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월버그의 10대는 심각한 비행의 나날이었다. 그의 듬직한 현재를 생각한다면 낯선 사실이다. 나락에 떨어졌던 오랜 경험은 단단한 현재의 기반이 됐다. 가족이라는 삶의 의지를 깨닫게 됐다.
“만약 내가 그 비행기에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 그렇게 떨어지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다. 일등석 객실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나서 이리 말했을 걸. ‘됐어요. 이제 안전한 곳으로 착륙합시다. 걱정 마세요.’” 9.11 테러에 관한 마크 월버그의 코멘트였다. 이 발언으로 그는 곧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웅 의식에 젖은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성토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월버그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월버그가 가정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켰다.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이라는 전제는 할리우드의 소문난 ‘딸바보’이자 4남매의 아버지인 그의 인생을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월버그는 보스턴 남부 교외의 도체스터에서 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주를 이룬 그곳에서 성장한 월버그는 열악한 경제적 사정 속에서 잦은 불화를 겪던 부모의 이혼을 11세 무렵에 경험했다. 월버그의 유년시절이 불구덩이 한가운데 놓인 폭탄처럼 위태로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13세 무렵부터 코카인에 손을 댄 월버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점차 깊은 나락에 빠져들었다. 마약 판매, 절도, 폭행 등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던 그는 결국 한 술집에서 저지른 심각한 폭행으로 교도소에 수감됐다. 16세의 나이였다. 2년 동안의 교도소 생활은 그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 “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그 실수들에 대해서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다. 11세 무렵, 친형 도니 월버그와 함께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의 창단 멤버로 발탁됐던 기회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만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 남다른 끼가 있었으니까.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 월버그는 형의 후원 속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마키 마크라는 이름의 래퍼가 된 그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첫 앨범의 타이틀곡 ‘Good Vibratio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싱글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며 섹시한 이미지를 어필한 그는 캘빈클라인의 언더웨어 모델로 기용되며 더욱 큰 인지도를 얻었다. 이 모든 과정은 월버그가 진짜 인생에 다다르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나는 스무 번 넘게 보스턴 경찰에게 체포됐고, 그 경험들을 기본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좋은 용도로 쓸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축복이었다.”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월버그는 이와 같은 소감을 밝혔다.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이른 일탈은 이른 성숙을 위한 여정이 됐다. 사실 월버그는 배우로서의 꿈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 월버그를 이끈 건 그의 스크린 데뷔작 <르네상스 맨>(1994)의 감독 페니 마샬이었다. “내가 이미 연기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어리석지 않으니 왜 카메라 서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더라.” 그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출연한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에서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캐릭터를 연기하며 주목을 얻었다.
월버그가 스스로 거물의 자질을 지닌 배우임을 증명한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 <부기 나이트>(1997)를 통해서였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통해서 당시 미국식 가족주의의 허상을 파헤친 이 작품에서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등장하며 정상과 바닥의 위치를 오르내린 이의 허무를 포착한다. 특히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1980)의 엔딩을 오마주한 라스트 신에서 거울을 응시하며 내뱉는 나직한 독백은 월버그의 자전적인 열망마저 오버랩되는 듯한 명장면이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한 이라크전 배경의 코미디 <쓰리 킹즈>(1999)와 해양 재난 영화 <퍼펙트 스톰>(2000), 동명의 SF 고전을 팀 버튼이 리메이크한 <혹성탈출>(2001)과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보컬에 대한 전기인 드라마 <록스타>(2001)는 월버그의 입지를 수직상승시켰다.
“아버지가 되면 더 나은 인생에 들어선다.” 월버그는 아버지가 된 뒤,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하게 됐다. 사실 월버그의 캐릭터 대부분은 어두운 성장사와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니고 있다. <쓰리 킹즈>와 <퍼펙트 스톰>에서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향한 절실한 감정이 감지되는 캐릭터였으며 무명 미식축구 선수의 성공실화를 영화화한 <인빈서블>(2006) 또한 가난과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한 남자의 열정과 로맨스가 큰 축을 이루고 있다. M. 나이트 샤말란과 피터 잭슨이 각각 연출한 <해프닝>(2008)과 <러블리 본즈>(2009)에서도 붕괴와 상실의 위기 속에 놓인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물론 지적이고 터프한 리더의 이미지를 어필한 <이탈리안 잡>(2003)이나 <4 브라더스>(2005)와 같은 작품도 있지만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든든하고 헌신적인 가장의 리더십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이다. 또한 대통령 암살의 음모 속으로 내던져진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를 그린 <더블 타겟>(2007) 역시 그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대변하고 있다.
월버그의 최신작 <콘트라밴드>(2012)는 이러한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이슬란드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월버그는 전직 밀수업자를 연기한다. 손을 씻고 새로운 인생을 살지만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위험한 밀수업에 다시 뛰어드는 남자로 등장한다. 복서 미키 워드의 실화를 다룬 전기적인 작품 <파이터>(2010)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역시 가난하고 불운한 가정 속에서도 건실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월버그가 직접 제작까지 도맡은 두 작품이니만큼 그의 철학과 잘 부합되는 작품이리라는 건 확실하다.
보스턴 교외의 빈곤한 도시에서 암담한 10대를 관통한 월버그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이자 제작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가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월버그가 아들과 함께 ‘그 비행기’에 존재했었다 해도 그 역사적 비극을 막아냈을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지닌 가족적인 애정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성공과 결혼으로 인해서 우리가 더 나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한 여자의 아내로서,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마크 월버그는 그렇게 오늘을 산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하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다. 개봉한지 한 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2월 27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탭댄스가 생중계됐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게리 올드만과 같은 할리우드의 초신성급 배우들을 제치고 헬리 혜성처럼 나타난 장 뒤자르댕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스타들은 무대에 오르는 낯선 프랑스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21세기에 등장한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출현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아티스트>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의 주요부문을 휩쓸며 아카데미 5관왕에 올랐다.
이 소식은 한국 관객들의 호기심마저 당겼다. <아티스트>가 재미있다고? 그러나 상영관을 찾기가 힘들다.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건 28일 오전이었다. 전국 58관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90관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사이트에 명시된 국내 총 상영관은 2312관이다. 스크린 점유율 약 1.6%. 물론 아카데미의 지원사격으로 <아티스트>는 좀 더 국내상영관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9일 경 95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3월 7일 경에는 100여 관 안팎을 오갔다. 개봉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에는 29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티스트>의 북미 개봉일은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미국 내 전체 상영관은 36000여 관 정도로 추산된다. 4개관에서 개봉됐다. 점유율로 보자면 한국보다 더욱 심각한 셈.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개봉 네 달에 다다르는 3월 15일경, <아티스트>는 1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봉작의 상영관 확보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와 리미티드(limited). 대규모 단위로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상영관을 대거 포섭해 관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티드는 그 반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도 없고, 한 편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를 배급한다는 건 상영관에서 영사될 필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필름을 제작하는 것도 자본의 소요다. 저예산 영화들의 수익구조 안에서 필름 제작에 자본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리미티드 방식의 배급은 불합리라기 보단 효율적인 선택이다.
한국과 미국은 배급사와 극장주의 수익 배분 구조도 다르다. 한국은 제작사와 극장주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눈다. 공평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이 온전히 절반을 먹는다면, 제작에 관여한 제작사와 배급사 휘하의 모든 이들이 그 절반을 나눠먹는 구조인 셈이다. 제작사를 도매상으로 보자면 폭리를 취하는 소매상을 만난 격이다. 미국에서는 수익 구조가 유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극장들은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에게 80% 가량의 지분을 준다. 블록버스터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 상황은 역전된다. 극장이 8을, 제작사가 2를 가져간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주의 입장을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가 높은 수익을 올린다면? 상황은 다시 변한다. 수익 배분 구조 또한 역전된다. 2를 가져가던 영화사가 8을 가져가는 구조로 변한다. 그리고 흥행성이 확인된 영화의 상영관 또한 늘어난다. 리미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전환된다. <아티스트>가 그랬다. 1월 20일, <아티스트>는 미국 내 662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 릴리즈됐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한국 못지 않게 대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시장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하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구조가 분리된 덕분이다. 국내 상황이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극장까지 소유한 대기업의 지배 상황이 공고한 까닭이다.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의 위력은 2차 판권 시장이 초토화된 국내 시장에서 더더욱 강력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만약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배급 구조가 이뤄지진 않았을 거다.”
국내에서 영화는 개봉주에 흥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완벽하게 명암이 뒤바뀐다. 2차 판권에 대한 이익이 미비한 국내 영화 시장의 상황 속에서 제작사들은 상영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들이 저마다의 파이를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국 곳곳에 극장 체인망을 확보한 제작배급사는 스크린 점유율이 낮은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관객의 입장을 유도하고 경쟁 영화들을 교차상영 방식으로 밀어낸다. 가뜩이나 설 자리가 비좁은 작은 영화들은 자연히 도태된다. 한때 독립상영관이 대안의 형태로 제시됐으나 몇 년 사이 수많은 독립상영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화들은 집을 잃었다. 시장 구조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어쩌면 그런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대자본을 쥔 영화사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스템을 단순 비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건 기형적인 시장과 시장 규모의 문제이다. 시장이 넓어야 투자한 자본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경로의 확보도 보다 쉬워진다. 티켓을 살 관객은 모자라고, 흥행을 바라는 영화는 넘친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기.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단위로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는 극장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해야 하는 수익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갈 곳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내 입장에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상황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대체 <아티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영화가 별로라서? 아니다. 그건 정작 당신이 찾기 쉬운 극장에서 딱히 당기지도 않는 영화가 상영하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영관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당신의 취향이 존중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저 손쉽게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소유하는데 만족하는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손쉽게 영화를 소유하는 재미에 탐닉한다면, 그 영화들조차 존재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디 앨런과 함께 필름 뉴요커로 자리해온 마틴 스콜세지는 전세계 영화의 수호자다. 일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녹슬지 않는 열의와 애정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발굴한다. 언젠가 영화가 될 그 삶에 대하여.
“내 모든 삶은 영화와 종교에 머물러 있다. 어쩌겠나. 그뿐인걸.” 마틴 스콜세지의 유년시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뉴욕 맨하튼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폭력을 목격하거나 내몰리며 자라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스콜세지에게 일종의 동아줄이었다. 영화란 그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고, 그는 그 꿈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할리우드의 6~7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흥행사들을 비롯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작가주의적인 성향의 감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영화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화학과 출신 세대들, 즉 아카데믹한 씨네필들이자 테크니션이었다.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스콜세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단편을 감독하며 연출자로서의 경력에 시동을 걸던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 출신의 고백적인 작품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스콜세지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는 여성을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카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의 잠재적 폭력과 이중적인 심리를 다룬 문제적 수작이다. 스콜세지에게는 시대적인 공기를 파악하고 현상의 근원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강압적인 불평등 처우로 가난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무법자가 되어 벌이는 사건을 그린 <공황시대>(1972)를 비롯해서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2002)까지, 뉴욕의 이민자 출신 갱단들과 남루한 뒷골목 소시민들을 비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담보로 상환한 비극적 폭력성을 담아냈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해서 폭력 그 자체를 유전자에 새긴 듯 살아가는 비열한 갱단들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그 특별한 방식의 삶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편입시킨다.
스콜세지는 이주민들로 채워진 뉴욕에 깃든 폭력의 역사를 탐구해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면들을 발췌해온 진정한 필름 뉴요커다. 1920년대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그린 은밀한 삼각관계에 관한 <순수의 시대>(1993)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이례적이나 유럽과 같은 뉴욕 사교계 문화의 풍경을 들춘다는 점에서 그답다. 무엇보다도 뉴욕 상류층의 향락을 살핀 이 작품은 미국의 근간을 이룬 그들 역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이주민이란 사실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또한 스콜세지의 이례적인 작품 <특근>(1985)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려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이방인 같은 여성들과 거듭 만나며 미궁과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좀처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도시의 현실 그 자체를 패닉에 가까운 과장된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다.
<쿤둔>(1997)과 <비상근무>(1999)로 쇠퇴의 기미를 지적 받던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폭력의 역사로 들어선다. 혹독한 뉴욕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린 <갱스 오브 뉴욕>은 괴물의 탄생을 그린 영화다.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안착한 갱단들의 비열한 정서를 그린 스콜세지의 초기작과 달리 폭력 속에서 생존을 터득하고자 본능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폭력성, 즉 폭력의 계승을 그린다. 미국의 미스터리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전기물 <애비에이터>(2004)는 뉴욕의 이주민들이 꿈꾸던 환상, 아메리칸 드림에 근접한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취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뛰어난 수완을 거둔 남자는 끝내 스스로의 욕망으로 자신마저 불사른다.
스콜세지에게 비로소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디파티드>(2006)는 홍콩의 <무간도>(2002)를 보스턴의 풍경으로 변환한 그의 탁월한 접근 방식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비정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무간도>와 달리 비열한 거리의 물리적 폭력이 체감되는 <디파티드>는 명분을 중시하던 <무간도>의 인물들과 달리 사적인 지배욕으로 팽배한 사내들의 생존 전장으로 변환된다. 무간지옥의 윤회 대신 비열한 거리 위에서의 구원을 행하는 사내들의 정조는 태평양을 건넌 리메이크작의 진수를 드러낸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셔터 아일랜드>(2010)는 <케이프 피어>(1991) 이후 처음 연출한 장르물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마치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스콜세지의 괴물들이 끝내 분열증과 망상증으로 내몰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묻는 과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물의 태도는 폭력을 관찰해온 스콜세지가 보다 적극적인 답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보다 새롭다.
스콜세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녹을 닦아온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가족영화이자 3D로 촬영된 작품인 <휴고>(2011)는 분명 의외의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고>는 가족을 위한 영화도, 3D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한 영화도 아니다. 뤼미에르가 촬영한 달리는 기차 이후로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관람의 대상이 된 영화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영화의 진정한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원작은 스콜세지의 마음을 당길만한 것이었다. 특히 뤼미에르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3D로 체험한다는 건 진귀한 체험에 가깝다. <휴고>는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까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디지털 3D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를 스크린에 집약시킨다.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스콜세지는 말한다. “영화는 역사다. 영화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문화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각자 서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연결고리를 잃게 된다.” 70세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스콜세지는 전세계 필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힘쓰며 끊어진 필름의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대중을 영화라는 마술로 인도하고자 한다. 결코 녹슬지 않는 감각과 애정으로, 영화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와 함께 하는 그 삶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한국의 전주는 다채로운 식감을 자극하는 먹거리들이 가득한 맛의 고장이다. 올해로 13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는 각종 식재료들이 어우러진 전주비빔밥을 닮았다. ‘자유, 독립, 소통’이라는 전통적인 슬로건 아래 디지털 영화나 독립영화를 아우르는 전세계의 비주류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스페인의 신예 감독 알베르트 세라의 특별전을 기획한 이번 영화제는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전세계 영화의 진미를 한 자리에 차렸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영화화된다고 하자 사람들은 문제적인 캐릭터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누가 맡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루니 마라는 의외의 카드였다.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연모하던 여인의 단정한 인상을 기억해낸 이들은 덕분에 더욱 의심했다. 스웨덴에서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닐스 아르덴 오플레르 또한 이에 질색했다. 하지만 모두의 기우를 발로 차버리듯, 그녀가 해냈다. 가시처럼 세운 머리, 스키니한 가죽 의상 곳곳을 메운 메탈 재질의 장식과 체인 벨트, 얼굴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어싱. 퇴폐적인 스타일 만만하지 않게 무뚝뚝한 태도와 범접하기 어려운 반사회적인 인상. 마라는 완벽하게 리스베트가 되어 스크린에 등장했다. 부유한 NFL 구단주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이를 더욱 비범하게 수식하는 반전이었다. 화염병처럼 강렬한 폭발, 루니 마라는 이제 막 불이 붙었다. 더욱 뜨거워지리라.
마크 월버그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10대를 관통했다. 암담한 어제는 지났다. 다만 결코 잊지 않는다. 이제 그는 가장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족과 함께 오늘을 산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밀수업자였던 크리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벗고 새로운 삶을 입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가 있다. 가족은 그 남자가 사는 이유다. 그러나 마약밀수업자들의 운반책 노릇을 하던 처남이 얻게 된 큰 빚을 대신 갚기 위해서 다시 밀수를 모색해야 할 상황에 내몰리면서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콘트라밴드 Contraband>는 어느 가장의, 아버지의, 결국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마크 월버그는 평범한 삶을 꿈꾸는 그 가장의, 아버지의, 한 남자의 사연을 대변한다. ‘딸바보’로 잘 알려진 마크 월버그(Mark Wahlberg)는 할리우드에서도 가정적인 남자로 손꼽히는 남자다. “아이가 생겼을 때, 미치도록 행복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삶이 실현됐으니까.”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스타배우이자 행복한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그의 오늘은 한때 결코 기약할 수 없는 미래였다.
메사추세스주 보스턴 남쪽 교외에 자리한 도체스터에서 태어난 마크 월버그는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10대를 건넜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열한 살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마크 월버그는 열세 살 무렵 코카인에 손을 댔다. 열네 살의 나이로 학업을 중단했고, 열여섯 살에는 교도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은 마크 월버그의 유년시절을 기워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회복시킨 건 가족이었다. 2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간 그는 검정고시 자격을 얻었다. 특히 희대의 아이돌 스타로 군림했던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인 친형 도니 월버그는 동생의 삶을 견인하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로 발탁됐지만 스스로 기회를 날려버린 적이 있었던 마크 월버그가 후에 마키 마크라는 힙합 뮤지션으로 데뷔해서 성공을 거둔 것도 제작자로서 서포트해준 형 도니 덕분이었다.
결과론에 가깝지만 마크 월버그가 경험한 이른 일탈은 현재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이른 성장통이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이른 나이의 과오는 그만큼 삶의 방향을 일찍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기까지 스스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진정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때까지.” 그가 추구하는 ‘제대로 된 삶’은 배우로서 실현됐다. 배우 마크 월버그의 경력에 있어서 방아쇠가 된 건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감독의 <부기 나이트>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살피는 이 작품에서 마크 월버그는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출연하며 남다른 물건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출연한 걸프전 배경의 코미디물 <쓰리 킹즈>와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 SF물 <혹성탈출> 그리고 다채로운 출연진과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 범죄물 <이탈리안 잡>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위치를 만들어나갔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로 전미 비평가 협회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유년 시절 온갖 비행을 전전한 콜린 패럴이 야생마 기질의 배우로 성장한 것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배우가 됐다. 가족의 불화와 가난으로 인해서 길거리의 비행에 내몰렸던 그가 건강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거듭나며 가족적인 가장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길거리에 내몰려 스스로를 망쳐가던 시절에 그가 꿈꾸던 삶이었고, 영화를 통해서 그런 희망을 회복해나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콘트라밴드>는 마크 월버그의 자전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자가 되길 자처한 그는 자신이 연기한 크리스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상황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생각과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착하고 성실한 남자다. 문제를 해결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 나간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고단하고 간절한 여정에 마크 월버그는 기꺼이 동참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제작된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콘트라밴드>는 원작의 뼈대를 최대한 살리고 할리우드의 효율적인 제작방식으로 새로운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특히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하는 감독 겸 배우이자 <콘트라밴드>를 제작하고 원작에 직접 출연한 바 있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Baltasar Kormakur)가 연출을 맡았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마크 월버그는 그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배우이기도 한 그는 카메라 앞에서도, 카메라 뒤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굉장히 잘 파악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줄 알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법을 안다.” 뉴올리언즈와 파나마를 오가며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촬영은 단 37일만에 종료됐다.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적지 않은 액션 신이 연출된 이 작품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됐다는 건 결국 제작진들의 신뢰로 구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콘트라밴드>는 올해 오프닝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현재 마크 월버그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의 새로운 코미디 연출작에 출연을 결정하고 덴젤 워싱턴과 함께 호흡을 맞출 준비를 하고 있다.
마크 월버그는 소문난 타투 마니아다. 지난 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문신 제거 시술을 받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들이 내 문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만든 건 아버지로서 전하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신을 지우는 고통을 보여주면서 어떤 행동에는 책임져야 할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일찍이 삶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체험했기에 그 뼈저린 교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진심,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지금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가 매일 같이 돌아가야 하는 집에 있다. “나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생기기 전까지 가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이 나를 변화시켰다. 영화에서처럼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크 월버그는 오늘을 산다.
북반구의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는 2월이면 시네필들의 봄,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오는 9일부터 19일까지,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감독 브느와 자꼬의 신작 <Les Adieux à la reine>(2011)의 상영으로 물꼬를 트는 이번 영화제는 스티븐 달드리와 장이모우의 신작 등이 공개되며 올해 영화계의 첫 번째 흐름을 살핀다. 메릴 스트립의 명예금곰상 수상이 예정된 이번 영화제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영화의 봄을 알린다.
카사 드 라 플로라는 디자인 호텔을 추구하는 카오락의 신진 리조트다. 숲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한 천혜의 자연 경관 한가운데서 첨단의 편의를 자랑하는 시설을 갖춘, 최고의 휴식처다.
카오락(Khao Lak)은 태국 남부에 있는 푸켓 북부에 자리한 전통적인 휴양지다. 사시사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푸켓과 달리 성수기에도 한적한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카오락은 그야말로 천혜의 휴식처다. 덕분에 유럽 등지의 서양인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아지트처럼 애용되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왔다. 덕분에 카오락에는 100여 개의 리조트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팡가 지역에 최근 디자인 호텔을 지향하는 최신식 리조트가 개장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카사 드 라 플로라, 즉 자연 속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리조트는 현대적인 첨단 설비의 편의를 갖춤과 동시에 자연친화적인 호흡으로 안락함을 더했다.
바다와 숲의 경계처럼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길게 누워있는 외관 앞에 다다르면 인공적인 폭포형 분수가 로비로 올라가는 투숙객들을 맞이한다. 넓은 로비의 개방적인 형태는 리조트로 향하는 긴 여정의 피로가 비로소 휴식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드디어 카사 드 라 플로라의 영토에 들어서면 미로처럼 갈라진, 하지만 결코 길을 잃을 염려는 필요 없는, 작은 길들을 따라 구분된 큐빅 형태의 빌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서른 여섯 개의 큐브형 빌라가 질서정연하게 층위를 이루거나 규칙적으로 나열된 이 리조트는 너르게 펼쳐진 카오락 해변과 울창한 나무들이 자리한 숲을 전후에 두고 있다. 바다를 마주하고, 숲을 등진 이 리조트에서 객실 안과 밖에 자리하게 된다는 건, 그만큼 완벽하게 상반된 경험을 만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직으로 냉정하게 잘라 세운 듯한 콘크리트 외벽의 내부는 이와 반대로 티크목으로 마감되어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에 노출콘크리트 공법으로 마감된 욕실과 벽면 일부로부터 정갈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의 조화가 느껴진다. 저마다 꽃의 이름을 딴 36개의 빌라는 9종류의 구조로 구분된다. 그러나 모든 빌라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해변을 응시하는 빌라의 창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눈과 같다. 방 안의 침대에 누워있는 순간에도 바다의 수평선이 시선에 들어온다. 또한 모든 빌라에는 개별 풀이 마련돼 있으며 그 주변에는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만끽할 수 있도록 세워진 커다란 울타리가 자연적인 정원 주변으로 둘러쳐 있다. 리조트에서 만끽할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경관을 빌라 내부까지 제공하면서도 투숙객의 시간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보호한다. 카사 드 라 플로라는 디자인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투숙객의 심리적인 배려까지 추구했다.
비치프론트 그랜드 풀 빌라를 포함한 10개의 비치프론트 빌라들은 리조트에서 해변과 가장 근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치 해변을 소유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해변 위에 지어진 집에서 생활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해변이 바라보이는 풀은 실로 로맨틱한 감정을 품게 만든다. 한편 복층 구조로 이뤄진 듀플렉스 그랜드 풀 빌라를 비롯한 19개의 듀플렉스 빌라들은 공간의 편의성을 보다 강조한 인상이다. 침실과 욕실, 거실이 명확하게 층별로 분리된 이 공간은 주거적인 편의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보다 안성맞춤이다. 비치프론트 라인의 빌라들이 연인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듀플렉스 계열의 빌라들은 가족적인 여행을 위한 공간에 가깝다. 만약 보다 간편한 동선을 원한다면 단층 구조로 이뤄진 스튜디오 풀 빌라를 선택해도 좋다. 그 밖에도 최고급 객실인 카사 풀 스위트와 프레지덴셜 스위트가 준비돼 있다. 모든 방의 미니바 이용은 무료로 제공된다. 무선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카사 드 라 플로라의 중심부에 자리한 야외풀은 리조트가 자랑하는 명소 가운데 하나다. 바다를 향해 탁 트인 광경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지는 풀에서 음료나 칵테일, 스낵을 주문하고 망중한을 즐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연적인 경관을 제공하는 카사 드 라 플로라는 그만큼 친환경적인 설계로 완성됐고 그에 따른 정책을 고수한다. 물을 재활용할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된 리조트 내의 모든 수영장 시설에는 화학적인 성분의 소독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 투숙객과 환경 모두를 배려한 처사다. 친환경적인 성분으로 유명한 태국 고유 브랜드 ‘탄’의 어메니티를 구비해놓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스파 라 카사’에서 마사지와 사우나 등을 즐기며 긴장과 피로를 푸는 것도 좋다. 또한 비즈니스 업무의 해결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비즈니스 센터나 여유롭게 독서를 즐기고픈 투숙객들을 위한 도서관 시설도 눈길을 끈다. 피트니스 센터 이용과 자전거 대여도 가능하다.
‘라 아란야’ 레스토랑은 태국 고유의 음식들을 기반으로 다국적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벽 대신 푸른 바다와 녹색의 잔디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오픈된 구조로 설계된 야외 레스토랑은 미각적인 만족감 못지 않게 시각적인 분위기 또한 즐길 수 있는 공감각적인 공간이다. 한편 카사 드 라 플로라에서는 특별한 서비스를 행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드림메이커’라 불린다. 투숙객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는 그는 누군가의 부탁을 대신 이뤄주는 이벤트 도우미, 이름 그대로 드림메이커로서 활약한다.
만약 보다 적극적으로 카오락의 경관을 즐기고 싶다면 리조트 인근의 관광 명소를 찾아갈 수도 있으며, 리조트에서 마련한 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리조트 앞마당처럼 자리한 카오락 해변의 끝이 보이지 않는 풍경 위를 독식하듯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진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곳에 머무른다면 시끄러운 소음도, 분주한 일상도, 특별한 목표도 완전히 잊어도 좋다. 첨단의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자연적인 낭만을 선사하는 이 리조트는 당신이 머무르는 동안 그 아름다운 풍경으로 당신을 편입시킨다. 숲과 바다의 경계 한가운데에 자리한 카사 드 라 플로라는 당신의 완벽한 휴양을 위해 마련된 안식처다. 휴식이라는 이름의 낙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
Recommendation
디자인 호텔을 지향하는 카오락의 최신 리조트. 큐빅형의 모든 풀빌라로 해변의 풍경이 중계된다.
Rooms 36 (including 2 suites) Restaurant La Aranya
Facilities Swimming pool, pool bar, Spa La Casa, Private Airport Transfer, Library and business center, Fitness centre,Dream Maker Tailor Made
Features Flat-screen TV with wireless keyboard, Wi-Fi internet access,iPod docking station, Espresso machine, Complimentary mini-bar replenished daily
Address 67/213 Moo 5. Khuk Khak, Takuapa, Phang Nga 82190
휴 잭맨은 할리우드의 호주 출신 톱스타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배우다. 스크린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호주 시드니 출신인 휴 잭맨은 활동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집안에 머무는 시간보다도 해변에서 놀거나 캠핑을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여행을 좋아했지만 단순히 여행만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호기심이 많았다. 이는 연기에 대한 흥미로 이어졌고, 재능에 대한 발견까지 나아갔다. 무대 경력을 쌓아나가며 재미를 느끼던 잭맨이 배우로서의 진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22살 무렵이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춤과 노래 실력이 빼어난 잭맨이 자신의 무대를 꿈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보다 중요한 건 ‘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였다. 호주의 TV시리즈 <코레일>은 잭맨의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상대배우였고, 지금의 아내인 데보라 리 퍼니셔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불과 한 시즌만에 막을 내렸지만 잭맨은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얻었다. 그는 말했다. “아내와의 만남은 그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가장 훌륭한 결과였다.”
대단한 지위에 오른 이들에게는 일종의 전환점이라 불리는 타이밍이 존재한다. 잭맨에게는 <엑스맨>의 히어로로 등장한 2000년이 그랬다. 아다만티움이라는 강철 골격을 지닌 불사의 몸과 다혈질의 성격을 소유한 뜨거운 남자, 울버린은 잭맨을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 사실 그 강철손톱은 원래 잭맨의 것이 아니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2000)에서 울버린 역에 내정된 건 더글레이 스콧이었지만 그는 하차했고, 잭맨은 기회를 얻었다. 잭맨에게 있어서 울버린은 하나의 과제였다. 원작 코믹북의 팬이 아니었던 잭맨은 자신이 울버린 같은 남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티 해리>시리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매드 맥스 2>(1981)의 멜 깁슨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 모습을 보며 울버린이 지닌 야수적인 본능, 다혈질적인 난폭성의 잠재력을 이해하고자 했다. 한편 소품에 불과했지만 강철손톱을 달고 연기를 하다가 상대 배우를 찌르거나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등의 실수를 견뎌야 했다.
결과적으로 울버린과 함께 잭맨의 터프한 이미지는 <엑스맨>의 성공적인 스크린 안착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서 전세계에 배포됐다. 하지만 이는 잭맨을 오해하게 만들만한 소지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1년에 공개된 그의 출연작 세 편, <썸원 라이크 유>와 <스워드피쉬>, <케이트 앤 레오폴트>는 주요했다. 제각각 장르적인 차이를 지닌 이 세 편의 작품은 하나같이 잭맨에게 소득에 가까운 결과물이었다. 단순한 하드보디 액션 배우로 이해될 수 있었던 그는 1년 만에 다양성을 지닌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특히 부드러운 로맨티스트이자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가장으로서의 삶에 충실한 잭맨의 실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엑스맨>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속편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엑스맨 2>(2003)와 <엑스맨 – 최후의 전쟁>(2006) 그리고 울버린을 주인공으로 삼은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까지, 울버린을 연기하는 잭맨은 일관된 이미지 속에서 안티히어로의 고뇌와 분노를 폭발시키는 노하우를 익혀갔다. 사실상 울버린으로 주목 받은 잭맨이 울버린과 같은 하드보디 캐릭터로 방어전을 치를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했다. 기독교적인 사상을 판타지 액션의 모티프로 삼은 <반헬싱>(2004)의 롤타이틀에 캐스팅된 것도 어쩌면 울버린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엑스맨>의 세 번째 속편의 공개와 함께 울버린으로서의 사명을 끝낸 직후,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6년, 대가들과 함께 한 영화 세 편으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우디 앨런의 <스쿠프>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천년을 흐르는 사랑>,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가 바로 그것. 특히 앞선 캐릭터들과 달리 비열한 면모를 지닌 정치인으로 등장한 <스쿠프>와 질투와 야심으로 사로잡힌 마술사를 연기한 <프레스티지>는 잭맨의 연기적 내면에 대한 증명서에 가까웠다.
할리우드 톱배우 반열에 오른 잭맨은 대작에 출연하며 그 지위를 공고히 다져나갔다. 물론 그 지위가 언제나 안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잭맨은 고향 호주에서 촬영된 <오스트레일리아>(2008)에서 역시 호주 태생인 니콜 키드먼과 호흡을 맞췄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대거 등장하는 이 영화는 대단한 규모와 반비례한 평가를 얻었고,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엑스맨>시리즈의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으로 다시 한번 강철손톱을 빼 들었고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영화적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작인 <리얼 스틸>(2011)은 여러 모로 성공적인 복귀전처럼 보인다. 인간 대신 로봇이 복싱 선수로 활약하는 시대를 그린 SF 기반의 이 영화는 사실상 부자의 관계 회복과 루저의 승리를 그린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자상한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곤 했던 그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인물의 부성애와 밀착된다.
<엑스맨>에 발탁되기 전까지, 잭맨은 호주에서 무대를 비롯해서 몇 편의 영화와 TV시리즈에 출연했다. <엑스맨>으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뒤에도 잭맨의 무대 경력을 줄곧 이어져왔다.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그는 2004년에 공연한 피터 앨런의 <오즈로부터 온 소년>을 통해서 대단한 호평을 이끌어냈으며 토니상 트로피까지 얻었다. 한때 <미녀와 야수>의 무대 위에서 가스통으로 자리한 적도 있는 그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영광이었다. 그는 울버린의 강철손톱을 전시하는 사이에도 자신의 연기를 갈고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실함은 생활연기자로서 잭맨을 설명하기 위한 유용한 단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을 통해서 그의 춤과 노래 실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예정이다. 특히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로서 특별히 한번 뽐낸 바 있었지만, 브로드웨이를 찾아야만 <킹스 스피치>(2010)로 아카데미를 석권한 톰 후퍼 감독이 연출하는 <레미제라블>(2012)에 캐스팅된 것. 물론 울버린의 강철손톱도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은 디딤돌과 같다.” 휴 잭맨은 여전히 디딤돌을 밟고 서있다.
톰 하디의 경력은 전쟁터에서 시작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TV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연기를 시작한 뒤,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을 통해서 영화에 데뷔한 것. 하지만 그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2010)은 좋은 기회였다. 터프한 성격으로 꿈 속을 종횡무진하는 임스는 대중에게 하디의 매력을 ‘인셉션’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독한 내면을 지닌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열연한 <워리어>(2011)의 하디는 강력한 훅처럼 자신을 내던졌다. <렛 미 인>(2008)을 연출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할리우드 데뷔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보다 강력한 한 방이 예정돼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배트맨의 새로운 숙적 베인으로 등장하는 것. “사내라면 이 정도 포부는 돼야지.” <인셉션>의 인상적인 그 대사처럼, 이 남자, 거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