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요즘 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 이상의 체험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극장부터 골랐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새로 단장한 프리미엄 상영관 ‘부티크 M’을 찾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예매사이트에 접속해서 영화를 고르고, 두 좌석을 선택한 후 결제를 했다. 5만원이 결제됐다. 그러니까 영화 티켓 두 장의 가격이 무려 5만원이다. 티켓을 금으로 만들었나? 종이였다.
상영관 이름이 스위트룸이라고 했다. 흔한 극장 상영관처럼
1관이라고 부르는 대신 101호라고 했다. 상영관이
아니라 호텔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호텔식 서비스를 지향했다.
넓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체어에서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에비앙 생수를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입구에서 무릎담요를 나눠주고 자리엔 슬리퍼도 놓여있다. 룸서비스도 가능하다. 영화 시작 전에 좌석 측면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팝콘이나 나초 대신 피자를 주문했다. 화덕에서
구운 조각피자로 유명한 ‘피자리움’이 입점해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와인도 판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대 부근의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앤트러사이트를 비롯해 타발론 티, 오설록
아이스크림도 상시 판매한다. 어쨌든 2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를 보면서 리클라이너 체어의 안락함을 실감했지만 동시에 영화가 재미없다면 숙면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고,
잠들 일은 없었다.
부티크 M과 같은 상영관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프리미엄 상영관은 존재해 있었으니까.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모델이다. CGV에선 일찍이 식사와 영화관람을 연동해서 즐길 수 있는 ‘시네 드 셰프’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롯데시네마 역시 샤롯데라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메가박스
부티크 M은 후발주자다. 이미 존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 시장에
뛰어든 건 지금의 시장에서 유효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박스에선 지난해부터
다양한 형태의 상영관을 기획해왔다. 과거의 자동차 극장을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M과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텐트와 캠핑 의자에 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글램핑 상영관인 오픈 M이 눈에 띈다. 둘 다 영화 관람 외적인 경험을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띄는데 어린 유아가 있는 부부가 쉽게 극장을
찾지 못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바비큐나 와인, 맥주와 함께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전통적인 영화관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 관람과 동반할 수 있는 체험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21세기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맛을 돋우는
음악처럼, 영화 또한 감각적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CGV에선 멀티플렉스 대신 컬처플렉스란 언어를 동원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했다. 컬쳐플렉스는 영화뿐만 아니라 외식이나 쇼핑, 문화체험
등 영화 외적인 다양한 경험과 연계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성의 연계나 확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CGV청담시네시티엔 다양한 식당과 커피 전문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층층마다 자리해있다. 기존의 골드클래스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더
프라이빗 시네마’와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 형태로 제작된 커플석만으로 상영관 좌석을 채운 ‘스윗박스 프리미엄’과 같은 상영관은 영화 관람에서 서비스의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새롭게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 ‘시네
파크’라는 광장 형태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영화 이외의 문화적 체험을 전달하려는 다른 극장들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체험적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은 극장산업의 화두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넓어졌고, 관객들은 기꺼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기다린다. 이를 테면 최근에 화제가 된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열풍이 그렇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길 고집하는 배경엔 ‘좀 더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 ‘두 영화를 관람하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이맥스 상영관이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영화가 주는 감각적 체험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영화관람이란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적인 체험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소비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D 상영 방식의 일반화 또한 궤를 같이
하는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전세계적인 흥행 이후로 디지털 상영관이 확대되고 3D 상영이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해 버린 건 어떤 체험을 계기로 관객들의 감각적 경험이 확장되고 정착된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 감각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체험적 방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험의 확장을 통해 훈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체감하길 바라는 관객의 정착이 극장 상영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돌비 애트모스 음향 시스템도 장착된 상영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개인 좌석마다 설치된 헤드셋을 통해서 영화 사운드를 홀로 독점하는 상영관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통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향에 따라서 좌석의 진동을 체감하도록 하는 비트박스관과 오감을
자극하는 4D 상영관의 공감각적 체험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4D는 기존의 영화관람 형태를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영화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고, 그런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극장은 진화하고 있다.
21세기의 극장들은 영화의 관람방식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영화 관람 외적인 서비스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극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견인해왔다. 동일한 티켓 가격으로 각기 제작비가
다른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 산업이란 대중의 기호에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 극장문화의 변화란 결국 대중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영화는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또한 IPTV를 통해서 한동안 부재했던 영화의 2차 판권 그러니까 홈 씨어터 시장이 순식간에 정착됐다. 영화란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됐다. 그만큼 극장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커다란 스크린만으로 극장의 경쟁력을 논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관객들은
이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영화 그 이상의 영화관을.
신해철과 서태지는 90년대를 관통하는 뮤지션이자 메신저였다. 하지만 신해철이 언어로서
세상과 충돌하는 사이, 서태지는 언어의 미로 속에 자신을 숨겨왔다. 죽은
신해철은 말을 남겼고, 산 서태지는 말을 아낀다. 신해철의
말은 죽어서도 살고, 서태지의 말은 살아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신해철이 죽었다. 벼락처럼 떨어진 비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추모했다. 밀물처럼 추모의 말들이 달려와
바다를 이뤘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서태지도 말을 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 현장이었다. 서태지는
“힘들지만,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해철은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명곡을 만들었고, 나도 듣고 자란 세대다. 누구 보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노래 가사는 내 마음을 너무 흔들어놨다. 나도 그런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태지가 신해철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서태지가 신해철처럼 가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의외였다.
신해철의 가사는 직설적이다. 피해가지 않는다. 투수로 치자면 직구 일변도의 투수였다. 그래서 종종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속구를 구사하며 호쾌하게 미트를 때렸다. 수비수의 도움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특별히 해석을 부르는 가사를
쓰거나 부르지 않았다. 가사가 가리키는 지향점이 명확하다. 반대로
서태지의 가사는 은유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투수로 치자면 맞춰 잡는 변화구 투수였다. 가끔씩 정면승부를 시도하며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인구를 던져서 맞춰 잡았다. 그만큼 수비수의 도움이 절실하다. 쉽게 말하자면 팬덤의 지원사격이
중요하다. 단어를 나열한 형태만 봐도 의도라는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언어인 만큼 애정을 바탕에 둔
의미부여가 중요해진다.
올해 신해철과 서태지는 모두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신해철은 7년만이었고, 서태지는 5년만이었다. 신해철은
올해 말에 넥스트의 신보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서태지에게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서태지의 활동 재개가 확정된 시점이었다. 서태지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서 방송 출연을 결정했다. 그가 결정한
건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였다. 방송 전부터 서태지가 등장한다고 예고편을 떠들썩하게 틀었다. 22년
만에 못다한 말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서태지의 지난 시절을 떠들썩하게 떠들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서태지의 아들 이름이 ‘삑뽁이’라는 것 외엔 새로울 것도,
기억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에 출연한 <뉴스룸>에서 유효한 이야기가 나왔다. 앵커 손석희가 뼈 있는 질문을
던져준 덕분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소격동’이 녹화사업을 비롯한 과거의 정치사를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과 해석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서태지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노래를 만들 땐 정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컨대 예쁜 한옥 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마음만 다뤘다”고 했다. 다만 “80년대 서슬 퍼런 시대를 표현하지 않고는 ‘소격동’이란 곡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들어간 거다”라고 부연했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 발매된 서태지의 8집 앨범에 수록된 ‘T’ik T’ak’을 두고 세간에선 이것이 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 즈음에 코엑스에서 펼쳐진 서태지의 게릴라 콘서트에서
서태지는 시대적 흉흉함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며 ‘시대유감’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그 노래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지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태지의 본의와 무관하게 서태지에게 무언가 명확하게 바라는 바가 있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적 부도덕과 불합리를 좀 더 명확하게 꿰뚫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태지와 상관 없는 바람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신곡
중 하나인 ‘크리스말로윈’의 가사에 등장하는 ‘산타’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서태지는
그것이 ‘나쁜 권력자’라고 했다. ‘교활한 권력자, 교활한 직장 상사, 그런게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부연했다. 그러니까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인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나쁜 권력자인지 알 길이 없는 ‘환상 속의 그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랄까.
신해철의 언어는 언제나 명확하고 확실했다. 서태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신해철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현정부를 향한 촌철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대통령은박정희대통령의향수를가지고있는지모르겠지만국민들이지금보고있는모습은전두환의모습이다. 박정희의모습이아니다.”그런태도는지지자를만들어내는동시에적대자가등장하는이중적계기가되기도했다. <백분토론>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에대해서세간의비판여론이일자그는자신의미니홈피계정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은분명일부에게 '익숙지않은모습'일수있다. 하지만 '익숙하지않은모습'이반드시 '옳지못한모습'은아니다"라고논평했다. 그에게는정해진편이없었다. 단지불합리한권력을내세우는다수와맞서는사람이었다. 하지만그의언어는불합리한권력을찌르기위한창으로서만존재하지않았다. 반대로그는약자에게관대한사람이었다. 신해철의생전마지막기록이라할수있는JTBC의 <속사정쌀롱>에서그는 "내가
다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에서 비전을 세우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다르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보험사에서 최소한 주유소까지 향하는 기름을 넣어주는, 최악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 환경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언어는 그의 노래 가사와도 일맥상통한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용기를 주거나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The
Dreamer’)”라고 다짐하거나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어(‘매미의 꿈’)”라고 꼬집어 말한다.
서태지도 한때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매나!”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허공에 대고 일갈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제도를 바꾸라는 건지, 그런 교육제도 속에
머무르는 학생들의 태도를 바꾸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 통일을
염원하거나, 교육제도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도 명확한 비판의 대상이 부재한다. 서태지는 ‘시대유감’을
‘이 시대에 유감이 있다고 말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런 노래의 가사가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라고 겉핥기에 그치는 건 가사유감이다. 명확한
건 제목뿐이다. 서태지의 솔로 앨범 가사들은 대부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를 동반하지 않으면
언어의 가치가 불확실해진다. 최소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쳐먹도록 그게 뭔지 몰라”라는 언어를
구사하는 신해철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시대 비판이라는 언어로 처세를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리스너의 판단’이라는 말로 모호함만 증폭시킨다.
<해피투게더>에선
서태지의 90년대 활약상을 훑으며 찬사를 거듭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태지는 90년대의 영광 이후로 보여준 것이
드물다.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9년, 서태지가 모아이섬에서 신비를 노래할 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서태지의 노래와 노래 밖 현실의 괴리가 선명했다. 신해철이 죽은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해철이 생전에 뱉었던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주워들었다. 죽은 신해철의 언어로부터
위로를 느낀다. 멋대로 해석해도 좋을 말장난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가 존중 받는 건 당연하다. 흉흉한 세상에선 위로가 되는 말이 더욱 귀하다. 신해철의 죽음은
그래서 시대유감이다. 그 가운데서 서태지는 ‘소격동’의 추억을 노래한다. 소격동의 녹화사업은 단지 기억의 재현일 뿐이다. 개인적인 옛 기억이 예쁘게 추억될 뿐이다. 유감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린다.
좋은 작품이란 걸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좋은 감독이란 거장의 면모를 지닌 감독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라세 할스트롬은 바로 그런 작품을 만든 그런 감독이다.
1946년생인 라세 할스트롬은 40여
년에 달하는 연출 경력을 지닌 60대 후반의 노장 감독이다. 하지만
흔히 그만한 경력을 지닌 감독들에게 손쉽게 동원하는 ‘거장’이나
‘대가’라는 단어에 어울린다고 말하기엔 겸연쩍은 구석이 있다. 물론 그가 연출한 작품 가운데선 기억될만한 수작들이 더러 존재한다. 하지만
라세 할스트롬은 대단한 울림을 전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걸작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을 연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거장이나 대가만이 오랜 시절의 경력을 보장받는 건 아니다. 라세 할스트롬은 개별적인 인생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동을 길어 올리는 범작들을 꾸준히 만들어오며 대중과 호흡해온 감독이다.
라세 할스트롬이란 이름만으로도 짐작하겠지만 그는 미국 출신 감독이 아니다. 스웨덴, 그러니까 북유럽 출신 감독이다. 라세 할스트롬과 함께 동시대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북유럽 출신 감독으론 레니 할린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레니 할린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옛날
사람이 된지 오래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할리우드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연출해온 건 할스트롬이 유일하다. 과거형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물론 할스트롬의 감독 경력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할스트롬은 소위 말하는, ‘떡잎이 노란
아이’였다. 열살 무렵 단편영화를 연출하며 감독으로서의 비전을
찾은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TV방송 전파를 타게 되는 경험을 얻기도 했다. 이 경험은 본격적인 TV시리즈 연출 데뷔로 이어졌고, 10여 년간의 TV시리즈 연출자로서 경력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유명세에
일조한 건 세계적인 스웨디시 팝그룹 ‘아바’였다. 아바의 히트곡 대부분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으며 아바의 공연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바: 더 무비>(1977)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스트롬은 1985년에 발표한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미래로 나아간다.
할스트롬은 <개 같은 내 인생>
이전에도 스웨덴에서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모두 가정을 배경으로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란 점에서 일관성이 있었다. <개 같은 내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병약한 어머니를 둔 소년의 고독하고도 묵묵한 성장기를 그린 이 작품을 통해서 할스트롬은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각본상과 연출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그 뒤로 한동안 스웨덴에서 영화를 연출해오던 그는 홀리 헌터, 지나
롤랜즈 등 당대의 배우들이 출연한 <사랑의 울타리>(1991)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리고 그 후 할스트롬의 가장 인상적인 연출작 중 하나인 <길버트 그레이프>(1993)를 발표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라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변변찮은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다섯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해낸다.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충격에 휩싸여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지나친 과체중이 된 어머니와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막내 동생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라도 부둥켜
안을 수 있는 혈육이지만 한편으론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기도 하다. 하지만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애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 살아가다 보면 어찌할 수 없이 매일 같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론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종속된 일상이 무기력하게 추락하지 않고 결국 새로운 기류를 타고 짐작할 수 없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응원 같은 결말로 이륙한다. 결핍의 시간을 어제로 밀어내고 충만한
내일을 꿈꾼다.
<길버트 그레이프> 이후로
연출한 <사이더 하우스>(1999)와 <쉬핑 뉴스>(2001), <언피니시드 라이프>(2005) 사이엔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사생아들을 받아주는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의 성장과 정착을 다룬 <사이더 하우스>,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보낸 유년시절로 인한 자신감이 결여된 삶을 극복해내는 남자의 인생을 살피는
<쉬핑 뉴스>, 모종의 사고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며느리를 원망하고, 친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곰에게 앙심을 품은 노인의 삶에 관한 <언피니시드
라이프>까지,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거나 그로부터 해방되는
남자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조류를 거슬러올라가거나 타의적으로 떠밀려가거나 제 자리를 꿋꿋이
지켜나가거나, 저마다 다른 형태로 천착한 결핍을 메우고 치유하는 건 결국 그 주변부에 머무는 관계를
통해서다. 결국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설 자리를 깨닫고, 자신이
의지할 존재를 발견한다. 필연적인 환경이나 불가피한 사건으로 얻은 결핍과 상처가 관계를 통해 치유된다. 평범한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뤄지는 삶, 그것이 바로 라세 할스트롬의
영화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서다.
할스트롬의 작품 속에서 보기 드물게 우화적인 세계관을 지닌 <초콜릿>은 종교적 교리를 바탕에 둔 억압적인 정서를 당연한 규율로 감내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 편입된 한 여인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주민들을 계몽한다는 달콤한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서 시대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어느 개인과 그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초콜릿>은 서로 반목하던 세계의 화해와 화합을 그린다는 점에서 근작인 <로맨틱
레시피>(2014)와 연결된다. 뤼미에르에서 프랑스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프랑스 여인과 인도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인도 가족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이 작품은 결코 서로 손잡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의
화합을 그린다는 점에서 할스트롬의 세계관에 종속된다. <사막에서 연어낚시>(2011) 또한 중동과 서방 세계의 갈등 속에서 국면 전환을 꿈꾸는 영국 정부와 예멘의 부호가 손을 잡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21세기 이후로 할스트롬은 다양한 방면의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중세 시대에 숱한 여성들을 매혹시켰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호색가 카사노바에 관한 <카사노바>(2005)나 미국의 대부호인 하워드 휴즈에
대한 자서전을 날조한 작가에 관한 실화를 다룬 <혹스: 욕망의
법칙>(2006)과 같이 남다른 면모를 지닌 이들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디어 존>(2010)이나 <세이프 헤이븐>(2013)과 같이 남녀의 절실함을 바탕에
둔 로맨스물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주인에 대한 충심이 강한 강아지의 절절한 사연을 다룬 <하치 이야기>(2009)도 한편으론 새로운 드라마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세 할스트롬의 작품들은 어떤 대단한 경지를 선사할만한 걸작에 대한 기대감으로부터
확실히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그의 영화들은 과거보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너른 감정들을 담아내는
드라마로 확장되고 있다. 감독으로서 무엇이 더 옳은 길일지에 대해 말하긴 어렵다. 중요한 건 그의 드라마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걸작일 수 없듯이 모든 이의 삶이 위대해질 순 없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에도 나름의 위로가
필요하다. 라세 할스트롬의 드라마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좋은
범작들을 만드는 것, 그것 또한 이 세상에 필요한 재능인 셈이다.
소설
찍는 남자, 라세 할스트롬
라세 할스트롬의 초기 대표작인 <개 같은 내 인생>은 스웨덴 작가 레이다 욘손의 자전적 소설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을 기초로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밖에도 그는 적지 않은 소설을 영화로 연출해왔다. 소설가이자 각본가이며 영화 감독인 피터 헤지스의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부터 스토리텔링의 대가 존 어빙의 소설 <사이더
하우스>, 영국의 여류 작가 조앤 해리스의 소설을 옮긴 <초콜릿>과 퓰리처상 수상 작가 E. 애니 프롤스의 소설 <시핑 뉴스>, 베스트셀러 작가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소설 <디어 존>과 <세이프
헤이븐>, 영국 작가 폴 토데이의 소설 <사막에서
연어낚시>를 영화화했으며 최근작인 <로맨틱 레시피> 또한 경제전문지 출신 기자인 리처드 C. 모리아스가 쓴 소설 <백 걸음의 여행>을 스크린에 옮겼다.
무명 배우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변신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할리우드에선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탄생했다. 크리스 프랫은 지금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사실 크리스 프랫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 승선하기 전까지 완전한 무명 배우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다.
올해로 6시즌까지 진행된 TV시리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연기한 앤디 역으로 적지 않은
인지도를 얻었고, 크리틱스 초이스 TV어워즈에선 코미디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사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의 앤디는 유쾌한 유머 감각을 지닌 캐릭터란 점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외모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처럼, 믿을 수 없도록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육질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스타로드와 달리 앤디는 테디베어처럼 둥글둥글한 곡선미가 눈에 선명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프랫은 한 TV쇼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내에게 소리쳤던 일화를 밝혔다. “여보! 75파운드나 몸무게를 빼야 되니 빵은 그만 구워!” 반쯤은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에겐 일종의 절실함이 있었다. 마블
코믹스의 팬이기도 했던 그에게 마블 유니버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경력 안에서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감초 역할에 특화된 편이었는데 그런 역할을 통해서 경력을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오디션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2012)에 출연한 뒤부턴 연기하고
싶은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매니저를 통해서 새로운 오디션을 찾아갔다.”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말이다.
사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크리스 프랫이 특별히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출연했던 <원티드>(2008), <신부들의 전쟁>(2009)이나 <머니볼>(2011),
<5년째 약혼 중>(2012) 등의 작품에서 어떤 배우가 맡았다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역할을 전전해왔다. 그나마 지난해에 제작된 <딜리버리
맨>과 <그녀>에선
각각 극의 중심인물이 지닌 정서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중심인물의 정서적 결핍을 긍정적인 태도로 수긍하고 이해하는 인물로서
자리하며 나름의 존재감을 어필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다만 편차가 심해 보이는 체중으로 인상이
자주 변화하는 탓에 크리스 프랫이란 배우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인상을 꿰어내기가 쉽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앞서 나열한 출연작들보다도 주연 캐릭터의 내레이션을 맡은 <레고 무비>(2014)에서의 존재감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무엇보다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를 보며 앞서 열거한 그의 출연작들을 짐작하는 이란 드물 것이다. 단언컨대 그럴 수밖에 없다. 식스팩과 수백 광년쯤은 동떨어진 듯한
체형의 무명배우였던 그의 과거를 연상했을 때 스타로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 프랫과 처지가
유사한 작품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또한
마블 코믹스의 역사를 차지하는 작품이지만 <어벤져스>의
세계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 프랫에겐 좋은 기회였다. “시나리오와 감독의 디렉팅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배우로선 도움이 된다.” 대중에게도 낯선 역할인 만큼 자신의 관점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낯설지 않은 작품이었다. 유년시절 친구를 통해서 우연히 원작 코믹스를 접한 적이 있었고 자신도 그 중
몇 권을 소장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론 운명적이란 의미를 붙일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막상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역이라서 안도했지. 시나리오가 아주 웃긴데, 그게 딱 제임스 건 감독 스타일이다. 그는 실제로도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사실 크리스 프랫은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의 칭찬을 곧잘 하는 편인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도 주변 동료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입바른 말을 잘해서라기 보단 그가 실제로 사려 깊고 친절한 동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는 <당신은 몇번째인가요?>(2011)라는 영화로 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주연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의 역할에 오디션을 봤지만 작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크리스 에반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크리스
에반스 또한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크리스 프랫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었는데 두 배우가 모두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치곤 기묘한 일이다. 언젠가 <어벤져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중첩될 가능성도 다분한 만큼 두 배우가 한 스크린에 자리할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다.
한편 그는 자상하고 세심한 가장이기도 한데 한번은 동료배우이기도 한 아내 안나 패리스의 머리를 땋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화제가 됐고, 한 영상 인터뷰에서 머리 땋기 실력을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천연덕스럽게 내년 개봉작으로 예정된 <쥬라기 공원>의 새로운 속편을 홍보하며 1분만에 완벽한 머리 땋기를 선보인
그는 “(머리를 묶을 땐) 고무밴드보단 스크런치라고 불리는
걸 쓰는 게 낫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촬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아내로부터 생후 13개월이 된 아들이 아빠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자신을 보고 ‘아빠’라고 불러주는 어린 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날을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리스 프랫은 우주를 지키는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이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 충실한 남자인 것이다.
크리스 프랫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마블 유니버스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배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최근 LA에 있는 한 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자신이 영화에서 입었던 의상들을 입고 스타로드로서 아이들을 찾았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관련된 인터뷰 중 자신의 촬영
의상을 챙겨놨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영화가 개봉하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아이들을 찾아갈 거다. 영화가 크게 성공해서 아픈 아이들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피터 퀼이나 스타로드가 찾아오는 게 큰 의미가 된다면 그럴 거다. 그럼 이 영화가 내게 진정한 의미가 될 거다. 가장 멋진 건 내
아들이 언젠가 이 영화를 볼 것이고, 어쩌면 내가 어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이다. 그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는 거다.” 생각해보면 크리스 프랫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선한 인물로서 자리했다. 때때로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랬다. 그는 본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배우다. 진정한
영웅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식스팩보다 그 착한 마음이 진정한 매력이자 재능일 것이다. 그 마음이 그의 경력에 좋은 영감이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식스팩을
볼 기회는 유효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속편이 2017년에 공개될 예정이니 말이다. 물론 식스팩보다도
따뜻한 마음이 더욱 매력적인 남자, 크리스 프랫의 유쾌한 행보를 계속 목격하고 싶다.
'리부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부팅’ 그러니까 컴퓨터를 다시 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러니까 영화를 리부트한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부트는 그 대상이 되는 원작이 깔아놓은 철로에 개량된 열차를 올려놓는 작업이 아니다. 열차뿐만 아니라 철로를 싹 갈아엎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작업이다.
변주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시리즈의 정체성만은 유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엔 배트맨이 있고, <맨 오브 스틸>(2013)엔 슈퍼맨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없는 <007>시리즈가 존재할 리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의 미래를 보장하는 뿌리이자 줄기이며 잎이자 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엔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리부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배트맨이든, 슈퍼맨이든, 스파이더맨이든, 한결 같이 ‘태생의
비밀’을 안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리부트
영화들이 ‘프리퀄 무비’로 시작되는 건 다분히 전략적인 셈이다. 리부트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돼서 새롭게 설계된 이야기 위에서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다. 이를 테면 <007: 카지노 로얄>(2006)이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과 같은 작품은 프리퀄의 형식을 빌려서
시리즈의 리부트를 시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서사의 발판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구축한 뒤, 나아가버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노력보다도 손쉽게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방법론이다. 게다가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증명한 것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의 너비란 그야말로
우주처럼 넓고 광활하다. CG의 발달을 위시한 영상 기술의 발달도 리부트를 부채질한다. 과거의 기술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구현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을 놀라운 볼거리로 발바꿈시키는 것만으로도 리부트의 가능성은 보다 무궁무진해진다. 리부트
열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프랜차이즈들이 리부트의 대열에 합류 중이다.
리부트 열풍은 영화계를 넘어서 TV시리즈까지 강타하고 있다. 내년에 방영될 예정인 <히어로즈> 시즌 5는 이미 기존의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또한 고전 시리즈로서 인기를 모았던 슈퍼히어로물인
<플래쉬>도 새롭게 리부트될 예정이다. 또한
리부트 열풍은 영화와 미드의 경계를 넘어선 스핀오프 기획으로 진화 중이다. <어벤져스>의 성공에 힘입은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기획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을 주인공으로 둔 또 다른 <배트맨> 프리퀄 시리즈가 미드로 제작 중이다. 스크린과 TV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리부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9>엔 유난히 독점 보도가 많았다. 이상하다. 타방송사 기자들은 노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뉴스9>에서만 유독 독점 보도가 많단 말인가. 손석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같이 출입처에서 나오는
자료 보고 그 바탕 위에서 보강 취재하는데 익숙해지면 자기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데 익숙해진
기자의 경우 자율적 취재기능이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 <뉴스9>의
공신력은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손석희의 <뉴스9>은 언론의 직업 윤리란 정의로운 신념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뉴스룸>이추구하는것은지금까지진행해왔던 <뉴스9>과본질적으로다르지않습니다. 한걸음더들어가진실에접근하는것입니다." 손석희의말처럼<뉴스룸>은
기존의 <뉴스9>의 확장판이다. 100분짜리 뉴스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보도국 입장에선 기존의
탐사 보도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호흡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기존의 <뉴스9>에서 힘을 발휘했던 손석희의 생방송 인터뷰 능력과
현장성 있는 보도 방식은 100분이라는 시간을 생동감 있게 채운다. 실제로
지난 10월 17일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당시 <뉴스룸>은 해당 보도를 무려 70분 동안 진행했는데 대부분 현장에 출동한 기자들의 현장 스케치와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과의 통화로 채워졌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건을 사건 현장에서 급박하게 전한다는 것. 이건 <뉴스룸>이 타방송사들과 차별화된 취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해외의 ‘뉴스쇼’들처럼 박진감을 연출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갖은 사회적 이슈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100분짜리 뉴스가 존재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손석희의 <뉴스룸>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 무모한 도전으로 회자될진 모르겠다. 공중파 뉴스의 시청률에 비해서
낮은 시청률을 보이는 종편 뉴스로선 모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뉴스룸>의 영향력은 이미 타방송사의 뉴스를 압도한지 오래다. 브랜드로서의 인지도가 중요하다. 게다가 당장 TV 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지 않아도 <뉴스룸>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뉴스룸>에 대한 평가가 심심찮게 들린다는 건 이미 <뉴스룸>이 어떤 식으로든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적지 않은 영향력이 감지된다. 지금 한국의 방송 뉴스는 손석희가
있는 뉴스와 손석희가 없는 뉴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손석희가 JTBC의 보도국 사장직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손석희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그 누가 손석희를 의심하는가. 지금 손석희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손석희뿐이다. <뉴스룸>에 대한 믿음도 거기에 있다. 손석희는 손석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의 죽음은 세상에 큰 구멍을 남긴다. 신해철이 죽었다. 세상에 구멍이 났다. 그 구멍으로 폭포처럼 언어가 쏟아진다. 한결 같이 그리움이 고이고
또 고인다. 깊고 너른 상실감 속에서 사람들은 신해철이 남긴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되짚고 되새겼다. 신해철을 다시 읽는다.
JTBC에서 방영한 <속사정쌀롱>을 봤다. 1회였다. 신해철이
있었다. 웃고 있었다. 따라 웃다가 끝내 울컥했다. 죽은 신해철이 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실감이 났다. 타 들어가는 성냥의 끝자락을 보는 기분이었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속이 쓰렸다. 신해철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 건 지난 10월 27일 저녁 무렵 방콕의 공항에서였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속보’와 ‘신해철’과 ‘사망’이란 단어가
일렬로 나열돼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달려든 비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비행기는 두 시간 연착됐다. 하늘도
우는 것 같았다. 거짓말 같은 소식 한가운데에서 거짓말 같은 생각만 떠올랐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신해철의 음반을 찾아봤다. 마치 깃발이 없는
깃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CD 하나를 집어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신해철은
노래했고, 나는 코끝이 시큰했다. 과거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던 신해철은 ‘욕을 많이 먹으니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유세윤의 말을 이렇게
받았다. “불노불사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세상에 회자될
슬픈 농담 하나가 연착된 비행기처럼 뒤늦게 더해졌다.
신해철이란 사람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솔로
앨범을 낸 인기 가수였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먹은 가수이기도 했다.
나름 곱상한 외모에 커피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 커버로 쓰인 그의 1집 앨범은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그냥 평범했다. TV에 나와서 노래하는, 잘 나가는
인기가수처럼 보였다. 그러다 2집 앨범 활동 중에 대마초를
피워서 경찰에 붙잡혔다고 뉴스에 나왔을 땐 어른들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머리가 길고, 옷차림이 불량하고, 저럴 줄 알았지’란 식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왜 저렇게 됐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신해철이라는 가수를 좋아하게 된 건 조금 머리가 굵어진 중학생 시절이었다. 넥스트의 2집 앨범인
<The Being>은 내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접한 명반이었다. 록이 뭔진
잘 몰랐고 그냥 넥스트의 음악이 좋았다. 그리고 가사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좋아했던 신해철의 가사를 보면서 그 당시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생각했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이게 열네 살짜리 중학생이 즐겨 부를 만한 노래 가사인가. 확실한 건 그의 언어가 학창시절부터
나를 움켜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일 게다. 신해철은 항상 나 자신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서, 나 자신이 취해야 할 삶의 노선에 대해서 노래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 알게 됐을 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과 맞서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직접 최전선에 서서 자신을 짓누르려는 사회의 편견과 맞서서 싸우면서도 스스로를 보존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선생님도, 부모님도 알려주지 않던 삶의 방식이었다. 오히려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겐 쳐다봐서도 안될 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해철은 기성세대에게 내 자식을 이상하게 물들이는 나쁜 친구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신해철을
독설가라고 말한다. 독설가는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해철이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신해철은 항상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선 어떤 것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신해철의
독설이란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이나 힘을 향해 있었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았으면 음악적 평가를 ‘닥치라’고 일갈했고, 동방신기와
비의 노래를 유해매체로 지정하지 말고 국회를 유해매체로 지정하라고 주장했으며 사회적 환경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가 일방적으로 게으르다
비난받아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지성을 바탕에 둔 예리한 주관을 정확하게 빼 들었다. 말을 아끼지도,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불합리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거나 집단의 논리로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참지 않았다. 이를 테면 안정환이 경기 중 관중석에 난입한 것을 두고 스포츠 선수로서 팬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질타를 받을 때 그가 관중석에 난입한 것은 가족을 욕한 관중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는 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해철의 언어는 미디어를 통해서 숱하게 왜곡 당했고 대중은 손쉽게 그 언어를 폄하했다.
반대로 그는
개인을 대상으로 말을 걸 땐 격려와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독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언어가
대부분 기득권의 폭력과 불합리에 맞섰다는 건 그에 억눌린 개인의 편에 선 목소리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말은 동일한 의지를 표명한 이들과의 연대이자 응원이며 위로였다. 트위터에서 음악을 한다는
후배가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신해철은 이렇게 답했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냐.” 신해철은 강자에겐 강자의 언어로, 약자에겐 약자의 언어로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 모든
언어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는 건강한 자아의 보존을 통해서 건강한 세계의 형성을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신해철은 넥스트를 해체한 뒤로 4년간의 영국 유학을 떠났다. 인기 절정의 밴드가 해체된 것도 아쉬웠지만 솔로 활동으로도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뮤지션이 홀연히 유학을 떠난다는
건 굉장히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록과 메탈로 다진 음악적 아성을 뒤로 하고 영국에선
테크노 사운드를 파고 들었고, 끝내 ‘크롬(Crom)’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들은 상당한 음악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한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는 뮤지션이었다. 그래서
<백분토론>에 나간 것을 후회한다고도 말했다.
세간의 언어에 휘말리면서 음악에 집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참기 힘든 세상을
향해 말하고 또 말했다. “이 사회에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걸 겉으로 숨기고 쉬쉬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지.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안 만들어요. 숨기는
사람들이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 목소리가 사라졌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모두 다 언젠간 사라질 운명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어느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어떤 우주의 상실이 된다. 신해철의 죽음이 그렇다. 신해철의 노래는 이 세상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세상에 속한 나와 당신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변화는 개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존 레논의 죽음과 유사한 상흔을 남긴다. 세상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내는 죽음이다. 정당한 언어로서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고, 공정하지 못한 기준에 저항하고, 불합리한 윽박을 위트 있는 유머로
대항함으로써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노래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드물고 귀하다. 귀한
사람의 죽음이자 귀한 언어의 소멸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6년
만에 <SNL코리아>로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말했다. “여러분이 나를 못 본 사이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딸이 아홉 살, 아들이
일곱 살일 때 들려주던 이야기를 스무 살에도 들려주고 싶다. 공부든 학교든 돈 못 벌어도 좋으니까 아프지만
말아라.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아픔을 호소하다
세상을 떠난 것이 벌써 여러 주가 지났다. 울컥함은 현저히 줄었지만 그의 노래와 말에서 느껴지는 절절함이
깊어져 땅이 꺼질 것만 같다. 그래도 어쨌든 산 사람은 두 발을 딛고 살아서 명복을 비는 수밖에 없다. 잘 가세요. 부디 음악만 할 수 있는 곳으로. 안녕, 마왕.
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족보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 친숙하다. 예술영화라는 말보단 가볍고, 블록버스터보단 고상하다. 아트버스터가 대중에게 먹힌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8월에 개봉된 <비긴
어게인>은 10월까지
3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3개월간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수성해왔다. 다양성영화 중엔 최초로 세 자릿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비긴 어게인>이 흥행에 탄력을 받게
된 시점부터 아트버스터라는 단어를 명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트버스터는 ‘예술성을 갖춘 블록버스터’라고 정의하는 신조어다. ‘아트’보단 ‘버스터’에 방점이 찍히는 인상이다. 올해 아트버스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지난 3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개봉 직전이었다. 그 이후로 아트버스터는 대단히 보편적인
용어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일찍이 2011년에 영화 <북촌방향>의 홍보과정에서 한차례 사용된 바 있었지만 올해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발음된다.
<비긴 어게인>을 홍보한 올댓시네마의 김태주 실장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예술영화라고
하면 지적인 예술을 즐기는 소수 취향의 영화라고 느껴져서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들이 있다. 그런 거부감을
대중적으로 완화시켜주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중들의 입장에선 아트버스터라는 단어가 생각 이상으로 친근하고
쉽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녀>, <프란시스 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등 아트버스터라고
불린 영화들에게선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실 완성도가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이긴 한데 주제가 가볍게 느껴지고, 표현방식이 예쁜, 소위 ‘달달한’ 영화들이 전반적으로 잘되는 분위기다.” 영화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아트버스터라고 명명되는 작품들은 대체로 관객의 취향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테면
전체적인 영화의 형태를 즐기는 것만큼이나 영화의 일부가 되는 소품들에 대한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그러니까
어떤 관객에겐 아트버스터를 본다는 건 소품숍을 방문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의 소품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미래적인 환경 속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온화한 색감이 인상적인 <그녀>는 그 단편적인 이미지의 취향을 소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만족감을 부른다. 게다가 아기자기한 디테일과 거창한 스케일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킨다.
KT&G 영화사업팀 팀장 진명현은 아트버스터에 대한 소비 욕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영화들은 저렴해 보여서 싫고, 상업영화는 평범해
보여서 싫은 관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요즘 소위 아트버스터라고 불리는 예술영화가 그 영역을 잘 파고든
것 같다.” 결국 아트버스터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특별해진다는 만족감을 즐기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도시를 잘
묘사한 영화들의 성적도 하나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진명현 팀장은 말한다. “유명 감독이나
배우보다도 도시가 키워드인 거 같다. 제목에 유명한 도시 이름이 들어간 영화들의 흥행이 나쁘지 않다. 대표적으로 <미드나잇 인 파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흥행했다. <프란시스 하>나 <비긴 어게인>도
영화의 배경인 뉴욕을 잘 보여준다. 해외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런 영화들은 낭만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SNS가 아트버스터의 열풍을 확산시키는 경향도 있다. 고급스러운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듯이 자신의 남다른 영화적 취향을 타인에게 전파한다. 영화적인 취향을 통해서 자신을
메이크업하는 거다. 예전에 비해서 영화를 많이 보지만 과거의 시네필과는 달리 진지한 영화적 비평에 심취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영화에서 발견한 이미지를 전시하고 음악을 공유하는데 집중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소품을 활용한 머천다이즈 제작을 통한 마케팅이 활발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포스터와 스티커, 엽서는 물론 텀블러와 같은 제품을 만들어서 시사회나
이벤트를 통해서 배포한다. 저예산 마케팅을 추구해야 하는 다양성 영화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이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취향을 적절하게 건드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유명한 셀러브리티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하거나 게스트로 초대해서 관객과의 대화를 마련하는 이벤트가 잦아진 것도 유명인들의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부여한다.
“SNS의 전파속도가 빠른 만큼 어느 영화나 예쁘고 감각적인 아트워크나 감성적인 텍스트를 통한 마케팅이 선행적으로
이뤄지는 거 같다. 대체로 이런 방식은 20~30대 여성
취향에 정확히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유현택 대표의 말은 20~30대
여성들이 아트버스터의 주요한 관객층에 속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네이버의 영화 섹션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녀>, <프란시스 하>와 같은 아트버스터 류의 영화들은 20대 여성의 호감도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 극장 환경의 변화도 주요하다. 과거와 달리 다양성영화를 상영하는 요즘의 예술영화 전용관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준하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 CGV 무비꼴라주나 롯데시네마 아르떼처럼, 멀티플렉스에서도 예술영화
전용관이 확대됐다. 극장 환경에 대한 거부감은 남성보단 여성 관객에게 예민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선 바람직한 결과다.
“예전엔 50개
미만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 다양성영화 시장과 200개 이상의 개봉관을 지닌 상업영화 시장으로 분류됐는데
요즘은 100개 전후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 중간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시장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여러모로 반길만한 일이다. 다양한 취향을 배려할 수 있는 시장의 확대는 결국 전체적인 시장 규모를 확대시킬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편식의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최근 아트버스터 열풍 속에서
영상미나 음악 좋은 영화를 찾는 경향이 많아졌다. 수입 경쟁이 심해지고 수입 단가가 치솟는 경향이 발생한다. 영화의 투자 비용이 상승할수록 손실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는 전체적인
시장성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트버스터는 여전히 불명확한 단어다. 그만큼 시장의 미래도 불확실하다. 확실한 건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지금
아트버스터라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기회란 말이다.
음악 듣기는 간편하다. 터치 한 번이면 손쉽게 플레이된다. 비싸지도 않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음원 수익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돌고 돌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들어도
상관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어려운 게 당연한 게 됐다. 지난 7월 16일, 록 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을 주축으로 한 ‘바른음원협동조합’이
출범했다. 뮤지션들의 음악적 권익을 보호해 주지 않는 현재의 대중음악 시장에서 뮤지션 스스로 생존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음악으로 돈을 벌기 힘들어진 뮤지션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뮤지션이 힘들어진 건 음악 시장 사정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음악 시장은 돈을 버는데 정작 음악을 만드는 당사자들의 수익이 보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의 다운로드 가격은 600원이다. 가수나 연주자에게 돌아오는 저작권료는 5% 수준이다. 90%에 가까운 금액이 제작사와 유통사의 몫이 된다. 노래 한 곡을
만들고 팔면 100원이 남지 않는다. 게다가 스트리밍은 곡당 12원에 결제된다. 그 와중에 음원 서비스 업체들은 음원정액제 등을
통해 박리다매로 헐값에 팔아 치운다. 제값을 받아도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에서 수익성은 더욱 바닥을
친다. 지난 2012년
12월, AP통신에선 그해에 전 세계를 뒤흔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매출에 관해 보도했다. 당시까지 ‘강남 스타일’은 한국에서만 360만
건의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싸이가 손에 쥔 돈은 6600만원 정도였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선 290만 건의 다운로드가 집계됐다. 그런데 미국에서 싸이가 음원 다운로드만으로 얻은 수익은 무려 28억원에
달한다. 이 심각한 괴리는 국내 음원 시장의 기형적인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다. ‘강남 스타일’조차 이 정도니 다른 곡들의 음원 수익은 얼마나 처참할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다운로드 최저가격은 2237원, 프랑스가 1087원, 영국이 1064원, 미국이 791원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63원이다. 잘못 쓴 게 아니다. 결국 생산자인 뮤지션의 몫은 평균 10.7원 수준이다. 10원짜리 동전 하나 보기 힘든 요즘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곡당 12원 수준인 스트리밍 서비스는
저작권자의 몫이 곡당 무려 0.2원이다. 100곡을 스트리밍해도 20원이 남는다. 어쩌다 이렇게 기형적인 음원 수익 배분 구조가 정착된
건가. 국내 음반 시장은 2000년 이후 급격하게 디지털
시장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벼랑 끝에 섰다. 인터넷 망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소리바다와 같은 P2P 사이트를 통해서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음반 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터진 경제위기로 인한
소비 시장 위축은 얼어붙어가는 음반 시장을 향한 매서운 바람이었다. 침몰하는 음반 시장을 구출해 줄
대안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불법 다운로드를
막고자 음원을 초저가로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급했다. 망 사업자들의 플랫폼을 통해서 음악을 싸게 공급하고
유통시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면 다시 음반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 순진했다. 음반 시장의 맥박은 나날이 희미해졌다. 그 사이에 음원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기술 발달과 대중화로 인해 음원 시장 역시 급격하게 생활과 밀착해 버렸다. 문제는 구조와 의식이었다. 대형 음원 유통사들은 초기에 공급받았던
낮은 음원가에 맞춰 유통 기준을 정했다. 소비자들에게도 음원은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음악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음반
판매량은 회복될 기회를 잃었다. 음반 한 장 가격이면 듣고 싶은 음악을 다 듣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언젠가부터 음악은 거저 들어도 상관 없는 것이 돼버렸다. 음악은
제작과 유통을 담당하는 망 사업자들의 수익을 위한 시녀로 전락했고, 음악 종사자들은 순식간에 재주 부리는
곰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젠 음원 차트에서 선전하는 아이돌 스타를 대거 보유한 메이저 기획사들조차 음원
수익엔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해외
진출이라는 옵션이 생겼지만 그것도 모두를 위한 은총일 리 없다. 그럼에도 음원 서비스 업체에서 차트
성적은 중요하다. 기대할 수 없는 음원 수익을 대체하는 수익 모델은 공연과 행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가 음악적인 주 수입원이 됐다. 결국
음원 차트 순위가 섭외 순위를 좌우한다. 행사장을 쫓아 전국 각지를 동분서주하는 가수들이 늘어났다.
최근 교통사고로 사망한 레이디스 코드 멤버들의 현실도 이런 시스템의 열악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음악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에서 빚어진, 러시안 룰렛
같은 비극이다. 음원값은 음원서비스사, 저작권협회, 음반제작자협회 등 음반 산업의 관계자들이 모여서 합의한 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승인을 받는다. 음악이 공공재도 아닌데 정부의 가격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정부에선 음원 서비스 사가 40% 이상의 수익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을 설립한 신대철은문체부 회의에 참석해서 직접적인 음악 종사자들에게 80%의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신탁 단체들과 합의하면 승인해 주겠다는 대답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제안을 한 경우는 없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정부에서도 제대로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음악의 실제 주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은 어쩌면 그 첫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현재의 음악
종사자들이 불합리한 음원 수익 배분을 감당하면서 폭리를 취하는 대기업 산하의 음원 서비스 업체들에게 음악을 공급하는 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변화도가 아닐 것이다. 음악이
음악을 살리지 못하는 땅에서 그리는 음악적 청사진이란 결국 신기루이거나 백일몽이다. K팝도, 한류도, 언젠가 흩어질 모래성이다.
말해주고 싶었다. 읽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는 팟캐스트를 열었다. 거기 독자가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진행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 관한 팟캐스트다. 소설가 김중혁 작가가 항상 고정 게스트로서 옆자리를 지킨다. 평론가와
작가가 진행하는 책에 관한 방송이라고 하니 진지하고 엄숙할 것만 같지만 유쾌하고 엉뚱한 만담이 귀를 잡아 끈다.
본질적으론 책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지적인 관점과 뚜렷한 성찰이 마음을 붙잡는다. 2년
전에 시작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스타 평론가와
인기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고, 2년 동안 전체 팟캐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을
지켜왔다. 인기를 모으는 대부분의 팟캐스트가 시사나 정치, 섹스에
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을 상기했을 땐 놀라운 선전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는 사실이다.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출판사는 위즈덤하우스뿐만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동네’의 <문학이야기>, 소설가 황정은과 김두식 교수가 진행하는
‘창작과 비평’의 <라디오
책다방>이 대표적이다. 출판사가 팟캐스트를 기획하는
상황을 보도하는 다수의 언론에선 출판 시장의 불황으로 인한 현상과 연관해서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일까. 만약 출판 시장의 불황을 타파하기 위한
의도를 앞장세운 기획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당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마케팅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어야 하지 않을까.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선 언젠가부터 자사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광고성 코너를 짧게 삽입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출판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임을
모르고 듣는 청취자도 많았다. 게다가 90회 이상을 업로드한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위즈덤하우스의 도서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건 윤태호 작가의 <미생>뿐이다. 그렇다면 위즈덤하우스에선 대체 왜 팟캐스트를 운영한 것일까.
“출판시장이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독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질의 책을 가이드해줄 수 있는 경로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 사실 방송을 비롯한 기존의 매체가 지닌 영향력이 줄어들고 책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독자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데 팟캐스트 청취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서 새로운 형태의 매체에서
책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있었다. 아마 다른 출판사들도 비슷한 의도에서 팟캐스트를 기획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기획한
위즈덤하우스의 김은주 분사장의 말이다. 한 달에 두 번 업로드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매주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에 어울리는 책을
소개한다. 신작보다도 구작이 대부분이다. 진행자인 이동진이
선정하는 도서들이 그 대상이 된다. 위즈덤하우스는 그저 멍석만 깔았다.
완벽하게 진행자의 역량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다른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해설과 철학적 접근에 집중하고자 하는 진행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존중한다. 어지간한 농담이나 유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성을 염두에
둔 기획이라고 말할 여지조차 없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역시 대단한 야심에서 출발한 기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질의
정보’를 생산해내겠다는 의도는 존재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진행자의 섭외가 관건이었다. 그 자체로 브랜드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인지도 있는 평론가와 작가가 팟캐스트를 통해 책을 말하게 된 건 그래서다. 이는
기성 미디어에선 시도하기 힘든 기획이었다. 책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책을 소재로 한 양질의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저조한 야심한 시간에 편성되기 일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청취가 가능한 팟캐스트는
출판사 입장에선 매력적인 플랫폼일수밖에 없다.
“아마 책이 잘 팔리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출판계의 위기를 고려한 돌파구일수도 있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본다.” 교보문고 콘텐츠 사업팀의 윤태진 PD의 말이다. 그는 올해 초 소설가 정이현과 문학평론가 허희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낭만서점>을 기획했다.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지만
역시 진행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건 앞서 소개한 출판사의 팟캐스트와 유사하다. 다만 서점이라는 광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메리트가 있다. 서점은 본래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책의 광장이다. 북콘서트라던지, 낭독회 등의 도서 관련 행사가 서점에서 열리는 건
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명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란 형식성을 생각했을 때 교보문고라는 광장의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타이틀 자체로 브랜드가 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 또한 광장을 얻었다. 상수동에 생긴 카페
‘빨간 책방’은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지만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위한 공간이다. 이동진이 팟캐스트에서 선정해 소개한 책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팟캐스트
녹음 혹은 공개방송을 위한 광장 노릇을 한다. 2주년을 기념하는 공개방송 당시엔 50개의 객석이 가득 채워졌다. 온라인에서 확인한 인지도를 오프라인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 적극적인 출판사만큼이나 적극적인 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지난 8월에 오픈한 웹사이트 ‘소설리스트’는 소설가 김중혁과 김연수, 서평가 금정연 등이 운영하는, 소설 전문 매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간에 묻혀 사라지는 좋은 소설을 발굴하자는 취지를 안고 문을 열었다. 영화에 별점을 매기듯 문학에 별점을 매긴다. 소설가가 직접 소설을
평한다. 새로운 시도다. 시기적절한 기획이다.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론을 통해서 기대 이상의 대중성을 확보한 팟캐스트의 성과는 분명 출판사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도 고무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새로운 바람이다.
물론
‘불황’이란 단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기류를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시도는 존재해야 한다. 팟캐스트는
출판계의 새로운 날개다. 디지털식 방법론이 아날로그 시장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