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폭력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는 관객을 폭력의 현장에 무덤덤하게 노출시키며 이야기를 꺼내 든다. 날이 선 면도칼은 사람의 목을 갈라 피를 쏟아내고, 약국에 들어와 도움을 청하던 임산부는 발 아래로 하혈하다 쓰러진다. 시작부터 피가 흥건하다. 그 거리엔 피가 흐른다. 포도주를 따르듯 피를 부르는 무리들이 조용히 살아간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피의 거래로 거리를 장악한 이들의 살벌한 언약에 발을 담게 된 자의 이야기다. 폭력에 가담한 그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 없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침전된 삶에 발목을 잡힌다.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니콜라이는 국제적 범죄조직 ‘보리V자콘’의 보스 세미온(아민 뮬러-스탈)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을 돕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앞뒤 분간 못하는 키릴과 달리 니콜라이는 냉정하면서도 속이 깊다. 거친 인상과 달리 난폭하지도 않다. 명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직감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런던 거리를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보리V자콘’의 패밀리들은 거리의 이방인이다. 그들은 폭력을 유입하며 그 거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니콜라이는 그들이 장악한 거리에 편입하기 위해 폭력을 전시한다. 신임을 얻고 그들의 일부로 거듭나려 한다. 결국 세례식이 거행되듯 그는 조직의 일부로 문신을 새긴다.
폭력을 계승하려는 아비는 직계의 무능함을 질시하면서도 보호하려 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인을 주문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후계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거나 무력하다. 아비들이 자식들로 전전긍긍할 때 새롭게 유입된 이방인이 눈에 들어온다. 니콜라이는 키릴로 인한 조직의 손실을 보석하기 좋은 대상이다. 세미온은 니콜라이에게 의식을 통해 조직을 세례한다. 그는 조직의 신임을 얻고 중책을 맡게 된다. 자식으로부터 비롯된 조직의 부채를 갚기 위한 제물로 삼는다. 사투가 벌어진다. 조직의 일원으로 거듭되는 순간 조직을 위한 죽음에 내몰림마저 불사해야 한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한 관찰이 시작되는 건 일기장 덕분이다. 사람이 죽는 동시에 생명이 태어난다. 폭력에 노출된 어미는 죽어서 새로운 자식을 남긴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기록은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왓츠)는 그 실체로 접근하지만 실상 그녀조차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폭력의 위협을 감수해야 할 따름이다. 니콜라이는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은밀히 흔들린다. 조직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명령을 이행하지만 그는 폭력을 맹신하는 무리와 다르다. 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조직에 잠입하면서도 조직의 수하로서의 역할극에 충실하다.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폭력에 온전히 노출된다. 또한 조직에 충성하는 동시에 안나와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 이전의 사연처럼 보인다. 두 영화가 하나의 맥락을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정서적인 진화의 측면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보다 뒤가 아닌 앞에 놓인 이야기 같다. <폭력의 역사>가 폭력의 인과율을 운명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양면성을 저울질하듯 관찰하는 이야기다. 전자가 어떤 결과에 대한 후일담이라면 후자는 결과를 가늠하는 전사의 추적에 가깝다. 갱스터 무비의 외피를 입고 중후한 방식으로 구술되는 영화는 흥건하고 질퍽거리는 이미지를 묘사한다. 관객은 그 폭력을 관찰하는 동시에 온전히 폭력에 노출된다. 아이를 입양한 안나의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외딴 곳에서 평화를 누릴 때 니콜라이는 런던의 어두운 바에서 고독을 맞이한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구원을 약속할 뿐 정작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선의든 악의든, 폭력은 그 대상마저 철저하게 유린한다. 발가벗고 적을 맞이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선 악마가 되야 한다. 폭력과 계약한 사내는 그 속에서 계속 가라앉을 따름이다. 죽여야 할 적도, 살려야 할 가족도 모두 다 잃은 채 홀로 아득한 폭력에 갇혀 살아갈 뿐이다.
덥다라는 말까지 녹아내렸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니 중천에 뜬 해가 이마에 땀방울을 만들어냈음을 알고 구부정하게 등을 뗐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4년만의 쾌거니, 대한민국 만세니, 일단 닥치고 박태환 선수 수고했어요. 남은 경기 일정도 최선을 다해서 많은 노력만큼이나 좋은 성과 거두길. 지구 한편에서는 축제분위기로 떠들썩한데 어느 한편에서는 죽음 앞에 대면한 사람들의 비명과 흐느낌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한다. 쑥대밭이 따로 없다. 죽은 이는 차라리 말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이 절절하게 남아서 떠돌 뿐. 베이징 올림픽 슬로건이 One World. One Dream이란다. 하나의 세상이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실상이 이렇다. 이 순간에도 세상은 각자의 초침을 돌리고 있다. 어떤 이는 새로운 희망을 탐닉하지만 어떤 이는 지독한 좌절을 맞이한다. 해가 뜨는 반대편에서는 해가 진다. 하나의 세상이란 것이 말처럼 쉽다면 올림픽 따윈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합과 평화라는 슬로건은 그 반대편에 선 무언가를 경계하는 좌표인 것을, 우린 얼마나 직시하고 있을까. 눈 앞의 유희를 탐닉하고 있을 때, 저 너머에선 그것이 본래 두려워하던 비극이 비웃듯 도사리고 있다.
날씨가 덥다. 세상이 타오르듯 밤이 되도 땅은 식을 줄 모른다. 아이구, 더워. 하긴 나조차도 날 숨막히게 하는 더위가 먼 나라의 비극보다 가깝다. 하나의 세상이란 정녕 힘들다.
올림픽이 개막됐다. 장예모가 연출한 천이백억 짜리 개막식 공연이 화제다. 역시 중국은 쪽수면 장땡, 이란 반응부터 장예모의 블록버스터 클리셰라는 말까지, 물론 호화롭고 웅장했을 것이다. 물론 난 안 봤다.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인지 몰랐다. 맙소사. 그저 오늘 갑자기 잡힌 인터뷰 준비로 2시간 밖에 잠을 못 잤고 날씨가 미친듯이 더웠을 뿐이다. 알았으면 봤겠지. 혀를 차든 우와, 하든 간에 단 한번뿐인 볼거리는 일단 봐두는 게 상책이니까.
어쨌든 올림픽이 개막됐다. 애초에 말이 많았던 올림픽이었다. 베이징에서는 인공강우를 뿌려대고 공장의 생산을 중단하고 차량 2부제까지 철저히 실시함으로써 맑은 하늘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선수들은 심각한 대기오염에 투덜대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이전엔 티벳 탄압으로 인해 올림픽의 평화정신을 훼손하는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 와중에 세계 각지의 성화 봉송엔 테러(?)의 물결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막겠다는 중국인민들의 몰지각한 타지거리점령 행위도 있었다. 우리도 크게 데였다. 시청 한복판에서 중국 애들한테 떡실신당한 한국인이 여럿 있었는데 경찰들도 속수무책이었단다. 자국인들이 자국에서 중국애들한테 멱살잡히고 다구리 맞고 있었는데 한국 경찰들 다 어디 갔었냐고? 성화 보호했다. 걔네 들이 지금 촛불 때려잡고 있는 거다. 어쨌든 이 글의 본론은 이게 아니고.
올림픽 개막식이 베이징에서 한참인 지금, 러시아는 전쟁을 선포했다.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다. 이미 그루지야 기지를 폭격한 러시아는 아마 군대를 몰고 제대로 밟아주겠다고 벼르는 양상이다. 그루지야의 친서방정책에 열받았던 러시아가 남오셰티아 공화국과 그루지야의 영토분쟁을 그루지야를 밟아줄 절호의 찬스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건 전쟁과 평화의 제전이 공존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란 물음이다. 이는 올림픽에 더 이상 평화의 제전이란 수식어가 일종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선포하는 시대적 이미지가 아닐까. 올림픽이라는 매스게임은 이제 메달 따먹기의 장일 뿐, 혹은 말 그대로 스포츠라는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빅매치일 뿐, 그것이 모토로 했던 전세계 화합의 수식어와는 무관해지는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되려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상대에 대한 손가락질이 오가는 형국이다. 자기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메달의 수로 증명하려 하고 그를 통해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는 지금의 올림픽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무조건 1등의 단상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바라봐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작위적인 금빛 드라마가 감동적인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그리스의 올림피아제 기간엔 이에 참가하는 폴리스 간의 전쟁행위도 중단됐다. 적어도 올림픽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평화를 일깨우는 깊은 잠재력이 있다고 비약할 수는 없지만 잠시라도 폭력의 창을 거두고 서로의 육체적 경쟁을 통해 인간적 유대감을 도모하고자 하는 인간적 화합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게 올림픽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올림픽은 그것과 상당히 먼 것이 돼버렸다. 그게 베이징올림픽 탓이냐고? 아,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올림픽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고, 한국축구가 16강을 넘어가길 간절히 고대하고, 적어도 우리가 일본보단 금메달 수가 많아야 할 텐데 걱정하는 것이 올림픽이라면 이미 우리도 글러먹었다는 거다. 물론 이기는 게 뭐가 나빠? 라고 한다면 그건 나쁘지 않다. 단지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금메달 따먹기에 혈안이 됐다는 게 문제란 거지. 결국 메달 따는 편이 우리 편, 못 따면 듣보잡.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무한경쟁체제의 현실 아닌가. 결국 인간들의 땀내나는 경쟁의 의미는 퇴색되고 누가 이기고 지는가라는 성적표만이 중요해질 뿐. 우리에게 올림픽은 이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 정신차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