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혈기왕성한 청춘은 축복이라지만 가진 것 없어 비참한 시절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형구(하정우)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 살아가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현해탄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삶을 떠도는 청춘이다. <보트>는 머무를 곳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청춘의 방황하는 감수성을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버무리며 희망을 역설한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쓸쓸한 뒤안길로 내모는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고 이내 비극으로 내던지는 느와르필름이다.
보트 위에서 나른하게 망중한의 낮잠을 자는 형구는 매번 현해탄을 건너 자신의 은인이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보경 아저씨(이대연)에게 다양한 물품과 김치를 배달한다. 그렇게 매번 보물처럼 김치를 전달하던 형구는 바다에서 묘연한 기습을 당해 김치를 망가뜨리고 중간에서 형구와 보경 아저씨를 중계하던 토오루로 인해 자신이 옮기던 김치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형구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묘령의 여인 지수(차수연)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도주로 인해 형구와 토오루는 예상치 못한 기회이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구는 유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남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기억엔 의문이 섞여있다. 왜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향수라는 배반적 감정과 함께 뒤엉켜 나아간다. 자식을 버린 혈육에 대한 희미한 애증이 식물적인 삶 사이로 무심히 새어나간다. 반대로 토오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미혼모로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의 현실을 비관으로 덧칠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회한을 무표정에 감춘 채 뒤로 조소하며 살아간다. 상반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두 청년은 지수의 돌발적인 제안을 통해 연대를 이룬다.
<보트>는 엉뚱한 사건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밟아나가며 예측불가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다. 참신하고 신선한 발상이 때때로 돋보이며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유머도 제법 쏠쏠하다. 특히 하정우의 연기는 새삼 대단하다. 특유의 넉살과 야생적 기질의 혈기가 어우러진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보트>의 생동감을 발생시키는 원천과 같다. 또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눈에 띄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어울림도 나쁘지 않다. 두 배우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듯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하게 뒤엉키고 구르며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한 관계가 진심 어린 우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의 부조화를 극복할만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두 남자와 함께 부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수의 캐릭터는 때때로 감정 과잉의 상태를 자제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특별한 매력을 남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느와르적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영화적 과정은 때때로 배반적이다. <보트>는 일본청춘드라마의 골자에 장르적 유머와 구성을 결합시킨 형태의 영화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엇박자 상황의 유머로서 동력을 끌어올린다. 두 캐릭터의 연대는 중심맥락을 차지하며 인물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보트>는 사실 캐릭터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인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다만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된 듯한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종종 편애적이다. 동시에 느와르적인 결말은 영화가 지속시키던 정서와 무관하게 단독적인 느낌을 준다.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온도차가 발생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강한 허무를 인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청춘의 표류 가운데 허구적 희망을 감지했던 이라면 활기 가득한 무용담 너머로 내려앉은 절망적인 결말 앞에 당황할 가능성이 녹록하다. 물론 포스터나 전단지를 통해 해양액션영화 따위를 기대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상영관을 박차고 나갈 확률이 더 크겠지만.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
일 때문에 바쁘기만 한 부모의 무관심이 원망스러운 코렐라인(다코타 패닝)은 새롭게 이사온 집을 구경하던 중 작은 문을 발견한다. 벽으로 막혀있던 문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코렐라인은 결국 그 문이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임을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형 눈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눈을 한 그 곳은 코렐라인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세계다. 일에 매달리는 진짜 부모와 달리 가짜 부모는 코렐라인에게 헌신적이고 자상하다. 하지만 단추를 단 눈은 때때로 기괴하며 음침한 예감을 부른다.
인형을 새롭게 봉제하는 바느질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출발하는 도입부는 인형과 바늘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함과 불길함이라는 양면성을 재단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하, <코렐라인>)의 상상력을 온전히 대변한다. 팀 버튼의 원작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연출한 <크리스마스 악몽>의 헨리 셀릭 감독의 새로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인 <코렐라인>은 <크리스마스 악몽>만큼이나 불길하고 순수한 악몽의 세계다. 세계적인 작가 닐 게이먼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코렐라인>은 동화적 세계관을 구술하는 텍스트를 표현력이 풍부한 이미지로 치환하고 새롭게 각색한다.
닐 게이먼이 창작한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완성된 <코렐라인>은 이미지만큼이나 독창적인 세계관을 품은 스토리텔링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코렐라인이 현실로부터 느끼던 결핍을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충족시켜나간다는 사연은 오늘날 어린이들을 고립시키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맞닿아있으며 이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계몽적이다. 그러나 마치 음침하게 변주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판타지 버전같기도 한 <코렐라인>은 자연적이고 순수한 동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괴하고 음흉한 괴담의 기운을 그려넣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을만 하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며 현실 안에서 결핍을 쌓아나가던 코렐라인이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세계에서 부모와 빼 닮은 단추눈의 부부를 만나 그들이 제공한 환상적인 공간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과정은 순수한 아이들의 꿈을 대변한다. 그러나 친부모 몰래 매일같이 비밀의 문을 건너 대리만족을 만끽하던 코렐라인의 미소는 점차 위협적 예감으로 일그러진다. 단추눈의 불길함이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순간, 동화적 모티브에 가려 있던 악몽의 채색이 짙어진다. 코렐라인의 긴장감이 이미지를 타고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된다.
상반된 공간의 특성을 대변하는 대비적 이미지는 <코렐라인>의 세계관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로서 탁월한 기능성을 발휘한다. 특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틀에 3D입체영상의 날개를 단 이미지는 기능적인 효과보단 입체적 감각 그 자체가 중시될만한 독창적인 이미지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스톱모션의 분절된 연속성은 물리적인 입체감을 구현하는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보존한다. 물리적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비주얼은 호러적인 긴장감을 연출하거나 캐릭터의 심리적 두려움을 생동감 있는 물리적 형태로 반영하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이다. 다만 아동 취향의 동화적 색채가 강한 소설을 원작으로 두는 만큼 이야기의 기본 맥락은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교훈적인 결말도 상투적인 감상을 부른다. 이미지의 입체감에 비해 스토리의 평면성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코렐라인>은 수공예적인 제작방식만큼이나 풍부한 감수성으로 이뤄진 이미지의 체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완벽한 인공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요즘의 애니메이션의 월등함을 제치고 <코렐라인>의 진보된 투박함을 권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화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순수한 상상력이 황홀한 이미지의 날개를 달고 악몽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이 황금비율을 이루는 <코렐라인>의 황홀경은 감성적 체온이 느껴지는 기술의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 성과 그 자체다.
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과 같은, 자칭 스위트 팝 가수를 꿈꾸는 네기시 소이치(마츠야마 켄이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도쿄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스위트 팝이 아닌 데쓰메탈 밴드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MC)’에서 극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악명을 떨치는 ‘크라우저 2세’로 활동하며 신분을 속이며 살아간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기시 소이치가 짙은 분장으로 제 얼굴을 감추고 무대에 올라 크라우저 2세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쳐낸다는 설정은 욕망과 현실이 괴리된 캐릭터의 부조리를 유머로 치환한다. 특히 와카스키 키미노리의 동명 원작만화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영화적 상황으로 반영한 <DMC>는 유치하듯 쾌활하고 황당하듯 기발하다. 물론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한 척을 하며 간지러운 페이소스를 주입하는 광경이 발견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엉뚱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위트가 독창적인 매력분포도를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츠야마 켄이치다. <데스노트>영화판에서도 L을 연기했던 전력이 있는 마츠야마 켄이치는 <DMC>에서도 소심한 네기시 소이치와 과격한 크라우저 2세를 오가며 만화캐릭터 전문배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만화적인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영화적 사실감을 만족시킨다. 자칫 잘못하면 코스프레 수준의 유치함으로 몰락하기 좋은 캐릭터를 영화적 형태로 구현한다. 결국 <DMC>의 특이성을 보장하는 캐릭터가 성공적인 표현력을 갖춘 덕분에 영화적 설정 역시 힘을 얻는다. 또한 영화는 원작의 주요한 에피소드를 영화화에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서사의 변주를 통해 영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간다.
물론 <DMC>는 유치한 슬랩스틱 개그처럼 가볍고 산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여기서 가볍고 산만한 웃음은 깊이에 대한 지적이라기 보단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다. 대단한 교훈에 도달하거나 걸출한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기보단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황당한 소동극으로 무장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원작과 달리 과하게 변주된 드라마가 종종 간지럽지만. 흉폭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크라우저 2세와 순진하지만 소심한 우엉남 네기시 소이치 사이를 오가는 에피소드는 효과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적 형태의 드라마로 변주된 영화는 매니악한 소재를 보편적인 드라마로 엮어낸 원작만큼이나 즐겁다. 취향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다면 음악영화로서의 묘미도 만끽할 가능성이 크다.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비극의 방아쇠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혼한 전처와 딸로부터 무시당하는 행크(에단 호크)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던진다. 동생과 달리 반듯한 직장의 중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앤디 역시 당장 거액의 돈을 마련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긴장감을 견디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큰 행운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이 박살나고 결코 맞이해선 안될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드러난다. 형제의 공모가 비밀로 움트는 사이,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이 뿌리를 내려가며 파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악마가>는 플래쉬백을 적극 활용하며 지속적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 서사의 변화와 함께 서사를 지배하는 시점이 이동한다. 30분 후로 점프컷하는 초반의 단 한번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진하는 서사의 중심에 놓인 인물을 갈아입으며 5번에 걸쳐 플래쉬백된다. 전진하다 뒷걸음질치는 서사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내며 사건에 연루된 인물 제각각의 사연을 수집해나가고 이를 통해 <악마가>는 영화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하나의 면처럼 이어 만든 입체도형의 형태로서 영화를 완성해나간다. 행크와 앤디의 시점이 교차되던 영화가 그들의 아버지인 찰리(알버트 피니)의 시점으로 옮겨 마침표를 찍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서사는 원인에 대한 의문을 결과까지 이어나가며 시작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1975)와 <네트워크>(1976)와 같이 사회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영예를 누렸으나 현대에선 점차 잊혀지던 시드니 루멧은 2007년에 발표한 <악마가>를 통해서 영광의 시계를 현재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악마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기품 있는 연륜이 깊게 배어든 중후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중후한 극적 무게를 보존하는 동시에 고조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장박동기의 신호음을 이용해 긴박하면서도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결말부는 <악마가>의 클라이맥스로써 손색이 없다. 어떤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발견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백미다. 특히 온화한 미소 너머로 점차 불안의 기색을 방출해내면서도 대범하게 움직이는 앤디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표정은 <악마가>의 심리적 깊이를 대변하는 바다와 같다. 반대로 초조하게 흔들리는 에단 호크의 표정은 영화의 불안한 심리를 출렁이게 만들고, 알버트 피니는 단호한 중압감을 더하며 마리사 토메이는 관능과 허무를 동시에 이끈다.
<악마가>는 흉악하고 퇴폐적인 사회를 고발하고 있지만 근엄한 기운을 잃지 않는 중후한 영화다. ‘하나씩 더해도 완벽해지지 않는 삶’을 떠도는 도시의 양자들은 결국 끝없이 더해지는 욕망에 이끌려 천천히 파멸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앤디의 제안을 받은 행크의 불안을 잠재우는 건 다름 아닌 지폐이며 행크의 제안을 받은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또한 지폐다. 양심과 공포를 잠재우는 건 물질적 욕망이다. <악마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삶이 향한 본질적 비극을 향해 전진하는 가족드라마다. 지독하게 흉악하고 끔찍한 스토리는 현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부를 정확히 찌른다.
개인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결국 가족은 붕괴된다. 이는 결국 극악하게 타락한 세태를 대변한다. <악마가>는 결국 중후하고 세련된 영화적 양식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의 세태를 놀라운 방식으로 고발하는 영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근사하면서도 엄숙한 제목을 포함한 이 문구는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흉악한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비통한 기도와 같다. 그리고 <악마가>는 그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뜨거운 시선이자 깊이 전해 들어야 할 비장한 묵시록이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구경남의 대답이 이어진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렴하는 겁니다. 체계적으로 미리 가지 않고, 매번 발견하는 겁니다.”누군가는 이 답변이 홍상수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단정할 순 없다. 그냥 관객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선을 견지한 채 해석을 시도할 뿐이다. 혹은 그냥 흘려 보내거나. 어쨌든 그 상황의 진심에 대해선 어느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냥 나름대로의 태도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체감할 뿐이다.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반복의 형태를 고수하는 영화다.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후 구조로 나뉘듯 명확히 나열되는 이야기는 때때로 뜬금없고 당황스럽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라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인지된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카메라 앵글은 무심하게 던져놓은 시선을 중심인물에게 돌려놓고,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인물을 향한 줌업을 반복한다. 그 시야 속에 놓인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 술판을 벌이다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거나 어떤 비밀을 잉태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춰진 의중이 탐색되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흥분해 길길이 날뛰고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는 움츠리다 이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구경남이다. 그는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제천과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특강을 내려간 제주도의 대칭을 이루는 한 점이다. 그는 영화 속의 모든 현장에 위치함으로서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수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을 관찰하는 위치를 고수해 나간다. 두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은 다른 듯 닮은 풍경 속에서 변형된 닮음의 역할극을 펼쳐나간다. 바뀐 공간 속에서도 어떤 대사들은 동일하게 들려오고 이와 함께 펼쳐지는 상황은 변형된 형태 속에서도 구조적 평행과 대칭을 이룬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 위해 내려간 제천과, 영화 특강을 위해 내려간 제주도는 목적만으로도 대구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 구경남의 영화를 둘러싼 성찬의 고백과 비판적 물음이 뒤바뀌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런 관계가 은밀히 폭로되거나 조심스럽게 감지되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조우한 절친과 은사를 통해 마주한 그들의 부인을 통해 예상치 못한 소동극을 한차례씩 건넌다.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구경남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드시는 거죠?’라고 당돌하게 묻는 학생의 질문에 달아오르듯 답변을 토해내는 순간, 인물의 표면과 내면의 온도차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구경남 이외의 다른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스스로가 빛이 됐다고 말하는 유신(정유미)과 이를 두둔하는 부상용(공형진) 앞에서 빈정거리는 구경남에게 유신이 정색하고 부상용이 이런 태도를 뒤따를 때나 오랜만에 은사와 만난 구경남이 은사와 관련된 기억을 고백하던 중 그 기억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소한 갈등에 직면할 때, 스스로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발이나 이견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인물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간격을 발견하거나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차가 끼어들 때, 서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는 척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으로 순간을 견딘다. 그 상황의 부조리는 때때로 개인의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하며 종종 상대와의 갈등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이런 이해차는 영화와 그 외부에 놓인 관객 사이의 체험으로 확장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구경남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불미스런 원인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영화적 상황이 어떤 원인을 통해 발생한 결과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잠정적으로 내려진 결론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천수(문창길)의 불순한 동침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관객들은 구경남과 고순(고현정)의 밀회를 발견한 조창우(하정우)가 그 사실을 양천수에게 폭로하는 상황 속에서 뻔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의외의 대응을 목격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추출되지 않는 결과를 통해 관객의 오해를 도모하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케 하다 이내 배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어떤 상황의 단면을 통해 그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이나 매한가지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고순이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장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방점도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찍혀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타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참견하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난장판 속에서 고순은 유일하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과 상대를 관통한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마친 인물이 화면에서 멀어져 갈 때, 카메라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차분히 응시하다 비로소 이야기를 멈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이름값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체험을 위해 헌신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홍상수 감독은 때때로 자신을 겨냥하듯 자학적인 대사를 삽입하고 이를 밀쳐내듯 또 다른 반박을 맞은편에 세운다. 결과적으로 이런 태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관객에겐 유쾌한 영화임에도 작가 스스로에겐 수없이 오가는 의심과 고민의 산물로 거듭난 작품임을 거듭 깨닫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의 새로운 대구적 관찰을 통해서 더욱 여유로워진 시야와 한층 깊어진 관점을 인식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대구에 어떤 풍경이 놓여있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전시하며 익숙하듯 새로운 관점을 펼쳐놓곤 했다. 그건 마치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당일 분량의 대본을 탈고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찍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의 발견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결국 홍상수 감독의 9번째 발견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홍상수 감독은 10번째 발견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다. 마치 꾸물꾸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느릿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그 시선의 새로운 약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소소하고 재미난 생활의 발견 덕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각 종교적 음모론을 추적하는 기호학자의 수사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있지만 전자가 철학적 기호를 추출하는 반면, 후자는 대중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분자를 지닌다. 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건 단지 기독교의 권위를 뒤흔들만한 이슈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국한할 순 없다. 종교적 진의에 대한 갑론을박만큼 이야기의 리듬감도 중요한 관건이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보다도 속도감이 빠른 소설이다. 뒤늦게 인기를 얻은 탓에 오히려 스크린에선 속편으로 둔갑한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마찬가지로 장르적 서스펜스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스케일까지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루 갖춘 작품이다. 게다가 마치 주먹질하지 않는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는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지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활보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매력을 두루 얻기 좋은 캐릭터다. 물론 댄 브라운의 소설에 담긴 놀라운 단서들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수집품인가를 판단할 수 있기란 쉽지 않다. 다만 작가의 취재를 기반으로 벌어들인 단서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밀고 나가는 재능이 얼마나 쓸만한가를 확인하는 건 가능하다. 댄 브라운의 두 작품은 때때로 액션처럼 치열하게 공방하는 인물 간의 대화와 위트와 긴장감을 조절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통해 대중적 호감을 발생시킨다.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댄 브라운은 장르적 연출이 뛰어난 감독에 가까운 작가다. 론 하워드 감독이 댄 브라운의 소설에 호감을 느꼈다면 그런 지점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적 실패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크린이 텍스트를 축약하기 위한 전시판의 역할에 국한돼버린 탓이다. 오락적 속도감마저도 상실한 듯한 안이한 형태는 원작의 가능성마저도 간과하게 만들 정도였다. <천사와 악마>의 불안요소도 다름 아닌 <다빈치 코드>의 영화적 전례에 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는 시작부터 <다빈치 코드>와 다른 전철을 밟아나간다. 소설에서 대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연출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몇몇 캐릭터는 제 위치에서 생략되거나 비중이 축소된다. 서사가 재편되고 관계가 재구성된다. 다만 주요한 캐릭터의 관계나 활용성은 대부분 보존한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달리 영화적 변주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에 비해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서 좀 더 과감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원작이 지닌 속도감은 보존하되 텍스트를 고스란히 이미지로 재연하려는 과욕에서 벗어났다.
<천사와 악마>가 가장 자신있게 선전해도 좋을 요소는 호사스러운 풍경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크리스트교 시대의 영예를 대변하는 로마와 바티칸의 예술적 자취와 건축적 풍광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시각적 묘미다. 또한 교황의 서거 이후 교황의 인장이 새겨진 '어부의 반지(Pescatorio)'를 폐기하고, 교황을 추도하는 ‘세데 바칸테(Sede Vacante)’기간 이후 새로운 교황을 추대하는 추기경들의 투표가 이뤄지는 ‘콘클라베(conclave)’까지, 비밀스런 가톨릭 의식을 사실적으로 연출한 장면들 역시 이색적인 묘미를 부른다. 또한 반가톨릭 조직이라는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존재와 거대한 입자가속기에서 ‘반물질(antimatter)’을 추출하는 ‘CERN(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최근 빅뱅 실험으로 논란을 부른-의 존재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물질 폭파 장면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패러다임의 충돌과 융화를 주제로 둔 <천사와 악마>의 클라이막스로 대변해도 좋을 만한 이미지적 성과다.
물론 <천사와 악마>는 원작에 비해 간결해진 스토리와 구체화된 이미지 덕분에 입체감이 보다 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흘러 넘치는 빽빽한 정보를 온전히 이미지로 치환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천사와 악마>의 선택이 최선이라 단정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필요악의 순기능을 수행했다고 평할만하다. 물론 <천사와 악마>에서 전달하는 정보가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 평가하는 건 무리다. 단지 그 정보를 엮어가는 스토리가 얼마나 특별한 오락적 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는 어느 정도 무난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오락물로서 인정할만한 영화다. 기적적 체험에 도달하진 못해도 흥미로운 교리를 듣는 묘미 정도는 확보한다. 확실한 건 적어도 <다빈치 코드>보단 낫다는 것.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헤밍웨이는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밍웨이의 저서인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원제, <(A) moveable feast>)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 파리는 낭만으로 치환되기 좋은 도시다. 앙상한 철골구조로 이뤄진 기괴한 에펠탑에 낭만의 살점을 붙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도시의 바닥에 개똥이 가득하고, 광장과 뒷골목에 소매치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침 튀기며 설명한다 한들, 그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파리의 풍광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사랑을 부르는, 파리>(이하, <파리>)는 그런 환상을 부추길만한 영화다. 물론 <파리>는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영화가 아니다. 파리의 곳곳을 누비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표정을 통해 거리의 정서를 수집하고 그들의 동선을 따라잡으며 풍경을 전시하는 <파리>는 그 거리를 채우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도시의 본심을 드러낸다. 파리라는 도시 구성원의 표정을 통해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얼굴들은 낭만과 거리가 먼 표정을 지으며 삶을 비관하고 한탄함으로써 낭만을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마냥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실제로 그 도시의 주체들은 낭만과 거리를 두듯 삶을 꾸려나간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피에르(로망 뒤리스)는 오래 전 사모했던 여인에게 고백을 전하지만 좌절을 경험하고, 그의 누이인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사랑을 비관하다 삶을 염세하는 지경에 다다르곤 한다. 저명한 역사교수 롤랭(페브리스 루치니)은 제자인 래티시아(멜라니 로렌)를 사모하다 스토킹을 저지르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할 즈음에 절망에 봉착한다. 심지어 시장의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즈음 죽음으로서 감정을 짓이긴다. 이쯤 되면 파리는 사랑의 메카가 아니라 로맨스의 무덤에 가깝다. 그 도시에서도 사랑은 결코 쉬운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염세하는 이도, 사랑을 갈망하는 이도, 하나같이 사랑을 통해 삶을 꿈꾼다. 오래된 도시는 사람처럼 나이 들어가지만 그들의 감정을 통해 한층 젊어진다.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해서 발생하는 도시의 모더니티’처럼 낡은 이별과 새로운 사랑이 충돌하며 도시의 낭만을 발생시킨다. 혈관처럼 세밀하게 이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은 산소와 같은 사랑을 나누며 도시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파리>는 역설적인 나르시시즘의 영화다. 도시는 사랑을 꿈꾸고 그 꿈은 낭만을 이루고야 만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삶을 펼쳐내는 만큼 산만한 구석도 많지만 <파리>는 그만큼 다채롭고 풍만한 영화다. 편견이든, 착각이든, 일방적으로 포장된 도시의 실제적인 표정을 통해 진짜 낭만의 정체를 드러낸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리는 낡은 도시지만 그 낡은 풍경엔 오래된 낭만이 깊게 배어 새로운 세대에게 그 혜택을 전한다. 파리는 분명 낭만의 도시다. 그 도시는 분명 낭만을 꿈꾸게 한다. 비록 이방인들을 통해 부풀어오른 허세라 할지라도 그 도시는 분명 한번쯤 누군가가 꿈꿀만한 이미지와 정서를 품고 있다. 물론 우리가 꿈꿔야 할 낭만은 단지 파리로 날아가 해결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국의 낭만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그 결핍의 주체가 스스로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굳이 이국의 로맨스를 꿈꾼다면 낭만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건 파리지앵들에게도 쉬운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파리가 아닌, 서울에도, 자신의 주변에도 얼마든지 산재해있다.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낭만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의 낭만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를 역설한다.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낭만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현명하고 뚜렷한 낭만의 역설적 전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