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스타를 꿈꾸며 무대에 오르던 폴 매든스(마틴 프리먼)의 꿈은 과거로 흩어진 지 오래다. 한때 같은 꿈을 꾸던 친구 고든 셰익스피어(제이슨 워킨스)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의 성탄극 기획자로 호평을 얻었고, 역시 함께 무대에 오르던 애인 제니퍼(애슐리 젠슨)는 새로운 꿈을 좇아 할리우드 제작사로 떠나간 지 오래다. 평범한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별 일 없이 살던 매든스는 어느 날, 급작스럽게 떠맡겨진 성탄극 감독직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성탄극의 조력자로 등장한 파피(마크 우튼)의 돌발행동에 울화를 참지 못한다.
제목만으로도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임을 광고하고 있는 듯한 <크리스마스 스타!>는 아이들의 성탄극 준비를 주제로 연출된 일종의 소동극에 가깝다. 최소한의 인과를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뜨린 뒤, 돌발적인 사건들을 주렁주렁 널어놓는 이 영화의 서사적 형태에 걸맞은 감상이란 논리적인 개연성보다도 돌발적으로 뛰쳐나오는 상황들을 거듭 수습해나가고 이로 인해 불거져나가는 후속적인 사건의 연속을 주시해야 하는 쪽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스타!>의 스토리는 마치 도로 위로 갑작스럽게 뛰쳐나오는 야생짐승들을 피해가는 아슬아슬한 주행을 떠올리게 만들만한 것이다. 사연의 진전에는 긴밀하게 밀착된 근거가 부족하고 단지 그 상황만이 제시되며 이를 통해 극은 굴러간다.
물론 이를 <크리스마스 스타!>의 핵심적인 단점이라 지적하는 건 마땅치 않다. 이는 사실 <크리스마스 스타!>의 서사가 치밀한 서사적 개연성을 요구할 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하자면 <크리스마스 스타!>는 자신의 꿈을 상실한 어느 어른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 밀려들어가 뒤늦게 자신의 삶을 회복해나간다는, 일종의 크리스마스 동화처럼 기획된 성장담과 같다. 다만 덩어리의 조각처럼 나뉜 서사와 서사의 간극을 유연하게 연결할 만한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사건을 나열하는, 즉흥극과 같은 느낌의 이야기랄까.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로서의 흥미가 대단하다면 그 과정의 논리는 어느 정도 무시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 스타!>는 탈출구를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 스타!>가 찾은 해법은 급작스런 사건의 마련과 이 사건을 더욱 큰 사고로 연결하는 돌발적인 성향의 인물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사고를 일으키는 인물의 행동이 딱히 큰 자극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탄극 감독 직책을 맡게 된 매든스가 조력자로 임명된 파피의 등장과 함께 겪게 되는 소동극들은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건으로서 작동하기 보단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 결함을 보다 부각시키는 단점으로서 극대화되는 인상이다. 이는 이 영화가 서사적인 결함을 선택한 것이라기 보단 서사적인 결함을 스스로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단점을 품고 있는 이 영화에도 일말의 장점은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소동극답게 영화는 천진난만하며 나름대로 소란스럽다. 이 자체의 활기를 감상적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줄 수 있는 관객에게 <크리스마스 스타!>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무난한 시즌용 영화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영화적 성격은 해피엔딩을 그리는 이 영화의 무리수조차도 낭만적이라 이해시킬 만한 여력을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말 그대로 이 모든 부연은 모를 일이다. 아쉽지만 착하다 하여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이 세상의 논리가 아닌 것이니까. 누구나 다 착한 이의 민폐 앞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성인이 아니듯이, 심심한 영화에 너그러워질 수 없는 것도 관객의 기본적인 심리다.
17살이 되는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맞이하는 건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를 상대할 희망이라 믿었던 호그와트의 교장 덤블도어(마이클 갬본)는 죽었고, 호그와트는 볼드모트를 추종하는 ‘죽음을 먹는 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마법부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는 마법세계로 언론과 권력을 장악한 볼드모트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만 간다. 그리고 해리포터와 론(루퍼트 그린트),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는 볼드모트를 제거하기 위해 덤블도어가 남긴 표식을 따라 볼드모트의 영혼이 담긴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여정에 나선다.
J.K 롤링이 집필한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어둡고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마법세계를 어드벤처처럼 즐기던 호그와트의 소년, 소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갈등에 맞서며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채 세상의 눈을 피해서 고립된 신세다. 볼드모트의 등장과 해리포터의 주변인의 죽음을 묘사하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결말부터 서서히 시리즈 위로 드리워지던 암울한 기운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절정과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승화된다.
결말의 전초전이라 할만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이하, <죽음의 성물 1>)은 덤블도어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담고 있다. 지난 6편의 전작에서 나름대로 천진난만한 마법 세계의 병풍이 되던 호그와트의 보호막이 사라진 <죽음의 성물 1>은 그만큼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된, 심정적인 진통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이 시리즈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는 배우들의 외모와 같이 결말에 이르러 확실하게 시리즈의 성숙을 증명해내는 이번 편은 그만큼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의 여부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최종관문이 될 것임에도 틀림없다.
일단 역대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의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누어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서사적으로 보다 탄탄한 주행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번 영화는 지난 전작들에 비해서, 특히 <죽음의 성물>과 유사한 텍스트량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스토리의 집중과 선택이란 측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을 얻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건 곧 이 시리즈가 쌓아온 모든 역사와 정보가 총집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전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얼마나 잘 기억해내는지에 따라서 재미는 그만큼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전작들에서 설명됐던 어떤 장면들이 단순히 보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말부의 서사를 수식하기 위한 복선의 요소로서 일찍이 장치된 것들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마지막 시리즈는 전작들에 대한 기억력에 따라 보다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팬서비스의 기능성을 품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언급되거나 등장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이는 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동시에 내년에 후속편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이 불완전한 작품이 끝까지 고통과 번민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이미 원작을 예습한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곧 이어질 후속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선사할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위해 마련된 ‘골고타의 언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과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를 연출한 데이빗 예이츠는 지난 전작이 얻었던 호불호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이 든다. 또한 결말로 치닫는 시리즈의 연출을 한 감독에게 연속적으로 맡긴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든다. <죽음의 성물 1>은 전체적으로 암울해지는 마법 세계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이 세계를 주시해온 팬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리즈 자체의 흐름 안에서도 원숙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방대한 정보량을 품은 결말 시리즈를 고스란히 묘사하기 위해 140여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두 편의 시리즈를 마련했다는 것마저도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보다 여유로워진 만큼 서사의 운용력은 확실히 나아진 인상이며 서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간결해진 인상이다. 특히 호그와트의 대전투를 그릴 최종 클라이맥스를 앞둔 이번 작품이 묘사하는 몇 번의 대결신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한 어린 배우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할만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밀착하듯 표정을 잡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 시리즈의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년은 성장했고, 운명에 다다랐다. 달아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비범한 숙명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소년의 숙명과 그 숙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먹구름과 같이 세계 위로 악은 쉽게 드리운다. 그 아래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선이 서서히 빛을 밝힌다. 악에 잠식당한 세계가 불안에 떨 때, 작은 선이 서서히 불을 밝힌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년은 홀로 빛을 옮긴다. 이미 소년의 운명은 자명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대단원으로 이야기는 옮겨가고 있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스케이트를 타거나 죽거나’라는 제목 그대로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스케이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 드는 두 소년의 도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줄거리는 간단명료하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두 소년이 스케이트 보드에 의지한 채 자신들을 추격하는 범인들로부터 달아나고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들을 쫓는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상대가 경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
음모론의 플롯을 아우른 범죄영화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장르물이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특이점은 서사가 아닌 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스케이트 오어 다이>가 실제로 스케이트 보드를 잘 다루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사실적인 스턴트 액션을 연출해낸다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추격과 도주의 도구가 되는 스케이트 보드는 단순히 이 영화의 소재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킥 플립과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스케이트 보딩을 본다는 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나 다름없다. 스케이트 보드를 이용한 스피디한 추격전과 지형을 이용한 스케이트 보드 액션은 볼거리로서 유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또 다른 특이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 파리라는 사실이다. <택시> <스틸> <13구역> 등 파리를 배경으로 둔, 파리에서 제작된 스피디한 액션 영화들의 새로운 계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프랑스 상업영화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소재로 둔 스턴트 액션에서 꾸준히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파리라는 고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는 스피디한 추격전은 동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유사한 소재를 활용한 동류의 장르물 가운데 신선하다고 평할 만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장점과 단점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둔 익스트림 스포츠 킬링타임 무비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활극적인 재미의 자극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서사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음모론을 축으로 둔 범죄영화로서의 내러티브가 탄탄하거나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흠이다. 결국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성패는 영화 속에서 질주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달아나거나 멈춰서 구경하거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빠른 속도감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좋은 햇살을 받고 정제된 소금과 맑고 깨끗한 천연의 물, 기름진 토양 위에서 자란 콩.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 하지만 이 모든 재료들이 마련된다 하여 꼭 좋은 된장이 빚어질 수는 없는 법. 이 모든 재료를 빚어낼 손의 정성도 중요하고, 오랜 시간 제 몸에 된장을 품을 장독대가 튼실해야 하며 풍부한 햇살과 적절한 바람을 맞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다면 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담긴 된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선사하는 특별한 된장의 비결 그것은 무엇일까.
탈옥 후 5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는 결국 경찰에게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를 검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강력반 김형사도, 이형사도 아닌, 된장이다.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된장찌개를 먹다가 자신을 검거하러 접근하는 형사들도, 자신을 겨눈 총부리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저 된장찌개를 밑바닥까지 긁어먹고서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을 찬 채 경찰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특종PD 최유진(류승룡)은 이를 취재 조사하던 중, 그 신비한 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된장녀, 장혜진(이요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낯선 제목인 <된장>에서 ‘된장’은 일종의 미끼이자 핵심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경계를 일순간 해체시켜버린 된장찌개의 비밀을 쥔 여인의 정체를 탐문해나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곧 그 된장에 얽힌 물음표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문 너머에 자리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순으로 관객의 흥미를 이어나간다. 마치 후각을 통해 얻어진 식욕이 미각적인 만족으로 이어져 나가듯 <된장>은 소재 자체가 발생시킨 일종의 흥미를 이야기 본연의 감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지 소재를 통해 완성해낸 이야기의 완성도가 탄탄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된장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야기에 착안해낸 기획력과 그 기획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 것인가라는 구성력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된장이라는 소재를 되레 심오하고 세심하게 다룸으로서 소재에 의외적인 특이성을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킨 뒤, 이를 내러티브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기본적으로 완급조절이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능수능란한 연출로 구사하는 <된장>은 안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된장을 만드는 비결이 단순히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공식처럼 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된장>은 뛰어난 이야기란 것이 단지 좋은 소재와 완결성의 구조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많아도 숙성된 감동을 지닌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질려도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된장>은 질리지 않는 감동을 맛있게 이야기하는 진국과 같은 작품이다.
절대무공을 자랑하던 고수 라마가 죽어서 남긴 시신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문과 함께 강호에 피바람이 분다. 두 조각으로 나뉜 그의 시체를 소유하고자 절대고수들이 쟁탈전을 벌이기 때문. 그 가운데 잔인한 고수 문파로 알려진 흑석파가 시신을 보유한 한 가문을 급습해 부자를 죽이고 시신의 절반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 시신을 소유하게 된 여성 검객 세우는 자신의 그런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도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꾸는 성형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흑석파는 그녀의 뒤를 좇게 된다.
앞선 문맥은 <검우강호>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검우강호>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 시퀀스와 CG컷을 동원한 오프닝 시퀀스가 포함된 10분여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이를 설명해낸다. 이는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검우강호>는 무협물로서 기초적으로 빤한 소재나 줄거리를 공들여 설명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소 유치한 무협물 특유의 설정을 비범하게 포장하지 않은 채 단지 내러티브의 정보로서 전시되는 이 압축적인 도입부는 <검우강호>가 오락물의 하위 장르로서의 기능성에 충실한 작품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검우강호>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무협의 코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고전적인 웨스턴 무비의 정서와 특정한 스파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캐릭터와 플롯까지, 단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영화다. 오우삼 자신의 작품인 <페이스오프>의 흔적부터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 같은 스파이물의 영향력이 깊게 감지되는 <검우강호>는 현대적 소재의 장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비범한 대의를 표방하는 무협물의 정서와 달리 물질적인 욕망과 개인적인 삶에 천착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무협물의 포맷 안에서 이례적인 정서적 묘사를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빼어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우강호>는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파악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의의를 전파하기 보단 자신의 기능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 역량을 전시하는데 능한 가공품으로서 유용하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표현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내러티브의 소모품으로서 유용하게 등장하고 퇴장한다. 시종일관 거듭되는 유려한 액션신을 기대했을 어떤 관객에게는 <검우강호>의 액션신이 양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액션신의 완성도는 분명 즐길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검우강호>는 레일을 깔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작품이다. 기차가 지나는 역을 살피기 보단 전진하는 기차의 방향이 보다 뚜렷하게 눈에 띈다. 어떤 특별한 철학적 의미를 발췌해내기 보다는 영화가 발생시키는 장르적 쾌감과 이야기의 진전에 방점을 둔 작품이다. 대단한 장르적 성취를 이뤘다거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작품이라기 보단 제 목적을 이루고 오락적 성과를 제공하는 무협물로서 유효하다. 취향의 문제만 아니라면 딱 눈감고 시간을 죽일 만한 유용한 롤러코스터적 무협물일 따름이란 말이다.
전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영국에서 살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난 선남선녀다. 그리고 베로나는 실존하지도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인물들의 덕분에 실존의 전통을 얻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바로 그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남긴 실물적인 전통을 소재로 둔 현대적 로맨스물이다.
뉴욕의 출판잡지사에서 팩트체킹, 즉 기사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근거를 조사하는 기자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개업을 앞둔 약혼자와 함께 이탈리아 베로나로 여행을 떠나지만 다양한 음식과 와인에 정신이 팔린 약혼자와 떨어져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던 중, 줄리엣에게 자신의 구애상담을 전하는 편지 이벤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줄리엣의 비서들이라 불리며 그 편지에 답장 업무를 행하는 이들과 함께 누군가의 절실한 구애에 선의의 거짓말을 답신하던 중, 50년이 지난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답장을 보낸 뒤, 예상치 못한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허구적인 로맨스를 통해 현실적인 이벤트를 발생시킨 베로나의 관습을 이어받은 허구적인 로맨스다. 셰익스피어의 허구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통이 <레터스 투 줄리엣>의 기반이 됐다는 사실은 허구와 실재의 전이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식상하듯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이는 영화 외적인 문제다. 단지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결과물을 놓고 말하자면 이런 접근은 사족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로맨스물이라기 보단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전형적인 로맨스물들의 궤 안에 놓인 또 하나의 낭만적 일탈극일 따름이다.
이는 어떤 지적의 의미가 아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이 품은 전형성이 영화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와의 여정 속에서 결핍을 겪게 되는 여인이 우연과 필연의 경험 끝에서 새로운 결심을 품게 된다, 라는 일종의 판타지를 허구적인 세계 위에서 적절한 낭만을 곁들이며 담백하게 진전시켜 나간다. 덕분에 <레터스 투 줄리엣>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발생시키는 환상성과 함께 그 특별한 성격 자체의 전형성을 동시에 설득시키는 작업으로서 적당한 성공을 불렀다 말할 수 있는 동시에 장르적 기성품으로서 제값을 해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그 허구적 명성을 실제적인 전통으로 승화시킨 베로나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피렌체 인근에 자리한 시에나 와이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미하기 좋은 식단처럼 풍성한 시각적 만찬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루는 신구의 조화는 영화의 균형감각을 이루는 자질과도 같다. 딱히 새롭거나 빼어난 영화라 추켜세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구적인 환상과의 타협은 적절하며 기본적인 현실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마치 허구로부터 새로운 현실적 가치를 창출해낸 베로나의 오늘처럼 환상과 현실의 접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타협을 성사시킨 느낌이랄까.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