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는 마약 거래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삶을 꾸려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은 그렇게 흘러 넘어왔다.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도 하나 있다. 죽은 자를 보는 것, 그리고 말을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서서히 직감한다. 선명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것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자를 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목격이 가능해도 대화가 불가능함을 안다. 아니,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우티풀 Biutiful>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Beautiful’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어느 언어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Biutiful은 Beautiful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쓴 언어다. 이는 고의가 아니다. 그저 어느 한 남자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 행위에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 그저 그 남자, <비우티풀>의 욱스발이 인식한 단어의 외형이 그러했을 뿐이다. <비우티풀>은 그런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마치 자신의 꿈을 해몽하듯 이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여정 안에서 점차 어떠한 의도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흐릿해진다.
알 수 없는 두 시퀀스의 연결을 통해서 시작되는 <비우티풀>은 그 불투명한 원점의 의미를 선명하게 밝히며 눈을 감듯 끝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불안이 영화 곳곳을 채운 몽타주들을 수집하다 이내 인물의 감정으로 파고들 때, 영화에 잠재된 수많은 비극이 제 머리를 들고 제 몸을 드러내듯 구체화되고 명확해질 때, 관객 대부분은 영화와 함께 시름하면서도 그 세계 자체를 둘러싼 기이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냐리투는 <비우티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영화적 해석에 개입하고자 했는데, 그의 변에 따르면 <비우티풀>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된 영화였으며 어느 공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비우티풀>은 온전히 이냐리투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인 셈인데, 이 영화는 그만큼 비선형적인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사유한다. 이 영화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에 자리한 어느 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삶 속에 자리한 어떤 하나의 생에 관한 이야기다. 규정된 언어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듯 규정에서 벗어난 언어가 때로는 더욱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규정되지 않은 언어처럼 쓰여졌다. 어느 한 남자의 삶으로부터 뻗어나간 영화는 결국 이 세계를 채운 어느 특별한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의 너비, 즉 죽음이라는 비극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 숙명의 너비가 저마다의 생으로 채워지고 모여서 이 세계의 형상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인과의 변형적 제시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는 화술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부조화가 이루는 특정한 리듬감, 이냐리투 특유의 화법과 묘사로 채워진 이 영화의 인장을 더욱 근사하고 명확하게 새겨 넣는 건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비우티풀>은 이냐리투의 영화이며 바르뎀은 그 세계를 완성하는 핵심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통해서 생존을 체득한 이가 체감하는 불행, 바르뎀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통해서 그 모든 생의 스펙트럼을 일거에 점령하듯 영화 속에서 걸어나간다.
<비우티풀>은 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 즉 죽음을 목격하는 방법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에 신비로운 사유를 더한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대구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처럼 잉태되고 종말된다. 그 끝에서 의미는 선명해진다. 삶을 정지시키듯 죽음이 찾아올 때, 그 정지된 삶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의 삶은 무엇으로 남겨지는가. 그 끝에 다다라야만 알 수 있는 물음. 하지만 당신의 삶은 어느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가치로 누군가에게 전승될 것이다. 삶을 이루는 건 ‘삶’이란 단어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규정할 수 없는 삶을 각자의 언어로 읽어나가듯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라진다.
딸은 어머니의 과거를 명예롭게 여겼다.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 모사드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레이첼(헬렌 미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실험이란 미명 하에 잔혹한 학살을 주도했던 어느 박사를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녀의 한 쪽 볼을 가로지른, 깊은 창상이 짐작되는 긴 흉터는 일종의 훈장과 같다. 딸은 어머니의 애국적 활동을 기리고자 책을 집필했고 이를 헌정했다.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감격보다도 근심의 기운이 역력하다. 사라지지 않는 지난 날의 상흔처럼 레이첼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있다.
2007년에 개봉된 이스라엘 영화 <Ha-Hov>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언피니시드 The Debt>는 원작의 뿌리로부터 복제된 동일한 뿌리의 영화다. 90년대의 텔아비브와 60년대의 동베를린을 오가며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환기시키는 영화는 위장된 진실로 서서히 접근해 나간다. <언피니시드>는 양심적 부채를 청산하지 못한 어떤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덮고, 명예로운 공적을 위조한 뒤, 그 명예를 안은 채 살아가는 어떤 이들에 관한 사연이다.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 현실을 반영한 은유적인 대체 현실, <언피니시드>는 결국 이 세계의 어떤 불미스런 단면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인 셈이다.
<언피니시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폴 그린그래스의 <본> 트릴로지, 그리고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과의 접점이 발견되는 영화다. 조작된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위장된 인물이 양심적 가책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깃발>을, 비밀 첩보 조직의 부품처럼 활용되던 어느 개인의 양심적 발로가 내부 고발을 자행한다는 점에서는 <본> 트릴로지와 같은, 그리고 독일 나치에 의한 제노사이드를 경험한 유태인들의 피해 의식이 가해자로서의 동일한 경험에 놓인 죄의식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을 연상시킨다. 다만 앞서 나열한 세 영화들에 비해서 사적인 심리를 긴밀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언피니시드>는 좀 더 개인적인 드라마에 가깝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모종의 진실에 접근해 나가는 영화는 그 진실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밀착하며 보다 깊은 호흡을 얻어낸다. 민족적인 명예 회복이라는 거대한 조직적 임무를 떠안은 개인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파괴되듯 그 임무의 폭력성에 노출되며 점진적인 심리적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대의를 수긍하고 있지만 저마다 목적이 다른 세 인물은 점차 조직적인 와해를 직감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공황 상태로 스스로 빠져든다. 자신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파괴자들에 대한 응징과 보복을 감행하던 이들이 스스로 동일한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며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지닌 <언피니시드>는 거시적인 역사에 매몰된 개인의 미시적인 심리에 밀착한 심리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극적인 서스펜스를 자아내기 위한 연출을 지양하고 리얼리즘에 가까운 상황 묘사를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보다 객관적인 위치로 안내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영화 속에 자리한 인물들의 심리가 보편적인 현실의 삶 안에서 인식되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치장된 영화적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어느 개인의 삶이 발견되는 방식으로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 인물의 전후를 차지한 제시카 차스테인과 헬렌 미렌은 동일한 흐름 속에 놓인 서사의 호흡을 서로의 위치에서 유연하게 이어받으며 극적인 흥미를 더하고 설득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특히 상처 입은 채로 복도를 걸어나가는 헬렌 미렌의 뒷모습은 폭력적인 역사의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짊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어느 개인들의 고독을 대변하듯 쓸쓸하고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그 남자 냉정하다. 태건호(정재영)는 유능한 채권추심원이다. 그물을 던지듯 추심 대상자들을 포획하고 그들로부터 걷을 돈을 확실하게 건져낸다. 그가 냉정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채권추심원이 되어 남의 빚을 대신 받아내며 자신의 빚을 청산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빚보다도 무거운 간암 진단이 떨어진다. 누군가의 간을 기증받아야만 그는 삶을 연장할 수 있다. 채권을 추심하듯 간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찾는다. 한 여인이 그의 목숨을 덧댈 수 있는 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차하연(전도연)은 정재계의 거물들을 상대로 한 탕을 노리는 지능적인 팜므파탈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교도소에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출감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그녀의 간을 얻기 위해서는 그녀를 노리는 적들을 대신 헤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녀도 믿을 수 없다. 그 여자 위험하다.
<카운트다운>은 수궁가 같은 스릴러물이다. 간을 얻고자 생명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가 그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한 여자와 얽히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쫓아간다. 남자나 여자나 시간이 없긴 매한가지다. 남자는 당장 간이 급하고, 여자는 당장 돈이 급하다. 우직한 거북이처럼 목표에 접근하는 남자와 달리 날렵한 토끼처럼 임기응변에 강한 여자는 언제나 달아날 길을 찾는다. 잡으려는 자와 달아나는 자의 입장은 확연하고, 그 명확한 관계를 수식하는 주변의 관계가 꼬리를 물고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그 명료한 관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담보로 융통된 것이다. 대출과 입양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실을 대변하는 문제적 소재들이 복잡한 관계의 인과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장르적인 리듬감을 환기시킨다.
기본적으로 두 인물을 중심에 두고 가지를 뻗어나간 듯한 영화다. 태건호와 차하연이라는 두 인물은 <카운트다운>의 심장을 구성하는 심방과 심실과 같다. 태건호가 일종의 들숨이라면 차하연은 날숨과 같다. 정재영이 영화의 균형추라면, 전도연은 흔들림을 낳는 무게추에 가깝다. 그만큼 두 배우의 연기가 이 영화를 저울질하는 핵심이라는 것. 그리고 이미 이름값만으로도 기대를 모을 만한 두 배우는 신뢰할만한 연기력을 선사한다. 우직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정재영은 전반적인 영화를 관통하는 밑그림을 완성하고, 전도연은 능수능란한 리듬으로 영화를 채색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로 다시 만난 두 배우의 호흡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전도연의 연기는 대단하다. 클리셰에 가까운 팜므파탈로 분하는 전도연은 자신의 캐릭터에게 그 어떤 팜므파탈 캐릭터보다도 프로페셔널한 설득력을 얹는다. 단지 관능적인 매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능력적으로 뛰어난 프로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신뢰를 더한다.
중후반부에 다다르기까지 영화에 특별한 흠은 없어 보인다. 플래쉬백의 사용도 그 흐름의 측면에서 과하지 않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결말은 다소 의외다. 간단하게 말해서 과하다. 흡사 앞선 부분까지 다른 영화를 봤나 싶은 결말부는 맥락 안에서 사족처럼 머물러 있다. 과잉의 감정과 과욕의 설명, 이미 상황 자체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직접 필요 이상으로 떠먹이다 보니 거북한 감상이 밀려온다. 물론 결말을 맺는 방식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앞서서 축적된 감상의 리듬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신파적인 결말의 여운은 수긍할만하다. 단지 그 여운을 강요하는 인상이 안쓰럽다는 의미다.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며 점차 자신의 리듬을 확보해내던 영화가 스스로 감정을 방전시키고 정체되는 듯한 결말로 다다른다는 건 가히 미스터리다. 성공적인 롱레이스 끝에 다다른 결승선 앞에서 머뭇거리는 선수를 보는 심정과 같이 맥이 빠진다.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존(로버트 드니로)은 가석방 심사관이다. 가석방 심사 자격을 원하는 죄수들은 그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 혹은 연기한다. 그의 업무는 바로 그 연기를 구분하고 진심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의 앞에 어느 날과 같이 한 죄수가 앉았다. 그는 방화죄로 검거되어 형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스톤(에드워드 노튼). 그는 자신이 가석방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존은 고민한다. 그런 그의 곁에 미모의 여성이 나타난다. 스톤의 아내 루세타(밀라 요보비치)라고 했다. 죄수의 주변인과의 만남은 부적절하기에 그녀를 피하던 존은 거듭되는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와 마주 앉게 된다.
<스톤>은 두 인물의 심리전을 포석으로 삼아 서스펜스의 집을 지어내는 스릴러다. 이에 위태롭게 얹혀진 여인의 관능은 서스펜스를 강화시키려는, 그리고 보다 입체적인 관계를 구성해내기 위한 한 수다. 결국 중요한 건 두 인물이 밀고 당기며 벌이는 심리적 거리감의 구도인데, 그만큼 뚜렷한 정황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제시돼야 의도를 관철할 수 있는 스릴러물이란 의미다. 모호하거나 애매한 느낌의 감지 뒤에는 확실한 실물의 제시가 뒤따라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스톤>은 은유적인 수사로만 치장된 듯한, 결과적으로 어떠한 실물이 쥐어지지 않는 스릴러물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두 인물의 관계는 선명하지만 그 선명한 관계의 긴장감이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자와 그 의도를 감지하려는 자 사이의 기싸움이 수면 위의 이미지로 설명될 뿐, 깊은 서스펜스의 밑바닥으로 관객을 끌어내리기에는 호흡이 얕다.
로버트 드니로와 에드워드 노튼은 그 인상만으로도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 사람의 대립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스톤>은 분명 뭔가가 있어 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끝내 그 있어 보이는 분위기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 메시지는 짐작이 간다. 프롤로그로부터 짐작되는 속내는 죄의식을 품은 자가 심판자의 위치를 취하고 있는 형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힌다. 하지만 그 읽힌다라는 의미 이상의 공감을 부여하지 못한다. <스톤>은 자신이 취한 설정 이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범작이다. 선악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같지만 모호한 선문답에 다다를 뿐, 그 고민에 관객을 동참시킬만한 자질을 얻지 못했다. 그저 물결처럼 상황이 흐르는 가운데서 바닥에 가라앉은 돌처럼 관객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인상적인 출연진은 그만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그 연기만으로 이 영화를 구원하기에는 너무도 버겁다. 그저 묵묵하게 감흥 없이 흐르는 사연의 끝에 무거운 공허함이 감상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셋’이란 안정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숫자다. ‘둘’은 무난하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 권태는 밀려온다. ‘셋’은 그래서 보다 지속적인 흥미를 자극하고 보다 공고한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와 ‘하나’ 사이의 관계를 흔드는 또 다른 ‘하나’와의 유지가 요구된다. 그래서 ‘셋’은 그만큼 ‘둘’보다 심오한 숫자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둘’에서 시작되지만 ‘셋’으로 넘어갈 때 본격적인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 ‘둘’이 사회를 이루는 필요조건이라면 ‘셋’은 결국 사회를 이루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인 셈이다.
<쓰리>는 바로 그 문제의 ‘셋’에 관한, 어느 특별한 ‘3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베를린에 한 부부가 있다. 유명 TV앵커 한나(소피 로이스)와 아트 엔지니어로 일하는 시몬(세바스티안 쉬퍼)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지만 그들은 은연 중에 자신들의 권태기를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삶은 딱히 문제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 부부는 각자 모종의 관계를 통한 비밀을 얻게 된다. 시작은 여자였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결국 선택했고, 이를 즐겼다. 그리고 곧 남자도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사건을 얻고 관계를 지속한다.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문제와 상관 없이 두 사람은 급격하게 그 관계로 빠져들었다.
톰 티크베어의 <쓰리>는 문제적인 소재를 실생활적인 합리로 풀어내고 전위적으로 전시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생을 유지하고 버텨내려 하지만 때때로 그 관계에 속박되어 자신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삶을 포기하거나 인내하기도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삶을 단단하게 세우는 지지대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수갑과도 같다. 감정은 자유지만 제도는 곧 속박이다. 제도란 바로 그 자유로운 감정을 속박하고 구속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이하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도구인 것이다.
<쓰리>는 바로 그 제도적 속박에 대한 합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불행을 억누른 거짓 행복과 동거하는 삶보다는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그 욕망의 절충과 합의를 통해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고 공유하는 편이 백배는 나음을 보여주는 전위적인 전시인 것이다. <쓰리>는 이 문제적인 주제 의식을 거칠게 주장하거나 장황하게 설명해내는 노력 대신 그러한 삶의 단편을 연출하고 응시하게 만든다. 문제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영화는 단순히 그 도발적인 스토리텔링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건조한 인상이 느껴지기는 하나, 이야기의 흐름에는 무리가 없고, 깊이가 있으며, 예상 경로에서 벗어나는 놀라움과 성찰을 안겨주는 순간도 존재한다.
삶이란 전기줄 두세 갈래의 흐름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에 어떤 행위를 통한 비유로 형상화시켜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복잡한 삶을 단순화시키는 방식은 결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 안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를 공유하고 한 덩어리로 승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 <쓰리>는 윤리적인 문제제기 안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분명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작품이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각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때, 보다 너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마카오 출장을 다녀온 아내의 감기 증상이 심각하다. 남편은 지독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내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역시 감기 증세가 발병했던 아들도 일순간 세상을 떠났다. 죽은 건 아내와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전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각국 정부와 보건기구는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할 수 있는 건 발병의 근원지를 찾고 환자들을 격리 수용시키는 것뿐,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정부의 음모를 선동하고 나서고, 급속도로 확산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요동치던 불안은 결국 거대한 폭동으로 이어진다.
전염(contagion)은 신체의 접촉이나 공기 중의 확산을 통해서 침입한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는 과정을 의미한다. <컨테이젼>은 제목 그대로 전염에 관한 이야기다. 순식간에 숙주가 된 인간의 몸을 점령하고, 신체를 무력화시킨 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고 숙주와 접촉하거나 근접한 또 다른 숙주들에게 빠르게 침투하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영화를 본다면 당장 어딘가 자신의 손이 닿고 있다는 것마저,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기침을 하는 것마저 신경을 쓰일 정도로 예민한 경계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컨테이젼>이 묘사해내는 정황이 현실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컨테이젼>은 질병과 맞서 싸워나가는 이들의 극적인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하듯 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전염으로 삽시간에 무너진 인간의 면역 체계가 공포와 불안으로 확대되어 이성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이 세계의 시스템이 유린당하는 과정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포착하듯 연출해낸 작품이다. 담담한 시선으로 일관된 이 영화는 마치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서 이 세계를 동시간에 관찰해낸 누군가의 시점숏으로 수집되고 정리된 리포트를 보는 것 같다. 홍콩과 일본, 미국, 영국 등 서로 동떨어진 그 세계 위에서 저마다의 사연이나 임무를 안고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은 이 거대한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의 스케일을 대변한다.
<컨테이젼>은 극적인 감정을 고양시키기 보단 스크린 너머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가히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정보적이고, 체계적으로 진전되는 극적인 양상은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밖의 현실을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리얼리즘을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죽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아노미에 가깝게 사회의 체계가 붕괴되고 급속도로 혼란에 빠져드는 정국의 형태가 묘사되는 광경은 그만큼 공포스럽고 충격적인라 할만하다. 포석을 두듯 세계 곳곳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전세계적인 상황을 수집해나가는 편집술이 힘을 발휘해나가는 가운데 그 얼굴을 자처하는 스타 배우들이 본래의 인상을 지우듯 평범하고 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이 극적인 논리와 설득에 기여한다.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 거대한 스케일을 구축하는 소더버그 특유의 연출력과 편집술은 슈퍼 캐스팅이라 불릴 만한 출연진 리스트를 평범한 그 세계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며 보다 생생한 현실 감각을 끌어낸다.
영화가 시작되는 건 발병 두 번째 날부터다. 발병 135일째가 돼서야 마감되는 서사의 뒤를 잇는 건 바로 그 모든 현상의 시작점이었던 발병 첫 날의 사연이다. 결코 극적일 수 없는 충격과 공포의 정황의 시작을 이 모든 카오스의 끝에서 드러내는 방식은, 그리고 그 방식을 넘어서 그 진실 자체는 충격이랄 것 없이 그저 그 초현실적인 진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거대한 혼돈으로 치닫던 인간 사회를 목도한 뒤에서야 전달되는 진실은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의 여운을 남길만한 것이기도 하다. <컨테이젼>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거대한 현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붕괴되고 다시 회복하는가를 살피는, 사회적 면역 체계에 관한 생생한 리포트다. 전염병은 하나의 수단에 가깝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공포가 인간의 이성을 어떤 방식으로 마비시키고 사회의 붕괴가 어떤 방식으로 진전되는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컨테이젼>의 공포는 바로 그 우리가 지닌 이 세계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인 면역 체계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재앙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안전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문제제기,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주터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릴라 릴라>는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눈덩이 구르듯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감당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하는 한 남자에 관한 사연이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러브스토리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카페의 평범한 웨이터에 불과하던 다비드(다니엘 브륄)는 마리(한나 헤르츠스프룽)라는 여인에게 사로잡히고, 그녀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우연히 얻게 된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긴 소설을 자신의 것처럼 사칭해 마리에게 접근한 다비드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성취감을 맛보는 것도 잠깐일 뿐, 그것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사건임을 곧 깨닫게 된다.
삽시간에 성공가도에 올라선 남자.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둔 성공이 아닌 누군가의 재능이 남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도용해버린 남자.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은, 그리고 애초에 얻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 누군가가 쓴 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남자가 단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를 자신의 것처럼 사칭을 하고,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글 좀 읽는 여자는 그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고, 출판사에 남자 몰래 출판 문의를 넣어버렸고, 출판사는 긍정적인데 남자는 망설이고,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 소설은 출판되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지만, 정작 그 소설은 제 것이 아니고, 그 삶도 제 것이 아니고,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어느 남자가 접근해 오고, 남자의 수심은 깊어져만 가고, 여자와의 갈등은 심해진다.
단지 이 맥락만으로도 <릴라 릴라>는 가능성이 풍부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릴라 릴라>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로 뻗어나간 줄기에서 서스펜스의 가시를 철저하게 제거한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다. 작가가 선택한 방향은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작품의 설정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재능을 훔친 다비드의 심리적 불안, 즉 서스펜스에 주목한 스릴러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릴라 릴라>는 이런 개인의 불안보다는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 또한 심각한 갈등과 불화가 발견될만한 관계조차도 연민과 연대가 발견된다.
착한 영화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선의를 품고 있으며, 악의조차 상대를 배려하며 행한다. 덕분에 영화는 종종 비현실적인 거짓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조건이 이 영화의 기발한 설정을 보다 깜찍하게 수식하는 인상이 든다. 물론 로맨스 영화로서 남녀의 심리적 관계를 설명해나가는 기승전결의 인과가 결말부에 다다라 무리수에 가까울 만큼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하고 있다는 인상도 느껴진다. 갈등의 요건이 두터운 캐릭터의 관계가 지나치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시선을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견지하고 싶진 않다. <릴라 릴라>는 그 비현실적인 우연만큼이나, 그 불순한 행위의 결과를 해피엔딩으로 밀어내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감상을 야기시키는 영화다. 우연은 결국 시간이 지나 필연으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릴라 릴라>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뒤바뀐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틱한 영화다. 영리한 설정이 너무 순진하게 발전된 구석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훈훈하다. <굿바이 레닌>의 다니엘 브륄과 <포미니츠>의 한나 헤르츠스프룽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다.
눈을 뜬 그의 눈 앞에 놓인 건 낯익은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그가 머물던 곳이 아니다. 게다가 몰골도 말이 아니다. 지난 밤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말이 아니다. 심지어 모두 다 있는 게 아니다.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한 친구와 연락이 닿는 것도 아니다. 행적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널브러진 그 방에서 난데없이 출몰한 어떤 동물의 출처도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기억이 사라진 지난 밤의 흔적은 끔찍한 숙취(hangover)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첫 번째 경험이 아니다.
<행오버 2>라니, 어떤 이에게는 이 낯선 제목의 영화가 심지어 속편이란 것까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알만한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영화가 이 땅에서 미개봉작이 돼버린 전편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불시착하듯 개봉한 것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숙취’라는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결혼식을 앞둔 친구와 총각파티를 벌이겠다며 라스베가스에서 질펀하게 먹고, 마시고, 맛보고, 즐기던 네 남자가 필름이 끊어진 사이에 벌어진 친구의 실종을 수습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난장판의 코미디다. <행오버>가 여타의 코미디물들과 차별화된 건 절제하지 않는 표현력의 막강한 수위 덕분이다. 예측불가능한 내러티브 위에서 나열되는 파편적인 시퀀스는 역시나 측정 불가능한 수위의 파괴력을 지닌 코미디의 엔진을 달고, 거침없이 달려나간다.
<행오버>와 <행오버 2>는 온전히 닮은 꼴 영화다. 라스베가스에서 방콕으로 장소만 변했을 뿐, 모든 제반 상황은 전작의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유사하다. 심지어 영화 속 캐릭터들조차도 또 한번의 반복이라는 상황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대사로 이를 내뱉는다. 그러니까 이는 분명 의도적이다. 또 한번 필름이 끊긴 그 상황은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민폐의 포텐셜을 지니고 있는 한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역시나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그들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동물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역시나 전작에서 등장했던 요주의의 인물이 그들의 여정에 끼어들고, 그들이 더듬어나간 잃어버린 기억 안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잠재돼 있다.
그러니까 만취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이 마치 토사물을 치우듯, 지난 밤에 벌여놓은 난장을 청산하는 과정이 바로 <행오버>와 <행오버 2>의 요지다. 사실 이건 똥이다. 변기 뚜껑 아래에 놓인, 똥이다. 그냥 물을 내려도 되겠지만, 꼭 누군가는 그 뚜껑을 들어서 내용물을 확인하고야 마는, 그것이다. <행오버 2>는 <행오버>와 마찬가지로 술 취한 얼간이들이 벌인 지난 날의 막장 놀음을 뒤쫓는, 좋은 구경거리다. 전작만큼이나 위력이 대단한 화장실 코미디가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된 <행오버 2>는 위력적인 면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나온 속편이라는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한다.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복마전을 전전하는 전편의 재미는 속편에서 다소 증발된 면이 있다.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인위적인 강박이 느껴지고, 캐릭터의 등장도 부자연스럽다. 특히나 하던 이야기를 대충 수습하는 듯한 결말의 방식은 어리둥절한 수준에 가깝다. 업데이트가 부진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행오버 2>는 역시 <행오버>의 속편답다. 무시할 수 없는 코미디의 위력,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존재가치를 스스로 선언한다. 스토리는 그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그 만취의 난동 속에서 만들어진 토사물 같은 상황들을 시한폭탄 같은 웃음의 잠재력으로 강력하게 이어나간다는 것이 바로 <행오버>를 포함한 <행오버 2>의 본체다. 그러니 더도 말고, 그저 취향이 맞으면 고, 아니면 스톱인 것. 다만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숙취처럼 감상의 호불호도 결국 본인의 몫인 것.
야심 차게 시작한 베이커리 사업은 씁쓸한 과거의 실패담이 돼버렸고, 비호감이 철철 넘치는 룸메이트는 상의 한마디 없이 역시 비호감인 여동생을 집에 모셔놓고도 기고만장으로 일관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섹스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취급 당할 뿐인, 그 혐오스러운 일상의 주인공은 바로 애니(크리스틴 위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절친한 친구 릴리언(마야 루돌프)이 그녀에게 기쁜 한편으로는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함께 늙어가는 노처녀 친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한 것 그리고 들러리 대표로 서주기를 부탁 받은 것. 둘도 없는 친구의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위해서 애니는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일찍이 미국에서 ‘여자 버전의 <행오버>’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그 소문대로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뽐내는 화장실 유머로 치장된 코미디물이다. 하지만 <행오버>시리즈가 그 막장 유머에 대한 취향이 필요한 미국식 코미디물이라면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한 여인의 성장드라마 위에 파괴력 있는 유머가 가미된 작품이란 점에서 공감의 여지가 보다 너른 작품이다. 메가폰을 잡은 폴 페이그보다도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주드 아패토우의 인장이 보다 짙은 이 작품은 그가 연출한 전작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나 <사고친 후에>, <퍼니 피플> 등과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한 내러티브가 설득력 있게 극의 밑천을 마련해나가는 위로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들을 장식처럼 얹혀나간다.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 입장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볼거리를 이루는 이 작품의 유머들은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매설된 지뢰와 같다. (물리적인 가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끔찍하리만치 가혹하게 난감해지는 어떤 상황들 혹은 한없이 엇나가거나 유치하게 일관하는 성인들의 대화와 행동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투하되는 유머들은 양에 비해서 질적으로 우수한,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드레스장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소동극을 비롯해서 마력과도 같은 폭소의 자질이 곳곳에 설치된 이 작품의 유머 코드에도 취향의 호불호는 작용할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행태를 담보로 벌어지는 극단의 연출이란 점에서 공감대의 웃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것이 <행오버>와 이 작품의 웃음을 구분 짓게 만드는 또 하나의 차별점에 가깝다.
물론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웃음의 광풍만으로 채워진 단순 코미디가 아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한 여인이 갖은 갈등과 충돌을 겪은 뒤, 비로소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견뎌내고 스스로 다시 일어선다는 보편적인 성장드라마의 틀거리가 이 작품의 본론에 가깝다. 이토록 빤한 교훈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었다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어떤 특정한 소재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대상 혹은 캐릭터 자체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서 시작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덕분이다. 결혼과 자립이라는 고민 앞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한 여인이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뒤돌아볼 계기를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단편적인 설정 이상의 깊은 이해를 품고 있다.
여자가 당당해야 이 영화는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대로 살았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망가지는 동시에 깊은 감정까지 포괄하는 여배우들의 열연은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완성시킨 기초적인 자산과 같다. 애니 역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를 비롯해서 그녀의 주변부를 장식하는 로즈 번, 마야 루돌프 등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은 모든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놀랍도록 과감한 영화의 난장 속에서 끝내 제각각 반짝인다. 진심으로 더럽게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