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개봉작과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고 취재를 했다 재개봉작이 주목 받게 된 결정적인 방아쇠는 작년 11월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하며 3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덕분이겠지만 그에 앞서 2014년부터 다양성영화 시장이 활성화된 것이 일종의 장전 역할을 한 것 같다. 실제로 2013년에는 다양성영화 순위에서 10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6편에 불과했지만 2014년도에는 18편으로 늘었고, 이중에서 2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에 이른다. 심지어 그해에 <비긴 어게인>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 해의 뻥튀기가 됐지만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였다. 2013년도에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만여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으니 확연한 차이다. 다양성 영화 시장에 대한 주목도가 남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이후에 다양성영화에 대한 주목도가 상승하면서 약간의 투기 심리가 형성됐다는 것. 실제로 해외 마켓에서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먹힐 만한 영화들을 구입하고자 하는 수입사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해당 영화들의 단가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결국은 시장 안에서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2015년도에도 다양성 영화 시장은 나름대로 선방했는데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편에 달했고, 2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8편에 이른다. 18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위플래쉬>와 같은 홈런작도 나왔다. 물론 2014년은 거의 마약 같은 한 해였으니 비교불가분이지만 어쨌든 다양성영화의 시장성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다는 건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동일한 시장 규모에서 수입가가 상승한 탓에 시장 전체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필연적 결과다. 게다가 올해 다양성영화 시장의 전체 시장성은 지난 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인상이다. 아직 한 해가 끝나지 않았지만 10만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한 18편 가운데 2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4편에 불과하다. 그만큼 다양성 영화를 통해 재미를 본 수입사가 현저히 줄었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결국 재개봉을 통해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이터널 선샤인> 이후로 재개봉작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은 2014년 이후로 다양성 영화 시장이 확대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영화 시장의 과열 이후로 이어진 시장성 악화로 인한 투자심리의 위축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로서도 유효한 결과 같다. 아무래도 신작에 비해 10~30% 수준의 수입가로 개봉 판권을 가져올 수 있는 재개봉작은 이미 인지도가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도 마케팅에 유리하다. 물론 모든 재개봉작이 흥행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수입가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투자가치는 충분하다. 마케팅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P&A를 낮출 수 있고, 낮은 수입단가 덕분에 BEP 즉 손익분기점도 상당히 낮다. 간단히 말하면 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고, 망한다고 해도 그 손실이 신작에 비해 역시 낮다.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이 서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재개봉작들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다양성영화 시장 안에서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한다는 점에 있다. 새로운 신작들도 개봉관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재개봉작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인상이 있는데 이를 테면 요즘 단독상영 정책을 펴는 멀티플렉스 입장에선 좋은 상품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브랜딩은 어느 정도 구축이 돼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마케팅에 힘을 실어줬을 때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는 작품들이 꽤 있다. 반대로 시장의 인지도부터 구축해야 하는 신작 다양성영화들은 역설적으로 상영관 확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영화마다 상대적이겠지만 한 회차 상영조차 아쉬운 다양성영화 입장에서 경쟁률이 높아진다는 건 여간 부담이 아니다. 특히 중소 규모의 수입영화를 대거 들여오는 몇몇 수입사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느낌이다.
동시에 다양성영화 시장도 소모될 가능성이 있다. 한번 구축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재개봉작이 늘어나고 해당 영화들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 다양성이란 단어에 대한 인식이 재개봉작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성이 급격하게 낡아버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역시 분명 문제라면 문제다. 사실 재개봉작 시장은 장기적으로 좋은 포석이 될 수 있다. 자본력이 약한 중소 규모 수입사들 입장에선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관객 입장에서도 고전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는다는 점에서 윈윈일 수 있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얼마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올해처럼 다양성 영화 시장의 위축이 확연히 보여지는 상황을 본다면 특히나 이런 화두는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을지로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낡아가면서도 풍화되지 않는 활기를 지켜왔다. 그
활기에 새로운 감각이 수혈되고 있다. 을지로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굉음과 마찰음, 비좁은 골목을 민첩하게 누비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들. 이른 아침 을지로의
시간은 피가 도는 혈관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흐른다. 6.25 전쟁 이후, 목재, 철물, 공구, 미싱, 타일도기, 조명
등 갖은 분야의 제조업자들이 자리를 잡고 반세기 동안 뿌리를 내린 을지로는 고목처럼 자리한 가게들의 숲과 같다.
모세혈관처럼 어지럽게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마다 손으로 직접 쓴 간판들이 이어진다. 그 간판
아래로 부지런히 오가는 발걸음과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을 통해 을지로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할 것도 없는 곳’이 됐다.
그런 을지로에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작가들이
을지로에 둥지를 트고 작업을 개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의 유입으로 색이 바랜 거리에
새로운 활기가 채색되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은 왜 을지로를 찾았을까.
“작업실을 옮길 시기가 됐고, 더 큰 공간이 필요해서 찾다가 을지로로 오게 됐어요. 사실 을지로는 재료를 사러 자주 오던 곳인데 이곳에 작업실을 두게 되니 운송도 용이해졌죠. 따로 용달을 부를 필요도 없고 리어카만 끌고 가면 되니까요.” 지난
해에 이태원에서 을지로로 이전한 ‘길종상가’의 대표 박길종의
말처럼 을지로는 장르를 망라한 예술가들이 작품의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곳이다. 설치 작품이나
가구 제작 등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길종상가가 을지로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아트디렉터인 염승일이 디자인 스튜디오 ‘플랫플래그(Flat Flag)’를 을지로에 연 이유도 동일하다. “원래 문래동과
이태원에서 작업실을 열었다가 을지로3가의 공동작업실에 들어간 뒤 재료 공급과 공정 작업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알게 됐고 개인 스튜디오를 열기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았습니다. 공업지대가 가까운 곳에선 일반적인
사무실을 열긴 어렵지만 작품을 만드는 작가에게 터프한 환경은 문제가 안 되죠.”
재료와의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장점은 새로운 영감을 부여하는, 창작의
기회비용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양한 재료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잘 모르던 재료를 알게 될 때고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생기는 거 같아요.” 박길종 대표의 말이다. 아트디렉터 염승일도 비슷한 목소리를 낸다. “재료나 도구를 바로
수급할 수 있는 환경에 머무를 수 있으니 적용이 가능할 것 같은 소재를 접할 때마다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만큼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크게
발품을 팔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됐으니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는 창작열을 한 뼘 더 늘리는 기회로
호환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을지로에서 거리감이란 그 자체로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된다.
을지로가 주는 거리감의 장점은 단순히 을지로 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의
중심지에 자리한 을지로는 어디서든 가깝게 올 수 있고, 어디나 가깝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인쇄소인 코우너스는 지난 해 소공동에서 을지로로 자리를 옮겼다. “사무실에서 디자인과 인쇄를 하지만 재단, 제본, 기타 커팅 등의 후가공은 거의 충무로에 있는 인쇄골목에서 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소공동에 있을 땐 충무로까지 택시를 타고 오갔지만 을지로에선 상대적으로 가까워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죠. 게다가 종이를 배송할 때도 가까운 지역은 퀵비를 받지 않고요. 여러
모로 비용이 절감된 셈이죠.” 코우너스의 공동대표 조효준의 말이다. 또
다른 공동대표 김대웅이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충무로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라 찾아가는데 부담이
덜한 거 같아요. 그래서 후가공의 종류가 다양하니 작업에 어울릴만한 업체를 찾기 위해 예전보다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플랫플래그의 염승일도 비슷한 장점을 느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레이저 커팅이나 3D 프린팅을 활용하고 있는데
을지로와 가깝기 때문에 여러 모로 좋습니다.” 결국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중심에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산업을
품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을지로라는 거점 자체가 예술가들을 위한 보고가 된 셈이다.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
개인적으로 을지로를 개척한 작가들도 있지만 공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을지로에 정착한 작가들도 있다. 지나 2014년 서울특별시 중구청의 시장경제과에선 을지로의 경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던 중 을지로의 공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런 공가들의 활용방안을 구상한 뒤 업무계획수립을
세운 것이 2015년의 일이었다. 중구청의 지원을 통해 비어있는
건물을 젊은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파악된 공가의 건물주들과의 사업설명회를 열었다. 자신의 공간을
얻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개인의 창작열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하고 이를 지역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로 모색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몇몇 건물주가 이에 호응했다. 중구청에선 건물주를
설득해 절반으로 조정한 월세의 10%만을 작가에게 부담했다. 보증금과
나머지 90%의 월세는 중구청에서 보장하는 방식으로 2년
계약을 보장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다.
그런데 중구청에선 왜 을지로의 공가를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했을까? “을지로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재료나 기술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 그들이 선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풍경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래서 예술과 연계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가 용이한 부분이 있으니 예술가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업이라 판단했어요.” 중구청 시장경제과 이하숙의 설명처럼 을지로에 예술적인 숨을
불어넣고 새로운 활기를 일으키겠다는 취지에서 추진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리고 2015년 7월, 프로젝트의 1기 멤버의 입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현재 2기 멤버까지 입주하며 다섯 개의 공간을 확보했다. 여섯 명의 작가가
모여 다양한 예술활동을 전시하는 예술창작공간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을
비롯해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미술학부 전공자 7인이 함께 뜻을 모아 감상 교육이나 체험프로그램을 통한
공동체 중심의 미술사업을 개진하는 ‘R3028’ 그리고 가구와 생활용품 제작 스튜디오인 ‘산림조형’과 을지생산이라는 브랜드를 육성하고자 하는 금속공예 스튜디오
‘서클활동’ 등 다양한 결을 지닌 젊은 작가들이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라는 지붕 아래에 자리를 폈다.
가구와 생활용품을 디자인하는 산림조형의 소동호 작가는 이 프로젝트의 1기
멤버로서 어느덧 을지로에서 1년을 보냈다. 학생 때부터 찾았던
을지로에 새로운 작업실을 구하려던 찰나에 때마침 프로젝트 공고를 알게 됐고 지원하게 됐다는 그는 을지로를 찾은 여타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접근의 용이함과 재료 수급의 수월함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다양한 기술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습니다. 바로
옆에 흔히 시보리라고 말하는, 냉면기와 같은 원형판의 형태를 찍어내는 사출 공정을 하는 집이 있는데
요즘의 대량생산 방식과 다른 수공업 방식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그런 기술을 활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아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런 기회에 숙련된 기술자의 도움을 얻어 보다 효율적인 작업방식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서울 안에서 금속공예 재료 수급이 유일하게 가능한 곳인 을지로를 학생시절부터 자주 찾아서 잘 안다는 ‘서클활동’의 조민정 작가 또한 을지로의 전통적인 기술자들과의 협업
구조를 큰 장점으로 꼽는다. “금속 공예 특성상 기술자와 함께 가성비를 살릴 수 있는 협업이 가능할
거란 판단을 했어요. 그리고 작은 스튜디오에선 큰 공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제품 제작이 쉽지 않은데
주변에 큰 공정이 가능한 제조사들이 있으니 시제품 제작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죠.” 오랜 역사와 함께
기술을 연마해온 숙련공들이 즐비한 을지로는 젊은 작가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창작열을 완성도 있게 구현해줄 원숙한 파트너와의 협업을 기대할 수 있는
이상향인 것이다. 물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오랫동안 생업의
터전을 지켜온 기술자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과정이 단박에 이뤄질 리 없다. 그리고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서클활동의 이건희 작가 또한 그렇다.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협업을 해봐야 가능성이 확대될 것 같아요. 한편으론
숙련된 기술자들의 작업 방식을 관찰하는 과정이 현장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디자인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중구청에선 매년 을지로 일대의 조명 업체들과 연계한 ‘을지로 라이트웨이’라는 행사를 개최한다. 올해에도
11월에 어김없이 열리는데 을지로 디자인 아트 프로젝트에 입주한 작가들도 이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의무감에 짓눌리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지만 작가들은 오히려 이를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보다 적극적이었다. “처음에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점점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찾게 되는 것도 같아요.” 실제로 소동호 작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을지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을지로 버스 정류장에 타일 도기 특화정류장 디자인에 참여했고, 을지로 투어 프로그램인 ‘을지유람’의
지도 디자인 작업을 도맡기도 했다. 소동호 작가와 함께 을지3호를
공유하는 이지성 작가는 더 큰 그림을 기대하고 있다. “을지로 기반의 창작자가 늘어난 만큼 그들을 묶을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올해 라이트웨이에서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문분야가 각자 다른 만큼 서로의 재능을 나누는 활동을 조금씩 해나가야죠.”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영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해온 정원석 작가가 국내로
들어와 스튜디오 ‘메이커원(Makerwon)’의 자리를 을지로로
낙점한 것도 접근성 때문이었다. “금속과 전자 관련해서 재료 수급이 용이한 동시에 매뉴팩처링이 가능한
곳은 을지로뿐이었어요. 영국에도 이런 곳은 없어요. 서울처럼
고도로 발달한 도시 한가운데에 매뉴팩처링이 가능한 지역은 전세계적으로 이곳뿐일 거예요.” 그의 말처럼
을지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풍경이다. 언뜻 보면 낡고 황폐해진 슬럼가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성을 지닌 영토를 기반으로 켜켜이 쌓여온 기술의 집합소. 창작적인 영감을 부추기는 이야기와 창작을 구체화시키는 노하우가 자리한, 완벽한
유산이다. “일본 요꼬하마 시의 상점가인 모토마치는 장인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에요. 모토마치에서 만든 제품들은 도쿄의 유명한 상점가인 긴자로 유통되는데 그만큼 오리지널이라 인정 받는 브랜드가
된 셈이죠. 을지로로 그렇게 지역을 대변하는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하숙 씨의 바람이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꿈을
꾸는 예술가들이 이미 을지로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미래다.
(MorningCalm 09 SEPTEMBER 2016 'Contemporary Korea')
결혼은 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별 일을 겪게 되는 일이 결혼일지도 모르겠다. 결혼 이후 3년 남짓한 세월을 보낸 입장에서 되새기는, 결혼에 관하여.
벌써 3년이다. 3년을 만난 여자친구가 아내가 돼서 함께 살게 된 것이.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와는 6년째 알고 지낸 사이가 된 셈인데 우린 남들이 신혼부부라고 부를 때에도 특별히 신혼 같다는 생각을 못했다. ‘4년째 연애 중’이 ‘결혼 4년차’로 갑자기 바뀐 기분이었달까. 어쨌든 연애라는 것이 인생에서 쓸모 없는 단어가 된 뒤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혼을 했다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난다거나 그렇진 않다. 하지만 여전히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종종 실감하게 된다. 이를 테면 타인의 결혼식장에 가게 되는 경우, 턱시도를 입을 일도 없었고, 주례사를 들을 일도 없었고, 결혼사진을 찍을 일도 없었던 내게 언제나 결혼식은 경험해보지 못해서 신기한 구경이기도 하지만 경험해보지 않아서 다행스런 통과의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결혼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반적인 결혼 준비 절차를 밟는 대부분의 예비 부부들과 다른 방식의 결혼 과정을 겪었던 것도 어떤 의미에선 남다른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그랬다. 결혼은 일생일대의 쇼핑 기회라고. 부피가 큰 가구부터 사소한 가재도구까지, 사야 할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아진다. 하지만 필요할 것 같아서 사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고, 살면서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사라는 유경험자의 조언을 받들어 최대한 절제한다고 했건만 3년을 살고 나니 부질 없이 자리를 차지하거나 어딘가에 쳐 박힌 물건들도 있긴 하다. 이를 테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계 같은 것 따위 말이다. 3년
동안, 아니, 결혼하고 1년
사이에 한 세 번 정도나 썼던가. 그러니까 그때는 일생일대의 쇼핑 기회라지만, 희한하게도 인생에서 쓸모 없는 것들이 굉장히 갖고 싶어지는, 절정의
지름신을 접신하기 좋은 타이밍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금 결혼을 앞두고 세간을 장만 중인
예비부부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살면서 이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상 구매 리스트에서 일단 지워두는 게 좋겠다.
결혼 과정에서 선결 과제는 신혼집을 구하는 일이다. 집을 구하면 일단
결혼 과정의 절반은 끝난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 과정은 만만치 않다.
아내의 직장과 내 직장의 중간지대에서 집을 보러 다녔고, 최대한 발품을 팔아 일대의 부동산을
샅샅이 방문해 연락처를 남겼는데 그만큼 많은 집을 보러 다녔다. 사실 집을 보러 다닌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단순히 집을 보러 가는 것 같지만 결국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훔쳐보게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세상엔 정말 별의별 집이 다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집을
구하는 신혼부부는 호구가 되기 좋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신혼집은 결혼식 전까진 구해야 하니 적당한
집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닥쳐서 구할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어느 친절한 부동산 주인이 말을 해준 뒤로 그 동안 봐왔던 집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터무니 없는 집을 보여주며 ‘이 정도면
신혼부부가 살기 딱 좋죠. 그런데 결혼식 날짜가 언제에요?’라고
묻던 의도가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집을 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 동네에, 원하던 예산 안에서.
아까도 말했듯이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상 결혼 과정의 기준점이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혼
과정들이 헤쳐 모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테면 우리 부부는 신혼집을 확정하기 전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이유인즉슨 성수기 시즌이 와서 항공료나 숙박비가 오르기 시작하는 5월이 되기 전인 4월에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경비를 상당히 아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4월에 하와이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함께 한
건 나와 아내 그리고 친한 지인까지 세 사람이었다. 나의 결혼 과정을 듣던 이들은 보통 이 대목에서
동공이 확장되는 게 느껴지는데 사실 아내와 나는 어차피 함께 술 마시며 어울릴 수 있는 지인이 있다면 더욱 재미있지 않겠냐는 의기투합으로 상황에
어울리는 지인을 섭외해 신혼여행을 빙자한 그냥 여행을 했던 셈이라 해도 좋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지인이 없었다면 하와이 신혼여행은 지금보다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 어려웠을 것 같다. 하와이 여행에 동행한 지인은 하와이 현지에서 금발머리 신부가 주례를 하는 결혼식을 선물했는데 정말 뜻 깊은
추억이 됐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결혼행진곡도
축가도 없는 결혼식이었지만 앞으론 바다가 보이고, 등 뒤론 공원이 이어지는 곳에서 아내와 함께 잘살
것을 다짐했던 기억은 분명 인생에서 잊기 힘든 순간으로 남아있고 남게 될 것 같다. 그런데 결국 내가
결혼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겪을 수 있었던 남다른 과정들은 사실 그 결혼을 흔쾌히 허락해준 양가의 부모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묵한 미식가이신 장인 어른과 손재주가 남다른 장모님을 뵙기 위해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여행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인생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결혼이란 내게 여행과도 같은 것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대세는 VR이다. 모두가 VR을 언급한다. 바람이 분다. 물론 이것이 판을 뒤엎을 바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VR영화
<카타토닉>을 상영했다. <카타토닉>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기 보단 휠체어를 타고
괴기스러운 공간을 돌아다니며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드는데 목적을 둔 호러 단편물이다. 이를 테면 테마파크의 귀신의 집 같은 거랄까. 특별히 마련된 휠체어에
앉아 안내에 따라 VR헤드셋을 쓰니 플레이 과정에 대한 선택을 묻는 문구가 떴다. 헤드셋의 전면부를 터치하니 영화가 시작됐다. 다른 세상이 시야에
꽉 찼다. 아니, 다른 세상이었다.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이한 풍경 속으로 내가 떠밀려가고 있었다.
긴장감이 엄습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앞서 영화를 본 여자가
상모 돌리듯 머리를 돌려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VR영화는 고개를 돌리면 그 시점에 해당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이 시점을 결정할 수 있다. 신기해서 상모 돌리듯 상하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게 됐다. 그런데 무언가 굉장히 끔찍한 것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내가 왼쪽을 보고 있어서
지나쳐 버린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긴장감 대신 내가 외면한 귀신의 쓸쓸함을 느껴버렸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시력이 0.5 정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날 영화를 보는데 활용된 건 삼성기어VR인데 해상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담긴 기사가 적지 않게 검색된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막는 기술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변화다. 아이맥스,
3D, 4D 등 새로운 관람 방식이 더러 등장했지만 VR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그만큼 전세계 영화계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루카스필름 산하의 한 스튜디오에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관객이
다스베이더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다스베이더의 시점으로 영화에 참여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이맥스(IMAX)사에서도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아이맥스사에서 만드는 VR영화이니만큼 기존의 VR기기에 비해 화각이 넓은 VR기기를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VR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기존의 영화산업에 몸담고 있던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해 구글에선 <헬프>라는 단편 VR영화를 발표했다.
간단한 테스트 영상 정도를 만든 게 아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한 저스틴 린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우주에서 날아든 괴물이 활보하는 도시를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청자가 영화 속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구글과 함께 <헬프>를 제작한 콘텐츠 기업 불릿의 대표 토드 마커리스의 변이다. 그렇다.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다. 감독이 결정한 시점에 영화의 의도가 담겨있다. 문제는 VR영화는 관객이 시점을 결정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완벽하게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체험이 의도치 않게 영화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관객에게 360의 시야각을 열어줌으로써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건 VR영화가 지닌 현재 시점의 한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과연 VR영화가 영화산업의 미래를 견인할 화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종의 답변일 수도 있다.
VR영화가 영화를 대체하는 미래일 것 같진 않다. 다만 VR영화는 하나의 장르를 자처할 수 있다. 1인칭 시점의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극명한 오락적
장점을 품고 있다. 다만 VR영화라는 것이 보편화되려면 극장의
풍경이 달라져야 한다. 관객의 자리마다 VR헤드셋이 비치돼
있거나 3D입체안경처럼 상영관 출입구에서 관객에게 VR헤드셋을
하나씩 나눠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대한 스크린이 아니라 각자의 머리에 쓴 고글을 통해 각자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영관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VR영화를 본다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홈비디오 시장 혹은 기존의 극장과 다른 형태의 VR영화관이라는
신종 사업을 통해 활로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엔 VR영화를 볼 수 있는 VR시네마라는 영화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거대한 스크린 대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볼 수 있는 VR헤드셋이 다량으로 배치돼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VR영화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VR영화는 위험하다. 왜냐면 관객은 감독의 의도와 다른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VR기술을 개발하는 한 회사의
고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대가에게도 VR영화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쟁점인 셈이다. 결국 VR영화는 그에 어울리는
기획과 결합됐을 때 완벽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VR은 영화의 미래라기 보단 새로운 영토, 즉 신대륙의 발견인 것이다.
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곡성>과 <아가씨>는
중력 같은 영화들이다. 근래 한국영화를 두고 논할 때 좀처럼 발음되지 않았던 언어가 두 영화 주변으로
시끄럽게 모여들었다.
지난 5월 11일에 개최된
칸국제영화제에서 <아가씨>는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곡성>은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가 완성한 <스토커>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었다. 국내에서 제작된 작품으로선 <박쥐> 이후로 7년만이었다.
<곡성> 역시 나홍진 감독이 <황해> 이후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었다. 두 작품 모두 개봉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불어오고 있었다. <곡성>은 5월 11일에 개봉했다. 한
달여 만에 6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아가씨>는 6월 1일에 개봉했다. 2주 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흥행작이 됐다. 그리고 여느 흥행작처럼 수많은 감상이 올라왔다. 그런데 근래 여느 흥행작들과는 다른 느낌의 감상들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영화에 대한 해석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영화적 의도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간다. 관객의 시점에서 영화를 평가하기 보단 감독의 시점을 유추해내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객석보단 스크린 너머에 주도권이 놓인 인상이다.
<곡성>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품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폭투를 피한 것처럼 넋이 나간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왔을 것이다. 너무 세게 맞아서 통증보다
얼얼함이 느껴지는 듯한, 그래서 뒤늦게 깨어난 감각과 함께 살아나는 통증의 정체를 알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을 거다. <아가씨>는 민감한 소재를 도발적으로 다루면서도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는 작품이다.
어떤 이는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발가벗기고
조롱 당한 듯한 불쾌함과 직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지 여부를 사이에 둔, 언어의 전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두 영화를 둘러싼 언어의
온도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존중 받고 있다는 건 명확하다. 찬사와 비판 모두 영화의 의도 안에서 이뤄진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이분법적인
감상을 넘어 영화적인 의도 자체를 중심에 둔 해석과 논쟁이 야기된다는 건 결국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인
힘' 자체를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일정한 억양으로만 발음됐다. 영화에 대한
완성도를 논하는 억양은 여전하지만 영화를 해석하고, 지지하고, 영화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억양은 힘을 잃었다. 소위 말해 '때깔'이 좋은 영화들은 많아졌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별다르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 영화들이 너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흥행작이었던 <암살>과 <베테랑>을 봐도 그렇다. 두 작품은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를 관통하는 수작이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시대에 던져야 할 말에 대해 깨닫게 되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결국 언어도 그 쾌감에 갇힌다.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 문법을
설명하거나 두 영화가 관통하는 화두의 배경 지식과 사회 분위기를 살필 순 있지만 두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상상하긴 어렵다. 물론 이는 <암살>과 <베테랑>을 저평가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가 아니다. 다만 최근의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런 장르적 쾌감과 형태적 완성도 그리고 이야기의 완결성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자꾸 잊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론 꽉 차 있지만 상상하게 만드는 재미가 현저하게 줄어든
인상이랄까. 또 다른 화제작이었던 <내부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영화 이상의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세계가 돌아가는 부조리한 함수를 상영관에서 확인하고 사회적인 불만과
분노를 대신 일갈하고 때려눕혀준 영화에 대한 대리만족적인 쾌감만 되새김질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홍진의 <곡성>과
박찬욱의 <아가씨>는 한국영화가, 그리고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실감하게 만든다. 인간의
내면적인 호기심을 직설적으로 강타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은유를 통해 호기심의 외연을
키워낸다. 상영관을 벗어난 순간 맺힌 감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털어내 버리기 보단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
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나홍진과 한국영화 신에 지속적인 흥미를 부추기는 박찬욱을 통해 환기된 영화를 향한 언어들은 보다 소중하다.
본래 영화는 보는 재미만큼이나 말하는 재미가 쏠쏠한 매체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어떤 매체보다도 말의 힘이 강력하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리뷰는 플랫폼의 형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여느 매체보다도 언어로 재생산되는 비율이
현저하고, 관련 커뮤니티도 발달돼 있다. 대중문화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매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영화를 동일한 가격에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른다는 건 결과적으로 기회비용이 따르는 선택이다. 영화에 대한 말을 듣는다는 건 더 좋은 영화를 소비하겠다는 욕망과 깊게 연관돼 있다. 결국 영화를 말한다는 건 우리가 더 나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여기는 감독들과 작가들의 자궁 노릇을 했다. 영화를 말한다는 건 결국 흥미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턱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한 기회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도 최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 홀로 쌓은 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거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5월 17일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언컨대 한반도에서 맨부커상의 존재 자체를 아는 한국인은 출판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굉장히
드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맨부커상이 전국적인 화제가 된 건 이 상이 정말 대단한 상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언론의 헌신적인 보도 덕분이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노벨상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에게
맨부커상이 노벨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것이라고 주지되는 순간 한강은 이미 메시아 같은
존재가 됐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문장이니라. 그런데
말입니다. 한강은 어떻게 맨부커상을 수상했을까?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상은 본래 영국의 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영어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이었다. 한강이 수상한 부문은 2005년에 신설된 인터내셔널 부문인데 영국의
비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소설을 후보작으로 선정하고 수상작을 가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변역한 <The Vegetarian>이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의미다. 그리고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원작자와 번역자가 모두 수상자로 호명된다.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을 그저 언어의 형태를 바꾸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결과물로서 원작을 집필하는
것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국의 정서를 자국의 언어로 이해시키는 작업이란
점에서 번역된 소설은 제2의 창작에 가깝다. 맨부커상은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사실 맨부커상을 수상하거나 말거나, 한강은 이미 뛰어난 작가였다. 그래서 한강에게 몰리는 찬사란 새삼스럽지만 이처럼 훌륭한 작가를 제대로 조명할 기회가 왔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걸리는 건 열광의 기저에 놓인 어떤 심리들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2007년 10월 30일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엔 그 주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2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출판사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맨부커상 수상 직전까지 8년 7개월 동안 대략 6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한다. 3월에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타전된 이후 4만부
이상이 판매됐으니 실질적으로 맨부커상과는 무관한 판매량은 2만권 정도인 셈이다. 해외에서 상을 타기 전후의 상황이 극명하게 갈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하루 독서시간은 6분에 불과하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이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나라에서 매년마다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물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이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활기가 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 신작소설 <종의 기원>을
발표한 작가 정유정을 인터뷰로 만났을 때 그녀는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문학으론 변방국가나
다름 없는데 한강 작가가 기회를 열어준 셈이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 작가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이 해외에 번역돼 있는 한국소설을 주목하게 만들거나 한국소설을 번역하고자 하는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 덕분에 독자들이 소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정유정의 말 역시 유효하다. 최근 서점가에선 전년 대비
소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소설을 읽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얼마나 긴 지구력을 안고 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누군가가
어느 대단한 상을 수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이 국제적으로 문학계의
변방국가로 분류된다는 것보다도 한국 안에서 문학 자체가 변방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누고 한 신문에선 '맨부커상이 K픽션의 문을 열었다'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선 모든 분야의 앞머리에 K라는 성씨를 붙이면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미신이 생긴 것 같다. 혹은 이뤄졌다는 착시를 느끼는 것 같다. 어느 개인의 노력으로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얻겠다는 심리가 읽힌다. 사실
K픽션은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생소한 말이다. 데보라 스미스는 '소주'나 '만화'를 '코리안 보드카'나 '코리안 망가'로 표현하자는
편집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 국가의 문화를 다른 국가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대목에서 ‘K픽션’은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라고 명명하는 행위와 유사하게 보이지 않는가? 실체가
없는 K픽션은 과연 한국문학을 대변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영국소설을 E픽션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럴 리가.
어쨌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성취다.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수상자라는 점에서도 이는 분명 대단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맨부커상 수상이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은 한강의 또 다른 수작 소설 <소년이 온다>를 더불어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은 5월 17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시작했다.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 드린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깬 한국에서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어느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한국 문학의 쾌거."
그렇게 한국은 한강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얻게 됐다. 진정한 한강의 기적이다.
조각 같은 외모와 근육질 몸매를 지닌 헨리 카빌은 갈 수 있는 길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게 슈퍼맨이 돼서 날 수 있었지만 걷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헨리 카빌은 정말 잘 생겼다. 만약 지금이 고대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였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훗날 지금의 시대가 됐을 때 미술 입시 학원에서 헨리 카빌의 얼굴을 본뜬 흉상을 두고 데생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카빌의 학창 시절 별명이 ‘뚱보 카빌’이었다는 게 짐작이나 되는가. “아이들은 항상 짓궂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갖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 남자, 관대하다.
하지만 신은 헨리 카빌에게 관대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슈퍼맨 리턴즈>(2006)의 슈퍼맨 역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슈퍼맨 역에 낙점된 건 브랜든 라우스였다. 물론 이 작품이 혹평에 시달리며 흥행에 고전했던
걸 생각한다면 전화위복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007 카지노
로얄>(2006)에 출연해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다. 감독이었던
마틴 캠벨까지도 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는 것을 지지하며 스크린 테스트까지 진행했지만 영화사에선 조금 더 나이 든 제임스 본드를 원했고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를 선택했다. 반대로 나이가 많아서 출연이 불발되기도 했다.
<트와일라잇>(2008)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2002)의 카빌을 보고 에드워드
컬렌 역에 적격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역할을 주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17세 역할을 맡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캐스팅 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기회는 로버트 패틴슨의 것이었다. 카빌은 <해리포터: 불의 잔>(2005)에서도 로버트 패틴슨에게 기회를 내준 적이
있었다. <배트맨 비긴스>(2005)의 배트맨
역으로 거론됐던 건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었으니 앞선 사례들에 비하면 아쉬울 일도 아닐 정도다.
물론 그가 대단한 기회를 상실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카빌에게
유명세를 안긴 건 영국의 문제적 왕이었던 헨리 8세를 다룬 TV시리즈 <튜더스>였다. 헨리 8세와 가까운 사이로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좌한 찰스 브랜던을 연기한 카빌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탓에 오랫동안 캐릭터의 명운을 지키기 힘들었던 이 시리즈가 시즌 4까지 진행되는 2007년부터 201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희귀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만큼 카빌의 인지도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상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매튜 본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물인 <스타더스트>(2007)와
우디 앨런의 코미디물인 <왓에버 웍스>(200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나가던 카빌은 마침내 첫 번째 주연작을 얻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에 둔 블록버스터 <신들의 전쟁>(2011)에서 신이 간택한 영웅 테세우스 역을 맡게 된 카빌은 특별한 주문을 받게 된다. 식스팩도 아닌 에잇팩을 만들 것. 금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과
미장센이 넘실거리는 영화적 분위기와 달리 시종일관 윗옷을 입지 않고 상체를 드러내는 신이 많은 작품에서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갑옷과도
같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결국 체지방 6%대의 조각과도
같은 육체로 거듭난 그는 격렬한 액션신을 소화해 냈지만 심각한 혹평에 시달리며 기대 이하의 반응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이듬해에 공개된 액션 스릴러물 <콜드 라잇 오브 데이>(2012)에선 브루스 윌리스와 시고니 위버라는 쟁쟁한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며 기대를 모았음에도
신랄한 혹평에 시달리며 대중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웠다. 심지어 세계적인 평점사이트로 신선한
토마토와 썩은 토마토로 평점을 매기는 로튼토마토닷컴에선 신선도 5%를 기록하는 수모를 얻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작품들 이후로 카빌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2011년, 카빌은 비로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제안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 과거 슈퍼맨이 되고자 했던 카빌은
결국 새로운 슈퍼맨 수트의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이자 DC 코믹스 세계관을 격발하는 첫 번째 실탄이라 할 수 있는 <맨
오브 스틸>(2013)에서 슈퍼맨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슈퍼히어로의
신전에서 슈퍼맨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언제나 존경 받는 캐릭터였다. 그가 빅스크린으로 복귀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영광스럽다.”
카빌의 말처럼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영화화되는 슈퍼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대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카빌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카빌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나는 슈퍼맨이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최선을 다해 역할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슈퍼맨에 걸맞은 체형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흐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건 단순히 캐릭터에 어울리는 육체적 조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이었다. “만약
내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활보하면 사람들은 슈퍼맨이라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사실 이런 책임감은 지나친 몰입이거나 과한 발상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슈퍼맨과 같은 세기적인 아이콘을 연기한다는 건 결국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이상의 상징성을 입게 되는 것이다.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으로 두 번에
걸쳐 슈퍼맨을 연기한 카빌은 새로운 시대의 슈퍼맨으로서 완전히 각인됐다. 마블의 <어벤져스> 격인 DC의 <저스티스 리그>를 영화화한 두 편의 작품도 예정돼 있다. 그만큼 슈퍼맨에 걸맞은 육체를 유지하고 그 이미지를 수호하는 건 프로다운 행위이자 각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작품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라는 문제는 배우가 책임질 수 없는 지점이니 배우로서
노력할 수밖에.
물론 카빌이 슈퍼맨 수트만 입는 배우는 아니다. 그가 슈퍼맨으로 분한
두 작품 사이에 공개된 영화 <맨 프롬 엉클>(2015)에선
섹시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스파이로서의 매력을 발산한 것을 보면 카빌의 야심이 단순히 빨간 망토를 두른 슈퍼히어로에 국한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고용하길 원하는 이름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카빌의 말이 단순히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상업적인 배우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기를 통해 상업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올해엔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서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는 이라크 배경의 전쟁드라마인 <샌드 캐슬>(2016)에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군인으로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싸울 예정이다. 카빌에게 슈퍼맨이란 자신이 맡은 하나의 책임감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질 수많은 책임감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있다. “할리우드엔
나보다 멋진 사람들과 나보다 나은 배우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잡으며 능가하는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지나치게 낙천적이지도 않은 진지함, 헨리 카빌의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1인 미디어란 언어 그대로 1인이 미디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파워블로거 같은 것이다. 웹을 통해 전지역적인 네트워크가
개설되고 편집과 제작이 용이한 개인 블로그 플랫폼 툴이 제공되면서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띄워 보낼 수 있게 됐다. 세상을 망라한 식견을 쥐고 있다면 충분히 털어낼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영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유투브, 아프리카 TV와 같은 동영상 사이트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영상을 찍고, 보여줄 수 있다.
반대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은 옵션 중
하나가 된지 오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핸드폰 광고는 높은 산에서, 먼 바다에서 통화가 잘 터지는가를 강조했다. 요즘의 스마트폰 광고는 대부분 카메라 화소가 얼마나 좋은지, 데이터가
얼마나 잘 잡히는지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잘 찍히는가 그리고 잘 볼 수 있는가가 지금 스마트폰을 고르는
기준이다. 결국 음성이 아니라 사진과 영상이 스마트폰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란 말이다.
1995년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를 사람들은 ‘귀가시계’라 불렀다. 사람들이 <모래시계> 방영 시간을 맞춰서 집으로 귀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면 방송을 보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보고자 했던 방송을 찾아서
볼 수 있다. 재방송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결국 정확한
시간대에 TV 앞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스마트폰은 TV의 대안이 아니다. 그들에겐
리모콘으로 채널을 고르는 것보다 액정을 터치해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게 더욱 익숙하다. 그곳엔 엄마, 아빠가 보던 TV채널과 다른 것이 있다. 먹방, 겜방, 톡방 등
개인이 직접 출연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한다. 자신이란
콘텐츠를 세상에 전파한다.
이들을 콘텐츠 크리에이터라 명명하는데 그들 중에선 연예인만큼이나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올해 <동상이몽>에 출연한 BJ 대도서관은 자신의 월 수익이 오천만원이라고 밝혔다. 대도서관은 자신이 게임을 하는 영상을 중계하고, 그 영상을 보는
이들과 대화하듯 말한다.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실시간적인
콘텐츠 플레이가 가능하다. 채널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채널이 된다는 것, 이는 전통적인 TV 방송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다.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있듯이 대단한 팬덤을 지닌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도 매니저가 생겼다.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만든 콘텐츠의 배급과 관리를 담당하는 신종 사업인데 이를 멀티 채널 네트워크(Multi Channel Network), 즉 MCN이라고 한다. MCN 산업은 1인 미디어의 시대를 통해서 새로운 미디어의 흐름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1인 미디어를 위한 매니지먼트이면서도 수많은 1인
미디어를 거느린 방송국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트레저 헌터나 다이아TV, 메이크어스 등 1인 미디어 혹은 중소 규모의 제작자 집단을 거느린 MCN 산업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결국 폭넓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범대중적인 영향력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시장성과 휘발되는 재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콘텐츠의 질적인 성숙 여부도 향후 MCN 산업의
청사진을 가늠하는 키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스마트폰이 1인 미디어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흥미 있는 콘텐츠는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발 빠르게 전파된다. 1인 미디어 시대란 결국 스마트폰이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발견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개인 창작자들의 서부시대다. 그 중에서도 영상 콘텐츠는 1인
미디어 시대의 패권을 가늠할 알파요, 오메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히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였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제대로 개최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한 영화제로 전락한 건 내부의 적 때문이었다.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자리잡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로
21회를 맞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과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제 생일을 챙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매년 10월경에 열렸다. 지금쯤이면 초청작을 비롯해 기본적인 영화제의 윤곽 정도는 잡았어야 할 시기이지만 영화제 기간을 제외한 어느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그나마 원년 집행위원장이었던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이 서병수 부산시장 대신 민간
자격의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된 것이 최근의 성과다.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린다는 영화제 기간을 제외하면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세월호 참사 구조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상영을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부산시장이자 조직위원장인 서병수가 정치편향적인 영화라는 이유로 <다이빙벨>의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영화계에선 상영 중단 요구를 철회하라며 반발했다. 결국 부산국제영화제
측에선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모토를 고수하며 예정대로 <다이빙벨>을 상영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사태가 시작됐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일부 영화인들만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서병수
시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향한 비난을 쏟았다. 비난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해 1월부터 4월까지, 부산국제영화제는 감사원으로부터 대대적인 감사를 받았고, 9월에는
국고보조금을 부실 집행했다는 명목으로 관련자를 검찰에 고발하라는 감사원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12월엔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이용관이 검찰에 고발됐고, 이듬해 1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영화계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지만 결국 지난 2월, 부산국제영화제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장
임기가 종료된 이용관의 재위촉이 무산되면서 부산국제영화제는 키가 없는 배처럼 방향을 잃고 표류했다. 영화제
집행위원회에선 국내영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위원 68명을 위촉했지만 부산시에선 되레 자문위원 위촉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며 팽팽히 맞섰다. 결국 국내 영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영화인 연대에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우려가 ‘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실물적인 예감으로 번지는 상황이었다.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은 2010년 집행위원장 직을 내려놓았다. 1996년 영화제의 시작부터 함께 했던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적인 현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은퇴한지 6년 만에 집행위원장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자신의 손으로
일군 부산국제영화제가 기우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국내 영화인들과 대립각을 세워오던 부산시장 서병수
역시 부산국제영화제가 좌초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세계적인 영화제를 하루 아침에 바닥으로 내려 앉힌
악명을 뒤집어 쓰는 건 정치인의 입장에선 두고두고 회자될 오명이다. 결국 조직위원장 자리를 민간 자격인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에게 이양함으로써 명예와 실리를 함께 세우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중요한 건 결국
남은 시간이다. 불과 4개월 남짓한 기간은 영화제를 정상화시키기
빠듯한 시간이다.
사실 국내 영화제가 예산을 집행하는 지자체와 갈등을 빚어 파행의 위기에 놓인 사례는 적지 않다. 전주국제영화제는 2회 직전 지자체와 갈등을 빚어온 수석 프로그래머가
사퇴하며 영화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상황이 연출됐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부천시장인 조직위원장을
필두로 한 조직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을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영화계의 반발을 샀고 영화제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현재 표류 중인 부산국제영화제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는 경우다. 대부분의
국내 영화제는 지방자치단체, 즉 지자체의 예산을 통해 운영되고 이를 집행하는 지자체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는 것이 관례다. 문제는 영화제의 역사와 함께 전문성 있는 인력으로 양성된 프로그래머나 영화제
관계자들이 영화제의 전문성과 무관한 지자체 관계자들로 구성된 조직위원회의 간섭을 받거나 정치적인 외압을 받으며 영화제의 역사를 송두리째 상실할
위기에 놓였거나 놓여있다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느껴야 마땅하다.
영화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다. 영화를 선정하는 전문 프로그래머와
영화제 운영의 노하우를 익힌 전문적인 운영위원들이 꾸준히 영화제의 내실을 다짐으로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문화적,
경제적 보고다. 그만큼 전문인력양성을 도모하고 이를 보조하는 기관의 협조와 이해가 절실하다. 영화제를 쥐고 흔드는 게 아니라 영화제의 정체성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심지어 지자체에서 집행하는 예산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자체의
예산은 시민의 것이고, 국민의 것이다. 지자체는 대리 집행인일
뿐이다. 부산, 전주, 부천, 제천 등 지금의 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건 영화제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성실한 호응으로 숨을 불어넣은 관객들이었다. 영화제는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이 존재하는 덕분에 존재하는
행사다. 영화제의 진정한 주인은 관객인 것이다. 고로 지자체의
예산은 그 예산의 집행을 위해 세금을 낸 국민들 즉 관객들을 위해 집행하는 것이므로 영화제에 알력을 가한다는 건 결국 영화제의 주인들이 기꺼이
납부한 재산으로 영화제의 주인들이 일군 텃밭을 훼손한다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지자체가 알력을 써서
지자체의 자산을 무너뜨린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게 무슨 낭비적인 짓거리인가.
어쨌든 부산국제영화제는 열려야만 한다. 시네필들의 애정이 원기옥처럼
모여서 만들어진 20년의 역사가 몰염치한 지자체의 알력 따위로 무너지는 걸 본다는 것 자체가 뼈아픈
일이다. 심지어 ‘아시아의 창’이란 슬로건을 걸고 아시아영화들을 발견하는 보고의 역할을 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문제는 아시아 영화계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산을 기억하는 전세계 시네필들의 염원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상화로 이어지길 바라며, 나 역시 염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