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도 알고 난 자리도 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없어졌고, 없어야 할 것이 굴러다녔다. ‘내 집’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 결혼 후 ‘우리 집’이 생기면서 벌어졌다.
“사람을 갑자기 바꾸려고 그러면 안돼. 그냥 서로 맞춰서 살아야지.” 장모님께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내는 종종 ‘조커’ 같았다. 집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어지럽혔다. 여기가 신혼집인지 고담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 무찔러야, 아니,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확립해야만 한다. 복면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언어를 던져야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가방은 제발 식탁 의자에 던져두지 말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가방은 주문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식탁 의자에서 발견됐다. 종종 쇼파에서도 목격됐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이라도 읊는 마음으로 그 무질서를 견뎠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내로 업데이트 되기 전, 그러니까 여자친구 버전이었던 당시에 그녀가 혼자 살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 사실 낯익은 그림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라는 단어와 멱살이라도 잡은 양 생활하는 누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여자와 정리라는 단어는 강남구와 캘리포니아주처럼 요원한 관계임을 암기해 왔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한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간혹 청소와 정리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보자.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며 정리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이다. 그러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지갑이나 옷 따위를 치우고 나서 우리가 ‘바닥을 깨끗하게 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간단히 정의해서 날 잡고 하는 게 청소라면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해야 하는 게 정리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밑줄 쫙. 청소를 하겠다고 정리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냥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씀. 청소를 위한 정리란 말 그대로 청소 직전의 일상적인 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어질러진 것을 치운다거나 청소기 헤드에 걸릴만한 것들을 임시적으로 옮기는 하등의 행위일 뿐이지 약속된 위치에 두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온전히 정리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청소는 주기적인 노동일 뿐이지 일상적인 습관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선 청소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깔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좀처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선 청소도 힘드니까, 결국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고.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을 구별하고 위치가 얼마나 자주 바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 뒤 물건의 용도와 어울리는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방에 국자를 두지 않고, 부엌에 옷걸이를 걸지 않는 이치랄까. 물론 이처럼 명확한 경우엔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공간의 특성에 딱 떨어지지 않는 물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집마다의 구조적인 특성에 기반한 노하우도 요구된다.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 그건 어디 있는 거지?’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약속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생기는 혼선에 익숙하다면 정리를 못하는, 어쩌면 안 하는 쪽인 셈이다. 아내를 비롯해서 몇몇 여자들이 가끔 핸드백이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작은 가방에도 작게나마 별도의 주머니가 있는데 굳이 그 핸드백 안의 잡동사니들 속으로 핸드폰을 묻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곤 매번 겨우내 핸드폰을 발굴한다. 그때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긴장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실제로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건지 모르고 뒤늦게 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정리란 물건의 공간을 확정 짓는 동시에 공간의 용도를 명확히 가져가는 일이다. 단지 집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리가 필요한 건 비단 ‘집 구석’만은 아니니까.
원래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방의 면적엔 한계가 있었고 넘치는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만한 공간의 견적을 파악해서 채워 넣는데 이골이 났다. 문제는 그런 덕분인지 빈 공간에서 어떤 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신혼집을 방문한 몇몇 지인은 말했다. “신혼집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정도 살아온 집 같은데?” 그러니까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내보단 내 욕심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집정리의 윤곽이 잡혀가던 3일 간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주도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야 할 가구가 생기면 으레 자리를 지정하는 건 아내보단 나다.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주로 내 몫이 됐다.
아무래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듯이 더 많이 정리하는 쪽도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빨래가 마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쪽이 전전긍긍하다가 빨래를 걷게 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이고, 청소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살짝 억울해지는 순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정리 페티쉬라도 있는 것마냥 정돈된 이미지로부터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피곤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길 설득하며 실태를 확인하는 쪽이 자연스레 더욱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딱히 정리에 신경 쓰지 않는 아내가 편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아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식탁 의자나 쇼파에서 아내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집 안을 떠돌아다니던 물건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물건의 가짓수가 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무장해제되는 순간도 생기는데 ‘포기하면 편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나 할까. 노력하는 속도가 빠를지, 포기하는 속도가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애초에 정리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발만 맞춰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국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머슴처럼 살고 있다는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응?)
직장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여자 상사가 그랬다. 듣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글래스 실링(glass ceiling)’이라는 숙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유리 천장’이란 뜻이지만 ‘여성이나 어떤 집단이 높은 지위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차별은 뿌리 깊은 전통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통용되고 유전자적으로 세습되면서 때론 교묘하게 역할의 분리처럼 강요되는 차별적인 유전자가 사회 도처엔 여전하다. 어쩌면 굳건한 남성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의 공성전과 남성의 수성전은 현대 인류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에덴동산의 외로운 독거남을 위해서 그의 늑골 하나를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란 남자에게 있어서 뼈를 내어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탈무드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남자가 잃어버린 늑골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는 훼이크고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남성은 항상 여성을 ‘소유’하고자 했다. 그래도 된다고 믿었다. 아니, 믿을 것도 없이 그랬다. 전쟁에서 여성이 전리품처럼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전쟁이 지배하던 역사의 주인공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건 어쩌면 야만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가. 남자만 지배하는 시대가 끝났을 뿐 남자가 지배하는 시대가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론이 거창했다. 어쩌면 거창한 핑계를 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다. 군대도 다녀왔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하기 최적화됐다고 여겨지는 ‘남자 직원’ 중 하나다. 무슨 자신감이냐고? “군대문화에서 익힌 계급적인 충성심이 강하다.” “군대 경험을 통해서 상하 관계에 익숙해서인지 무언가 지시를 내리면 일단 부딪혀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여자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여자 상사’로부터. 지금부터 인용되는 말들은 모두 여자 상사들로부터 얻은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 상사란 직장 내에서 최소한의 결정 권한이 있는, ‘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지닌 여자들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무기명으로. “누런 소가 일을 잘하오? 검은 소가 일을 잘하오?”라고 묻는 황희 정승의 질문에 밭 갈던 농부가 굳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타산지석 삼았다. 그 농부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면 검색하길 요망하며 본론으로 다시 정주행.
분야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상사들은 직장 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직장 내에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원 시절엔 조금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옆에서 볼 땐 답답하고 줄서기에만 급급해 보여서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팀장이 되고 보니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깍듯하고 다른 팀으로부터 주요 정보를 수집해오는 정보력도 있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관계를 형성시킨다. 관계는 바로 정보망이다. 정보가 패처럼 돌려진다. 좋은 패는 아무 곳에서나 펴는 게 아니다. 이기고 싶은 상대 앞에서 펴는 거다. 인정받고 싶은 상대에게 던져야 한다. 그러니 동료들은 몰라도 상사는 알게 돼있다. 그 패를 확인하게 되는 쪽은 상사일 테니, 그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정보의 장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동료 여자들이 한심해 여기는 단합회장에선 은밀하게 정보가 오고 간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 때도 남자들은 대놓고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대의견을 표한다. 표정 관리도 잘 안 되는 편이라 일을 주는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게 남자다. 유전자적으로 서열을 나누고 패를 가르는 게임에 능하다. 어쩌면 군대는 그런 본능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발시키는 조직일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일상에 2년간 체류하다 보면 방사능에 피폭당한 사람처럼 상명하달 방식의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게임상에서 일단 클리어해야 하는 스테이지처럼 느껴지는 거다. 상사에 대한 복종심도 존재하겠지만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복하겠다는 욕망도 적지 않을 거다. 뭐,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기도 하고.
“남자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당장의 흥미에 이끌려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아이템을 개진하는데 그러다 보면 논리에 막히는 경우도 있고 큰 관점에서 허술한 측면이 발견된다. 남자들은 아무래도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디테일한 가능성을 깊게 파고드는 편이라 무언가를 추진할 때 더뎌 보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뢰하게 된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에서 남자는 목적을 성취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고, 여자는 누군가와 자신의 느낌을 공유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남자는 결과적인 완성을 추구한다. 여자는 그 순간의 흥미를 인정받길 바란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딴 것도 여자였다. 선악과를 권하는 여자를 믿고 역시 한 입 물었던 남자는 여자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애초에 리스크 있는 거래는 피하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 교훈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장점들이 남자들의 뛰어난 경쟁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근시키는데 무리가 없다는 건 과연 장점인가?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가? 무조건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사업에서 유리한가? 이 모든 장점들을 빛내주는 건 남자들 자신일까, 그 장점을 요구하는 사회 혹은 조직문화의 분위기일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의 성비가 여전히 높은 만큼 남자들에겐 좀 더 많은 선배가 있기 마련이고, 남자들 특유의 선후배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애초에 불리한 경쟁이다.” 그러니까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결혼이나 육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잠재적으로 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중요 업무를 맡기는 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큰 것 같다.” 출발선도 다르지만 트랙의 조건도 차별적이란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상사’의 위치까지 오른 여자 상사들이 남자의 경쟁력을 인정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남성보다도 치열하게 습득한 여자만이 그 유리 천장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조직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반대로 어느 남자 상사는 말한다. “여직원들은 빨리 이해할 줄 알아서 편하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성별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라고 느껴지는 환경을 진단해야 한다.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건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리가 있는 거다. 관료적이고 계급적인 시스템 말이다. 결국 남자든 여자든 편하게 일하면서도 저마다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의 장점이 편안하게 수용되는 사무실의 풍경은 당장 요원해 보인다. 현실적으론 지금의 직장에서의 최적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력이 조직을 진보시키기 보다 조직에서의 생존에 유용한 것이라면 과연 그 경쟁력을 존중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경쟁력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별이 아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가 됐을 때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고민일 거다.
어느 날, MP3가 식상해졌다. LP로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다. 21세기에 말이다.
일렉트로니카 듀오 다프트 펑크가 복고적인 신시사이저 사운드로의 회귀를 표방하며 올해 발표한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이 LP는 미국에서만 30만장이 넘게 판매됐다. 뮤즈, 레이디 가가, 비디 아이, 마룬 5, 데이비드 보위, 메탈리카 등 현재 전세계 음악산업의 최전선에서 언급되는 현재진행형의 뮤지션들은 끊임없이 LP 제작과 발매에 공을 들여왔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선 끊임없이 LP가 제작됐고,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가 공존했다. 한편 지난 4월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Hello>를 발표한 조용필의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그런데 여기서 다프트 펑크의 LP와 조용필의 LP 사이에 어떤 흐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믿겠는가?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 LP는 전세계 음악산업의 새로운 화두다. 미국의 음반판매량을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미국 내에서 LP는 25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1991년 이래로 최대 수치를 기록했고, 매년마다 판매량을 갱신하며 지난해에만 460만장이 판매됐다. 2008년부터 시작된 ‘레코드 스토어 데이’가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다. 매년 4월 셋째 주 토요일에 미국 전역의 독립 레코드점들이 참여하는 이 행사엔 특별한 음악 관련 아이템이나 희귀 LP들이 판매되고 다양한 뮤지션들의 공연이나 이벤트가 개최된다.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 바로 한국의 레코드페어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레코드페어는 LP 리스너들을 위한 축제다. 올해까지 1만 명 이상의 관객이 레코드페어를 찾았고, 매년마다 관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은 LP를 제대로 접한 적도 없는 2~30대라고 한다. 이는 현재 국내에서의 LP 수요계층을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올해 레코드페어에선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미선이, 이이언, 조원선 등 몇몇 뮤지션의 명반들을 LP로 한정수량 재발매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기획이 가능해진 건 국내에 8년 만에 설립된 LP 공장, LP 팩토리 덕분이다. LP 팩토리의 대표 이길용은 공연기획사에서 다양한 해외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을 주관하던 중, 그 아티스트들이 LP로도 앨범을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장성을 파악했다. 장기적으로 국내에서의 시장 개척 가능성을 타진했고, 개인적인 애정을 더한 결과 LP 팩토리의 설립이 이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친 것마냥 미국에서의 LP 시장 확대가 한국의 LP 부활을 부추기는 것만 같다. 조용필의 <Hello>가 LP로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아직 국내에서의 LP 제작은 미지근한 수준이다.
국내에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 발매가 일반화된 건 음악시장이 음원 다운로드 위주의 구조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곡 단위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장에서 자본과 시간을 투자해서 다량의 곡을 담은 정규앨범을 발매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국내 실정에서 CD에 비해서 단가가 10배까지 치솟는 LP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을 발매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만큼 LP 제작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LP에 대한 수요는 확실히 증가하고 있다. 휴대용 턴테이블인 ‘아리아 판 USB 턴테이블’을 수입한 ‘스카이디지탈’의 마케팅 담당자는 지난 3개월 사이에 이 제품이 2천여 대가 판매됐다고 전했다. 스카이디지탈은 컴퓨터 주변 기기를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해외에서의 턴테이블 시장이 활성화되는 걸 눈여겨보고 직접 수입과 유통을 계획했다. 7만원대의 저렴한 가격대를 지닌 만큼 들을 만큼 들어본 이들보단 LP에 막 입문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제품이다. 무엇보다도 LP음을 MP3 음원으로 변환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점에서 MP3 사용이 익숙한 젊은 세대에겐 보다 매력적이었고, 결국 먹혔다. LP에 대한 젊은 층의 수요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LP를 사용한 경험이 없는 젊은 리스너들은 LP를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음반사들은 그들이 지갑을 열도록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요즘 해외에서 발매되는 LP 케이스엔 MP3 다운로드 쿠폰이나 CD가 동봉됐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CD를 사더라도 파일 형태의 음원으로 변환해서 MP3 플레이어에 담아 듣는 이들이 음원 다운로드 대신 굳이 CD를 사는 건 그 물리적인 형태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CD보단 보다 크고 선명한 커버 이미지를 지닌 LP가 부르는 소유욕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CD나 음원까지 제공한다니 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일본에 비해서 아직 국내 LP 시장의 성장세는 더딘 편이다. 하지만 수요는 분명 존재한다. 서울의 한 백화점에선 한 달에 2대 이상 판매가 어려웠던 턴테이블이 조용필의 신보가 LP로 출시된 이후로 한 달에 20대 이상 판매됐다고 한다. 결국 공급의 문제다. LP를 갖고자 하는 욕망은 음악을 소유하는 재미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음원을 아무리 채워 넣어도 손바닥만한 MP3 플레이어가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허기에 대한 자각. 하지만 LP의 재조명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회귀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오히려 전진이라 할만하다. 디지털 시스템의 편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정서적 포만감에 대한 경험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 물론 LP를 음악의 미래라고 말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확실한 건 LP가 지금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의 음악으로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다. 그럼 대부분 공식처럼 날짜를 묻는다. 나는 번번히 그 공식을 깨는 답변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했어.” 어떤 식으로든 놀라워하고, 두 가지 혐의를 추궁한다. 설마 속도 위반? 아니면 신부가 재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진 않았다. 혹자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질책했다.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고 결혼식해라. 신부가 평생 너 원망할걸.” 하지만 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 모든 과정을 수용했다. 결혼식 없는 결혼을 제안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였고, 이를 수용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 어른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동의했고 부모님의 동의를 얻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을 뿐이었다. 때는 3월이었다.
어차피 형식이 중요해지지 않은 만큼 여행 경비를 아낄 수 있는 비성수기에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생각보다 빨리 신혼집을 계약했고, 신혼여행에 골몰하다가 하와이행 항공 티켓을 예약했다. 동행인도 생겼다. 현지 가이드이자 드라이버 역할에 지원한 지인에겐 신혼여행 술친구라는 옵션까지 있었다. 신혼여행에 가져갈 짐이 없어서 사람까지 가져가냐고 우려하는 이들이 8할이었지만 우리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말 멋진 선물까지 받았다. 깜짝 이벤트로 현지의 신부님을 섭외해서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의 결혼식을 마련해준 것. 나는 한국에서부터 귀띔을 받고 작전에 동참했지만 아내는 전날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나는 그저 장난 같은 이벤트일 거라 생각했다. 추억이나 만들자는 심산이었지. 맥가이버 가발을 쓴듯한 백인 신부님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정복을 입고 나타난 신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경건한 마음을 이끌어냈다.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지도 않았고, 결혼행진곡도 없었지만 사랑을 맹세하고, 영원을 약속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 결혼은 장난이 아니니까. 애초에 장난이 아니어야 했다. 그걸 깨닫게 해준 지인에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혼여행을 다녀왔지만 결혼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원고는 썼는데 취재가 남은 것마냥 이상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나 아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의는 내게 대단히 솔깃한 것이었다. 결혼식은 넥타이를 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번거롭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갖춰야 하는 격식이었다. 하객을 받는 쪽이나, 찾아오는 하객이나, 서로에게 피로한 일이리라. 그러니 서로의 고충을 덜어주는 이 결정이란 얼마나 합리적인 결정인가. 오산이었다.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의외로 서운함을 전하는 벗과 지인들의 마음을 읽게 됐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지나치게 야박한 삶을 살아온 것인가 인생을 되돌아봤다. 남들 하듯 결혼식은 하지 않더라도 친척들과 지인 일부를 모시고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장인 어른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최종적인 결혼 일정은 결국 신혼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서야 완료됐다. 종로에 있는 한옥 레스토랑을 대관했고, 초대자 명단을 작성했다. 장소 여건상 초대 인원을 제한해야 했고 초대할 명단의 우선순위를 가린다는 건 생각보다 미안한 일이었다. 결혼식은 그저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결혼’이지 ‘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당사자들만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당사자들을 아끼는 사람들이 진심을 전달할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섭섭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야박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을 채우는 수많은 존재들을 인식했다. 그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에너지를 선물 받았다. 아내는 그날 우리를 찾아온 이들에게 줄 꽃을 마련했다. 입구에서 한 송이씩 꽃을 쥐어줬다. 더 이상 내 삶이 아니었다. 우리 삶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 잘 살아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용기를 얻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그 진심들을 잊지 않고 살겠다. 그리고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미괄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오랜 대화라도 나눈 사람처럼, <미생>을 말한다. <미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택시에서 스마트폰으로 <미생>을 보다가 울컥했다. 눈물을 훔치니 택시 기사가 사연을 물었단다. 말해봤자 알겠나 싶었지만 <미생>이란 만화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허허!’ 웃더니 물었단다. “아니, 그 <미생>이란 만화가 대체 뭐요? 얼마 전에 한 여자도 뒤에서 갑자기 펑펑 우는 거야! 그래서 뭔 일 있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그 <미생>인가 뭔가를 봤다네? 아니, 그게 뭔데 그리 울어?” 친구의 소주잔을 채우면서 전해들은 경험담이다. <미생>이 연재된 포털사이트의 댓글 게시판엔 이 같은 사연이 차고 넘친다.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를 쏟아낸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 <미생>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미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다.
<미생>은 어느 실패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에 바둑연수생이 된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뒤 7년 만에 프로바둑기사라는 꿈에서 이탈한다. 낙오한다. 돌을 던진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소년이 고졸의 낙오자가 돼서 사회로 나온다. 바둑판에서 추방된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해서인걸로 생각하겠다.’ 아픈 말로 자신을 누른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킬만한 핑계는 많지만 그 핑계마저 자신을 찌르는 일이니 차라리 스스로를 짓누른다.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란 대부분 성공으로 역전되는 희망의 송가로 귀결된다. <미생>도 희망을 찾는 작품이다. 하지만 ‘성공’에 관한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지인을 통해서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장그래는 2년 간의 계약직 사원 근무 끝에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 그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고졸이기 때문이다. 그가 머물렀던 조직의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고,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일 때, 독자들은 뜨거워졌다. ‘이만하면 장그래도 정직원 자격이 있네! 정직원 되겠네!’ 응원했다.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단순히 이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되레 현실을 직시했다. 장그래는 ‘정직원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말했다.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뜨겁기만 한 빈말보단 차가운 척 따뜻하게, 정말로.
<미생>이 그리는 건 이 사회의 전형적인 관료제다. 겉으로 보기엔 언뜻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듯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체계와 질서의 합의와 균형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맹점을 지적하고 질타하기 보단 그것이 합리화되고 안착할 수 있는 배경을 살핀다. 그 끝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돼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을 얻고, 사람을 쓰고, 사람을 통해서 계획이 수립되고, 정책이 시행되고, 결과가 완성된다. 제도가 완전해도 사람은 불완전하고, 결국 체계도 불완전해진다.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를 막기 위해서 제도는 보완되고 방파제처럼 강건해진다. 예외란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단어다.
“이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장그래에게 직속 상사는 답한다. “안 될 거다.” 이유란 이렇다. “세상은 원래 불완전한 거니까.”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아닌 불완전함. 본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은 절망이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희망이다. 단지 그곳이 당신의 세상이 아닐 뿐이란 말이니까. 거기서 다시 <미생>은 말을 건다. 장그래에게 어쩌면 당신에게.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은 대단히 이상적인 팀이다. 직속 팀장인 오차장은 “일은 뺏겨도 사람은 안 뺏겨”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원활하다. 서로를 존중한다. 홀로 작은 바둑판 위에 집을 짓고 부수던 장그래는 사회로 나와 바둑알 같은 존재가 돼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자신과 함께 집이 되는 바둑돌들을 마주한다. 기대고, 부딪히고, 마주본다. 사람을 얻는다. 세상을 익힌다. 삶을 내다본다.
<미생>의 끝, 정확하게 1부의 끝에서 장그래는 다시 자리를 찾는다. 불완전한 세상을 가르쳤던 오차장이 둔 포석에 합류한다. 미생이 모인다. 완생을 꿈꾼다. 2부는 거기서 시작된다. 바둑연수생을 포기하고 기원에서 나오던 장그래와 계약직 만료 메시지를 받고 회사에서 나오는 장그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패배감이 사라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이 패배만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단단하게 여문 장그래를 통해서 당신도 어쩌면 성장했다. 막연한 희망을 품었을 때 현실은 가혹해진다. 정확한 대안을 찾을 때 현실은 생생해진다. 깨닫는다.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나도, 당신도 미생이니까. 꿈꿀 수 있다. 살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케이블과 종편 채널에서 공중파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전파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궁금하다면 채널, 아니, 페이지 고정할 것.
‘빠’들의 힘, <SNL 코리아>
TVN의 <SNL 코리아>는 미국의 간판 라이브쇼 <SNL>의 한국 버전이다. 안상휘 CP가 <SNL>의 국내 도입을 건의했고 일단 8회 정도를 해보고 판단하자는 내부 의견을 얻었다. “1회가 별로였다면 아마 힘들었을 거다. 1회 호스트였던 김주혁이 잘해줘서 할만해졌다.” 안상휘 CP에 따르면 시즌1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호스트에 따라서 기복이 심했다. 시즌 2의 양동근 편부터 감을 잡았다. 19금 개그를 본격적으로 건드리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동엽의 호스트 출연은 <SNL 코리아>의 뇌관을 건드렸다. 잠재력이 폭발했다. 시즌 3에 신동엽을 영입한 건 <SNL 코리아>의 전후를 구분하는 신의 한 수였다. 크루들의 캐릭터가 확실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우리 사회에서 음성화된 19금 소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능수능란하게 주무르고 과감한 정치 풍자와 위트 있는 시사 만평까지 도맡으며 파격적인 포복절도를 선사했다. 그리고 정규 방송으로 편성된 지금까지 <SNL 코리아>는 토요일 11시마다 생방송됐다.
“스튜디오 콩트를 4~5개 정도 준비하고, 야외 촬영되는 뮤직비디오도 2개 정도를 확보하고 오프닝 스테이지와 ‘위크엔드 업데이트’까지 대략 11개 코너를 정리해야 한다. 매주마다 그만한 아이디어를 짜고 대본 작업을 하며 생방송을 대비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도 한 주 내내 생방송을 준비했던 예전과 달리 이젠 호스트와 크루들의 리딩과 리허설, 생방송은 토요일 하루 동안만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크루들이 스타가 된 만큼 <SNL 코리아>에만 집중해야 한다면 결국 이탈할 수밖에 없을 거다.” 크루 한 사람 한 사람이 <SNL 코리아>의 저력임을 알고 있다. 오전에 대본을 리딩하고, 점심 이후로 무대 리허설을 가진 뒤, 6시 즈음엔 실전에 가까운 ‘런 스루(Run Through)’를 통해서 모든 동선과 진행을 체크하고, 8시 반에 진짜 관객들을 대상으로 1차 공연을 한다. 이 때 안상휘 CP는 직접 객석에서 관객 반응을 체크한다. 이전까지의 리허설이 섀도우 복싱이라면 1차 공연은 최종 스파링이다. 생방송의 컨디션을 짐작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는 콩트의 리액션을 살피는 것인 동시에 과감한 표현이나 연기가 불쾌함으로 인식되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생방송 이전의 마지막 기회다. “센 걸로 먹히면 더 센 것을 보여줘야 된다. 수위로 승부하면 안된다. 결국 아이디어로 허를 찔러야 한다.”
리딩부터 1차 공연까지 깨알 같은 대본이 수정되고 콩트의 설정도 변하며 캐릭터 자체가 뒤바뀌기도 한다. 신동엽을 위시한 크루들은 서로에게 화기애애한 ‘지적질’을 불사한다. “막내 작가와 선배 작가가 20년 차이가 나는데도 똑같이 대본을 놓고 비교한다.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낸다. 초기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선배 작가들이 많이 나갔다. 지금은 정착이 된 거다.” 어쩌면 그만큼 치열하다는 말이다. 좋은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분위기에선 그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결국 <SNL 코리아>는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빠’들의 방송이란 말이다. “시작할 때부터 크루의 힘이 강한 쇼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지금의 크루 진영에 90% 이상 만족한다. 다만 캐릭터들이 확실해지다 보니까 콩트의 성격도 그 안에 갇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 확고한 위치를 점한 만큼 새로운 고민도 자라난다. 그리고 그 고민이 <SNL 코리아>의 비전일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회가 끝나면 방송에 못 나간 자료들을 모아서 <시네마 천국>처럼 상영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안상휘 CP의 기약할 수 없는 바람이다.
목소리를 찾아서, <히든 싱어>
JTBC의 <히든 싱어>는 가수들이 도플갱어 같은 성대를 지닌 모창 가수들과 대결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 가수들이 아마추어 실력자들 앞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승욱 PD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궁리하던 중 한 작가로부터 아이디어를 들었다. ‘진짜 가수와 모창 가수가 한 무대에 서면 어떨까.’ 그렇게 시작된 것이 <히든 싱어>였다. 일단 연말특집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2회 정도 제작해보고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일단 가수 섭외만큼이나 모창 출연자들을 찾는 것도 난관이었다. 모창을 잘해도 방송 무대에 적합한 실력자를 걸러내고 트레이닝까지 시켜서 무대에 올리는 건 그 자체로 강행군이었다. “사실 그 두 편 이후로 더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정규물 편성은 어렵고 시즌제로 진행할 순 있을 것 같았다.” 결국 1월 초에 편성이 확정됐고, 팀이 꾸려졌다. 2달 간의 준비 끝에 3월부터 시즌1이 전파를 탔다.
<히든 싱어>의 첫 번째 고민은 룰의 보완이었다. 2편의 파일럿 제작에서 겪은 시행착오는 결국 중요한 자산이었다. 1회 박정현 편에서 1라운드부터 모창 출연자를 공개했던 걸 2회 김경호 편에서 2라운드로 미뤘다. 모창 출연자들의 얼굴 공개 시점이 빠를수록 관객들의 적응력도 빨라져서 게임의 흥미가 급격히 낮아진다는 판단 떄문이었다. 시즌1 중간에는 2라운드에선 목소리를 가린 채 얼굴만 공개해서 목소리와 얼굴의 매칭에 혼선을 주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시즌1 역시 섭외와의 전쟁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모창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가수의 섭외도 난관이었지만 모창 가수들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김건모 씨는 1월부터 예심을 했는데 섭외가 오케이된 건 4월 중순 즈음이었다. 미리 모창 출연자를 축적해놔야 했다.”
이름도 없는 프로그램인 탓에 참가자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작가들은 유투브, 음악 관련 커뮤니티의 동영상을 뒤지거나 보컬 학원이나 대학교 실용음악과로 발품을 팔며 모창의 귀재들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찾은 지원자들 가운데 1차 예심으로 8명 가량을 뽑은 뒤, 2차 예심 때 무대에 오를 5명을 확정한다. 그런데 예심 때만 해도 놀라운 실력을 자랑하던 참가자가 녹화 때 무대 위에선 극심한 긴장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진짜 실력자를 가리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중요했다. 프로 가수와 진검 승부를 벌인 준우승자들의 ‘왕중왕전’을 끝으로 시즌1을 마감한 <히든 싱어>가 남긴 아쉬움은 가수를 꺾고 1천만원의 상금을 거머쥔 모창 출연자가 없었다는 사실. “ 적어도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는데 어렵더라. 하지만 이룰 게 있으니까 다음 시즌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시즌2는 오는 9월 무렵에 전파를 탈 계획이다.
입심의 파괴력, <썰전>
JTBC의 <썰전>은 제목 그대로 ‘썰의 전쟁’이다. 흔히 ‘썰을 푼다’고 했을 때의 그 ‘썰’ 말이다. 김수아 PD와 정다운 작가가 <썰전>을 기획했을 당시만 해도 부정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한주간의 이슈를 토크로 푼다는 청사진을 그렸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라디오 스타> 같은 정치 토크’라고 하면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김수아) 동아줄을 내려준 것은 유일하게 호감을 표한 여운혁 CP였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썰전>은 빛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일단 방송 후 반응을 보자는 분위기는 <썰전>이 전파를 탄 뒤 호의적인 물살을 탔다. 예능국뿐만 아니라 보도국에서도 흥미를 보였다. 일찍이 <썰전>의 자산은 김구라였다. <라디오 스타>의 작가시절부터 김구라의 토크 감각에 익숙했던 정다운 작가는 일찍이 김구라를 위시한 토크쇼를 구상했다. 김구라가 운전대를 잡은 <썰전>을 굴려줄 단단한 바퀴가 될 고정 게스트들이 관건이었다. “처음부터 섭외가 반이라고 생각했다. 달변도 중요하지만 결코 기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말할 사람들을 구성하는 게 최고의 과제였다.”(김수아)
1부와 2부의 외피는 정치와 문화란 점에서 확연히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결국 썰을 푼다는 것. 방송을 통해서 묻지 않았던, 사실은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고위공직자들의 인명을 앞에 두고 던지는 질문이 이런 식이다. “그 중 뭐가 ‘땡보’직인데?” <라디오 스타>를 벤치마킹했다는 토크쇼답게 <썰전>의 파격이란 바로 그 솔직함 자체에 있다. 이는 정치 문외한인 예능 작가들 덕분이기도 하다. “국회의원들이 재래시장 살리기를 한다고 보라카이로 연수를 갔다고 하면, ‘거기서 뭘 배워서 오죠?’ 이런 리액션이 가능하니까. 보통의 인간사에서 일어날만한 일이 근엄해 보이는 정치계에서도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되면 웃기더라.”(정다운) 토크 주제가 잡히면 관련 자료를 게스트들에게 보내주고 작가들이 직접 통화하면서 게스트들의 의견을 대본에 반영한다. 하지만 뉴스는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법. 정해졌던 주제 대신 새 이슈로 갈아타는 건 다반사다. 드라마로 치면 ‘쪽대본’을 쓰는 셈. 개개인의 입담이 좌우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특별한 리허설도 없다. 방송 전에 간단하게 당일의 토크 주제의 흐름과 중점을 정리한 뒤 안부나 묻는 수준이다. 썰을 풀 준비가 된 고정 게스트들이 준비된 덕분이다.
사실 월요일에 녹화해서 목요일에 송출하는 방식은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에선 상상할 수 없다. <썰전>의 평균 녹화시간은 4시간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4시간 동안 쉴새 없이 말하는 게스트들의 입담’을 걸러내기에 이틀은 생각보다 버겁다. 하지만 뜨거운 뉴스를 뜨거운 타이밍에 썰로 푼다는 건 <썰전>만의 강점이다. 그리고 녹화일과 방송일의 간극을 줄이는 건 <썰전>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궁극의 해법이다. 김수아 PD와 정다운 작가는 <썰전>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한다. “콘텐츠가 좋으면 결국 사람들이 본다.” 그래서 밥 먹을 때 엠넷을 봤던 정다운 작가는 이젠 YTN을 보고, 김수아 PD는 <9시 뉴스>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아, 글쎄, 이소라 누나가 부른 것처럼 바람이 분다니까. 그리고 김동률이 노래합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 정말 어떻게 안될까.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라서였을까. 그 뒤로 우린 네 번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연애의 온도>는 장영(김민희)과 이동희(이민기)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난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어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개차반 같은 공방이 펼쳐진다. 뒤에선 울고 불고 짜다가도 앞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회복된다. 거짓말처럼 붙어먹는다. “나 너랑 처음 하는 것처럼 떨려.” “나도 그래.” 몇 번이나 함께 뒹굴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 자는 것처럼 말하고 진짜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대체 왜 싸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뭐 대수인가.
희한한 일이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망쳐놓은 뒤에야 풍요로웠던 시절이 간절해진다는 것이. 누구나 러브 스토리를 꿈꾼다. 솔로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금이야 옥이야 물고 빨며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귀엽고 예뻐죽겠지. 그리고 점점 변한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이 정도도 못 참아?’에서 ‘이 정도로 해줘도 저래?’로 진화한다. 편하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다 이해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결국 그 관성은 이별에 부딪혀서야 멈춰서고 되돌아본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덕분에 헤어진 연인 가운데 몇몇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 헤어진다.
<연애의 온도>는 이별의 과정 이후의 결과를 전시하며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재회를 통해서 이 남녀가 일찍이 어떤 방식으로 헤어졌을지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동어반복이다.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서 잘될 확률은 3%’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로또에서 1등이 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라는데 매주마다 1등이 나온다’니 희망을 갖고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미안하지만 관계에서 로또는 없다. 당신의 애인은 복권이 아니다. 그러니 서로를 기꺼이 감내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당신 혹은 내가 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난 그녀와의 다섯 번째만의 이별에서야 그걸 알았다. 당장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그걸 알 때 비로소 진짜 이별했다. 그날은 잠도 잘 왔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어도 선명한 금은 남는다. 더 이상 예전의 접시가 아니다. 박살난 관계에서도 금은 선명하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사실 그 금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 없다는 속설이 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이별했다. 이별했었다.
<연애의 온도>에서 배우는 실전 연애 팁
DO 기다림
헤어지자는 그녀 혹은 그를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버려라. 즉흥적인 흥분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니 일단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라.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도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당장의 어떤 노력에도 되돌리기 힘들 거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감내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Don’t 진상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뭐,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야!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부터 “남자(여자) 생겼어? 그 새끼 누구야?” 같은 막말을 내뱉는다면 당신 역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잡고 싶으면 당신부터 잡을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깊은 배려라면야 어쩌겠냐마는.
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스타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말엔 대부분 실체가 없다. 그저 떠돌 뿐이다. 그 사이에서 스타가 산다. 말을 타고 건너면서도 빛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별은 본다. 별이 빛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스타를 본다. 스타란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건 자꾸 보고 싶기 마련이다. 그리고 별과 달리 스타란 보다 가까운 존재다.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그들을 더욱 가깝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말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 일상이, 그 일상에 대한 말조차도 팔리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말이 유통되는 것도 그래서다. A가 B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C가 여자를 엄청 밝힌다던데? D가 사실 결혼도 하고, 임신도 했다던데! 얄리얄리얄라셩 얄라리얄라! 숱한 루머가 전국 팔도 각지를 돌고 도는 와중에 개중의 몇 가지는 진실로 판명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확실해진 몇 가지 진실이 불확실한 다수의 루머를 압도한다. ‘카더라 통신’이 예언의 서로 등극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스타가 과연 공인인가? 혹자는 말한다.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그들을 공인이라 여겨야 한다고. 그 범위가 크건 작건 모든 일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기사를 써서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기자는 공인인가. 혹은 방송에 나온 누군가가 일회적으로 대중적인 파급력을 행사했다면 그는 공인이란 말인가. 공인의 사전적 정의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공적인 일이란 공공의 업무를 대신해서 수행하는 일에 가깝다. 정치나 행정이 그렇다. 스타라는 직업이 봉사가 아니듯 대중의 관심 또한 기부가 아니다. 스타라는 상품성에 대한 지불이다. 정당한 등가교환이다. 스타로서의 영향력에 공인이란 탈을 씌우는 건 결국 불공정거래라는 말이다.
스타들에 관한 말들은 대부분 막연한 동경이나 순수한 관심을 넘어서 대부분 지나친 관음이거나 무분별한 사생활 침해로 발전하며 때때로 폭력성을 띤다. 밑도 끝도 없는 루머나 풍문에 시달렸던 셀레브리티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삶을 고백한다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진 톱배우의 주변인들로부터 그가 평소 악플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증언을 듣게 될 때, 우린 그 화려한 삶에 깃든 명암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삶을 긍휼히 여길 수 없다. 그 삶이 너무나 풍요로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선 마땅히 감내해야 할 운명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스타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관심을 먹고 빛을 발하는 존재다. 어떤 형태로든 대중의 관심이 스타의 지위를 가늠하게 만드는 바로미터가 된다. 오죽하면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 필연적으로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스타로선 삶에 드리운 그림자를 밟고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의 사생활조차도 상품이 되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리값을 지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주목을 받고 다수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건 그만큼 다수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가짜라고 변호하거나 진짜를 덮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대중에게 중요한 건 그 말의 실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진위를 불확실한 말을 끊임없이 유통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게 돌고 도는 말들을 주워다가 팔아먹고 시간을 때운다.
스타들을 다루는 언론 매체들조차도 사실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아류가 되는 시대다. 기이하게도 국내에선 기자라고 명함을 판 사진기자가 파파라치 컷을 찍고 소속 매체에서 보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스포츠 일간지에서 시작된 일이 파파라치 컷을 전문적으로 찍고 배포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창궐 아니 창간에 이르렀다. 최근 그 사이트는 기사를 통해서 한 톱배우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톱배우는 그 사이트에서 찍은 파파라치 컷으로 오해가 발생했다고 밝혔고 그 사이트에선 그 톱배우가 자신들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으며 그가 거짓말을 늘어놓을 경우 자신들의 배려로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그 톱배우 역시 ‘근거 없는 ‘찌라시’의 피해자’라고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두둔보다도 흥미로운 건 ‘찌라시’라는 단어와 자신들을 격리시키는 그들만의 철학과 기준이지만.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만들지마. 그럼 거기가 끝이야. 사람들이 널 끝없이 동경하게 만들어. 그게 스타야.” 드라마 <온에어>의 대사처럼 스타는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흉하고 보기 싫은 언어들 속으로도 몸을 숨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에 섞이는 순간 많은 것을 해명하거나 드러내 보여야 한다. 사생활조차도 계산대에 오른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진정한 자신을 지워야 한다. 가진 게 많아서 부러울 것 같은 삶에 빈곤한 일상이 드리울지라도 그 빈곤한 일상조차 구원할 수 있는 건 그 일상조차 진실과 거짓 사이에 끼워 넣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소문의 일부로 위장하면 된다. 그렇게 진짜 자신의 모습까지도 거짓의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그저 떠도는 말 사이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존하면 된다. 그렇게 완전한 거짓의 보호색을 띄고 스타는 살아간다. 혹은 살아가야 한다. 대중들이 스타라는 환상을 끝까지 소비하도록. 혹은 스타가 군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스무 살 넘은 성인이 클럽에서 만난 이성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법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만 없다면 말이지.
그저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5년을 함께 하니 알겠다. 그저 나만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집안의 풍경도, 삶의 태도도, 우리 강아지 하늘이로 인해서.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하는 목소리가.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마치 애한테 말을 걸 듯 오냐, 오냐, 하셨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 강아지였으니까. 원래 어머니께선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려동물을 집에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강아지와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건 2008년 2월 즈음이었다. 생후 3개월 된 말티스가 집에 온 건 정확히 2월 12일이었고. 누나가 어머니께 잠깐 집에 데려다 놓을 거라 말했던 것도 어느덧 5년을 넘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아지 키워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름은 하늘이다. 뭔가 좀 더 시크하거나 세련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 불린 이름이 하늘이라 해서 그냥 동일한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요즘 집에서 강아지 키우는 게 한두 집도 아닌데 별일이냐고 묻는다면 나에겐 별일 맞다. 나이 서른에 다다라서야 반려동물을 집안에 들인다는 건 때때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처음엔 대부분 우여곡절이었다. 강아지는 좌변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럴 수가 없지. 그러니 녀석의 뒤처리(?)를 직접 ‘핸드 메이드(?)’로 해줘야 한다는 건 대단한 도전이었다. 길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화장실이 가까운 마루 한 부근을 하늘이의 화장실로 내줬다. 하지만 침대 이불에서 하늘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부아가 치밀어서 도끼눈이 된 내 시선을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표정 덕분에 사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단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자면 그 흔적을 치우기 전에 강아지를 그 흔적이 보이는 곳 앞에 데려다 두고 가리키면서 신문지를 말아서 바닥을 치면서 혼내던가, 가끔 코를 때리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상태라면 역효과만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발견하는 것도 관건이라 했다.
차츰차츰 하늘이의 흔적을 치우는 게 익숙해질 즈음, 하늘이도 자신이 가려야 할 자리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알아듣는 말이 늘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께선 갑자기 불러선 ‘이것 좀 보라’고 하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앉아!’ 하니 앉았다. ‘손!’하니 손을 내밀었다. 이 기분은 뭐랄까. 자식을 얻은 친구 중에 어느 날 어린 아기가 갑자기 몸을 발라당 뒤집으니까 기분도 갑자기 발라당 뒤집어지듯 미친 것마냥 좋아졌다는데, 이런 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뒤, 어머니는 하늘이의 새로운 능력을 다시 개발해주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빵야!’하는 순간, 등을 대고 발라당 누워서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돌아!’하면 제 자리에서 뱅글 돌고, ‘굴러!’하면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을 보니 잠시 군대에서 유격 훈련 받던 기억이 나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대단히 기막힌 기분이었다. 비결은 그저 손에 들고 있는 간식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점점 머리를 굴려서 간식을 들고 있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무슨 짓을 해도 딴청을 피웠다. 문득 기억이 났다. 수의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이가 똑똑한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사실 하늘이는 처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을 무렵, 심장의 판막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해서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을 거란 진단을 받았고,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들었다. 혈액 순환을 방해할 수 있는 육류 음식의 섭취는 제한하고, 최대한 뛰지 못하게 하라는 말도 들었다. 전자는 충실히 지키고 있지만 후자까지 막긴 어렵다. 사실 산책을 주기적으로 자주 시켜주는 형편은 못 되는데 하늘이는 집 안에서 기분만 좋으면 장난을 걸고 털이 휘날리게 뛰어다닌다. 처음엔 뛸 때마다 놀라서 막았지만 이젠 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가끔씩은 설마 오진은 아니겠지,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한번은 대수술을 감행한 적이 있다. 명절에 이쑤시개에 꽂힌 전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을 하늘이가 보고 대번에 삼켜버린 적이 있었다. 이쑤시개가 가로로 걸려서 위에 천공이 생겼고, 낑낑대는 녀석을 안고 병원에 가서 개복수술을 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하늘이를 보러 위문을 갈 때마다 측은하게 낑낑거리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추후에 '0'이 무려 6개(!)가 붙은 수술비 및 입원비를 결제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보험 적용도 안 되는 반려동물 병원비에 부가세까지 붙이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라니까.
마루 한 구석에 화장실이 생겼다던가, 언젠가 관절염에 걸릴까봐 점프를 하지 않도록 계단 형태의 스텝을 침대 곁에 뒀다던가, 하늘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집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던가, 방 한 쪽에 있는 하늘이 물통을 수시로 살핀다던가, 화장실 문을 꼭 닫아둔다던가, 눈에 띄는 집안 풍경의 변화란 이처럼 소소하다. 하지만 집에 들어갈 때 나를 맞이하는 이가 없지 않다는 안도감이라던가, 집안에서 말을 걸 상대가 하나 늘었다던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던가, 작은 인형 같은 걸 보면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던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사고가 변했다. 저 밖의 현관 대문 앞에 서기만 해도 녀석은 놀랍게 알아보고 짖어댄다. 유독 나에게 그렇다. 강아지 좀 키워본 지인은 반갑다는 표시일 거라 했다. 하긴 꼬리를 흔들어대더라니.
하늘이가 집에 오기 전까진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단지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 즉 내가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 단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있어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하늘이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몹쓸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하늘이는 나보다 먼저 늙고, 먼저 눈을 감을 거다.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처음엔 한 손 위에 올려놓아도 됐던 하늘이는 이제 양손으로 들면 제법 무게가 느껴진다. 그 선물 같은 무게를 느끼지 못할 때가 올까봐 조금 두렵다. 그러니까 일찍 가지 말고 오래 살아줘. 지금처럼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목욕할 때 말 안 들어도 구박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이쑤시개 같은 건 다시 삼키지 않는 걸로. 다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무려 '0'이 6개라서가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