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김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김병희는 막 생을 끊으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삶을 포기하는 시도가 그저 처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막 벽에 못을 박고 노끈을 묶어 자신의 목을 조일 고리를 만들었고 설마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던 차였다. 그리고 결심의 순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그 중요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녀가 등장했다. 거짓말처럼, 불쑥 찾아와 남의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미스럽게 그의 결단을 또 한차례 꺾어버린다. 이수강과 김병희의 만남은 생소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급격히 틀어버린 혹은 다시 제자리로 튕겨버린 우연은 그토록 현실감 없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엽기적이라 느껴질 만큼 기막힌 방식으로.
현재를 축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나열되는 과거는 김병희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재구성되는 시점과 이수강의 과거를 플래쉬백하는 시점으로 나뉜다. 현재에서 파생된 병렬 구조의 과거가 나란히 배열된다. 두 사연의 간격은 동떨어진 것처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현재를 떠받드는 궁극적 인과의 실마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집>은 그 사연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 사연이 무엇을 가리키며 시작되는지, 강한 호기심을 부르는 영화다. 모든 호기심의 축은 이수강이란 인물에게서 시작된다. 그녀의 정체를 비롯한 모든 행위는 물음표를 소환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수강의 사연이 큰 테두리라면 김병희의 사연은 핵심에 가깝다. 관객이 <우리집>을 통해 머금게 될 호기심은 입체적이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두 인물에게 걸쳐지는 의문은 사실상 영화 내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보좌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삶엔 어떠한 연관도 없다. 단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처럼 다가온 진실로 인해 한 순간 좌초된 삶을 맞이한 병희와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관계의 결렬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물로 몰락한 수강은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결과적으로 그 만남은 지독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거와 공모는 필연처럼 이뤄진다. 그 기이한 연대는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사연들이 감정적 동의를 구축하고 이 모든 총합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덧씌운다.
정체불명의 해프닝처럼 시작된 사연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벗겨지며 사연의 실체에 접근할 때 얕은 호기심은 점차 깊은 연민으로 번진다. <우리집>은 분명 비극적인 사연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는 담담하며 때때로 역설적인 유머를 장착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해학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영화다. 그 죽음엔 어떤 불행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복구시킨다. 게다가 한 여자의 오랜 착각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독한 간섭이거나 악몽이기도 하지만 실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실이란 점에서 연민을 부르고 한편으론 위안을 준다. 수강의 과거를 모두 벗겨낸 이야기는 핵심적으로 병희의 사연을 벗기며 핵심을 들어선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지를 되새겨버린 남자의 인생을 좌초시킨 근본을 비로소 고백한다.
지나친 우연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아닌 사연에 감화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놓인 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통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필연은 어쩌면 우연을 쌓아 올린 결과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집>은 첫인상이 낯설어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비극에 갇힌 이가 누군가의 담담한 비극을 마주한 뒤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실상 부조리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할만하다. 사실상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병희와 수강의 태도가 겉보기와 무관하게 너비를 벌린 까닭이기도 하다.스토킹과 납치, 자살미수로 거칠게 포장된 사연이 너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설적으로 미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연민까지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집>은 특별한 사연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연의 형태는 여전히 비극에 가깝지만 그 비극의 중심에 놓인 자들은 죽음으로서, 혹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물음엔 답이 없다. 그건 그저 그랬기 때문일 뿐이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필연이라는 게 어차피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엽기적으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비극은 비극을 구출하고 미련 없이 소진된다. 게다가 영화는 노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일방적인 동정의 여지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현실을 과감히 묘사함으로서 대안의 의지를 촉구한다. 정치적 주장이나 투쟁이 아닌 시선의 견지 자체로 하나의 쟁점을 마련한다. 이는 분명 공정한 시선이라 그만큼 깊은 배려다.
오랜만에 특별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강혜정의 캐릭터에 대한 반가움도, 번거로운 과제나 다름없는 1인칭 나레이션을 탁월하게 소화한 박희순의 대단한 소화력도 <우리집>을 보좌하는 훌륭한 일원이다. 무엇보다도 엽기적이라 할만한 사연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감수성을 야기시키는 <우리집>은 황수아 감독의 데뷔작이란 점에서 분명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성과다.
<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賊)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야연><집결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인 <천하무적>은 사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소매치기 씬이나 소매치기들 간의 결투 장면은 지나친 눈속임으로 일관하다 못해 때때로 한심할 정도다. 잔상이 심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작을 파악하기 힘든 영상으로 무마하는 소매치기 장면에서 디테일한 손놀림 따위를 기대했을 관객의 심리를 뻔뻔하게 반감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소재를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지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일면 타당한 구석도 있다. 사건의 전개보다는 개과천선을 바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그렇다. 사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의문을 야기시키는 그 변화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그 변화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느 정도 허무맹랑한 구석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성찰을 높이 평가할만한 자신은 없다. 변화의 양상이 타당할 뿐, 그것이 깊은 감동을 부를만한 수준은 아닌 덕분이다.
동시에 소매치기라는 소재를 통해 발생하는 기교적 기대감은 철저하게 망연자실해진다.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그릇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천하무적>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확실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점이겠지만. 때때로 허세로 가득 찬 화면과 음악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고의적으로 웃음을 야기시키는 의도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소를 부르는 풍경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유덕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동정을 부르는 느낌이다. ‘천하무의(意)’와 ‘천하무실(實)’의 연속이다. 의미도, 실속도, <천하무적>에선 얻을 수 없다.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네소타 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의 손실을 절감하기 위해선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직원들의 정리해고 절차가 필요하다. 중책을 떠안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은 팽배하다. 적어도 미네소타행 공항에 도착할 때까진 그랬다. 하지만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몰아치는 칼바람에 한번, 그리고 결코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 속에서 또 한번 발을 구르고 치를 떤다.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시크한 생활을 즐기던 루시힐에게 미네소타는 지방의 촌뜨기들이 모여 사는 열악한 구석에 불과하다.
교훈적인 인생지침서처럼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찰적 스토리가 줄기를 이루고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의 무드가 가지를 친다. 따뜻한 마이애미에 익숙한 루시힐이 척박한 미네소타에서 적응해나가는 모습 그 자체가 <미쓰 루시힐>의 관건이나 다름없다.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도시 여자가 지방의 관심을 번거로워하거나 텃세에 갈등을 빚다 결국 소박한 진심을 깨닫고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물론 뻔하다. 전형적이거나 도식적이다. 하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들이 곳곳을 장식하며 소소한 매력들이 소박하게 진열된다. 뜨겁게 달아오를 만한 특별함은 없지만 그 진심에 담긴 온기가 서서히 전해질만큼의 자질은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국내 국내개봉명에 불과하지만) <미쓰 루시힐>이라는 롤타이틀처럼 루시힐이란 캐릭터가 어필하는 매력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루시힐은 르네 젤위거를 본떠 만든 캐릭터라고 해도 될 만큼 배우의 매력이 투과된 캐릭터다. <미쓰 루시힐>의 루시힐은 도도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르네 젤위거의 출세작이라 말할 수 있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처럼 쉽게 망가지고 털털한 내면을 드러낸다. 때때로 과감한 슬랩스틱을 서슴지 않으며 웃음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딘가 심심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조연 캐릭터들에 더욱 정감이 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소박한 얼굴로 영화의 표정을 대변하고 소소한 매력을 더한다.
<미쓰 루시힐>은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가는 영화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 물론 도시와 지방이라는 지정학적 대비는 단조롭고 한편으로 지방의 인심을 지나치게 우상화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물질주의적 풍요와 개인주의적 이기에 젖은 현대도시인들의 삭막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효력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 상투적이고 투박하지만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곧잘 발견된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처럼 <미쓰 루시힐>은 소박한 이미지에 아기자기한 매력을 숨겨둔 귀여운 영화다.
백부는 경극 배우였다. 그는 배우로서 명성을 누렸고,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백부는 광대였다. 광대란 명예를 쌓아 올려도 한 줌 바람에 허물어지기 좋은 운명에 불과했다. “경극배우로 성공해도 멸시를 벗어날 수 없다. 무대를 떠나라.” 백부의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던 어린 원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연기를 가르칠 선생님이 왔다. 백부는 원화에게 무대를 떠나라 했지만 운명은 원화를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매란방>은 배우로서의 삶을 면치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의 운명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된 이름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경극 배우 ‘매란방’의 실존적 삶을 영화화했다는 <매란방>은 한 인물의 인생 속에서 격정적인 사건을 추출해 서사적으로 나열한다.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반복으로 진전되는 상황은 3번의 점프컷을 통해 크게 분할된다. 유년시절 스승으로 모시던 대배우와의 대결, 성장한 매란방(여명)과 맹소동(장쯔이)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미국 진출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린 매란방의 역경. 3조각으로 나뉜 서사엔 저마다 극적인 사연이 존재하며 이는 <매란방>이란 스토리텔링을 분할하는 카테고리처럼 질서정연하게 나열된다. 그 중심엔 어김없이 ‘매란방’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근원이 되는 주체라기 보단 모든 사건에 연루된 객체로서 그 자리를 지킨다. 사건의 배경이 되어 병풍처럼 존재한다.
물론 유년 시절의 서사는 매란방이라는 인물의 기초적인 서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한다. 서양연극을 공부했다는 구여백(손홍뢰)은 원화를 만난 뒤 관료직을 버리고 원화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결국 타성에 젖은 경극 배우들의 전통적 관념에 대항하고자 하는 구여백에게 감화된 매란방은 자신의 스승과 대결을 펼친다. 물론 그 대결의 주체는 매란방이 아니다. 진보적인 구여백과 ‘경극의 대왕(伶界大王)’이라 지칭되던 보수적인 대배우의 대립 안에서 매란방은 승부를 결정짓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국면 안에서 매란방이 느끼는 정서적 애환이 백부의 유언을 환기시키며 일종의 감흥을 부른다. 대배우의 쓸쓸한 몰락과 이를 지켜보는 매란방의 부채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이 매란방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매란방>에서 묘사되는 ‘매란방’은 전반적으로 반사율이 낮은 인물이다. 공허하며 한편으로 단조롭다. 인물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낄만한 여지가 많지 않다. 흥미로운 건 매란방의 주변부를 차지하는 서사이며 그 서사에 참여하는 주변인들이다. 씬의 감정을 지배하는 건 대배우이거나 맹소동이거나, 일본군 장교다. <매란방>에서 ‘매란방’은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면서도 주체적인 감정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실제 인물의 서사가 그러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화상에서는 그렇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유년 시절 이후 여명이 연기하는 매란방의 서사가 이에 해당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시점부터 매란방이란 인물의 관점은 흐리멍텅해진다.
매란방은 대단한 사연 속에서 감정을 지배하는 역할을 선점하지 못한 채 그저 존재한다. 유년 시절 이후로 나열되는 두 번의 큰 사건 속에서 매란방은 무색무취의 형태로 그저 늙어갈 뿐이다. <매란방>은 주인공을 날려버린 배경 사진과 같다. 그 여백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나 주변부에서 고조되는 감정에 흥미를 느낀다면 다행이겠지만 매란방에게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매란방 이야기라는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면 감상 자체가 텅 비는 꼴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찰리 채플린도 영감을 얻었다는 매란방의 실제연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경극이 소리를 절제한 무대극으로서 무성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영화는 매란방의 삶이 관객에게 어떤 영감을 주지 못할 정도로 심심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매란방’이 <패왕별희>의 데이(장국영)가 연기한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인물이 경극배우라는 점에서 <매란방>과 <패왕별희>는 누군가에게 비교하고 싶어지는 영화가 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수순일지는 의문이다. 단지 두 영화가 평행선에 놓기 좋은 비교군의 조건을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경극을 소재로 한 첸 카이거 감독의 작품이란 공통분모가 선명한 까닭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명과 장국영의 연기력을 비교한다거나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한다는 건 사실상 부질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매란방>은 <패왕별희>보다도 훌륭한 기능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존적 재현과 허구적 창작의 너비만큼이나 두 작품은 엄밀히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타고난 환경과 천성이 다른 두 인물의 서사에 우열의 잣대를 부여한다는 건 어딘가 무지막지한 태도다.
사실 118분 가량의 상영시간으로 국내에서 개봉될 <매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떤 면에서 무색한 일처럼 느껴진다. 국내 수입사에서 가위질 했다는 30분의 서사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첸 카이거 감독의 승인을 얻었다지만 감독 스스로도 편집본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결과물을 놓고 이야기한다는 건 어딘가 무색한 일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상에서도 무성의한 편집의 결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매란방>은 위대한 경극배우, 좀 더 포괄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가가 인생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재현하는 드라마다. 30분이 잘려나간 국내개봉판의 모습에서 매란방의 수난이 오버랩된다. 마치 그것은 문화적인 정서나 이해 차이로 경극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멸시하는 타지인들의 무지한 태도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신문물과 구시대적 풍습이 공존하는 일제 치하의 경성은 분명 흥미를 끌만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대다. <그림자 살인>은 그 과도기적 시대상을 무국적의 그릇으로 활용한다. 친일 세도가들이 득세하고, 이를 비호하며 밥그릇을 유지하는 관료들이 자리잡은 암울한 시대상 한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민초들의 활력이 거리를 지배한다. “요즘 세상 의리 없이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만시경을 들고 바람난 유부녀의 불륜 현장을 추적해 얻은 사진과 기사를 신문사에 팔아 넘기는 홍진호(황정민) 역시 앞선 대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과 무관하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뒤바뀐 국가 권력의 주체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채워진 그곳은 마치 아나키스트들의 영토 같다.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의 풍경을 무국적성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양식은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시대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그림자 살인>은 역사성을 지워버린 특이성을 통해 장르적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취향을 대변하듯 호기로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복을 차려 입고 플라스크나 비커와 같은 과학실험 도구 앞에 앉은 순덕(엄지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도기적인 시대 이미지를 대변하는 중의적 뉘앙스가 된다. 국적불명의 현실을 굳이 불행으로 치환하지 않는 태도로 장르적 그릇을 마련한다.
사건의 단초는 빈약하지만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 상의 구조적 미숙이 눈에 띈다.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는 초반부는 탐정물의 기본 구조를 축으로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를 가미하며 속도감을 더한다. 특히 경성 스타일의 옥상 추격씬은 나름의 볼거리다. 하지만 그리 영민한 이야기를 밀고 나가지 못한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처럼 신선한 시대상과 복잡한 인물 관계를 통해 후더닛 구조를 발전시켜나가지만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고 나면 되레 정답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스스로 들어선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성공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또한 캐릭터들은 기대되는 역량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변을 겉돌거나 외형적 묘사 이상의 기능적 활약을 선보이지 못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하나 캐릭터의 역할을 위한 제반이 불성실하다. 뛰어난 능력치가 예상될 뿐 그에 적절한 활용 능력이 결여된 양상이다.
실상 야심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르적 연출에 몰입하던 전반부와 달리 시대에 대한 소묘가 적극 가미되는 후반부는 그 기운을 담보로 묵직한 상황을 연출한다. 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후반부의 사연은 직업 윤리와 권력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벌려나간다. 덕분에 전반부와 괴리된 듯한 리듬이 발생하며 말미에 다다라서 발견되는 클라이맥스의 도돌이표가 권태롭기까지 하다. 쌍둥이와 같은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대립적 이미지는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일지 모른다. 이는 분명 흥미로운 접근이나 이를 묘사하는 방식이 또 한번 세심하지 못하다. 게다가 그 지점에서 이미 희석된 탐정추리극이라는 본래 의도가 다시 한번 아쉽다. 결국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이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다 해도 그것 또한 석연치 못한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위성사진의 부감이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버지니아 CIA본부의 복도, 그리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엄청난 예감을 일으키는 오프닝이 환기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예감은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 박자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비범한 척하기 좋은 농담과 같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얻을 게 없는’결말로 종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번 애프터 리딩>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CIA분석가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의 해임 장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사건을 부풀려나간다. 오스본과 이혼을 고민하는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국무부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내연의 관계이며 그와 전혀 무관한 스포츠센터엔 전신성형을 꿈꾸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낙천적인 동료 채드(브래드 피트), 인자한 상사 테드(리차드 젠킨스)가 있다. 동떨어진 구석에 자리한 두 맥락의 인물들이 동일한 문단에 포섭되는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스포츠센터에서 발견한 CD한 장이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가며 거창한 음모론이 꿈틀댄다. 작은 오해는 불미스런 갈등으로 발전하고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의 자장 안에 들어선다.
실상 사건의 맥락엔 어떤 본질 자체가 없다. 그저 그 허무맹랑하게 커지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도가 발견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관계도 속에서 맞닥뜨린 개개인들은 불필요한 해석을 덧씌우며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의 수순에 이르고 만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사람도, 사건을 스스로 확대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산출된다. 그러나 그 해프닝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득력을 갖춘다. <번 애프터 리딩>은 구심점이 없는 인과관계만으로 온전한 스토리텔링을 형성한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녹록하다. 허풍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구술엔 어떤 허세가 없다.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다.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란 해프닝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과장된 음모론에 도취된 이들은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거나 그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이라도 결국 본질은 없다. 결국 그 모든 악화일로는 그저 실없는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망상을 통해 음모론을 확장하는 인물들과 그 추이를 관찰하는 건 CIA정보부다. 그들은 린다나 채드의 상상처럼 대단한 음모의 중추가 아니라 그저 퇴임한 정보분석가의 뒤처리나 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결국 그 망상의 음모론은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마치 살상무기 없는 이라크 전처럼, 그건 그저 해프닝이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속이 빈 형태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블랙코미디의 자격을 거머쥔다. 실체가 없어서 완벽한 해프닝을 이루는 <번 애프터 리딩>은 그 자체를 통해 거대한 음모론의 지지자들을 완벽하게 조롱한다.
'모든 것은 사소한 법(It is all small stuff)’이다. 다만 그 사소함이 때론 대단한 해프닝을 낳는다는 것. 물론 심각할 필요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저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를 즐기는 바보들의 향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저 그들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즐기면 된다. 하나같이 이름값이 대단한 배우들의 부조리한 앙상블 역시 또 다른 백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코엔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를 통해 깊이와 너비를 모두 갖춘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재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재능이 스스로의 삶을 위한 유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의 어울림이 낳은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운 정원엔 햇살이 가득 들어섰다. 어머니의 75번째 생일을 맞아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이 한 집에 모였다. 오랜 추억을 공유한 형제들의 옛집에서 그네들의 손자와 손녀가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는 중이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어느 새 할머니가 사는 집이 됐고,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자신의 사후에 유산 처리를 정리하는 중이다. 집안 곳곳에서 놓인 예술품과 고가구, 집기들은 그저 낡고 오랜 삶을 증명하는 소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고가를 자랑하는 미술품과 앤티크한 양식의 고가구들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탐낼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적 유산이다. 형제의 추억이 자리한 그 집엔 그만큼이나 값진 가치를 품은 예술적 유산들로 이뤄졌다.
인상파 화가 카밀 코로와 상징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오딜롱 르동의 그림, 화려하고 귀족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들부터 작은 찻잔 하나까지, 문화적 가치가 온전한 산물로 곳곳을 채운 그 집은 마치 박물관과 같은 사명을 띠고 있다. 오랫동안 엘렌느(에디뜨 스콥)가 손수 모은 미술품과 고가구의 보호소를 지키는 근위병처럼 벽을 세우고 문을 열고 닫았다. 하지만 그 집은 자신의 여생이 길지 않을 것을 직감한 엘렌느와 운명을 함께 한다. 엘렌느는 자신의 사후에 그 유산들을 자식들이 잘 처리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을 전해들은 큰 아들 프레데릭(샤를르 베르랭)은 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다짐한다.
벽에 걸린 그림과 곳곳에 놓인 가구들은 형제들의 추억과 함께 묵어온 것이다. 그것이 고가의 미술품이거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가구이기 전에 프레데릭은 추억으로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다. 그러나 각기 미국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과 제레미(제레미 레니에)는 감상보다도 실리를 추구한다. 더 이상 프랑스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 오랜 추억이 놓인 집을 보존한다는 건 딱히 이로운 일이 아니다. 프레데릭의 계획은 형제간의 이견을 통해 무산되고 결국 집안의 모든 집기들의 일부는 팔려나가고 대부분 미술관에 기증된다. <여름의 조각들>은 사라지는 것과 보존되는 것의 형태를 관찰하는 영화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형제들의 구심점이 되던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처분될 상황에 놓이고 그 집에 놓인 유산 역시 뿔뿔이 흩어질 운명을 맞이한다.
오르세 미술관 20주년을 기념해서 기획된 <여름의 조각들>은 오랜 예술적 가치가 보존되기 힘든 현실과 그것이 현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고 있는가를 제시하는 보고서와 같다. 집 안의 미술품과 고가구들은 형제들의 기억 속에 걸려 있거나 놓여있다. 그들의 추억을 차지하던 지난 일상의 흔적들이 팔려나가고 미술관에 전시되는 상황 속에서도 추억은 온전하다. 단지 그 흔적들이 지난 추억과 달리 온전하게 조립되지 못하고 흩어진 형제처럼 각기 다른 곳에서 보존된다. 아이러니하지만 현대의 미술품들은 더 이상 인간의 삶 속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금고 속에 감춰지거나 혹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전시될 운명에 놓였다. 개개인의 삶에 영감을 주고 함께 공존하는 소품으로서 장식되기 보단 금전적 가치로 평가되고 제도적으로 보호되는 유물로서 가려지거나 보호된다. 물론 이에 대해 불평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 현대로부터 이 가치 있는 산물들을 지켜내고 유전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가치를 공유할 수 없는, 혹은 개인의 추억으로서 사유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유산들이 오랜 세월을 전해져 오는 동안 인간의 가치관은 수없이 변모한다. 시대에 따라 부각되는 삶의 기호와 공유하는 의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예술적 가치에 대한 견해가 존중될 것이란 예상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전세대는 후세대를 위해 지켜야 할 것을 보호하고 그것들을 온전히 물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 <여름의 조각들>은 변하는 것 가운데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비록 그 선택이 자신의 추억이 담긴 현실을 분해하고 나누는 일이라 쓸쓸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위대한 유산이 누군가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추억이기 보단 깔끔한 카탈로그처럼 짜임새 있게 전시되고 설명되는 파편의 역사로 잔존할 수 밖에 없다는 건 한편으로 애석한 일이다.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선 이별을 감내해야 한다. 그저 화창한 볕 가운데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너머의 풍경처럼,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은 보존될 수 없는 현실에서 흐릿해지지만 그만큼 그리움이 깊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추억은 더 이상 예전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공유된다. 개인의 소유에서 공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부여하는 미술관의 기능성은 이처럼 이롭다. 하지만 한편으로 능동적인 삶의 터전에서 문화적 서사를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건 한편으로 씁쓸한 일이다. 물론 현명한 답을 얻기란 힘들다. 다만 그런 고민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과업이자 현대의 풍요를 미래로 전해주기 위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의 조각들>은 학술적인 동시에 예술적이며 현실적 고민 속에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그리는 작품이다. 또한 현실의 예술적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프랑스의 제도적 고민과 달리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성이 요구된다. 건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제도를 통해 인류의 유산을 보존하는 선진국의 가치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두려움을 심기 좋은 소재가 된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많은 작품들이 낯선 곳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을 서스펜스의 발원지로 삼는 것도 비슷한 연유다.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실제적 사건들이 서스펜스를 보좌하는 리얼리티의 배후로 지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 영화에 영감이 불어넣곤 한다. <실종>도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 영화다. ‘보성어부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김성홍 감독의 변처럼 <실종>은 장르적 외피를 걸치고 세상에 나와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주력하는 영화다.
의좋은 자매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핸드폰 동영상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자매에게 닥칠 비극을 더욱 짙게 체감하게 만드는 보색효과로 기능한다. <실종>은 극초반부터 살인마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분위기를 급속하게 냉각시킨다.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추리적 물음엔 일말의 관심이 없다. 장르적인 눈속임보단 캐릭터를 통해 발생하는 살기 그 자체를 장르적 중추로 장착한다. 감정적 대립을 이루는 캐릭터 관계를 명확히 노출시킨 뒤, 눈덩이처럼 불거지는 이야기를 굴려나간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서스펜스는 캐릭터 본연의 존재감 자체를 통해 발산된다. 판곤(문성근)은 관객의 심리 안에서 불안하게 예측하는 수순들을 여지없이 이루고 만다. 변태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살인마는 여자를 납치하고, 감금한 뒤, 변태적 성욕을 채우다 결국 살해한다. 그 모든 과정은 캐릭터의 끔찍한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묘사의 방식에 가깝다. 이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나 동정의 여지로부터 관객을 괴리시키기 위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공들이는 양식처럼 보인다. <실종>은 궁극적으로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한 악의를 품길 원하는 영화다. 인면수심의 싸이코패스, 더 넓게는 사회적인 악에 대한 적의를 품게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스크린에 살기를 가득 채우고 악의적인 눈빛으로 객석을 응시한다.
사악한 캐릭터의 본능을 묘사하는 전반부의 파괴력은 인정할만하다. 그것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건,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이건,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곤은 분명 끔찍하고 불쾌한 공기로 객석을 지배한다. 하지만 캐릭터의 잔혹한 본성이 밑천을 드러낸 전반부를 지나 반전의 기운이 담긴 후반부에 돌입하면 그 지배력이 서서히 쇠락한다. 캐릭터의 사악한 기운을 바탕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던 방식을 통해 전반부를 소진한 영화는 같은 양식으로 후반부를 운영하지만 기시감이 가득한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지배력이 떨어진다. 캐릭터가 발생시킨 파괴력의 효력이 떨어질 때 즈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별다른 장치가 발견되지 않는다. 특별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느슨해진 플롯의 여백을 채우는 건 지속적인 불쾌함뿐이다.
불쾌함은 <실종>의 본질적 의도이자 착시적 판단이다. <실종>은 스릴러라는 장르에 복무하기 보단 현실에 대한 언질을 위해 마련된 영화처럼 보인다. 실종된 동생 현아(전세홍)을 찾아나서는 현정(추자현)의 여정은 판곤에 대한 적의를 복수와 징벌로 매듭짓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다.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실종>은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공적 시스템이 개인의 복수를 부추기고 이를 방치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생시킨다. <실종>에서 실종된 여자를 찾아 뛰는 건 <추격자>와 매한가지로 경찰이 아닌 개인이다. 하지만 <실종>은 이런 문제의식을 하나의 단계로 삼을 뿐, 발전시킬 의도가 없다. 그보다도 오히려 개인의 복수를 정당화시키는 수순으로서 태도를 심화시킨다.
순간적인 복수심에 몰입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태도다. 제3자가 당사자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논한다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주장하는 건 다르다. <실종>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이다. 가치 판단의 주체가 될 관객의 몫을 영화가 낚아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덧붙게 되는 에필로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 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복수를 묘사하는 수순을 넘어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 <실종>은 덧없이 불순해진다. 제도적 태만이라는 공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하고 되려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며 이를 희석시킨다. 동시에 말미에 다다르면 흡사 희생자를 향한 조롱마저 감지된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두 아가씨가 나이 든 어부에게 배를 태워달라는 가운데 노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너머로 따라붙는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불순하다. 본래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태도가 감지된다. <실종>은 불순한 착취로 가득한 영화다. 낙후된 지방성의 이미지는 영화의 말미에 다다를 때면 원시적 기운의 악이 은둔하는 은신처 즈음으로 몰락하고 악랄한 남성을 묘사하기 위해 폭력에 움츠린 여성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그 와중에 복수를 정당화하고 공적 물음이 간과된다. 불쾌함의 근원은 단순히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현실의 악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의혹의 잔상이 강하다. 스릴러에 대한 장르적 접근을 배제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면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동시에 그것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이해의 접근 방식이라고 판단된 사안이라면 더욱 우려스럽다. 결국 스릴러적인 묘미도, 현실에 대한 환기도 실종된 채 일그러진 정치적 욕망만 발견된다. 배우들의 열연마저도 착취된 것마냥 안타깝다. 어쩌면 <실종>은 농촌 스릴러라 불리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살인의 추억>과 좋은 대조군이 될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스피아톤의 화면 너머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거구의 경찰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년은 심문 당하는 중이다. 거칠게 날아오는 손바닥이 얼굴을 강타하는 동시에 질문이 날아온다. “이름?”곧바로 교차된 화면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돈 다발이 떨어지는 욕조의 풍경이 낯설게 삽입된 후, 선명한 조명 아래 제 자리를 잡은 컬러톤의 화면 너머로 퀴즈쇼 사회자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년의 표정은 역시나 상기돼 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자말 말리끄(데브 파텔)가 2천만 루피(20 million rupees) 상금을 얻기 위해선 (퀴즈쇼에서) 단 한 문제만 통과하면 된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통과)했을까?” 4지 선다형의 질문. 그리고 상황은 다시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경찰의 구타와 퀴즈쇼의 긴장이 연속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동일한 질문이 서로 다른 상황을 관통하다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그 와중에 어떤 상념이 다시 끼어든다.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이 점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하나의 정답을 맞추면 상급 단계로 넘어가는 퀴즈쇼처럼 자말은 인생을 돌고 넘으며 높게 자리잡은 염원을 향해 나아간다. 비극적 테두리에서 시작되는 자말의 거칠고 험난한 인생사는 물음표를 통해 소환되고 정답처럼 나열된다. 폭력이 지배하는 원초적 기운의 사회에서 착취와 유기에 내몰린 자말은 잇따른 상실을 건너며 상흔을 품고 성장해 나아간다. 자말을 성장시킨 수많은 정답들은 그가 염원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건 그저 순리적인 과정들에 불과하다. 모든 우연은 필연을 이루고 끝내 운명으로 명명된다. 모든 지나간 시간은 운명이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이하, <슬럼독>)는 삶을 가로막고 선 수많은 물음표 사이로 전진해나가는 자말의 인생을 통해 풀어나가는 퀴즈쇼다. 물음이 던져지면 과거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 놓인 정답이 드러난다. 현재의 물음을 통해 소환되는 과거는 관객에게 일종의 퍼즐과 같다. 관객은 퀴즈쇼를 통해 자말의 서사를 조립하고 그 운명의 조각들을 수집해나간다.
<슬럼독>은 분명 운명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는 운명에 순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운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운명을 이야기한다. 배반과 상실의 경험을 덧칠해나가던 자말의 인생은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매번 역류를 시도한다. 수많은 물음표가 향하는 정답을 수집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리를 뒤따르는 방식이 아니다. 단지 그 정답이 드러난 후에야 뒤돌아 확인하게 되는 지난 과정들이 마치 이미 준비된 운명처럼 인식될 뿐이다. 퀴즈쇼는 자말의 운명을 되짚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점차 고단위의 문제들이 출제될수록 자말은 평정심을 찾아간다. 경험의 반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에 스스로 익숙해져 간다. 문제의 간극을 파고드는 과거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필연의 방식으로 현재를 재구성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마다 익숙한 경험의 실마리를 통해 발견된 정답 역시 지나갈 운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말은 자신의 염원으로부터 주춤하거나 때때로 물러서야 하는 지난 운명들을 배반하듯 이내 전진한다.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라는 물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치 않다. 그저 라띠카(프리다 핀토)를 만나는 것이 그가 염원하는 유일한 운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염원을 운명으로 개척하기 위해 자말은 답을 고른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그 지난한 여정은 <슬럼독>의 피날레를 완성하기 위한 도움닫기와 같다. <슬럼독>은 인도라는 특별한 국적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다. 운명을 뒤쫓아 달리는 자말의 서사는 사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절반 정도는 되감기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기 위해 마련된 것과 다름없다. 퀴즈쇼와 심문의 빠른 교차를 통해 출발하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오가며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돌입하기 위해 기지개를 편다. 이미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둔 자말의 현재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사실상 이미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놓인 운명들을 관객들이 복기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운명에 대한 설득력을 마련하는 셈이다. 결국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위해 복무하는 운명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에게 오늘의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경험의 예시이자 뒤따를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운명을 이룬다.
각색을 맡은 사이몬 뷰포이는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가 집필한 ‘Q&A’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슬럼독>을 완성했다. 대니 보일은 이에 완전한 이미지를 덧씌워 스크린에 투영해냈다. <트레인스포팅>만큼이나 혈기왕성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스토리는 거칠고 성기지만 유쾌하고 끝내 낙관적이다. <슬럼독>은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완성된 발리우드 감성의 영화다. 원시성이 잔존한 인도의 부조리한 현대적 풍경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지만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최대한 배제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필터링되지 않은 온전한 이국의 풍경은 생경함을 뛰어넘어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한 이미지로 연출됐다. <슬럼독>은 이국적 세계의 관습과 양식을 충실히 보존하는 겸손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현지의 양식에 입각한 방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 특성을 습득하고자 하는 열의를 느끼게 한다. 지정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할리우드의 글로벌 전략은 분명 주목할만한 태도다. 올해 아카데미가 <슬럼독>을 지원 사격한 것 역시 그런 흐름 자체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큰 존중을 얻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년은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달려 결국 운명을 따라잡는다. 그 운명 속엔 자말을 무너뜨리기 좋은 비극적 기제들이 넘실거리지만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염원을 쫓아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자말의 약속은 좌절을 건너 거대한 기적을 이룬다. 그 염원은 개인을 넘어 온 국민들의 염원으로 발전하고 이내 기적처럼 완성된다. <슬럼독>은 우연이 한데 모여 필연을 이루는 과정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 끝에 이뤄지는 결말은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으로 완성된 운명이다. 그 모든 건 애초에 운명이다. 그 운명을 납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모든 뒤쳐진 순간들은 이미 운명이 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분명 어떤 선택을 통해서 결정된다. <슬럼독>은 그 운명적 선택을 설득하는 흥미로운 사연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통해 <슬럼독>을 본다면 그 역시도 운명이다. 물론 그 운명 역시 어떤 선택을 통해 이뤄진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