해 화면을 다채롭게 디자인하고 때론 뮤지컬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화려한 장면을 얹어내기도 한다. 특히 다양한 효과를 응용한 표현력으로 스크린에 만화적 틀의 상상력을 입히는데 성공한다. 시각적인 묘미가 도처에서 발생한다. 발랄하면서도 지나치게 붕 뜨지 않는다. 그 틈새로 유머러스한 대사와 상황들이 포개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앤티크>가 남성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진혁(주지훈), 선우(김재욱), 기범(유아인), 수영(최지호)은 <앤티크>라는 하나의 케이크를 이루는 네 조각과 같은 존재다. 물론 구심점이자 무게중심인 진혁의 사연이 중점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다른 세 남자의 사연 역시 저마다 기둥을 이루고 <앤티크>를 지탱한다. <앤티크>는 네 명의 사연을 비중의 차이와 별개로 고른 관심을 얻을만한 형태로 완성한다. 네 조각의 사연을 통해 <앤티크>는 달콤한 인생의 비결을 선사한다. 각기 상처를 지닌 네 젊은 청년은 서로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를 바라보며 스스로 위로 받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꿈에 대해, 기억에 대해 각기 절망하거나 좌절하던 청년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극복하고 진짜 삶을 꿈꾼다. 아마추어들은 비로소 프로페셔널로 성장한다. <앤티크>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트렌디드라마다. 외모에 신경 쓰면서도 내실을 갖추고 있다. 근사한 데코레이션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를 맛본다는 건 실로 즐거운 일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즐거움을 만끽해도 좋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의, 식, 주가 붕괴되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상실된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1953년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엔 빈곤의 기운이 가득하다. 애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먹고 사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줄 정도의 여유도 없다. 기본적인 욕망조차 결핍된 도시에서 비정함이 새어 나온다. 그곳에서 소년은 울어봤자 별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전쟁 후 고아가 된 종두(이완)와 태호(송창의)를 주인공으로 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어느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서울을 재현한 스크린 너머의 풍경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 일종의 실감을 안겨줄 만한 설득력이 존재한다.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두 소년의 삶을 둘러싼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는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받아주기엔 너무도 허기진 그 시대의 정서는 서슬이 퍼렇다. 법도 질서도 자리잡지 못한 시장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힘이다.
태호와 종두는 시장의 주먹인 명수(안길강)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악도 불사하는 냉혈한 도철(이기영)이 두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치 않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신들이 빼돌린 미제 물건을 처분하려는 태호는 계산에 능한 만큼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반면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종두는 명수의 싸움을 목격한 뒤 그를 동경하며 힘을 기른다. 태호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종두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태호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이익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만 종두는 직관적인 판단과 옳고 그름의 신념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대비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화합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상충시키려 한다. 아이들이 이루는 군집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완성한 유사가족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부모 역할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성장기를 잃어버린 채 어른 행세를 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명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엔 그 자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열악함이 선명하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엔 큰 무리가 없다. 간혹 상황이 심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로맨스를 통한 갈등과 같은 클리셰의 흔적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인상은 아니다. 감정이 개입될만한 어떤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정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의 고군분투는 비관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양식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 뿐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사실감을 주지 못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적인 풍경 너머의 정서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비극적 시대상에 대한 수긍을 이미 전제로 두고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담담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참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찰이 지속될 따름이다.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며 그 내부를 지배할만한 비극적 사연도 전시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당연해 보인다. 그 세계가 짊어진 거대한 비극의 굴레가 눈앞에 생생하여 어떤 낙관도 버겁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강자와 약자의 우열관계가 생생한 시대에 기본적인 가치는 생경한 언어처럼 무기력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며 살아온 전후1세대의 삶을 조명한 휴먼드라마다. 비극 자체를 삶이라 치환하며 버틴 이들의 사연이다. 생계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소년의 눈물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성장기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처럼 비열해지거나 스스로 강해지길 꿈꾼다. 가혹했던 시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비극을 전제로 한 무용담을 기억에 쌓아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개입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력한 수긍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이 양립한 듯한 극의 말미에서도 의지보단 어떤 체념이 먼저 감지된다. 영화적 재능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의 야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거짓이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거짓에 압도당해 쓸모를 잃고 그 빈자리마저 거짓으로 메워진다. 형체가 없는 거짓이 진실의 육체를 장악할 때 선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중동과 미국의 전쟁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끝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포스트 911의 시대에서 악의 축으로 구분된 이라크는 미군의 로켓세례를 얻었지만 그 반작용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발생시켰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고도화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기 위해 첨단의 반대편에 서는 방식을 터득했다. 도청이나 추적 자체를 막기 위해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으며 게릴라적인 대응으로 적의 정보를 분산시킨다. 정보력이 약화되면 적과 아군의 구분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적의 실체는 모호하고 동지에 대한 신뢰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진실은 백지장 차이로 옷을 갈아입고 소통의 부재는 총구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의 갈등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적진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CIA요원 페리스는 지뢰처럼 깔린 도처의 위협을 피해 테러리스트의 본산을 찾아내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현장에서 활약하는 페리스는 자신과 접촉하는 정보원들과 인간적 신뢰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무선으로 지령을 내리는 호프만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앞세우며 매번마다 페리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절친한 정보원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페리스와 호프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중동에서 고군분투하는 페리스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것과 달리 본국에서 생활하는 호프만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이라크와 미국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은 삶에 대한 이해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건 옳고 그름의 여부가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삶과 죽음도 그 지점에서 판별된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을 끌어내기 위해 평범한 건축가를 거물 테러리스트로 설계해 위장된 테러의 주범으로 조작해 미끼처럼 내모는 과정은 거짓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수긍할만한 결과를 위해 희생양이 동원되고 모종의 신뢰는 전략적 볼모로 채택된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분명 포스트 911의 텍스트를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초월해 개인적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가와 문화라는 프로파간다의 경계가 부딪히는 사이,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은 어느 한편의 실체 없는 명분을 지탱하기 위해 거짓을 품기 위한 실존적 육체로 투하된다. 생사의 기로를 넘으며 그 허상을 목격한 페리스는 결국 스스로의 진실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허상의 세계에서 탈출한다. 거짓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뛰던 말은 궤도를 이탈한다.
과감한 액션과 세심한 스릴이 거듭되는 <바디 오브 라이즈>는 생생한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박감과 달리 스크린의 표면에선 건조한 기류가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능동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정적인 무기력이 감지된다. 그건 영화가 묘사하는 그 세계를 향한 무기력과도 같다. 재활의 의지로 몸부림칠수록 진창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듯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은 그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암담할 따름이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그 익숙한 회의감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탄탄한 연출력과 두 주연배우의 녹록치 않은 연기가 감탄스럽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현실의 무게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중의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아래,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스팽글(spangle) 도시가 펼쳐진다. <도쿄!>의 오프닝은 미쉘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까지, 됴쿄를 바라보는 세 이방인들의 시선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선을 집약한다. 반짝거리는 빌딩 숲 사이를 가득 메운 갖가지 소음들로 들어찬 도시의 풍경 속에 숨어들어간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형체. 발들일 틈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하게 텅 빈 풍경. 인공 도시 안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단상들이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가늠할 수 없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도쿄!>는 이처럼 뚜렷한 형체가 짐작되지 않는 거대한 실체를 구상한다.
포문을 여는 것은 미쉘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다. 히로코(후지다니 아야코)는 자신의 애인인 아키라(카세 료)와 도쿄로 상경해 친구의 거처인 작은 쪽방에서 머무른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묻는 어느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깊은 우울에 빠져들던 그녀는 어떤 변신을 맞이한다. 공산품처럼 비슷한 크기의 방이나 줄지어 선 자동차보다도 가치가 앙상하다고 느끼는 히로코의 변신은 물질가치의 경도 속에서 스스로 퇴락을 경험하는 현대 도시인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그 불행은 유령처럼 인식되는 자신의 가치를 사물에 빗대어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가볍진 않지만 묵직하지도 않다. 수긍할만한 의도는 존재하지만 큰 감흥을 부르기엔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사물과 공간에 감성을 부여하는 미쉘 공드리 특유의 미술적 감각만큼은 탁월하게 구현된다.
1999년 작, <폴라 X>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은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도쿄 도심의 하수구에서 출현하곤 하는 정체불명의 광인(드니 라방)은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라지곤 한다. 광인은 도쿄의 하수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그 밑바닥엔 대동아 전쟁 시대의 잔재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대일본의 기저에 잠재된 군국주의적 욕망을 도시의 상하구조로 형상화하여 고발하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상흔에서 비롯된 공포와도 연동된다. 정체불명의 광인이 벌이는 폭력적 행위가 부르는 도심의 혼란은 패전국의 역사를 물려받은 일본인의 심리적 반작용을 자극한다. 마치 광인의 재판장은 전범재판소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한다. 광인은 일종의 망령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혹은 짐처럼 짊어진 일본인의 이중적 심리가 유령 같은 형체로 도사린다. 드니 라방의 거칠고 사나운 연극적 연기는 이런 심리적 형상을 끌어내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노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결말부는 둔탁한 맥락을 지닌 이 작품의 모호한 가치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은 다음 상대를 겨누기까지 한다.-메르드의 다음 모험은 뉴욕에서!-
말미에 등장하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와 팬시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9년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적막한 삶을 담담하게 인식하는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마주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를 통해 변화를 겪게 된다. 소품과 같은 상징성과 은유적 태도가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하지만 <흔들리는 도쿄>는 간결하면서도 단출한 테마가 짧은 시간에 잘 숙성된 작품이다.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편집증적 삶에 어지럼증과 같은 흔들림이 찾아온다. 폐쇄적인 안정에 갇혀있던 히키코모리가 우연히 외부와 접촉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은 실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체된 삶에 흔들림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정돈된 삶이 일사불란해진다. 도시의 유령은 비로소 삶의 윤곽을 확보한다. 히키코모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진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에 접속한 봉준호 감독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능숙한 연출력으로 잘 포장된 작품이다.
연출자의 개성이 적극 반영된 개별적 결과물들은 형태적으로 불균질한 패키지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맥락은 도쿄라는 유령이다. <도쿄!>의 세 작품은 도쿄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해 도쿄라는 특수한 이미지를 완성하지만 그것은 도쿄의 실체가 아니다. 그 지점에서 <도쿄!>가 어느 정도 통찰력을 검증 받은 개인의 해석적 관점을 수집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만큼 그것은 보편적인 심리를 아우르는 대신 특별한 시야를 확보한다. 누군가가 문득 느꼈을, 혹은 느낄만한 도시의 단상이 심중하거나 재기 발랄하게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바탕으로 한 기획은 그 도시에 대한 어떤 관심을 볼모로 한다. 그런 점에서 과연 현재 서울이란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일부일처의 결혼 양식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그것도 여전히 남성성에 편향된 지배의식이 관성처럼 유지되는 대한민국 커뮤니티에서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 문구 자체로 하나의 도발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제도적 대안을 주창하는 반사회적 야심을 품었다거나 현실제도에 반발한 정치적 도전이라 인식될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수한 사례에 가깝다. 폴리가미(polygamy)나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와 흡사한 주인아(손예진)의 자유연애관도 그렇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노덕훈(김주혁) 같은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특수하다. 비현실적인 사안을 가능케 하는 건 어떤 특별한 인연의 성립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 과정은 어느 특수한 개인의 욕망이 납득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일 따름이다.
주인아의 연애관념은 정치적 선언이라기 보단 본능적 선택에 가깝다. 애초에 주인아는 섹스를 사랑과 동일한 개념으로 나열하는 여자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이 사랑이라 인식되는 상대에게 헌신적이다.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내로 살고 싶다는 주인아의 부탁을 노덕훈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그 공유자의 한편을 차지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결과적으로 그 이상한 합의가 단순한 영화적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공유는 단순히 무책임한 이상적 도피의 수순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 개인의 특수한 이상이 다른 개인에게 수용되는 합리적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제도적 규범과 유전적 관습과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는 비합리적 한계가 나란히 노출된다.
일처다부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주인아의 그것은 개방된 신념의 행위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단 소유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결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만의 아내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노덕훈의 심리와 달리 주인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을 자신의 남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이는 제도에 대한 정치적 저항처럼 읽힐 가능성도 있지만 실질적으론 그것과 무관하게 그저 취향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본능적 선택에 불과하다. 관습과 제도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이 간과되고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물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FC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지칭하는 주인아는 어쩌면 (축구를 좋아하는) 남성을 충족시키는 판타지다.-유럽 클럽 축구 중계를 함께 봐주는 애인이 있다니!- 사실 주인아는 이 외에도 지극히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여성상으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도발적이면서도 다소곳하고, 청순하고 지적이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섹스어필에도 능하다. 도시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시어머니 앞에서 구시대적인 며느리 역할에 적극적이다. 어쩌면 주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행위를 하면 되려 논리적이다. 법적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또 하나의 사실혼 관계를 천명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캐릭터가 이미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 덕분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영화적 상황이 현실적으로 채색되는 건 주인아를 연기한 손예진의 공이 가장 크다. 그녀의 행위가 영화의 비현실성을 부채질하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을 겸비하는 것도 중요한 사안인데 손예진의 연기는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 다만 주인아의 주변 관계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묘사가 배제된 건 이 영화가 완전한 부연 설명을 포기한 채 자기 편의를 위해 도피처를 마련했다고 지적당할 사항이다.-과연 주인아의 부모가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밀접한 주변인을 누락시킨 건 실수인가, 고의적 포기인가?-
<아내가 결혼했다>가 하나의 실험극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야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이해될 수 없는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그 상황에 굳이 윤리적 잣대 따위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가치관 안에서 지극히 허락되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유형처럼 포장된 이 영화는 유머를 발생시키는데 능숙하고 보편적인 감성을 돈독하게 자극한다. 이는 나름대로 대중과의 접점을 고려한다면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자신의 정치적 잠재력에 스스로 주눅들어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기도 하다.
특수한 사연의 전시는 결국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종결된다. 아내가 두 남편을 지니려 한다는 사연은 도발적이지만 영화는 그 사연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나가는 노덕훈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삶의 보편적 물음을 추출하려 한다. 사랑을 포함해 삶이란 여정을 채우는 표지판들의 궁극적 도착지는 행복이라는 것, 그 행복의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적 제한의 너머에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삶의 특별한 유형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단 어떤 특수한 삶조차도 보편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방편에 불과함을 설득하려는 영화다. 소재가 지닌 특이성에 거부감을 느낄만한 대한민국 남성(!)이 다수 존재할지 모를 일이지만 손예진의 뛰어난 교태(?)가 이를 중화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어쩌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도발적 문장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손예진의 매력에서 기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로 영화를 또 하나의 비현실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손예진이 아니었다면?-
양미숙(공효진)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여자다. 타인의 생각을 자의대로 파악해버린 뒤, 그에 대한 오해를 스스로 만들어놓고 되려 민폐 끼친 상대방에게 억울해한다. 예측 불가능한 삽질의 연속이 일상의 전부다. 여러모로 혐오스럽고 피곤한 상대다.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은 외모에서 기인된 것이다. 안면홍조증이라는 신경성 불치병(?)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곧잘 빨개지는 그녀의 얼굴은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경계하기 전에 그녀 스스로 주변을 경계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녀가 여중학교 러시아어 교사다. 어린 여중생들도 비호감이라 무시하는 왕따 선생의 처연한 일상이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으로 포장될 수 있는 건 그녀가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덕분이다.
<미쓰 홍당무>는 어떤 비교 유형이 드문 천연덕스런 이야기다. 열등감을 지닌 인물을 전면에 배치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승리나 성공으로 점철되는 클리셰적인 결말을 안고 가기 마련인데 <미쓰 홍당무>는 그런 뻔한 방식의 이야기투르기와 무관하게 혼란스런 양상으로 상황을 진전시킨다. 그 모든 혼란의 주체는 종잡을 수 없는 양미숙이지만 그녀와 함께 영화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서브 캐릭터들 역시 영화 속 세계관의 비전형성을 보좌하고 있다. 청순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남자들의 인기를 독점하기 때문에 양미숙의 질시를 한 몸에 받는 이유리(황우슬혜)와 10년 전 양미숙의 은사이자 동료 교사인 서종철(이종혁)의 딸이자 ‘전(교왕)따’로 불리는 서종희(서우)는 양미숙의 기이한 성향을 부추기거나 그 성향에 연대해 사건의 양상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넓혀나간다.
본질적으로 <미쓰 홍당무>는 처연한 동정심을 유발할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실제로 결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만한 양미숙의 현실에 대한 기저라 할 수 있는 과거의 사연들이 수집되면 그 처연함의 실체가 더욱 구체화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가 발생시키는 모든 상황들은 기이하게도 우스꽝스러운 유머감각을 동반한다. 사실 그 상황들은 일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의 사건들이 아닐 만큼 생경한데 때때로 그 생경함이 상황의 특이성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곤 한다. 양미숙을 비롯한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도 정도 차가 있지만 비정상적인 형태로 인식될만한 유형이다. 단지 이는 이 인물들이 기본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지닌 탓이기 이전에 이 캐릭터들이 평범하게 포장된 사람들의 숨겨진 내면을 폭로하고자 하는 기능성의 자질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결국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비틀린 자화상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하다. 러시아어 선생이 영어 수업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영어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노골적인 함의나, 외모지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혐오의 반작용에서 비롯된 양미숙의 뒤틀린 강박-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를 버려!-은 판타지에 가깝게 묘사되는 영화를 통해 그 외부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현실이 실제로 얼마나 비정상인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예측 불가능하게 뒤엉킨 상황이 해결되는 지점도 특이한 양식을 갈무리하기 위한 해법으로 탁월하다. 마치 법정과도 같은 구도로 재판을 벌이는 4명의 가해자이자 피고들은 그 사건에서 가장 동떨어진 지점에서 가장 정상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성은교(이경미)의 판결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정리한다. 하지만 인물들에게 어떤 인위적인 변화를 주입하거나 특별한 감상을 도모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냥 상황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킬 따름이다. 그 와중에 가족주의의 해체를 연상시키는 탈가족주의적 태도까지 동원된다.
왕따는 계속 왕따일 뿐, 세상이 특별히 그들에게 관대해지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관대해질 따름이다. 혐오스런 양미숙의 일생이 비극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희극적인 감상이 유도되는 건 그 덕분이다.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현실은 그걸 때때로 간과하거나 무시할 따름이다. 결국 세상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당사자의 몫이 큰 법이다. 미친 사람 취급을 감내하는 것만큼이나 미친척하며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미쓰 홍당무>는 정상적이란 명목의 폭력으로 둘러싸인 비정상의 세계에서 미친 척 살아가는 비정상의 인물들을 평등한 관점에서 연대하듯 지켜본다. 결국 이 괴상한 영화에 기이하게도 온기를 느낀다면 연민을 배제한 채 그녀들의 씩씩한 자기애를 당당하게 지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소란으로 가득차 어수선한 이 영화에 진지한 태도를 발생시키는 근원이기도 하다.
만약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이하, <공작부인>)과 비슷한 사례를 현대에서 색출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 불륜치정을 다루는 '사랑과 전쟁'과 <공작부인>은 기본적인 골조가 비슷하다. 시집온 여자의 남편이 난봉꾼이고 이에 자극 받은 아내는 맞바람을 핀다는, 치정에 얽힌 부부의 갈등과 대립은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의 형식으로 줄곧 소비되는 전형적 양식이다. 하지만 <공작부인>이 두른 시대상에서 여성의 위치는 '사랑과 전쟁'과 같이 불륜 스캔들을 다룬 오늘날의 그것들과 현저히 다른 지점이다. 고로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주제 양식이 판이하다.
아만다 포맨의 소설 '조지아나, 데본샤의 공작부인'을 원작으로 한 <공작부인>은 18세기 영국의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둔 작품이다.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지닌 데본셔 공작(랄프 파인즈)과 결혼한 공작부인 조지아나(키이라 나이틀리)가 그 주인공으로 그녀는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행사한 사교계의 거물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작 혹은 실화가 영화에 끼치는 영향력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 <공작부인>은 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어떤 가치관을 끌어내는 것보다도 그 여인의 삶 자체를 응시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드라마를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구차한 삶이 시대에 대한 회의를 내포하고 있음은 확실하나 <공작부인>은 그 시대를 고발하기보단 그 시대에 몸을 담고 있는 여인의 태도에 주목한다. 어느 순간 통속적인 로맨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만큼 과감한 결말을 통해 비극적 감상을 고취시킬 가능성도 충분한 이 영화가 되려 무덤덤하게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는 것도 한편으론 의외적인 측면이다. 비극적이거나 비범하게 포장될만한 상황에서 영화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인물의 선택이다. 현대적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영화에 주제의식을 인위적으로 삽입하기 보다 시대적 취향을 수용하는 여성의 태도를 통해 그 시대의 현실상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조지아나의 선택은 이 영화의 관점을 손상시키지 않음과 동시에 영화의 외부에서 효력이 발생할 시대읽기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킨다.
고풍스런 이미지들이 전반적으로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처럼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18세기 영국의 다양한 풍경과 귀족들의 호사스런 문화는 단지 눈으로 영화를 즐기는 것 자체를 허락하는 기분이다. 물론 <공작부인>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남성권위주의적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자기 권리를 획득해나가는 과정이다. 단지 가문의 후손을 낳기 위한 씨받이의 도구로 취급 당하던 여성이 쾌락을 경험하고 진정한 로맨스를 찾아 떠나지만 모성애의 의무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는 과정은 격렬하지 않지만 굴곡이 깊다. 결국 조지아나는 한 개인으로서 사회적 구속력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저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과 타협해 여성으로서 자립한다. 통속적인 방식으로 통속을 차버리는 쾌감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