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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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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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바쁘기만 한 부모의 무관심이 원망스러운 코렐라인(다코타 패닝)은 새롭게 이사온 집을 구경하던 중 작은 문을 발견한다. 벽으로 막혀있던 문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코렐라인은 결국 그 문이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임을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형 눈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눈을 한 그 곳은 코렐라인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세계다. 일에 매달리는 진짜 부모와 달리 가짜 부모는 코렐라인에게 헌신적이고 자상하다. 하지만 단추를 단 눈은 때때로 기괴하며 음침한 예감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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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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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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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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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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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천사와 악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각 종교적 음모론을 추적하는 기호학자의 수사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있지만 전자가 철학적 기호를 추출하는 반면, 후자는 대중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분자를 지닌다. 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건 단지 기독교의 권위를 뒤흔들만한 이슈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국한할 순 없다. 종교적 진의에 대한 갑론을박만큼 이야기의 리듬감도 중요한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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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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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밍웨이의 저서인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원제, <(A) moveable feast>)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 파리는 낭만으로 치환되기 좋은 도시다. 앙상한 철골구조로 이뤄진 기괴한 에펠탑에 낭만의 살점을 붙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도시의 바닥에 개똥이 가득하고, 광장과 뒷골목에 소매치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침 튀기며 설명한다 한들, 그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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